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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오 崔炳五 1930. 6. 9 - 농업, 작천 농업협동조합장,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호 醒齋 29세손, 첨정공파, 강진석교(弘武公후손)문중, 考 棟珠, 祖 淳淇, 祖 鍾正, 전남 강진 작천 출생. 향리에서 작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진 농업중학교를 거쳐 강진 농업고등학교에 진학, 원예를 전공하고 ----년 졸업 후, 고향을 지키며 부친의 농사를 이어 받아 영농에 전념하였다. 그는 농학도로서 “농촌이 잘살아야 나라가 잘산다”는 농업입국의 신념 하에 잘사는 농촌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재래식 농업에서 탈피, 시설원예 농법과 같은 과학적 영농기법의 활용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영농기술을 개발하고 작물을 개발, 개량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증대에 앞장서 왔다. 또한 그는 이렇게 해서 늘어난 소득을 꾸준히 영농시설의 확충과 농토확장에 투자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농지 ---,농업시설---,농기계-------)를 갖추고, ----農藥商社와 작천원예사를 경영하고 있을 만큼 강진군 내에서도 손꼽히는 大農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연구․개발하고 또 선진지들을 찾아다니며 배워 온 선진 영농기술과 소득작물들을 이웃에 널리 보급함으로써 농가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고, 이러한 그의 활동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농촌 지도자의 길로 나서게 하였다. 근면 성실하며 봉사정신이 투철한 그는 주민들의 싶은 신뢰를 받으며 농촌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향토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년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고향 작천 농업협동조합 조합장에 당선되어 農協運動을 통해 ‘잘사는 농촌, 살기좋은 농촌’건설의 이상을 실현코자 진력하였다. 또 ----년 제4공화국 때는 국민의 최고 주권적 수임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으로서 지역주민의 뜻을 대변하여 활약한 바도 있다. 그는 또 宗族愛와 爲先精誠이 남다른 바 있어, 門中事에도 늘 앞장서 왔으며 ----년 先親과 棟連 숙부 등의 뜻을 받들어 향리에 先塋 祭祀를 받들 祭閣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77년 新齋 先祖의 祠宇인 道源書院 복구를 위해 온 宗中이 誠力을 모을 때도 協贊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1977년 丁巳 大同譜 편찬과 1989년 己巳 大同譜편찬시 收單委員으로 편찬에 적극 참여하였고, 매년 도선산 시제와 도원서원 享祀에 빠짐없이 참례해 오고 있다. ----년 대종회에서는 그의 이갚은 爲先精誠을 높이 사 그에게 赤壁賞을 수여하였다. ----년 -----농업협동조합장으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表彰狀을 받은 바 있고, ----년 ----로부터 향토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표창장을 받은 바 있다. 부인 密陽朴氏 一心과의 사이에 2남 洸榮․洸碩과 4녀 文淨․化淨․芝英․素英을 두었다. (족2-279, 강진 석교 44-100) 최동련 崔棟連 1922. 1. 7 - 成均館 典儀, 草系崔氏大宗會長, 본명 相休, 호 碩齋, 28세손, 첨정공파, 강진석교(弘武公후손)문중, 考 淳淇, 祖 鍾正, 전남 강진 작천 출생. 어려서 향리 서당에서 漢學을 공부한 후, 심상 소학교를 마치고, ----세 때 공부를 위해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關西공업학교에 입학하여 苦學으로 학업을 유지하였으나 학비 마련이 어려워 끝내 졸업을 못하고 ---세 때 귀국하였다. 일제 말인 19--년, 생계를 위해 ---(직위)로 해남군청에 발을 들여놓아 19---년 보성읍사무소 근무 중 1945. 8. 15 광복을 맞았다. 이때 그는 국권을 잃고 일제의 압제아래 고통받고 있는 민족의 현실을 가슴아파하여 은연중 민족의 편에서 겨레를 도와 일을 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자, 직원들이 논 2마지기를 사주어 생계를 돕기까지 한 적이 있으며, ---소재 ----학교 설립 시는 이를 위해 면민들과 벼짚을 모아 그 설립기금마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특히 보성읍에 근무할 때는 전쟁말기 일제가 강제로 한국청장년들을 노무자로 징발해 갈 때, 많은 사람들을 대상에서 빼돌려 死地로 끌려가는 것을 막아 줌으로써, 해방 후 이들로부터 오래도록 칭송을 받아온 바도 있다. 광복후 -----(언제)------------에서 ----------------------일에 진력하다가 공직을 그만 두고, ----세 때 인쇄업에 뛰어들어 서광인쇄소를 경영해 오다가 이를 4남 炳朝에게 물려주고 ---세에 향리로 돌아가 儒學에 잠심하여 儒道의 扶植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초계최씨 대종회의 실질적 영도자의 한사람으로 씨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오고 있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儒學에 심취하여 經書를 손에서 놓지 않고 탐독하여 凝滯된 곳이 있으면 碩儒들을 찾아가 論問하여 그 의미를 터득하고 나서야 묻기를 그치었다. 한편으로 광주, 강진 향교는 물론성균관에 출입하여 유림들과 道義之交를 맺어 사귀면서 性理의 연구와 유교윤리의 扶植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유림의 推重을 받아왔으며, 1994년에는 성균관 典儀에 추대되었다. 그는 博學强記하여 四書의 章句들을 두루 다 외울 뿐 아니라 그 의미에 정통하였고, 禮學에도 박식하여 매년 씨족의 큰 행사인 도원서원 享祀나 도선산 시제의 祭禮 절차를 주재해 오고 있다. 그가 용운공 후예인 柄吾로 더불어 일가찾기 운동을 기치로 세우고 가문의 재 결집을 위해 나선 것은 1971년 6월 광주종친회를 창립하면서부터이다. 炳釵․興燮․棟連․鍾烈․柄吾 등 40여 종친이 참여하여 결성된이 광주종친회는 그 첫 사업으로 1년 후인 72년 7월 전국 초계최씨대종회 창립을 목표로 전국 일가찾기 운동을 벌리기로 하고, 棟連과 柄吾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때부터 그는 병오와 더불어 가문의 재결집이라는 지상과제를 두 어깨에 짊어진 채 전국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일가들을 찾아 나섰고, 전국 각 읍 면사무소의 호적을 열람하고 소문을 따라 일가들의 거주지를 하나하나 확인, 심방하는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전라․경상도 지역을 하여, 서울․제주․울릉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처에 산재해 있는 종친들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하여, 1972년 7월 20일 각 종중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역사적인 초계최씨대종회의 창립을 보게되었다. 한마디로 이 일가찾기 운동의 성공과 그 결실로서 맺어진 대종회의 창립은 이 두 사람의 열정적인 종족애와 가문정신이 피워낸 찬란한 꽃이요 초계최씨 700년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라 할 것이다. 그는 또 대종회 총무로써 일가찾기 운동의 성과로써 수집된 자료들을 병오와 함께 정리 편집하여 1973년 1월 「報本錄」이라는 책을 발행, 전국의 일가들에게 비매품으로 보급함으로써, 선조들의 유적과 이에 수록된 6500여 종친들의 거주현황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 일가찾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 병오 등으로 더불어 초계최씨 대동보 편찬사업을 일으켜 그 편찬위원장으로써 1977년 1만여 宗親을 收單한 丁巳譜를 발행, 宗族의 大 結集을 이룩해 내었고, 같은 해 그 收單金과 종친들의 찬조금을 모아 新齋先祖를 配享한 道源書院을 復建하는 대 역사를 이룩해 냄으로써 온 宗中의 열망이자 湖南儒林들의 오랜 숙원을 성취하였다. 이밖에 1972년 도선산 제각인 鳳陽齋 신축, 1974년 新齋先祖 祠宇인 鳳陽祀 복건, 1989년 己巳大同譜 편찬 등에도 그의 헌신적 노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년 문중의 추대로 대종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년과 ----년에도 대종회장에 추대되어 대종회의 기틀을 다져가며 씨족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년 대종회에서는 그의 이 같은 공적을 기려 學士臺賞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私門中의 爲先事業에도 앞장서 ----년 문중의 힘을 모아 先塋奉祀를 위한 祭閣 武浩齋를 선영이 있는 병영면 삭양리 삭둔 마을에 건립한 바 있으며, 9대조 弘武 선조로부터 6대조에 이르기까지 선조 묘소에 石物을 獨擔하여 갖추기도 하였다. 伯兄 棟珠를 위시해 5형제가 서로 우애하며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였고, 특히 양친의 壽宴을 다 면민잔치로 베풀어 원근 마을 사람들을 모두 청하여 음식을 나누며 어버이의 기쁨을 돋우니 원근사람들이 다 그 형제들의 효성을 감탄치 않는 이가 없었다. ----년, 의사로써 미국에 이민하여 병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장남 柄曙의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바 있다. 書道에도 조예가 깊어 이로써 여가의 즐거움을 삼고 있으며, 부인 仁同 張氏 順愛와 偕老 슬하에 炳曙․炳哲․炳閏․炳朝와 英淑․安淑 4남 2녀를 두었다. (족2-283, 강진 석교58-99) 최동집 崔棟集 1909. 1. 26 - 농업, 본명 春休, 호 耕讀, 28세손, 첨정공파, 강진석교(弘武公후손)문중, 父 淳淇, 祖 鍾正, 전남 강진 작천 출생. 어려서부터 형을 따르고 아우를 사랑하는 정이 독실하였고, 어버이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스름이 없었다. 일찍 漢學을 수학하여 학식이 넉넉하였고, 成家후 근검 절약하며 治産에 힘을 써 형제 중 가장 饒富하였으되, 내 것을 따로 쌓아 둠이 없이 형제가 나눠 쓰며 홀로 잘 살고자 하지 않았다. 특히 자녀 교육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두 아들을 다 명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시켜, 장남 炳南은 실업가로 성공하였고, 차남 炳模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병모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의 ‘옷 로비’ 의혹사건 특별검사에 임명되어 사건의 실체를 明正하게 밝혀냄으로써 국민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회장을 엮임 하였고, 16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크게 힘을 보탰으며, 노무현 정부 초대 법무장관 입각이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본인이 이를 고사하여 잠적해버렸을 정도로 청렴강직하였다. 근면 성실한 성품으로 일생을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우애와 일가간의 화목을 위해 힘써 왔으며, 爲先精誠이 독실하여 先世 祭享에 참례하기를 거른적이 없다. 家譜에는 그를 기록하기를 “어버이를 孝로써 奉養하였고, 근면 검소한 생활로 家産을 일구었으며, 자녀 교육에 온 힘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하고 先世 奉祀에 정성을 다하며 일가를 사랑하였다.”고 하였다. 부인 潁陽 千氏 小任과 偕老하여 슬하에 炳南․炳模 2자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족2-281, 강진 석교 49-98) 최동주 崔棟珠 1906. 3. 8 - 1976. 10. 19 농업, 본명 述休, 호 觀湖, 28세손, 첨정공파, 강진석교(弘武公후손)문중, 考 淳淇, 祖 鍾正, 전남 강진 작천 출생. 어려서 漢學을 공부하여 文識이 有餘하였고, 농사를 부지런히 하며 治産에 힘을 기울여, 어버이를 奉養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네 아우를 成家시키는 데 모두 곤핍함이 없게 하였다. 강직․온화한 성품으로 자질들의 훈도를 엄격히 하고 교육에 열성을 다해 세 아들을 훌륭히 교육시켰으며,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여 다섯 형제가 서로 네 것 내 것이 없이 각종 産物이며 가재도구를 나눠 쓰고 화목하며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니, 군민들이 그 일가를 가리켜 ‘孝悌집안‘ 이라 하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또 장자로써 爲先精誠이 남달라 先塋을 지키며 時祭와 ?祭祀를 예를 다하여 받들었고, 1972년 ?弟 棟連과 함께 초계 최씨 대종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여 초창기 대종회 顧問職을 맡아 씨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기도 하였다. 家譜에 기록하기를 “성품이 강직하며 총명하고, 몸가짐이 단중하고 예절이 바랐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독실하여 서로 네 것 내 것이 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부인 道康 金氏 玉女와 偕老하여 슬하에 棟珠․棟集․棟千․棟萬․棟連 5남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報本錄】(족2-279, 강진 석교 43-97) 최홍근 崔洪根 1937. 12. 2 - 농업, 본명 炳根, 28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祖 幼學 成律, 考 雲卿,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향리에서 정읍 산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생 동안 농업에 전념하면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근면․성실하며 검소한 생활로 마을의 모범이 되어왔으며, 戶長 武立의 후손인 정읍 화죽 문중의 종손으로서 일생 동안 고향을 떠나지 않고 조상의 얼을 지켜 선산을 돌보며 祖上奉祀를 독실히 받들어 오고 있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의 甘旨를 誠孝로써 받들어 왔으며, 형제간에도 우애가 각별하고 종손으로서 일가간 화목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宗事에 힘써오고 있다. (족3-924) 정읍 화죽 9-96 최연중 崔連仲 1923. 3. 16 - 농업, 본명 仲休, 28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祖 成律, 考 貴男,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향리에서 정읍 산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동안 농사에 힘쓰면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근면 성실하며 純厚한 성품으로,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아무리 어려운 때에도 절기에 맞는 옷과 감미로운 음식으로 양친을 孝養하였으며, 일가 동기간에 화목하고 이웃과 친화하며 일생 동안 분수를 지켜 청렴한 생활로 일관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아왔다. 達成徐氏 金伊와 결혼하여 4자 仁喆․喆洙․敏植․春植과 1녀 春子를 두었다. 족3-929, 정읍화죽 8-95 최태주 崔泰柱 1928. 9. 16 - 1990. 9. 16 군인, 육군대위, --(젼역후 직업?) 본명 泰休, 28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祖 幼學 成律, 考 昌桓,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정읍 산외초등학교를 거쳐 전주중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1946년 국방경비대에 지원 입대, 사병으로서 1948년 여순사건 진압에 참전한 바 있고, 1950년 6․25 한국전쟁 시 강릉지역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부산으로 후송되었다가 퇴원 후 다시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군 복무 중 마산 의정장교 학교에 입교하여 1953년 11월 제 15기로 수료하고 바로 육군 소위로 임관, 야전 부대 군의관으로 복무하였다. 1956년 육군중위로 진급, 대전 국군병원에 근무하였고, 1959년 대위로 진급해 국군병원과 야전부대 의무중대장을 역임하면서 장병들의 질병과 부상치료 및 군 의료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1967년 춘천 국군병원을 끝으로 14년간의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재직 중 미국과 일본에서 6개월간 군 의료행정에 관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왔다. 전역 후 춘천에서 ------------------------------- 사업에 종사하면서 터전을 잡고 생활하던 중, 1990년 63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延安 李氏 富興과 결혼, 슬하에 1남 顯翊과 1녀 英淑을 두었다. 【후손: 顯翊】 족3-927 정읍화죽7-94 최득주 崔得柱 1933. 10. 4 - 公社員, 한국전기통신공사 전주전화국 근무, 본명 得休, 28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祖 幼學 成律, 考 昌桓,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향리에서 정읍 산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유학, 전주 중학교에 재학 중 6․25 한국전쟁이 발발해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전쟁 당시 仲兄 泰柱가 남한군 국방경비대에 소속되어 북한 공산군과 싸우고 있었던 관게로, 공산군이 호남지역까지 장악하였을 당시 온 가족이 반동으로 몰려 가산을 焚蕩당하고 處殺될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해 정읍 신태인 청천리로 피난, 가족이 안전을 얻고 종전을 맞았으나 이때의 충격으로 부친이 사망하여 가족이 향리로 돌아갈 뜻을 잃고 피난지에서 정착하였다. 결혼 후 30세 때 분가하여 김제군 부량면 대평리로 이사하여, 농사에 전념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밤낮 없이 일에 열중하였다. 1965년에는 농촌지도소에 입소하여 영농교육을 받고 나와 소득증대와 농촌개량 사업에 헌신, 마을에 과학적 영농기술을 보급․지도하며 농한기 소득사업의 전개, 마을 길 넓히기 사업 추진 및 夜學을 열어 문자․산수교육을 실시해 문맹을 퇴치하는 일에 매진하는 등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8년 김제저금관리국에 취직하여 공직에 첫 발을 디뎌놓은 이래, 1972년 김제우체국으로 옮겼고, 다시 1980년 전주 체신청으로 자리를 옮긴 뒤, 1982년 전화국의 公社化와 함께 한국전기통신공사 전주전화국으로 옮겨 복무하던 중 1993년 정년퇴임 했다. 그는 또한 가문의식이 투철하고 崇祖愛族 정신이 독실하여 先代에서 정읍군 산외면 화죽 마을로 은둔한 이래 여러 대를 종족과 연락이 끊겨 自家門의 族派根源을 알 길이 없자, 世傳되어 오던 조선조의 先代 戶籍單子를 품고 수년 동안 각처 종족을 심방하며 근원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同根同祖의 일가를 찾고, 1977년 大同譜에 그 昭穆의 序를 갖춰 譜系를 정립해 놓음으로써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문중대표로써 1989년 대동보 편찬시 수단위원으로 편찬에 참여하였고, 新齋 中祖 配享 書院인 도원서원 享祀와 도선산 시제에도 열성적으로 參禮하고 있으며, 각종 문중사를 헌신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草溪崔氏 七百年史」편찬에도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康津 金氏 北順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漢基․漢秀․漢暻과 1녀 善子를 두었다. 족3-928, 정읍화죽5-93 최창환 崔昌桓 1900. 5. 25 - 1953. 5. 22 농업, 27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祖 幼學 文玉, 考 幼學 成律,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父祖의 훈도 아래 어려서부터 西學을 멀리하고 서당에서 漢學에만 전심, 禮學과 經史書를 두루 博覽하여 도학군자의 稱譽를 들었다. 伯氏로 더불어 형제가 우애하며 어버이를 誠孝로써 봉양하였고, 농사로써 생업을 삼아 근면 성실로써 치산에 힘써 裕足한 생활을 하였으며, 마을의 일에도 적극적이어서 大小事를 공정히 처리하고 가난한 이웃과 衣食을 나누어 飢寒을 줄이니 마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日帝의 가혹한 식민통치하에서도 斷髮을 거부, 조상의 얼을 지키다가 日警에게 끌려가 모진 폭행을 당하고 의식을 잃은 사이 삭발을 당한 채 업혀 돌아와 식음을 폐하고 통곡하기를 3주야를 계속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命을 마칠까 걱정하기를 일가처럼 하였다. 해방 후 민족이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되어 혼란의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차남 泰柱가 국방 경비대에 자원입대하여 1948년 여순사건시 그 진압작전에 참가, 反共의 선봉에 서서 싸웠던 사실로 인해, 1950년 6․25 한국전쟁시는 공산치하에서 온가족이 반동으로 몰려 가산을 분탕 당하였으며, 一族이 處殺될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하는 수난을 겪었고, 이 때의 충격으로 1953년 마침내 타계하였다. 이 같은 危亂 중에서도 先代로부터 간직해왔던 조선조의 先代 호적단자를 몸에 간직해 피난함으로써 후손들이 이를 통해 혈통의 근원을 알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가문의식과 崇祖愛族 정신의 투철함 이에서 볼 수 있다. 부인 密陽 朴氏 貞烈과의 사이에 宗柱․泰柱․得柱 세 아들을 두었다. 【후손:得柱】 족 3-927 정읍화죽5-92 최성률 崔成律 1869. 7. 15(고종 6,기사) - 1933. 7. 25 幼學, 韓醫師, 26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曾祖 記官 致大, 祖 幼學 明坤, 考 幼學 文玉,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漢學을 수학, 학업에 정진하여 經史書는 물론 醫書에까지 博通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林間에 草堂을 짓고 墨客들로 더불어 詩會를 열어 詩才를 겨뤄 장원을 가리고 음주단란하기를 즐기었다. 또한 醫學에 통달하여 中年이후에는 그의 和劑를 얻기 위해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名醫로서 명성을 떨쳤다. 부인 光山金氏와 사이에 雲卿․昌桓 2 男과 英信 1女를 두었다. 【후손:得柱】 족 3-924 정읍화죽 4-91 최문옥 崔文玉 1820(순조 20,경진) - (卒年未詳) 12. 5(忌日) 幼學, 25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祖 記官 致大, 考 幼學 明坤, 정읍군 산외면 화죽 출생, 어려서부터 부친 서당에서 글공부를 배워 학문이 진취하였다. 성품이 활달상쾌(豁達爽快)하여 매사에 응체(凝滯)함이 없었고, 詩酒를 즐겨 詩友들로 더불어 음주단란하기를 좋아하였으며, 學行이 고매하여 사림의 推重을 받았다. 또한 부친의 서당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기에도 열중하였으며 특히 孝悌忠信과 같은 예절교육을 중요시하였다. 昌寧成氏․金海記氏 두 부인으로 더불어 화락하여 슬하에 成律․成節 두 아들을 두었다. 【후손:得柱】 정읍화죽3-90 최명곤 崔明坤 1768(영조 44,무자) - (卒年未詳) 2. 18(忌日) 幼學, 24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高祖 戶長 武立, 曾祖 戶長 忠達, 祖 武學 再弼, 考 致大, 순창군 左部面 玉川(현 순창읍)출생, 어려서 부친을 따라 정읍군 산외면 화죽리 엄계로 들어와 이에 정착하였다. 부친의 교훈을 지켜 학문에 정진하며 수행에 힘써 學行으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졌고, 書堂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며 儒林과 교유가 빈빈하였다. 평생 가르치기에 힘썼고 유림들로 더불어 詩會를 즐기며 林泉 가운데 自娛하며 청한한 삶을 살았다. 부인 南原 梁氏와 사이에 1子 文玉을 두었다. 【문헌:戶籍單子】 【후손:得柱】 정읍화죽2-89 최치대 崔致大 1737 (영조13, 정사) - (卒年未詳) 10.8 (忌日) 記官, 字 晸華, 23세손, 용운공파, 정읍화죽(武立公 후손)문중, 증조 戶長 武立, 祖 戶長 忠達, 考 武學 再弼, 순창군 左部面 玉川(현 순창읍)출생, 先代로부터 순창에 世居해오면서 戶長職에 나가 관직을 수행해 왔으며, 생활은 奴婢를 두고 살만큼 裕足하였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힘써 학문이 有餘하였으나 記官職에 머물러 지내던 중, 이를 버리고 獨子 明坤을 이끌고 정읍군 산외면 화죽리 엄계로 이사해 詩書를 즐기며 林泉 가운데 은거하였다. 부인 羅州 陳氏와 사이에 獨子 明坤을 두었다. 【문헌:호적단자】 【후손:得柱】 정읍화죽 1-88 최현주 崔賢柱 1925. 9. 7 - 수산업, 南和水産社 대표, 대형기선 저인망수산협동조합장, 수산경영학회 부회장, 한일어업 민간협의회 위원, 부산 수영연맹회장, 부산중구청 평화통일정책 자문위원, 본명 賢休, 호 望雲, 28세손, 통정공파, 남해동천(宗國公 후손)문중, 祖 弼石, 考 琪五(본명 在琪), 경남 남해군 삼동면 송정 출생, 향리에서 남해 미조심상소학교와 남해 공립 수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廣島縣 廣島中學校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년 日帝에 의해 徵兵으로 끌려가 입대(----전선에 배치)하였다가. 8․15해방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生還하였다. 1946년 해방 후 좌․우익 대립으로 혼란된 사회를 보고 경찰공무원직에 투신, 남북 분단과 정부수립,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상․경제․사회적 혼란기에 민중의 지팡이로써 치안과 국법질서의 수호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또 경찰공무원으로 봉직하면서도 항상 학구적 자세를 견지하여 ----년 홍익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주경야독으로 同 學科를 졸업하기도 하였다. 1970년 수산업에 뜻을 두어 ----경찰서 ---(직위,직급)을 끝으로 14년 동안 몸담아왔던 경찰직을 그만두고, 船具商社를 차려 운영하던 중, ---년 <남화수산>회사를 창업(또는 인수?), 경영하면서 창의적 경영기법으로 한국 수산업의 낙후성과 경영의 불합리를 과감히 쇄신해가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지속,<남화수산>을 --------------의 규모로 키워내 업계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다. ------년에는 부산 수산대학교 산업대학원 최고 경영관리자 과정을 수료하는 등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수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81년 대형기선 저인망 수산협동조합 조합장으로 피선되어 6년간 연임하면서, 漁具改良事業과 새 어장 개척에 힘쓰고 원양어업에 나서 동지나해와 남지나해 일대 시험조업에 성공함으로써 水産人의 생산증대와 한국 수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현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조합 산하 선원자녀 장학사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우수자녀들에게 장학금을 확대 지급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힘써왔다. 또 1983년, 당시 부산 다대포 앞 바다 무장간첩 침입 시 해군본부와 합동으로 격침된 무장간첩선을 인양,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으며, 부산 수영연맹 회장에 피선되어 6년간 연임하며 향토체육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84년 이러한 공적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銅塔産業勳章을 받았다. 그밖에도 부산시 중구청 민주평화통일정책 자문회의 위원 겸 부회장을 다년간 역임한 바 있으며, 한․일 어업 민간협의회 위원과 부산시선진질서 추진위원, 부산 수산대학교 기성회 이사 등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이와 함께 각계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표창을 받기도 하였는데, 위의 銅塔産業勳章 이외에도 수산물 생산 提高와 유통질서 확립 有功 국무총리 표창(---년)을 비롯해서, 漁具漁法改良 및 기술개발 有功 국립부산수산진흥원장 표창(----년), 부산시 水泳개발 有功 부산시장 표창 (-------년), 다대포 간첩선인양 유공 수산청장 표창(---년), 남해송정 어촌선착장 건설 유공 남해군수 표창(----년), 학술진흥재단 설립 유공 뿌산대학교 총장 표창(-----년), 교육발전 유공 부산시 교육감 표창(----년), 한국언론 창달 유공 한국 수산신문사 표창(----년)등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또한 그는 孝友가 독실하고 爲先?誠과 가문의식이 투철하여 형제 우애하며 어버이를 誠孝로 섬겨왔고 일가 돈목에 힘써 伯氏 益柱로 더불어 南海宗親會 창립에 앞장섰으며, 여러 해 종친회장을 연임하면서 宗族의 誠力을 모아 1991년 남해군 삼동면 동천리에 우리 씨족 남해 종중의 숭조애족의 요람이요, 길이 씨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질 宗閣 「草溪祠」를 창건, 남해 入都祖 통정공 宗國 선조․선무원종공신 증병조참의 歇 선조 등 59位 선조 神位를 모셔 時享을 받드는 齋室을 삼으니, 그 爲先精誠의 극진함과 고매한 애족정신을 이에서 볼 수 있다. 저서에 『초계최씨문중과 혈통』(2000), 『내고향 남해 나의 삶』(2001)이 있어 그의 남다른 씨족애와 향토애를 보여주고 있다. 부인 金海金氏 占葉과의 사이에 興坤․興千․興祿 3남과 1녀 貞伊를 두었고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정성을 남아 3남 1녀를 모두 대학교육까지 마쳤다. 【남화수산】 1.회사의 연혁 2. 자산․인원․어선 수 등 회사의 규모 족4-511, 남해동천 72-87 최옥균 崔玉均 1947. 2. 6 - ---------------------본명 玉休,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善秀, 父 吉南(본명 在拂), 전남 고흥군 봉래 출생,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 ------고등학교를 거쳐 광주로 유학, ----년 조선대학교 -----학과를 졸업한 뒤, -----년 -----(직업)사업에 뛰어들어 -------에 종사하여 왔고, 현재는 ------------------------------------------ 일에 종사하고 있다. 부인 金海金氏 亨心과의 사이에 京烈․京賢 두 아들을 두었다. 족2-267, 고흥외초10-86 최창휴 崔彰休 1949. 7. 3 - -------------------------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光秀, 부 亨九(본명 在亨), 전남 고흥군 봉래 출생,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로 유학, ---년 휘문대학 -----학과를 졸업한 뒤, ---년 ----일(사업)에 뛰어들어 ---------- 현재 ----------일에 종사하고 있다. --------------------------------------------- 부인 長水 黃氏 仁姬와 사이에 智․幼利 두 딸을 두었다. 족2-266, 고흥외초9-85 최방휴 崔芳永 1942. 1. 27 - ------------------------- 본명 芳休,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光秀, 부 亨九(본명 在亨), 전남 고흥군 봉래 출생,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로 유학, ------년 건국대학교 -------학과를 졸업한 뒤, ----년 ------일(사업)에 뛰어들어 -------현재------------일에 종사하고 있다.-------------------------------- 부인 密陽 房氏 英淑과 사이에 1남 允碩과 1녀 允姬를 두었다. 족2-266, 고흥외초 8-84 최주휴 崔柱休 1937. 6. 28 - 화가, 서양화전공,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光秀, 父 亨九(在亨), 전남 고흥군 봉래 출생,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로 유학, 196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일에 종사하면서 그림에 전념하고 있다. ----년 --------작품으로 ----------에서 -----상을 수상하고, --------주요작품으로는 ------ --------- --------- 등이 있고, -----년 --------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부인 盆城裴氏 福南과의 사이에 1남 赫哲을 두었다. 【작품 경향】 1963년 이후 줄곧 고향인 고흥군 나로도에 살면서 바닷가에서 바라다 본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겨 화폭에 담아 작품활동을 해왔다. 바다와 하늘과 나무와 바위 그리고 바람이 있는 그의 풍경들은 남쪽의 밝은 태양빛을 받아서 유난히도 밝다. 되도록 주관을 억제하려는 온화한 태도와 자기만이 느낄 수 있는 태양광선의 작용을 화면에 받아들여 빛과 그늘의 조화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작가다. 이렇듯 그는 자연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자기 생활 주변의 바닷가에서 아름다움과 시를 발견하며, 때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미적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그의 작품세계는 완전한 자연주의에 몰입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국립미술관장 이경성의 <崔柱休展에 부쳐>】 족2-266, 고흥외초7-83 최완우 崔莞雨 1958. 9. 5 - -----------------------본명 炳莞, 29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性九(본명 在九), 父 秉休,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초리 출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성균관 대학교 ----학과에 입학, ---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에 투신하여 ------(일, 사업)에 종사하여 오고 있다. ------------------ 혼인자녀사항-------------------------------- 족2-264 고흥외초6-82 최진옥 崔眞玉 1936. 10. 10 - 공무원, 보성군청 산림과장, 본명 眞休,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光秀, 考 性九(본명 在九),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초리 출생. --------------------------------전남 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 ------년 --------에 첫 발령을 받아 山林 공무원직에 투신하여 ---------을 거쳐 ---------현재 보성군청 산림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일에 정려하고 있다. --------------------高靈申氏 仙玉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莞煜․昶宇와 1녀 리나를 두었다. 족2-264 고흥외초5-81 최병휴 崔炳休 1933. 9. 28 - -------------------------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光秀, 考 性九(본명 在九),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초리 출생. ----------전남 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에 투신하여 ------------일에 종사하여 오고 있다. ----- 부인 忠州池氏 善姬와의 사이에 3남 莞雨․弼善․裕澈을 두었다. 족2-264 고흥외초4-80 최형구 崔亨九 1912. 3. 19 - 공무원, 나로도 수산협동조합장, 본명 在亨, 호 維洋, 27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時達, 父 光秀, 母 延安明氏,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초리 출생, -----------------------------나로도 수산업협동조합장을 역임, 어민들의 권익보호와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그는 특히 가문의식이 투철하고 종족애와 위선정성이 독실하여, 초창기 초계최씨 대종회 건설에 크게 기여하였고, 1975년 도원서원 중건에 물심양면으로 협찬을 아끼지 않아 그 芳名이 「도원서원 유허비」후면에 새겨져 있다. ----년 대종회 부회장에 피선되어 宗事에 크게 공헌하였다. 부인 長興高氏 妹葉과 사이에 文休․柱休․芳休․彰休 4남과 貞子․順子․錦子․錦蘭 4녀를 두었다. 자녀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아 네 아들을 모두 서울에 유학시키고 명문 대학을 졸업시켜 사회 각계에 지도적 인물로 키워냈으며, 또 딸 貞子․順子도 각각 서울 명문대학을 졸업시켜 사회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케 하였을 정도로 남다른 교육열의 소유자였다. 족2-265 고흥외초2-79 연안 명씨 延安 明氏 1890. 10. 4 - (卒年未詳) 4. 27(忌日) 孝烈婦, 崔光秀(26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문중)의 妻, 延安 明氏 仲元의 女, 천성이 맑고 곧아 독실히 婦德을 지켰다. 남편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리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따라 죽고자 수건으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시부모를 섬기기를 더욱 극진히 하여 남편의 몫까지 섬겨 孝養하기에 몸을 다하였고, 두 아들을 교육하여 훌륭히 성취시키니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년 향리의 추천으로 도지사가 그 효열을 표창하였다. 이 사적이 家譜에 기록되어 있다. 性九(본명 在九)․亨九(본명 在亨) 두 아들을 두었고, 성구가 2자를 두고 형구가 나로도 수산협동조합장으로 4남 4녀를 두고 또 국회의장 정무수석 비서관 文休와 같은 영재를 두어 가문을 흥기하니, 고흥군 외초리 초계최문을 창성케 한 근본이 다 연안 명씨 부인의 공이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2-264 고흥외초3-78 최봉무 崔奉武 1661 (현종 2년, 신축) - (卒年未詳)10. 13(忌日) 贈 嘉善大夫, 字 之彦, 19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曾祖 첨정공 得麟, 祖 참판공 好立, 考 동지중추부사 宇福,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초리 출생. 伯兄 愛錦과 弟 弘武와 함께 삼 형제가 서로 우애하며 어버이를 성효로 받들면서 부친의 훈도를 따라 독서에 힘쓰고, 林泉에 娛遊하며 맑은 행실로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벼슬은 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貞夫人 淳昌 趙氏와의 사이에 祥鶴․祥瑞․祥順․祥表 네 아들을 두었다.【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 】 족1-137 고흥외초12-77 최우복 崔宇福 1633(인조11년, 계유) - 1694. 8. 1(숙종20, 갑술) 贈 同知中樞府事, 고흥군 봉래면 외초 入都祖, 字 而善, 1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문중 門祖, 祖 첨정공 得麟, 考 참판공 好立, 전남 광양군 봉강면 부저리 출생. 하루는 우연한 感興이 일어 유람 길에 나섰다가 고흥반도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은 채 探勝에 열중하여 반도를 두루 유람하였다. 이어 배를 타고 여러 섬들을 유람하는데, 船遊 도중 해안의 여러 勝景 가운데 특히 외나로도의 경관이 가장 아름답기로 뒤에 이 섬의 외초리(고흥군 봉래면 외초리) 지역에 처음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로써 무인도인 이 외나로도가 사람이 사는 섬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이 마을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300여년이 넘도록 우리 초계최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평생 독서에 힘쓰고 행실을 가다듬어 학행이 고매하였고, 벼슬은 直長을 지냈으며 뒤에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1926(병인)년 9대손 北秀․萬秀 등이 중심이 되어 公의 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相彬․在洵이 썼다. 貞夫人 光山金氏와의 사이에 愛錦․奉武․弘武 세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동지중추부사 宇福 公碑文】 【후손: 】 족1-137 고흥외초11-76 최문휴 崔文休 1935. 8. 8 - 행정학석사, 정치가, 국회의장 정무수석비서관(1급), 한나라당 고흥군 국회의원후보, 한나라당 총재 특별보좌관, 주식회사 五峰開發 대표이사, 28세손, 첨정공파, 고흥외초(宇福公후손)문중, 祖 光秀, 父 在亨, 전남 고흥군 봉래 출생. 광주서중과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국제학술원 기획조사국장으로 일했다. 27세 때인 1962년, 한국문제역구원을 설립, 6년간 영문학술지‘KOREAN AFFAIRS'를 발행,(?,연구분야, 학술지의 성격, 배표계층,연구소의 주요 업무 등등을 간략하게 제시요망)----------------------의 발전에 기여한 바 있다. 근면․성실․정직을 생활신조로 삶을 일관해 온 그는 활달한 성격과 따뜻한 인간미, 남다른 친화력으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폭넓은 교우를 가져 왔으며, 웅변에도 뛰어나 대한 웅변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언제나 학구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35세때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고, 45세 때엔 다시 명지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해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36세때(------의 주선 또는 발탁?, 정계입문경위를 간략히 제시)---국회의장 공보비서관으로 정게에 입문, 8대․9대․10대 국회까지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으로써 역대의장의 對言論 관계와 국회운영을 拔群의 능력을 발휘해 성실히 보좌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두 차례나 국회의장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71.10. 白斗鎭 국회의장을 수행, 중화민국, 필리핀, 뉴유질란드를 순방하였고, 74.5. 丁一權 국회의장을 수행, 브라질과 중화민국을 순방하였으며, 또 75년 4월에는 정의장을 수행, 서독, 프랑스, 미국, 일본을, 76년 1월에는 역시 정의장을 수행, 쿠웨이트, 이란을, 그리고 77.8.에는 또 백두진 국회의장을 수행, 뉴우질랜드, 호주를 각각 순방하여, 그때마다 탁월한 수완과 외국어 실력을 발휘, 국가의 외교적 역량을 확대해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76년 5월에는 국회 각 상임위원회 간사 일행을 수행, 일본 등 동남아 6개국의 의회제도를 시찰한 바 있으며, 79년 9월에는 주요일간지 정치부장일행 유럽 각 국 언론계 및 의회제도 시찰단 단장으로 프랑스 등 유럽 8개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바 있다. 79년 10․26사태 이후, 정계를 떠나, 신우건설산업(주)․태화건설(주)․태양종합건설(주)․삼영토건(주)의 대표이사로서 실업가로 활약하다, 88년 6월 다시 13대 국회의 국회의장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정계에 복귀, 89년 국회내무위원장 일행을 수행, 서독의 지방자치 제도를 시찰하고, 91년 국회운영 위원장 일행을 수행, 영국 등 유럽 7개국의 의회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등 한국 의회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진력하다가, 91년 6월 다시 정계를 떠나, 주식회사 오봉개발을 설립하고 골프장 아시아나컨트리클럽을 경영, 레저산업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는 또 爲先精誠과 가문의식이 투철하여 1974년 신재선조 배향서원인 도원서원 중건을 위해 온 종중이 誠力을 모을 때, 국회의장 공보비서관으로써 대통령과 국회의장, 그리고 중앙 요로에 서원 중건 취지를 상달하고, 행정관청으로부터 서원 중건에 필요한 협조를 얻어내는 데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부인 慶州李氏 玉宰와 슬하에 1남 晸宇․1女 禎元을 두고 있다. 추가할 사항, 【1990년대 이후의 정계진출 및 정치활동】 및 【주식회사 오봉개발 아시아나 컨트리 클럽】(1. 회사의 연혁 2. 자산,인원 등 회사의 규모 3. 아시아나 컨트리 클럽의 소재지,규모,종사자 수, 연간 매출액) 족2-265 고흥외초1-75 최 돈 崔 敦 1646(인조24, 병술) - 1707. 9. 9(숙종33,정해) 가선대부, 字 致弘, 21세손, 첨정공파, 완주안덕문중 門祖, 고조 참판공 好立, 증조 통덕랑 宇熙, 祖 成武, 考 彦複, 전남 승주군 송광면 이읍 출생, 전북 임실군 덕치면 두지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학문에 힘써 벼슬이 가선대부에 올랐다. 貞夫人 光山金氏와 사이에 독자 震伯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淳天】 족1-192 완주안덕1-74 최순천 崔淳天 1926. 5. 15 - 농업, 본명 炳淳, 호 松岩, 29세손, 첨정공파, 완주안덕(敦公후손)문중, 祖 陳基(본명 在元), 考 周興(본명 完休),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 출생, 어려서 공부에 뜻을 두어 구이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으나 日人에게 교육받는 것을 반대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중퇴하고, 향리에서 농사를 도우면서 先學에게 나가 漢學을 공부하였다. 成年이 되어서는 더욱 영농에 힘쓰면서 치산에 힘을 기울여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고 어버이를 정성을 다해 孝養하며 일가와 화목하고 이웃과 친화하니 주위 사람들이 다 그 인품을 칭송하였다. 청렴 정직하며 근면 성실한 성품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향리의 里長을 십수년간이나 맡아보며 마을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년 향리에 초등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그 설립 추진위원장을 맡아 안덕초등학교 설립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또 6년 동안이나 기성회장직을 맡아 학교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년에는 구이 중학교 육성회장으로 선출되어 2년 동안 연임하면서 학교발전을 위해 노력한 바 있고, 또 수년간 완주군 선거관리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도 구이면 개발위원으로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가문의식이 투철하고 종족애와 爲先精誠이 독실하여, 先代가 생계를 찾아 安德마을에 정주한 이래 3․4대에 걸쳐 100년 가까이나 종족과 왕래가 두절되어 漏譜됨으로써 譜系를 알 길이 없자. 10년이 넘도록 노심초사하며 각종 문헌을 섭렵하고 각처 종족을 심방하며 族派根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초계최씨 첨정공파, 전북 순창군 유등면 건곡문중의 希東 族丈을 상봉, 마침내 근원을 찾고 同根同祖의 혈족과 만나 도선산 중시조의 묘소에 香火를 올려 參拜함으로써 積年 갈망하던 소원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1989년 己巳譜 편찬시는 門中 수단위원으로서 대동보 편찬에 참여해 辛卯譜이래 100여년이나 漏譜되었던 譜系를 계승해 놓음으로써, 一族이 이로써 氏族史와 昭穆의 序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전주 종친회 창립에 앞장서 1982년 창립이래 현재까지 부회장직과 회장직을 맡아 일가화목과 발전을 위해 힘써오고 있으며, 대종회 운영위원으로서 매년 도원서원 제향과 도선산 시제에도 빠짐없이 참례하여 후손된 도리를 다하고 있다. 全州李氏 順德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培圭․坪圭․銀圭․榮圭․洪圭과 1녀 玉禮를 두었다. 족1-765 완주안덕9-73 최규선 崔奎善 1847(헌종13,정미) - 1935. 12. 19 선비 字 燦五, 호 松村, 24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曾祖 사헌부감찰 順明, 祖 효자 淙業, 考 幼學 廷老, 전남 담양군 금성면 덕성 출생, 일생 세속 名利를 구하지 않고 독서와 修己에 전심하였고, 學行이 淸高하여 향당의 추앙을 받았다. 夫人 延安金氏와 사이에 3자 震光․震雄․震洛과 2녀 陽川許氏 桃의 妻․晋州姜氏 吉秀의 妻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2-425 담양봉서18-72 최용환 崔鎔煥 1900. 8. 4 - 1962. 2. 27 효자, 字 仁玉, 호 芝堂, 26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曾祖 幼學 廷老, 祖 선비 奎善, 考 震光,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舊韓末 開化와 斥邪의 두 시대사상이 혼류하는 가운데 열강의 국권침탈로 민족의 생존이 위협받던 시기에 태어나,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 시대를 겪고, 해방 후 또 6․25 전쟁으로 동족상간의 痛苦를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왔으면서도, 혼란에 지조를 잃음이 없이 修己正心으로 孝友를 독실히 실천하여 道義를 扶植하고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어린시절 漢學을 수학하고 일생 어버이를 孝養하였고 독서로 修己에 힘쓰며 농사에 종사하였다. 보첩에 기록하기를 “일편단심효우독행(一片丹心孝友篤行 : 일편단심으로 한결같이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독실히 실천하였다)”이라 하였다. 부인 陽川許氏와 해로하여 슬하에 3남 羽暹․羽村․羽祥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족2-461 담양봉서47-71 최우섬 崔羽暹 1935. 1. 3 - 공무원, 행정주사, 본명 在南, 27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曾祖 선비 奎善, 조 震光, 考 효자 鎔煥,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孝友家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받들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이 남다른 바가 있었다. 향리에서 금성초등학교, 담양중학교, 담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에 종사하던 중, -------년 지방행정직 공무원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년 ------에 초임 발령을 받아 공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년 -----로 옮겼고 -------이후 담양군 관내 각 면에 순회 근무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봉사행정의 구현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년 행정서기, -----년 행정주사보에 승진하고, ----년 행정주사에 승진하여 현재 고향인 금성면 재무계장으로서 면민에 대한 봉사와 향토발전에 헌신하고 있다. 성실하고 온유하며 책임감이 강한 성품으로 鶴壽 慈親을 孝養하고 있으며, 일가 동기간에 화목하고 이웃과 친화하며, 직무에 임해서는 친절한 대민봉사로 이웃과 면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다. 20세에 陽川許氏 順伊와 결혼, 슬하에 倫植․椿植․景植․淳植 네 아들을 두고 있다. 족2-461 담양봉서48-70 최정준 崔廷俊 1802 (순조 2,임술) - 1873. 6. 24(고종10, 계유) 贈嘉善大夫, 字 仁寬, 23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考 淙得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학행으로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官은 가선대부에 追贈되었다. 貞夫人 光山金氏와 사이에 日善․秉善 두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2-437 담양봉서31-69 최병선 崔秉善 1839(헌종 5, 기해) - 1899. 1. 10(고종36,기해) 사헌부 감찰, 字 乃應, 24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考 가선대부 廷俊,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어려서부터 독서에 힘써, 벼슬에 나가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학행이 고매하여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淑人 達成徐氏와의 사이에 독자 震八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2-438 담양봉서32-68 최진팔 崔震八 1868(고종 5,무진) - 1946. 8. 3 中樞院 議官, 字 明瑞, 호 尤齋, 25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祖 가선대부 廷俊, 考 사헌부 감찰 秉善,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학문에 힘써 舊韓末 벼슬에 나가 中樞院 議官을 지냈다. 부인 光山金氏와의 사이에 독자 吉煥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2-438 담양봉서33-67 최병원 崔昞元 1949. 10. 19 - 공무원, 회사원, 농협중앙회 기획실 대리, 광주상호신용금고 기획실 차장, 주식회사 고려섬유 대표이사, 주식회사 우미산업개발 경리부장, 본명 善休, 28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祖 吉煥, 父 祥基(본명 在赫),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이 남다른 바가 있었다. 향리에서 금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양중학교를 거쳐 담양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농협중앙회 공채에 합격, 1969년 신안군 농협에 공무원으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년 해남군 농협 상무로 승진하였고, 다시 ---년 농협 전남도지회 대리로 옮긴 뒤, ----년 농협중앙회 기획실 대리로 승진하였다. 1981년 광주상호신용금고 간부 공채에 합격, 업무부․여수지점 근무를 거쳐 본사 기획실 차장으로 근무하였다. 1987년 광주상호신용금고 간부 공채에 합격, 업무부․여수지점 근무를 거쳐 본사 기획실 차장으로 근무하였다. 1987년 사업경영에 뜻을 두고 광주상호신용금고 차장직을 사임, 전남 화순군 능주 농공단지 내에 섬유생산업체인 주식회사 <고려섬유>를 창업, 89년부터 90년까지 그 대표이사직을 맡아 경영하였다. 전문 경영으로써 공장 가동이 본 궤도에 이르게 되자 대표직을 인계하고 1991년 종합건설회사인 주식회사<우미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겨, 기획실장․총무부장을 거쳐 현재 경리부장으로 재직 중에 있으며, 전문 경영인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기반을 착실히 다져가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믿음․정직․성실을 생활신조로 어버이를 孝養하며 일가와 화목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종중사에도 열과 성을 다하고 있으며 현재 광주 종친회 총무를 맡고 있다. 1984년 금융단 연수차 일본을 방문, 2주간 여행한 바 있다. 부인 新平宋氏 順任과의 사이에 1남 哲과 은영․은정․은지․수련․하련 5女를 두고 있다. 족2-492, 담양봉서70-66 최용만 崔龍萬 1941. 10. 19 - 보일러설비기능사, 본명 龍休, 28세손, 禦侮公派, 순창내동(龍立公후손)문중, 祖 應元, 考 東允(본명 在童), 전북 순창읍 순화리 출생,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순창초등학교, 순창 중학교를 마치고 농사를 돌보면서 호남매일신문 순창지국의 총무로 일하다가 지국장․보금소장을 맡아 이를 운영하였다. ----년 호남매일신문이 운영난으로 폐간되자 다시 농업에 전념하면서, 농한기에는 도회지에 나가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며 틈틈히 온수․온돌 보일러 기술을 익혔다. ----년 보일러 설비 기능사 지적을 취득한 후 각종 건축공사의 보일러 설비 시공을 맡아 공사를 하면서 차츰 경제적 기반을 잡기 시작하였으며, 1977년 고향을 떠나 서울 성복구 상월곡동에 ---------보일러 시공업소를 차려 현재 보일러 설비업에 전념하고 있다. 근면 성실하며 책임의식이 강한 성품으로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봉양하기를 정성으로 하였으며, 특히 엄친이 암으로 신고하고 있을 때에는 객지에서 어렵게 저축한 돈을 털어 치료비를 대며 간병하기를 지성으로 하니 이웃 사람들이 다 그 誠孝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1세때 全州李氏 順玉과 결혼, 슬하에 紋塽․佑塽 두 아들을 두었다. 족4-172 순창내동6-65 최혜진 崔惠珍 1953. 8. 8 - (직 업 ) 본명 惠基, 30세손, 순절공파, 순창남계(湜公후손) 문중, 父 鳳燮, -----------출생, -----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해양학과에 진학, --년 졸업하고 -----------에 뛰어들어 ------일에 종사하고 있다. 순창남계3-64 최준봉 崔俊鳳 1655. 5. 10(효종6, 을미) - 1724. 11. 11(경종4, 갑진) 증 통정대부 우부승지, 19세손, 순절공파, 고창상평문중 門祖, 祖 行 韓山郡守 仁興, 考 진사 謹南, 전북 순창군 쌍치면 강성산 자락의 한 마을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후손들이 일찍 世居地를 버리고 移居하여 자세한 사항은 알 길이 없다. 묘소가 강성산 상봉 甲坐에 있는 것으로 족보에 전하고 있지만 失傳하여 후손들이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官은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에 추증되었다. 淑夫人 密陽朴氏와 사이에 克良․湜 두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4-211 고창상평문중1-63 최치겸 崔致謙 1724 (경종 4,갑진) - 1793 (정조17, 계축)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 22세손, 순절공파, 순창남계(湜公후손)문중, 考 命哲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 출생, 독서에 힘써 학행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병서에 통달하고 무예가 絶倫하여 벼슬이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올랐다. 淑夫人 全州李氏와 사이에 독자 聖宗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4-231 순창남계1- 62 최봉섭 崔鳳燮 1925. 2. 6 - 무선통신사, 통신사 1급, 본명 炳燮, 29세손, 순절공파, 순창남계(湜公후손)문중, 考 判南(본명 南休), 경북 울릉군 남면 도동 출생, 울릉도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成年에 이르도록 ------ -------- ----------- 직업에 종사하였다. ----세 때 일본에 유학, 동아전기통신공업학교에 입학하여 무선통신 기술을 배우고 18세에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관립 무선 전신 강습소 實科를 마치고 귀국, 19세에 ?島의 울릉무선전신국에 들어가 해방 후 까지 여기서 통신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인천 무선전신국으로 옮겨 근무하다 다시 1951년 대한해운공사로 자리를 옮겼고 -----년 1급 통신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967년 해외 무역선박 ----호 통신사로 승선, 20년을 근무하면서 배와 함께 세계를 일주, 세계 각 국을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두루 다 여행하였다. 1986년 6월 해운공사에 정년퇴임, 42년여를 외길로 걸어온 통신사 생활을 마감하였다. 祖父때까지만 해도 전북 순창에서 부유하게 살았으나, 일제 강점기 민족이 누구나 생존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시절, 부친이 생업을 찾아 울릉도까지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이곳에서 生長하였고 해방 후 근무지를 따라 인천, 부산 등지에 이사하여 살다가, 1970년 이후 서울로 생활근거지를 옮겼고, 정년 퇴임 후 현재 서울에서 가족과 더불어 단란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남달리 뿌리의식과 일가애가 독실하여 순창의 선조 묘소를 찾아 享祀를 받들어 오고 있으며, 대종회 문중 대표로서 일가돈목과 문중사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도원서원 중건시 그 기금을 출연한 바 있으며 대동보 편찬에도 참여해 1977년 丁巳譜, 1989년 己巳譜 편찬시 수단위원으로 일한 바 있다. 金海金氏 貞任과 결혼, 슬하에 1남 惠珍과 1녀 順喜를 두었다. 족4-327 순창남계2-61 최종언 崔鍾彦 1834 (순조 34, 갑오) - 1885. 4. 8 (고종 22, 을유) 가선대부, 字 彦鎰, 26세손, 첨정공파, 완도대문(致才公후손)문중, 高祖 통정대부 日信, 曾祖 통정대부 尙昊, 祖 통정대부 致才, 考 官福, 전남 해남군 북평 출생, 學行으로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벼슬은 가선대부에 올랐다. 淑夫人 漢陽趙氏와 사이에 4자 允淇․京淇․三淇․模淇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2-310 완도대문2-60 최치재 崔致才 1785 (정조 9, 을사) - 1847. 10. 5 (헌종 13, 정미) 통정대부, 字 得午, 24세손, 첨정공파, 완도대문문중 門祖, 高祖 판관 祥燮, 曾祖 가선대부 命翮, 祖 통정대부 日信, 考 통정대부 尙昊. 전남 해남군 북평 출생, 독서에 힘쓰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벼슬은 통정대부에 올랐다. 淑夫人 全州李氏와 사이에 독자 官福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1-237 완도대문1-59 최상호 崔尙昊 1752 (영조 28, 임신) - 1848. 2. 11(헌종 14, 무신) 통정대부, 字 貴賢, 23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高祖 가선대부 弘武, 曾祖 판관 祥燮, 祖 가선대부 命翮, 考 통정대부 日信, 전남 해남군 북평 출생, 독서에 힘쓰고 學行으로 향당의 우러름을 받았다. 벼슬은 통정대부에 올랐다. 淑夫人 慶州鄭氏와 사이에 致才․致萬․致寧 세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1-237 추자도영흥3-58 최일신 崔日信 1734(영조 10, 갑인) - 1823. 8. 10 (순조 23, 계미) 통정대부, 字 陸香, 22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증조 가선대부 弘武, 조 판관 祥燮, 考 가선대부 命翮, 전남 강진군 군동면 석고 출생, 해남군 북평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학문에 힘써 벼슬이 통정대부에 올랐다. 숙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 독자 尙昊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1-237 추자도영흥2-57 최명핵 崔命翮 1702(숙종 28, 임오) - 1763. 8. 10 (영조 39, 계미) 가선대부, 字 世連, 21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문중 門祖, 祖 가선대부 弘武, 考 판관 ?燮, 전남 강진군 군동면 덕천 출생, 학문에 힘써 벼슬이 가선대부에 올랐다. 淑夫人 金海金氏와 사이에 日信․日金 형제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1-237 추자도영흥1-56 최상원 崔相元 1934. 4. 2 - 장군, 육군준장, 大韓乘馬協會 副會長, 베델物産주식회사 고문, 본명 炳完, 29世孫, 僉正公派, 완도대문(致才公후손)문중, 祖 允淇, 考 伯碌, 전남 목포 출생, 목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 6․25전란의 참상을 몸으로 체험한 그는 護國의 干城으로 조국의 수호와 민족의 생존을 지키겠다는 불타는 사명감에서 52년, 육군사관학교 4년 정규과정에 입교, 56년 제(?)기로 졸업하여 육군소위에 임관된 이래 79년 准將으로 예편할 때까지 23년여를 군인의 正道를 걸으며 그 사명에 충실해 왔다. 재직기간 동안 그는 野戰軍 소대장, 중대장, 작전주임 등을 두루 거치면서 탁월한 부대지휘능력을 발휘, 그 능력을 인정받아왔으며, 67년(당시 계급?) 자유민주능력을 인정받아왔으며, 67년(당시 계급?)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참전, 68년까지 (?)부대에 소속되어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판단력으로 각종 작전을 지휘, 수많은 대․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특히(?)전투에서 혁혁한 戰功을 세움으로써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명예를 중히 여기고 군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늘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61에는 渡美하여 美 陸軍經理學校에 입교, 지휘관리반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72년에는 주로 陸軍大學을 76년에는 국방대학을 각각 졸업, 이후 주로 軍指揮部인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주요 참모부의 중책을 역임하면서 주위의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軍 현대화를 위해 헌신해 오다가 79년 준장으로 전역하였다. (?)년 국가로부터 保國勳章 3․1章을 수여 받기도 했다. 전역후 일시 새마을金庫 연합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82년부터 韓國馬事會의 총무이사와 한국승마협회 부회장, 올림픽 승마경기장건설본부장 등의 중책을 맡아, 올림픽 경기장건설과 병행해 국가 승마대표선수 양성의 중추적 책임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승마경기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86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 승마대회 사무총장으로서 경기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승마가 이 대회에서 종합 2위의 기록적인 성과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88 올림픽대회에서도 승마경기 본부 사무총장으로서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주관함으로써 그 능력을 내외에 과시하였으며,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체육포장의 榮典을 받기까지 했다. 현재는 무역회사인 베델 物産株式會社와 한국기업연구소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가훈으로 ‘화목’을 특히 강조하는 그는 부인 興德張氏 儒子와 1자 碩均과 3녀 延僖․文僖․文瑄을 두었다. 족2-314 완도대문6-55 . 최병남 崔炳男 1947. 9. 26 - 상업, 금은방 경영, 본명 南植, 28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高祖 文人 炯善, 曾祖 효자 震燮, 祖 壬煥, 考 在勳,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고향에서 ----초등학교․----중학교를 거쳐 담양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일에 종사하다가, -세 때부터 시계 수리와 金銀 細工技術을 배워 ---년 담양읍에다 金銀房을 개업, 성실히 이를 경영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사회․정치 운동에도 관심을 보여 그는 탁월한 웅변력과 친화력, 통솔력을 바탕으로 1977년 담양군 반공연맹 청년회장을 3년에 걸쳐 역임하였고, 1979년에는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담양지역 청년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82년 서울로 이사해 종로구 예지동에다 금은 보석과 시게를 취금하는 「보광당」 금은방을 열어 현재까지 그 경영에 열중하고 있다. ----년 부터는 ----회사의 ----건축공사에 출자, 건축업에도 뛰어들 계획을 갖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생활신조로 살고 있는 그는 성품이 근면성실하고 인정이 많아 항상 이웃과 친화하며, 一家 同氣간에 화목 우애하여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다. 특히 一家愛와 爲先?誠이 남달리 독실하여 담양에서 보광당을 경영할때는 점포에다 草溪崔氏 潭陽 宗親會 현판을 걸고 사무소를 설치해 각종 門中事業에 앞장섰으며, 시골에 살고 있는 종친들이 담양장을 보러 올때면 의례 보광당에 들러 쉬어가는 것을 거르지 않았을 정도로 일가간 情誼가 각별하였다. 서울에 이사하여서도 서울종친회에 참여하여 종친회 발전기금을 쾌척한 바 있으며, 「초계최씨 700년사」편찬에도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부인 慶州李氏 永淑과 사이에 -,------,-----, ?남 ?녀를 두고 있다. 족2-472 담양봉서55-54 최일금 崔日金 1738 (영조 14, 무오) - 1788. 10. 15(정조 12, 무신) 通政大夫, 22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曾祖 가선대부 弘武, 祖 判官 祥燮, 考 가선대부 命翮, 전남 강진군 군동면 석교 출생, 만년에 북제주군 추자도 사곡리로 이사하여 초당을 짓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벼슬은 통정대부이다. 淑夫人 金海金氏와 사이에 尙堤․尙善 두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1-239 추자영흥7-53 최상제 崔尙堤 1754 (영조 30, 갑술) - 1804. 10. 13 (순조 4, 갑자) 가선대부, 23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高祖 가선대부 弘武, 曾祖 判官 祥燮, 祖 가선대부 命翮, 考 통정대부 日金, 전남 강진군 군동면 석교 출생, 어려서 부친을 따라 북제주군 추자도 사곡리로 이사하여 부친의 초당에서 독서에 열중하며 어버이를 至孝로 섬겨 효도를 다하니 世人들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벼슬은 가선대부에 올랐다. 貞夫人 김해김씨와 사이에 致孫․致啓 두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1-239 추자영흥8-52 최치계 崔致啓 1785 (정조 9, 을사) - 1845. 10. 15 (헌종 11, 을사) 오위장, 24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高祖 判官 祥燮, 曾祖 가선대부 命翮, 祖 통정대부 日金, 考 가선대부 尙堤, 북제주군 추자도 사곡 출생, 독서에 열중하며 어버이를 잘 섬겼으며, 武人의 기상이 있었다. 벼슬은 五衛將을 지냈다. 淑夫人 昌原黃氏와 사이에 德福․信福․富福 세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1-239 추자영흥10- 51 최덕복 崔德福 1810(순조 10, 을사) - 1855. 7. 30 (철종 6, 을묘) 副司果, 25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高祖 가선대부 命翮, 曾祖 통정대부 日金, 祖 가선대부 尙堤, 考 오위장 致啓, 북제주군 추자도 사곡 출생, 학문에 힘썼고 武藝가 출중하여 武科에 급제하였다. 官은 副司果를 지냈다. 淑人 潁陽千氏와 사이에 독자 鍾元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1-239 추자영흥12-50 최정봉 崔正鳳 1933. 11. 15 - 기업인, 주식회사 삼정스트렌드콘사장, 본명 炳道, 29세손, 첨정공파, 추자도영흥(命翮公후손)문중, 祖 學奎(본명 亨淇), 考 孟休, 전남 진도군 고군면 원포 출생, 향리에서 진도 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중학교․광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上京하여 自力으로 경희대학교 경상대학 ---학과를 졸업하였다. -세때 -에 뛰어들어 ----일을 하였고, ----년 부터는 교량공사용 철강자재를 생산하는 「주식회사 삼정스트렌드콘」을 창업,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시켜 관련업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스케일(scale)이 크며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지녀, 스스로 섬마을에 정체해 있기를 거부, ?島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보다 큰 세계를 향해 해남․광주․서울로 그 삶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苦學으로 중․고․대학을 졸업하였을 정도로 성취욕과 의지력이 강하였다. 그는 또 기업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세계적인 것을 추구, 일본을 세 차례나 여행하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네덜란드, 스위스 등을 두루 여행하는 등, 꾸준한 해외여행을 통해 선진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혀오고 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를 생활신조로 자기관리와 자녀교육에 엄격하며 책임감이 강하고 근면 성실한 성품으로, 어버이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92세의 鶴首 모친을 효봉하고 있다. 全州李氏 恩卿과 33세때 결혼, 슬하에 1남 哲奎와 2녀 素英, 希夙을 두어 모두 명문대학을 졸업시켰다. 추자영흥52-49 최용립 崔龍立 1608 (선조 41, 무신) - 1684. 3. 7 (숙종 10, 갑자) 贈 通政大夫, 字 景龍, 17세손, 어모공파, 순창내동문중 門祖, 高祖 文節公 山斗, 祖 贈通政大夫 同副承旨 宗彦, 考 禦侮將軍 聖麟, 순창 인계 출생. 先世의 뜻을 조차 벼슬에 뜻을 버리고 林泉에 娛遊하며 글읽기에 힘썼다. 후에 통정대부에 贈職되었다. 淑夫人 光山 金氏와 사이에 독자 忠亨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4-134 순창내동1-48 최진호 崔鎭鎬 1941. 7. 30 - 경찰공무원, --(현직급), 본명 鎭休, 28세손, 禦侮公派, 순창내동(龍立公후손)문중, 祖 應先, 考 福男(在男),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출생, 순창동초등학교․순창중학교를 거쳐 순창농고를 졸업, 향리에서 힘써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가난을 이기기 어려웠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세 때 경찰공무원 시험에 응시․합격하여, ---년 -------경찰서에 첫 발령을 받아 경찰직에 투신하였다. ----년 서울 -------경찰서로 옮겼고, 이후 서울 경찰청 관내 각급 경찰서에 순회 근무하면서 -----년여를 경찰공무원으로서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사명을 다해오고 있다. ----년 ------로 진급하였고, ------한 공적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근면 성실하며 外柔內剛한 성품으로 일가․동기간 화목하면서, 어버이를 誠孝로써 섬겨오고 있으며, 친구나 이웃 간에도 情誼가 두터워 신망을 받고 있다. 각 종 운동에도 능하여 못하는 운동이 없으며 특히 유도는 ---단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30세 때 星山 裵氏 淑子와 결혼, 兩親을 奉養해왔으며 슬하에 眞梨, 潤河․允瑞 세 딸을 두고 있다. 족4-173 순창내동7-47 최순의 崔順儀 1726 (영조 2, 병오) - 1782. 1. 15(정조 6, 임인) 淳昌竹田 入都祖, 字 孝深, 22세손, 첨정공파, 순창죽전문중 門祖, 고조 通政大夫 宇晟, 증조 洪武 조 祥仁, 考 國慶, 전남 담양군 남면 鶴亭 출생, 담양에서 성장하다가 순천에 移居한 후, 다시 전북 순창군 풍산면 죽전리로 이사하여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이후 후손들이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뿌리를 내리고, 초계최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부인 昌寧 曺氏와 사이에 興燁․日燁․宗燁 세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순창군지】 【후손: 】 족1-169 순창죽전3-46 최종철 崔鍾鐵 1941. 8. 12 - 화가, 본명 炳大, 29세손, 첨정공파, 순창죽전(順儀公후손)문중, 考 東植(본명 識休), 전북 순창군 풍산면 죽전 출생, --------목원대학교 미술대 회화과 졸업, -----년부터 ------에서 -------영농, 미곡상, --------등등을 하면서 작품활동에 열정을 쏟아오다가, -----년 서울 역삼동에 「모뉴망 미술학원」을 열어 운영하면서 후진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작품 활동에 몰입하고 있다. --------------26세때 全州李氏 春金과 결혼, 편모를 孝奉하면서, 슬하에 2남 聖培, 龍培와 1녀 榮夏를 두고 있다. 족1-494, 순창죽전4-45 최형선 崔炯善 1839(헌종 5, 기해) - 1914. 1. 7 文人, 字 士賢, 호 友石, 24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高祖 嘉善大夫 大岌, 曾祖 사헌부감찰 順明, 祖 통정대부 淙信, 考 가선대부 호조참판 延黙, 담양군 금성 봉서 출생, 天稟이 총명 영특하여 문장이 일찍 進就하였으나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林泉을 娛遊하며 淸閑한 삶을 즐겼다. 부인 羅州 林氏와 사이에 震燮․震必․震鳴 3남을 두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懿行으로 世人의 推重을 받았다. 【문헌:초계최씨 족보】 【후손: 】족2-430 담양봉서26-44 최진섭 崔震燮 1861 (철종 12, 신유) - 1909. 2. 6 효자, 字 德峻 호 一山, 25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高祖 사헌부 감찰 順明, 曾祖 통정대부 淙信, 祖 가선대부 호조참판 延黙, 考 문인 炯善. 담양군 금성 봉서 출생, 평생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고 두 아우와 우애가 독실하여 世人의 推重을 받았다. 부인 淳昌 薛氏와 사이에 壬煥․甲煥 두 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족2-430 담양봉서27-43 최진필 崔震必 1866 (고종 3, 병인) - 1911. 12. 23 文人, 字 命燮 호 九鶴, 25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高祖 사헌부 감찰 順明, 曾祖 통정대부 淙信, 祖 가선대부 호조참판 廷黙, 考 문인 炯善, 담양군 금성면 봉서 출생, 형 震燮․아우 震鳴으로 더불어 형제 우애하며 어버이를 誠孝로 섬겨 閭里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세속 名利를 구하지 않고 林泉에 娛遊하며 風月을 읊조렸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슬하에 독자 太煥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2-430 담양봉서28-42 최진명 崔震鳴 1879(고종 16, 기묘) - 1944. 7. 6 莊陵參奉, 字 聲述, 호 問松, 25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高祖 사헌부 감찰 順明, 曾祖 통정대부 淙信, 祖 가선대부 호조참판 廷黙, 考 문인 炯善. 담양군 금성 봉서 출생, 독서에 힘썼고 震必․震燮 두 형으로 더불어 형제 우애하며 어버이를 至孝로 섬겨 閭里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벼슬은 정릉참봉을 지냈고 슬하에 독자 斗煥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 족2-431 담양봉서29-41 최치봉 崔致鳳 1720 (숙종 46, 경자) - 1797. 5. 13 (정조 21, 정사), 嘉善大夫, 字 瑞仁, 21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考 大成, 전남 담양 금성 태생, 학문에 힘쓰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벼슬이 가선대부에 올랐다. 貞夫人 達城徐氏와 사이에 日三․應三 두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 】족2-434 담양봉서 21-40 최현수 崔鉉洙 1942. 10. 20 - 상업, 본명 共植, 28세손, 첨정공파, 담양봉서(景立公후손)문중, 考 升萬(본명 在升), 전남 담양 금월 출생,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담양에서 금성초등학교와 담양중학교를 졸업한 후, 17세 때 일자리를 찾아 상경하여 벽돌공장에서 노동일을 하였다. ----년 공장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에 힘썼으나 가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세 때 다시 상경하여 ----에서 그릇 장사에 뛰어들어 ---년여를 이에 종사하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몸을 다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상당한 재산을 모아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고 --세 때 다시 업종을 전환하여 양천구 목동에서 당구장을 개업, 自營하고 있다. 근면하고 생활력이 강하며 책임의식이 투철하여 自手成家로 가난을 극복하고 가정적 행복을 일궈낼 수 있었다. 모친 병환 중에는 저축한 돈을 털어 가지고 내려와 지성을 다해 간병하니 이웃이 그 효성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가․동기간 우애가 자별하여 남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金海金氏 香子와 27세에 결혼해 슬하에 英在․英完․英華 세 아들을 두었다. 족2-483 담양봉서64-39 최우춘 崔宇春 1634 (인조 12, 갑술) - 1686. 3. 15 (숙종 12, 병인) 贈嘉善大夫, 字 承九, 18세손, 첨정공파, 승주죽청문중 門祖, 祖 훈련원첨정 得麟, 考 호조참판 好立, 승주 낙안에 入都하여 家基를 세웠다. 독서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하여 향당의 우러름을 받았고 가선대부에 贈職되었다. 부인 江陵 劉氏와의 사이에 楠武․源武․循武 세아들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갑구】 족1-133, 승주죽청 10-38 최남무 崔楠武 1648 (인조 26, 무자) - 1707. 8. 6 (숙종 33, 정해) 通政大夫, 字 君瑞, 19세손, 첨정공파, 승주죽청(宇春公후손)문중, 조 호조참판 好立, 考 嘉善大夫 宇春, 승주 낙안에서 살았다. 학행으로 이름이 있었고 벼슬은 통정대부에 올랐다. 부인 坡平尹氏와의 사이에 1남 汝柱와 두딸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영근】족1-133 승주죽청9-37 최시만 崔時萬 1684 (숙종 10, 갑자) - 1743. 7. 5 (영조 19, 계해) 通政大夫, 字 元五, 21세손, 첨정공파, 승주죽청(宇春公후손)문중, 증조 嘉善大夫 宇春, 祖 通政大夫 楠武, 考 汝柱, 승주 낙안 출생. 학문이 고매하고 懿行이 있어 향당의 推重을 받았다. 벼슬이 통정대부에 올랐다. 부인 晋州姜氏와의 사이에 獨子 處大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영근】 족1-133 승주죽청8-36 최갑구 崔鉀九 1925. 3. 17 - 鑛山業, 農業, 본명 炳九, 29세손, 첨정공파, 승주죽청(宇春公후손)문중, 考 金岩(본명 金休), 전남 승주군 서면 운평 출생.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에 종사하였다. ----세 때 광산업에 뛰어들어 순천에서 金鑛을 경영, 採金으로 경제적 기반을 잡았다. 그러나 매장량이 한계에 달해 더 이상 採鑛이 어려워져 광산을 폐광하고, --세 때 다시 향리로 돌아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농에 힘쓰고 있다. 근면․관후하며 崇祖愛族 정신이 남달리 강한 성품으로 일가․동기간 화목에 힘쓰며, 爲先事나 門中事에 지대한 열성을 갖고 일해오고 있다. 오래 전부터 新齋 中祖를 享祀하는 鳳陽祠 別有司를 맡아 매년 광양 유림으로 더불어 그 祭享을 주관해 오고 있으며, 21世 時萬 선조의 후손들인 昇州 西面 門中의 門長으로 일가돈목과 문중의 발전을 위해 誠力을 경주하고 있고, 도원서원 享祀나 광양 도선산 중시조 묘소 時祭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후손의 도리를 다해 오고 있다. 大同譜 丁巳譜․己巳譜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단위원으로 일한 바 있다. 淸州韓氏 善心과 결혼하여 死別하고 晋陽 鄭氏 斗伊와 재혼하였다. 슬하에 泳根․泳先 2남과 泳心․泳子․泳仁․泳瀾 4녀를 두었다. 족1-776 승주죽청7-35 최영근 崔泳根 1947. 10. 8 - 군인, 육군중령, 본명 泳基, 30세손, 첨정공파, 승주죽청(宇春公후손)문중, 父 鉀九(본명 炳九), 전남 승주군 서면 운평 출생, ---------------경남대학교 경영 대학원 졸업. ---------------------- 부인 전주이씨 賢子와의 사이에 2남 赫桓․赫埈을 두었다. 족1-776, 승주죽청6-34 최성주 崔成周 1919. 2. 19 - (대표적 직업) 본명 在周, 호 春坡, 27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宇晟公후손)문중, 考 鳳秀, 전남 승주군 송광 이읍 출생. ----------------------爲先精誠이 지극하고 宗中事業에 앞장서 가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 6남 大羽․大圭․大輝․大日․大鉉․大勳과 2녀 順熙․慶熙를 두었다. 족1-200 승주이읍17-33 최대규 崔大圭 1937. 9. 13 - 언론인, 조선일보 기자, 농민신문 논설위원,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宇晟公후손)문중, 父 成周(본명 在周), 전남 승주군 송광 이읍 출생. 순천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196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 조선일보사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 주로 ---부 기자로서 ----문제(사건)들을 보도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내면서 18년 동안 조선일보사에 재직하였다. 1983년 농협중앙회에서 발행하는 농민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언론인으로서 그의 오랜 관심사였던 한국의 농촌문제를 연구하며 농업정책을 제시하는 등 농민의 권익신장과 농촌발전에 헌신하고 있다. 또 1993년부터 농림수산부 농림수산 정보센타 「월간마을」 편집주간을 맡아 -------활동으로 농어촌 발전에 이바지 해 오고 있다. 청렴 강직하며 대쪽같은 성품으로 불의를 蛇蝎視하며 권력에 굽힘이 없이 정론․직필로 언론인의 大道를 걸어왔으며, 특히 농촌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같고 언론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년 -----(목적, 동기)로 -------------(미국,유럽,동남아,남미) -------------(방문지역)를 여행하며 세계 각국의 -------------문제들을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또한 가문의식과 一家愛가 남달리 강해 1977년 신재선조 배향 서원인 도원서원 복건에 앞장섰으며, 1987년 서울 종친회 창립시에도 일가찾기 운동을 펴 종친회 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서울 종친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고, 「초계최씨 700년사」편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부인 德壽李氏 春子와의 사이에 1남 康民과 2녀 賢庭․賢珍을 두고 있다. 족1-299 승주이읍16-32 최상휴 崔相休 1938. 7. 26 - 공무원, 체신 기능직, 字 國男,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宇晟公후손)문중, 父 在日. 전남 승주군 송광 이읍 출생.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이읍초등학교와 이읍중학교를 졸업한 후, --세 때 상경하여 미군부대에서 ---년여를 근무한 후, 고향에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던 중, ----년 체신 기능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년 고향인 송광 우체국에 첫 발령을 받아 5년여를 근무하였고, ----년 광주우체국으로 옮겨 현재까지 25년여를 체신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근면 성실하며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직장에서는 相敬相愛하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고 있으며, 가정적으로는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일가간 서로 돈목하면서, 守分自足하며 세 아들을 잘 가르쳐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특히 숭조애족 정신에 투철하여 여러 爲先事業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선조 유적지를 자주 찾아가 보살피고 도선산 시조묘 시향에도 성실히 참례하고 있다. 부인 濟州 梁氏 鳳牙와 사이에 炳化․炳旻․炳琸 세 아들을 두었다. 족1-307 승주이읍15-31 최성현 崔成炫 1957. 7. 20 - -----학 석사, -------------------조선대학교 대학원 졸업 ------------------- 고령신씨 玉과 혼인하여 1자 珉碩과 1녀 熙를 두었다. 족2-635 순창건곡107- 30 최종렬 崔鍾烈 1929. 7. 21 - 군인, 무공수훈 국가유공자, 운수업, 범한정기화물 광주영업소장, 본명 暎秀, 호 鍾山, 26세손, 첨정공파, 순창건곡(生立公후손)문중, 考 時浚, 전북 임실 운암 출생. 일제 식민치하의 혹독한 수탈정책으로 민족의 생존이 위협받던 수난의 시대에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세 때 생존을 위해 姉兄-----를 따라 만주까지 유랑해 滿州國 佳木斯市에 정착, 자형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和光普通學校와 畜産중학을 졸업하고, 만주 국제운수주식회사에 취직하였다가 그만두고 다시 만주척식공사에 들어가 일하던 중,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곧바로 자형과 함께 귀국, 충북 괴산군에서 1년여를 ----일을 하면서 생활하다 그만두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운암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은 당시 ------------移民 바람이 불어 ------삶의 조건이 열악한 ------공사장 생활이었고 그나마 일자리조차도 없었다. 할 수 없어 행상을 하며 이곳 저곳을 떠돌아 보았지만 여의치 못해, 우선 국방의무부터 마치고 볼 요량으로 ----년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그러나 군 생활조차도 10여년을 낯선 이국 땅에서 극도의 시련 속에서 삶을 지탱하다 돌아온 그에게 조금의 안정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은 당시 민족이 좌․우익 진영으로 따로 정부를 세워 민족이 분단․대립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 ------------ 마침내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그는 대한민국 정부군의 일원으로 국가 수호를 위해 북한 공산군과 전장에서 맞서 생사를 건 전투를 수행하여야 했다. 전쟁중 그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정부로부터 金星花郞武功勳章을 받았다. ---- 전역후의 생업 및 사회활동 사항 ----대종회 활동 및 대종회부회장 역임------ 부인 밀양박씨 英子와의 사이에 3남 成炫․成旭․容準과 3녀 銀姬․銀美․銀寧을 두었는데 3남 3녀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켜 훌륭하게 성취시켰다. 족2-635 순창건곡 106-29 최계명 崔啓命 1751 (영조 27,신미) - 1832 (순조32, 임진). 7. 16 贈 通政大夫, 21세손, 첨정공파, 순창건곡(生立公후손)문중, 증조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載重, 祖 가선대부 호조참판 善榮, 考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爾昇, 순창군 유등 건곡 출생, 學行으로 이름이 있었다. 官은 증 통정대부이다. 淑夫人 晋州康氏와의 사이에 鎭哲․鎭實․鎭煥 3子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鍾烈】 족2-553 순창건곡72-28 최이승 崔爾昇 1699 (숙종 25, 기묘). 5. 20 - 1768(영조44,무자).1.3 崇政大夫, 同知中樞府事 兼 五衛將, 字 升及, 20세손, 첨정공파, 순창건곡(生立公후손)문중, 증조 僉知中樞府事 生立, 祖 절충장군 行 용양위부호군 載重, 考 嘉善大夫 戶曹參判 善榮, 순창군 유등면 건곡 출생으로 선세로부터 벼슬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 학행을 힘써 닦아 관작이 승정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올랐다. 貞夫人 順興安氏와 사이에 啓昌, 啓命, 啓垣, 啓震 4子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 】 족2-535 순창건곡7-27 최정주 崔程柱 1938. 7. 21 - 실업가, ----대표, 본명 炳柱, 29세손, 첨정공파, 승주오봉(命益公 후손)문중, 祖 在淑, 父 允植, 승주군 송광 오봉 출생.----------- -----------학력 및 경력사항--------------- 부인 밀양박씨 炅美와 해로하여 슬하에 2자 埈基․湜榮과 1녀 周美를 두었다 족1-362 승주오봉6-26 최윤식 崔允植 1913. 10. 20 - 철학자, 字 翼華, 호 後齋,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오봉(命益公 후손)문중, 考 在淑, 승주군 송광면 오봉 출생. ---------일본제국대학 철학과 졸업 ------------------------ 경력사항 ---------------------------- ----부인 김해김씨 姬順과 해로하여 슬하에 3남 程柱․程儀․程南과 4녀 英子․叔子․英順․淑喜를 두었다. 족1-362 승주오봉5-25 최완식 崔完植 1911. 7. 9 - ( 직 업 ) 字 翼鳳, 호 岑齋,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오봉(命益公 후손)문중, 考 在淑, 승주군 송광 오봉 출생. ------------------- -----학력, 경력사항 ------ 대종회 활동 사항, 대종회 적벽상 수상--------------- 부인 전주이씨 貴順과 해로하여 슬하에 4자 國信․程洙․珵奎․程奐과 4녀 愛禮․玉順․順德․春子를 두었다. 족1-360 승주오봉 4-24 최국신 崔國信 1935. 2. 2 - ( 직 업 ) 본명 炳國, 29세손, 첨정공파, 승주오봉(命益公 후손)문중, 祖 在淑, 父 完植, 승주군 송광 오봉 출생. -------------- --- 학력․경력 사항 --------- 부인 玉川趙氏와의 사이에 2자 復基․閔基와 1녀 善俚를 두었다 족1-360 승주오봉3-23 최정수 崔程洙 1939. 2. 20 - 1971. 3. 11 군인, 육군중령, 본명 炳洙,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오봉(命益公 후손)문중, 祖 在淑, 父 完植, 승주군 송광 오봉 출생. 어려서 ---------------------------학력․경력 사항 -------- 군인으로 순직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게 된 경위---- 부인 旌善全氏 仁淑과의 사이에 2남 秦基․容基와 1녀 明雅를 두었다. 족1-360 승주오봉2-22 최정규 崔珵奎 1944. 7. 3 - 군인, 육군중령, 국방부 군사문제연구위원, 본명 炳奎,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오봉(命益公 후손)문중, 祖 在淑 父 完植, 승주군 송광 오봉 출생, 향리에서 송광국교․주암중학을 마치고 광주에 유학, 광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선택, -----------년 육군대학교에 입교하였다. ----년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에 임관한 그는 장교로서 야전군 소대장․중대장을 거쳐, 육군대학 보안과장, 5사단 정보참모, 육군본부 儀仗隊長, 31․32사단 대대장, 2군 훈련소 군수참모, 육군사관학교 본부대장 등 군 주요보직을 두루 역임, 1987. 3. 육군중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23년여를 군인의 正道를 걸으며 군 발전과 국토방위에 헌신하였다. 체격이 碩大하고 성음이 우렁차며 활달․상쾌한 성품으로 친화력이 뛰어나고 지휘․통솔력이 강하며, 운동에 있어서도 그의 특기종목인 테니스는 물론, 럭비․배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다능하였다. 그는 이러한 성품과 활동력, 추진력을 바탕으로 23년간의 군생활을 통해 대통령표창․국방부장관표창(2회)․육군참모총장표창(3회)․군사령관 표창(3회)․군단장표창(5회)․사단장표창(12회)․ 등 26차례나 각종 표창을 받았을 정도로, 군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던 의욕적이고 창의적인 군인이었다. 1987년 전역과 동시에 국방부 군사문제연구위원회 연구위원으로 발탁되어 현재까지 정책분야 군사문제 연구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그간 「특기병 교육제도 발전 방안」․「참모업무체계 정립」과 같은 연구서를 내놓은 바 있다. ---년에는 ----일로 월남을 여행한 바 있다. 그는 또 ?祖愛族?識이 투철하여 그간 여러 爲先事業에 적극 참여하고 一家敦睦에 앞장 서왔으며, 특히 초계최씨 서울 종친회 창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년여에 걸친 일가찾기를 하여 서울 각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230여 세대의 일가를 모으는 데 성공, 1987년에 최영철(30세손, 당시 ----장관?)을 회장으로 추대해 서울 종친회를 창립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서울종친회 총무를 맡아 宗會 발전과 일가간 상부상조활동에 힘써오고 있으며, 「초계최씨 700년사」 편찬에도 물심양면으로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부인 淸州韓氏 和子와 사이에 1남 亨栗과 3녀 璟姬,貞姬,璟美를 두고 있다. 족1-361 승주오봉1-21 최석태 崔錫泰 1946. 3. 27 - 기업가, 육영사업가, 춘태산업주식회사 사장, 학교법인 춘태학원 이사장, 본명 鉉泰, 호 仁齋, 31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祖 炳釵, 考 重基, 전남 승주군 석곡 출생.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광주에서 성장하면서 초․중․고․대학까지를 마쳤다. ----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상경, 동대문구 휘경동에 ---------春泰産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 학력 경력 사항 --------------------------------- 부인 김해김씨 慶順과의 사이에 1자 元浩와 2녀 元一․元二를 두었다.--- 족2-386, 승주운용6-20 밀양박씨 密陽朴氏 1809(순조9,기사) - 1874(고종11,갑술) 1.11 孝烈婦, 贈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崔時達(25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 문중)의 처, 천성과 행실이 곧고 맑아 남편을 잘 받들고 시부모를 至孝로써 섬겼다. 시어머니가 병이 깊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그 오줌을 맛보아 病症을 검사하고 정성을 다해 간병하는 한편, 시어머니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게 해주도록 북두칠성에게 빌기를 지성으로 하였으나, 마침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에 미치자 애통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또 先妣의 삼년상을 겨우 마치고 夫君이 갑자기 세상을 버리기에 이르자 급히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회생시켜 이틀 동안이나 命을 잇게 하니 閭里가 다 그 孝烈을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遺子 學鎭을 잘 길러 삼대 독자의 가문에 嗣續을 끊이지 않게 하였으니, 그 孝烈의 큼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뒤에 孝烈婦의 旌褒가 있었다. 이 사적이 家譜에 기록되어 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炳淑】 족1-150 승주운용2-19 최시달 崔時達 1807(순조7, 정묘) - 1832(순조32, 임진). 6. 15 贈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字 幸元, 25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高祖 효자 命大, 증조 致三, 조 聖南, 考 昌寬, 곡성 석곡 출생, 부인 孝烈婦 密陽朴氏와 더불어 어버이를 誠孝로써 섬겼다. 부모 喪을 마치고 얼마 안되어 불행히 25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다. 官은 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이다. 밀양박씨와의 사이에 1子 學鎭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炳淑】 족1-149 승주운용 1-18 최경휴 崔敬休 1879(고종16,기묘) - 1955. 6. 19 行 敦寧府都正 兼 承政院同副承旨, 字 昌淳, 호 雲史,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祖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時達, 考 行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泰洙, 전남 승주 석곡 출생. 學行이 고매하여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벼슬은 行 敦寧府都正 兼 承正院同副承旨에 올랐다. 配 貞夫人 金海金氏, 室 淸州韓氏와의 사이에 炳釵, 炳壽, 炳述, 炳祥, 炳坤, 炳淅 6子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 錫泰】 족1-311 승주운용4-17 최태수 崔泰洙 1858 (철종9,무오) - 1922 (임술)10.4 行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一名 基錫, 字 汝善, 호 農隱, 27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祖 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 時達, 考 學鎭, 전남 승주 석곡 출생, 학문에 힘써 벼슬이 行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올랐다. 家譜에 기록되어 있기를 “천성이 인자하여 평생 어버이를 섬기며 덕을 닦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大聖文學院에서 「孝康」이라는 私諡를 奉呈하였다. 淑夫人 恩津宋氏와의 사이에 獨子 敬休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 錫泰】 족1-311 승주운용3-16 최병숙 崔炳淑 1943. 2. 22 - 韓醫師, 因果院 院長, 호 問溪, 29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祖 左承旨 泰洙, 考 奉休, 곡성군 석곡 출생, 8세 때 從叔 崔敬休의 주선으로 광주로 유학, 그 해 광주 학강초등학교에 입학, ---년 졸업하고, ----년 광주 남중학교를 거쳐, ----년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從兄 崔炳釵의 因果院에서 한약학과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전국의 저명 한의사들을 심방하여 醫術을 수련, ----년부터 종형의 뒤를 이어 인과원 원장으로서 仁術을 펴오고 있다.------------------------- ---------경력 및 대종회 활동 및 대종회장 역임 ------------------------------ 부인 전주이씨 命信과의 사이에 1남 南基와 2녀 美蘭․美貞을 두어 모두 훌륭히 교육하여 성취시켰다. 특히 아들 남기는 -----학력사항---한의학을 공부하여 부친의 뒤를 이어 仁術을 펼치고 있다. 족1-319 승주운용 10-15 최남기 崔南基 1964. 6. 10 - 韓醫師, 因果院 院長, 30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曾祖 左承旨 泰洙, 祖 奉休, 父 韓醫師 炳淑. 곡성군 석곡 출생,-- ----------학력, 경력, 혼인 사항---------------------------------------------- ----- 족1-319 승주운용 11- 최병채 崔炳釵 1907. 5. 9 - 1987. 5. 16 韓醫師, 育英事業家, 因果院 院長, 春泰學園設立者, 字 宰佑, 호 春潭, 29세손, 첨정공파, 승주운용(致三公후손)문중, 祖 左承旨 泰洙, 考 敬休, 곡성군 석곡 출생,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 수학 중 승주보통학교에 나가 新 敎育을 받았다. 12세때 ----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에서 -----을 공부하고 ---세때 ----주선으로 중국에 가 ---에서 ----을 공부하고, ---세 때 만주로 가 ----에서 -------을 공부하여 중국의 醫學․鍼灸學과 같은 의술을 배워 정통하고, 또 儒佛道 三敎 哲學을 섭취한 후 20세에 귀국, 광주시 양재동에 因果院을 설립, 의료사업을 하면서 신묘한 의술로 수많은 환자를 치료, 완쾌시킴으로써 名醫로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는 이러한 의료사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년 ------建學理念으로 春泰學園을 설립, ----년 春泰中高等學校를 ---에 -----규모로 설립하였고, 이어 -----년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를 -----에 -----규모로 설립하였고, 향리인 곡성군 석곡에도 ---년 ----규모의 석굑초등학교를 설립, ----에 기부하였고, 또 ----년 화순 -----에 화순신농중학교를 설립 -----에 기부하였다. ------------------------의술, 육영, 대종회활동, 사회활동 -------------------- 부인 達城徐氏 順德․광산김씨 喜葉과의 사이에 1자 重基와 3녀 七南․九南․三南을 두었다. 족1-311 승주운용5-14 최환휴 崔還休 1924. 12. 4 - 교육자, 승주 낙안초등학교 교감, 호 松泉,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在善, 승주군 송광 이읍 출생. 근면 성실한 성품으로 어버이의 家風을 이어 어릴 때부터 양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이 남다른 바가 있었다. ----년 송광공립보통학교에 입학, --------년 졸업한 후, 고향을 떠나 광주에서 6년여를 ----하며 지냈다. -----동기로 교육에 뜻을 두어 교사가 되기 위해 독학으로 교사자격 시험을 준비하여, ----년 전라남도 시행 초등학교 교사선발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년 문교부 시행 초등학교 준교사 시험에 합격, -----년 향리인 송광 이읍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교직에 첫발을 디뎌놓았다. 이후 그는 승주․여천․고흥군 관내 각 초등학교에 순환 근무하면서 時俗의 名利에 초연한 채, 오직 교사가 서야할 곳은 아동들이 있는 교실일 뿐이라는 신념 하나로 -----년여를 교단교사로 자족하며, 인간교육․생활예절 교육․과학교육의 실천에 평생을 바쳐왔다. ---년 교감에 승진하여 -----하다가, -----년 승주 낙안초등학교 교감을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그는 평생 근면․성실․봉사를 신조로 삼아왔으며, 40여년을 청렴하게 외길 교육인생을 살아오면서 교육현장에서 이를 실천궁행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을 강조하며 師弟同行의 교육을 垂範하여 교육동료들은 물론 제자들과 지역사회 학부모들로부터도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는 교직에 재직하는 동안 ----의 공로로 -----년 문교부장관상을 받았고, ----년 대한교육연합회장 표창을 받은 바 있으며, 1990. 2. 정년퇴임식전에서는 40여년을 교육 외길을 걸으며 2세 교육에 헌신해온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다. 교직에서 은퇴한 후 그는 향리에서 손수 영농을 하며 전원의 청한한 삶을 즐기는 한편, 九旬老母를 孝養하면서 선조의 유덕을 지켜나가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아 힘써나가고 있다. ----년 일본, 대만을 여행한 적이 있다. 부인 忠州池氏 愛心과의 사이에 4남 炳浩․炳容․炳允․炳斗와 3녀 錦淑․賢淑․孝淑을 두었다. 족1-304, 승주이읍 14-13 최재선 崔在善 1905. 5. 27 - 1986. 2. 28 농업, 효자, 字 仕振, 호 松岩, 27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雲秀, 승주군 송광 이읍 출생, 어려서부터 才華가 뛰어나 英材의 칭예가 있었고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일가에 대한 공경이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글자를 익히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농사일을 돌보면서도 晝耕夜讀으로 학문에 힘써 15세에 이미 論語 등 經書類를 두루 통독하여 학문이 진취하였고, 이로써 隣里에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學行一致를 修己의 근본으로 삼아 兩親을 至孝로 봉양하였으며, 慈親께서 일찍이 失明하시자 더욱 섬기기를 극진히 하여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며, 이렇게 하기를 1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진실로 出天의 효가 아니면 이 같을 수 가 없었다. 또한 숙부모가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고독하게 살고 있으므로 친부모와 한가지로 숙부모께 효성을 다하여 섬기니 鄕黨이 그 효행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經史書를 두루 섭렵하여 博學疆記하였고 특히 禮學에 정통하여 日帝植民 치하에서 민족이 질곡 가운데 고통받고 있을 때나, 해방 후 좌․우익 의 대립과 혼란,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學行一致로 禮를 실천궁행하여 모범을 보이는 한편 이를 가르치고 권장하여 향리의 禮俗을 지켜나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마을 사람들이 冠婚喪祭를 당하여 禮節節次를 물어올 때면 반드시 그 집에 나가 執禮를 맡아 시범하며 자상하게 이를 가르쳐 주었으며, 후생들의 생활예절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갖고 가르치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또 매년 겨울철 農閑期에는 마을에 서당을 열어 私財로 후생들에게 漢學을 가르쳐 후세교육에 열중하였고, 자제나 후생들에게 항상 근면절약할 것과 예의와 염치를 알아 처신을 바로 할 것을 가르치니 鄕民들이 다 그를 선비로 推重하였다. 爲先精誠과 宗族愛가 독실하여 평생 향리에 있는 문절공 신재선조 不兆廟 享祀를 주관해 왔으며, 도원서원․봉양사․학사대 등 선조 유적들을 수시 歷覽하며 보살피고 광양의 도선산 時祭에도 빠짐없이 참례하여 효손의 도리를 다하였다. 家譜에는 “어려서부터 양친을 善養하였고, 慈親이 失明하자 돌아가 실 때까지 10년을 한결같이 孝養하기를 더욱 극진히 하였으며, 숙부를 섬기기를 親父같이 섬기니 향당이 다 그 효를 칭송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부인 羅州林氏와의 사이에 2남 還休․大仁과 2녀 ,福心․春心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 還休】 족1-304 승주이읍13-12 최원명 崔元明 1905. 6. 27 - 1982. 3. 28 교육자, 승주 이읍초등학교 교장, 순천시교육위원, 본명 炳基, 29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春京(본명 善休). 승주군 송광 이읍 출생. 어려서 매우 총명 성실하였으며 어버이께 효성이 지극했고 일가 동기간 우애가 자별하였다. 교육에 뜻을 두어 광주사범학교에 입학, 1924.졸업 후 그 해 4월 전남 고흥초등학교 訓導를 시작으로 교직에 투신하여 민족교육에 헌신하였으며, 해방 후 1945.10. 송광 이읍초등학교 교장에 취임, 이후 승주 상사국교․보성 복내국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30여년을 교육 외길을 걸으며 향토에서 2세 교육과 한국 초등교육의 발전을 위해 진력하다, ----년 ----초등학교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은퇴하였다. 교직에 종사해온 동안 그는 일제 치하에서는 민족의식을 일깨워 문맹퇴치 교육에 앞장섰으며, 해방 후에는 초창기 한국 초등교육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는 한편, 일선학교 교장으로서 특히 국민 생활개선 교육, 예절교육․과학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교육공로 표창을 받았다. 지역사회 발전에도 앞장서 향리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교육계에서 은퇴한 후 향읍인 송광면에서 ----년과 ----년 면의원에 두 차례나 피선되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진력하였다. 또 지역사회 교육계의 원로로서 ----년부터 순천시교육위원회 교육위원과 동위원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교육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그는 종족애가 남달리 두터워 평생 일가돈목과 종족의 발전에 힘써왔으며 爲先誠心으로 도선산 時享과 신재선조를 모신 도원서원 享祀에 빠짐없이 참례하고 선조유적을 보살피는 일에도 앞장서 우리 초계최씨 대종회가 가문창달에 기여한 공이 현저한 종친에게 수여하는 「赤壁賞」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종회 부회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면서 문중발전에 기여하였다. 항상 온화하고 정직하며 양보와 도량이 넓은 성품으로 종족간에는 물론 지역사회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었다. 부인 珍原朴氏 東心과의 사이에 3남 相圭․文圭․夏圭와 2녀 南姬․南淑을 두었다. 족1-272 승주이읍12-11 최상업 崔祥業 1686(숙종12, 병인). 1. 29 - 1750 (영조26, 경오). 10. 6 贈 嘉善大夫, 20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曾祖 호조참판 好立, 祖 通政大夫 宇晟, 考 昇武, 송광 이읍에서 살았다. 學行이 고매하여 향당의 추중을 받았고 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貞夫人 長水黃氏와의 사이에 命灝․命大․命五․命宣․命益 5자를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후손: 】족1-272 승주이읍11-10 최명대 崔命大 1699(숙종25, 기묘) - 1761(영조37,신사) 효자, 字 羲瑞, 호 屛岩 또는 鳳岡山人, 21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曾嘉善大夫 祥業. 어려서부터 姿稟이 純美하고 氣度가 淸閒하여 부모의 뜻에 순종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집안에서 조금도 疎遠한 말이 없었다. 入學 초로부터 才華가 출중하여 학업이 날로 진취하였고, 冠禮를 행하기에 이르러는 양친을 얼굴색을 살펴 봉양하며, 정성을 다해 甘旨를 받들어 매양 새로 난 음식을 얻게 되면 자기 입에 먼저 넣지 아니하고 반드시 어버이께 먼저 드려 잡수시게 하였으며, 이렇게 孝養하기를 40여 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엄친께서 병을 얻어 불안하시매 의약으로 처방하기를 분주히 하며 성심으로 간호하였으나 마침내 돌아가시기에 이르자, 哀毁하기를 禮에 넘게 하고, 肉味붙이가 없는 거친 음식을 먹으며 거적자리를 깔고 廬幕에서 시묘하며 호곡애통하니, 조문하는 사람들이 보고 모두 옛 효자 顔丁․高柴의 居喪함과 같다고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매월 초하루면 묘를 살피고 掃墳하여 風雨暑寒에도 일찍이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同福 道源書院이 여러 해 風霜을 겪어오는 동안 기둥이 毁破되고 地礎가 기울어 퇴락한 지경에 이르자, 영조조 기미년에 縣人 金壽麟․安世允․河得龜 등 제공들과 더불어 개축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해 성력을 다 하였으니 진실로 효성과 사친지념이 絶倫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같이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제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남겨 이르기를 “孝는 百行의 근원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힘 쓸 지니라”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어 계시지 않게 된 이후에도 매양 忌日을 맞게 되면 목욕재계하고 치성하기를 3일간을 하였으며 追遠의 예절이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인 密陽 朴氏와의 사이에 致寬․致敬․致權․致三 4子를 두었다. 후에 사림의 포장이 있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 【후손:成休】 족1-140 승주이읍10-9 최희수 崔喜秀 1859. 5. 11 - 1936. 3. 19 行 通政大夫 都事, 字 仲悅, 호 淨菴, 26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時復, 조선조 말기 초계최씨 집성촌인 송광 이읍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도가문의 遺風을 이어받아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특출하였으며 일생을 일가돈목과 爲先精誠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儒學에 정통하였으며, 당대 巨儒들과 도의로써 교우하여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특히 己卯名賢 新齋 崔山斗 中祖의 학문과 절의를 숭모하여 이를 顯揚하는 데 헌신하였으며, 고종 13년 병자년 (1876)에 蘆沙 奇正鎭․莘湖 金祿休선생의 발론으로 도내 유림들이 장성 백양사에 모여 신재선생께 諡號를 내릴 것을 나라에 청하는 疏를 올릴 것을 발의하는 데에 璟模․學模․寔模․昌模․廷黙․鍾秀․慶秀․在煥․芳秀 등 諸宗들과 더불어 本孫대표로 참여하여 이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 해 극심한 흉년으로 성사를 보지 못하여 이를 안타까워하던 중, 다시 1923년 계해년에 전남 유림과 본손 대표들이 힘을 모아 大東斯文會長에게 私諡를 헌정할 것을 청해, 마침내 그 해 11월 18일 大東斯文會長 前判書 閔泳徽 등 儒林代表 30여인과 道內 儒林 7천 여인이 모여 신재 선조께 「文節先生」의 私諡를 헌정하기에 이르니, 그간 본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여기에 바친 그의 誠力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는 구한말과 일제 식민치하의 혼란 속을 살아오면서도 선비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였으며, 도의로써 모범을 보이며, 가문의식을 일깨워 종족의 결집을 도모하였다. 그는 평생 先世의 時享에 한번도 참례치 않은 적이 없었을 정도로, 그리고 선조의 유적을 살피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알았을 정도로 爲先精誠이 지극하였다. 譜牒에는 “그의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선조의 遺業을 받드는 정성은 종족의 감복함이 되고 鄕黨의 師表가 되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관직은 行 通政大夫 都事를 지냈다. 부인 김해김씨와 해로하여 3자 在殷․在順․在吉을 두었는데, 특히 仲子 在順은 출가하여 學僧으로 이름이 높았고 송광사 주지와 조계종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하였다【문헌:초계최씨족보】 족1-248 승주이읍 9-8 최재은 崔在殷 1896. 11. 28 - 1972. 2. 11 (직업) 字 子亨 호 農山, 27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행 통정대부 都事 喜秀, 구한말 초계최씨 종손 마을인 송광 이읍에서 태어나 ------- 행적--------------------------------------- 부인 김해김씨․전주이씨와의 사이에 4자 成休․淳休․貴休․廷休와 2녀 愛心․金德을 두었다. 【문헌:초계최씨족보】족1-248, 승주이읍8-7 최재순 崔在順 1899. 6. 19 - 1975. 2. 19 승려, 松廣寺主持, 曹溪宗中央會議長, 號 錦堂, 27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考 행 통정대부 都事 喜秀, 송광 이읍 출생. ------------학력 및 출가 계기, 출가 후 행적 --- 출가하여 學僧으로 이름이 높았고 송광사 주지와 조계종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문헌:초계최씨족보】족1-251 승주이읍7-6 최성휴 崔成休 1927. 4. 24 - (직업), 호 大隱, 28세손,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祖 通政大夫 喜秀, 考 在隱, 송광 이읍 출생 ----------------- ------------학력, 경력 사항 ------------------------------------------------ 부인 김해김씨 榮才와 해로하여 슬하에 3남 茂松․茂英․茂南과 2녀 桂心․桂淑을 두었는데, 무송은 정계에 진출해 2002년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 북구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족1-248 승주이읍 6-5 최무송 崔茂松 1955. 2. 5 - 공무원 (직열,직위?), 본명 炳松, 29세, 첨정공파, 승주이읍(宗家,宇晟公후손)문중, 증조 通政大夫 喜秀, 조 在殷, 父 成休, 송광 이읍 출생 ------------------ 년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학력, 경력사항--------- 정계에 진출해 2002년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 북구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부인 김해김씨 英子와의 사이에 2녀 善住․允羅를 두었다. 족1-248 승주이읍 4-4 최길용 崔吉容 1952. 7. 27 - 국문학자, 철학자, 문학박사, 본명 吉休, 호 連村, 28세손, 첨정공파, 순창방화(宇德公후손)문중, 高祖 孝子 昌甲, 曾祖 孝子 時鳳, 祖 義士 鍾秀, 考 효자 在植. 6․25 전란 직후 가족의 피난지인 전북 임실 신평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환경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학업에 정진, 전주로 기차통학을 하면서 중․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마쳤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대학진학을 일시 중단, 공무원생활(행정주사보)로 가정을 돌보기도 했다. 29세에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고전문학을 전공,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37세에 「連作型古小說硏究」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50세 때인 2002년 3월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유학과에 입학하여 유교철학을 전공하였다. 학위기간 동안 전주교육대학에서 10년 가까이 국어과 조교, 신문방송사 幹事職을 맡아 奉職하였고, 同대학 강사를 거쳐, 현재 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북대학교․충북대학교․인천대학교․건국대학교․전주우석대학교․전주공업대학 등에도 출강하였다. 18세때 전주 - 서울간 300여 km를 혼자서 도보로 걸어 完走했을만큼, 목표에 대한 성취욕과 집념, 의지가 강하다. 그는 10년여를 일관되게 조선조 장편대하소설 연구에 몰두, 세계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장편대하물들인 조선조연작소설들을 樣式的 측면과 작품론적 측면에서 연구․종합한 저서 「朝鮮朝 連作小說 연구」(1991)를 내놓았다. 주요 논문으로 「明珠寶月聘 連作小說 硏究」(1989, 문학석사학위 논문), 「李德懋 文學 硏究」(1988)등 30여편의 논문이 있고, 저서로는 앞의 「朝鮮朝 連作小說 硏究」와 「漢字와 漢文」(2000)이 있으며, 번역서로 新齋中祖의 文集「新齋集」(1989)이 있고, 또 校註書로 「瑤華傳」(2003), 공(편)저에「韓國家門小說硏究論叢Ⅰ」(1992), 「韓國家門小說硏究論叢Ⅱ」(1999), 「한국고전문학의 이해」(2001), 「古小說硏究史」(2002) 등이 있다. 그밖에 철학박사학위 논문으로 「沙溪 金長生의 禮學思想 硏究」를 준비중에 있다. 한편 族譜編纂事業에 적극 참여, 순창방화(直提學 宇德公후손)문중 家乘譜인 「草溪崔氏 提學公派譜」를 편찬하였고, 己巳年 大同譜의 편찬에도 참여 그 文獻篇을 國譯하였다. 「草溪崔氏大宗會報」를 창간, 그 主幹 겸 대종회 부회장직을 맡아 일했고 본서 「초계최씨 700년사」를 집필했다. 韓山李氏 東伊와 혼인하여 1남 새날과 1녀 새해를 두고 부부가 모친을 孝養하였다. 족2-38 순창방화44-3 최중근 崔中根 1940. 4. 1 - 토목기사, 공학석사, 한국수자원공사 이사장, 本名 中植, 호( ? ), 28世孫, 禦侮公派, 남원오룡(善立公후손)문중, 祖 大鉉, 考 東述. 전북 남원 출생. 祖父 大鉉公은 乙丑年 譜事에 그 편찬과 교정을 맡았던 분으로, 그 학행과 爲先精誠을 온 宗中이 추앙하던 바였다. 이 같은 儒賢의 正脈을 타고 나, 裕福한 가정에서 어버이의 맑은 薰陶를 받고 자라난 그는 천성이 凝滯 拘束됨이 없이 豁達爽快하며 率直大凡하여 주위의 사랑과 推重을 받아 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고향인 南原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에 유학,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각종 운동에 능치 못한 것이 없었다. 27세에 군복무를 마치고 바로 국영기관인 韓國水資源公社에 입사, ----년 公社 首長인 이사장으로서 정년퇴임하기까지 --년여를 奉職해 오면서, 엘리뜨 토목기술인으로써, 각종 대규모 국가 토목사업들인 소양강댐(19 년)․안동댐(19년 )․수어천댐(19 년)․대천댐(19 년)․충주댐(19 년)․임하댐(19 년 )․합천댐(19 년) 등 여러 댐건설 사업들에 참여해 발군의 능력을 발휘, 이에 헌신함으로써 국가발전에 不滅의 공적을 남겼다. 이 공로로 그는 두 차례나 건설부 장관상( 년, 년)을 받았고, 드디어는 19 년( 세때)국가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크게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石塔産業勳章을 받기까지 하였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는 차관급인 이사장에까지 올랐다. 항상 연구하는 토목기술인으로서 자기 발전을 기하여 토목기사 1급 자격을 보유하고 있으며, (?)을 전공, 공학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고,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폴, 홍콩 등 동남아 국가들과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歐美 여러 나라들을 여행, 견문을 넓힌 바 있다. 댐 건설 분야에서의 오랜 현장경험과 연구 및 기술을 바탕으로 갈수록 用水難이 심각해지고 있는 국내 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물 수요조사․설계․시공 등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부인 晋州 鄭氏 先迎과 슬하에 2남 赫․薰이 있다. 족4-147 남원오룡22-2 최금안 崔金安 1923. 8. 11 - , 農水産業, 孝子, 본명 炳安, 29世孫, 龍雲公派, 신지도가인(日元公후손)문중, 祖 仕淇, 考 保順, 전남 완도 출생. 민족이 일제로부터 수난을 겪던 암담한 시대에 섬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극도의 빈곤과 싸우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향학열이 높고, 보다 낳은 삶을 향한 집념과 의지가 강했다. 어려서 鄕里에서 漢學을 修學한 바 聞一知十하는 聰明이 있어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12세 때 어려운 가정형편을 무릅쓰고 목포에 留學, 儒達尋常小學校를 마쳤으며, 16세 때 뜻을 품고 單身上京, 京城普通學塾에 進學해 苦學으로 학업을 유지했으나, 지탱할 길이 없어 1년을 수학한 뒤 그만두고, 17세 때 日本으로 건너가 학업과 생업을 찾아 각처를 漂泊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마침 전쟁에 광분한 日帝가 조선인 징병에 혈안이 되어있는 때라 귀국하지 못하고, 日本廣島縣에서 눌러 지내며 日帝의 徵兵을 피해 千辛萬苦의 고난을 겪던 중, 일제를 패망케 한 히로시마 原爆投下의 현장에서 九死一生으로 살아, 1945년 조국광복과 함께 6년만에 귀국, 他國生活의 波瀾萬丈한 고난의 歷程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고향에 정착한 그는 長興任氏 良辰과 결혼, 天性인 勤勉․誠實로 治産에 힘을 써 家基를 세우고, 어버이를 誠孝로써 奉養하여 한 달이 멀다않고 닭을 잡아 감미로운 음식으로 甘旨를 받드니 隣里가 그 誠孝를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四兄弟가 苦樂을 함께 하며 友愛가 지극하니 고을 사람들이 이들 집안을 일러 孝悌의 집안이라 일컬었다. 특히 季弟 金材가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자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그 등록금과 학비를 보태 졸업시킴은 물론 사법고시 공부를 하는 기간 중에도 숙식의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여 마침내 동생이 官界에 진출, 水協中央會 全北 道支會長에까지 오를 수 있게 하였으니 그의 형제우애가 이처럼 지극하였다. 또한 爲先精誠도 남달리 지극하여 돌아가신 부모님의 제사에는 물론 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祭需를 갖춰 參祭치 않음이 없었으며, 재산을 헐어 先塋을 마련, 考․祖考의 英靈이 쉴 곳이 있게 하였다. 한편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열성이 있어 萬難을 무릅써가며 2남 永敏․榮哲과 1녀 慶娥를 다 대학까지 훌륭히 교육하여 成家시켰으니 가히 자녀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어버이라 할 것이다. 그의 生平은 이렇듯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을 위해서는 한 일이 없었으되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몸을 바쳤으니 어찌 後裔들의 귀감이 되지 아니하랴. 족3-330 신지도가인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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