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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디워홀의 생애
(1) 앤디워홀의 이력
(2) 앤디워홀의 성장과정과 젊은 시절
(3)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일을 시도하는
장년기 워홀과 그의 마지막
2. 앤디워홀의 작품소개
3. 맺음말
4. 참고문헌
앤디워홀을 현대예술가라 칭한 이유는 그가 활동했던 예술분야가 다양했기에 어느 한 분야에 단정 짓지 않고 이렇게 이름 붙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창조한 적이 없고, 어느 것도 발명한 적이 없으면서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 앤디 워홀은 살아서 이미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신화는 누군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산 표본이기도 한 그의 일생과 작품 활동은 스타에의 열망과 스타가 되기 위한 집요한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한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이며 ‘비지니스 아트’를 추구했던 그의 생각처럼 사업가였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작품과 활동이 미술계에 가져다 준 충격과 영향, 그리고 그가 차지한 거대한 위상을 가려버릴 수는 없다. 그를 비난하든 칭찬하든 워홀은 이미 그러한 평가를 벗어난 위치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생애와 작품들에 대해 알아보자.
1. 앤디워홀의 생애
(1) 앤디워홀의 이력
본명 Adrew Wahola, 미국의 미술가. 실험영화 감독.
1949 피츠버그 카네기 기술연구소 디자인과 졸업, 그후 뉴욕에서 상업적인 삽화가로 활동
1962 시드니 재니스 화랑 ‘뉴리얼리스트전’에 <캠벨 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브릴로 비누상자> 출품
1963 영화 <Eat> <슬립> <앰파이어>
1964 <엘비스 Ⅰ과 Ⅱ>
1965 영화 <My Hustler>
1966 영화 <The Chelsea Girls>
1969 영화 <Blue Movie>
1975 책 <앤디 워홀의 철학>
1979 책 <1970년대의 조망> <Andy Warhol’s Exposures>
(2) 앤디워홀의 성장과정과 젊은 시절
여러 해에 걸쳐 워홀은 자신이 클리블랜드나 필라델피아 혹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 스타인과 조지 플림톤이 저술한 『에디 : 한 미국인의 전기』에 수록되어 있는 워홀의 출생증명서에는 워홀이 1930년 9월 28일 펜실베니아 주, 스크랜톤 북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 포리스트 시티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워홀은 이 출생증명서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이름은 체코슬로바키아식 성을 따른 ‘앤드류워홀라(Andrew Warhola)'로 기재되어 있다. 워홀은 가족이 언제 스크랜톤에서 펜실베니아로 이주하였는지 한 번도 정확히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어린 시절 그가 앓았다는 신경쇠약증도 어디에서 발병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 워홀은 “한 번은 8살, 한 번은 9살, 또 한 번은 10살 때였다. 성 비투스 댄스의 발작은 항상 여름방학 첫날에 시작되었다. 나는 온 여름을 시트와 베게에 흐트러진 종이인형과 찰리 맥카시 인형과 더불어 라디오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지내야 했다”라고 설명한다. 1960년대의 한 친구는 워홀이 그때 “헤디 라마르 의 광고를 복사하면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앤디의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는 191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일찌감치 그는 펜실베니아 탄광지대에서 일거리를 얻을 수 있긴 했지만 1921년까지는 아내 줄리아를 데리고 올 여건이 되지 않았다. 워홀은 아버지가 일 때문에 자주 광산으로 떠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어머니와는 퍽 친밀하였다. 사실 그녀는 워홀과 맨하탄에서 거의 30년을 같이 살았다. 앤디는 어머니를 이렇게 회상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투박한 체코식 발음으로 힘껏 책을 읽어 주곤 하였으며, 엄마가 딕 트레이시를 다 읽고 나면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도 ‘고마워요. 엄마’라고 대답하고 했다. 또 엄마는 내가 색칠하기 책을 한 장 끝낼 때마다 허쉬 초코렛을 하나씩 주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워홀은 1945년 가을,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당시 이 학교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많았으며, 이들 중에는 후일 리얼리스트 화가의 선두주자로 활약할 필립 펄스타인도 있었다. “나는 앤디를 퍽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종종 우리 집에 작업하러 오곤 했다. 왜냐하면 그의 집에는 자기 방이 없었고, 조카들이 여럿이나 되어 앤디를 조용하게 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은 앤디의 일거리를 찢기도 하였다. 앤디의 두 형들도 그를 놀렸다. 그들은 앤디가 예술을 하기 때문에 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앤디는 학과 과목에서는 다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획대로 4년을 보내고 1949년 여름, 공립학교의 미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졸업했다.
그후 뉴욕에서 8개월가량을 펄스타인과 함께 지내면서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맨하탄의 전문가들에게 보였다. 야망있는 상업예술가라면 양복과 넥타이의 깔끔한 차림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워홀은 운동화에 작업복 바지, 목을 풀어헤친 셔츠의 초라한 차림새였다. 작품들은 갈색의 종이가방에 들어 있었고, 더군다나 그는 유달리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서들과 아트 디렉터의 조수 등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라면 가리지 않고 인사를 다녔다. 뉴욕에서의 첫 번째 여름, 잡지 『글래머(Glamour)』의 티나 프레데릭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몇 가지 일거리를 얻었다.
펄스타인의 아파트를 떠난 워홀은 맨하탄 거리, 103가의 지하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했다. 워홀이 그곳을 ‘일종의 예술공동체’라고 표현했듯이 그 아파트는 뉴욕에 처음 온 야심만만한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절 워홀은 여기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으며 친구는 거의 사귀지 못했다. 1952년 6월에 뉴욕의 휴고 갤러리에서 트루만 카포테의 소설을 위한 삽화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아미 반더빌트의 에티켓의 모든 것』의 삽화를 프레드 맥 카롤과 매리 스즈키와 함께 제작해서 개인전을 열게 된 것이다. 1953년에 그는 데니스 보건이 연출하는 이스트 사이트의 한 극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디자인 세트와 베르토르 브레히트의 작품에 친숙해졌고, 자신의 머리를 은색으로 염색을 했다. 1954년에 58번가의 한 상점인 서렌디피티에서 자신의 드로잉과 책을 판매하였다.『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25마리 고양이와 한 마리의 푸른 고양이』를 세이무어 베를린 출판사에서 한정판으로 발간하였다.
이러한 초기 단계에서의 워홀의 작업은 다소 사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다. 섬세한 어휘와 시각적 뉘앙스 속에 의미가 숨어 있으나 지금 그들 중 태반은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근 십 년간, 아니 그 이상을 워홀은 그다지 영속적이지 못한 성질의 작품에 정열을 쏟았다. 1950년대 중반, 워홀은 순수예술이 지속적인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듯하다. 그 후 얼마간 워홀은 당시 득세하고 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해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인물이며, 뉴욕에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던 젊은 예술 스타 존스와 라운센버그와 친교를 맺고자 하였으나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3)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일을 시도하는 장년기 워홀과 그의 마지막
1955년 랄프 포메로이와 함께 『잃어버린 구두를 찾아서』를 출판하였고, 1956년, 텔레비전 세트 디자이너인 찰스 리센비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게 되었다. 이해 4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최근의 미국 드로잉>이라는 그룹 전시회에 참가하게 되어, 밀러 구두 광고로 35번째 아트 디렉트 클럽의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7년, 밀러 회사의 구두와 모자 광고로 36번째 아트 디렉트 클럽의 메달과 우수상도 수상하였고, 『라이프』잡지는 ‘미친 금빛 슬리퍼’라는 기사에 그의 삽화를 소개했다.
1960년에 만화를 기반으로 한 첫 번째 회화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딕 트레이스』, 『토요일의 파피』, 『슈퍼맨』제작. 그리고 이 즈음에 『코카콜라병』도 제작했다. 1962년에 지폐와 캠벨 스프 깡통 그림을 발표하였고, 6월 아빙 불룸이 L.A. 페라스 갤러리에서 그의 스프 깡통 그림을 전시. 8월, 마릴린의 첫 번째 실크스크린을 제작. 9월,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열린 ‘새로운 리얼리스트’라는 중요한 팝 아트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또 1963년, 이스트 87번가의 소방서를 작업실로 빌려서 그의 조수로 활약하게 될 제랄드 말랑가를 만났다. 그리고 16밀리 무비 카메라를 구입해서 그의 첫 번째 영화 『다시 나타난 타잔과 제인』등을 제작하였고 1964년, 파리의 갈레리 일리나 소나벤드에서 열린 첫 번째 유럽 개인전에서 꽃 그림을 선보였다. 그리고 건축가 필립 존슨으로부터 뉴욕 워드 페어의 뉴욕과에 장식될 벽화 『13명의 긴급 수배자』의 제작을 요청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4월 정치적인 이유로 이 벽화가 지워지게 되었지만, ‘필림 컬쳐’ 잡지로부터 인디펜던트 필림상을 수상했다. 1966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 여름에 상업극장에서 상영된 첫 번째 언더그라운드 영화인 ‘첼시아 소녀들’을 만들게 되었고, 4월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독일 가수인 동시에 배우인 니코를 등장시킨 멀티미디어쇼를 제작했다. 그리고 1968년, S.C.U.M.의 창시자이면서 유일한 회원인 발레리 솔레니에 의해 저격당해. 거의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1972년, 영화와 연극으로 몇 년의 시간을 보낸 워홀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고 특히 이 당시에는 유명인을 대상으로 하는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이 그림들은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고 그에게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1975년에는 89번가에 인접한 렉싱턴 거리의 집을 구입해서 모친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의 중요 회고전을 준비해서 스위스 취리히에서 회고전을 열게 되었다. 그 이후에 『해골과 망치와 낫』, 『신화』, 『산화』, 『위험에 처한 종족』, 『Ads』등의 시리즈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1987년 2월 22일, 뉴욕에서 담낭 수술 사흘 뒤 취침 중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2. 앤디워홀의 작품 소개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앤디 워홀의 첫 개인전이 끝난 다음 날인 1962년 8월 5일 남성들의 우상 마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가장 인기있던 마를린 먼로의 죽음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언론은 몇 주에 걸쳐 그녀의 삶을 소개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자 앤디 워홀은 마를린 먼로를 자신의 예술에 끌어 들인다
↑ <마르린 먼로>
초상화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고 붉은 색은 입술밖으로 번지는 방식)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유명인을 그리면 자신도 유명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두드러진 팝아트 예술가가 되기를 바랬던 앤디 워홀의 시도는 적중했다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스타들의 초상화는 자연히 인기가 있었고 중개상들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클레오파트라로 분장한 파란 리즈>
흥행에 성공한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영향으로 거리에는 온통 머리카락으로 앞이마를 덮고 짙은 눈화장을 한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모습의 많은 여성들 투성이었다고 한다
↑ 여성들의 우상 <엘비스>
↑ 가수 <믹 재거>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
↑ 배우, 작가 <브룩 헤이워드>
그녀는 영화배우들이 모인 파티에서 앤디 워홀을 대단히 칭찬하며 유명배우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 <찢어진 큰 캠벨 수프 통조림>
앤디 워홀의 형에 의하면 어머니는 그들 형제에게 늘 캠벨 수프를 먹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9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 낙찰가 150~250만 달러를 훨씬 넘는 352만 달러에 팔렸다
↑ <푸른 코카 콜라 병들>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가로 새로로 반복하여 대량 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하였으며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 <메그의 남자> 캔버스에 아크릴
영국의 마가렛 공주와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얼굴을 마치 초상화처럼 그려 관객은 신문 표지를 재현한 것임을 알면서도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가 없었다
3. 맺음말
이 시대에 앤디 워홀만큼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작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대중 이미지를 소재로 하는 팝 아트에서부터 스타를 방불케하는 작가로서의 사생활까지 그의 모든 것은 기존 예술의 테두리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1960년대 초반, 워홀이 등장하기까지 미국 미술을 지배한 미술은 추상표현주의였다. 즉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의 독립된 지고한 목표를 지니며, 이와 더불어 특권의식에 팽배해 있던 작가들은 자신만의 내적 세계에 우월감을 지니고 미술이란 심오한 내적 세계의 표출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미술은 지극히 난해하고도 주관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으며 그만큼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워홀은 만화, 광고, 할리우드 스타 등, 대중문화를 고급 예술에 수용하여 비개성적이고 객관적인 예술을 만들어 냈다.
소재뿐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워홀은 획기적이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실크스크린이라는 상업적인 프린트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 고무도장이라는 원시적인 판화 기법을 사용하던 워홀은 점차 자신의 작품이 수공적인 분위기가 배제된 공산품같이 보이기를 원했다. 실크스크린은 ‘보다 강력한 공장 조립대의 효과’를 추구하던 이러한 워홀의 열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워홀은 소재뿐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철저히 대중문화의 그것을 따름으로써 순수 미술과 대중미술로 엄격히 구분되던 기존 예술의 불문율에 성공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워홀을 거론할 때 한 가지 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예술뿐 아니라 그 자신이다. 감정을 드러낼 줄 모르는 무표정한 얼굴에 극히 인공적인 은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워홀은 기계의 효과를 추구하던 그의 팝 아트만큼이나 피상적이고 무개성적이다. 기존 예술가의 아틀리에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의 작업실도 그 이름부터 파격적인 ‘공장’이었다. 그의 작업실은 완전 개방되어 있어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워홀의 공장에는 전위 예술가, 워홀 영화의 스타, 하버드 대 출신의 엘리트에서부터 헐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배우지망생, 심지어 유명인의 출입이 잦은 이곳에서 스타를 보고자하는 일념으로 타이핑 등에 자원봉사하는 소녀들까지 다양한 층의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여기 모인 모두는 헐리우드의 삶과 신비를 쫓고 있었으며, 이들의 생활 패턴 또한 오후 느지막이 일을 시작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파티에 쫓아다니는 헐리우드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결국 예술가로서의 워홀의 삶은 고고한 예술가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대중 예술가, 즉 헐리우드 스타의 생활에 더 밀착된 것이다. 그러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워홀과 그의 예술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면 될수록 그는 시종일관 바보스럽기까지 한 천진한 답변으로 일관했을 뿐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워홀은 아무런 주관도 없이 수동적으로 대중문화를 쫓아다니는 기인으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워홀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워홀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는 많지 않다. 워홀이 1987년까지 생존한 바로 이 시대의 작가라는 사실이 객관적인 연구를 어렵게 하고 있으며, 외국 미술을 수입하는 우리나라에서의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그러나 요즈음 워홀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전문적인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고조되고 있다. 앞으로 워홀에 대한 연구가 여러 각도로 활기차게 진행되기를 바라고, 많은 이들이 워홀에 대해 연구하여 좋은 성과를 이루길 바란다.
4. 참고 문헌
․ 워홀과 친구들, 김광우 저, 미술문화
․ 앤디 워홀, 거울을 가진 마술사의 신화, 강홍구 저, 재원
․ 앤디 워홀, 카터 래트클리프 저, 눈빛
․ 팝 아트와 현대인, 김춘일 저, 열화당
․ 앤디워홀의 대중적 이미지의 표현에 관한 연구, 남택운 저, 미술교육논총 제2집 1993
․ 앤디 워홀의 작품 속에 나타난 이미지의 반복, 오진경 저, 미술교육논총 제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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