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산 목사 강해>
Ⅱ. 시편(詩篇)에 대하여
1. 시편의 서정성과 계시성
성경의 여러 책들 중에서 시편만큼 심오하고, 아름다운 신앙적 체험을 다양하게 표현한 말씀도 없습니다. 시편의 작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시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와 또 자신들의 신앙적 응답과 체험들을, 시로서 표현하는 시정신을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성경문학의 시편들은 역대의 성도들이 사랑했으며, 예수님도 사랑하였고,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사랑하였습니다. 이 시편들은 오늘날까지도 성도들의 교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개인의 경건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개혁자들, 문학가들, 일반 사회인들까지도 사랑하는 위대한 성경이 되었습니다.
시편들의 주제들은 대략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성도들이, 신앙의 범주 안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시편들을 읽을 때, 그 시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을 가지게도 됩니다.
시편에 대한 문학 비평의 좋은 출발점은 루이스(C. S. Lewis)1)의 “시편은 시, 즉 운문으로 읽어야 하는데, 그것은 서정시에 걸맞는 특성인 파격과 모든 형식, 과장 어구들 그리고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적 연관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피력한 진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서정시(抒情詩)를 뜻하는 리릭(Lyric)은, 서양 개념으론 ‘정을 서(抒)하는 시’란 말 외에 “지혜로써 추구하는 사상”이란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서정시의 개념에 있어서는, 정서를 읊음과 아울러 그 속에 지혜로써 추구하는 사상이 깃들여 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은 원래 노래로 불려질 수 있도록 간결하게 씌여졌습니다. 그러한 시편들이 사람의 목청으로 불려지기도 했고, 때로는 소규모 혹은 대규모의 히브리 민속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져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시편은 단순히 문학 형태로 주어진 계시라기보다는, 고대의 음악문화를 배경으로 주어진 곡조 있는 계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시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영원한 세대의 찬양의 표준으로써, 아름다운 곡조와 함께 전달되는 운율 있는 계시라는 점입니다.2)
2. 시편의 다양한 주제들과 원형 패턴
그 동안 시편은 여러 비평주의 신학자들이, 문학적 장르 혹은 여러유형에 따라 분류해 보기도 했는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시편의 여러 유형들이 특정한 예배 의식이나 제사 의식이나 종말 의식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50편의 시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내용상 상당히 복합적인 주제(主題)를 골고루 내포하고 있어, 특정한 주제나 유형에다 단도직입적으로 끌어다 맞추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당한 타당성과 객관성을 고려해, 시편들을 유형대로 분류해 보며 긍정적 안목을 가지고 내용들을 해석해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일 줄 압니다.
시편의 내용에 따른 주제들로는 감사, 찬양, 비탄, 간구, 회개, 메시야, 결혼, 자연, 시온의 회복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총체적으로 시편의 원형 패턴은, 재난에서 축복으로, 비극에서 희극(喜劇)으로 이동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요약하고 있는 구절이 시편 30:5절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 시편의 문체 또는 문학의 형식
어떤 형식의 문학이든 그 미학적(美學的) 효과 및 감성적 효과는 적절한 문학적 표현 수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내용의 진실성 만큼이나 형식의 아름다움도 필수적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여러 가지 독특한 문학적 표현수단들이 나타납니다. 구약성경 대부분이 원래 운문 형식으로 씌어졌으며, 히브리 원어가 운율적 패턴을 띠고 있기에, 시편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문학적 표현수단은 병행법(竝行法) 즉 대구법(對句法)을 사용하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병행법이란 하나의 사상을 다른 사상과 연속하여 표현함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거나, 반대의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 혹은 처음 사상을 더욱 설명하거나 발전시키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기법(技法)을 ‘사고(思考)의 운율’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동의(同義)적 병행법
동의어(同義語)의 귀절들을 병행으로 표현하여, 첫 구절의 내용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전체 내용이 보다 풍부해지고 감명 깊도록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편 24:2,3)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편 103:9~1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 53:1,2)
둘째, 반의적(反意的) 병행법
서로 반대의 뜻을 가진 구절들을 병행시킴으로서, 첫 구절의 뜻을 뒷 구절이 더욱 분명해지도록 밝혀 주거나, 또는 그 반대를 강조해 주는 방법입니다. 이 반의적 병행법은 특히 잠언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 1:5,6)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를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4)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 29:25)
셋째, 종합적 병행법
첫 귀절에서 표현된 사상을 그 다음 귀절에서 계속 설명하고, 그 뜻을 밝혀주면서 내용을 한층 고양(高揚)시키는 방식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편 19:7,8)
네가 소망이 있음으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욥기 11:18)
이외에도 참고적으로 부언(附言) 한다면, 성경에 자주 사용되고 있는 문학적 표현 수단으로는 반복법이 있습니다. 이 반복법은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사무엘하 18:33)
등은 전형적인 반복법입니다.
그런데 모든 문학에 있어서 그렇듯, 성경 문학의 문체상 가장 효과적인 문학적 표현수단은 비유(比喩, simile)입니다. 비유는 ‘상상’(想像)이라고 부르는 신비한 정신 능력에 기인합니다. 이러한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단일 개념에 결부되어 있는 무수한 이미지를 추출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편 23편에서 느끼는 감동은 문학적 견지에서 보면, 거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한 가지 비유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비유적 묘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실로 무수한 의미와 암시의 연쇄적 공명(共鳴)작용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따라서 비유(simile)의 목적은, 어떤 추상적 개념에 감각적 성질을 부여하여 생동감을 줌으로써, 사상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적은 말로 많은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문학에서 주로 나타나는 비유적 용법으로는 직유와 은유가 있습니다.
직유(直喩, simile)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알 같으니”(마태복음 13:31)란 표현과 같이, 명시적(明示的) 비교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은유(隱喩, metaphor)는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시편 74:1)란 표현과 같이, 묵시적(黙示的) 비교 관계를 띠고 있는 표현 양식입니다.
상징법(象徵法, Symbolism)은 기법상 비유에 해당되지 않지만, 문학적 표현 수단으로서 성경문학에서 그것이 지니는 가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상징은 다양한 암시와 의미 함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실재(實在)를 눈에 보이는 것처럼 표현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서나 다니엘서 및 요한계시록 등과 같은 묵시문학적 책에서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 생물, 유리 바다, 뿔, 크고 흰 보좌, 진주 문, 생명수의 강 등과 같은 상징물들은 단순한 설명적인 교훈을 통해 줄 수 있는, 의미 이상의 심오한 의미와 사상을 전달해 줍니다.
4. 시편의 해석들
시편은 저자별로 나누는 것보다, 유형별로 나누는 것이 더 의의(意義)가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적절한 서시(序詩)로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두 가지 길(원리, 태도의 방법)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철저히 대조함으로, 시편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사상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1편 이외의 나머지 시편들은 이러한 중심 주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추구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편은 문학적 견지에서 문학의 두 가지 중요한 판단기준, 즉 표현의 구체성과 예술성의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시편 1편은 긍정적인 진술과 부정적인 진술이, 연쇄적으로 주의 깊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율법 대신 자신의 삶의 원리를 좇는 자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하타임: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절)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
이러한 부정적 묘사는, 2절에서 긍정적 묘사를 함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
하나님의 교훈 말하다, 속삭이다.
3절에는 긍정의 진술이 연속됩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인생의 추수기. 알곡성도.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위의 3절은 의인의 구체성과 그 번영을 고취시키기 위해, 직유의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시인은 경건한 사람을 시냇가에 뿌리 내려 자라나는 나무에 비유함으로, 추수기 또는 결실기에 당연히 열매를 맺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4, 5절은 부정적 패턴입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미쉬파트: 종말론적으론 최후의 심판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에다: 장소적인 개념으로 새 예루살렘을 상징
6절은 경건한 자가 구원의 결과를 얻고, 사악한 자가 멸망의 결과를 얻는 것으로 묘사하는 교차 진술의 형식으로써 결정에 이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결국 의인이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서게 되는 것은, 역시 역사의 종말(또는 개인적인 종말)의 날에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은 현실적이면서도 다분히 종말론적인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시(詩)입니다.
1편의 주제(主題)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편 장차 온 세상을 통치하실 왕으로서의 메시야의 영광을 예언한 다윗의 시로서(사도행전 4:25~28), 유형상 제왕시 또는 메시야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어찌하여’(1절) 라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본 시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안타까움은 열방이 메시야의 통치를 거역 하고 반기를 들 뿐 아니라, 세상의 군왕들이 장차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우시는 기름 부음 받은 종들을 대적하여, 그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반역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1~3절)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반역 행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비웃음으로 끝날 일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4절)
비록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마태복음 23: 37, 누가복음 13:34), 또한 신약시대에 와서는 헤롯 안티파스와(마태복음 14:3), 본디오 빌라도가 서로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며 예수를 죽이는 일에는 친구가 되어 합세했으나(누가복음 23:12), 예수 그리스도는 예정대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주권자 곧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예언함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대목은 본 시편(2편) 중에서 7절입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만일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주장한다면, 그건 신약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큰 과오입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篇)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3:33~35)(참고, 히브리서 5:5, 시편 16:10)
따라서 시편 2:7의 ‘오늘날’이란,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의 메시야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 때, 곧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당대의 세대를 가리킵니다. 특히 ‘너는 내 아들이라’라는 시편 본문은(시편 2:7)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 때 사용되던 시(詩)로서, 이스라엘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부자(父子)의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마가복음 1:11, 누가복음 3:22)한편 바울은 사도행전 13:34절에서 다시한번, 예수가 죽어서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의 근거를(이사야 55:3)들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약속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죄사함을 주는 인류의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2:7절의 ‘낳았도다’라는 표현은 탄생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 부활은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영원한 통치를 시작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6)(참고, 요한복음 5:22/ 12:48)
요컨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세상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훼방하고, 하나님께 비웃음을 살 일이 또 있습니다.
혼합주의 종교 사상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란 종교 단체가 있습니다. 세계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이 W. C. C란 종교 단체는, 종교간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한다는 미명 아래, 이방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하고, 전 세계적으로 종교 다원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1968년 스웨덴 웁살라 대회 제 4차 총회에선, 그리스도 외에도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선언하고,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득실대는 세계 교회 협의회에, 한국 기독교계의 굵직한 6개 교단이 가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75년 11월 23일~12월 10일까지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 5차 총회 때엔 공산당 칼 맑스주의 사상까지도 인정하고 손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 총회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16명의 천주교인과 불교, 힌두교, 모슬렘교, 유대교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교황은 그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전 교파 운동을 촉진하고 가능하면 WCC와 손잡기 위하여 카톨릭교회가 경주해 왔고, 또 계속 노력할 것이며,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훨씬 크게 성장할 것임을 믿는다”라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인도 성경 외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의 말을 들어야 하며, 맑스주의 자들의 말도 들을 때가 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있는 교회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7차 총회는 1991년 2월 7일~20일까지 호주 캔버라에서 각국 316개 교회로부터 889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였습니다.
이 대회엔 힌두교, 모하멧드교, 유교, 불교, 시크교등 14개 종교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한 강단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고 “우리는 모두 같이 하나님을 예배한다”
“모든 종교가 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다”
그러면서 WCC닥터 웨슬레이 회장은 “모든 종교가 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진짜 신앙인이라면 다른 종교인에게 우리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설교라는 말은 없어졌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분명 혼합주의 음녀 바벨론의 사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회의장 밖에서 ICC총재인 맥킨타이박사는 8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피켓을 들고 “너희는 여러 하나님을 믿으나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천국 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라”고 시위했습니다.
․제 8차 총회는 1998년 12월 12일(금세기 마지막 총회) 아프리카 짐바브 하타레에서 열렸는데, 112개국 960명의 대의원이 각 종교 대표로 참석했고, 전 세계적으론 5000명의 지도자가 참석했습니다.
이 총회에선 초교파 세계적 기독 포럼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소위 개신교+카톨릭+제 3세계 토착교회= 세계적 초교파 기독교 조직이란 ‘통합종교’를 추진했습니다.
이날 콘라드라이저 총무는 “이번 결정은 50년 WCC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것이며, 앞으로도 세계 교회의 통일과 일치 운동에 커다란 진전이 이룩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박영호 목사는 현대신학 비판시리즈 제 3권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W.C.C는 이단자, 맑스주의 좌파, 초교파주의자, 인본주의자, 악마, 적 그리스도이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슬프다 하는 탄식조차도 지옥불의 영혼들에게 기록하기엔 적당치 아니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광은 그 성벽 안쪽에는 결코 머무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W.C.C는 타락한 배교다. 신앙의 자유주의 기독교의 연합단체, 교리적, 신앙적 정통성을 포기하고 배교 불신앙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신앙의 정도를 저버리고 적 그리스도와 세상과 간음한 매춘부이다”
이상과 같이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총회 결의사항을 볼 때, 그들은 분명코 교회이기를 포기한 혼합주의 단체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결의한 사항들은 한결 같이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제 W.C.C란 종교 단체는 힘을 합쳐, 말일에 시대의 등불인 영원한 복음(계시록 14:6)을 들고 외치는, 선지 영을 받은 종들을(계시록 22:6) 대적하고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기름 부어 세우신 종들을 절대적으로 보호해 주심으로 진리의 종들이 승리하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은혜시대엔 보혜사 성령을 심령에 부어 주어, 구원의 보증으로 인을 쳐주었다면(요한복음 3:33, 고린도후서 1:22/ 5:5, 에베소서 1:13/ 4:30), 말일에는 완전한 일곱 영으로(계시록 4:5/ 5:6) 머리에 다시 부어주심으로, 온전한 특별한 소유로 삼아(말라기 3:17) 아들 같이 아껴주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악인으로부터 절대 보호를 받게 하시고(하박국 3:13), 비진리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스가랴 4:12~14), 선지자의 영을 부어 주어 1260일 동안 전 세계적으로 다시 예언하게도 하십니다.(계시록 10:11/ 11:3~6)
전 세계적으로 다시 예언할 때, 5개월 황충 재앙의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3)(계시록 9:3~6, 7:13,14), 두 증인의 인도 따라 광야의 예비처로 들어가, 1260일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게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계시록 12:6,14)
다시 예언하는 사명을 다 마친 종들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해,(계시록 11:7,8) 큰 성길에 삼일 반 동안 시체로 놓여 있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기를 받고 일어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올라갑니다.(계시록 11:18) 공중으로 올라간 종들은, 후 삼년 반 기간 동안 공중에서 상급을 받고(계시록 11:18), 주님과 함께 백마 타고 지상 재림하게 됩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의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9:11~16)(참고,요한계시록 1:7, 이사야 19:1/ 40:10/ 66:15)
시온산에 섰던 주님과 그 종들이(계시록 14:1) 마침내 백마를 타고, 아마겟돈 전쟁에(계시록 16:12~16)참예하여 계시록 19:11~21같이 싸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날에 하늘 군대들이 주님의 뒤를 따르며 철장권세를 가지고 대적자들을 질그릇 같이 깨뜨리게 됩니다.(참고, 시편 2:9, 계시록 2:26,27/ 12:5)
결론적으로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산채로 붙잡아 유황불못에 던지고, 그 나머지는 입으로 나오는 이한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게 됩니다.(계시록 19:20,21)
그렇다면 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 시편 2:12에는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입맞추는 행위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순종하겠다는 표시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은 진정 높고 높은 영광의 보좌에서, 낮고 천한 이 세상으로까지 나를 찾아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 죄인의 목을 껴안고 입맞추며 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입맞춤은 참으로 택한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죄인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2:20, 에베소서 5:2, 요한일서 4:9,10, 계시록 1:5등)
요컨대, 주님의 입맞춤은 죄인을 인격적으로 대한 사랑이요, 영혼까지 사랑한 고귀함의 극치였습니다.(참고, 누가복음 15:20)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듯, 주님께 입맞춰야 합니다.(누가복음 7:36~49, 요한복음 11:2) 이는 진정 참회와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는 마음의 표상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입맞춰 주기를 원하듯 해야 합니다.(아가서 1:2) 이는 주님께 성도가 자기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인정해 주어, 입맞춰 주기를 갈망하는 교제의 극치, 결혼의 극치를 바라는 신부로서의 마음입니다.
결단코 가룟 유다처럼 거짓으로 주님께 입맞추거나(누가복음 22:47,48) 비진리의 사람에게 입맞추지 말고, 오직 진실한 입맞춤으로 진리를 좇아 주님만 의지하고 나아갈 때,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줄로 믿습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시편 2편의 주제는 ‘주님께 입맞추는 자, 구원의 길 열린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2)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6)
시편 23편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목자(牧者)가 양떼를 돌보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 전형적인 전원시(田園詩)입니다. 특히 저자 다윗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지난날의 자신의 체험을 빌어 은유와 비유를 통해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편을 감상하는 데는 당시의 전원적 배경을 고찰(考察)해 보는 것도 큰 유익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 시(詩)의 특징으로는, 문체가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매우 포괄적인 게, 그만큼 넓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시적(詩的) 감정이 거칠거나 고조되지 않고, 오히려 시어(詩語)들이 잔잔한 물가처럼 평온하고 친밀감 있게 다가온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만큼 일상적 용어들이 훌륭하게 시적이고 신앙적인 언어들로 승화되어 있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詩) 전편에 푸른 목장, 아름다운 물가 등의 전원적 이미지와, 음침한 골짜기 등의 어두운 이미지를 교차시킴으로써, 우리의 인생 여정(旅程)을 형상화한 시적 발상은, 그야말로 친근한 일상의 사물 속에 생의 진리를 이입(移入)시킨 시의 정수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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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목동(牧童)의 경험이 있는 다윗은, 훗날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선한 목자와 같이 인도하시는 여호와의 돌보심과 구원하심을 회상하며, 어느 날 이 시를 지었던 게 분명합니다. 즉,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외침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생명을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언제나 필요한 양식을 풍족히 채워주시는 분으로,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자(牧者)로서의 공급은, 물질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자로서의 여호와가 양무리 성도에게 제공해 주시는 것은, 육신의 빵 뿐만 아니라, 영혼의 안락(安樂), 사랑, 소망, 말씀, 이김, 기업 등 모두를 포함하는 영역(領域)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브리서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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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편은 2절에서 회화적(繪畵的) 이미져리(감각체험을 그림처럼 표현함)를 통해, 우리에게 한결 행복을 느끼게 하는 그런 목가(牧歌)적 세계에로 동경심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23:2)
이기적인 문명사회에 살다보면, 푸른 초장이 있고 쉴만한 물가가 있는, 자연세계가 그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세계의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는,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옛날 다윗은 목동 시절에, 아침 일찍이 양떼들을 거친 초원에서부터 몰기 시작하여 점차 꼴이 풍성하고 안전한 초장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비록 그 길이 순탄치 않고 위험한 길이 있다 할지라도 양떼들을 잘 인도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정오 때쯤엔 충분한 휴식을 갖기 위하여, 풀이 우거진 푸른 초장의 그늘이나 쉴만한 물가가 있는 곳에 다달아 양떼들을 쉬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목자(牧者)가 되시는 우리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거친 세상의 들에 남아 있는 양들이나, 이미 우리(양우리)에 든 성도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살피시며, 생명의 말씀의 꼴이 있는 교회라는 초장을 통해 먹이십니다. 교회는 말씀의 꼴 뿐 아니라, 성령의 생수 곧 영혼을 누이며 쉴만한 물가가 있는 영적 초장입니다.(참고, 에스겔 34:18) 쉴만한 물가란, 양(羊)이 마음놓고 편안하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입니다. 양(羊)은 본능적으로 물살이 거센 시내에서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 두려움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양(羊)은 거센 죄악의 물결이 흐르고 있는 고해(苦海)와도 같은 세상에는 머무르지 못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런 세상에서 양들이 나와 나에게로 돌아와 쉼을 얻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이렇게 하여 세상에서 돌아온,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주님께서는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고,(요한복음 8:32) 생명의 떡으로 배불리 먹여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요한복음 6:35)
그렇지만 세상 끝날이 다 되도록 바벨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있어, 주님은 다시금 이렇게 외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요한계시록 18:4,5)
노아 때 땅에 홍수 심판이 내린 것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기 때문이었으나(창세기 6:5), 세상 말일에 바벨 세상이 무너지는 건 사람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계시록 18:2절 말씀처럼 온 세상 뿐 아니라 인간의 심령들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은 바벨 세력을 몰아내고, 조밀한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 성전을 이루듯(참고, 시편 122:3, 스가랴 8:3) 우리의 거룩해진 심령에 완전한 일곱 금촛대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계시록 1:20)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구원을 완성한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무궁 천국에서는 진정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를 받듯,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저희 눈으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게 될 것입니다.(계시록 7:1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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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여기서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영과 육의 회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입니다. 영혼(nephsh:네페쉬)이란 용어가 ‘영’ 뿐만 아니라,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활동하는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말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죄악과 연단으로 인해 헤매이던 다윗 자신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택한 자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뜻을 위하여, 택한 자를 형통의 길로 이끄신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참고, 시편 106:8)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인도하실까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를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며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2~14)
오늘날 성령께서는 장래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전한 일곱 영 일곱 등불로 인도해 주십니다.(계시록 4:5)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도달할 곳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장차 기업으로 받을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한편 그 나라는 단지 미래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미 이 땅의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뤄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나라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 12:28, 누가복음 11:20)
요컨데, 장차 도래할 천년왕국이나 무궁천국은 마귀가 없는 나라입니다.(계시록 20:1~3/7~10). 마찬가지로 현세(現世)에서도 인간의 마음속에 침투해 있는 어둠의 영들을 주(主)의 이름으로 쫓아내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임한 것이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그리고 또한 하늘의 높은 보좌의 세계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우리 성도들을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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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실지 이스라엘 지방에 있는 골짜기를 비유로 하였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사해(死海)에 이르는 여리고 도로의 남쪽에 있으며, 산악 지방을 통과하는 좁은 골짜기입니다. 기후 및 방목 조건에 따라 양떼는 해마다 계절별로 먹이를 찾아 이 골짜기를 통해 이동하게 됩니다. 이때 목자는 양떼가 큰 도랑을 만나지 않도록 인도하고, 도랑을 만날 때는 힘껏 뛰어 건너게 합니다. 혹 미끄러지거나 바위 아래 떨어지는 양이 있으면, 목자는 구부러진 지팡이로 큰 양은 목에 걸고, 작은 양은 가슴 부분에 걸어서 구합니다(막대기는 주로 맹수의 공격을 막는 데 사용됨). 사실 이 음침한 골짜기는 수많은 들개들이 먹이를 향해 울부짖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둡고 음침한 골짜기’란 이미지로써, 성경에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욥기 10:21,22 아모스 5:8)
따라서 목자(牧者)없는 양떼들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넘어지거나,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성도는, 다윗의 경우처럼 주께서 인도하시며 지켜주시기 때문에,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여호와께서는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가서 7: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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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의 목자(牧者)와 양(羊)에 관한 이미지가,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양(羊)의 환경을 그리기 위해서 인간의 상황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목가(牧歌)적 세계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라는 내용은, 다윗의 주변에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대적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매번 그런 위기 때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듯 다윗을 지켜주시고, 또한 훌륭한 대접을 해 주시듯 귀한 잔치상(식탁)을 베풀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왕이었으므로 적군을 물리치고 즐거운 잔치를 벌였을 것을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이 잔치는 다윗이 벌였지만. 결론적으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한편 구약과 신약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베풀어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및 언약 관계의 발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애굽기 24:10,11)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5,26)
따라서 본 시편 5절에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고 한 것은 의식적인 기름 부음(왕, 선지자, 제사장에게 기름 붓듯)이 아니라, 여기서는 큰 잔치 때에 초대 받은 귀족들이 주로 머리나 수염 등에 바르던 향유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잔치의 이미지는, 마태복음 22:1~14절의 천국의 비유인 혼인잔치와, 또한 장차 이루어질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연상케 합니다.(참고, 이사야 62:4,5)
그러므로 이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한 것은, 성도가 지금까지 복을 받고 또 장차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까지 내포할 수 있는 축복의 잔입니다.(참고, 시편 16:5,6)
「참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아들이 상속(相續)받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 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왕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왕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니라”(에스겔 46:16,17)(참고, 레위기 25: 10)
․아들로서 이기는 자들이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 왕권을 누리게 됩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遺業)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시록 21:6,7)(참고, 계시록 12:11)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갈라디아서 3:29), 성경은 밝히기를 심고, 충성하는 대로 그 누리는 영광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15:40~44) 따라서 장차 천년왕국의 사랑하시는 성에 들어가고, 또 무궁천국의 새 예루살렘성에까지 들어가 영원한 신부의 영광을 누리며 살기 위해선,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신부로서 모든 비진리와 미혹을 이기고 정절(貞節) 있는 신앙 생활을 지켜나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신부 신앙이 될 때, 최고의 축복의 잔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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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23:6)
여기서 여호와의 집이란 문자적으론 당시 예루살렘 성소를 가리키지만 그 성소는 영원할 수 없음으로, 영적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 즉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성도들의 모임 뿐 아니라,(사도행전 20:28, 로마서 12:4,5) 하늘에 있는 성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 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요한계시록 3:11,12)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며, 모든 환난과 미혹을 이겨낸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14:1절에 보면 14만 4천인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씌여 있었는데, 바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의 위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을 기록해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1:2절과 9,10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신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3:12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는 자는 신부인 것이며, 이 신부 성도는 결국 14만 4천인처럼 ‘정절이 있고 어린양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며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완전한 성도’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완전한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빌라델비아교회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됩니다.(계시록 3:10)
그리고 궁극적으로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계시록 21:22~27) 결론적으로 이것은 다윗의 시편 23편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시편 23편의 주제(主題)는 ‘목자(牧者)되신 여호와의 영원한 인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5편
본 시편은 기름 부음을 받은 강대한 왕의 결혼 예식에서 사용하던 축가(祝歌)로서, 일명 ‘사랑의 노래’라고 불리워집니다. 본 시편에는 신랑으로서의 왕의 능력과 품격에 대한 찬미와, 신부의 아름다운 자태가 두드러지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관계를 예표한다는 측면에서 구속사(救贖史)적인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을 ‘메시야 시’로 보는 이유는, 본 시의 6,7절이 신약성경 히브리서 1:8,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 시편이 예표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은 현세(現世)뿐만 아니라,(참고,마태복음 22:1~14, 요한복음 3:29, 고린도후서 11:2, 에베소서 5:23등) 궁극적으로 천년왕국과 무궁천국에서 그 영광과 기쁨이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본 시편은 크게 세 연(聯)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1연(聯)
신랑으로서의 왕에 대한 찬미(45편1~8절)
먼저 저자 시인은 왕에 대한 자기의 노래가 억지로 지어내어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영감(靈感)을 통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용솟음치는 기쁨으로써, 마치 필객(筆客)의 붓(아주 잘 쓰는 문장가의 붓)과 같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1절)
그러면서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합니다.(2절)
이것은 과격한 말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은혜롭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의미합니다.
이 왕은 역사적인 배경으론 솔로몬 왕을 지칭한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므로, 본 시편에 예시된 왕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합니다.(참고, 누가복음 24:27,44,45등등)
특별히 이 왕은 본 시편에서, 패배하지 않은 전사(戰士)로 등장합니다. 패배하지 않고 언제나 완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삼일만에 살아나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로새서 2:14, 15)
‘의문에 쓴 증서’라는 율법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자꾸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공격합니다.(로마서 3:20)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아 도말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영들인 정사와 권세를, 십자가로 패배시켜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정사와 권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의 승리의 자리에 나아가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요한계시록 17:12~14)
열왕은 이 세상 말일에 짐승(적 그리스도)과 연합하여, 어린양(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땅의 임금들입니다. 이 열왕들은 한 뜻을 가지고 충성을 맹세하며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대적하는 사탄의 추종 세력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철저히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에게 패배당하고 또한 어린양과 함께 있어 동행하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구별된 자들로서, 자신의 신앙 인격과 책임에 있어서 진실한 자들에게도 패배당하게 됩니다.(참고, 계시록 19:11~21)
특별히 주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는 시편 45:3,4절을 보면,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예컨대 세상 말일에 백마 타고 군왕 같이 위엄있게 나타나실 주님의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말일의 추수기에 다시 한번 기독교 2차 복음운동을(계시록 6:2) 주도하실 주님의 모습은, 본 시편 45:3,4절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시편 45편은 예언적으로 종말론적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4)(στεφανος, 스테파노스)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시록 6:2)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διαδηματα, 디아테마타:왕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시록 19: 11~13)
결국 세상 말일에는 그 동안 전통에 감춰 놓았던 종들이(이사야 49:2,3), 마광(磨光)한 화살 같이 쓰임 받아,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소멸하고 세상을 심판함으로, 만민이 만왕의 왕 앞에 무릎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배인 옷을 입고, 상아궁에서 울려 퍼지는 악기 소리에 즐거워했지만(시편 45:8)(참고, 열왕기상 10:18, 아모스 3:15),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새 예루살렘 성전이 되셔서(계시록 21:22) 만국을 다스리매, 모든 만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게 됩니다.(계시록 5:13, 14)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은, 최고로 아름다운 성입니다.(계시록 21:10~23)
이 성은 신부된 성도들이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최상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곳입니다.
제 2연
왕의 신부의 영예(45편 9~15절)
신부는 오빌의 금으로 단장한 결혼 예복을 입고 왕의 우편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오빌의 금이란, 가장 귀한 금을 뜻한 말입니다.(참고, 열왕기상 9:28, 이사야 13:12) 따라서 신부의 단장은, 신랑되신 왕이 자신을 성별하고 영광의 관(冠)으로 치장하듯, 신부 성도 역시 죄에서 떠난 정결한 마음과 행실로(베드로후서 3:11)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재림의 주를 맞이하기 위해서 신앙의 정절을 의미하는 세마포를 입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계시록 19:7,8)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예비하기 전에, 먼저 행해야 할 한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편 45:10)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결혼할 신부는 지금까지 착념(着念)하고 있는 옛 것과 관습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브리서 12:1),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해 좇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13,14)(참고, 누가복음 9:62, 히브리서 10:38,39)
제 3연
왕의 나라에서 누리는 왕권(45편16~17절)
마지막 3연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즉, 왕의 아들들이 왕권을 계승받으며, 이를 통해 만왕의 왕께서는 그 이름이 만세에 기억되고 영원히 찬양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왕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相續)받는 후사로서의 권세도 함께 가진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16,17)(참고, 로마서 4:16, 에베소서 3:6)
한편, 요한 계시록에는 사도 요한의 형제가 되는 성도들을(계시록 1:9), 그리스도의 왕국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땅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고 그 인봉(印封)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시록 5:9,10)
다니엘서 12:4,9절에, 마지막 날에 될 일들을 간수하고 봉함하라 하여 오랫동안 봉함해 두었으나, 신약시대에 이르러 사도 요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록하게 하시고(계시록 1:11), 그리고 다 기록한 다음에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시록 22:10) 라고 부탁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일곱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 책을 취하시고(계시록 5:1,7) 이제 그 책과 일곱 인을 하나씩 떼실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나팔소리 같은 음성입니다.
일곱인은 종말에 나타날 재앙의 징조들을 보여주는데,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는 실제적인 책의 개봉과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예비적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등장하는 네 말과 그 탄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는 도구 즉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대행하는 자들로서, 마지막 때가 되기 직전에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일어날 것입니다.(계시록 6:1~8)
특히 계시록 6:2절의 흰말 탄 자는 기독교 복음주의의 최종 승리자가 될 자로서, 먼저 작은 책을 꿀 같이 먹고(계시록 10:9,10),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담대히 공개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환난에서 구원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깨어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나라(만국 백성)와 제사장이 된 구원 받은 성도들은(계시록 1:5,6/ 5:10)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새 노래를 부르며 최상의 복락(福樂)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새 노래’란 본래 성도들이 날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승리하게 하심으로, 늘 새로운 마음과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새로운 마음의 감격의 노래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현세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천년왕국과 무궁천국에 들어가서도 부를 새 노래입니다.(참고, 시편 96:1,2, 계시록 14:3 등)
결론적으로 이러한 찬송은 시편 45:15~17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6편
본 시(詩)는 예루살렘 도성(都城)이 극도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보전되었음을 찬양하는 시온의 노래입니다.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은 아마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시기라고 추정됩니다.(참고, 열왕기하 18:13/ 19:34~37) 따라서 기록자 시인은, 한 국가의 운명이 외적의 침략에 의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위태로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적 개입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신 그 은혜를,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본 시편은 시인 자신의 구원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패역한 세대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에 대한 찬양을 부각시킴으로, 오늘날 여러 가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저자 시인은 자신의 역사적 구원의 체험을,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보호하심으로 확장시키면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 시편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세 연(聯)으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연(聯)
자연(自然)이 격변하는 와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46편 1절~3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2절)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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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
본 시(詩)는 먼저 예루살렘의 도성(都城)이 극도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보존되었음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방어자가 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 주시는 장수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본 시 10절 말씀에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말을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해석하기 보다는 ‘너의 손을 약화시켜라’ ‘너의 노력을 멈추어라’ 등으로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사실상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마지막 한가지 더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일 것입니다.(참고, 출애굽기 14:13,14)
「참고 말씀」
“너희 염려(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 전서 5:7~9)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내일도 호시탐탐 우리를 노려 공격해 오는 육적, 영적 대적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북방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리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메시아)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미가 5:4~6)
여기서 ‘앗수르’를 역사상 존재했고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강대국 앗수르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대항해서 그들을 물리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앗수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나라가 땅끝까지 창대해진 종말 시기에 북방의 앗수르 세력이 궁이 둘이 있는 나라를 짓밟으러 내려올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목자, 여덟 군왕 같은 권세 있는 종들을 일으켜 세워 앗수르 세력을 물리치게 하신다는 예언으로 봐야 합니다.
그 날에 권세 있는 종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거나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사자(獅子)같은 강한 신앙으로 대적을 밟고 찢어 이기게 될 것입니다.(미가서 5:7,8)(참고, 이사야 8:6~8/ 37: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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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셀라)”(2,3절)
이 지구 땅의 일부가 지진이나 침식작용에 의해, 땅 밑으로 가라앉든지, 또는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진다든지, 바닷물이 해상 지진으로 인해 흉용하게 넘쳐 산을 덮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산’(山)은 안정적이고 견고한 심지(心志)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써, 산이 흔들린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장면의 강도를 극대화하고 있는 표현입니다.(참고, 이사야 24:19,20)
그렇지만 본문은 산이 요동할지라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믿음의 성도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참고」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요엘 3:15,16)(참고, 이사야 25:4, 예레미야 17:17)
성경이 말하는 지진(地震) 현상은 일반 지질학자들이 분석하는 원인과는 다릅니다. 지질학자들은 판구조론 즉 지구 표면을 구성하는 두께 1백 Km정도의 13개판이 서로 충돌하면서 지진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늘날 지구촌의 잦은 기상 이변과, 기근, 전쟁, 강진(强震)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는 말세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영적으로 더욱 경성하여 굳센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참고, 욥기 9:5~10, 시편 18:15, 나훔 1:5,6, 마태복음 24:6~8/ 21~22, 계시록 6:12~17/ 11:13/ 16:17~20)
따라서 최근 종말론적 현상의 하나로 처처에 발생하고 있는 대 강진(强震)은, 인간의 최첨단 과학 문명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땅 속에 묻어 버릴 수 있는 무서운 재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하나님의 지혜가 목사님께 충만하여라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