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1672년(선조 5)에 그려진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의 부친인 청계 김진(1500∼1580)의 영정으로 규격은 142×109cm이다. 청계는 151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인후 등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다 귀향하여 자녀교육에 전념하여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 및 소과에 급제하여 세칭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었다. 현재 김진의 영정(影幀)은 원본과 이모본(移模本)이 각각 1점씩 의성 김씨 종가 영당(影堂)에 봉안되어 있는데 원본은 김진이 73세 때인 1572년에 이모본(移模本)은 1765년에 제작되었음이 10대손인 김상수(金常壽)의 [지려유고(芝廬遺稿)]에 전한다. 원본은 저본(紵本)으로서 윗부분에 3폭, 아랫부분에 4폭을 이은 일곱 폭의 모시 바탕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는데, 당시 선유정이란 정자에 두었다고 한다. 머리에는 평량자(平凉子)를 쓰고, 녹색 직령(直領)을 입고 공수(拱手)자세로 호피 방석 위에 앉아있는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가부좌상(全身跏趺坐像)으로서 두 눈을 가늘게 내려 뜨고 있어 정적인 고요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양한 필선의 사용으로 인해 더욱 강조되는데 한 선을 쭉 연결해서 그은 명확한 경계를 가지는 선이 아니라, 가늘고 부드러운 몇 개의 선을 잇대고 때로는 겹쳐가면서 표현했기 때문에 단순한 묘사선이 가지는 것 이상의 분위기를 도출해내고 있다. 깔고 앉은 호피 방석은 원근이나 부피감이라는 회화적 표현 없이 직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어 유치한 표현 수법을 보여주나 방석을 깔았다는 상징성은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명상에 잠긴 듯 한 고요한 모습의 이 초상화는 자식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켰던 안동 땅 한 선비의 인자한 모습을 상상해 보게 한다.
*안동 청계(오파) 대종택
靑溪宗宅(청계종택)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번지 문화재 보물 제4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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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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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 보물 450호 (1967. 6.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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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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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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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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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16세기에 불 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 선생이 재건한 것이라 전하는 가옥이다. 의성 김씨가 500여년을 세거하고 있는 내앞(川前)마을에 있다. 16세기말 학봉선생이 명나라 사행길에 북경에서 그곳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그려다가 완성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한다.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와 기타 부속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사(巳)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다른 口자형 평면과 달리 안방이 외부 쪽에 높이고 커다란 대청이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동향하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오히려 깊숙히, 별채처럼 외진 곳에 배치하여 내객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지만 남자 주인의 거처방으로서 기능은 약하다. 모채(안채와 사랑채)는 1.6m가량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바깥채보다 높다. 사랑채에 이어지는 부속채는 완전한 2층 구조로 되어 윗층은 서고로 사랑의 대청과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되어 있다. 집의 외관은 가지런하게 수평으로 이어진 지붕 위엘 4개의 합각지붕으로 변화를 주어 아름답고 조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운천 호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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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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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 보물 484호 (1968. 12.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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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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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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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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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용(金涌 1577∼1620)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에 의주로 피난가는 선조를 호종하면서 지은 일기체의 수고본(手稿本)이다. 金涌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으로 안동에서 출생하였으며,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에서 병과(丙科) 1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子)·검열(檢閱) 등을 역임한 후 사환(仕宦)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웠고, 다음 해에 선조(宣祖)가 피난한 곳으로 쫓아 올라가 왕을 호종하면서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독운어사(督運御史)·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등에 임명되어 전란의 타개에 노력하였으나, 1598년(선조 31)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외직(外職)에 나가게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태상사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재직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크기는 가로 16cm, 세로 30cm이며, 3책으로 되어 있으며 표제(表題)는 '운천선조호종일기(雲川宣祖扈從日記)'이다. 내용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義州)로의 피난중에 직접 체험하고 견문한 사실들을 그대로 기록(記錄)한 것으로, 김용 자신의 사생활은 물론 당시에 일어난 정치·군사·외교 등 여러 부문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임난의 타개와 이 시기에 일어난 사회상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음으로 당시 사회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밖에 김용의 저술로는 {경연진대(經筵秦對)}3책이 있는데, 이는 그가 경연관(經筵官)으로 활약하면서 선조에게 시강한 내용을 자필로 적은 것으로서 이 역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후일 그의 저서들은 {운천집(雲川集)}6권 3책이 간행되었다.
*문충공종가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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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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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 보물 905호(1987. 6.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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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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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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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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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적(典籍)은 조선의 문신·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일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으로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에서 병과(丙科) 23人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서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이어서 이·병조(吏·兵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고 1576년(선조 9)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다음해에 명에 다녀왔다. 이어 대간·홍문관(臺諫·弘文館)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적정을 살피고 다음해에 돌아 왔다. 이 때 민심의 동요를 안정시키기 위해 적의 침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어 의병을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임란의 타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가 晋州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후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해원사록(海援 錄)"·"북정록(北征錄)"·"학봉집(鶴峯集)"등이 있다. 이 전적은 56種 261冊으로 먼저 간본(刊本)은 1418년(태종 18) 계미자(癸未字)의 복각자(覆刻字)로 간행된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2책, 1425년(세종 7)에 인쇄된 경자자판(庚子字版)의 "사기(史記)" 14책을 비롯하여 김성일이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등의 내사본(內賜本) 등이 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것들로서 28종 156책에 달한다. 그리고 필사본은 김성일의 자필초고본(自筆草稿本)인 "호당삭제(湖堂朔製)"·"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해원사록(海援 錄)"·"조천록(朝天錄)"·"북정록(北征錄)"등을 비롯하여 각종 서간(書簡)을 첩(帖)으로 만든 "선현유묵(先賢遺墨)"·"용사사적(龍蛇事蹟)"등 28종 85책이다. 이들은 매우 방대하고 우수한 것들이며, 그 중에는 희귀본이 상당히 많아 역사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곧 이들을 통해 조선 전기의 여러 가지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들의 간행에 사용된 활자가 계미자복각(癸未字覆刻)·경자자(庚子字)·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갑인자복각(甲寅字覆刻)·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을해자(乙亥字), 그리고 각종 목판본 등이 있어 당시의 인쇄술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는 동시에 이들을 통해 다른 전적들의 간행 연대도 파악할 수 있다. 또 필사본의 경우 김성일의 자필초고본(自筆草稿本)이 11종에 달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김성일이 사환(仕宦)중에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의 정치·외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학봉(문충공)종가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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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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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 보물 906호 (1987. 6.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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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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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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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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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조선의 문신·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관한 것으로 17종 242점에 달하는데, 대부분이 김성일 및 그의 후예들에 관련된 각종 고문서(古文書)들로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서·유서(敎書·諭書) 각 1점 : 1592년(선조 25) 김성일이 경상도(慶尙道)에서 재직하면서 받은 것 2. 유지(有旨) 3점 : 1578년(선조 11), 1592년 김성일이 받은 것 및 1834년(순조 34) 아산현 감 김진(牙山縣監 金鎭華)화가 받은 것 3. 교첩(敎牒) 및 교지(敎旨) 59점 : 김성일과 그의 후손들이 받은 각종 임명장 4. 차정첩(差定帖) 4점 : 1630년(인조 8) 이후 김성일의 후손들이 받은 임명장 5. 시권(試券) 7점 : 김성일과 그의 증손(曾孫)의 각종 시험(試驗) 답안지 6. 시호서경(諡號暑經) 2점 : 1691년(숙종 17) 김성일의 시호(諡號)와 관련한 서경문서(暑經 文書) 7. 품정절목(稟定節目) 1점 : 1622년(광해군 14) 안동 여강(廬江)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운영 에 관한 절목(節目) 8. 입안(立案) 5점 : 16세기 후반 이래의 가옥·노비·전답(家屋·奴婢·田畓) 등에 관한 안동부(安 東府)의 입안(立案)
그 외 등장(等狀) 6점, 호구단자(戶口單子) 50점, 분재기(分財記) 6점, 명문(明文) 34점, 완의(完議) 3점, 通文 34점, 致祭文 1점, 設計圖 3점 등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조선 후기의 簡札·祭文 등을 위시한 각종 고문서가 85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율리고택
栗里古宅(율리고택) 안동시 풍산읍 막곡 2리 248번지 중요민속자료 제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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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가옥
지 정 : 중요민속자료 제181호 (1984. 1. 10)
소재지 :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33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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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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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의성김씨 23대손인 김후(金煦 1613∼1696)의 가옥이다. 그의 장인 권관풍당(權觀風堂)이 1630년경에 건립하였다 한다. 김후는 자 춘향(春鄕), 호 도암(陶菴)으로 운천(雲川) 김용(金涌)선생의 손자이다. 이 집은 옛 지명을 따라 의성김씨 율리종택이라 하였다.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밭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동향으로 자리잡았는데 축대를 높이 쌓아 올려서 집 전체가 솟아 보인다. 집 앞쪽은 넓게 시야가 열려 있으며 앞쪽 좌측 약 200미터 거리에 풍산으로 가는 국도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있다. 집 형태는 사랑, 대문간 및 외양간 등으로 구성된 一자 앞채와 경자형 안채가 결합되어 口자를 이루었지만 전면의 양쪽에 1칸씩 날개가 돌출되어 있다. 앞채는 높게 축대를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방주를 세웠다. 정면 6칸중 대문간에서 좌측으로 3칸이 사랑부분인데 사랑방 2칸에 이어 끝에 마루방 1칸을 두어 좌익을 이루었다. 사랑채 부분의 전면 3칸에는 동마루를 놓고 낮은 난간을 돌렸으며 마루밑은 시멘트 벽돌을 쌓아 막았다. 마루방의 북벽 윗쪽에는 처마밑에 달아맨 벽감이 보이는데 문을 반닫이장의 문처럼 달아놓았다. 대문간 우측에는 외양간을 1칸 두었고 우측 끝에 온돌방을 1칸을 돌출시켜 우익을 이루었다. 이 앞채는 집이 퇴락하여 1934년에 해체하여 중건하였다는데 안채에 비해 재목도 빈약하고 개구부도 커졌다. 안채의 중앙부는 정면 2칸의 안대청이다. 대청의 좌측에는 윗머리부터 도장방과 사랑방이 1칸씩 놓여있고 마당을 따라 부엌과 책방이 연달아 놓여져 앞채의 사랑방과 접하였다. 대청 우측에는 2칸통의 안방이 놓였고 그 앞에 2칸 길이의 큰부엌이 배치되어 앞채의 외양간에 닿았다. 안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5량가인데 방주위에 보아지가 없이 들보를 사괘맞춤으로 얹어놓았으며 종보위에는 각대공을 세우는 등 간소한 결구를 보이고 있으나 재목은 비교적 후하게 사용하였다. 대청 뒷벽은 중방 하부에 판벽을 꾸미고 각간에 두짝열개 널문을 달았는데 창문틀의 상하면에 가운대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이 남아 있다. 사랑채 부분은 중건으로 인하여 다소 변형이 된 것으로 보이나 안채는 후한 재목과 간소한 결구로 소박한 품위를 지니고 있으며 평면구성 및 가운데 설주의 유구 등과 더불어 조선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의성김 문충공(서지)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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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가옥
지 정 : 중요민속자료 제182호 (1984. 1. 10)
소재지 :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311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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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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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의 묘제(墓祭)를 위해 건립된 재사이다. 정확한 건립년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재사에서 약 50m쯤 떨어져 있는 학봉신도비의 건립년대가 1634년(인조 12)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볼 때 신도비보다 늦은 1700년대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학봉의 묘소가 있는 산하 동편기슭에 동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자형 재사의 정면 5칸 루다락은 루하에 원주를 세워 어칸에 대문을 내고 광과 외양간을 두었으며 루상은 각주를 사용하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루마루의 정면과 좌측면 벽은 판벽이며 매칸의 중앙에 양개널문을 내어 외부에서 볼 때는 폐쇄되었으나 안마당쪽으로는 개방하여 헌함을 설치하였다. 이 곳은 재사 후 음복석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3량가로 제형판대공을 세웠으며 보 밑에 깔린 보아지는 수평으로 길게 뻗었다. 루하 어칸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변이 3칸인 방형 중정(中庭)에 이르는데 정면에 높이 쌓은 자연석 축대위에 각주를 세운 3칸 정면 대청이 설치되어있다. 우물마루를 깔아 놓은 대청의 상부가구는 3량가로 제형판대공을 세워서 마루대공을 올려 놓았고 뒷벽은 각칸의 중앙에 두짝열개 널문을 달았다. 대청 좌측의 마당쪽으로 나 앉은 안방은 대청으로 직접 출입할 수 없으며 윗머리의 뒷방을 통해야만 한다. 대청의 우측에는 2칸 웃방과 마루방 1칸, 사랑방 2칸이 차례로 배열되어 앞채의 루마루 측면과 직교하였고 안대청에서 루마루까지는 난간을 세운 쪽마루로 연결하여 동선이 매우 원활하다. 전면이 다락집으로 꾸며진 口자형 재사로서 경사지를 이용해 건축한 수법이 눈길을 끈다.
*知禮 오류헌(五柳軒)
五柳軒(오류헌)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282번지 중요민속자료 제184호
지 정 : 중요민속자료 제184호 (1984. 1. 10)
소재지 :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282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김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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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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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숙종조에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선생의 셋째 아들로 좌승지에 증직된 목와(木窩) 김원중(金遠重)이 임동면(臨東面) 지례동(知禮洞) 천곡(川曲)에 살림을 날때 지은 가옥이다. 13대째 내려살았다. 안채는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나 사랑채는 소유자의 조부가 1920년에 크게 개축하였으며, 1980년대에 임하댐 건설로 천곡이 수몰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는 북서쪽에서 뻗어내린 산세를 의지하여 동남에서 서북간으로 흘러가는 반변천(半邊川)을 거슬러 바라보는 동남향으로 앉아 있었다. 서쪽으로 경사져 올라간 대지 주위에는 방형으로 토담을 쌓고 동남향한 5칸 행랑채의 중앙에 솟을대문을 내었다. 문간에는 중턱대문을 달았고 좌우에는 방과 고방을 각각 1칸씩 대칭으로 배치하였는데, 외벽은 검은색이 도는 냇돌을 백회로 곱게 화방쌓기를하여 멋을 내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건너서 중문간이 있는 ┸형 사랑채가 서 있는데, 뒷쪽의 「 형 안채와 튼 口자를 이루고 있고, 사랑마당 좌측에 외양간이, 안채의 우측에 방앗간이 놓여졌으며, 담 밖 뒤쪽 낮은 언덕에 2칸 사당을 배치하였다. 사랑채의 정면 5칸에는 툇마루를 깔았고, 뒤로 좌측의 중문간 쪽에서부터 2통칸 사랑방과 2통칸 사랑마루방에 이어 1칸 감실방을 두었는데 감실방 앞의 툇마루만은 한단 더 높이고 헌함을 돌려 루마루처럼 꾸몄다. 사랑마루방은 5량가이고 종보위에 둥근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올렸다. 사랑방 뒤에는 부속된 마루방과 안마당으로 통하는 샛마루를 두었고, 뒤에는 샛방과 책방을 배치하였다. 감실방 뒤에도 한칸을 두어 벽감을 설치하였는데 줄을 당겨서 상하로 승강할 수 있게하였다. 샛마루와 샛방 뒤에는 모방과 고방을 두어 안마당에서 쓰도록 하였다. 사랑채 좌측에 접하여 한단 낮은 지붕으로 구성된 중문간채는 사랑방에 접한 중문간 좌측으로 아랫방 2칸과 아랫마루 1칸 순으로 배열되었다. 안채는 안마당을 향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2칸 안방과 그 앞에 2칸 부엌이 마당을 향하여 뻗어 있고, 우측에는 상방 1칸이 있다. 안방부엌의 부뚜막 윗벽에는 벽돌크기의 네모난 구멍을 5개소 내어 구들골이 막혔을 때 뚫을 수 있게 하였다. 자연석 초석 위에 방주를 세웠고 3량가로 각대공 위에 마루대를 얹었다. 사랑마당, 안마당, 뒷마당 등이 조선시대 사대부주택의 내외 생활영역에 따라 각 공간이 건물과 담장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승강식 감실과 구들골을 청소할 수 있는 시설 등 흥미있는 구조도 갖추고 있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의 섬세하고 우아한 구조기법도 눈길을 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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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을 모두 볼 수가 없어서 아쉽습니다.
사진은 다시 올리던지 볼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두루 두루 구경 잘 하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