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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 서원 |
공자를 배향하는 서원은 전국에 3개 서원이 있는데 이북 함흥의 문회서원과 단천의 복천서원 그리고 휴전선 이남에서는 오봉서원뿐인 유일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공자·주자·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학생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강릉부사(江陵府使) 함헌(咸軒)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공자 진영(孔子 眞影)을 가져와서 1562년(명종 17)에 서원을 건립하고 공자의 진영을 모셨고, 1782년(정조 6)에는 주자(朱子)의 영정을 모셨으며, 1831년(순조 31)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모셨다. 오봉서원의 규모는 묘우(廟宇) 3간, 전랑(前廊)[내삼문과 연결된 건물]과 신문(神門) 5간, 강당(講堂) 10간, 좌우재랑(左右齋廊) 각 6간, 풍영루(風詠樓) 10간, 서책고(書冊庫) 2간, 대문 2간이었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아니었으나 공자의 영정을 모셨으므로 사액서원과 같이 토지 3결을 국가에서 지급하였으며 서생(書生)은 20명을 모집하여 교육하였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1902년에 철폐된 오봉서원지에 다시 단을 쌓고 9월 상정일(上丁日)에 제향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집성사(集成祠)를 중건하였고, 그 후 칠봉사(七峰祠), 강당(講堂) 등을 건립하였다.
1806년에 건립한 오봉서원기적비(五峰書院紀蹟碑)와 1856년에 건립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연계관광지]
o 오봉서원 → 오죽헌·시립박물관 → 선교장 → 경포대 → 참소리 박물관 → 소금강 o 오봉서원 → 대관령박물관 → 통일공원 → 등명락가사 → 정동진 → 심곡·금진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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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 서원 |
본 송담서원은 언별1리에 소재하며 1973년 7월13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계속 관리되고 있다. 이 서원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학생을 교육하던 곳이다.
1624년(인조 2)에 강릉부사(江陵府使)와 강릉 유생(江陵 儒生) 30여 명이 구정면 학산리 왕고개 위에 석천묘(石川廟)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1630년(인조 8)에 완성하고 율곡 선생을 봉안하였다. 1652년(효종 3)에 현 위치로 이건 하고 송담서원이라고 개칭하였다. 1660년 3월에 국가로부터 송담서원(松潭書院)이란 액자(額字)를 하사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1736년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정호(鄭澔)가 찬하고 글씨는 민진원(閔鎭遠)이 썼다.
송담서원의 규모는 묘우(廟宇) 6간, 월랑(月廊) 7간, 동재(東齋)·서재(西齋)[유생들이 공부하던 건물] 각 3간, 강당 10간, 광제루(光霽樓) 3간, 서책고(書冊庫) 3간이었고, 원생 30여 명이 공부하였다. 1871년(고종 8) 5월 13일,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가, 1905년에 송담재(松潭齋) 1간을 건립하고 다례(茶禮)를 지냈다. 1971년에 송담사(松潭祠) 6간이 건립된 것을 비롯하여 이후 동·서재(東·西齋)·삼문(三門) 등을 복원하였다.
[연계관광지] o 서원⇒마을관리휴양지⇒기생바위⇒계곡내오토캠핑장⇒단경댐(공사중)⇒담정농원 o 서원⇒안인해수욕장⇒통일공원(잠수함침투지)⇒등명사오층석탑⇒등명해수욕장⇒정동진역⇒조각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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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락가사 |
등명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강릉도호부 동쪽30리에 위치한다하며 등명이라는 명칭은 강릉의 등화와같은 존재이며 또한 서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삼경(심야)에 뒷산(괘방산)에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과거에 급제한다하여 연유 하였다 한다. 현재 등명사는 폐찰이되고 락가사가 세워졌음 락가사는 대웅전,극락전이있으며, 1977. 10. 16. 인간문화재 유근형 옹이 심혈을 기울여 청자로구운 오백나한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오백나한의 모습이 움직이는 듯 모습이 모두 달라 더욱 돋보인다.
[연계관광지] ㅇ 등명락가사⇒등명해수욕장⇒모래시계공원⇒조각공원⇒집필횟집단지⇒헌화로 ㅇ 등명락가사⇒잠수함침투지⇒안인해수욕장⇒염전해수욕장⇒송정해수욕장⇒경포해수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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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사 |
선덕여왕 3년(624년)에 현장율사가 창건하였으며 - 1986년 독서재를 불당으로 바꿈 - 1946년에 사찰을 중창 - 1958년 안국정쟁때불탄 법당을 건립 ·1967년과 1968년에 요사채 1동씩 신축 - 1974년 청우당, 1978년 범종각, 1986년에 2층의 삼성각을 지음 법왕사의 성보로는 현재 법완사라는 편액이 붙어있는 법당이 있고 1989년에 봉안한 관세음보살좌상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한 극락회상도가 있으며 청우당안에는 1958년 법당신축때 봉안하였던 석가여래심존불을 옮겨 모셔 놓았다. 이 심존불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관세음보살 우측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로 구성되어 있다.
[ 연계관광지] o 학산.굴산사지 → 참소리박물관 → 경포대 → 선교장 → 오죽헌.시립박물관 → 소금강 o 학산.굴산사지 → 신복사지 → 강릉통일공원(잠수함침투지) → 등명락가사 → 정동진 → 심곡.금진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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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사 |
동해안 7번 국도 연곡에서 소금강 방향으로 달리다가 유등리 도로에서 1km정도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산속에 자리한 백운사는 신라 헌강왕시대에 도운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폐사시기는 확실치 않으며 조선시대 인조때를 전후하여 남진혁의 백운사에서 율곡과 최옥이 머물렀다는 사실이 동로승람에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중엽까지 있었던으로 여겨 진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밭에 흩어진 주초석과 축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 할 수 있었다고 하나 알길이 없다. 일설에는 이 절의 쌀씻는 물이 행정천으로 흘러 내렸다고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청월화상이 오대산상원사에서 수도하다가 이 절터를 발견하고 1946년 초암 3칸을 짓고 지내오다가 1954년에 현재의 규모와 같은 사찰을 이루었으며,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등이 모두 근간에 세워진 것이다.
사찰 입구 좌측에 최근에 세운 부도 2기가 있는데 1954년 사찰 중건시의 향봉당과 청월당이 부도의 주인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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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 |
강릉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10분 정도 달리면 사천면에 이르는데 사천에서 서쪽방향으로 약 10Km가량 들어가면 아늑한 산속에 용연사가 나타난다.
구전에 의하면 강원도에 여러 사찰측에서는 1670년(현종11)을 전후하여 왕장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한때 많은 승려들이 수도하였고 6.25때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1953년 한 비구니에 의하여 대웅전과 요사채가 중건되었고, 1958년에 요사채 1동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1983년 원통보전과 삼성각을 건추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석가모니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뒤의 탱화는 목각으로 조성하였다. 삼성각에는 여러 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이들 모든것이 조성된 시기는 오래지 않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내에는 1967년에 세운 높이 3.6m의 5층석탑 1기가 있는데, 원래부터 있었던 기단부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다.
탑의 옆에는 귀부가 있는데 이절에서 가장 오래된 석물들 중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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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
강릉에서 출발하여 대관령 쪽으로 달리다가 성산면소재지를 지나 2km가량 가면 오른쪽으로 보광리로 가는 좁은 도로가 나타난다. 고속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므로 지나치기 쉽다. 이 갈림길에서 계곡을 끼고 포장길을 따라 약 4km가량 들어가면 보광초등학교가 있는 세갈래길에 이른다. 이 곳에서 왼쪽으로 포장도로(1km)따라 가다가 완만한 비포장 산길을 4km정도 올라가면 왼쪽에 보현사 입구의 부도밭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절까지의 거리는약 300m이다.
보현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신라시대에 불교 4보살 가운데 한 분인 보현보살이 직접 창건하였다는 설이며, 신라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돌로된 배를 타고 천축국로부터 강릉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문수사가 지금의 한송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완공되자 보현보살은 말하였다.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 보현보살이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 현재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졌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으니 이것이 보현사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낭원대사의 창건설은 한 고승의 생애가 뒷받침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이 설을 따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창 경내의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제192호)를 참고하여 대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절의 창건자는 대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낭원대사는 보현사를 크게 중창하고 참선도량을 이룩하여 이절을 사굴산문의 대표적인 선찰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낭원대사의 창이후 이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대관령을 분기점으로 하여 내문수도량 월정사와 함께 외보현도량의 명성을 이어 수행승의 요람으로 이어 왔다. 비록 자세한 사찰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입구에 있는 20여기의 부도가 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산중사찰의 정적과 자연의 아름다움, 신앙과 수행의 주건을 갖춘 사찰로서 현재 보현사에는 대웅보전(문화재자료 제37호)을 비롯하여 영산전, 삼성각, 만월당, 범종각이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제191호과 보물 제192호 낭원대사오진탑비가 있다. 이 외에 20여기의 부도와 대웅전앞에 사자모형의 석물과 석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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