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다 태우지 못한 불이 아직 몸속에 끓고 있는데 지나가는 누구라도 좋다 몸의 유연한 선과 정열을 읽어내는 사람이라면 값이 문제랴 등잔은 목을 길게 빼고 사람을 부른다
제가 등잔이 목을 길게 빼고 부른 그런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배흘림 등잔 불빛 아래서
'배흘림 등잔'의 불빛은 세상을 아늑하고 따듯하게 비춰줍니다. '그 옛날 다 태우지 못한 불'에 시인이 심지를 당기자 '푸르고 둥근 세상'이 환하게 열립니다. 바늘 끝처럼 파란 불꽃이 날카로운 시인의 감성으로 마법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 세상에서는 '돌들이 햇볕에 익어가는 소리', 그늘이 계곡으로 걸어나오는 소리' 등이 계곡의 물소리와 잘 어울립니다. 햇볕은 아른아른한 입자들의 움직임으로 계곡에 깔린 혹은 불쑥 솟은 돌들을 반질반질하게 닦아줍니다. 햇볕이 내려앉는 곳마다 돌들의 등어리는 따듯하게 데워져 무감각하고 묵직해 보이는 그것들이 체온을 가진 생명으로 발전합니다. 시인은 빛의 눈부심과 돌의 상승하는 체온으로 아늑해진 풍경을 돌들이 햇볕에 익어가는 소리라는 청각적인 표현으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그 풍경은 아버지와 손자의 바둑 두는 소리라는 마지막 붓질로 완성됩니다. 빛이 보여주는 풍경을 소리로 들려주는 시인의 기교가 돋보입니다.
'뙤약볕 속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인에게는 녹음의 출렁임이 언뜻 '강'의 물결로 보입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더욱 확대되어 팔월의 햇살이 초록 이파리에 꽂히는 순간 일어나는 스팽글 같은 빛부심을 '은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녹음과 햇살의 만남은 강물에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은어의 활기찬 파도타기로 환치됩니다. 뙤약볕의 강렬함과 건강한 여름 산의 모습이 싱싱하게 살아납니다. 마침내 숲속 강물에서 파도 타기를 하던 은어는 꼬리지느러미로 세상을 짚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전환의 국면을 맞이합니다. 여기까지 전개되어온 수평의 구도를 배경삼아 섬광처럼 은어의 날아오름이라는 수직의 이동이 화면을 압도해버립니다. 은어의 비늘과 햇살의 비늘이 한 몸으로 어우러지면서 '갇힘'으로 부터의 '풀림'이라는 자유의 기쁨을 선사합니다. 하늘은 은어 한 마리인 우리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는 숲속 보다 크고 넓은 강물입니다. 그 순간 산의 정상에서 숲속을 내려다보는 '나'와 하늘 강물에 풀어지는 '나'는 동시에 터지는 햇살 속에 그저 사라질 뿐입니다.
시인에게 자전거는 시의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소재가 됩니다. 씽씽 잘 달리는 자전거가 못되는 고장난 자전거, 자물쇠가 채워져있는 자전거로 기능성을 유보하고있습니다. '알뜰시장에 헐값으로 몸을 내어 놓았다'는 배흘림 등잔처럼 결핍과 좌절의 의미로 읽힙니다. 등잔에서 심지가 잘 탈때는 심지는 보이지않고 불빛만 보이듯이 잘 달리는 자전거 바퀴의 바퀴살은 빠른 회전 속에서는 그냥 묻혀버립니다. 달림을 멈추었을 때, 혹은 부러졌을때 비로소 바퀴살은 형체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같아 잘 나아갈때 행복할때는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아플 때, 좌절했을 때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안보일 정도로 빠른 회전으로 몸체를 밀어내는 바퀴살은 바퀴의 테두리에 갇혀있을 뿐입니다. 몸체는 달려도 바퀴살은 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리뛰기 일 뿐입니다. 헛돌고 있는 바퀴, 부러진 바퀴살에서 어떻든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고물이 된 등잔의 꼿꼿한 모가지, 시인을 포함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고장난 바퀴를 일으켜세우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오기가 아니라 빗방울이나 추운 겨울의 눈입니다. 자연 치유력과 시간의 힘을 넌지시 일러줄만큼 손옥자 시인의 사고는 깊습니다.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는 것은 배흘림 등잔 뿐이 아닙니다. 시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사물과 자연이 엄연하게 살아있다는 자존심의 발로입니다. '낚시'에서 낚시 바늘에 수없이 찔렸어도 '모가지 꼿꼿이 세우며 꿈틀대는' 바다로 일어섭니다. 그의 시에서 의성어가- '탄력 있는 꼬리지느러미 탁-세상 치고'<뙤약볕 속에서>, '투둑투둑 빼꼼히 열린 창문을 치며'<난꽃 비>, '침묵의 껍질을 깨고 툭-'<겨울 철쭉>- 자주 등장합니다.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은 닫힌 세상의 갑갑함을 의성어를 빌어 열린 세상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손옥자 시인에게는 첫 시집을 낸다는 일이 심중에 갇혀있던 말들을 밖으로 풀어놓는 작업이 되었을 것입니다. 환한 세상으로 나온 시인의 시가 앞으로 어떤 행보로 나아갈지 궁금해집니다. 위로 꼿꼿이 세웠던 모가지로 옆으로 아래로 돌아보는 시야의 확장을 기대해봅니다.
첫댓글 선생님, 눈물나도록 감사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까페가 엉망입니다. 이런 곳을 지속적인 사랑으로 들려주셔서 격려해 주시고 이렇게 좋은 글도 실어주시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요? 제가 기막힌 차 한 잔 대접하면 어떨까요?
시인님 이글 내가 손옥자시인님의 홈피에서 옮기기만한거 아시지요 ..읽어보니..누가 썼다고 이름이 없어서 혹시 내가 쓴걸로 오해하실까봐서요.. 난 손옥자시인님의 시집도 못받았걸랑요?
주경림샘 글이랍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이미 지운 제 홈피에 실렸던 사진도 못가져온 것이 태반이라서...... 보내주신 좋은 사진들이 많이 있었는데...... 재빠르게 ?겼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보다는 기술부족이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