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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議政府左參贊贈諡思簡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안공(安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및 서문(序文)
공(公)의 성(姓)은 안(安)이요, 휘(諱)는 윤손(潤孫)이며, 자(字)는 홍조(弘祖)로 광주(廣州) 사람인데, 전조(前朝)의 대장군(大將軍)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이다. 증조(曾祖) 휘 성(省)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내고 사간공(思簡公)이란 시호를 추증받았고...
광주인(廣州人) : 본관(本貫)이 광주(廣州)라는 의미임.
전조(前朝) : 조선 시대에 고려(高麗)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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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議政府左參贊贈諡思簡公。祖司贍署令諱鐵山。贈吏曹參議。考龍安縣監克辨。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皆視公秩。妣貞夫人金氏。成均館司成最之女。以景泰庚午。生公。成化甲午。連捷進士生員試。丙申別試。乙科第三人。出身初授承文院正字。選入藝文館爲檢閱兼經筵典經,春秋館記事官,弘文館正字。次陞著作,博士,脩撰,副校理。仍帶知製敎。餘如故。俄拜司憲府持平。遷兵曹正郞。丙午。以北道疲弊。特授會寧府判官。文官之出守朔方。自公始。秩滿階朝奉。爲軍器寺僉正,司憲府掌令,成均館司藝。征西都元帥李克均。薦爲從事官。壬子。以親老丐外。守錦山郡。嚴以御吏。寬以待民。闔境晏然。戊午。考滿而遞。除宗簿寺僉正。陞司僕寺副正。己未。以有武才。超擢折衝。拜全羅右道水軍節度使。辛酉。遞爲僉知中樞府事兼內禁衛將。移拜司諫院大司諫。以正朝使赴京。還授弘文館副提學。遷刑曹參議。丁外憂。服闋。拜僉知中樞府事。尋擢嘉善。再以正朝使赴京。丙寅。拜黃海道觀察使。丁卯。漢城左尹,司憲府大司憲。戊辰。拜咸鏡北道節度使。力辭不赴。己巳。觀察江原道。遷同知中樞府事兼都摠府副摠管,刑曹參判。庚辰閏八月。以同知中樞府事兼同知成均館。卒于第。享年七十一。公十歲喪考。篤志力學。夙夜不懈。大夫人憫其稚弱。強止之。垂泣不輟。遂捷三試。成廟朝。以翰林嘗侍夜對。講罷。經筵官皆退出。都承旨任士洪還入俯伏。公亦隨入。士洪不虞公在後。遽啓曰。近者。臺諫輕易其言。請往往譴責之。上答曰。人主之威。非特雷霆。譴責以隨之。誰敢盡言。公以此言大書史冊。於是。始知士洪之姦。駁竄義州。士論偉之。其通判會寧也。政尙廉簡。民戎便之。一日。虜潛入境。掠人畜而去。城底野人懼其譴罷。自追刷還。其見愛慕如此。嘗赴京。寓玉河館。朝貢野人。先寓于此。聞公之至。咸來謁見曰。公之政治。我土之人。至今稱嘆云。平生淸素自守。不營產業。性又至孝。自幼隨母而居。若値佳辰令節。必備酒饌會子孫。盡親歡乃已。公配金氏。繕工監正元石之女。曾祖卽平陽府院君承霔。婦道甚備。閨門之內。肅穆如也。享公之榮。壽八十一而終。生男女各三。男長曰子欽。提檢。次曰子明。副司直。次曰子文。進士。女長適掌樂院正權晟。次適典籍李文昌。次適察訪尹來莘。提檢娶僉正辛禹鼎之女。生七男。男長士彥。登乙酉科。今爲淸州牧使。次士雄,士英,士俊,士豪,士贇。俱進士。士傑幼學。司直娶護軍洪汝楫之女。生一女。進士娶郡守尹伯焞之女。生三男。曰士挺,士擢,士振。皆業儒。曾孫男女若干人。噫。安氏之福。其未艾也。何其子孫之多也。余釋褐入仕。累累望公於朝著。充然其容。溫然其色。信乎有德者必有後也。今者。乞養南來。門雀可羅。進士君惠然見顧。以銘事請。烏可辭乎。銘曰。 維岳降精。維國之英。早擅芳名。從師負笈。 學如不及。才華燁燁。應擧馳辭。獨對丹墀。 若摘頷髭。邇英夜對。直書不貸。憸人乃退。 禁中頗牧。出撫南北。民夷悅服。亞卿之授。 七袠之壽。天賦攸厚。滿眼兒孫。玉樹蘭芬。 式高于門。回視甘泉。實惟舊阡。草樹芊綿。 螭首隱映。載德及行。過者起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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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안공(安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및 서문(序文)
공(公)의 성(姓)은 안(安)이요, 휘(諱)는 윤손(潤孫)이며, 자(字)는 홍조(弘祖)로 광주(廣州) 사람인데, 전조(前朝)의 대장군(大將軍)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이다. 증조(曾祖) 휘 성(省)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내고 사간공(思簡公)이란 시호를 추증받았고, 할아버지는 사섬서 영(司贍署令)을 지낸 휘 철산(鐵山)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낸 휘 극변(克辨)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품질(品秩)에 견준 것이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낸 김최(金最)의 딸인데 경태(景泰) 경오년(庚午年, 1450년 세종 32년)에 공을 낳았다. 성화(成化) 갑오년(甲午年, 1474년 성종 5년)에 진사시(進士試)ㆍ생원시(生員試)에 연이어 합격하고, 병신년(丙申年, 1476년 성종 7년) 별시(別試)에 을과(乙科) 제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처음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어 경연 전경(經筵典經)ㆍ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ㆍ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겸하였고 차례로 홍문관의 저작(著作)ㆍ박사(博士)ㆍ수찬(修撰)ㆍ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여 계속해 지제교(知製敎)를 띠었으며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다. 얼마 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겼다.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년)에는 북도(北道) 지방이 피폐해졌다하여 특별히 회령부 판관(會寧府判官)에 임명되었는데, 문관(文官)으로서 북방(北方)에 나가 수재(守宰)가 되기는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자 조봉 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으며, 서쪽을 정벌하러 가는 도원수(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이 공을 천거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년)에는 어머니가 연로함으로 인해 외직(外職)을 청하여 금산 군수(錦山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아전들을 통제하는 데는 엄격하고 백성들을 대할 때는 관대하였으므로 온 군이 편안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된 후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에 임명되었고,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으로 승진되었다. 기미년(己未年, 1499년 연산군 5년)에 무재(武才)가 있다하여 관계를 뛰어 넘어 절충 장군(折衝將軍, 정3품 당상관(堂上官))에 발탁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가 신유년(辛酉年, 1501년 연산군 7년)에 체직되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겸하였다. 그 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옮겼고, 정조사(正朝使)로서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옮겼다. 어머니 상을 당하였고 3년상을 마치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발탁되었고, 다시 정조사로서 명나라 서울에 갔다.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ㆍ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년)에 함경북도 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힘써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己巳年, 1509년 중종 4년)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며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府摠管)ㆍ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겸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년) 윤 8월에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서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1세였다. 공의 나이 10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워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자 대부인(大夫人)이 공이 어리고 약한 것을 애처롭게 여겨 억지로 말렸으나, 공은 눈물을 떨구면서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세 번의 시험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성종조(成宗朝)에 한림(翰林)으로서 일찍이 임금을 야대(夜對, 임금이 밤에 경연(經筵)을 여는 일)에 모셨는데, 강독이 끝나자 경연관(經筵官)이 모두 물러갔으나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은 다시 들어가 부복(俯伏)하였고, 공 역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임사홍이 공이 뒤에 있음을 헤아리지 않고 느닷없이 아뢰기를, “요즈음 대간(臺諫)이 말을 경솔하게 하니, 청컨대 종종 견책하소서.”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인주(人主)의 위의(威儀)는 비단 격렬한 천둥일 뿐만이 아닌데, 여기에 견책이 뒤따른다면 누가 감히 할 말을 다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 대화를 사책(史冊)에 크게 써서 표시함으로써 이에 임사홍의 간악함이 비로소 알려져 그를 논박하여 의주(義州)로 귀양 보내게 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이를 장하게 여겼다. 공이 회령 통판(會寧通判)으로 있을 때 정사는 염간(廉簡)을 숭상하여 백성과 군사들이 편안해 하였다. 하루는 오랑캐가 몰래 경계(境界)로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간 일이 생기자, 성(城) 밑의 야인(野人)들이 책임을 추궁받아 그곳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하여 자진해서 추격하여 쇄환(刷還)해 왔으니, 그들로부터 애모(愛慕)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명나라 서울로 가던 중에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공(朝貢)을 바치러 온 야인(野人)들이 먼저 이곳에 머물고 있다가 공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와서 뵙고 말하기를, “공의 정치(政治)에 대해 우리 땅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합니다.” 하였다. 공은 평생에 청렴하고 소박함을 스스로 견지하여 살림을 늘이는 일을 경영하지 않았다. 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살면서 좋은 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술과 찬을 마련하고 자손들을 모아 놓고서 어버이의 즐거움을 다해드린 뒤에야 그쳤다. 공의 부인은 김씨(金氏)로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원석(金元石)의 딸인데, 증조는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김승주(金承霔)이다. 부도(婦道)가 두루 갖추어졌으므로 규문(閨門)의 안이 엄숙하면서도 화목하였다. 공의 영광을 누려 향년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남녀 각 3명씩을 두었는데, 장남 안자흠(安子欽)은 제검(提檢)이고, 다음 안자명(安子明)은 부사직(副司直)이며, 다음 안자문(安子文)은 진사(進士)이다. 장녀는 장악원 정(掌樂院正) 권성(權晟)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전적(典籍) 이문창(李文昌)에게 출가했으며, 다음은 찰방(察訪) 윤내신(尹來莘)에게 출가하였다. 제검 안자흠은 첨정(僉正) 신우정(辛禹鼎)의 딸에게 장가들어 7남을 낳았는데, 장남 안사언(安士彦)은 을유년(乙酉年, 1526년 중종 20년) 과시(科試)에 급제하여 지금은 청주 목사(淸州牧使)이다. 다음은 안사웅(安士雄)ㆍ안사영(安士英)ㆍ안사준(安士俊)ㆍ안사호(安士豪)ㆍ안사빈(安士贇)은 모두 진사(進士)이고 안사걸(安士傑)은 유학(幼學)이다. 부사직 안자명은 호군(護軍) 홍여집(洪汝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다. 진사 안자문은 군수(郡守) 윤백돈(尹伯焞)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으니, 안사정(安士挺)ㆍ안사탁(安士擢)ㆍ안사진(安士振)은 모두 유학을 업으로 삼고 있다. 증손은 남녀 약간 인이다. 아! 안씨(安氏)의 복(福)이 다하지 않았도다. 어찌 그 자손이 이렇게도 많은가? 내가 벼슬길에 나선 뒤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공을 뵈었는데, 그 용모는 충만하고 그 안색은 온화하였으니, 덕(德)을 소유한 자는 반드시 그 훌륭한 후손이 있음은 미더운 일이로다. 이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와서 문(門)에 참새의 그물을 쳐도 될 만큼 한가롭게 지내는 중에, 진사군(進士君)이 호의를 가지고 찾아와 묘비명의 일로써 청하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산악(山嶽)이 정기(精氣)를 내려 나라의 영걸(英傑) 탄생시켰도다. 일찍부터 아름다운 이름 떨치며 스승을 좇아 유학(遊學)하였는데, 배움이 미치지 못한 듯 여겼으나 재주 뛰어나 빛나고 빛났도다. 과거에 응해서는 궁전에서 임금과 단독으로 대하였고 어좌(御座) 아주 가까이 모시고 밤에도 경연(經筵)을 열었도다. 사책(史冊)에 사실대로 쓰고 용서치 않아 간사한 사람을 내쫓았도다. 조정에서 파목(頗牧, 조(趙)나라 명장(名將)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의 무재(武才)를 인정하여 남북(南北)의 절도사로 나가 진무(鎭撫)하였는데, 백성들과 오랑캐가 기쁘게 복종하였는지라 한성부 좌윤ㆍ형조 참판을 제수하였네. 70세 이상의 수명을 누림은 타고난 후덕(厚德)의 소치이며, 눈앞에 가득한 아들과 손자들은 뛰어난 재능(才能) 지니어 높이 본받을 가문일세. 감천(甘泉)을 돌아보건대 실로 옛 무덤 있는 곳인데, 초목이 우거져 무성하여 비석 머리 은연중에 빛나네. 공의 덕행(德行) 기록되었으니 지나는 사람 경의(敬意)를 표할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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