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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백야현상 때문에 정말로 '별 볼일이 없는 곳'에 다녀왔으며, 물도 엄청나게 구경하였고, 집안사정 때문에 마음도 편하지 않아 기분을 전환하려고 갑자기 계획하였다. 못 삭이는 성격이라 많이 불편한데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어 죄송할 따름이다. 72세, 이번에는 부군수를 했다는 홍천에서 오신 나이가 74세인 촌노(村老)이다. 않았고, 우리나라가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덕분에 민주주의에 대한 감사함도 알았다. 순서가 틀리거나 다른 곳의 이야기를 적을 수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때문에 틀린 곳이 있어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만난 여행자들의 많은 것에 놀랐는데 평시의 2배가 넘는 33명이었다. 생각이 드는 분이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될 분이었다. 천장 중간에 짐칸이 없어 시원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좌석 번호가 좌석 뒤에 있기에 사람들이 혼돈하여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으며, 10시간 정도를 비행하여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와 똑 같은 코스를 여행하는 또 하나의 여행 팀이 있었는데 이들은 KRT에서 온 사람들로 13명 정도가 되었고, 우리보다는 비자비용을 빼면 13만원 정도를 더 주었다. 이 팀은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친하게 되었으며, 어릴 적에 빨간색으로만 뒤 덮여 있으며, 전부 긴 장화만 신은 군인들만 살고 있으라고 상상하던 모스크바이다. 한번만 사용하는 여행비자이기에 이번에는 무(無)비자로 입국하는 형식이다. 그렇게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다른 국가를 여행하고, 다시 들어올 때에 비자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무(無)비자로 입국의 제도를 모르는 여행자들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이 때부터 출국할 때까지 감시자의 관리를 받게 되는데 1인인 경우는 한 사람이 1:1로 감시를 하지만 우리 같이 단체는 여러 명의 감시를 받으며, 그들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식사도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복도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잘생긴 아가씨들이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주었는데 같은 일행 중에 루마니아 아가씨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때엔 감시자들을 돈주고 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곳이 '러시아' 이어서 조금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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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병의 호위를 받으며,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여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발트 3국 중에 라트비아 상공을 나르며 잘 정리된 농지와 산을 내려다보는 보았다. '리가'만과 '리가'시가지도 보였으며, 코펜하겐에 도착하여 관광이 시작되었는데 증평이 고향이며, 인천에서 사셨다는 나이가 많은 이씨 성을 가진 아저씨가 가이드를 하게 되었다. 코펜하겐은 영어식 발음으로 현지서는 '쾨벤하운(Kobenhavn) '이라고 하며, '물건을 사는 사람이 모이는 항구'라는 의미로 즉 '상인의 항구'라는 뜻이다. 지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으며, 정원의 야경이 일품이라고 했지만 볼 수 없었다. 27도를 가르치고 있었으며, 30도까지만 눈금이 있는 것은 30도를 넘는 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청사 건물에는 도시를 시작한 대주교의 동상이 건물 벽에 있다.
복원이 다 되었을 때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했으며, 이 때 의회가 구성되어 1849년 이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주었기에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이 6월5일로 제헌절이며 휴일이었는데 국회의사당 건물 안에는 비둘기가 앉지 못하도록 뾰족한 침을 박아 놓았으며, 국회의원은 농민 출신이 제일 많다고 한다. 글뤽스부르흐가(家)의 크리스챤 9세(재위 1863-1906)가 왕위에 올라 지금의 왕조를 열었다. 이 왕은 6명의 공주가 유럽의 각 나라 왕비가 되는 바람에 '유럽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회의사당 옆에는 의원들이 타고 온 자전거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나 의원뿐 아니라 누구나 자전거를 주차할 수 있다고 하며, 국회의사당에 딸린 건물에는 왕립도서관이 있다. 이곳 정원에는 코펜하겐 출신이자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자인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 동상이 있으며, 걸어서 크리스챤 4세 교회로 갔으나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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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어상) 인공으로 만든 니하운(Nyhavn:새로운 운하)이라는 곳을 지나갔다. 다른 곳보다는 술값이 좀 비싸지만 시민들은 이곳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대하여 가이드가 이야기하는 중에 우리가 아는 내용과 조금은 달랐다. 받으면서 성장하였고, 15세 때 배우가 되려고 무일푼으로 코펜하겐으로 갔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가이드는 안드르센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모르며, 이런 이유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 달랐고, 코펜하겐의 상징인 작은 인어상이 있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80cm의 작은 동상으로 몇 차례의 걸쳐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복원되었다. 분출되어 폭발할 수 있다고 하며, 경찰이 못 들어가게 하여 되돌아 나왔다. 점심은 '스트뢰에' 거리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하였고, 옆에 있는 작은 기념품 가계에서 쇼핑을 했다. [아말리엔보르 성(아마리엔보, Amalienborg) 궁전] 크리스티안보그 궁전이 화재를 입은 뒤 1794년부터 현재 마르그레테 2세의 여왕과 가족이 살고 있는 아마리엔보 궁전은 8각형 광장에 로코코풍의 4개의 건물이 있다. 하나는 여왕이 사는 건물로 여왕은 출타 중인지 여왕 깃발이 없었으며, 다른 건물은 황태자의 건물로 황태자가 있다는 표시로 황태자 깃발이 있었다. 포함되며, 스칸디나비아 반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스웨덴과 노르웨이만을 포함한다. 이 스칸디나비아 5개 국가의 국기는 똑 같이 십자가 하나만 있는데 바탕과 십자가의 색깔이 다를 뿐인데 노르웨이는 빨강 바탕에 청색 십자가 이고, 스웨덴은 청색 바탕에 노란 십자가 이다. 핀란드는 흰 바탕에 청색십자가 이고, 아이슬란드는 청색 바탕에 빨강 십자가이며, 덴마크는 빨강 바탕에 흰 색깔의 십자가이고, 국기는 모양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한다. 직사각형은 일반적인 것에 사용되며, 국기 뒤 부분이 삼각형으로 파인 것은 국가 공공 건물에만 사용하고, 여왕깃발은 여왕 모양이 들어있으며, 황태자깃발은 사자 3마리 그림이 들어있다. 불리며, 프레데릭 5세가 시작했으나 많은 건축물을 동시에 하다가 자금이 모자라 중단됐다. 만들지 못했는데 교회 내부는 대리석를 사용하여 원형모양으로 만들었다. 아래는 건축을 중단하기 전에 만든 탓에 못 쓰게 된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고, 2층에는 다시 만든 새로운 오르간이 있으며, 벽에 있는 못에는 숫자가 쓰여진 것이 걸려있다. 이것은 예배 때 부를 찬송가 장으로 새로 개편된 찬송가는 791장인데 이 중 그룬트비 목사가 만든 곡이 271장이나 된다고 하였으며, 그의 동상이 교회밖에 있다. 나오다가 우리가 오슬로까지 타고 갈 훼리 여객선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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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젠보르크 성(로렌보그, Rosenborg Slot)] 시간이 남아 로렌보그(장미성)의 황제 정원(콩엔시하운)에 잠시 쉬기로 했으며, 장미성 현재 왕실의 보물관으로 사용되는데 정원의 장미는 아직 꽃이 필 시기가 아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끄러움도 없이 전부 발가벗고 썬팅을 한다. 나무들이 잘 조성되어 매우 아름다웠고, 이젠 오슬로로 가는 큰 여객선에 탑승했다. KRT는 2인 캐빈(선실)을 예약하였고, 우리는 4인 실을 예약하여 낯선 부부들이 함께 자는 진풍경이 벌어졌는데 대구에서 온 할머니는 남의 부부와 함께 잘 수 없다면 버티었다. TC와 한 방을 쓰게 되어 마음을 놓았고, 발트해를 바라보는 저녁식사는 푸짐하여 좋았다.
수가 없어 화력과 풍력발전기가 있는데 특히 풍력발전이 유명하다. 그들이 처음 만들기도 하였고, 풍력발전기는 세계로 수출하는 중요 품목에 속는데 풍력발전기 소음 때문에 바다 가운데 세워 놓았으며 코펜하겐의 항구에도 20개의 풍력발전기를 볼 수 있다. 닫지 않으며, 이 나라는 농대를 나와야 30ha(약 9만평)의 땅을 구입할 수 있다. 강이 없어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기에 지하수 오염을 철저하게 방지하여 절대로 농약을 쓸 수 없어 잡초는 풍부한 천연가스로 태워버리고, 가축에서 나오는 거름을 소화할 수 있는 땅을 가져야 가축을 키울 수가 있으며, 3.000평 정도에 돼지 2마리를 키울 수가 있다고 한다. 이 나라에서 나는 과일은 물로 씻지 않고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북 유럽에서 여러 번의 큰 체리를 사 먹을 기회가 있었지만그때마다 그냥 먹었다. 때문이라고 하며,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의 나라에서 배워야할 것 많다. 그중 하나는 소프트파워강국으로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남도 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더불어 사는 협력인데 UN에서 결정한 GNP의 0.7%을 국제협력에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이라고 한다. 말하는데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이지만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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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조금 일찍 일어나 스카게라크 해협을 지나가면서 섬들과 해안의 집들을 구경했는데 아름다운 바닷가 언덕 위에 집들이 그림 같았으나 추위를 생각하니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는데 호텔 아침과 비교하면 선상의 아침은 먹을 것이 많았다. 체질이라고 하였는데, 일도 체질에 맞는 즐거운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큰 비겔란 조각 공원은 32만 3.000㎡ 이며 프로그네(너) 공원에 안에 193점 조각품이 후에 오슬로로 돌아왔으나 가난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가난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철문은 페인트칠할 때나 작업할 때에는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한다. 다리 양 입구에 크다란 2개의 조각은 아담과 이브가 사탄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다.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모습이 귀엽게 느끼는 동상은 도난 당하였다가 다시 찾았다고 한다. 아래도 원형으로 자궁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인간모습이 순차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있는데, 분수는 인생을 의미하며, 6명의 남자는 젊음에서 노인까지 표현하였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만져보면 근육과 핏줄까지도 느낄 수 있었는데 비겔란은 자기 조각품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는 각자가 보고 느끼는 데로 해석하도록 했다고 한다. 통과하면 천국은 끝이 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온다. 버스로 가는 잔디밭에 질경이가 많았는데 서울서 오신 분이 질경인 줄도 몰라 설명을 했는데 질경에게 배울 교훈은 다른 식물들이 싫어하는 길가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데 있다. 질경이는 사람들이 밟아서 다른 식물이 살지 못하는 곳을 이용하는 지혜로 환경을 탓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며, 또 질경이는 눈에 다래끼가 나면 불 위에 약간 말린 뒤 눈에 붙인다. 그러면 고름이 터져서 다래끼를 치료하는 식물이기도 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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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멘콜렌이라는 스키점프대를 찾았는데 점프대는 인스부르크 것보다는 초라하였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왕의 조각상이 있으며, 주위 풍광과 아름다운 오슬로의 서쪽 도시가 보인다. krt 팀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웠다. [바이킹 배 박물관(Viking Ship Museum)] 오세베르그호는 9세기초 건조된 것으로 35명의 노 젓는 사람들과 돛을 이용해 항해했다. 화려해 유람선으로 건조된 것으로 보였는데 각종 장식품과 부엌용품과 가구류가 발견됐으며, 50년 정도 사용된 후 오사 여왕의 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물통에는 절을 표시하는 만(卍)자 있어 동양과도 접촉한 것으로 봄이며, 실제로 바이킹들은 현재의 이스탄불까지 활동하였다고 한다. 말과 6마리의 개, 짐승머리로 장식된 침대, 3척의 보트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투네호는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대부분 부패된 채 발견됐다고 한다.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이며, 이 배 옆에 있었던 작은 통나무집은 족장 집이라고 하지만 생활하기엔 너무 작았는데 추운 곳이라 땅속에서 생활하고 입구로 사용된 것 같다. 배들의 이름은 발견된 지명을 따서 붙여졌으며, 노르웨이 어원은 바이킹이 영국왕 앞에서 북쪽의 길을 따라왔다고 설명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노스웨이(north way)가 노르웨이(Norway) 변한 것이라고 하며, 시내로 들어가 카를 요한스 거리를 지나가면서 노벨평화상을 시상한다는 시청사와 호텔 앞을 지나갔다. 이 호텔은 노벨상을 받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으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상을 받았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호텔이 어느 건물인지 뒤에 앉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이 돈으로 핵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니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며, 어떤 인터넷 만화에 '남쪽 왕이 북쪽 왕에게 돈을 주었고, 남쪽 왕은 가을에 노벨상을 받았데'가 생각났다. 장미화원에 인도의 간디가 서 있는 조금 이색적인 곳에서 쇼핑을 한 후에 점심으로 한식을 먹었다.
어울러진 미요자 호수(Lake Mjosa)를 따라 올라가는 가는 길은 아름답다. 바위 위에서 자라는 것은 수량이 많아 가능하며, 얕은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도 나무가 넘어지는 일이 없는 것은 태풍이 없기 때문이거 하며, 전나무는 이곳이 추워 햇볕을 보다 많이 받기 위하여 위로 곧게 자라기 때문에 보기에도 좋았다. 넘는 관계로 모든 식물은 열매를 맺지 못하여 곡물은 전부 수입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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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진 초원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며, 이곳에 심은 보리, 밀, 호밀 등은 사료용이고, 양과 염소는 집 주위에서 방목하며, 소는 자기 것을 표시하여 5-9월까지 산에다 방목한다. 가을에는 농부들 전부가 합심하여 소를 찾아 종자 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도살장으로 보내지며, 나이 많은 사람들과 여성이 많아 변소 가는 일이 큰 행사로 변소가 있는 곳이면 모조리 인사(남자는 머리를 숙인 고로)를 하고 갔으며, 변소가 부족한 곳에서는 남자들은 자연에게 인사했다. 생각보다 많이 나갔으며, 이곳에서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국인의 근성이 나왔다. 주어 그곳에 담고 나서 허락이 되었는데 이 나라의 살림 법은 어떤지는 모른다. 하와이 가이드는 고사리를 꺾다가 50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는 생각이 나서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 이곳에서는 괜찮은 모양이다. 떠난 주인공 페르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라고 한다. 1875년 쓰여진 이 곡은 아름다운 노르웨이 자연이 음악 속에 담겨졌다고 하는데 솔베이지가 저 산 아래에 살았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듣는 음악이 너무나 좋았다. 보이지 않았는데 주민이 환경을 파괴한다고 반대하기에 다리를 잘 놓지 않는다고 한다. 거의 끝나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별장은 호수 주위에 있고 주택은 산 쪽으로 있다. 점프대로 향했으며, 올림픽 당시 이곳 주민들이 주택들을 돈을 많이 받고 빌려주었다고 한다. 자신들은 길가나 숲 속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는데 후에 비싼 요금이 알려지면서 세금으로 말썽이 발생되었으나 유야무야(有耶無耶)가 되었다고 한다. 배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건물이 보였는데 동계올림픽 때에 쇼트트랙 경기를 치른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딴 곳이라고 하며, 배를 뒤집어 놓은 건물은 바이킹들이 회의를 할 때 배를 뒤집어 놓고 한데서 유래했으며, 운이 좋으면 점프하는 사람을 볼 수가 있다고 했다. 운이 있어 난생처음 스키점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하계용 점프대는 인조 잔디에 물을 뿌려 사용하였는데 점프대 끝에는 스키가 멈출 수 있도록 톱밥을 깔아놓았다. 후 한 남자가 뛰어 내렸으며, 우리는 박수를 치자 그는 엄지 손을 들어 보였다.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낭비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편으로 한 사람을 위하여 그토록 많은 배려를 할 수 있는 이 나라가 부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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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타(오따, Otta)] 유럽이 페스트가 유행할 때 여덟(8 명) 사람이 이곳으로 피신 온 것이 마을의 시작으로 여덟의 뜻을 가진 옥타(Octa)가 어원인데 우리보다 먼저 온 팀이 있었으며, krt팀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텅 비어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저녁을 먹고 아담한 마을을 산책하였는데 세차게 흐르고 강물은 눈이 녹아 내리는 것으로 산에는 수많은 폭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유를 알게 되었고, 노르웨이를 떠날 때까지 폭포, 호수, 강, 호수 같은 바다를 원 많이 보았다. 또 카톨릭신자라 아침에 꼭 미사를 드리기에 기다릴 때가 많았다. 팀의 아줌마는 대단한 사람이었고, 그 팀이 떠나고 1시간 뒤 우리도 떠났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바이킹들이 1,000년 전에 만들었다는 교회를 들렸으며, 나무로 만든 교회가 그토록 오래 보존된 것은 대단하다. 교회와 같은 색으로 칠하여 검은 갈색을 띄고 있다. 대부분의 집에는 스카이 콩콩이 있어 이색적이었는데 이곳에서 할아버지는 사진기를 떨어트려 고장이 났으며, 할아버지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더 큰 일이다 때마다 빌러 주는 일이 생겼는데 필름 마저 없다고 하여 필름까지 주었다. [브릭스달 빙하(Briksdal Glacier)] 경치에 매료되었는데 호수에 잠긴 눈 덮인 산들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다. 수 있도록 좁았으나 서로 양보하며 불편 없이 다니는 모습이 부러웠다. 양보도 하지 못 하도록 바짝 붙어 따라 오는 우리나라의 골목 길과 비교되었으며, 변소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고, 빙하가 녹아 만든 아름다운 호수 너머로 빙하가 연한 초록색으로 보였다. 빙하는 생각보다는 낮은 곳에 있었으며, 눈이 계속 쌓이면 만년설이 되고, 만년설이 압력에 의하여 얼음으로 변한 것이 빙하이며, 눈과 빙하의 차이는 눈은 초록색을 띄지 않는다.
빙하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해면상 5m 이상인 경우는 빙산이고, 그 이하는 빙암이며, 참고로 남극, 북극, 고산의 빙하가 다 녹으면 해면은 현재보다 60m 정도 상승할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높았으며, '유럽의 푸른 눈'이라는 애칭을 가진 브릭스달에 도착하여 우리가 타고 갈 마차가 내러오지 않아 조금 기다렸다. 3명이 탔으며, 입구에서 사진촬영을 했으나 사진을 찾지 않을 계획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모포는 말 냄새가 진동하여 올 때에는 준비한 우비로 대신했는데 우리 마부는 예쁘게 생겼으나 조금은 뚱뚱하고 건강한 아가씨이었는데 말 엉덩이와 아가씨 엉덩이가 많이 닮았다. 말 엉덩이로 유명한 브라질 여성의 엉덩이가 생각케했으며, 정상에 오르면 마차를 분리하여 말을 보다 편하게 쉬게 하고, 우리는 걸어서 빙하까지 가는 중에 물에 손을 넣어 보니 손이 시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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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는 추울 것 같아 바지는 두 개를 입었으며, 위엔 겨울조끼까지 입었으니 너무 더워 계속 옷을 벗었는데도 많은 고생을 하였고, 이곳 날씨는 초여름의 더위와 같았다. 마부 아가씨는 어깨가 나오는 옷을 입고도 땀을 흘렸는데 빙하가 옆에 있어도 더운 것이 신기했고, 주위의 식물들과 나무도 푸르러 빙하가 있는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 빙하를 만져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돌로 깨어 만져도 보았다. 일본인들이 마차 사고를 당했다고, 원하는 사람들은 같이 걸자고 했다. 희망자는 가장 어린 9살 짜리 꼬마 노은석뿐이었으나 부모님은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같이 걸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은석이에게 세상이 이렇게 넓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여행하는 중이라고 하며, 아버지는 치과의사로 울산에서 병원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여 동명 2인으로 알고 있다가 뒤늦게 알고는 몹시 반가웠다. 중에 재롱둥이로 우리를 즐겁게 했으며, 선택된 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의사선생님은 겸손하여 남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구에서 온 나이가 제일 많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 줄 때에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길게 적어 보았다. 사진은 8달러 주면 2장을 주는데 의사선생님이 두 장이 필요 없다고 하나를 내게 주었다. 위해 사진을 태우는 한이 있어도 값은 절대로 깎아주지 않으며, 이곳 마차는 17대로 한정되었다. 보내어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였다.
[레르달(Laerd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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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어야하는 레르달로 향하여 가는 도중에 터널이 많았으며, 6.5km나 되는 터널 안에 두 곳에는 북극의 차가운 낮을 표현하여 놓았고, 운전기사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페인트도 칠해 놓았다. 동굴 같았고, 중간 지점에서 유턴 할 수도 있으며, 송달(Songdal)을 지났다. 송달은 회사에 다닐 때 교환양 OS LEE가 부쳐준 별명이며, 또 학생시절 빙산이 만들었다고 배웠던 송네 협만도 같은 종씨로 기억하며, 어떻게 생겼을가? 상상했 곳을 직접 보게 되었다. 송네 피오르드(Songne Fjord)에 도착했으나 이곳도 다리가 없었는데 노르웨이 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하여 다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멋진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보았다. 없을 것이고, 피오르드는 물이 깊은 곳은 1300m나 되는 곳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깊은 곳에 큰 유람선이 다닐 만큼 높은 다리를 놓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겠지만 차량이 적으니 다리가 있었도 가성비가 적을 것이기에 복합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차와 사람을 건너 주었고, 밖에 있으면 물개와 돌고래를 볼 수 있기에 비가 내리고 추운데도 밖에서 있었으나 그들도 여행을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송네 피오르드'가 보이는 경치 좋은 라에달(라달)에 매우 늦게 도착하여 먼저 저녁식사를 했는데 유명하다는 갈색 치즈를 먹었으나 맛에 대한 무뢰한으로 먹어 보았다는 것으로 족했다.
'민들레'로 하자고 제안 했더니 TC가 맞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확인하려고 물을 맛보았는데 물은 매우 차가웠으나 정말로 짜지 않고 싱거웠다. 빙하가 온난할 때 붕괴되어 흐르면서 U자형의 좁고, 깊고, 긴 형태의 협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협만:峽灣)는 급한 절벽 이루어 장관의 경치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바닷물인데도 짜지 않는 이유는 100만전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져서 그러하다고 했다. 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라에달'을 출발하여 '플롬'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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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네 피오르드(Sogne Fjord)] 있다는 가이드 말을 따라 선상에 자리를 잡았으나 어제 더위로 혼났기에 오늘은 옷을 적게 입었다. 날씨가 옷을 적게 입고 나온 거을 알았는지 제법 추웠는데 하나 둘 배 안으로 들어가고 남은 사람은 몇 명되지 않았으고 가지고 온 우위를 입었더니 견딜 만 했다. 추위를 이기려고 술을 먹기도 했으며, 경치는 보던 것하고 별로 다르지 않아 지루하였고, 물개들을 보려고 열심히 살피는 중 물개가 있다고, 가이드는 방송으로 물개가 있는 곳을 설명했다. 옆에 있는 외국인 만원경을 빌려서 보았지만 별반 다르지 않아 실망스럽웠다.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이킹 식으로 만든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많이 없어졌으나 낮고 작은 지붕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벽은 나무로 마감했다. 전문가 설계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규격품을 사다가 손수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 없으며, 이젠 오슬로로 가는 도중에 루프(Loop)식으로 만든 터널을 통과했다. 오르다가 터널 밖으로 나왔는데 이곳은 매우 높아 송네 피오르드가 저 아래에 호수처럼 보였다. 분지에는 옛날 양치던 여인들이 여름철에 와서 양을 기르며 양털을 짜든 움막집들이 있다. 이 중에 부지런한 여인들은 시샘을 받아 마녀로 희생되기도 했으며,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이곳 호수들은 얼음이 녹는 중이었으며, 주위의 높은 곳에 눈들이 많이 있었다. 움직이는 스케이트를 타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쌓인 눈은 땅 표면부터 먼저 녹는다. 이 때문에 눈 아래는 허공이 있어 사진을 찍다가 빠져 웃기도 하였고, 오슬로에 도착하여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카를 요한 거리에서 가까운 호텔에 들었는데 정 들었던 가이드와 헤어져야 했다.
편히 살기 위하여 여러 명의 아버지를 두어 그 아버지부터 양육비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학교와 같은 수준인 50만원 정도 드리지만 받은 돈은 손자와 손녀를 위하여 대부분 쓰게 된다. 조부모가 있는 가정은 '일석이조(一石二鳥)'이며, 마을은 작고 떨어져 있어 학교 등교가 궁금했는데 학교는 6km 이내에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래도 6km 넘는 학생들이 있다. 이 학생들은 정부가 택시회사와 계약하여 무료로 등교시키며, 중학교 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성적이 우수한 20%는 인문계, 20%는 공고 계통, 나머지 60%은 상업계통으로 간다. 일반환자는 3개 을 기다려야 입원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가이드라고 하며, 이 나라에도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많이 입양되어 왔는데 이들이 자라서 친부모를 찾는 것은 나를 버린 이유와 마음 속에 쌓인 원망과 한이라고 한다. 그는 입양아이들이게 한국말과 한글을 가르치며, 친부모의 만남을 주선하다가 이런 것을 알고 난 뒤로 그만 두었는데 이들은 김치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지 김치를 좋아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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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기에 아침 잠을 자는데 애로가 되었다. 했으며, 아침엔 항상 바쁘게 마련인데 미사를 드리는 동안 기다려야 했다. 또 안 보이면 찾아다녀야 했는데 KRT는 열차로 우리는 버스로 스톡홀름까지 이동했으며, 3일 동안 노르웨이 운전한 기사 이름이 '막네'로 그는 국경 근처에 많은 땅을 가진 농부라고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각자의 소개와 공항에서 주운 우리나라 작은 병풍을 상품으로 걸었다. 없는 오늘 비가 오는 것은 우리가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자찬하였다. 막네가 스톡홀름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식당을 찾지 못하여 영업용택시를 앞세우고 뒤따랐으며, 호텔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고, 대리석으로 아주 고급스럽게 만들졌다. 그러나 고속열차가 옆을 지나가 시끄러워 잠자는데 방해가 되었다. 여러 대의 택시들이 있었고, 몇 명은 잠을 자고 있었다. 있기에 '물 위의 아름다움' 혹은 '물 위의 도시' 또는 '북쪽 베네치아'이란 이름이 늘 따라다닌다. 있으며, 물위에 세워진 매혹적인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갔으며, 태양열을 흡수하도록 검은 지붕이 많은 곳을 귀족 섬이라 한다. 라그나르 오스트베리 설계와 800만개의 벽돌로 만들어졌다. 설계 때 푸른 칠을 하기로 하여 붙여진 푸른 방(Bla Hallen)은 방은 만들고 보니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아름다워 칠하지 않았으나 이름만은 남게되어 오늘날까지 푸른 방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해마다 12월 10일 경에 열리는 노벨상 수상식 후 열리는 만찬회가 유명하며, 메달을 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외로는 노벨상에 많이 헌신한 사람은 초청될 수도 있다. 또 만찬에 봉사를 지원한 학생 중에 선택된 학생만 가능하며, 만찬회 때 국왕은 위층에서 계단을 따라내려 오는데 이 때 황후의 드레스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이 계단 높이를 설계 하기 위해 부인에게 드레스를 입혀 실험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계단 위에서 중국방송사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아나운서가 대단한 미인이다. 좁아 현재는 지금까지 노벨상에 수여된 메달을 보관하고 있다. 책상은 나누어 있으며, 책상 위에는 메모장과 볼펜 있다. 찬, 반, 기권, 이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자버튼이 함께 있었고, 결혼식 방엔 누구나 결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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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으며, 짧은 결혼(40초)과 긴 결혼(1분30초)은 꼭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반대편에 그렸다고 하는데 지금의 풍경과는 차이가 있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고, 골든 룸은 1,900만 개 금도금 모자이크이로 되어서 금빛 찬란하다. 잘리게 되었으며, 이곳에 있는 공중화장실의 변기가 처음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왕궁의 광장에는 구스타프 3세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아파트가 많았는데 살기가 좋은 곳이라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바닷가로 내려가면 용과 싸우는 전설 속의 이야기를 동상으로 만들었다. 증명한다고 하며, 서양 용이 동양용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모양이 서로 비슷하다. . 작았으며, 점심은 어제 저녁 먹은 곳에서 하였다.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인상적인 사람은 1926년 황태자(구스타프 아돌프) 이다. 그는 경주 노서리 고분군 발굴에 참여하여 세 마리 새(鳳)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는 것을 참관한 기념으로 금관 이름을 스웨덴(瑞典)의 서(瑞)자와 봉(鳳)자를 합해 서봉총(瑞鳳塚)이라 했다. 그런 인연을 맺은 구스타브 6세의 모습으로 고고학자답게 배의 인양을 참관하며, 격려하는 모습을 보게되어 기뻤으며, 바사호는‘북방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1625년 구스타브 아돌프(구스타브 2세)가 건조를 시작했고, 1628년 8월10일 처녀항해 때 스톡홀름 항에서 침몰했는데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호화 전함이라고 한다. 년도를 보면 스웨덴이 참여 했던 신구종교전쟁인 30년 전쟁(1618-48)을 위해 건조 된 것으로 생각 되어 지며, 1956년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가 발견했다. 침몰 후 333년 만인 1961년 인양되었는데 침몰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배 아래에 전함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자갈을 싣는 곳이 너무 작게 설계된 것을 원인으로 추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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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총 길이 69m, 최대폭 약 11.7m, 높이 52.2m, 배수량 약 1,210톤, 적재 대포 64문, 탑승 가능 인원은 450명(300명의 군인) 인데 박물관은 총 7층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배를 더 가깝게 볼 수 있고, 배를 여러 각도에서 잘 바라 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많은 조각품의 셈세 함이 예술품을 보는 것 같았으며, 또 호화로움에 놀랐다. 옷들이 작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 신체들이 작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는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왜소한 삶들을 승선시키지 않았나 추정하는 사람도 있고, 당시에 나온 치즈가 있었는데 이것을 먹고 죽은 사람도 있다고도 한다. 부식하지 않기 위하여 짠 바다 물에 처리하는 한다고 들었는데 잘 못 알고 있는 것인지? 항상 갈매기가 앉자있어 동상의 일부로 착각하기도 한다. 4세를 혁명으로 퇴위시키고 카를 13세를 왕으로 옹립하였으나 후손이 없었다. 왕위 승계를 둘러싼 위기 상황 속에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혹은 나폴레옹의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이라고도 함) 병든 카를 13세의 황태자로 임명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대파한 후 덴마크군을 쳐부수었다.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6세로 하여금 킬 조약(1814)에 서명하도록 하여 노르웨이를 얻었고, 카를 13세가 죽고 1818년 카를 요한은 카를 14세로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그가 현재 스웨덴 왕조의 시조로 스웨덴은 0.1%의 종교세금을 내는데 옛날에는 루터교회였으나 지금은 여러 종교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종교에게 세금을 낼 수가 있다. 지금까지 타본 여객선 중에 가장 컸고, 길이가 203m, 너비32m로 13층이나 된다. 13층은 바와 디스코, 12층은 미용실과 작은 물 놀이터 그리고 실내 전망대, 8층에서 11층까지가 6층은 식당과 면세로 살 수 있는 슈퍼마켓이 있으며, 선상에서 멀어져 가는 스톡홀름은 바라보면서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지 하는 마음에 아쉬움만 남았다. 왔고, 앞에 앉은 미식가 아주머니는 상어 알이라는 캐비아(caviar)에 대하여 극찬했다. 오라는 광주 의사선생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좀 많이 가지고 왔다. 짜고 아무 맛도 없어 후회를 하였는데 미식가 아주머니는 이런 연어는 한국에서 먹어 볼 수 없다고, 칭찬이 대단했지만 초장이 없는 연어 회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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