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루마니아
(2010년 6월 28일 ~ 7월 09일, 발칸 7개국 12일) 인천→ 파리 → 1.루마니아 부카레스트(1일) → 브란 → 브라쇼브 → 시나이아 → 부카레스트(2일) → 2.불가리아 → 벨리코투르노보 → 아르바나시 →소피아(3일) → 3.세르비아 베오그라드(4일) → 4.보스니아 사라예보(5일) → 모스타르 5.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니크(6일) → 6.몬테네그로 코토르 → 드브로브닉(7일) → 스플리트(스플릿) → 트로기르 → 자다르(8일)→ 플리트비체 → 7.슬로베니아 블레드(9일) → 포스토이나 → 8.이탈리아 베니스(10일) → 파리→ 기내(11일)/인천(12일) ※발칸(Balkan): ‘산이 많아 푸르다.’는 뜻이다.
<발칸 반도의 여행지 지도>
[1일] 10년 6월 28일 월요일 일정: AF267 → 09:25(인천 출발) → 14:20(11시간소요, 파리 도착) → AF2488→ 15:25(파리출발) → 19:15(2시간소요, 1.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 도착) → 호텔
(여행팀 구성원) 인천공항 모임이 오전 6시25분이어서 하루 전에 출발하여 시간을 맞추었으며, 일행은 TC 정미경씨를 포함하여 29명으로 남자는 나 포함하여 6명이었고, 여성은 부산 단체 팀이 8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서울여성 4명, 광주여성 2명, 전주여성 1명, 부부 팀은 모두 서울 근교이다. 가장 특이 한 것은 뉴질랜드에서 온 부부와 딸이었으며, 천재지변(천번봐도 재수 없고, 지금 봐도 변함없는)이 없는 평범한 팀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해외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이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많아 그런지는 몰라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적었고, 가이드만 돌아서면 모두가 바로 이동했다.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나에겐 조금은 불리한 상황이 이었고, 이 때문에 사진 찍기 위해 듣는 것을 포기한 곳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덕분에 호텔은 일찍 들어 갈 수 있었다. TC가 이번 팀 같이 시간 잘 지키고 말썽 없는 팀도 없다고 할 정도였고, 그래서 날씨도 인격을 따라 준다고 했는데 실제로 차 안에 들어가면 비가 오다가도 차가 멈추면 비가 오지 않아 관광하기엔 아주 좋았다.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도 되었지만 잘 견디고 희망에 찬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여 로컬 가이드 송용희(성공회 신학박사)씨를 만나 호텔로 향했다. 로컬 가이드의 첫 부탁은 '부탁하지 않은 선의는 사기꾼'이라는 명언을 말하며, 호텔에서나 어디에서나 부탁해도 잘 해주지 않는데 스스로 해 주겠다고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한 후 물건을 훔쳐 가는 경우가 많음으로 거절하라고 한다. TC의 명언 중에 유럽에서는 '빽이 앞에 있으면 내 것, 옆에 있으면 네 것도 되고, 내 것도 되고, 뒤에 있으면 내 것 아니다.'라고 했다. 나는 늘 휴대품은 '내 몸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 번 여행에서 깜박하는 사이에 두 번이나 실수를 했다.
[2일] 10년 6월 29일 화요일 (모든 일정은 버스로 이동) 일정: 부카레스트 → 브란 이동(170km, 3시간) 관광 → 브라쇼브 이동(32km, 40분) 관광 → 시나이아 이동(47km 1시간) → 부카레스트 이동(124km, 2시간) 관광 → 호텔 (호텔에서) 시차 때문에 4시도 안 되어 잠이 깨어 날이 밝기만 기다리다가 6시가 되어 밖으로 산책을 나아갔다가 털 빠진 험악한 방견(개)들이 앞뒤로 몰려와 호텔 주위만 맴돌았다. 호텔에서 손님을 기다리든 택시 기사가 본넷트 위에 과일을 내 놓고 먹다가 나를 보고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물었는데 어떻게 북한을 알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이 나라가 전에 공산주의를 했고, 특히 차우셰스쿠와 김일성 관계가 생각이 나 의문은 곧 풀렸다. 이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김일성 때문에 받은 고통을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든다.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생고기 생긴 붉은 색깔을 띤 과일을 집어 주며, 먹어 보라고 권하여 먹어보고 크게 맛은 없었으나 엄지손가락을 세워주자 대단히 좋아하며, 이 과일이 위장에 좋다고 한다. 조금은 겁도 나지만 방견들이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고, 좀 더 멀리 나가 도로를 따라 걷다가 호텔로 돌아오니 일행들이 보여 같이 멀리까지 산책을 했는데 숲과 나무가 많아 부러웠다.
<부카레스트의 라마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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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개, 지리, 종교, 경제의 이야기) 더디어 전용관광 차를 타고 브란으로 향하면서 송 박사님의 강의를 시작하면서 먼저 아침에 본 개들 이야기부터 시작하였으며, 발칸에는 이런 방견들이 방치 상태에서 계속 새끼를 낳기 때문에 많으나 개들도 아는지 중국과 북한 대사관 사이의 도로에는 없다는 것을 오후에 보여 주겠다고 한다. 시외를 벗어나면서 교통사고로 차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길가 들판에 핀 해바라기가 장관인데 아마도 이 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해바라기가 밭은 이곳부터 시작되었으며, 단 한 개의 예외도 없이 우리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핀 것이 신기했는데 정면의 모습이 궁금하다. 전 국토는 약24만㎢로 우리나라의 1.2배이며, 인구는 2.100만 명이고, 대부분 루마니아(본인들은 '로므니아' 부른다고 함)인지만 5% 정도는 독일과 형가리인이라고 한다. 60% 평야로 농업과 목축업을 많이 하고, 자원도 풍부하여 우리가 알지 못한 석유까지 생산되며, 가는 도중에 유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나 같이 한 쪽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로컬 가이드의 지리와 역사 이야기는 순서와 관계없이 이해가 쉽도록 함께 기술하기로 하고, 이제는 종교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종교는 대부분 동방정교회로 준 국교라고 하며, 성공회 박사답게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다른 팀에서 항의도 있었기에 듣기가 거북하면 이야기하라고 한다. 기독교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하면 개신교,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로 가톨릭과 정교회의 외형 차이는 가톨릭은 교황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정교회는 그리스에 형식적이 교황이 있지만 모든 권한은 지역의 주교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른다. 발칸지역에서 정교회하면 세르비아 정교회를 말하며, 복장은 가톨릭과 비슷하지만 정교회는 성직자가 결혼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성직자가 된 후에는 결혼할 수 없는 곳도 있으며, 또 이혼할 수 없는 곳도 있고, 부인이 죽어도 재혼 할 수 없는 곳도 있다고 하고, 예배 때는 무반주로 찬양한다고 한다. 성도가 찬양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성가대가 아카펠라로 찬양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화음이 대단히 듣기 좋았으며, 성직자가 강론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강론은 앞 중앙에 있는 강대가 아니라 위층 중간 옆에 있는 난간 같은데서 하는 것이 이채로웠으나 마이크를 쓰지 않아 전체 성도가 듣기에는 그 자리가 더 좋다. 가이드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화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기억엔 없지만 어떤 이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했고, 정교회가 가톨릭교회처럼 볼거리 없다고 했다. 볼거리 없는 점은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적으로 AD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긴 이유는 가톨릭이 너무 깊이 이방신앙과 혼합되었다.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음 알았고, 새로운 신앙의 도시가 필요해서 옮긴 것이 비잔틴으로 이렇게 되어 태생적으로 분리될 운명이었고, 결정적인 것은 성경에 우상을 만들지 마라는 내용이다. 가톨릭에서 성도들이 보고 믿기 쉽게 마리아나 예수 상 같은 우상을 만들었으며, 726년 동 로마 레오3세는 우상파괴로 로마가톨릭과 맞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교회는 그런 형상을 만들지 않았으니 볼 것이 적은 이유가 되었는데 사실 그림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콘(컴퓨터 아이콘의 어원 됨)이 있어 후에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우상을 만들지 마라는 내용을 가장 잘 지키는 종교가 기독교의 이단이라고 하는 이슬람교로 모스크의 예배 실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정치는 대통령과 총리도 권한을 가지는 2원체제이며, 군인은 징모 제에서 응모제로 바뀌었다. GDP는 1.1억 유로이며, 공업 35%, 농업 40%이고, 월급은 60만 원 정도로 부부가 직업을 갖기에 120만 원 정도를 벌지만 물가가 독일의 베를린과 비슷하여 생활이 어렵다고 한다. 부인이 화학 교사인데 현재 400유로를 받지만 외채를 갚기 위해 30%를 공제하고 한다고 한다, 국교는 1996년 6월에 수교를 맺었다고 하며, 차우셰스쿠가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소를 건설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골리앗 크레인을 설치했으나 수주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골리앗 크레인을 울산에 있는 현대 중공업에서 단 돈 1달러에 사 들어와 세계에서 제일가는 조선으로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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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자동차가 이 나라에 진출 할 때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이 대단히 잘 사는 나라로 알려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으며, 대우 자동차가 망한 지금까지도 잘 사는 나라로 알고 있다고 한다. 2007년부터 두산 중공업이 진출하였으며, 가는 도중에 한국전력에 의해 한국기계로 발전하는 발전소도 볼 수 있다고 하고, 한류열풍도 대단하다고 한다. 그 예로 대장금을 오후 5∼6시 30분까지 했으나 퇴근 하기전리라 보지 못한 요구로 오후 6시 30분∼ 7시 30분으로 방송 시간을 옮겨 다시 재방송했다고 한다. 그들이 방송을 보고, 어쩌면 키스 한 번하지 않고 그렇게 사랑을 잘 표현하는지 감탄한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 우측으로 가면 차우셰스쿠 안가가 있다고 하며, 안가 수도원 안에는 드라큘라 백작 무덤이 안치 되어 있다고 하여, 그 무시무시한 드라큘라 무덤과 같이 안가가 있었는지 의아 했으나 브란 성을 가보고 그 의문이 풀렸다. 혁명광장에서 연설하다 도망한 차우셰스쿠 부부는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헬기조종사가 도로에 두고 도망하는 바람에 차우셰스쿠의 요청으로 군부대로 갔다가 구금되었다고 한다. 루마니아에서는 체리도 많이 생산되는데 이제는 끝물이라고 하면서 점심 먹을 식당에 후식으로 체리가 되는지 부탁해 본다고 한다.
<시나이아 부근의 험준한 카르파티아 산맥>
카르파티아산맥 안으로 들어서면서 도로도 험한데 아직도 이 나라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며, 유로존의 돈으로 유로에 가입된 나라의 수도를 잇는 고속도로가 건설 중이라고 한다. 입장 시간이 안 되어 오후에 들릴 예정인 울창한 숲속에 펠레슈 성이 있는 시나이아에 도착하여 급할 일부터 보고 가가로 하고 하차를 했다. 차 안에서 보는 부체지 산은 웅장하며 험악하고 높기도 했지만 2.300m 지점에 설치한 거대한 십자가는 1930년 페르디난트 1세가 기념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며, 종교축일에는 전기로 등을 켤 수 있다고 한다. 또 부럽기 도한 아름드리 되는 전나무가 하늘을 찌르는데 이곳은 너도밤나무가 많다고 하며, 내 눈엔 레바논에서 본 백향목과 같은 나무는 발칸 전역에서 보였고, 정원수로도 쓰였다. 험한 산을 넘으면서 이 나라는 차 값이 비싸서 중고차도 3000만 원 정도 한다고 하며, 자신이 차를 사서 돈 번 이야기와 결혼 때 형님이 보내 준 돈으로 땅을 비싸게 샀지만 유로에 가입되면서 땅 값이 많이 올랐고, 그 땅에다 2층 집을 지어 집세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해 준다. 부체지 산을 넘자 대평원이 시작되었으며, 이런 평지는 불가리아까지 여러 번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산만 봐서 그런지 이런 평지를 세계 각국에서 볼 때 마다 무척 부럽고, 가슴 설레게 한다. 대평원에서 한창 근무 중인 양떼들이 보이고, 아직 추수하지 않은 잘 익은 밀밭과 옥수수가 한창 자라고 있었으며, 한전의 기술로 발전한다는 발전소와 정유소가 있는 곳을 지나간다. (루마니아의 의술과 제로비탈 H3) 이 나라의 유명한 화장품 '제로비탈'과 관련된 곳을 지나며, 이 나라의 의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위를 계승한 후 의술을 발전시켜 기초의학이 매우 발전한 나라라고 한다. 이곳 의학자가 처음 인슐린을 발견하고, 의학지에 기고했으나 국력이 약하여 인정받지 못하고, 캐나다 밴팅이 인정받아 노벨상을 빼앗겼다고 한다. 비만한 사람들이 하는 지방흡입 의술이 발달하여 한국의사들이 기술을 배우려 왔을 때에 통역을 했다고 하며, 이곳은 의료비가 싸기에 수술비로 여행까지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제로비탈에 대하여 가이드 이야기와 자료들과 함께 기술해 보기로 한다. 루마니아 여류의학자인 아나 아슬란(1897~1988)이 '제로비탈'을 발견한 후 노화를 지연시키는 복용 약으로 이 나라의 브랜드가 되었으며, 해외의 정치인, 연예인, 유명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로서 루마니아는 노화 방지 클리닉의 메카가 되었고, 챠우체스쿠도 그녀의 치료를 열심히 받았다는 후문과 함께 차우체스쿠 부인 엘레나가 직접 관리 감독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제로비탈의 중요 성분인 노보카인(독성이 적어 마취제나 치매 예방 약품으로 사용)의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각국으로부터 수입, 판매 금지라는 제재를 바르면서 그 빛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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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가 민주화가 되면서 Gerovital Cosmetic(Miraj) 회사는 제로비탈의 모든 권한을 가진 화멕사 (Farmec)를 무시하고 노보카인을 대체할 성분을 가진 화장품을 개발했다. 뒤 늦게 화멕사도 노보카인을 대체할 기술력을 갖추고 화장품을 만들었지만 마케팅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했으나 2006년 Gerovital Cosmetic 회시에게 소송에서 이겼다. 2008년부터는 단독으로 '제로비탈 H3'의 상표를 쓰게 되었으며, 화장품은 악 건성 피부, 탄력 없이 주름진 피부에 피부재생, 영양, 보습 3가지 효과를 주어 피부에 탄력과 견고성을 증가시켜 주름이 줄어들어 젊어보이도록 만들어 준다고 한다. 가이드는 아이크림은 유일하게 권할 만한 상품이라고 하여 저녁 먹은 식당에서 3개를 샀다.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장품 제로 비탈 H3>
(루마니아 지형과 역사) 멀리 카르파티아산맥이 보이면서 이 산맥이 투르크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마지막 보류의 산맥이라고 하며, 루마니아의 로마시대 역사를 이야기 하였는데 루마니아 역사는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3대 세력을 가이드 설명과 함께 기술해기로 한다. 국토 남부에 가로 지르는 트란실바니아산맥이 있고, 이 산맥이 시작되는 동쪽 끝으로부터 북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이 뻗어 올라가는 지점에 우리가 갈 브란과 브란쇼브가 있다. 트란실바니아산맥 남쪽 왈라키아지역에 있던 왈라키아공국은 터키와 가까워 터키의 침입을 받다가 1415년부터 지배도 받았으며, 드라큘라 백작은 이 시대의 사람이다. 카르파티아산맥 동쪽으로 몰다비아지역에 있던 몰다비아공국은 러시아와 가까워 1812년부터 러시아와 루마니아로 몇 번의 소유가 바뀐 후 1944년 가장 작은 소비에트 연방이 되었다. 1991년 8월 27일 독립 후 1992년 3월 몰도바공화국으로 국제 연합으로부터 국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국토는 33,843㎢, 인구 376만 명(2008 추계)이다. 트란실바니아산맥 북쪽과 카르파티아산맥 서쪽에 있는 트란실바니아지역은 헝가리와 가까워 1699년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루마니아 국명이 된 원인은 AD 106년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스페인 사람)가 정복하고 다키아인들을 카르파티아산맥 북방으로 추방하고, 이민 정책을 시행했다. AD 272년 고트족 침입으로 로마가 철수했으나 대부분 잔류하여 디키아인들과 혼합하여 현재의 루마니아 민족의 원조가 되었고, 이들이 로마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가이드는 이때에 원주민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부인으로 삼아 낳은 혼혈들이 현재의 루마니아 원조라고 하며, 로마는 귀족들만 철수했다고 한다.
<브란 성에서 본 루마니아 풍경>
(집시 정착촌) 루마니아 정부가 집시들이 살 수 있도록 허락한 집시정착촌을 지나면서 가이드가 이 지역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하여 잘 아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들의 삶은 열악하고, 집들도 흐름하고 텅 비어 있는 것은 모두가 서유럽으로 원정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파리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고가다 룸메이트의 주머니 들어 온 집시 아가씨의 손을 붙잡고 보니 가날픈 그녀의 손에 돈이 든 편지봉투가 들려있었는데 이들이 루마니아에서 온 집시라고 했다. 그 때는 루마니아가 어디쯤 있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오늘 집시들의 고향을 볼 줄은 몰랐다. ※집시(Gypsy): 집시를 통상적으로 ‘로마(Roma)'라고 부르나 국외에 사는 루마니아인(Romania)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어 루마니아는 집시를 ‘로마(Roma)'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나라에 따라 보헤미안, 치고이너, 치가니, 리타니 등으로 부르는데 집시는 인도에서 11세기 페르시아로 14세기 발칸으로 15세기 서유럽으로 들어 간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전 유럽에 1천만~1천200만 명 정도인데 집시는 한곳에 정착해서 살지 못하는 습성과 게으르고 구걸이나 소매치기로 연명한다는 인식으로 사회적 편견을 받고 있다. 루마니아도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집시에 대한 혐오와 증오정서로 서유럽은 강경추방하거나 불법이민 억제의 강경책을 쓰고 있어 가장 차별받는 소수민족이다. 2009년 헝가리는 전 인구의 6~8% 정도인 60만~80만 명으로 추정되는 집시를 사회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대학졸업생의 집시를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집시에 대한 연쇄 살인이 일어났고, 심지어 ‘집시를 치우자'는 슬로건을 내세운 극우정당이 의회에 당선되는 등 오히려 집시사회의 통합은 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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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 성(Bran Castle) 관광] 가이드가 가리키는 멀리 보이는 브란성은 일반주택과 구별이 잘 되지 않았는데 도착하고 보니 서유럽 같이 큰 성이 아니라 한 귀족의 저택같이 작았다. 브란은 호수와 울창한 숲의 중세 작은 마을이라고 했지만 호수는 보지 못했다. 브란성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너무 차이가 많아 이것에 대한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가 볼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것 같아 조금은 염려스럽다. TV에서 방영한 ‘카사 드라큘라(Casa Dracula)’라는 레스토랑과 브란 성을 같은 곳으로 착각하여 TV에서 본 장면들이 없어 이상하게만 생각했는데 여행 후에 알았다. 이 레스토랑은 드라큘라의 아버지 드라꿀이 지었던 생가로 그가 태어 난 곳으로 트란실바니아의 브란 성 북서쪽 시기쇼아라(Sighisoara)라는 곳이다. 브람 스토커가 한 번도 오지 않고 쓴 소설 드라큘라와 우리가 본 영화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지만 사실 브란 성은 소설과 아무 연관이 없기에 드라큘라에 대한 것을 찾는 것이 잘 못 된 것이다. 또 드라큘라백작이 흡혈귀로 묘사됐지만 루마니아인 들이 영웅시 하는 백작을 소설처럼 보여 줄 수도 없지만 그들은 그 자체도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또 이 성은 드라큘라 백작과도 전혀 관계가 없으며, 할아버지 소유였다고 하지만 그 마저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백작이 잠시 머물렀다고 추측하는 하는 곳이다. 또 백작에 대한 것을 찾는 것도 잘 못이며, 백작이 유폐되었다고 알고 간 정보도 허구였고, 루마니아 정부는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박물관에다가 드라큘라 영주가 사용했던 고문 도구 등 소설에 등장하는 물건들을 진열하고, 음향시설과 조명 시설을 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가이드 말로는 2009년 5월이라고 했는데 내가 잘 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자료에는 2006년 5월에 성이 개인 소유가 된 뒤로 내부 소장품은 국가에서 모두 가져가고 진열 된 모든 것은 가이드 말로는 최근에 전부 새로 갖다 놓은 모조품들이라는 것이다. 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마리왕비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이 성을 좋아해서 자주 찾았던 마리(마리아)왕비(1875~1938)가 이 성에서 보여 줄 수 유일한
역사이지만 자료도 빈약하여 사진이 대신하고 있었다.
<루마니아 왕비 마리아의 사진 >
루마니아의 제일 명소가 가이드 말대로 유럽의 3대 썰렁 명소(브뤼셀의 오줌 싸게, 라인 강의 로렐라이, 덴마크의 인어상)와 같은 곳이라고 했을 까? TC는 그래도 멀고 힘들지만 안 찾아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브란 성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리왕비에 대한 자료를 옮기면 가이드는 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이라고 했지만 다는 자료에는 여왕의 아들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는 루마니아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가 되었고, 자료에는 1920년 이곳 상인들이 왕비에게 브란 성을 바쳤고, 왕비는 딸 일리아나공주(1909~1991)에게 주었다고 한다. 1차 대전 때 루마니아 국왕이었던 미하이 1세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와는 8촌간이다. 그 후 공산정부로부터 국유화되었으며, 민주화 이후에 국유화된 사유 재산을 돌려주는 조치에 의해 2006년 5월에 후손 도미니크 폰 합수부르크에게 반환 되어 사유 재산이 되었다. 성의 입구에서 가이드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계단을 따라 내부로 들어가 정신없이 따라 다녔는데 마리왕비가 이용했다는 예배장소, 회의실, 거실의 벽난로, 왕이 왔을 때 같이 사용하던 침대, 식탁, 왕비의 사진도 보였다. 백작도 몰랐다는 비상구로 올라가 곰이 많이 출현한다는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도 봤고, 피아노가 있는 방, 영화에서 드라큘라가 올라왔다는 마당 가운데 있는 우물도 보았다. 브란 성의 역사 자료가 있는 방, 블라드 쩨뻬쉬 이야기와 꼬챙이로 처형하는 그림이 있는 방, 블라드 쩨뻬쉬 가족의 계보가 있는 방도 보았다. 일리아나공주의 어릴 때 모습부터 늙은 수녀의 모습까지 있는 방에서 공주가 1990~1년 마지막 방문 때 이곳 주민들이 과일을 담아 주었던 바구니에 약속대로 다시 과일을 담아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관광객의 입장을 생각해서 지금은 테마 파크로 바꾸는 중이라고 하며, 비록 모조품이지만 당시의 영주복장, 기사복장, 갑옷, 무기 등도 있었고, 드라큘라의 모습과 영화 포스터도 있었다. 가이드가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를 보여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물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나 예수 믿어'라고 했지만 웃는 사람이 없어 썰렁한 개그가 되고 말았다.
<드라큘라 촬영장소 브란 성(일명 드라큘라 성)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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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 성과 드라큘라-Dracula) 어째든 이곳은 소설과 영화로 유명해진 흡혈귀 드라큘라백작 때문에 오기에 이들의 관계를 알아야 하기에 불가리아로 가면서 들려준 TC 이야기와 함께 다루려한다. 먼저 브란 성은 브라쇼브 남서 32km에 있으며 '관문의 뜻'을 가졌으며, 1212년에 독일 튜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다고 하나 문서상에는 1377년에 착공돼 138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 후 왈라키아 지역과 트란실바니아를 잇는 교통 요충지 브란 고개(령)를 지키기 위해 꾸준히 증개축 되었다고 하는데 스토커의 소설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진짜 흡혈귀에 비슷한 사람은 에르체베트 바토리로 그는 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친척으로 트란실바니아 왕이나 폴란드 왕 등을 배출한 명문가로 체이터 성의 성주 페렌츠 나다스디 백작의 아내로 정신이상자로 보여 진다. 1560년 태어난 그녀는 1600년 남편이 죽은 후 엽기적인 흡열과 피의 목욕 소문을 듣고 1610년 12월 30일 그녀의 사촌인 기오르기 투르소 백작의 기병대가 도착하는 날까지 자행되었으며, 그녀가 기록한 10년 동안 살해한 처녀는 612명으로 1614년 8월 21일 54살의 나이로 감옥에서 죽었다. 흡혈귀는 아니지만 1431년 태어나 1476년 죽은 블라드 테페스(블라드 쩨뻬쉬)는 이름, 그의 행적, 음해하기 위하여 게르만계의 색슨족이 쓴 연대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그의 본명은 블라드 쩨뻬쉬(Bladv Tzepesi Ⅳ) 4세로 또는 블라드 테페스(Blad Tepes)로 그에게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아버지로부터 왔다. 아버지 이름은 헝가리의 지그문트 2세로부터 용(Dracul)이란 작위를 받아 이름을 블라드 드라큘(Blad Dracul)이라 했으며, 용을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그의 아들, 또는 대리자라는 뜻으로 '라'를 붙어 '드라큘라(Dracula)'라고 불렀는데 드라큘(영문: dragon)은 악마라는 의미도 있으며, 쩨뻬쉬는 꼬챙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부분 자료에 쩨뻬쉬가 투르크와 헝거리 볼모생활을 잔인한 취미 생활을 즐겼다고 하지만 유폐된 생활에서 그런 비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쩨뻬쉬의 잔인함을 이해하는데 TC 이야기가 더 적당하여 여기에 옮기기로 한다. 차남인 쩨뻬쉬는 14살 때 투르크의 궤락으로 초청을 받고 아버지와 같이 갔다가 불모가 되었고, 아버지는 돌아간 뒤 그는 계속 볼모로 남았다고 한다. 그도 17살 때 탈출하여 돌아왔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귀족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아버지와 형제들의 시체였다고하며,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인 자들에 의해 허수아비 왕으로 추대했지만 복수를 위해 헝가리로 탈출하여 헝가리 장군 밑에서 군사적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장군이 죽은 후 25세 때에 돌아와 왕위를 되 찾고, 성을 건축한 후 귀족들과 가족을 초청하였으며, 성문을 닫고 아이들을 죽인 피를 부모들이 먹게 했다고 한다. 그런 뒤 귀족들은 오래 동안 고통을 주도록 그의 이름과 같이 꼬챙이 위에 사람을 올려 놓고 몸무게에 의해 서서히 항문을 관통하여 죽게 했다고 한다. 그는 정직하고 착한 정치를 하였으며, 범죄자는 엄격하게 꼬챙이 사용하였으며, 정치를 잘 하여 주위 나라의 미움을 받아 그들이 악한 사람이라고 소문냈다고도 한다. 10배나 많은 투르크와 첫 번째 전쟁에는 용감하게 싸워 승리했으나 명예 회복을 위해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쳐 들어온 투르크에 패했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 복장으로 위장하고 비밀통로로 도망을 하다가 쩨뻬쉬를 알아보지 못한 아군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그의 시체는 투르크 가져갔다고 한다. 독일연대기에 브란쇼브를 식민도시로 건설한 색슨족(게르만)이 그의 고향 트란실바니아의 경제권을 쥔 것에 격분하여 공격하여 경제권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분풀이로 색슨족은 쩨뻬쉬가 죽은 뒤에도 악독한 전설은 더 부풀렸다고 한다. <큰 사진:블라드 쩨뻬쉬(Bladv TzepesiⅣ) 4세(Ⅳ), 작은 사진: 잔인한 처형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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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와 마늘 그리고 아틸라) 영화를 보면 드라큘라가 십자가와 마늘을 무서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십자가는 이해가 되지만 마늘은 조금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다. 드라큘라 자료를 찾다가 마늘과 드라큘라의 관계에 대한 이종호박사 학설이 매우 흥미로워 옮겨 보기로 하는데 나만 흥미로운 것인지 모르겠다. 아틸라(435~439년)는 445년까지 형 블레다와 함께 통치, 동로마의 협상자인 프리스쿠스가 쓴 '역사'란 책에 키 작고, 머리 크고, 눈 들어가고, 코 납작하고, 턱수염 적다고 묘사하여 몽골 인을 알게 한다. 이종호박사 학설로 훈족이 한반도의 한(韓)민족과 계통이 같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아틸라 군대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 수렵도에 나타난 복강궁을 사용했고, 몽골반점이 있으며, 무엇보다 머리 골상이 같은 편두(偏頭)라는 것이다. 유럽인은 신의 징벌로 여긴 공포대상 아틸라와 칭기즈칸이 아시아인이라 드라큘라는 훈족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훈족은 마늘을 즐겨 먹어 훈족의 상징으로 단군신화에도 나온다. 마늘을 보면 훈족의 자손인 드라큘라가 무서워 한 것이 아니라 순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질범이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면 순해지는 순화현상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 학자들은 '헝가리(Hungary)'의 어원은 훈(Hun) 족의 훈으로 신라의 간, 몽골의 칸, 우리 말 한(韓)으로 크다는 의미이고, 가리(gary)는 우리말 고대어 고려로 영역이나 나라를 의미한다고 한다. (발칸 지역의 역사자료와 연대가 차이가 나는 이유) 쩨뻬쉬 대한 잔인한 자료는 다른 곳에도 많아 더 다루지 않지만 때로는 자료와 연대까지 차이가 많은 이유가 궁금하여 했던 것을 기록해 본다. 먼저 연대가 다른 것을 불가리아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역사 자료가 없어 최근의 연대도 틀린 경우가 많다고 하였고, 또 지방마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같은 발칸 지역은 최근까지도 정치적으로 달랐고, 사라예보를 가보니 이 도시의 주민이 다양하여 역사를 어느 편을 넣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각기 다른 지역역사를 한 나라의 역사로 말하기가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보다 정확한 역사는 도시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아 도시역사를 기록했다다. (브라쇼브로 가는 길) 루마니아는 세계문화 유산이 7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에 없고, 보이는 마을마다 어느 종교를 많이 믿는지는 예배당의 크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크리스탈이라는 동네를 통과하면서 건물들이 도로 쪽으로 성처럼 이어져 있으며, 창문도 작고 골목이 없어 출입문을 닫으면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런 요새화된 마을은 터키의 침입 때문이라고 하며, 모든 교회마저도 예배를 보는 곳이지만 전쟁 때는 요새의 역할도 같이 하도록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런 요새화된 15세기 마을과 교회가 거의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도 있다고 하는데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룬 곳인지 알 수가 있다. 거의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요새화된 옛 마을과 교회 중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루마니아 인들은 순박하고, 강도가 적다고 하였는데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 루마니아 정교회 총 주교이자 작가이었던 게오르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25시'가 생각난다. 미모의 아내 스잔나를 좋아한 경찰서장이 순박한 농부 요한을 루마니아를 점령한 독일 나치에게 유대인이라고 밀고하면서 그는 많은 고통을 겪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자가 사진 찍을 때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아내가 낳은 아들을 안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서글픈 면서도 어정쩡한 앤소니 퀸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브라쇼브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후식으로 체리를 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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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쇼브(Brasov) 관광] 식당을 나오자 식당 앞이 관광할 구시가지 공화국광장 즉 스파툴루이광장이라 한다. 1240년에 건축된 구시청사는 현재는 박물관으로 4방에서 볼 수 있도록 4개의 시계가 있는 종탑이 있다. 구시청사와 은색 돔 위에 십자가가 있는 스판타아도미래 정교회(그리스)를 향해 사진을 찍고 바쁘게 가이드를 따라 검은 교회로 향했다.
<스파툴루이광장의 구시청사>
(검은 교회로 유명해진 성모마리아 교회)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이 교회는 1242년 몽고군이 쳐 들어와 초기교회는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1395~1477년 약 80년 동안 건설되었다. 가톨릭 성당으로 건설되었으나 독일의 종교개혁 후 자발적으로 루터교로 바꾸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대로 남아났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에 반대하다가 1689년 합스부르크 군의 공격으로 내부는 손상을 입지 않고 외벽 건물이 그을려 검은 교회 되었고, 1711~15년 사이에 복구할 때에 외벽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옆 건물은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 서 유럽식 이 학교의 설립자는 교회 외벽에 책을 들고 서 있는 동상 아래는 Honterus 1498-1549라고 쓰여 있는 이 사람으로 Johannes Honterus는 지도를 제작 출판한 사람으로 종교 개혁가이자 인도주의자라고도 한다. 내부에는 4,000개 파이프와 4개의 건반을 가진 세계최대로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며, 설교단 반대편에 있는 이 오르간을 듣기 위해 의자를 앞뒤로 바꿀 수 있다. 또 난간에 걸려 있는 15~18세기경 동양서 양탄자는 한 여행자가 터키를 다녀 온 기념으로 양탄자를 헌물한 것이 전통이 이 교회의 전통이 되어 그렇게 많다고 한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 성모마리아에게 바치는 그림이 있어 성모마리아 교회라고 했는데 아니 내가 잘 못 들었나? 아니면 내부가 비잔틴 양식? 하여튼 자료에는 고딕양식이다. 내부는 사진을 찍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고, 교회 전경은 다 넣고 찍을 공간도 없어 일부만 찍을 수 있는데 산 위에 허리우드처럼 'Brasov'라고 크게 쓰인 것이 보인다. 광장 주위를 한 바퀴 돌고 갈 줄 알았는데 식당에서 바로 옆에 있는 검은 교회를 보고 그 자리에서 시나이아로 떠나 내가 언제 또 온다고, 너무 섭섭한 마음이 든다. 참고로 인구 약 30만 명인 브라쇼브는 부쿠레슈티 북서쪽으로 170㎞ 떨어진 곳에 3면이 트란실바니아, 남 카르파티아,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이런 산맥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더 실감나며, 1211년 독일 튜튼기사단이 세웠고, 1251년 처음으로 문서에 브라쇼브로 기록된 고대도시라고 한다. 브라쇼브는 색슨족 식민도시의 중심지가 되었고, 루마니아인들은 시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1876년 카를 1세 때 자치는 막을 내린 이후 루마니아인이 세력을 확장하여 교육,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루마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참고로 게르만 색슨(Saxen)족은 독일 작센 지방의 영어표기로 영국의 최초 통일 왕조 앵글로색슨왕조 (827-1066)의 색슨도 작센 지방의 사람들이다.
<브라쇼브의 검은 교회>
(시나이아로 가는 길) 점심 식사 후에 모두들 잠이 들었으나 관광 시간과 요금을 나누어 보면 낮에 자는 잠은 너무 비싼 요금이기도 하고 다시 볼 수 없는 곳이라 최대한 참고 주위를 살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관광의 여운이 갈수록 짧아 진다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가 기억력의 차이라는 것을 너무 실감하게 되였으며, 기록한 것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때론 이런 기록에서 벗어버리고, 가이드의 설명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여행도 하고 싶은데 얼마 있지 않으면 기록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날이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왔던 길이 아니라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이어졌다는 철도도 옆으로 지나가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서유럽으로 가고 싶다. 다시 고개를 넘어 아침에 들렸던 부체지로 들어와 이번 여행에서 역사적 관광지로는 가장 볼 것이 많아 기대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 있는 펠레슈 성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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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국보1호 펠레슈 성(Peles Castle)관광] 펠레슈 성이라고 하며, 성과 성벽이 있는 것이 상상되지만 이곳은 건물만 있는 여름별궁으로 궁의 이름은 이곳을 흐르는 냇가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성은 카를 1세가 1875부터 건축하면서 일부완공은 1883년에 끝났으나 1893년 다시증축을 시작하여 1914년 증축을 마친 그해에 죽었다고 한다. 공산정권 때는 간부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고, 중요한 외국 국빈을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공산정권에서 몰수한 재산을 돌려 줄 때에 입국을 허락 받은 국왕이었던 미하이 1세가 돌아와 이 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많은 입장 수입을 포기할 수 없는 정부는 국가재산으로 지은 것이라 돌려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와 국민의 신임을 얻으려고 왕이 포기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커피숍이 있는 곳이 가장 전경이 잘 나온다고 미리 찍고 늦게 도착했더니 일행들은 내부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촬영하려면 돈을 지불하고 명찰을 목에 걸어야 한다고 한다. 사진이 찍는 것이 가능한 입구 벽에도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으며, 우리는 신발 위에 덧신을 신고 가이드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 설명을 들고 기록하며, 따라 다니는 것이 너무 바빴다. 그때에는 그나마 사진을 안 찍는 것이 다행이었으나 지금은 사진이라도 있으면 기억을 되살리기에 좋으렸만…. 기록한 것과 기억을 더듬어 가며 대충 옮겨 본다.
<펠레슈 성의 전경>
(중앙 홀) 당시 난방은 벽면난로였으나 이곳은 중앙보일러식이 특이하고, 환기를 위하여 유럽 최초로 전기를 사용하여 열고 닫는 천정 스테인 글라스가 있다. 벽면을 장식한 조각품은 보리수, 체리, 호두나무 등을 자료로 사용했다고 하며, 장식용 계단을 따라 무기실로 가는 복도 벽에 진공청소기를 연결했다는 파이프도 있다. (서양 무기실) 카를 1세가 루마니아 군인들에게 사용할 무기를 만들 목적이 아니라면 웬 무기들을 이렇게 많이 모았는지 궁금증이 생겼고, 사람들을 죽이든 무기와 같이 있는 것이 좋았을까? 600년 전부터 유럽각지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1,000 여 개의 무기와 25~30kg 되는 갑옷 중에는 기사신발이 특이하게도 끝이 뾰족한 것은 패션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이곳에만 유일하게 있다는 80kg의 말의 갑옷은 부쿠레슈티에 전시되어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목을 자르는 칼을 보고, 동양무기실로 향했다. (동양 무기실) 이곳은 터키나 중동지역에서 보았던 아랍식 무기가 전시 되어 있으며, 장식장 안에는 상아나 보석이 박혀 있는 자루들의 무기는 전쟁용이 아니고 퍼레이드용이라고 한다. (왕의 집무실) 왕을 알련 하기 위하여 마련된 대기실은 베네치아 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왕이 죽은 1914년에 멈추어 있는 달력은 손으로 돌려서 날짜를 맞추는 두루마리 식으로 만들어 졌다. 집무실 벽에는 왕비 엘리자베타가 특이하게도 우리처럼 아기를 업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하나 밖에 없었던 이 아이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왕비의 표정이 서글프게 보인다. 이 그림 끝에 있는 장식용 페치카 위에는 '신 없는 인생은 없다.'라고 쓰인 글을 보고 나왔다. (왕의 도서실) 도서관이라고 했지만 규모가 작아 서재 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곳 중간에 있는 진열장의 책을 유심히 보면 다른 곳과 다르게 책의 케이스만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장이 왕이 비상시 사용할 비밀 통로의 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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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방) 뮤직 살롱으로 들어가기 전 옆에 있는 작은 공간은 사람이 돌리면 음악이 나오는 커다란 뮤직 박스가 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이 방은 왕비가 주로 사용하면서 그림그리기와 시를 썼다고 하며, 독일 신화를 그린 그림은 왕비가 그린 것이라고 하고, 이 방에 전시된 중앙에 있는 하프와 피아노 등의 악기도 있다. 비엔나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와 일본도자기도 있으며, 중간에 있는 구리문은 앞뒤의 모양이 각 방의 분위기에 맞도록 다르게 만들어 졌다. (이탈리아 방) 이 방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놀라만한 것이 많은 방으로 그 중에 1.000번 이상의 수작업을 했다는 카펫은 어린아이 손으로만 할 수 있다고 하며, 가격도 1㎡ 당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다음은 응접실이 아주 크게 보이게 착각할 수 있도록 했다는 4m 높이를 가진 거대한 거울인데 100년 전에 베네치아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것을 카피했다는 천장의 그림은 보기 쉽게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응접실)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식당으로 음식은 지하주방에서 작은 엘리베이터로 옮겼다고 한다. (무어 방) 이방은 무어(아랍인)식으로 꾸며진 방으로 식사 후 차를 마신 곳으로 방과 벽은 보리수나무 위에 금분을 발랐다고 하며, 프랑스식 공간과 아랍 무기도 전시되어 있다. 소극장으로 이동하면서 2인용 엘리베이터와 통 보리수나무로 만들었다는 인어 상과 더 놀란 것은 높이 5m 되는 대형 거울이 또 있었다. 대형 거울의 세로 길이 궁금했으나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같은 길이라도 서 있는 것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을 감안하면 세로 길이는 높이와 비슷할 것 같다. 이런 대형 거울을 당시에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거울의 비치는 상이 하나도 찌그러짐이 없는 것이 굉장한 기술이라고 가이드는 말해주었다. 방의 구조를 대칭을 만들기 위해 왼편 것은 가짜로 만들었다는 문도 복도에 확인했다. (소극장) 한국의 연극인들이 보고 감격했다는 60석을 가진 아담한 소극장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궁전의 외곽) 남들은 밖으로 나갈 때 바쁘게 외곽을 돌아보고 사진도 찍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프랑스식 정원에는 카를 1세의 동상과 조각상들 그리고 분수대가 있다. (펠레슈 성의 일반 자료) 자료에는 이 궁전은 독일 건축가 빌헬름과 그의 제자 요한네스 슐츠에게 공사감독을 시켜 네오르네상스, 로코 코, 바로크, 터키 식, 등의 여러 건축방식을 혼합하여 건축 되었다. 170개의 화려한 방과 30개 의 욕실 1903~06년 사의의 동서양 무기류 4.000점과 유럽 화가가 그린 회화
2.000점이 전시 되어 있다고 한다. (시나이아, Sinaia의 자료) 도시 이름은 인근 ‘시나이아(성경: 시내산) 수도원’에서 왔으며, 루마니아 화폐(5 Lei 전면 인물사진)에도 등장하는 에네스쿠(1881~1955)는 유명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로 그의 루미니슈 저택도 이곳에 있어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이 일대는 부체지 자연공원(Bucegi Natural Park)으로 지정되었고, 공원 안엔 이곳 식물과 동물을 한곳에 모은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멀리 산 중턱에는 기암괴석이 있는 유명한 부체지산 꼭대기와 겨울에 스키어들이 많이 찾는 스키장은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고 한다.
<펠레슈 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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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체아우셰스쿠 이야기) 부쿠레슈티로 향하면서 아침에 예고했던 체아우셰스쿠(차우셰스쿠, 1918~1989)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료와 가이드 이야기를 함께 옮기기로 한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태하고, 구두제조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하며, 12살의 어린 나이에 공산당원으로 활약하다가 투옥되었고, 1947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청년 동맹의 서기였던 그는 농무장관과 국방차관을 거치면서 마침내 당서 열 2위가 되었다. 1965년 모스크바를 방문 중에 독재자 게오르기우 데지가 갑자기 사망하여 서기장이었던 그는 당권을 계승했으며, 1974년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초기에는 티토처럼 소련에 도전하는 민족주의적인 정치노선과 초기에 거둔 경제정책으로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었지만 나쁜 의형제를 맺게 된 것이 불행이었다. 그 나쁜 의형제가 바로 김일성으로 그에게서 공포정치와 개인숭배를 배우게 되었으며, 그는 김일성 궁전을 보고 이보다 호화롭고 더 큰 궁전을 건설했다. 이 궁전이 차우셰스쿠 궁전으로 지금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곳이며, 그는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했고, 김일성도 3번이나 답방하여 친분을 쌓았다. 71년 서열 2인자인 이온 일리에스쿠에게 개인숭배정책을 요구했으나 지역상 유럽이어서 안 된다고 하여 당 중앙위원직에서 축출된 뒤 출판사 대표직을 맡아왔다. 그는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독재를 강화하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족위주로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부인 엘레나는 실질적인 제1부총리였다. 나머지 요직은 아들, 형제, 친척들이 맡았으며, 가족들은 부정축재로 호화생활을 즐겼고, 별난 난봉꾼 차남 니크는 올림픽 체조의 여왕 코마네치를 괴롭혔다고 한다.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코마네치는 위장한 미국첩보원과 함께 헝가리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연인 콘스탄틴 페니트와 결혼했다. 부인 엘레나는 현대판 3대(필리핀 이멜다, 중국 장칭) 악녀의 한 사람으로 그녀는 농가에서 태어나 방직공장의 직공을 거치면서 가난을 뼈저리게 겪었다. 이것은 훗날 그녀를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하였으며, 필리핀의 이멜다처럼 광적이 구매와 초호화판의 생활을 하게 하였고, 그녀는 국립과학연구소의 잡역부로 일 했다고 하며, 이 경험을 토대로 모든 학위를 설렵하면서 스스로 화학박사라고 하였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일하여 화학분야가 인기가 있었고, 가이드 부인도 화학을 하게 된 동기라고 한다. 1970년대에 경제정책 실패로 1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갚기 위해 1982년부터 대부분의 농공산물을 수출하여 각종 생필품이 극도로 부족하게 되었다. 부족한 생필품의 배급과 에너지절약으로 어둠과 추위 속에 떨면서 9년 만에 외채를 다 갚았지만 궁핍한 생활, 독재, 가족들의 부패로 원성이 높아갔다. 민주화운동의 불씨는 가장 탄압받던 티미소아라 시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교회에 젊은 목사 라스즐로 토케스가 부임하였다. 그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설교로 50여 명이던 교인이 2년도 못 되어 5.000명으로 늘어났고, 그는 방송을 타게 된 유명인이 되었다. 비밀경찰은 그를 죽이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추방하려했으나 교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교인 중에 희생자가 생겼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89년 12월 17일에 일어난 타미소아라 시위대에게 군대에 발포를 명령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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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투병 중인 남편을 대신한 엘레나가 무자비한 탄압으로 루마니아 전역에 5.000여 명의 희생자가 생겼으며, 대통령 보안군을 제외하고 모두가 혁명대열에 참가하였다. 혁명의 성공은 다가 왔으나 새로 정부를 구성할 인재가 없었으며, 결국 71년 쫓겨난 이온 일리에스쿠를 중심으로 구국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이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1989년 25일 탈출에 실패한 차우셰스쿠 부부는 특별 군사재판에서 6만 여명의 대학살과 국가전복 기도 등 6가지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돼 즉각 형이 집행되어 27년의 권력은 끝났다. 이렇게 빨리 처형한 이유는 대통령을 위해 아직까지도 반항하는 비밀경찰, 친위대, 용병들의 희망을 꺾고, 성난 군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용병들 중에 북한인 2명과 아랍인 2명이 부상을 입고 치료도 받았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사람들은 공산당 시절 그대로 제도만 민주화가 되었으며, 사유재산으로 전환될 때 정권을 쥔 그들이 새롭게 부를 가진 자들이 되었다. 이들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며, 체아우셰스쿠 이야기 중에 인구증가 정책 이야기는 불가리아로 향하면서 TC가 해주었기에 그 때 기록하기로 한다. [부쿠레슈티(Bucharest, 부카레스트) 관광] 부쿠레슈티로 오는 도중에 보기 힘든 복잡한 안테나는 차우셰스쿠 시절에 전파교란 장치로 쓰였다고 하며, 현재는 감청을 하기 위해 두었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오면서 프랑스와 관계가 좋았던 드골 대통령을 기념하여 붙여진 '드골광장'과 페르디난트 1세가 즉위하면서 만들었다는 26m 높이의 개선문도 보았다. 대사관 거리에 왔을 때 가이드가 북한과 중국 대사관 거리에는 개가 없다고 이야기 하다가 개 한마리가 보였는데 목에 줄을 맨 주인 있는 개였기에 다행이라고 말한다. 공룡과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박쥐박제가 있다는 자연사박물관도 지나갔다. (혁명 광장) 혁명광장에 도착하여 차 안에서 설명을 하기에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명을 마치고 차 문이 열려 내려가 차 안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찍었다. 당시에 보안군과 싸웠던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 건물과 돌로 된 1층과 2층은 그대로 두고 불탄 위층은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도 있다. 1989년 12월 22일 아직도 추앙받는다고 착각하던 차우셰스쿠가 연설하다가 도망했다는 구 공산당 본부의 발코니도 보고 차우셰스쿠 궁전으로 향했다.
<부쿠레슈티 혁명광장의 구 공산당 본부>
(차우세스쿠 궁전) 실로 대단한 크기의 궁전은 김일성 주석궁을 본 후 감격하여 건설했다고 하며, 단일 건물로는 미국 펜타곤국무성건물 다음으로 크다고 하며, 현재는 국회의사당이라고 한다. 공화국 광장의 거리도 대단한데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보다 폭이 1m 더 크게 만들었다고 하며, 41개의 분수는 루마니아의 41개 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모든 건물을 헐어버리고 건설했는데 한 성당만은 통제로 뒤로 옮겼다고 하며, 건물을 바라보고, 왼쪽으로부터 재정경제부, 산자부, 통신부, 원자력자원부라고 한다. 딤보비차 강물을 끌어 들려 만들었다는 수로를 보고 차를 타고 가면서 통일광장(only one), 대학로광장, 로마광장, 빅토리아광장 등을 본 후 식당에 도착했다.
<차우셰스쿠 궁전 현 국회의사당>
(Will you be there ? - 거기 계실 건가요?) 가이드는 이 공화국광장에서 Michael Jackson의 공연을 1992년 10월 1일 전 세계 37개국에 방영했던 장소라고 하며, 그 때 많은 인파가 몰려 왔다고 한다. 하지만 비싼 요금 때문에 빈 공연장을 공짜라도 채워서 공연하는 것이 났다고 하며, 마음이 따뜻하다는 마이클 잭슨은 공짜로 입장시켰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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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공연을 본 사람들이 더 열광하며 좋아했을 것은 더 자명한 일로 이 때 부른 'Will you be there'는 내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 중에 유일하게 좋아하는 곡이다. 1993년 사이먼 원스 감독한 영화 '프리 윌리(Free Willy)'의 삽입곡으로 1994년 MTV에서 최고의 영화 음악상을 받았다고 하는 노래이다.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 '프리 윌리'는 조련장에서 말썽 많은 범고래 원리가 또 하나의 말썽 꾸러기 12살 제시와 친구가 되어 윌리를 바다로 유인하여 자유를 준다는 내용이다. (부카레스트 역사) 인구 약 225만인 이 도시는 ‘루마니아의 작은 파리’로 부쿠레슈티는 ‘기쁨이 넘치(샘솟는)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도나우 강 북부의 작은 지류 딤보비차 강 양안에 있다. 왈라키아 공국과 당시 북서쪽 69㎞에 있던 수도 티르고비슈테를 위협하던 투르크의 방어를 위해 요새를 세웠으며, 오스만제국의 속국 된 후 왈라키아 공국의 주요 경제 중심지로서 급성장하여 1659년 수도가 되었다가 1862년 루마니아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루마니아 역사) 238,391㎢(유럽 12번째), 2.200만 루마니아인 91.5% 루마니아정교회 87%, BC 1세기경 다키아(Dacia, 다치아)인들이 루마니아 지역에 중앙집권적인 다키아 왕국 건설했다. AD 106년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스페인 사람)가 정복하고 다키아인들을 카르파티아산맥 북방으로 추방하고, 이민 정책을 시행했다. AD 272년 고트족 침입으로 로마가 철수했으나 대부분 잔류하여 디키아인들과 혼합하여 현재의 루마니아 민족의 원조가 되었고, 이들이 로마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AD 2~3세기 기독교가 들어왔으며, 11세기에 그리스정교회가 정착되었다. AD 3세기 고트족 침입, 5세기 훈족 침입, 6세기 슬라브족 침입, 9세기 말 남 왈라키아는 제 1 불가리아제국이 지배, 10세기말 러시아 지배 후 13세기 타타르(몽골)족 지배를 받았다. 10~13세기 헝가리왕국이 지배받으며 헝가리, 색슨(게르만), 체크인들이 이민정책으로 정착 했고, 자치권을 인정받아 1330년경 바사라브 공(재위1310~52)이 왈라키아(Walachia)공국을 건설, 조금 뒤에 몰다비아공국을 건설하였다. 1415년 오스만은 왈라키아를 예속시켰고,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재위 1457~1504)는 투르크와 폴란드의 침입을 저지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16세기 초 몰다비아와 1541년 트란실바니아도 투르크의 속국으로 자치권은 인정했지만 17세기 애국자 미하이 중심으로 투르크로부터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크림전쟁(1853-56) 후 파리강화회의는 2공국(몰다비아, 왈라키아)이 민의에 의해 대공을 선임하기로 하여 1859년 양국의회는 A.I. 쿠자(재위1859~66)를 선출했다. 1861년 2공국이 통합, 국명을 루마니아라고 하는 단일 자치공국이 되었으며, 1866년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가 왕자를 카를 1세(재위 1866~1914)로 맞아들였다. 1878년의 베를린조약으로 독립국이 되었으며, 루마니아 역사가 독일과 관계도 있지만 그래도 카를 1세 즉위한 것이 기이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당시 막강한 빌헬름1세이자 또 유명한 재상 비스마르크(총리 1862-90)의 시대라는 것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베를린조약(1878년)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1881년 카를 1세는 오스만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루마니아왕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국토가 부쿠레슈티 강화 조약으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와 독일에 점령당하였다. 1947년 12월 30일에 소련군에 의해 최후의 국왕 미하이 1세가 폐위되면서 군주제도 폐지하고, 1948년 공산국가 되었으며, 1967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국가수반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였다. 1989년 차우셰스쿠가 총살되어 90년 1월 1일, 민주화되었고, 08년 11월 30일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였다.
<혁명광장과 대로 그리고 'Will you be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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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럽.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