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네팔과 인도(2009년 4월27일- 5월7일)
[11일 여행의 일정] 전체일정: 인천→(약8시간소요)→ 카트만두→(약8시간소요)→ 포카라→(약8시간소요)→ 룸비니→ (약11간소요)→ 바라나시→ (약13시간소요)→ 델리→(약6시간소요)→ 자이푸르→(약5시간소요)→ 아그라→ (약14시간소요)→ 부사월→(약3.5소요)→ 아잔타→(약2시간소요)→ 아우랑가바드→ (약40분소요)→ 엘로라→(약9시간소요)→ 봄베이→(약9.5시간소요)→ 인천 [1일] 인천 출발→ 카트만두 도착[파슈파트나트 사원, 스와얌부나트사원, 꾸마리 사원 관광] [2일] 카트만두 출발→ 포카라도착[데비스 폭포, 굽데스와라 동굴, 폐와 호수 관광) [3일] 포카라 출발→ 룸비니 도착[마야데비 사원, 아소카 왕 석주 관광] [4일] 룸비니 출발(약11간소요)→ 바라나시 도착[힌두교의 아르띠 뿌자 의식 관광] [5일] 바라나시[바라나시 가트, 미로길 관광]→ 기차로 델리 출발 [6일] 델리[자마 마스지드, 인디아 게이트, 정부청사, 바하이사원, 어처담사원, 쿠쿤탑]관광→ 자이푸르 출발 [7일] 자이푸르[하와마할, 핑크시티, 암베르성, 잔타르만타르 관광] 아그라로 출발(약5시간소요) [8일]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 성 관람]→ 기차로 부사월 출발 [9일] 부사월 도착→ 아잔타 석굴 관광→ 아우랑가바드로 출발 [10일] 아우랑가바드 출발→ 엘로라 유적 관광→ 뭄바이 이동[인도 문 관광]→ 인천 출발 [11일] 인천 도착 후 해산
[1] 2009년 4월 27일 월요일 카트만두 관광 (카투만두로 가는 길) 누가 ‘인생은 여행’이라고 했는데 '영화 속의 영화'처럼 또 다른 작은 여행을 시작하려고 오늘 길을 나서면서 오가는 길이 아무사고가 없기를 바라고, 좋은 사람만 보이는 눈을 갖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06시20분의 이른 미팅이 조금신경이 쓰여 하루 전에 딸이 있는 안산으로 갔다가 너무 이른 05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으며, 울산만 12명(남녀동수)으로 가장 많았다. 울산 팀이 이렇게 많은 줄은 공항에서 알게 되었으며,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2분은 부산사람으로 한분은 전직 교수님이시고, 한분은 여행하는 동안 우리를 즐겁게 하신 분이다. 젊고 온화한 분당부부, 웃음이 끊어지지 않는 대구사모님, 조금은 별난 서울할머니, 우리일행은 총 18명은 신기하게도 남녀가 동수인데 아쉽게도 20명에서 2명이 모자라 TC는 못 가게 되었다. 룸메이트는 좋은 분이어서 다행이었으나 룸메이트는 같이 온 단체가 있으니 그분들과 행동을 같이해야 했기에 '낄 곳 없는 불편'은 매번하지만 이번이 최고로 불편했던 것은 혼자 온 사람은 3사람인데 2분은 여자이니 더 낄 곳이 없었다. 룸메이트도 '낄 곳 없는 사람' 때문에 신경 쓰느라 불편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되고도 남았다. 카트만두에 도착하기까지 약 8시간 동안 울산 남자들과 한자리를 하였기에 지루하지는 않았고, 초라한 카트만두의 트리부반 공항에 내리니 위도는 우리보다 많이 남쪽이지만 고산지대라 날씨가 비슷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더웠다. 냉방도 되지 않는 공항에서 수기로 비자발급을 작성하여 1시간 정도를 더위를 견디면서 거의 마지막으로 비자를 발급을 받고 공항을 나왔는데 밖은 훨씬 더 더워 절기를 잘 못 택했나 보다. [카트만두(Kathmandu)] 인도가이드 ‘샌디(쌍용)’를 만나 차에 오르니 다행히 냉방이 잘되었는데 이곳도 왕이 다스렸다고 좌측통행을 하는 가 보라고 하였더니 대구에서 온 분이 자기는 섬나라만 좌측통행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영국, 일본, 뉴질랜드, 호주 등이 좌측통행이라 그렇게 생각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네팔과 인도는 영국지배의 영향인 것 같다. 한국에서 우리나리 말을 잘한다는 인도가이드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외국에서 항상 우리에겐 거의 무관한 현지가이드가 꼭 있는 것을 보았기에 그런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혼자서 관광지도 설명하고, 끝까지 우리를 가이드 할 것이라고 하여 여행의 3복 중에 하나는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는데 잘아 듣지는 못해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이드는 이번일정은 20일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하며, 걱정하지마라고 했는데 이번 여행도 시리아에서 미친 여행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일정이 그런가 보다. ‘카트만두’는 ‘카트’는 나무이고, 만두는 집의 뜻을 가졌다고 하며, 우리가 처음 관광할 곳은 한국일정에는 없는 파슈파트 나트 사원에서 내려 사원으로 향했다. ★카트만두: 5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해발 1400m의 분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구는 82만 명 추정된다.
<카트만두의 왕궁 앞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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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파트 나트(Pashupati Nath) 사원] 길목엔 조잡한 기념품을 파는 가계도 있었고, 거리도 지저분하지만 매연으로 공기도 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로만 듣던 주인 없는 못 생긴 검은 소들이 있으며, 이 사원은 힌두교인이 아니면 들어 갈 수 없다고 한다. 사원정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다가 작은 다리에 도착하니 매연의 정체와 역겨운 냄새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곳이 TV나 사진에서 보았던 가트의 화장터이다. 5구의 시체 중에는 이미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시체도 보였고, 또 준비 중인 시체에는 젊이 사람이 시체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보였고, 가이드 말로는 죽은 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하는데 아마도 손자일 것이라고 한다. 5번을 돈 후에 불을 붙인다고 하며, 부자는 향나무로 화장을 하고 일반인은 보통나무를 사용하나고 한다. 이런 의식을 본 사람들이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곳이라고 의미심장한 표현을 했지만 더위에 지친 여행자에겐 그런 인생철학을 느끼기보다는 빨리 힘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린아이가 더러운 물을 퍼내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 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행복의 지수를 가늠할 수 없으나 다만 여행자 눈에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물이 많을 때는 냇가이요 건기 때는 작은 도랑 같은 더러운 물이 있는 이곳의 이름은 거창하게 ‘바그마티 강’이라고 하며, 카트만두를 지나 갠지스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한다. 이곳도 중동같이 물이 없어도 강이요 물이 좀 많으면 바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자유롭게 찍은 후 계단을 올라 일직선으로 나열된 똑 같이 생긴 ‘에카더스’라고 하는 11개의 하얀 탑들이 있는 곳으로 갔으며,탑 안에는 시바신(링가: 파괴 신)은 맷돌 같이 표현되었는데 가운데 솟아 있는 것이 남근 상이고, 밑에 있는 맷돌이 여자생식기이라고 하며, 인도까지 다 똑 같은 모양이다. 탑문(구멍)을 통하여 보면 일직선상으로 다른 탑의 내부도 다 볼 수 있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탑 주위에는 전형적인 흰 가루를 몸에 바른 힌두 수도승들이 많이 보였으며, 그들의 기이한 행동을 힌두교에 무뢰한 여행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기행문(紀行文)은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는다는 생각보다는 기이한 유적과 기이한 사람들을 본 기행문(奇行文)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승들이 기거한다는 숙소를 들어가니 많은 원숭이들이 보였는데 흰 원숭이는 사납고, 검은 원숭이는 순하다고 하며, 수도승 중에 모델을 해주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가짜들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본 사원의 황금색 지붕과 안테나 같이 생긴 황금빛 원뿔형 첨탑이 이채롭고, 부채 같이 생긴 나무가 이색적이어서 이름을 물어보니 모른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을 이렇게 관리하나 싶었고, 이 나라 정부에게 주위도 정비하라고 훈수를 하고 싶다. ★파슈파트나트 사원: 현지인들은 ‘따수뻐띠나트’라고 부르며, 공항근처에서 카트만두 시내로 약 4km 정도에 위치하고, 네팔 최대 힌두교성지사원으로 파슈는 '생명체'를 뜻하며, 파트는 '존엄한 존재'를 뜻한다고 한다.
<파슈파트 나트 힌두 사원과 카트>![](https://t1.daumcdn.net/cfile/cafe/133294164CA977B468) [스와얌부 나트(Swayambhu Nath)] 이곳을 떠나 스와얌부 나트 불교사원으로 향했는데 사원 입구의 길들이 좁고 상인들로 복잡하여 우리 차가 상가의 처마와 부딪쳤으며, 이때 운전기사가 당겨 놓은 사이드브레이커가 풀리지 않아 차가 꼼짝할 수 없었다. 여러 명이 이것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시간만 흘려가 가이드에게 멀지 않으면 걸어가자고 했더니 이삼십 분이면 된다고 하여 걸어가기로 했는데 사원에 다갔을 무렵에 우리 차가 올라오고 있어 다행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본 다른 여행팀이 있었는데 이들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이 여행팀은 온누리 여행사를 통해 왔으며, 이곳 여행사는 우리와 같은 인디아 여행사가 일정을 맞고 있었다. 이 팀들은 자주 식사도 같이 하고, 유적지에서도 만났는데 바라나시까지만 코스가 같았으나 아그라의 기념품 가게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으며, 팀원은 우리보다 적었는데 비용을 더 주었는지 대우도 우리보다 조금 더 잘 해주는 것 같았다. 차도 새 것이라 좀 부러웠지만 팀원들은 차림새는 별난 내 성격이 맞지 않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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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흰색, 노란색 등의 깃발이 휘날리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가 어릴 적 학교교실 마룻바닥에 발라 광을 내고 미끄럼을 타던 아주까리가 보여 반가웠다. 이 사원 중앙에 있는 175m의 황금빛 원뿔형 첨탑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데 이 탑은 스투파이라고 하며, 가이드는 아소카 왕 때 건립했다고 한다. 언젠가 탑에 눈이 그려진 것을 보았던 생각이 드는 탑이 바로 이 탑으로 사면에 만물을 뚫어보는 ‘부처의 눈’ 또는 ‘법안’이라고 하는 눈이 그려진 것이 특색이다. 코에 해당하는 곳에 물음표 같은 것은 네팔 숫자 1을 나타내는데 진리는 하나라는 뜻이라고 한다. 입구에는 2마리의 사장 상 사이를 통과하여 마니차도 돌려보면서 탐을 중심으로 관람을 하였는데 큰 불상이 있는 건물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이드는 힌두교에서 불교가 파생되었고, 다음이 자이나교이며, 시크교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카트만두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 사원과 카트만두에 얽힌 사연이 가이드가 이야기한 내용이 인터넷에서 본 것과 비슷하여 인터넷에 있는 것을 옮겨본다. 이 사원의 석주비문의 기록들은 5세기경에 이미 불교 주요 순례지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지만 원래기원은 부처가 이곳에 오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전설은 불교와 관련이 있으며, 본래 카트만두 밸리가 호수였는데 인도를 다녀오던 문수보살이 호수의 사악한 기운을 끊기 위해 신성한 검으로 둘러싸인 산들을 잘랐고, 호수의 물이 빠졌다고 한다. 이때 호수에 피었던 연꽃이 찬란한 빛을 뿜었다고 하여 이곳의 이름이 '스스로 창조된' 또는 '스스로 존재하는' 뜻을 가진 스와얌부가 되었다고 하는데 카트만두시내가 호수의 바닥처럼 보였다. 사나운 원숭이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원숭이는 못 보았고, 윤기가 없는 원숭이들이 측은한 생각을 들게 하지만 발에 밟히도록 드러누워 있는 개는 팔자가 좋아보였다. 사원으로 오르다 입구에 있는 보기 좋은 나무가 히말라야 삼나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가이드는 모르고 물을 파는 현지인이 ‘방개시몬’이라고 한다. [스와얌부나트와 수투우파] ★스와얌부 나트: 2000년 역사를 가진 세계문화유산으로 성질 못된 원숭이가 많아 일명 ‘원숭이 사원 (멍키템플)’로 중심가서 2~3km에 위치하며, 하누만(원숭이신), 브라흐마(창조신), 비슈누(유지신: 코브라), 시바(링가: 파괴신) 등의 조각이 있다고 하지만 보지는 못했다. ★수투우파: 인도의 종교 중에 불교<2장- [1]>를 참고 하시고, 간다라 예술
<스와얌부 나트 불교사원>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294164CA977B469) [타멜거리] 스와얌부나트 떠나 신비의 거리로 생각했던 타멜 거리로 향하면서 조금 전 차 사고를 생각해서인지 가이드는 여행을 트러블(travel)이라고 하는 것은 여행 중에는 사고(trouble)가 나기 때문이라고 유머를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가는 도중에 네팔인들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이들은 우리를 보면 무척신기한가 보다 겨우 돌을 지난 것 같은 아이도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며, 우리가 같이 흔들어 주니 너무 좋아한다.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은 아이뿐 아니라 학생, 특히 순진한 여학생, 어른 할 것 없는 것 없이 다 좋아했는데 보고 웃기만 해도 좋아했다. 비좁은 거리에 오토바이, 삼륜차(오토릭샤), 짐차들 그리고 사람들, 거저 정신없을 지경이었으며, 신호등이라고는 하나가 보였지만 점멸만 하고 있어 교통하고는 무관해 보였다. 조금만 막혀도 울려 되는 경적소리는 네팔서부터 인도까지 늘 들어야 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인도는 인도만 있고, 차도가 없는 차들이 화가 나서 그런 것 아닌가? 한국에서 네팔과 카트만두는 만두가 하도커서 카트에 실었다고 해서 ‘카트만두’이고, 만두를 둘이 들다보니 팔이 네 개라 네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두 팔은 운전하고, 두 팔은 경적만 울려서 네팔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상가에는 냉장고도 없이 파는 육류들과 양과 염소의 머리들이 지저분한 상판 위에 그대로 놓여 있고, 우리들처럼 닭발만 파는 것도 보였으며, 그 유명한 용명 구르카 부대도 보였다. [네팔의 구르카 부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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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거리로 생각했던 타멜 거리는 잡상인들과 많은 인파로 인해 너무 복잡한 거리여서 사람들을 피하면서 가이드를 따라가기에도 분주했다. 거리에서 젊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헤라 문신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여 사진에도 담아보았는데 장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다는 것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이 있는 거리에 도착하니 해는 지고 거리는 어둡기 시작했는데 세계문화유산이 시장 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것 같아 어떻게 이렇게 관리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교하기로 이름난 왕궁의 창문과 창틀은 찬란하다는 말을 하기엔 좀 인색해지지만 고색하다는 말은 아낌없이 하고 싶으며, 그 옛날에 도구도 없을 터인데 정말로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왔으나 방치되는 것 같아 오래갈지 의문이 생겼고, 가이드는 천년된 건물이라고 했다. ★타멜 광장: 타멜 거리에 있는 달발광장(Durbar Square 다르바르: ‘왕궁’의 뜻), 바산트푸르 광장이 있으며, 타멜 시장도 함께 있고 세계문화유산이다. 달발광장은 3왕궁광장 중의 하나로 19세기까지 왕족이 거주하며, 왕의 대관식과 국가 주요행사를 하던 옛 왕궁의 단지로 지금도 국가 주요행사가 이루어진다. 16세기에 건설을 시작했고, 18세기의 샤(Shah) 왕조와 19세기 라마의 통치자들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왕궁은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창과 창틀로 치장되어 있다. 네팔을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군주인 트리부완왕을 기념하여 만든 트리부완왕 기념박물관과 그의 아들 마헨드라에게 헌납된 마헨드라 박물관이 있으며, 궁전 내의 접견실도 방문해 볼 수 있다고 한다.
<타멜 광장과 시장이 있는 곳이고, 오른편 건물이 왕궁> >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BED154CA979294F) [쿠마리 사원(Kumari)] 먼저 찾아간 곳은 네팔에서 가장 호기심을 유발하는 처녀신인 쿠마리신의 산다는 사원으로 향했는데 입구가 낮아 키 큰 사람은 주의를 해야 했으며, 우리 말고 다른 한국여행자들도 많았다. 사진을 찍지 마라는 주의를 받고 처녀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주위가 조용해지자 잠시 나타나 얼굴을 보여 주고 들어가 버려 싱겁게 끝나버렸는데 하긴 기대를 가졌던 것이 무리이었다. 쿠마리 사원 입구에는 처녀신의 사진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네팔서 인도까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유적을 보호한다는 차원도 있지만 모르게는 현지인들의 장사와도 관계가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느꼈다. 소녀는 첫 월경 등으로 몸에서 피가 나면 여신에서 일반인으로 추방되는데 이후에는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불쌍한 소녀로 왜? 이런 제도가 있는지 궁금했다. 소녀 가족에게 5루피 정도를 시주하면 2층 창문으로 관광객들에게 얼굴을 보여준다. ★쿠마리 사원: 달발광장의 남쪽 끝에 위치하며, 화신으로 뽑힌 소녀는 평소엔 밖에 나갈 수 없지만 1년에 7번 있는 축제 때만 나가서 여신의 역할을 한다.
<오른 쪽 창문이 꾸마리 여신이 얼굴을 보여 주는 곳>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BED154CA9792950) [왕궁] 가이드를 따라 바산트푸르 궁전 앞 작은 목조건물 지붕 아래 있는 에로조각상을 보러갔는데 나무로 크게 조각 된 시바신 아래에는 성행위를 하는 작은 조각이 사방에 조각되어 있으며, 카마슈트라에는 84가지의 성행위 자세가 있다고 한다. 또 왕궁입구에 우산을 쓰고 붉은 커튼 아래 큰 인형이 붉은 망토와 금색 치마를 두르고 서 있는 ‘하누만 상’은 힌두신화에서 바람의 신과 요정 사이에서 태어난 신성한 원숭이 왕이라고 한다. 정신없이 사진 찍느라 설명도 제대로 못 듣고, 또 발음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이름들은 인터넷 것을 인용했는데 이곳에서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은 일반인은 출입을 통제했으면 좋겠다. ★네팔: 인구는 약2.713만명(05년)이며, 면적은 약14.7만㎢ (한반도의 2/3), 다민족으로 네팔인(80%), 티베트(20%), 아리아인, 미얀마인 등으로 에베레스트 산지에 유명한 세르파족이 있다. 최근까지 힌두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로서 인도와 함께 대표적인 힌두교 국가였다. 2008년 6월 15일 신헌법이 반포되어 국교를 폐지했으며, 현재 힌두교(87%), 불교(8%), 이슬람교(4%)이고, 그 외 소수종교로는 기독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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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식당] 왕궁을 떠나 식당으로 향하면서 가이드가 한식이 먹고 싶은지 전통음식이 먹고 싶은지 물어 보는 것 같았는데 뒤에 앉아 있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정표대로 네팔 전통 식사를 하면서 전통 춤 관람으로 알았는데 난데없이 북한이 운영하는 식당이었고, 입구에서는 남자가 거수경례를 하여 사복한 북한병사 같았다. 역시 분위기는 좀 으스스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가씨들은 공항에서 전단지를 주던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울할머니가 자기는 GPS을 들고 백두대간을 다니고, 가이드를 하는 전문가라고 자랑을 늘어놓아
천재지변(천번 봐도 재수없고, 지금봐도 변함 없음)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보이는지 않을까 조심하는 편인데 그래도 이 할머니가 저녁을 먹은 후 나와 같은 견해를 이야기했다. 그는 전 세계를 다녀도 금강산은 안 간다면 늘 입으로는 동포라고 말하면서 원수 같은 짓만 하는 그들에게 왜 한 푼이라도 보태주는지 알 수 없다며, 이 식당에 온 것을 못 마땅해 했다. 식사가 끝나자 무대에는 종업원들이 배우로 변신하여 공연을 시작하였는데 남한의 노래도 부르면서 무대를 내려와 손님도 같이 부르도록 해 준다. 북에서는 선택받은 그들이겠지만 꼭두각시 같았고, 특유한 그들의 음성이 듣기 싫어 밖으로 나아가니 같이 온 온누리 남자들도 있었으며, 인사하던 북한남자도 있었다. 북한남자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무거운 분위기였는데 네팔이 사회주의가 정권을 잡아서 북한이 진출한 것으로 보여 졌으며,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불빛 아래 아담하게 보였으며, 우리의 음식을 담당할 요리사를 소개 받았는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자였고, 배가 많이 나온 것이 더 불편해보였다. 매일 반복되는 이른 기상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동일했으며, 이르면 새벽 3시 반이고, 늦어야 4시다. ★네팔과 카트만두(Kathmandu): 5개의 봉우리로 싸인 해발1400m의 분지로 인구 82만명 추정되며, 네팔인구는 약 2.800만명, 면적은 약14.7만㎢ (한반도의 2/3), 네팔인(80%), 티베트(20%), 아리아, 미얀마인 등으로 에베레스트 산지의 유명한 세르파족('동방사람' 의미)이 있다. 전에는 힌두교(87%)가 국교이며, 불교(8%), 이슬람교(4%)을 믿는다.
<농지가 부족한 황량한 네팔 산지>
![](https://t1.daumcdn.net/cfile/cafe/123F91104CA97ED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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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9년 4월 28일 화요일 포카라 관광 [포카라로 가는 길] 일찍 포카라로 출발하는 것은 카트만두에서 벌어지는 데모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여행 내내 긴 시간을 이동해야 하니 늦게 일어 날 수 있는 일정도 아니었다. 가이드는 네팔의 어원에 대하여 말해주었는데 '네(Ne: 스님의 뜻)’이고, ‘팔(Pal: 보호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네(Ne: 동굴의 뜻)’으로 알고 있었다. 가이드 설명이 더 신비성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동굴스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네팔에서 보는 진기한 풍경에 하나는 주유소 주위에 길게 늘어선 차량들의 행렬로 이들은 기름을 넣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도에서 수입한 휘발유 1리터에 1.5 달러 정도를 한다고 한다. 언제 기름을 넣을 런지 상관도 없는 우리가 왜? 걱정이 되는지... 그러고 보니 우리 차에도 기름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이해가 되었으며, 그들의 연료사정이 심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우리도 과거에 있었던 조수가 네팔에서 인도까지 항상 있었는데 도로와 차량이 나빠서 꼭 필요도 하겠지만 아마도 인건비가 싼 것도 한 원인이 될 것 같다.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나자 밀밭도 보였고, 위성안테나도 보였으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는 것도 보였는데 지그재그인 험한 도로를 따라 고개를 오르는 차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차는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기아를 바꿀 때에는 곧 멈추어 설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꾸준히 가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지대에도 어김없이 동네가 있다. 또 동네마다 어린이들이 등교를 하기 위해 남자아이들은 넥타이를 매고 말쑥하게 차려 입은 것이 사는 형편보다는 차림새가 좋아보였으며, 이곳도 교육열이 높은 것 같았다. 학교가 있을 만한 평지도 보이지 않았고, 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 아마도 학교는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가이드 말로는 2부제 수업을 한다고 한다. 가이드 이야기도 없으니 그저 상상만 하면서 자연들을 구경하는데 건기라서 그런지 날씨는 더워 여름 같은데도 나무들은 봄처럼 새싹이 돋고 있었다. 가끔은 처음 보는 나무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가죽나무 같은 것이 궁금하여 점심시간에 물어보니 잎은 따서 먹지는 않고 용처는 모르지만 다른 곳에 사용한다고 한다. 고개를 넘자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전부들 카메라로 담기에 분주하였고, 험악한 계곡에 만들어진 계단식 밭들이 특이했다. 건기라 그런지 밭과 논에는 빈 곳이 많았으며, 농사일을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지만 가끔은 옥수수와 감자가 자라는 것도 보였고, 때론 짐승 먹일 풀을 가득 담은 망태의 끈을 이마에 댄 모습이 우리와는 판이하게 달랐는데
모두들 여성만보였다. 교통경찰들이 차를 세워 놓은 것도 보이며, 도로가에는 운전자들을 상대로 하는 규모가 작은 가계와 식당도 보였고, 작은 동네에서 우리나라에는 화분에 있는 벤자민 나무가 큰 느티나무 같았다. 이 나무는 데비스 폭포의 벵갈 보리수나무의 정보를 찾다가 벤자민 고무나무(Ficus benjamina)를 것을 알게 되어 기뻤는데 우리가 기르는 벤자민 나무의 본래 이름이다. 길가의 작은 집들은 나무로 얼기설기 대충지어 바람을 막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며, 비를 막기에도 힘들어 보였고, 너무 작아 물건은 어디에 두고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다. 계곡에는 사금을 채취하는 것 같은 모습도 보여서 고향이 금광이 있던 곳이라 어릴 적에 금광과 사금을 채취하던 생각이 나서 옮겨보기로 한다. 먼저 금광석을 전기, 엔진, 물레방아 등의 동력을 이용하여 분쇄한 것을 광목을 깔아 놓고 그 위로 물과 함께 흘러
보내면 무거운 금이 광목에 남고 돌은 물과 함께 떠 내러간다. 광목에 붙은 것을 털어 수은에 넣으면 금은 수은에 흡수되는데 이것을 그릇에 넣고 고온의 불로 태우면 수은은 증발하고, 노랗고 예쁜 금만 계란의 노른자 같이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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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 덕분에 일본시대부터 전기가 들어와 동네에 변전소가 있었으며, 어릴 적에 수은도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지금도 생각이 나면 이 수은 때문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또 이 계곡에는 돌을 다루는 현장들이 많이 보였는데 그 많은 돌들을 어디에 다 쓰는지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많았다. 계곡을 건너다니는 이동수단으로 쓰이는 현수교와 케이블은 KBS에서 방영한 ‘차마고도’에서 본 것과 똑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며, 가이드는 네팔에서 유명한 것은 나무와 약초 그리고 히말라야 꿀(석청)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가졌던 의문점을 있었는데 식량이 부족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우리보다 더 산으로만 둘러싸인 네팔이 어떻게 그 많은 인구가 사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이곳에 왔었다. 참고로 대충 한반도와 네팔을 비교하여 계산을 해 보았는데 네팔은 국토의 2.3%를 경작지이고, 한반도는 25%로 보면 경작지 1㎢ 당 네팔은 약 8.300명이 살고, 한반도는 1.300명 정도가 산다. 그러면 우리보다 식량은 약 6배나 열악한 셈이고, 수입할 형편 안 될 것인데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궁금했지만 이곳에 와서 보고 사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이는 모든 산은 올라 갈 수 없는 곳만 빼고,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계단식 밭을 만들었는데 과연 어떻게 갈 수 있을 가? 하는 곳에도 밭은 있었다. 높은 산봉우리나 중턱에 있는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궁금한 것들이 많아지는데 과연 물은 어떻게? 농사는? 이웃에 놀러가는 것은? 추수한 것들을 어떻게 운반하여 장에 내다 파는지? 궁금하다. 일행 중에 그런 모습을 보고, 밭에 일가다가 허기저서 죽겠다는 말까지 하였는데 가이드는 그 사람들은 평지로 내려와 살라고 하며는 못 산다고 하니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가 보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하늘에는 미세먼지가 많아 우리나라의 스모그나 황사가 많은 날씨이어서 먼 산은 흐리게 보이고 깊은 산 중인데도 공기도 맑지 않았으며, 해도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여행 시기는 우기로 인해 하늘에 먼지가 씻긴 후 가을이 좋을 것 같았는데 가이드는 1~2월이 좋다고 한다. 그런 집에도 전기가 들어가고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이었으며, 열악한 조건에도 계곡물을 끌어 드리는 수로도 보였다. 카트만두가 고지대라 그런지 차가 올라 온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계속 내려가는 가는데 이젠 계곡의 물도 제법 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긍토 뿌리] 배긍토 뿌리라는 제법 큰 동네에 내려 잠시 휴식을 하면서 과일도 사 먹었고, 사진도 찍다가 막 결혼한 신랑신부가 택시에서 내리다가 우리일행의 사진모델이 되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 하던 부부였지만 신랑은 예쁜 한국여성과 사진 찍는 것이 좋은지 어깨에 손까지 얻으며 포즈를 취해주었고, 신랑의 웃는 모습이 신부보다 더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 이름인 ‘배긍토 뿌리’의 '배긍토'는 달의 뜻이고,' 뿌리'는 땅의 뜻이라고 온누리 가이드가 말해주었으며, 점심을 먹기 위해 어느 식당에서 내렸는데 길가에 처음 보는 화초 2개가 있어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하나는 예쁘게 핀 분홍 꽃은 잎은 칸나 같았고, 꽃은 아마릴리스 꽃이 겹으로 핀 것 같으며, 옆에는 토란 잎 같이 생긴 곳에 가운데는 붉은 색과 흰색을 흩어 놓은 것 같아 예뻤다. 점심을 온누리 일행과 같이 먹었는데 깻잎, 무말랭이, 마늘짱아지 들은 한국 것이라고 하였으며, 먹을 만하여 철수에게 박수로 고마움을 나타냈다. 점심 먹고 계속해서 내려가면 댐과 발전소 그리고 변전소도 보였으며, 잠시 차가 멈춘 곳은 인가도 별로 없는 한적한 곳으로 플라스틱파이프에서 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우리를 본 학생들이 모였고, 일행 중에 한분이 사탕을 나누어 주었는데 학생들은 고맙다고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좋아했며, 조금 큰 동네에는 힌두신을 모신 작은 신당도 보인다. 계곡을 다 내려와 평지를 다리는 곳에는 못자리한 논도 보였으며, 집 앞문이나 텃밭에는 기둥에 구멍을 뚫고, 막대기를 걸쳐 놓은 모양이 제주도와 비슷하여 어디가 원조인지 알고 싶다. 네팔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은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부겐베리아, 무궁화 같은 하이비커스(Hibiscus), 가끔은 'Coral(산호) Tree'도 보이고, 유도화(협죽도)도 보였으며, 우리나라 대나무는 넓게 자라지만 이곳은 멀리서 보면 한 그릇의 큰 나무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 것이 다르다.
<'배긍토 뿌리'라는 동네이고, 작은 사진은 길에 핀 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BED154CA979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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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스) 폭포(Davis's fall)] 이제 포카라 지역으로 들어선 후 가던 길(싯다르타 고속도로) 오른쪽에 있는 데비스 폭포가 있고, 길 건너 왼쪽에 있는 굽데스와라 동굴이 있는데 먼저 폭포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히말라야 산들의 모형이 있고,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 사이에서 나오는 물이 원형의 우물 같이 생긴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데 밑은 보이지 않으며, 건기에다 수량도 적어 좀 실망스럽지만 조금 올라간 상류엔 그 물이 흐르면서 파 놓은 바위들의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나오다가 특이하게도 물속에 많은 동전과 있는 동상을 보는 것은 처음으로 가이드의 설명이 끝날 쯤에 도착하여 다 듣지 못했지만 크기는 작지만 유명한 것이라는 것만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이 지금 후회가 되었지만 어찌하라! ★데비(스) 폭포: 전해지는 이야기는 Devi 또는 David 등으로 알려진 스위스 여성이 트래킹을 하다가 폭포 밑으로 휩쓸려 실종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포카라 공항에서 싯다르타 고속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현지에서는 파탈레 츠항고(Patale Chhango)라고 한다.
<왼편 아래가 데비스 폭포>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BED154CA9792A52) [보리수(피쿠스: Ficus Benghalensis) 나무] [보리수 참조] 가계들 중앙에 있는 큰 나무를 보고 아~ 이것이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들이 한 그루 아래 7.000명이 야영을 했고, 불타가 해탈했다는 벵갈 보리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반가웠다. 이 나무 가 더 크면 1개 소대의 야영이 가능할 것 같았는데 석가모니도 비를 피하고, 잠도 잘 수 있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나무로 느티나무처럼 크게 자라면서 줄기에서 땅으로 많은 뿌리가 내려온다. 이 뿌리들이 땅에 뿌리를 내리면 다시 기둥이 되어 독립된 한 나무처럼 되며, 여러 개의 기둥 나무가 본래 큰 나무를 받쳐주는 모습이 되어 매우 기이한 형태가 되는데 보지 않으면 상상이 잘 가지 않는 나무로 이런 것을 만날 때에 유적지보다도 더 감격적이며, 여행의 묘미를 느낀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했다는 보리수(Ficus religiosa)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보리수(린데바움)’도 아니며,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보리수도 아닌데 인도는 이 나무를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다. 다행이도 나무에 ‘Ficus Benghalensis Tree’라는 명패가 있어 적어와 정보를 찾았는데 아마도 내가 읽은 책은 보리수고무나무(F. religiosa)를 벵갈 보리수로 옮겨나 보다. ★피쿠스: 백과 전에 뽕나무과(科)에 속하며, 800여 종(種)이 있다고 하며, 무화과나무(F.carica), 벤자민고무나무(F. benjamina), 벵갈고무나무(F. Benghalensis), 보리수고무나무(F. religiosa), 떡갈나무잎고무나무(F. lyrata, 왕모람(F. pumila)) 등이 있다고 한다.
<거대한 보리수 나무로 작은 사진은 이 나무에서 뻗어 내려 온 오른편에 있는 기둥 같은 뿌리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BED154CA9792A53) [굽데스와라(Gupteswar Gupha)] 굽데스와라로 이동하여 조금씩 떨어지는 물이 맞으며, 동굴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자가용 소의 조각상이 나오고, 좀 더 가면 시바 신을 표현하는 남근 상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설명을 들었는데 이 상은 발견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남근 상 위에는 시바 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모습은 ‘코브라(뱀)’이라고 하는데 5마리가 있으며, 앞 쪽 구석엔 코끼리 상은 시바 신의 2째 아들 ‘가네샤’ 신이라고 한다. 더 내려 가면 데비스 폭포의 물과 만날 수 있다고 하며, 이곳까지만 구경하고 밖으로 나왔다. ★굽데스와라 동굴: ‘구테스와르 구파’라고도 하며, 인공동굴로 길이는 약 3km에 달하며, 몇 개의 커다란 홀 크기의 방과 기어서 들어갈 수 있는 4개의 통로가 있다고 한다. 이 동굴은 시바신의 남근상이 발견되면서 힌두신앙의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며, 사진 촬영은 금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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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와 호수(Phewa Lake)] 페와 호수로 향하면서 가이드는 여성의 이마에 바르는 붉은 점 빈디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는데 이마 중앙에 있으면 기도를 한 사람이고, 아래에 있는 것은 액세서리로 한 것이라고 한다. 중앙위에 있으면 결혼을 한 여성이라고 하며, 인도에서는 ‘신(GOD)’는 G는 창조이고, O는 보호자이며, D는 파과자의 약자라고 하는데 힌두교의 3신을 의미한다. 페와 호수에 도착하여 4명씩 조를 이루어 카누를 타고 호수 안에 있는 예쁜 섬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눈 덮인 히말라야를 볼 줄 알았는데 날씨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인다. 호수 건너편에서 옷을 벗고 수영을 하던 젊은 서양여자 2명이 우리가 접근하자 황급히 옷을 입었으며, 우리가 손을 흔들자 그들도 손을 흔들며, 수영하던 시늉을 한다. 일행 중 여자 2분이 물에 대한 노래를 화음을 맞추어 멋지게 부르는데 보통실력이 아니었는데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잠베지 강에서 유람할 때 생각이 났다.
<페와 호수>
![](https://t1.daumcdn.net/cfile/cafe/181BED154CA9792A54) ★빈디(bindi): 빈디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행운을 상징하며, 힌두교의 전통적인 예식에서 꽃잎으로 만든 파우더를 여성 예배자가 승려 앞에 서면 엄지손가락에 파우더를 묻혀 여자의 이마에 찍어 준 것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결혼한 여성을 축복하는 의미이지만, 지금은 미혼 여성들도 장식으로 빈디를 그린다. ★페와 호수: 눈 녹은 맑은 물로 아름다운 호수는 포카라 남쪽 약5km 있으며, 네팔어로 페와 탈(Fewa Tal)인데 탈은 '호수'를 뜻하고 , 전 국왕별장, 신혼여행지, 이곳의 부자인 쿠르카용병도 많이 산다고 한다. 눈 덮인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천혜의 장소로 ‘물고기 꼬리’라는 이름을 가진 마차푸차르(6,998m) 산과 유명한 안나푸르나(8,091m) 산을 사진에 담기에 가장 좋은 위치라고 한다. [훌라리(Fullari) 호텔]
어디에 국왕별장이 있는지, 어디에 바라히 사원이 있는지도 모르고, 호수의 관광을 끝냈는데 아침 일찍이
출발한 덕분에 7시간 반을 차를 타고, 관광을 했지만 늦은 시간인데도 낮이 길어져 아직 해가 떠 있어
이른 시간 같이 느껴졌다. 술을 사기 위해 포카라 시내에서 잠시 정차했는데 이곳에는 인도인들이 많이 살면서 장사를 하면서 잘 산다고 하며, 지금은 자리 잡기가 옛날 같지 않다고 한다. 오늘 자는 훌라리(Fullari) 호텔은 세계 12번째로 아름다운 호텔이라고 자랑이 대단하였는데 좁은 시골길을 따라 가다가 아름다운 깊은 협곡이 나타나고 그 끝에 호텔이 있다. 주위의 환경과 호텔전경이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으며, 호텔 로비도 무척 예뻤는데 웨이터가 음료수를 한잔씩 주어 페루의 아마존 강 상류에 있었던 '라세르바(리조트라는 뜻)'가 생각나기도 했다. 방을 배정 받고 해가 지기 전에 빨리나와 호텔 주변을 산책하면서 아름다운 환경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며, 팀원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오래 만에 여행(여유로운 행복)을 즐겼다. 이렇게 아름다운 호텔에 투숙한 사람들이 우리뿐이라 조금의 의아해서 물어보았더니 비수기라 그렇다고 하지만 조금은 오래된 호텔이라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이곳에는 카지노도 있었는데 저녁을 먹은 후 여행자들의 돈을 노리고 미끼로 공짜 쿠폰을 주었지만 슬롯머신도 아닌 카드게임이라 할 줄도 몰라서 울산 팀에게 넘겨주고 방으로 왔다. ★포카라(Pokhara): 네팔 제2의 도시이자 최고의 휴양도시로 아열대 기후로서 인도와 티벳과의 무역의 중개점으로 번영하였던 곳이지만 현재는 히말라야 등정과 트레킹의 출발점으로 붐비고 있다. ★1953년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제일 먼저 밟은 사람은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 중에 과연 누구였나? 하는 것이 오래 동안 미스터리였다고 한다. 세계여행기 12-1] 뉴질랜드 [에드먼드 힐러리 경 참조]
<훌라리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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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리 호텔 주변의 경관>
[네팔에서 인도까지 비슷한 점들] 중복된 기록을 하지 않기 위해 네팔에서 인도까지 비슷한 점들을 미리 적어둔다. 이번 여행의 특징은 매일 3~4시 경에 일어나 ‘기상은 이르고, 취침은 늦다.’이며, 8~14 시간 장거리 이동으로 ‘이동은 길고, 관광은 짧다.’라는 것이다. 고생한 만큼 대가가 적어 우리가 여행 내내 흔히 한 말은 ‘모르고는 와도, 알고는 못 온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미 말한 차량들의 경적, 비좁고 불편한 도로, 릭서, 오토 릭서(삼륜차), 길가나 하천을 오염시키는 그 많은 비닐과 쓰레기, 전력난으로 수시로 정전되는 전기 등이나 가장 심한 것이 구걸이다. 구걸하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등을 뿌리는 치는 것도 귀찮은 일 중에 하나였는데 누가 툭 쳐서 바라보면 여지없이 구걸하는 사람들로 길거리, 기념품가계, 유적지 등 어디에서나 만나게 된다. 어린이들, 아기를 이용하여 동정심을 사려는 엄마들, 장애자들, 가짜 수도사들 그 종류도 다양한데 만약 그들이 예수님이라면 그들을 외면한 것은 엄청난 잘 못을 저지른 생각이 든다. 샌디가 도로는 3종류가 있다고 하며, 하나는 나쁜 도로이고, 다음은 좋은 도로이며, 나머지는 아주 좋은 도로이라 정의 했는데 내가 본 도로는 네팔은 나쁜 도로만 있어 평균시속은 30km 정도이다. 인도도 나쁜 도로는 평균시속 30km 정도이고, 좋은 도로는 평균시속은 40km이며, 4차선의 아주 좋은 도로도 평균시속은 50km 정도가 될 것 같았다. 4차선 고속도로라고 해도 사람부터 우마차, 릭샤, 오토바이, 심지어 짐승까지 다 다니고 있어 속도를 낼 수 없는 형편이지만 뭄바이로 들어가는 일부구간만 차만 다니는 고속도로를 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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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룸비니 관광 [사랑 코트(love court)] 히말라야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3시에 기상하여 ‘사랑 코트’로 향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코트’는 땅의 뜻이라고 한다. 어둠속을 달리는 차 안에는 모자란 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사랑코트에 가까워지자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가던 차가 주차장에 멈추었고, 나머지는 걸어서 올라갔다. 더 높은 곳도 있었지만 우리는 낮은 곳에 도착하였는데 서울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잘 걷는 것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 가지 않는다고 가이드에게 불평을 한다. 온누리 팀이 보이지 않아 그들은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주위에 있는 기념품가계들이 호객을 하는데 일본어를 잘하는 누이와 우리말을 잘 하는 남동생이 있었다. 남동생은 서울대에서 1년간 우리말을 배웠다고 하는데 너무 유창하게 하여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먹고 살기 위해 배웠다.’라고 하여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그는 ‘마차푸차르’ 산이 ‘물고기 꼬리’의 닮은 부분과 세르파 족은 몽골인이라는 것도 가르쳐주었는데 쿠르카 족이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네팔 사람들을 다 ‘쿠르카’이라고 한다고 한다. 쿠르카 용병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한분이 다들 착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 할 수가 있는가?’라고 하자 그는 모두가 용감하다고 대답했다. 오늘은 물건을 사는 사람도 없어 장사는 공처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며, 우리 말고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부부가 있었고, 이들은 우리와 사진 찍기를 좋아했는데 남편이 더 좋아한다. 해 뜨기만을 기다렸으나 이미 해가 중천에 떴다는 것을 뒤 늦게 깨닫고는 하산을 하였는데 내 평생에 꼭 보고 싶었던 히말라야 산을 구경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너무 컸다. [네팔 역사와 쿠르카 용병 참조] ★사랑콧(Sarangkot): 1,592m의 가장 높은 히말라야 전망대로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림 같은 히말라야 산이 펼쳐지며, 이곳에서 보이는 계곡과 호수의 전망도 일품이라고 한다.
<사랑 콧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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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콧에서>
[룸비니로 가는 길]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8시간을 이동하여 룸비니에 도착할 예정인데 가는 도중에 어제처럼 작은 부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도 작고 자리도 부족하여 되는대로 앉았다. 부산 어르신들과 식사를 하면서 울산 남구에서 출마할 때마다 떨어진 사람이 친구하며, 화제로 삼았다. 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하고, 위험한지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을 정도였으며, 천천히 안쪽으로 가자고 소리쳐서 모두들 웃었지만 실제로 웃자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 일터인데 뉴스를 보지 못했으니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인지 사고가 나도 오지여서 알려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이어서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자리를 옮겼다. 이런 험악한 산맥을 넘고 평지로 내려오니 거짓말 같은 평지가 계속되었으며, 가이드가 ‘이제부터 산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여행 끝날 때까지 몇 군데만 빼놓고 다 끝없는 평지뿐이었다. 평지에서 만나는 가장 큰 도시 ‘부뜨월’에서 내려 변소도 가고, 저울에 달아 파는 수박도 사 먹어 보았는데 달고 맛은 있었지만 사치스럽게도 차지 않는 것이 불만이다. 이곳부터 인도까지 가장 많이 보이는 꽃나무는 잎은 아카시아 나무 같고, 꽃은 불타는 듯이 붉게 피어 ‘불꽃나무’라고 불리는 나무로 누군가 나무이름을 물어 보아 브라질에서는 '불꽃나무‘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이 이름이 맞는지 가이드에게 물었지만 몰랐으며, 식물에 관심이있어 가이드들이 이름을 몰라서 불편했는데 면허를 가진 하와이 가이드는 시험에 나오기에 대답을 잘하여 모든 가이드들도 이런 시험을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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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나무(플람보얌, Flameboyan Tree)] 불꽃(Flame) 나무는 콩과 식물로 한문으로는 화염수(火焰樹), 태국에서는 ‘항록용’이라고 하며, 사이판에는 불꽃나무 축제가 열리기도 하는데 잎이 나오기 전에 필 때가 가장보기 좋고, 잎이 나오면서 붉은 색이 줄어든다. 내가 처음 본 것은 파라과이와 브라질 경계에 있는 파라나 강의 이빠이쁘 댐 발전소 정원이다. 가이드는 '불꽃나무(훌란보이얀)'이라고 했고, 다음은 케냐의 암보셀리 인근에 있는 나마우가(Namauga)에서 보았는데 ‘Flouboant Tree’라고 했으며, 다음이 이곳으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가이드 말로는 열매 속에는 하얀 솜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잎은 비슷하지만 보라색 꽃이 피는 것은 자카란다 나무로 네팔과 인도에서도 가끔은 보인다.
<인도에 많이 볼 수 있는 불꽃나무와 삼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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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데비 사원] 더디어 룸비니에 도착하여 마야데비 사원으로 향했는데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으며, 이곳에도 어김없이 구걸하는 아이들과 빈 릭샤 꾼들이 따라오는데 돌아 올 때도 마찬가지로 따라 오는 열정이 대단하다. 사원 입구에 기념품 상점들이 있으며,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에 유적지임을 알게 하는 붉은 사암석을 사각모양의 얇은 벽돌을 겹쳐쌓은 것이 무너진 건물의 기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평평하고 넓은 것이 통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을 따라가면 보기 좋은 2그루의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2그루의 나무에는 만국기 같은 모형의 깃발들이 펄럭인다. 큰 나무가 붓다가 태어날 때 마야부인이 잡았다는 나무로 가이드가 천년쯤 된다고 하며, 그 앞에는 마야부인이 붓다를 목욕시켰다는 연못 있고, 흰 건물의 사원이 있다. 사원 옆에는 1개의 석주가 있었고, 이 석주는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는 인도 전체에 24개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그중에 하나라고 하였으며,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무너진 마야데비 사원의 원형들이 있다. 그 중앙쯤에 있는 유리관 속에는 커다란 발자국 비슷한 모양이 있는 돌이 있는데 붓다의 발자국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굴 당시에 있던 것이라고 하며, 바로 옆 벽에는 붉은 색의 돌이 하나 달려있다. 이 돌은 붓다가 태어날 때의 모습이 새겨졌다고 하는데 잘 알아 볼 수가 없어 대충 그런 것이구나! 할 정도로 이었고, 사원 문을 열고 나가 사진을 찍으면 연못과 나무가 잘 나온다. 사원 밖으로 나오면 붉은 벽돌을 20cm 정도의 높이로 둥글게 쌓아 놓은 것이 여러 개가 모여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순례자들이 와서 만든 수투파(탑)이라고 했지만 너무 낮아 탑 같지 않다. 룸비니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였으며, 유적을 보면서 세종 때 수양대군이 한글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역한 석보상절의 내용들이 생각났다. 유적지를 떠나 차로 오는 길가에 많은 예쁜 꽃들이 피어있어 사진에 담고 있으니 가이드가 향기가 좋은 태산목 같은 나무는 ‘열대 자스민’이라고 가르쳐준다. 자스민도 종류가 많은 것을 나중에 알았으며, 유도화 같은 입에 노란 나팔꽃 같은 꽃도 처음 보는 꽃이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전기불이 왔다가갔다 했으며, 시설도 좋지 않았으나 주민을 생각하면 이것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불평이 생기지 않는다. [마야데비 사원(Maya Devi Mandir)과 아쇼카 왕(Ashoka)의 석주] ★마야데비 사원: 현재의 외부 건물은 1943년 건축된 것으로 건물 안에 있는 원래의 사원은 11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건물 내부 중간에는 마야부인이 석가족의 토템인 살라나무 가지에 손을 잡고 연화대 위에 똑바로 서서 태어난 어린 부처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으로 2명의 천상의 인물들이 천상에서 내려진 물과 연꽃을 끼얹는 장면이 새겨진 돌조각이 있지만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또 그 아래 유리관 속에는 1600여년 된 붓다가 태어난 자리를 나타내는 발자국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큰 사진: 마야데비 사원과 살라 나무, 작은 사진: 아쇼카 왕의 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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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 왕(재위 BC272-232) 석주: 독일 고고학자 푸헤러(Dr. Fuhrer)가 1896년 발굴했다고 한다. 왕이 BC 250년 순례를 기념하여 세운 석주비문에 “신의 축복을 받은 피야데시왕(King Piyadesi)이 20년을 기름을 부어 성스럽게 하노니, 직접 납시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숭배를 하니 ‘여기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났도다.’ 말을 상징하는 돌로 이 석주를 세운다. 여기에 룸비니의 이 마을에서 성자가 태어났으니, 세금을 면하고, 생산량의 일부만 납입케 하라"라고 적혀 있다. 왕은 BC317 알렉산더가 철수한 후 통일한 마우리아[공작(새)]왕조의 3대 왕으로 불교사절을 이집트, 페르사, 마케도니아, 버어마, 수마트라, 자바, 실론에 등에 보내어 전파하였고,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고, 달마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인더스 문명 참조]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 [불교 참조] ★룸비니(Lumbini): 현재는 ‘룸민데’라 부르며, 카트만두에서 250km 떨어진 대 평지 ‘타라이 평원’에 있으며, 불교 4대 성지에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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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2009년 4월 30일 목요일 바라나시 관광 [바라나시로 가는 길] 오늘도 일찍 일어나 사기꾼이 많다는 국경도시 ‘소나울리(스노리)’에 도착해서 그동안 수고 했던 차와 이별을 하고, 인도의 입국절차를 밟고, 대형버스를 타고 바라나시로 향하였다. 산도 없고, 구릉도 없는 끝없는 대 평지에 아직은 농작물을 심지 않았으나 사탕수수밭도 가끔 보이고, 지난해에 심었던 목화밭도 보였는데 인도의 기름지고 좋은 평지를 보면서 이스라엘 대사의 고별사가 생각났다. 한국이 아랍국과 국교를 맺자 이스라엘은 한국대사관을 폐쇄하였고, 한국을 떠나는 이스라엘 대사가 고별사를 하면서 한국이 ‘못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로 이스라엘은 사막지대가 많아 인공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식물도 자라지 않지만 한국은 어디 던지 심으면 자라는 옥토를 가졌는데 못산다는 것 그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인도도 ‘못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궁금해진다. 소똥을 말리기 쉽도록 구멍 뚫린 불럭처럼 만들어 쌓아 놓은 것도 보이는데 인도에서도 소똥이 땔감으로도 쓰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청소의 재료로도 쓰인다고 한다. 농촌의 소는 주인이 있어 집에서 기르지만 도시 소는 주인이 없어 시민들이 사료를 사다가 준다고 하는데 한번은 본적이 있으나 대부분은 닥치는 대로 먹는 것 같았다. 가이드는 카레에 대하여 잠깐 설명을 했는데 카레는 27가지가 있다고 하며, 노란색이 띄는 것이 고급이고 인도인들이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은 카레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카레의 커큐민(Curcumin)이 치매, 알츠하이머, 항암, 비만의 다이어트, 관절염, 당뇨, 고혈압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식품의 효능 울금 참조] 점심을 먹기 위해 작은 도시에서 내렸으며, 변소도 없어 짓다만 건물 뒤로 가서 적당히 해결하였는데 이미 많은 일을 본 것이 있어 더럽고 불편했는데 여자들이 걱정되었다. 먼지가 많은 평상을 대충 먼지만 털어내고 땅에는 먼지가 나지마라고 물도 뿌리고 앉아서 온누리 팀과 점심을 먹는데 파리는 왜 그리 많은지... 반찬을 덮은 휴지를 들쳐가며, 인도인들의 시선 속에 먹었다. 오른손으로만 먹기에 손으로도 미각을 느끼길 수 있는 것이 인도음식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식판에는 얇게 구운 밀가루 빵과 카레 그리고 보라색의 작은 양파, 손가락 굵기의 무가 전부이다. 그들의 식사를 구경하다가 맛이 궁금해서 온누리 가이드가 먹는 것을 얻어 먹어보았는데 무는 조금 매웠고, 추억에 남길 만한 점심을 먹은 후 가는 길 왼편 어딘 인가가 김수로왕의 부인 허씨의 고향이라고 한다. 바라나시가 가까워지자 직감으로 갠지스 강이라는 생각이 큰 강이 보였으며, 이 강은 인도인들이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성스러운 강이라고 하면 약 12.500km 흘러 벵골 만으로 들어간다. 사르나트에 도착하여 사진기는 차에 두고 ‘사르나트 박물관’으로 향했으며, 이곳에는 나이가 든 인디아여행사 직원이 설명을 했는데 얼굴이 부처를 닮았고, 한국말을 샌디보다 더 잘했다. 이 중년의 가이드는 배가 많이 나와 ‘배불 띠기’로 불렀는데 이 분이 샌디를 대신해서 가이드를 했는데 아마도 우리와 같이 한 가이드보다는 급수가 높은 사람인 것 같았고, 모든 일은 이 분이 처리했다. 지금부터는 이 가이드를 ‘중 가이드’라고 표현하고, 샌디는 이름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네팔과 인도국경 도시 소나울리 네팔 쪽>![](https://t1.daumcdn.net/cfile/cafe/1419B1134CA980A710) [사르나트 박물관(Sarnath Archaeological Museum)] 중 가이드는 우리가 일찍 출발한 것은 이 박물관이 곧 있으면 문을 닫기 때문이라고 하며, 늦을 것을 대비에 부탁까지 했다고 하며,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옆에 있는 녹야원에서 발굴한 아소카 왕의 세운 석주 위에 있었던 4마리 사자가 등을 맞대고 사방을 바라보는 조각이었으며, 이 조각은 2.300년 동안 그 많은 세월에서도 크랙하나도 없다. 또 이곳의 날씨가 섭씨 40도에서 -2도까지 내려가는데도 온도와 풍화작용도 없이 표면이 반질반질한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며, 이 사자석상은 ‘인도의 국장’이라고 한다. 중 가이드는 지폐에도 있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또 아소카 왕의 세운 석주위에 있었다는 ‘덤바라’라는 돌 하나로 만들어진 둥근 돌 판이 벽에 걸려 있는데 그 크기가 대단하다. 초기불교는 불상이 없어 부처의 상징으로 임신 때 본 코끼리, 수행한 보리수나무, 사자, 법륜 등으로 표현 하다가 불상이 만들어졌는데 이곳에는 초기(AD1세기)의 불상(마투라 상)이 있다. 이 불상은 석굴암보다 500년 앞선 것이라고 하며, 또 이곳에 유명한 ‘불상(초전법륜 상)’이 있으며, 석가는 원숭이, 쥐, 사슴, 토끼 등으로 427번 다시태어 났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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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축 재료로 쓰인 구멍 뚫린 벽돌은 더운 이 지방에서 외부온도와 7도 차이가 나도록 했다고 하며, 각 방마다 불교유물, 힌두교유물, 회교유물들이 있으며, 회교 실 문 위의 조각은 1.000년 되었다고 한다. 중 가이드는 卍 조각된 곳에서 이것은 절 표시가 아니고, 한자의 일만 만자라고 하며, 절은 반대라고 한다. ★사르나트 박물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처음보이는 것이 인도의 상징인 2.31미터의 사자상이다. 입구 왼쪽 벽에 2개 중 하나는 ‘부처의 설법(초전법륜 상)’이라는 이름의 좌불 상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불상의 몸은 화려한 후광의 테두리가 둘러있다. 사르나트 박물관은 이 지역에서 발굴된 매우 값지고, 종교적 성향이 짙은 힌두 조각상, 당시 사용하던 연장 및 도구, 테라코타 등이 전시되어 역사적 사건들을 지니고 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녹야원(鹿野園: Mrgadava)] [불교 삼장법사와 대당서여기 참조] 차에서 사진기를 가지고 녹야원으로 향했는데 거대한 붉은 사암의 유적을 보는 순간 감탄과 함께 흥분되어 뛰어다녔는데 초등학생정도 되는 남매가 나를 보고 신기해하기에 사진을 찍어 보여 주었다. 나도 남매의 어머니에게 부탁을 하여 사진도 찍었지만 웬일인지 일행들이 오지 않아 내가 잘 못 왔는지 걱정이 되어 다시 정문으로 오니 그때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기념품을 사느라 늦은 것 같다. 중 가이드 말로는 이 주위 사방 몇 십리가 유물이 나와 유적지 크기가 얼마가 되는지도 잘 모른다고 하며, 10년마다 갠지스 강의 홍수로 인해 유적지는 매장되었다고 한다. 샌디 가이드는 영국사람 ‘죤 버닝’이 발굴했다고 하지만 다른 곳에는 ‘맥켄지’ 대령이 시작을 하고, 1835년부터 2년간 ‘컨닝 험’이 대대적으로 발굴을 했다고 한다. 다시 샌디를 따라 BC2세기 아쇼카 왕 때부터 시작된 사원은 1206년에 세워진 회교의 노예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있었으나 회교도와 힌두교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아소카 왕이 세운 부러진 석주는 철망 속에 있다. 한창 번영 시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했다고 하며, 현장이 이곳에 왔을 때 61m 높이의 큰 사원이 있었다고 했지만 백과사전에는 약 30m 높이의 정사(精舍)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고 한다. 무너진 유적지를 보면서 아소카 왕이 세웠다는 벽돌을 쌓아 만든 것 같은 거대한 다메크 수투우파(탑)로 향했는데 불교인들은 이 탑을 돌면서 기원을 한다고 한다. 이 탑을 돌다가 철조망 너머에 숲속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사원을 보고 차로 향했으며, 녹야원에 대한 자료는 백과사전과 인터넷에서 본 것을 종합해서 기록했다. ★녹야원: 바라나시 북방8km에 위치하며, 전설에 바라나 국왕이 사냥하다가 이곳에서 1,000마리의 사슴을 생포했는데 사슴왕(사랑나타)이 하루 1마리씩 식용으로 보내주겠다고 애원하여 모든 사슴이 풀려나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우리에게도 뜻 깊은 장소로 당나라시대에 통일신라 사람 혜초(AD704~787)가 이곳을 다녀간 후 ‘왕오천축국전’을 남겼고, AD635년 혜초보다 100년 앞선 당나라 현장이 이곳을 다녀간 후 남긴 대당서역기 기행문의 기록에는 ‘주위 100여 단이나 되는 감실(龕室)에는 황금 불상과 부조가 있으며, 안쪽에도 등신대의 초전법륜상(初傳法輪像)이 줄지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녹야원>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9B1134CA980A711) [아르띠 뿌자(arti pooja)] ‘아르띠 뿌자’ 의식은 40달러를 옵션으로 하게 되어 있는데 나이 많은 중 가이드는 무조건 다 해야 한다고 하여 한분이 항의를 하자 여행 경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여행경비로 충당해야 한다고 한다. 이 중 가이드는 최선을 다 한다는 내색을 너무 노골적으로 하는데다 내지 않아도 될 팁도 모두 우리보고 내라고 했으며, 또 너무 돈만 이야기하여 나중에 미워서 빨리 헤어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바라나시 도시에 도착하여 호텔로 들어가 전 검사대를 통과 하였는데 이것은 작년 뭄바이의 11월에 있었던 타지마할 호텔의 테러 사건 때문에 생긴 것 같다. 이곳을 통과하면 무섭게 생긴 건장한 사나이가 문을 잡고 있다가 웃으며, 열어주는데 차림새가 인도식으로 독특하였으며, 문을 드나들 때마다 문을 열어주어 나아가는 것도 미안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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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안으로 들어서면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고 음료수도 주며, 우리를 환영하였는데 평생 여행 때만 이런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하여튼 기분은 좋았다. 짐을 방에 놓고, 2명이 한조가 되어 릭샤를 타고 ‘아르띠 뿌자’ 의식을 보기 위해 갠지스 강으로 향했는데 인도는 인도(人道)만 있어 사람의 머리만 보인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가는 길이 너무도 복잡하고 공기도 나빠 우리일행은 전부 복면이나 마스크를 했는데 도시를 구경하는 것보다 언제 이 지옥을 벗어나려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지저분한 가트(계단)와 수도승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여 걸으면서 배 위에 올랐는데 강에 띄울 꽃과 초를 파는 어린소녀 둘도 있었는데 큰 아이가 욕심을 내며, 작은 아이에게 못 팔게 했다. 배는 화장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면서 중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가트의 화장 장소는 일정한 곳에서 하도록 있으며, 화장하는 시체는 잘 타라고 송진을 뿌리고 버터를 바른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그날 화장을 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와주기에 가능하다고 하고, 화장터에는 여자와 아이는 출입이 금지 되며, 화장 비용은 5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화장 할 때 사용하는 신성한 불씨는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건물을 중 가이드가 가르쳐 주었는데 어떻게 긴 세월을 꺼지지 않게 하였는지 놀랍기만 하다. 수도승들이 몸에 바르는 하얀 가루는 화장한 재라고 하여 엽기적이었는데 먹기까지 한다고 하니 할 말이 잃었는데 수도승들의 표시는 흰머리와 수염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돌을 달아 수장을 한다고 하며, 인도사람들은 죽음을 잠시 헤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고 한다. 뱀에 물려 죽은 사람이 갠지스 강 물에서 살아난 기적이 있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지금도 뱀에 물려 죽은 사람 다 수장을 한다고 하며, 짐승(소)은 죽으면 조(독수리)장을 한다고 한다. 돼지고기는 회교와 힌두교 모두가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힌두교는 비슈누 신이 돼지로 환생했기 때문이고, 회교는 돼지고기를 먹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에 금지했다고 한다. ‘아르띠 뿌자’를 보기 위해 의식 장소로 되 돌아왔는데 많은 인파와 배들을 보고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여행객들이 아니라 대부분 예배의식에 참가하는 힌두 교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식이 기다리면서 중 가이드는 오늘 일정에는 배를 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돈을 주고 배를 타는 이유는 여행객의 안전 때문이라고 또 생색을 냈지만 이것은 염연히 일정이 아니고 돈을 낸 옵션이다. 네온사인들이 찬란하게 켜지고, 종소리가 울리며, 스피커에서 사제가 진언 읊는 소리가 들리면서 어두운 제단에서 진행하던 사제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밝고 모양이 다른 등을 들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한다. 등을 든 사제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숫자가 많은 것에 놀라게 되며, 가트 전체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수십 명은 되는 것 같았는데 이들은 힌두교 신학생들이라고 한다. 신학생들은 이곳에서 경력을 쌓으면 인정을 받아 좋은 자리로 배치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며, 화려한 복장에 지루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동작을 하는데 힘들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의식이 끝나면 복잡하다고 사전에 자리를 뜨고 호텔로 향했는데 몸이 마른 릭샤꾼이 힘 드는지 때론 걸기도 했는데 같은 사람으로 타고 있는 우리 마음도 편치는 못했다. 일정에 시음하기로 되어 있는 수제 요구르트(라시)와 전통 밀크 차(짜이)에 대하여 물었더니 ‘짜이’는 내일 새벽에 하고, ‘라시’는 저녁식사 때 할 것이라고 했는데 식사 중에 가이드들이 들고 다니며, 맛보라고 한다. ★아르띠 뿌자: ‘아르띠’는 불의 신이고, ‘뿌자’는 의식이라는 뜻으로 갠지스 강 저녁에 불을 피워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힌두예배의식인데 인도의 최고계층인 브라만출신의 사제들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잠든 신을 깨우고, 부르기 위해 종을 울리고, 사제가 진언(Mantra)을 읊는 다고 하며, 뿔피리도 분다고 했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강에는 신께 소원을 빌며 띄우는 촛불(디아)과 꽃의 의식이 이루어진다.
<'아르띠 뿌자' 의식 때 불을 들고 있는 브라만 사제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9B1134CA980A712) ★바라나시(Varbnasi): 인터넷에 있는 백과사전을 참고로 하시기 바라며, 인구는 샌디는 정확하게 파악 할 수 없지만 대략 350만이라 했으나 백과사전에는 110만(2001) 정도로 되어 있다. 가이드는 바라나시는 시바신의 도시이지만 이란에서 회교들에게 쫓긴 배화교도들이 이곳으로 도망 왔다고 하며, 뭄바이에는 아직도 배화교(조로아스터교) 신도들이 많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 참조] ★1겁(劫): 시간의 단위로 ‘갠지스 강의 모래 알 만큼’의 시간 [석보상절과 아승기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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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09년 5월 1일 [금요일] 바라나시 관광 [바라나시 가트(Varanasi Ghat)와 미로길] 호텔이 공사장 가운데 있는 것처럼 밤새도록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어 일어나 창문으로 살펴보았으나 소리가 날만한 현장은 보이지 않았는데 호텔 주위 환경이 몹시 나쁜 것 같다. 갠지스 강의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이 기상하여 어제는 복잡해서 릭샤로 이동했던 곳을 새벽에는 복잡하지 않아 어느 정도는 차로 이동하였고, 나머지는 걸었다. 이동 중에 어느 아주머니가 파는 나무 앞에 서서 이 나무가 인도인의 칫솔과 치약을 대신하는 ‘마고자 나무’라고 하며, 이 나무로 이빨을 닦기 때문에 충치가 없어 인도는 치과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제 약속한 짜이를 맛보기 위해 찻집 앞에 멈추었고, 투박한 진흙으로 빗은 찻잔에 우유 빛깔의 차를 따라 주어 맛을 보니 먹을 만 했지만 너무 단 것이 흠이라고 할까? 어떤 분은 더럽다고 버린다. 한번만 먹고 버린다는 찻잔은 기념품으로 가져가라고 하여 챙겼다가 나중에 불편해서 버렸으며, 어제 탔던 배를 타고 이번에는 어제저녁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BC 6세기에는 카시 왕국의 수도였을 만큼 오래된 도시이기에 비탈진 강기슭에는 오래된 건물들을 볼 수 있었는데 중 가이드는 사암석으로 만든 1.200년 전 건물이라고 한다. 어느 것이 사원이고, 어느 것이 궁전이고, 어느 것이 개인들의 건물인지는 구별할 수가 없는 건물들이 층층이 솟아 있으며, 강에는 많은 인파들이 정화를 하기 위해 목욕을 하는 사람, 수영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강 속에 몸을 담그고 빨래하는 사람(도비)이 보이자 중 가이드는 갠지스 강물의 신비한 것을 자랑했는데 강물은 치료의 능력도 있으며, 8시간 이상 물속에 있는 도비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또 갠지스 강 물을 병에 담아 놓고 2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고 몇 번을 강조하였으며, 신비의 강물을 부자들은 강 가운데서 떠다가 매일 마시고 산다고 하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이다. 우리나라 북청 물장수도 한 강 가운데서 떠온 물은 가격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강 가운데 물은 유속이 빨라 깨끗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중 가이드는 인도사람들은 가진 것에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인도철학을 하면 미칠 수밖에 없다고 하며, 인도정부에서 인도의 철학에 대해 너무 깊이 말하지 말라고 한다. 안 그래도 인구가 많은 나라에 여행자들이 심취해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일부 그런 사람이 있는 줄 몰라도 글쎄? 인도의 걸인들을 볼 때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생각났다. 하긴 인도보다도 못사는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고 했으니 맞는 말인 줄도 모르겠으나 내사 인도에 살라고 붙들어도 살지 않을 그라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 아침에도 어제저녁에 본 ‘아르띠 뿌자’ 예식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구모가 적어 사제도 한명만 보였다. 오늘도 스모그 같은 날씨로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알았으니 갠지스 강의 일출은 강 따라 흘러갔지만 해는 다 같은 해인데 못 보면 어떠랴! 라고 위로를 해 본다. 배에서 내려 더러운 가트를 조심해서 올라 바라나시에서 이름난 미로 길을 가는데 더러운 것을 밟지 않으려고 바닥만 보느라 주변을 살펴보기도 어려웠지만 사실 볼 것도 없었지만 사원의 폭탄사건으로 무장한 군인만 기억에 남는다. ★바라나시 가트: 가트는 강가 돌계단의 뜻으로 그 중에서도 유명한 성지인 바라나시에 있는 갠지스 강의 층계를 뜻할 경우가 많으며, 수십 km라고 하지만 보이는 곳은 수 km 정도로 짐작된다. 갠지스 강을 힌두교도들의 성스러운 강으로 숭배하기에 아침마다 목욕재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이 한 곳에 존재하는 곳으로 인도에서는 죽음을 ‘목샤(자유)’라고 한다. 죽은 지 3시간 내에 화장하는 예식 때문에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은 인도 전역에서 '자유의 집'으로 모여들며, 화장은 인생의 업을 무사히 마친 사람만 가능하고, 사고, 전염병(황달, 수두 등), 임산부, 동물 등은 못한다.
<바라나시 가트>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430104CA986F65F) ★바라나시 미로길: 이 길로 들어가면 길 찾기가 매우 어려워 미로길이라 부르며, 1m 남짓한 폭의 좁은 길 양옆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향신료 및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로 북적인다고 했다. 그러나 아침이라 문을 안 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갔는지는 몰라도 북적이지도 안했고, 또 가장 인도다운 곳 중 하나로 전설보다 오래 도시이며, 영혼의 도시라고 했으나 그런 것을 느끼기엔 내가 부족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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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체험] 호텔 지하에 마련된 장소에서 하고 싶은 사람만 했는데 요가는 힌두교에서 신에게 접근하고 합일하기 위해 행해지는 일종의 예식이라고 하며, 시바신이나 불상의 손과 앉은 모양은 가장 기본적인 요가 자세라고 한다. 우리에게 체험을 해 줄 뿐은 인도에서 가장 알아주는 예쁜 선생이라고 하였는데 영어로 말해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동작이라 대충 따라할 수가 있었으며, 사례비는 우리가 각출했다. 오늘일정은 아침에 모두 마쳤기 때문에 저녁에 기차를 타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점심을 오후에는 카펫과 실크 기념품 가게를 들린다고 하면서 차표 때문에 큰일 났다고 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아침을 먹고 한가해서 바라나시를 보려고 나섰다가 릭샤꾼들과 걸인들에게 쫓겨 되돌아 와 카운트에 있는 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요금은 10루피가 나왔으나 1달러를 주었더니 거스름돈은 주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도비가트가 있는 곳을 다녀 온 분당 부부가 그곳을 안내하겠다고 해서 대구분이 따라나섰는데 뭄바이에도 일정에도 있어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혼자라서 미안해 할 가봐 따라나섰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날씨가 너무 더워 지치게 만들었는데 가트에 도착하니 한명만 빨래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빨래 통의 더러운 물속에서 장난을 하고 있었으며, 빨래를 말리는 것과 물탱크를 보고 돌아왔다. [카펫과 실크 기념품 가게] 인도 카펫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요즘 있는 카펫도 진드기 때문에 버리는 판국에 누가 살 것인가? 모두들 반응이 시원찮았으나 한분만 관심을 보였다가 중 가이드가 카펫을 호텔까지 들고 와 마음고생을 조금 했다. 바라나시 비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기념품 가게로 들어서니 비단을 짜는 모습을 보고, 매장으로 갔는데 파는 비단제품의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어느 여행 때보다 사는 사람이 적다. [기차 여행]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중 가이드는 기차표를 1년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20일 전에 겨우 숫자를 통보받아서
웃돈을 주고 침대좌석이 17석만 구했다며, 7명의 울산 팀에게 6석만 준다고 양해를 구했다. 착하게도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하여 우리를 안심하게 하였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곳 사정은 어떠하든 간에 여행이 가능하기에 이런 일정으로 여행상품을 파는 것이 아닌가? 카펫 때문이거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한 이유로만 들렸는데 중 가이드는 50만원을 줄 터이니 구해 보라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다. 또 내일은 델리를 관광하고 자이푸르로 이동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니 아침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열차 식으로 하자고 하여,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동의를 해주었다. 부산 2분, 서울과 대구분, 분당부부, 울산 2부부는 비록 떨어진 곳이나 자리가 정해져 별일이 없었지만 나머지 울산 팀만이 좌석이 정해지지 않아 남의 자리에서 눈치를 보면서 늦게까지 고생을 했다. 최고급 열차라는 것이 이런가? 할 정도로 열악했는데 칸막이도 없는 침대는 통로 안쪽에는 마주보고 한쪽에 3개씩 총 6개가 있고, 통로 창 쪽에는 2개가 있다. 객차 끝에는 양변기와 좌변기 2개가 있으나 휴지도 없으며, 유일하게 세수할 수 있는 수도꼭지가 있지만 눌러야 물이 나오기에 세수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비누도 치약도 없다. 인도 기행문을 쓴 법정스님이 변소 앞 통로에 자면서 깨끗하고 더러움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과 같지 않을까? 우리좌석이라고 하는 곳에는 이스라엘 부부가 찾아와 자기 좌석이라고 해서 쫓겨났는데 중 가이드는 승무원이 오면 이스라엘 부부는 쫓겨 날 것이라고 하여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 또 다른 자리는 예쁜 아일랜드 아가씨들이 자기 자리라고 찾아왔지만 다행이도 서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라고 해서 자리를 쉽게 바꾸어 주어 2자리는 정해졌다. 영어강사들과 이스라엘 부부는 우리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친해졌는데 이스라엘을 다녀온 사람은 나뿐이어서 내가 다닌 지명들만 말할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는데 그들은 북쪽 항구도시 ‘하이파’에 왔다. 잠 잘 때 코를 많이 골던 이스라엘 부인은 저녁 먹을 때는 냄새가 난다고 도망을 가기도 했는데 늦게 승무원이 왔으나 이스라엘 부부는 양보를 하지 않아 미움을 샀는데 얼굴도 못났지만 행동도 좀 거칠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분들 같지는 않겠지만 이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더 미움을 받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겨우 창 측 위 칸에 자라를 잡고, 더러워서 덮고 싶지 않는 담요지만 어쩔 수 없이 덮고, 시끄러운 에어컨 휀(fan) 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베개 삼아 한의사인 아들이 조제해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바라나시 기차역>![](https://t1.daumcdn.net/cfile/cafe/184430104CA986F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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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도, 네팔 여행을 잘 다녀온 기분이 듭니다. 자세하고 재미있게 잘 쓰셨네요. 앞으로 몇번 더 읽으러 놀러오겠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셔서 앞으로 30년간 기행문을 써 주시기를 부탁 드리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