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망교회 청년담당 구동휘목사
MK? 가방 브랜드명?
3년 전 총회의 주관으로 각 교회의 선교담당 목회자들이 모인 어색한 자리에서 MK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Missionary’s Kids의 약자인 MK. 목사의 자녀가 PK로 불려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금방 눈치챌 수 있었지만 주변에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섬기고 있는 교회에도 선교사 자녀가 없었던 내게는 너무나 낯선 단어였다. 그런 낯선 단어가 3년이 지난 지금 내 삶과 목회 그리고 우리 청년 공동체에게 가장 친숙하고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단어가 되었다.
그래, 이거다! ‘MK 캠프’
3년 전 그날의 모임에 내가 참석한 이유는 단기선교여행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 목사님들께 단기선교여행에 대한 생각과 노하우를 들어보고 싶었다. 이미 몇 차례 단기선교여행 경험이 있었고 그 때 마다 은혜가 있었지만 단기선교여행이 끝나고 돌아올 때면 뭔가 석연찮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갔던 곳에서 만난 선교사님과 현지의 아이들은 매년 여름 우리 팀과 같은 단기선교팀을 적게는 2-3팀, 많게는 7-8팀을 받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 팀들 중에 하나의 팀일 뿐이었다. 단기선교팀은 거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났던 현지 아이들은 매년 거의 똑 같은 부채춤과 태권도를 봐왔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축복송은 그 나라의 언어로 외울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분명 이런 형태의 사역도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나름의 의미는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이런 단기선교여행을 해마다 가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더 의미 있는 단기 선교 사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선배 목사님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참여한 나에게 MK사역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MK들이 비자발적으로 부모님들에 이끌려 선교현장에서 자라면서 겪는 아픔과 상처가 너무나 안타까웠고 선교사인 부모님 밑에서 조차 예배와 신앙교육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MK들의 상황을 소개하는 강지연 선교사님의 진심 어린 호소에 내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 MK사역이다!’ 이 사역이야말로 내가 찾던 의미 있는 단기 선교 사역이었다. 너무나 중요한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우리 교단에서 참여하는 교회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장점이 어린이 사역이니 이미 충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렇게 단기선교여행에 대한 나의 고민은 끝이 났고 그 해 여름 우리는 처음으로 MK캠프 사역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우리 MK 캠프 합시다!
내 마음은 정해졌고 이제 내가 맡고 있는 청년 공동체에 내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전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 가졌던 MK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몇 달이 지나면서 점점 식어져 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MK는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긍휼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할 것이다. 거기다 MK 캠프는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합친 행사니 청년들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사역이었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청년들을 설득해야 할 지 막막할 때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맞아! 얘가 있었지!’ 우리 공동체에 이미 MK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16년을 선교사의 자녀로 살았던 자매, 지금도 러시아어가 가장 편하다는 자매. 현재 그 부모님이 한국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자매가 MK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지연 선교사님의 조언에 따라 MK를 주제로 하는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자매에게 간증을 부탁했다. 설교는 강지연 선교사님이 전해주었고, 이어서 자매의 간증을 내가 그 자매를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해갔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터져버린 자매의 눈물 어린 호소는 나를 포함한 모든 청년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 나이에 카자흐스탄에 가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 학교에 입학해 겪어야 했던 수 많은 어려움들과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에서 지내야 했던 불편함들… 선교사의 자녀로서 요구 받았던 수 많은 부조리들은 어린 소녀가 겪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들이었고 눈물 없이는 전할 수도,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MK를 사랑해 달라는 자매의 눈물을 주님은 사용하셔 우리 공동체에 MK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셨고, 우리는 그들을 만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마음이 모이다
하루는 두 명의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들이 주님께 받은 MK에 대한 마음을 나누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신발을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신발회사에 다니는 청년이 있는데 그 청년을 통해서 신발을 구매하면 반 값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신발 한 켤레의 가격으로 두 켤레를 살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청년들이 하나를 가지고 똑 같은 신발 하나를 MK에게 선물해서 둘이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MK 캠프를 가고 싶어도 사정상 가지 못하는 청년들에게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MK들에게는 질 좋은 신발 하나와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형, 누나가 생기는 것이니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였다. 청년들은 같은 신발을 서로 나누어 갖는 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고 두 사람만의 신발을 만들기 위해 흰색 신발에 각자만의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35개의 서로 다른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일일이 신발에 색을 칠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청년들은 오로지 사랑의 마음으로 힘든 줄도 모르는 채 신발을 만들었다. 이 신발을 전달할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신발을 받아 든 아이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발과 함께 보여줬던 영상에서는 MK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후원자의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인 선교사님들의 눈에서는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고국에서 누군가가 내 아이 단 한 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타지에서 외로웠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을 느끼셨다고 후에 선교사님들은 말씀해 주셨다. 우리 팀원들도 울었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눈물이 흘렀던 데는 신발 이외에도 많은 원인이 있었다. MK 캠프의 모든 비용은 캠프를 주관하는 교회가 제공한다. 즉 우리 교회가 캠프의 모든 비용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선교 현장으로 가서 캠프를 열면 MK들은 공짜로 참여한다. 선교예산이 있는 교회야 걱정이 없겠지만 우리 교회는 달랐다. 우리 교회는 선교 정책상 선교 예산이 없다. 선교는 자비량으로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MK 캠프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우리 청년들이 만들어내야 한다. 캠프를 섬기러 가는 청년들이 자신의 항공료와 숙식비 외에 캠프 비용까지 더해서 회비를 냈고, 교회 성도님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해서 예산을 모았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가는 선교사로 그리고 보내는 선교사로 헌신했다. 현지에 가 있는 십 여명의 청년들이 온 교회의 대표인 셈이다. 그렇게 땀 흘리고 수고해서 캠프를 열었으니 MK들의 감격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눈물이 안 날 수가 있겠는가?
MK 캠프의 특별함
우리가 만난 스리랑카의 MK들은 수도인 콜롬보에 살고 있어서 한인교회를 다니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로 나뉜다. 그나마 한인교회에는 아이들을 위한 예배가 있지만 콜롬보가 아닌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나 아니면 콜롬보에 살더라도 부모님의 선교사역을 따라다니는 아이들은 그들을 위한 예배를 경험하지 못한다. 1년에 한 차례 열리는 MK 캠프가 그들이 체험할 수 있는 어린이 예배의 전부인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다. 히즈쇼 라는 회사에서 만든 3D 애니메이션을 성경학교 교재로 선정하고, 찬양과 율동을 선별하고 또 선별했다. 청소년들에게는 소명에 대한 코칭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정말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율동을 하면서 목이 터져라 찬양을 했다. 1년에 한 번 오는 기회를 시쳇말로 뽕을 뽑을 기세로 열과 성을 다한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찬양하는 아이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흐뭇하면서도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얼마나 갈급했으면…’ 한국에서는 웬만한 교회라면 다 어린이 부서가 있고, 예배가 있으며, 여름마다 성경학교를 한다. 하지만 선교지에 있는 MK들에게는 사치이고 호사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학교나 교회 또는 기타 기관들을 통해서 진로에 대한 코칭을 받을 수 있다. 교회들도 앞다투어 청소년들에게 비전과 소명을 찾게 해주려고 안간 힘을 쓴다. 하지만 선교지의 청소년 MK에게는 자신들의 진로를 고민해줄 사람이 부모님 밖에 없다. 하지만 선교사이신 부모님은 늘 바쁘다. 이들에게는 속 이야기를 할 곳이 필요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멘토가 필요하다. 사춘기가 되면서 부모와도 소통이 끊어지면 이들은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발견하게 도와준다. 선교사의 자녀로 살면서 받아온 상처가 어느새 캠프가 끝나가면서 선교사의 자녀라는 자부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며 부모님의 동역자가 된다. 이렇듯 MK 캠프는 일반 성경학교와도 다르고 7-8팀을 받는 현지인들을 위한 선교사역과도 다르다.
MK를 위한 캠프? 아니면 부모를 위한 캠프?
처음엔 MK 캠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준비했었다. 하지만 첫 회 캠프를 마치고 이 캠프가 그들의 부모님들인 선교사님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먼저는 자녀들에게 양질의 예배와 성경학교를 제공해 주니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한 마음의 짐을 좀 덜 수 있어서 좋고, 자녀들 때문에 선교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한인선교사회의 연합에도 도움이 되어서 좋고, 아이들을 맡겨두고 2-3일 부부끼리 오붓한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거기다 어른들을 위해 한국 먹거리들도 가져가 해드리니 MK 캠프는 이제 아이들만 손꼽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손꼽아 기다리는 캠프가 되었다.
함께 키운다는 마음으로
MK 캠프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뭐니 뭐니 해도 ‘애 보는 것’이다. 3박4일의 캠프기간 동안 청년들은 MK들과 먹고 자고 24시간을 함께하게 되기에 어린아이들을 씻고 먹이고 화장실 보는 것까지 돌봐야 했다. 20대 초 중반의 형제 자매들이 애를 키워본 경험이 있을 리 만무하다. 5세 유치반과 초등반을 맡은 선생님들은 첫 날 하루가 다 가기 전에 녹초가 된다. 넘치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이를 악물고 버틴다. 아이들이 찬양과 율동을 무한 반복하며 즐거워하고, 한국 아이들이라면 박스 채 받아도 감사한지 모를 조그마한 간식하나 장난감 하나를 받으려고 열심히 손을 들고, 선생님께 관심 한번 받으려고 열심히 눈맞추는 아이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했다. 오후가 되면 청년 선생님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들 다크서클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있다. 4일 내내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점점 지쳐간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아이에게 웃으면서 힘껏 손을 흔들어주고 나면 다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끌어안고 격려하며 시원섭섭한 마음을 달랜다. 만남의 기쁨도 크지만 그만큼 이별의 아쉬움도 크다. 벌써 3년째 겪지만 겪을 때마다 힘들다. 이별의 아픔은 MK 아이들이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전년도 단체 티셔츠를 다음해 캠프에 꼭 입고 오는 아이들, 선생님과 찍은 사진을 일년 내내 책상 앞에 붙여놓은 아이, 받은 신발이 닳을 까봐 몇 번 못 신었다가 발이 커져서 신지 못하는 신발을 박스 채로 보물처럼 넣어둔 아이… 우리는 한국에 돌아와서 바쁘게 살다 잊어버리기 일수였지만 아이들은 한 순간도 선생님과 캠프를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6월이 되기 시작하면 한 달도 더 남은 캠프를 기다리며 매일 엄마에게 캠프 언제 시작하냐고 묻는다고 했다. 어려운 사정이 생겨 캠프 시작 얼마 전에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하는 아이가 울면서 MK캠프 하고 가자고 졸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MK 캠프가 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첫 해에는 MK사역이 이런 거구나 맛보았고, 다시 오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다들 고마워 하면서도 인사치레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다시 갔더니 정말 다시 왔냐며 반가워하면서도 ‘설마 계속 오랴’ 라는 마음인 것 같았다. 세 번째 다시 갔을 땐 선교사님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반겨주었다. 왜 3번이나 같은 곳에 오느냐는 어느 선교사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함께 키운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렇다. MK 사역을 하면서 주님은 내게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님들이 가장 아끼는 자녀들을 함께 키우는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다. 아마도 선교사가 선교지를 선택하거나, 눈물을 머금고 선교지를 떠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자녀문제 아닐까? 낯선 선교지에서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몰라 눈물과 기도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다던 선교사님들의 하소연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자신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었다며 아이들 앞에선 늘 죄인이라는 선교사님의 고백도 여전히 내 마음을 울린다. 선교사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줘야 선교사님들이 건강하게 사역할 수 있다. 1년에 한 번, 3박4일의 캠프가 MK들의 영혼을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마음 놓고 행복하게 선교사역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면, MK캠프는 선교사를 돕는 게 목적인 단기 선교 사역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
내년에도 오시는 거죠?
캠프가 끝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오면 아이들은 자신의 선생님을 붙잡고 계속 묻는다. “선생님 내년에도 오시는 거죠?”, 부모님들도 악수를 하며 묻는다. “목사님 내년에도 오시는 거죠?” 그럼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그럼요 내년에도 또 와야죠.” 선교지에서는 다음에 대한 그 어떤 약속도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게 주신 이들을 향한 마음이 너무나 크기에 나는 또 약속한다. 올 해에는 두 번의 MK 캠프를 진행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선교사 대회에 참석하는 부모님을 따라 각국에서 온 MK들을 섬겼고, 일주일 후에 스리랑카에서 MK들을 섬겼다. 스리랑카는 계속 갈 생각이다. 정말 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미 청소년MK들은 한국을 방문하면 자신들의 선생님을 찾아 우리교회를 찾아온다. SNS를 통해 꾸준히 연락하는 아이들도 많다. 나중에 그들이 한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 우리 교회에 다니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한국 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모델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MK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만약 선교사가 된다면 부모님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잠재적 선교사인 그들이 바르게 커 갈 수 있도록 더 많이 돕고 싶다. 올 겨울엔 태국에 있는 MK를 섬기러 가려고 준비 중이다. 내년에는 스리랑카와 함께 또 다른 나라에도 가려고 한다. 아직도 MK 캠프를 맛보지 못한 MK들이 전세계적으로 너무 많다. 한국 교회는 이제 선교사 파송 2위 국가라는 타이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부모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MK들이 선교지에서 홀로 고군분투 하고 있음에 눈을 돌려야 한다. 더 많은 한국 교회가 새로운 단기선교여행인 MK 캠프 사역에 눈을 뜨길 바란다. 나는 이제 각 교회의 선교담당자를 만나면 자신 있게 이야기 한다. MK를 돌보는 것이 곧 선교사를 돕는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