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道傳 三峯集 1
樂章06 靖 東 方 曲 정동방곡 1393 7월
무진년(1388) 봄에 신우(辛禑)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자, 우리 태조는 우군장(右軍將)으로 여러 장수들을 효유하여 의(義)로써 회군 하였다.
繄東方阻海陲(예동방조해수) 금수동방 동떨어진 바닷가 나라
披狡童竊天機(피교동절천기) 저 교동이1) 천기를 도둑질하다니
爲東王德盛多里利(위동왕덕성다이리)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라.
肆狂謀興戎師(사광모흥융사) 부질없는 꾀 부려 군사를 일으키니
禍之極靖者誰(화지극정자수) 극에 달한 이 화를 막을 사람 누구인가
爲東王德盛多里利(위동왕덕성다이리)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라.
天尙德回義旗(천상덕회의기) 하늘은 덕을 숭상 의기를 돌리면서
罪其黜逆其夷(죄기출역기이) 죄진 사람 몰아내고 역적은 멸족했네
爲東王德盛多里利(위동왕덕성다이리)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라.
皇乃懌覃天施(황내역담천시) 황제님 기뻐하여 큰 은혜 베푸셔서
軍以國俾我知(군이국비아지) 군대로써 나라 세워 우리님께 맡기셨네
爲東王德盛多里利(위동왕덕성다이리)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라.
於民社有攸歸(어민사유유귀) 아름답도다! 백성과 사직이 돌아갈 곳 있으니
千萬歲傳無期(천만세전무기) 천세 만세 끝없이 전해가리
爲東王德盛多里利(위동왕덕성다이리)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라.
1)「시경」 정풍(鄭風)의 편명. 음란함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우왕을 가리킨다.
樂章07 致 語 夢金尺受寶籙通用 치어 몽금척 수보록과 통용한다. 1393. 7.
1. 進時口號 나아갈 때 구호
奉貞符之靈異(봉정부지령이) 정부의 영이를 받들어
美盛德之形容(미성덕지형용) 성덕의 형용을 미화 하도다.
冀借優容(기차우용) 바라옵건대 우용을 비시와
式孚宴譽(식부연예) 연예를 미덥게 하소서.
2. 退時口號 물러갈 때 구호
樂旣奏於九成(악기주어구성) 음악은 이미 구성을1) 아뢰었고
壽庸獻於萬歲(수용헌어만세) 수는 항상 만세를 드리옵니다.
未及歡娛之極(미급환오지극) 환오의 극치에 이르기 전에
遽懷儆戒之心(거회경계지심) 문득 경계하는 마음을 품으시옵소서.
拜辭以歸(배사이귀) 하직을 올리고 돌아가오니
式燕以處(식연이처) 편안히 쉬시옵소서.
1)구성(九成) : 음악(音樂)의 구장(九章)을 다 마침을 뜻한다.
「서경」 익지(益稷)에ꡒ소소 9곡을 끝내니 봉황이 와서 춤춘다.ꡓ[簫韶九成 鳳凰來儀]하였다.
3. 夢金尺中腔詞 몽금척 중의 노래
聖人有作(성인유작) 성인이 일어나시니
萬物皆覩(만물개도) 만물이 모두 우러러 보고
靈瑞繽紛(령서빈분) 신령한 상서 하도 많으니
諸福畢至(제복필지) 모든 복이 다 이리 오도다.
長信不足(장신부족) 긴 말이 오히려 부족하고
式歌且舞(식가차무) 노래하고 춤을 추네.
於樂於論(어락어론) 아 즐거움이여! 아 차례 있음이여!2)
君王萬壽(군왕만수) 우리 성주 만만세를 누리소서.
2)즐거움····차례 있음이여 : 詩經 소아(小雅)의 영대(靈臺)에"아 질서 있게 종을 침이여! 아 학교에서 즐기는구나!"[於論鼓鍾 於樂癰]하였다.
五言古詩48 病中懷三峯舊居 1393 5월
병중에 삼봉의 옛집을 생각하다.
嗟我抱沈痾(차아포심아) 아! 나는 해묵은 병이 있어
居常畏炎天(거상외염천) 언재나 더위를 두려워하네.
況復車馬塵(황복거마진) 더군다나 거마의 먼지 속에서
衣冠苦拘纏(의관고구전) 의관의 속박을 너무 받고 보니
所以氣煩欝(소이기번울) 그래서 기운이 답답하고 번거로워
五月猶未痊(오월유미전) 오월에도 오히려 낫지 않네.
懷哉三峯雲(회재삼봉운) 그립다 삼봉의 저 구름이여
故人在其巓(고인재기전) 벗님네 그 산마루에 살면서
爲我泛瑤琴(위아범요금) 나를 위해 거문고를 둥둥 타며
亂以歸來篇(난이귀래편) 귀거래사 한편으로 끝을 맺누나.
淸風振林莽(청풍진림망) 맑은 바람 짙은 숲 헤치고 오니
遺響何冷然(유향하냉연) 맑고 고운 그 소리 어찌 그리 시원 한가
問我久行役(문아구행역) 나의 오랜 행역을 위로하면서
何時當來還(하시당래환) 언제나 돌아올 것이냐네.
山靈未移文(산령미이문) 산신령이 이문을 하지 않아도1)
巖壑聊竚延(암학료저연) 고향산천은 그대로 나를 기다린다네.
我感故人意(아감고인의) 벗님네 후한 뜻에 나는 느끼어
危涕流潺湲(위체류잔원) 눈물이 줄줄 흐르네.
君臣義甚重(군신의심중) 군신의 의가 너무 소중하기에
病矣猶勉旃(병의유면전) 몸은 병들었어도 아직 쉬지를 못 하네.
天門九重深(천문구중심) 천문은 구중이라 깊기도 하여
欲叫空盤桓(욕규공반환) 외치고자 해도 걸음이 내키질 않네.
三峯渺何處(삼봉묘하처) 삼봉은 아득히 어디 뫼냐?
極目但雲烟(극목단운연) 저 멀리 하늘 끝엔 구름 연기뿐이네.
1)산신령이······않아도 : 이(移)는 공문서의 일종이다. 남제(南齊) 공치규(孔穉圭)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종산의 신령과 초당의 신령이 역로를 달려 산정에 이문을 새겼다." [鍾山之英草堂之靈馳煙驛路勒移山庭]라는 말이 있다. 즉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뒤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해염령(海鹽令)이 되었는데, 나중에 다시 돌아와 숨으려하므로 공치규는 신령의 뜻을 빌어 이문(移文)하여 못 오게 하였다.
兵書06 四時蒐狩圖 失傳 사시수수도 없어졌다 1393
編輯者) 이 책은 계유년(1393) 8월 20일 요동정벌을 대비한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저술하였다. 공이 평소 잘 알고 있던 것으로 효과적인 사냥방법에 관한 이론을 군사훈련에 접목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위하여 각종 지형과 지물, 적의 규모에 대하여 아군의 대처 방법에 관한 이론을 그림과 설명을 병행한 병법서인 것으로 여겨진다.
七言絶句81 陪御駕游長湍作 癸酉秋 1393 가을
임금을 모시고 장단에서 노닐며 짓다.
秋天澄澄碧以天(추천징징벽이천) 가을하늘 맑고맑아 온통 푸르러
君王暇日御樓船(군왕가일어루선) 우리임금 여가 내어 누선에 오르셨으니.
篙師莫唱長湍曲(고사막창장단곡) 사공은 장단곡을 부르지 마오
此是朝鮮第二年(차시조선제이년) 지금이 바로 조선창업 제2년이 아니던가.
五言律詩60 赴 鷄 龍 山 계룡산에 부쳐 1393
客遊南國徧(객유남국편) 나그네 남옄에 유하여 국운을 살펴보니
鷄岳眼偏明(계악안편명) 눈앞의 계룡산은 밝고도 밝구나.
躍馬驚鞭勢(약마경편세) 채찍 맞고 도약하는 말의 기상으로
回龍顧祖形(회룡고조형) 용이 휘감아 돌보는 형세일래.
蔥蔥佳氣積(총총가기적) 골골이 아름다운 기가 쌓여있고
鬱鬱瑞雲生(울울서운생) 서기가 피어나 겹겹이 둘러있네.
戊己旣亨通(무기기형통) 나라를 다스림에 이미 형통 하고,
何難治泰平(하난치태평) 정사는 태평한데 무엇이 어려운가.
주) 향리에 사는 중년들이 이 계룡산 시는 삼봉선생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赴 鷄龍山 聞於鄕中老 三峯所作] 《隱峯全書卷五 安邦俊 1773年》
1394年(太祖 3)
書07 軍制改訂上書 군제개정에 관한 상서문 1394. 2. 29.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 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의 환시(宦侍)·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청탁하는 사람을 시위(侍衛)하는 관직으로 임명하매, 세력을 믿고 교만하여 숙위(宿衛)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부위(府衛)가 비로소 무너졌으므로, 처음으로 홀지(忽只)·충용(忠勇) 등 애마(愛馬)를 설치하여 우선 숙위(宿衛)에 대비(對備)하게 하였습니다.
위조(僞朝)에 이르러 법제(法制)가 크게 무너져서, 무릇 부위(府衛)의 직책을 받은 사람은 한갓 국록(國祿)만 먹고 그 사무는 일삼지 아니하여 마침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이것은 전하(殿下)께서 친히 보신 바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늘의 큰 명령을 받고 성대하게 큰일을 하시니, 마땅히 구폐(舊弊)를 고쳐서 나라의 형세를 무겁게 하고 천재(天災)를 그치게 하여, 혁신(革新)하는 정치를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들은 데에 익숙해져서 오랫동안 쌓인 폐해를 고치기기 어려우나,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으면 반드시 복색(服色)을 변경하고 휘호(徽號)를 고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시청(視聽)을 한결같이 하여 폐단을 고쳐서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송(宋)나라 태종(太宗)은 아름다운 명칭으로써 금군(禁軍)의 그전 칭호를 고쳐 사기(士氣)를 진작(振作)시켜 새롭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동반(東班)의 관명(官名)과 직호(職號)는 일체 모두 개정하여 명칭에 따라 실상을 책임지우니, 백관(百官)이 일에 나아가고 공(功)을 힘쓰게 되는데, 유독 부위(府衛)의 칭호만은 그전대로 그냥 있으며, 폐단도 또한 전과 같습니다.
신 등은 직책이 삼군(三軍)을 관장(管掌)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와 삼가 부위(府衛)의 당연히 행해야 될 사건(事件)을 조목별로 아래에 갖추어 올립니다.
一.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로 고치고, 우위(右衛)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고치고, 응양위(鷹揚衛)는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고치고, 금오위(金吾衛)는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각기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영(領)을 두어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좌·우위(左右衛)는 용양순위사(龍쵃巡衛司)로 고치고, 신호위(神虎衛)는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로 고치고, 흥위위(興威衛)는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또한 각기 5영(領)을 두어 좌군(左軍)에 속하게 하고, 비순위(備巡衛)는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로 고치고, 천우위(千牛衛)는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로 고치고, 감문위(監門衛)는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또한 각기 5영(領)을 두어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고, 우시위(右侍衛)·순위(巡衛) 등 10사(司)는 매 1사(司)마다 인신(印信) 1과(顆)를 주조(鑄造)하여 주고, 도위(都尉)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할 것이며,
一. 상장군(上將軍)은 도위사(都尉使)로 고치고, 대장군(大將軍)은 도위첨사(都尉僉事)로 고치고, 제위(諸衛)의 장군(將軍)은 중군 사마(中軍司馬)·좌군 사마(左軍司馬)·우군 사마(右軍司馬)로 고치고, 장군(將軍)은 사마(司馬)로 고치고, 중랑장(中郞將)은 사직(司直)으로 고치고, 낭장(郞將)은 부사직(副司直)으로 고치고, 별장(別將)은 사정(司正)으로 고치고, 산원(散員)은 부사정(副司正)으로 고치고, 위(尉)는 대장(隊長)으로 고치고, 정(正)은 대부(隊副)로 고치고, 도부외(都府外)는 중군(中軍)으로 고쳐서 사직 1명, 부사직 1명, 사정 2명, 부사정 3명, 대장 20명, 대부 20명으로 하고, 좌군(左軍)은 사직 1명, 부사직 1명, 사정 2명, 부사정 3명, 대장 20명, 대부 20명으로 하고, 우군(右軍)은 위와 같으며, 매 1사(司)마다 도위사 1명, 도위첨사 2명으로 하고, 매 1영(領)마다 사마 1명, 사직 3명, 부사직 5명, 사정 5명, 부사정 7명, 대장 20명, 대부 40명으로 하고, 매 1도(道)마다 절제사(節制使)는 종실(宗室)이 맡고, 부절제사(副節制使)는 중추부(中樞府)에서 맡고, 병마검할사(兵馬鈐轄使)는 가선(嘉善)이 맡는데, 주군(州郡)의 군사 1백 명을 관장(管掌)하고,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는 정3품·종3품이 맡는데, 주군(州郡)의 군사 1백 명을 관장하고, 단련판관(團練判官)에 이르기까지 군사를 관장함이 차등이 있게 하고, 중군(中軍)은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와 동북면(東北面)이 속하고, 좌군(左軍)은 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경상도·전라도가 속하고, 우군(右軍)은 양광도(楊廣道)·서해도(西海道)·서북면(西北面)이 속하게 할 것이며,
一. 시위군(侍衛軍)을 시위(侍衛)·순위(巡衛) 등 여러 사(司)에 나누어 속하게 한 것은 대개 한(漢)나라 남북군(南北軍)의 유제(遺制)를 본받은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남군(南軍)은 궁문(宮門)의 시위(侍衛)를 맡고, 북군(北軍)은 경성(京城)의 순검(巡檢)을 맡았으니, 이것이 내외(內外)가 서로 제어하여 장구히 치안(治安)되어, 화란(禍亂)이 발생하지 아니한 것으로, 이미 그렇게 된 명백한 증거입니다. 지금 의흥(義興)·충좌(忠佐)·웅무(雄武)·신무(神武)를 시위사(侍衛司)로 삼아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인일(寅日)·신일(申日)·사일(巳日)·해일(亥日)로써 상장군(上將軍)·대장군이 각기 그 영(領)의 장군(將軍) 이하의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대궐 문에 윤번(輪番)으로 시위하게 하여, 한나라 남군(南軍)의 제도를 본받고, 용양(龍쵃)·용기(龍騎)·용무(龍武)와 호분(虎賁)·호용(虎勇)·호익(虎翼)을 순위사(巡衛司)로 삼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고, 상장군·대장군이 그 영(領)의 장군 이하의 군관을 거느리고 진량(津梁)을 지키고, 교대로 사문(四門)을 돌아다니면서 파수(把守)해 막고, 윤번으로 상직(上直)하여 돌아다니면서 경계하게 해서 한나라 북군(北軍)의 제도를 본받고, 그 당번(當番) 된 각사(各司) 상장군 이하의 군관(軍官)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때때로 명령을 내려 알려 주어서 어기지 못하게 하고, 무릇 입직(入直)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나가고 들어감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처벌할 것이며,
一. 사순(司楯)·사의(司衣)·사막(司幕)·사이(司츺)·사옹(司甕)의 상건(上件) 애마(愛馬)는 곧 고려 왕조의 말기에 첨설(添設)한 것이니, 마땅히 개혁해 버려야 될 것이지만, 각기 차비(差備)가 있으니 창졸히 혁파(革罷)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목(都目)이 우두머리가 된 자는 여러 영(領)의 직책을 받았으나, 본번(本番)의 사무가 한가함이 없는 이유로써 영(領)을 따를 수 없어서, 이로 인하여 시위(侍衛)가 허술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각영(各領)에서 녹관(祿官)의 수효를 삭제(削除)하고 사순(司楯)의 제1번에 사직(司直) 1명, 부사직(副司直) 1명, 사정(司正) 2명, 부사정(副司正) 2명, 급사(給事) 3명, 부급사(副給事) 3명을 두고, 그 나머지 3번과 각 애마(愛馬)도 모두 이 예(例)를 써서 도목(都目)을 두원(頭員)으로 삼아, 장차 차례대로 옮겨서 거관(去官)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사무가 있는 사람은 그 녹(祿)을 먹게 되고, 그 녹(祿)을 먹는 사람은 그 사무에 종사하게 되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아서, 서로 침해하고 문란하지 아니하여 거의 올바르게 될 것이며,
一.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나이어린 자제(子弟)와 내료(內僚)·공상(工商)·잡례(雜隸)들이 위영(衛領)의 직책에 충당되었으므로, 외람되고 용잡(冗雜)되어 그 임무를 감내하지 못하여, 혹은 권세에 의탁하여 그 사무를 보지 않고서, 늠록(쬎祿)만 한갓 허비할 뿐이고 시위(侍衛)는 허술하게 되었는데, 지금 그 폐단을 계승하고 일찍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처음 교화를 시행하여 자손에게 계획을 전하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본부(本府)와 병조(兵曹)의 제위영(諸衛領)의 현임자(現任者)로 하여금 신체를 살펴보고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그 건장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 직책을 다시 주고, 어리고 약한 사람과 늙고 병든 사람과 재주가 없는 사람과 잡류(雜類)에 속한 사람과 어떤 일을 핑계하고 출근(出勤)하지 아니한 사람은 일제 모두 삭제(削除)하고, 다시 친군위(親軍衛)에 소속된 원종 시위(原從侍衛)의 원인(員人)과 훈련관(訓鍊觀)에서 병법(兵法)을 익힌 원인(員人)과 태을수(太乙數)의 산법(算法)을 익힌 원인(員人)은 각기 소속 관원들로 하여금 보증 천거[保擧]하게 하여, 앞에서와 같이 신체를 살펴보고 재주를 시험하여 아뢰어 차비(差備)하게 할 것이며,
一. 무릇 위영(衛領)의 직책에 충원(充員)된 사람과 위영에 분속(分屬)된 각 성중애마(成衆愛馬)를 모두 명부에 이름을 기재하게 하고, 또 시위(侍衛)하고 순작(巡綽)할 번(番)을 당하면 아무 사(司)의 몇 원인(員人)과 아무 애마(愛馬)의 몇 원인(員人)을 명부에 명백히 써서, 명부에 있는데도 숙위(宿衛)하지 아니한 사람과 명부에 없는데도 들어온 사람을 때때로 죄를 다스리게 하고, 당번으로 숙위하고 순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병진(兵陣)의 법을 예습(預習)시켜서,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잘하지 못한 사람은 처벌하게 할 것이며,
一. 군사(軍事)는 엄격함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그 판지(判旨)를 따르지 아니하여 무릇 부위(府衛)의 법에 범한 자가 있는 사람은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하여금 상세히 심문하게 하여, 중한 사람은 계문(啓聞)하여 법사(法司)에 내려서 과단(科斷)하고, 그 간사하고 완악하여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성법(成法)을 무너뜨려 여러 사람의 시청(視聽)을 미혹시켜 어지럽게 하는 사람은 변방에 안치하여 군역(軍役)에 충당하게 할 것이며,
一. 군사를 거느린 사람은 직위가 낮으면 윗사람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어, 사역(使役)하기가 쉬우며, 그 본분을 편안하게 지키는데, 지금 조정에서 비록 도독(都督)·지휘(指揮)·천호(千戶)가 있지마는, 군사를 맡은 사람은 백호(百戶)이고, 고려 왕조에서 비록 중추부(中樞府)·병조(兵曹)·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지마는, 군사를 맡은 사람은 장군(將軍)이었으니, 이것은 장구히 치안(治安)을 유지하는 계책이었습니다. 본조(本朝)의 부병(府兵)의 제도도 이미 이 뜻이 있었으니, 장군으로 하여금 오원십장(五員十將)과 육십 위정(六十尉正)을 맡게 하고, 대장군 이상은 참예하지 못하게 하고, 각도 주군(州郡)의 군사도 또한 병마사(兵馬使) 이하에게 명하여 이를 맡게 하고, 절제사(節制使)는 때때로 병마사의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만 규찰(糾察)하게 한다면 체통(體統)이 서로 유지(維持)되므로, 군사가 비록 모이더라도 반란을 그치게 하지 못할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請01 請軍國事議論판삼사사(判三司事) 1394. 4. 22.
매일 장상들을 불러 군국의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다.
옛날 성주(成周) 시대에는 인심이 충후(忠厚)하였지만, 그러나 무왕이 병환이 났는데, 주공(周公)이 말하기를, ‘함께 점치지 말라.’ 하고는, 자신이 무왕을 대신하여 죽고자 하였으니, 대개 새로 건국된 나라에 인심(人心)이 요동할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나와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지 않으시니, 신민(臣民)들은 병환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위독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매양 이른 아침에 반드시 정전(正殿)에 앉아서 여러 장상(將相)들을 불러 군국(軍國)의 일을 함께 의논하소서.
七言古詩07 置書籍鋪詩 幷序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 서문도 함께 씀 1394
대범 선비된 자가 비록 학문의 길로 향한 마음은 있을지라도, 진실로 서적을 얻지 못하면 또한 어찌 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동방은 서적이 드물고 또, 많지 않아서 배우는 자가 모두 글을 폭넓게 읽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긴다. 나 역시 이점에 대하여 유감으로 여긴지 오래 이다. 그래서 절실한 소원이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동활자(銅活字)를 만들어 무릇, 경(經)․사(史)․자(子)․서(書)․제가(諸家)․시(詩)․문(文)․의방(醫方)․병(兵)․율(律)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출하여,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시기를 놓치고 한탄하는 일이 없도록 글을 널리 읽을 수 있게 하고자 함이다. 오직 제공(諸公)들은 사문(斯文)을 일으키는데 자신의 책무(責務)로 생각하고 다행히 공감(共感)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且問何物益人智(차문하물익인지) 우선 묻노니 뭣이 인간에게 지혜를 주는가
若非美質由文章(약비미질유문장) 미질이 아닐 바엔 문장을 말미암느니.
所恨東方典籍少(소한동방전적소) 한스럽긴 동방에 서적 적어서
讀書無人滿十箱(독서무인만십상) 열 상자 이상 읽은 사람 없네.
老來雖得未見書(노래수득미견서) 늙어지면 비록 못 본 글 얻더라도
讀了掩卷便遺忘(독료엄권편유망) 책 덮으면 돌아서서 잊는 법.
誓心願置書籍鋪(서심원치서적포) 이내 속 염원은 서적포를 설치하여
廣惠後學垂無疆(광혜후학수무강) 후학에게 널리 읽혀서 무궁토록 전하는 것.
君看夷裔害倫理(군간이예해윤리) 그대의 윤리를 해치는 오랑케를 보게
其書滿架充棟樑(기서만가충동량) 그 글들이 시렁과 기둥에 가득차있네.
彼盛此衰何足歎(피성차쇠하족탄) 그는 성하고 우리는 쇠했다 한탄 말게
自是吾曹志不强(자시오조지불강) 우리들 스스로 뜻이 강하지 못한 것을.
諸公請助書籍費(제공청조서적비) 여러분께 청하노니 서적비를 협조하여
致令斯道更輝光(치령사도경휘광) 사도를 부디 빛나게 해주오.
序13 送靖安君赴京師詩序 甲戌 1394 6월
경사가는 정안군을 전송하는 시의 서
삼가 생각하옵건데, 전하께서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뜻으로 대국을 섬겨 제후의 법도를 능히 삼가시고 어기는 일이 조금도 없으니, 천자가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친아들로써 조회하라." 하여서 정안군(靖安君 李芳遠)이 가게 되었다.
바로 6월 을해일(乙亥日)이다. 전하께서는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수창궁(壽昌宮)에 납시어 표(表)를 올리는 의식을 하고 의장(儀仗)을 좌우로 갈라 세운 다음, 악부(樂部)가 앞을 인도하게 하여 선의문(宣義門) 밖까지 전송하였다.
성안의 부로(父老)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메우고 우러러 보며 감탄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아들을 한번 보내서 만백성이 그로 인하여 편안히 살게 되었으므로, 노래를 지어 뒷자손으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하고, 서로 더불어 노래를 불렀다.
天子之明兮(천자지명혜) 천자의 밝으심이여!
吾君之誠兮(오군지성혜) 우리 임금의 정성이로세.
之子之行兮(지자지행혜) 대군의 가심이여
爲斯民開太平兮(위사민개태평혜) 우리 백성 태평을 열어 주리라.
그 노래에 이어 문하시랑(門下侍郞)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짓고 시중(侍中) 평양백(平壤伯 趙浚) 이하 여러 대부(大夫)들이 화답하여 운자(韻字)를 나누어 지은 시가 약 28편이었다. 그 서문(序文)을 도전(道傳)에게 부탁하므로 불민(不敏)한 것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득이 말하기를,
"정안군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학문이 숙성하여 이번에 군부(君父)의 명령을 받들고 천자의 조정에 조회 가니, 옥지(玉墀 천자의 궁전 뜰)의 지척에 서서 목목(穆穆)한 광채를 대하고, 자상하고도 명백하게 아뢰어 우리 임금에게 내리는 명령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면, 이것은 집안에서는 효자가 되고 나라에는 충신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정안군 스스로 기약하는 바이며, 여러 대부들도 역시 이것을 바라는 것이다. 여름철을 맞아 장마 비가 잇달아 내리니,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여행에 대한 고충을 누구나 생각하게 되지만, 정안군은 이런 것을 가슴에 조금도 염려 하지 않으니. 아! 어지신 분이로다."
라고 하였다.
원 제목: 정도전] 본조에서 요동변장과 여직을 꾀었다는 등의 일을 변명하는 표의 대략
表01 本朝辨明誘遼東邊將女直等事表略 甲戌 1394
본조에서 요동변장과 여직을 꾀었다는 등의 일을 변명하는 표의 대략
「國朝寶鑑」「攷事撮要」에 보인다
요동에 나가서 행례(行禮)하는 것으로 말하면, 역시 상국(上國)을 높이 사모하는 데서 나온 일입니다. 사신이 오고 갈 즈음 빈주(賓主)간에 교제하는 의식은 상(常) 관례입니다. 관례가 그러하기 때문이지 어떻게 감히 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직은 동녕위(東寧衛)에 예속되어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나오게 되었는데, 어떻게 사람을 보내서 꾀려 하겠습니까? 다만 요동도사(遼東都司)가 탈환불화(脫歡不花 몽고의 장수)를 잡아갈 때, 그 관하의 백성으로서 즉시 따라가지 않은 사람이 간혹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살던 집을 떠나가기 싫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신(臣)이 강제로 못 가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이사건과는 아무런 관계없으며, 각자 옛날 같이 관행을 지킨 것뿐입니다.
記07 靑石洞宴飮記 청석동 연음기 1394.6.
6월 갑신 일에 명나라 사신 황공(黃公 黃永奇) 등이 경사(京師)로 돌아가는데, 시중 평양백(平壤伯 趙浚)과 시중 상락백(上洛伯 金士衡)이 제공들과 함께, 그를 전송하기 위하여 금교역(金郊驛)까지 왔다가 정오에 되돌아갔다.
이때 한낮의 더위가 불기운 같이 맹렬하여 아전들이 청석동 시냇가에 차일을 쳤다. 이것은 피서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공들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자, 물은 그 아래로 흐르고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와, 몸이 편안하고 정신이 상쾌하여 마치 오랜 병이 몸에서 떠날 것 같았다. 높은 음악이 울리고 흐르는 술잔이 겹으로 이르니, 제공들이 흐뭇하게 즐겼다. 잠시 후 평양백이 문득 말하기를,'즐겁기는 하나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하였다.
도전(道傳)이,'재상의 직책은 수고로운 것이며, 온갖 책임이 한 몸에 모이고, 여러가지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혀 기운이 답답하고, 뜻이 정체되므로 아무리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혹 잘못 실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심(裨諶)이 정(鄭)나라의 정사를 계획할 때는 반드시 들에 나아가서1) 하였다. 이것은 대개 한가롭고 조용한 가운데 생각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도 막혀 답답한 기운도 풀고, 그 정지되고 멈춘 뜻을 인도하는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제공들은 '그대의 말이 옳다.'하였다.
그러나 평양백은 우연히 손님을 전송하려고 여기 와서, 제공들이 즐거워함을 보고 문득 그 지나침을 경계시켰으니, 이것도 알아두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여기 적는다.
1)비심(裨諶)····나가서 : 비심은 춘추시대 정나라 대부인데 계획을 잘 세웠다. 그런데 그는 들에 나가 생각하면 좋은 계책을 얻고, 도시에서 생각하면 실패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자산(鄭子産)은 외국과의 문제가 있으면 비심에게 수레를 타고 들에 가서 가부를 결정짓게 하여 정나라는 실패하는 일이 적었다는 것이다.《左傳 襄公 31年》
三峯先生 眞影賛 삼봉선생 진영에 대한 찬 1394
陽村 權近
온후(溫厚)한 기색(氣色)과 엄중(嚴重)한 용모(容貌)로다. 바라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 다가서서보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도다. 그 얼굴이 윤택(潤澤)하고 등이 펴진 것을 보면 화순(和順)한 덕(德)이 마음속에 쌓여 있음을 알겠다.
이것은 그 용모(容貌)를 말한 것이다.
환한 불길은 만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氣)는 긴 무지개를 뱉어 놓은 듯 하도다. 곤궁(困窮)할 때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귀(貴)하게 되어서도 그 덕(德)은 더욱 높았도다. 이는 그 마음이 넓어 스스로 얻은 것이니 반드시 의(義)가 축적(蓄積)되어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기상(氣象)을 말한 것이다.
선(善)을 좋아함이 독실(獨室)하였고 일을 처리함이 밝았도다. 관대(寬大)함은 넓은 바다와 같았고, 믿음성·결단성은 시귀(蓍龜 점칠 때 사용하는 시초와 거북)의 공정함과 같았느니, 그 국량(局量)과 규모(規模)의 방대(方臺)함은 또한 오활하고 고루(固陋)한자가 얻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재기(材器)를 말한 것이다.
성리(性理)에 대한 학문과 정치(政治)에 대한 공은 배척하여 우리 도의 정대(正大)함을 밝혔고, 정의(正義)에 입각하여 일어나는 나라의 운을 도와서 문장(文章)이 영원히 썩지 않고 감화(感化)가 끝없이 흡족하였으니, 정말 국가의 중신(重臣)이면서 후학의 스승이로다.
이것은 학문(學文)·사업(事業)·문장(文章)을 말한 것이다.
慶淑宅主 眞影賛 경숙택주 진영에 대한 찬 1394
權 近
남편을 섬김에는 순종(順從)하면서 의(義)롭고, 자손을 가르침에는 자애(慈愛)롭고 엄격(嚴格)하였으며, 친척(親戚)을 대함에는 은혜(恩惠)롭되 두루 미쳤으며, 노복(奴僕)을 거느림에는 엄(嚴)하면서도 관대(寬大)히 용서(容恕)할 줄 알았다. 이것은 비록 천품(天稟)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것이나 역시 덕(德)으로써 서로 대하는 데에서 오는 것일 게다.
題跋06 題眞賛後 진영찬 뒤에 씀 1394
오른쪽 진영찬(眞影賛) 두 편은 양촌 권가원(權可遠 權近의 字)이 지은 것이다. 찬양(讚揚)할 모습은 아니지만, 어찌 선생의 붓을 욕되게 하겠는가? 그 말에 과분(過分)함이 있으니, 나는 심히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종유(從遊)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서로 관찰(觀察)한 것 또한 깊을 것이니, 속일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최씨(崔氏)의 진영찬은 곧 그림 밖에서 정신(情神)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기록(記錄)하여 자손(子孫)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箋06 撰進朝鮮徑國典箋 甲戌 1394. 5. 30.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는 전
분의좌명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삼사사 동판도평의사사사 겸판상서사사 수문전태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판의흥삼군부사 세자이사 봉화백 신 정도전은 말씀 올립니다.
삼가 도승지 신 상경(尙敬)이 신을 위하여 구계(具啓)한 것을 받았사온데, 그것은 신에게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어서, 교서를 받들고 지어 올리는 것이 옵니다. 이에 부명(符命)을 잡고 도참(圖讖)1)을 받아 비로소 홍휴(鴻休 개국)의 운수를 열었으니, 강기(綱紀)를 세우고 베풀어서 자손에 대한 계책을 해야 하므로, 주(周) 육관(六官)2)의 이름을 모방하여 조선일대의 법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데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의 덕을 체 받으시어 왕위를 인(仁)으로써 얻으셨습니다.
국호(國號)를 정하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고, 세자[儲副]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셨습니다. 세계(世系)로 쌓이고 쌓인 경사를 나타내셨고, 교서로 관대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다스리는 방법은 상신(上臣)에게 책임지우시고, 세금[貞賦]은 실지로 공용에 쓰여 졌습니다. 예(禮)와 악(樂)을 제정하시어 귀신과 사람을 화하게 하셨으며, 무사(武事)를 강론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형벌로 간사한 이를 꾸짖고 난폭한 짓을 막으며, 공(工)으로 한도와 분량을 알맞게 하셨으니, 이에 창업(創業)하여 자손에게 이어 줌이 어려움을 보여, 충분한 준비로 수성(守成 창업을 이어 받아 안정됨)함을 오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서책[汗簡]에 실어 명산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용졸한 자질로 외람되게 전하의 지우(知遇)를 얻어, 저작(著作)의 자그만 재주를 가지고 생성(生成)의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려합니다만 그 성덕(聖德)과 풍공(豐功)은 진실로 다 기술하기 어려워 대강(大綱)‧소기(小紀)만을 모두 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경국전」을 삼가 써서 전(箋)과 함께 올리오니, 바라옵건데 성자(聖慈)께옵서는 한가한 시간이 있으시면 관람하십시오. 비록 성상의 밝은[緝熙] 학문에는 도움이 못 되더라도 시정(市政)에 있어서 조금은 취할 바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격절하고 송구한 마음을 이길 수없어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부명····도참 : 부명은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주는 표이고, 도참은 미래기(未來記)에 해당한다. 이는 곧 임금의 자리에 오를 운명을 받았음을 뜻한다.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 ‘고조(高祖)가 부명을 받고 도참을 받아 하늘의 뜻을 따라 나쁜 이를 베었다.’ 하였다. [高祖膺籙受圖順天行誅]
2)주육관 : 주대(周代)의 육관. 곧 천지와 춘하추동을 상징하여 천관은 총재(冢宰)로 전체 정사, 지관은 사도(司徒)로 교화와 농상(農商), 춘관은 종백(宗伯)으로 제사(祭祀)와 전례(典禮), 하관은 군정(軍政), 추관은 사구(司寇)로 옥송사(獄訟事)와 형벌(刑罰), 동관은 사공(司空)으로 수토(水土)를 관장 하였다. 《周禮》
兵書07 歷代府兵侍衛之題編修 역대부병시위지제편수 1394.6.24.
편집자) 태조실록 3년 6월 24일 조에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이 역대 부병(府兵)의 시위하는 제도를 엮었는데, 부병들의 시위하는 폐단과 지금 시행하는 부병들의 연혁(沿革) 및 해야 할 일들을 논하고, 도(圖)를 만들어서 올렸다.” 는 짤막한 기사만 있을 뿐 실전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대략 깃발과 북·징 등의 소리로 집단이 움직이는 제식훈련을 위한 괘도로서 역대의 병서를 참고하여 당시 실정에 적합하게 편수한 병서로 추정된다.
疏01 毋岳遷都反對上疏 무악천도에 대한 반대 상소 1394.8.12.
태조 3년(1394.8.12.)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대하여 판삼사사로서 공은 국가의 치란은 地氣와 地勢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자의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였다.
一. 이곳이 나라 중앙(中央)에 위치(位置)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스러운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王者)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一.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學說)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議論)이 모두 음양술수 밖을 지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협욕(狹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 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運數)는 지리(地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좇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項羽)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는 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와 양견(楊堅)의 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一.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都邑)하는 곳은,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晉)나라·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여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당나라·진(晉)나라·한나라·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인해 도읍을 하였는데 대송(大宋)의 덕이 한나라·당나라에 못지않았으며,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대요(大遼)·대금(大金)·대원(大元)이 다 도읍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一. 우리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平壤)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鷄林)과 완산은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王業)을 편벽(偏僻)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一. 전하께서 기강(紀綱)이 무너진 전조(前朝)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疏生)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休養)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의 자손도 함께 영원(永遠)할 것입니다.
一.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盛衰)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의 말한 바도 또한 옛사람들의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인사(人事)를 참고해 보시고, 인사가 다한 뒤에 점(占)을 상고(上古)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祭文02 告由文 新都 役事를 皇天后土神에게 고함. 1394. 12. 3.
임금이 하루 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인 공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新王都]의 공사(工事)를 시작하는 사유(事由)를 고하게 하였다.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덕(陰德)의 도움을 받아,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가 오고 개는 날을 때맞춰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臣) 단(旦)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冪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헤아려,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질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神)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時調01 新 都 歌 신도가1) 1394
녜는 양쥬(楊洲) ㅣ 꼬올이여,
디위예 신도형승(新都形勝)이샷다.
개국셩왕(開國聖王)이 셩대(聖代)를 니르어샷다.
쟛다온뎌 당금ㅅ경(當今景) 쟛다온뎌,
셩슈만년(聖壽萬年)하샤 만민(萬民)이 함락(咸樂)이샷다.
아흐디 롱다리,
알픈 한걍슈(漢江水)여 뒤흔 삼각산(三角山) 이여,
덕즁(德重)하신 강산(江山) 즈으매 만셰(萬歲)를 누리쇼서.
編輯者) 이 신도가는 漢陽都邑에 대한 불안한 민심을 解消하고, 새로운 도읍으로서 조선의 德治와 백성들의 敎化가 깃들어, 길이 이어갈 터전임을 노래한 것이다. 新都歌는 純粹 우리말로 지어진 것으로 頌禱詩중 時調体를 除外하고 國文學史에 있어서 龍飛御天歌와 함께 가장 훌륭한 作品으로 評價되고 있다. 金文基 慶北大 碩士 學位論文 「鄭三峯 文學硏究」
1) '신도가'는 조선을 개국하고 도성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했을 때, 새 도읍지에서 환희와 희망 그리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노래이다. 조선 초기의 창업을 기리는 노래의 하나로 속요체이다. 조선 건국의 핵심 주역이었고, 새로운 수도를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의 새 나라 조선에 대한 긍지와 낙관적인 전망이 예찬의 어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