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는 배가 들어옴보다 나감에 무게가 실린다. 만남보다 떠남이, 끝보다 시작을 먼저 느끼는 이유는 뭘까? 부산항은 북쪽으로 동해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남해와 이어져 먼바다로 떠나는 뱃길을 풀어놓는다. 부산이 아름답다면 바다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동해안을 따라 걸어 내려오며 고민 아닌 고민을 했었다. 동해안의 시작이 두만강 하구의 잃어버린 섬인 녹둔도부터는 알겠으나 끝은 어림이 가지 않았다. 바다가 시작과 끝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걸음의 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여행하며 알아낸 바로는, 조선시대는 기장이 경계이고 요즘은 부산항을 기점으로 한단다. 또, 행정기관마다 승두말, 울산의 울기등대로 저마다지만, 끝을 부산항으로 잡은 동해안 걷기는 가던 길에 있는 광안리 바다가 기분 좋게 취하게 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끝을 냈다. 항구에서 시작하는 걸음도 분명 기분 좋지만 이번엔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 고민이다. 어디에서 출발을 한담. 조선시대 동래부를 대신하는 동래구청? 아니면 지난번 걸음을 끝낸, 경상수영이 있던 광안리부터 이어볼까? 꼭짓점을 잇는 걷기여행에 자주 있는 일이지만 옛길을 찾는 여행이라 시작도 중요하다. 그러다 우선은 성문부터 나서야 하지 않겠나 싶어 동래읍성을 시작점으로 한다. 동래향교를 찾은 시각이 오전 10시30분, 명륜당에서는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네로 분주하다. 마치 예전의 향교 같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신발을 동여매며 일어선다. 바다를 보여주지 못한 미안함이었을까? 손뼉치기로 출정식을 대신하는 몸짓이 다분히 허풍스럽다. 그러나 목소리는 아내와 함께하는 만큼 우렁차다. ”부인, 갈 길이 멉니다! 떠납시다.” 동래읍성은 동래구 복천동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문과 암문, 인생문(人生門)의 문과 성곽이 있었으나 자동차시대에 들어서며 모두 헐렸다. 다행히 마안산에 있던 북문 주변의 성곽은 복원하였기에 부부는 읍성의 북문으로 향한다. 출발지로 삼은 향교는 읍성 밖에 있었으니 성곽이 아직도 있다면 읍성으로 들었다가 나가는 셈이다.
향교 뒷담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성곽이 지나던 오름, 언덕을 오르는 층층다리 이름이 ‘역사의 산책로’이다. 한양까지도 역사의 산책로이길 바라며 가쁜 숨을 내쉬니 복원한 장대(將臺)와 성곽이 나타난다. 매우 수려하다. ”쉼이요.” ”아니, 방금 출발하고는 무슨 쉼?” ”부인, 쉼 하기 좋으면 무조건 쉬어야지, 안 그러면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며 깔깔대는 아내. 말로만 쉼을 할 뿐 성곽을 타고 북문으로 향한다. 빼어나게 복원하여 출발하자마자 쉬게 해준 관계자에게 감사의 인사도.
북문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군졸이었다가 장군도 되어보고는 읍성을 나선다. 부부는 북문으로 나서지만 옛사람은 산을 넘어야 하는 이곳보다는 동래전화국 근처에 있던 서문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곳의 행정명이 '부산시 동래구'인데, 부산은 동래부에 속했던 포구였으니 '동래시 부산구'가 마땅함이 아닌가? 생각건대, 성곽만 사라지고 변했으랴. 땅이름도 매한가지일 테다. 상큼한 흙길로 동래문예회관을 나오니 본격적인 걸음이 기다리고 있다. 자동차와 함께하는 길이나 번잡지도 분주하지도 않게 검문소였던 부곡동 기찰(譏察)마을 삼거리에 닿는다. 삼거리답게 길이 갈라진다. 왼쪽으로 큰길을 따르다 남산동에서 대룡마을에서 오르는 고갯길이 하나이고, 오른쪽의 하정마을을 거쳐 작장마을에서 사배고개를 오름이 둘이다. 엇비슷한 두 길은 앞이 소로(小路)라면 뒤의 길이 대로(大路)에 속하지만 근대화하며 남산동 쪽이 먼저 국도의 위치에 오르는데, 동래온천이 한몫한다. 이에 반해 대로는 한동안 소외받다 고속도로가 지나자 큰길의 기능을 다시 잇게 된다.
삼거리에는 동래부사 민영훈의 공덕비가 있어 옛길을 찾는 이에게 반가움과 이정표의 구실도 함께한다. 1835년부터 1837년까지 재임 중에 큰 흉년이 들었고, 부사는 곡식을 나누어주고 세곡을 덜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비는 사배고개 중턱의 녹동마을에서 발견한 것을 옮겨놓았다. 옛 지도를 보면 근처에 십휴정(什休亭)이라는 정자도 있었으니 동래부사와 함께 쉼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덩달아 쉼을 한 걸음은 경부고속도로 부산 기점을 만난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던 고속도로가 오늘만큼은 묘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양과 동래의 옛길을 대신하는 고속도로로는 서울까지 네댓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부부는 십수 일을, 그것도 걷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차이만큼.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집필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나라의 큰길을 열 개로 구분하였고, 부산에서 한양으로 오르는 영남대로도 상세히 적어 놓았다. 현대에 들어서 고속도로에 기능을 내어주고 뒤란으로 나앉은 옛길. 걸어다니던 조선의 천릿길은 지금도 남아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잊힌 천 년을 찾아 나선 부부에게 고속도로는 옛길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 지금부터 옛사람의 걸음으로 시간여행 하듯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를 시작하는 거다. 구서갈림목을 지나자 도시의 분주함을 완전히 빠져나온다. 자동차의 통행도 별로라 걷는데도 좋다. 아예 부부를 위해 내어준 길은 브니엘고등학교를 지나 하정마을을 거친다. 하정은 고속도로 건너에 있기에 토끼굴을 지나야 하는데, 길이 좋아 기분 내키는 대로 걷다가 그만 놓치고 만다.
휘적휘적 걷는 도보여행과 달리, 길 찾기 여행에 생기는 난관 중 하나일 테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아내에게는 감추고 그냥 지나기로 한다. 그런데 대충은 또 다른 대충을 부를까? 실수로 성긴 머리가 또다시 길을 놓쳐버린다. 요금징수소에서 남산동을 다섯 배나 넘게 엉뚱하게 에돌고도 모자라 사배고개의 들머리를 찾지 못해 헤매는데, 초장부터 이러니 한양까지의 고생은 불 보듯 하련가? 미안하기도 하여 바보스레 툴툴거리기만 하는데, 아내는 첫날부터 엉터리는 곤란하다며 되돌아가자는 선뜻한 의견이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하정으로 되돌아가는 남편의 맘이 벌쭉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반대쪽인 침례병원으로부터 들어서는 마을. 나무숲에 포옥 감긴 길이 너무나 예쁘다. 차를 세워 달라고는 사진에 몇 장 담으니 기사가 속사포 질문을 쏘아댄다. 한 마디 이해하기 전에 다음 말이 연이으니 짧은 물음이지만 부부에겐 속사포다. ”모 할라꼬 댕기는데?”가 내용.
모두 알아들었다 싶은 경상도 말은 막상 대꾸하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여정과 하정으로 가는 연유를 설명하는 사이 마을에 도착하는데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겠단다. 그러며 ”조심해서 다니라”라고만 하고는 힁허케 떠난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부부. 찢어진 길을 짜깁기하는데 실과 바늘을 선사해준 택시 기사에게 이렇게나마 인사를 드린다. 영남대로 첫 번째 역인 황산도(黃山道)의 소산역(蘇山驛)이 있어 분주했을 마을은 한적하기만 하다. 정적을 깨듯 골목을 한 바퀴 돌아 들길로 접어든다. 지도에는 이곳부터 요금징수소까지 이어지지 않는데 들길도 고속도로와 만나며 역시 끝이 난다. 혹시나 산 쪽으로 올라보지만 점차 좁아져 잡목을 헤쳐야 할 지경이기에 다시 내려와 고속도로 옆의 수로를 따르기로 한다. 길은 고속도로가 빌려간 듯하니 첫 번째 끊김이다. 자투리 산자락을 수로로 살짝 넘으니 끊긴 길을 이어준다. 구르지 못하는 바퀴는 많지만 두 발로 가지 못할 곳은 없음을 실감하니 수고했다며 흙을 밟는 행운을 준다. 흙길은 걷는 이에겐 무시무시한 고속도로와 섞이며 끝이 난다. 여기에서 요금징수소를 향해 직선으로 이어야 한다. 진입로건, 지하통로건 들어서면 들어선 만큼 헛걸음을 하게 된다. 물론 부부의 경험이다. 요금징수소로 가는 길녘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덩그렇게 서 있다. 곁눈질로 지나려는데 글자가 새겨있다. 살펴보니 이도 동래부사의 선정비다. ‘부사 조재민 청덕선정(淸德善政) 만고불망(萬古不忘)’이라 읽어 내려가다 다음 한자에서 서서히 막혀버린다. ‘숭정후3신미9월(崇禎後三辛未九月)’, 신미년 9월은 알겠으나 숭정이란 연호도 생경하다. (‘숭정’은 명나라의 연호로 인조 6년인 1628년부터 사용하였고 ‘숭정 후 3 신미’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여 세 번째 도래한 신미년으로, 1751년이 된다.) 비의 끝은 ‘감관 최준혁’으로 끝난다.
한자를 배우지 못한 나와 어설프게나마 교육을 받은 아내가 머리 맞대고 풀어보지만 두어 개의 한자는 끝내 해독해내지 못했다. 옛 지도와 옛 문서에서 길을 찾는 부부에게 한자의 취약함은 큰 장애이다. 당장 《대동여지도》나 《대동지지》를 풀어내는 것도 벅찬데, 어쩌랴 누굴 탓할 수도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해야겠지. 걸음은 요금징수소 뒤 샛길로 이어지다 앞서 걸었던 고속도로를 건너온 찻길과 만난다. 이곳에서 개울을 건너자마자 좁은 흙길로 들어선다. 두 번째로 놓친 길이다. 포장이 패여 흙과 반반인 이 길로 들어서면 토끼굴로 고속도로를 다시 건넌다. 도로 밑의 통행로인 토끼굴은 토끼굴처럼 좁고 컴컴하다며 붙여진 말로, 물이라도 고여 있다면 곤욕을 각오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질퍽한 흙탕물. 위로는 자동차를 위해, 이곳은 사람이 다니라 만들었단다. 신발에 묻은 질펀한 펄을 심통스레 털어내니 시골길이 위로해준다. 노포마을을 지나 사배고개 들머리에 닿아 택시를 탔던 점방의 평상에 지도를 펼치고는 손가락으로 지나온 길을 그어본다. ”팔자네!” 아내가 대뜸이다. ”내가 길 잃고 다닐 팔자란 말야?” ”아니 우리가 꼭 8자로 걸었다구.” ”……” 첫날부터 헛걸음에 비싼 수업료도 톡톡하게 치렀다. 옛길을 걷는다면 1:5만 지형도는 있어야 하며 영남대로에 필요한 도엽은 21장이다. 지형도는 수원에 있는 국립지리원에서 사야하는 불편이 있으며 우편구입을 하려면 도엽명을 알아야 한다. 장당 가격도 비싼 편이다. 부부는 경비를 줄이고자 인터넷 지도를 인쇄하여 이어 붙였는데, 길이만도 수십 미터에 달한다. 덕분에 상세한 지도를 갖고 다니게 되었지만 곳에 따라 듬성듬성 비거나 부정확하기에 이처럼 길을 놓치곤 했다. 다시는 실수 없기를 다짐하며 물러지는 발바닥을 달래고는 사배고개를 오른다. 이런 사정을 알아주었는지 사배고개는 흙을 밟는 여유로움을 주며 고생한 부부를 한껏 안아준다. 주변에는 산딸기가 지천이라 걷게만 해 주질 않으니 이처럼 흥겨운 소풍 길이 또 어디 있담? 호젓함은 긴장한 마음마저 녹여 아내와 노닥거리는 여유도 준다. ”송 선비 이번 과거길이 몇 번째인가?” ”난 처음일세. 김 선비는?” ”과거는 무슨, 난 국밥이나 팔아볼까 올라가는 걸세.”
아내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맑다. 걸음이 넘는 건지 재잘거림이 넘는지 모르게 고속도로 구름다리를 건너니 어느덧 마루. 대룡마을에서 힘겹게 오르는 자동차와 함께 양산 땅으로 들어선다. 마루에서 보니 동래는 2차선인데 양산은 4차선으로 넓혀진 재미있는 모습이다. 또 부부가 오른 흙길과도 대뜸 대비가 된다. ‘오르막은 걷는 이의 길, 내리막은 자동차의 길’ 같은 고개이나 오르내리는 느낌이 천지 차이이다. 그런데 곁의 고속도로가 어쭙잖은 감상은 하지 말란다. 고속도로는 고개를 넘지 않고 산자락을 송두리째 파내어 지난다. 수십 미터 협곡을 만들어 지나는 길, 현대를 대표한다는 고속도로이런가. 내려다보는 협곡이 어마어마하다. 지난날의 개발이 한편으로 파괴였다는 말이니 흙을 밟고 오른 만큼 순식간에 답답해져 온다. 사배고개는 백두대간의 낙동정맥의 줄기이다. 일제강점기 때 왜인은 민족의 지맥을 끊는다고 쇠말뚝을 박았다. 이번에는 제 손으로 산허리를 끊어내어 아프게 한다. 지금이라도 굴을 만들어 자동차를 보내고 산을 덮어주자. 자연의 질서를 위해, 작게는 동물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산이 아프면 사람도 아프게 된다. 내려서는 고개에 의문이 매달린다. 길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어지러움을 눈치 챈 걸음도 덩달아 설렁설렁 이기에 내송마을에서 쉼을 하며 고개를 넘은 심란함을 닦는다. 아내는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일어서더니만 잠시 후 돌아온 표정이 참으로 묘하다. ‘재래식이라서 그런가?’ 말 그대로 뭐 안 닦은 얼굴로 입술 삐 집어 하는 말. ”배터리가 퐁당 했어.” ”……” 부부의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툭툭 빠지는데 배터리만 퐁당 했단다. 에궁, 두고 갔으면 그만인데 저 덜렁거리는 성격. 집에 아이들만 남겨둔 여행이라 전화는 필수품인데 어쩐대. 출발 전부터 이 여행이 안 해도 될 부부 쌈질의 원인이 되지 않나 우려했던 만큼 속상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길을 재촉한다. 멋쩍어하는 아내가 말을 붙여도 머릿속은 어수선하니 툴툴대기만 하는 남편. 그러다 길을 잘못 들었지만 더 좋은 추억을 남겼듯이, 일이 꼬인다고 낙담만도 그랬기에 맘 고쳐먹으니 양산 들머리까지 마중 나온 서비스센터가 기다리고 계시다. 오래된 전화기라 걱정스러웠지만 단숨에 해결하니 역시 길은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시청을 지난 남부사거리에 도로원표가 보인다. 원표(元標)는 거리의 기준점으로 삼는 표석으로 ‘양산 20km’라는 이정표라면 그곳부터 이곳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원표는 대부분 자치단체의 청사에 있으니 도보여행을 하며 참고해 둘 표석이다. 시내구경을 하며 버스터미널에 앞에 있던 읍성 서문을 나선다. 양산읍성은 터미널 북쪽인 중부동 일대에 있었다. 읍성을 벗어나며 국개다리, 구읍포교로 불렸던 영대교를 건넌다. 해동지도에는 곡포토교(曲浦土橋)로 적혀 있다. 동래에서 한양을 가는 과거길의 선비, 부보상(負褓商) 등 양반 천민 가릴 것 없이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한양길로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부부 역시 한양으로 오르는 길이기에 옛사람처럼 건너 양산향교로 들어선다.
향교의 출입문은 동래처럼 누문(樓門)으로 되어있는데 경기지역에서는 보지 못한 형식이다. 누문을 미는데 열어주지 않아 눈으로만 올라보고 돌아서니 학동들의 낭랑한 글소리가 부부를 배웅해 준다. 길을 틀어 범어리로 들어서다 멈칫하는 걸음. 이런, 갓길이 없다. 자동차가 다가오면 길섶으로 내려서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앞으로 얼마나 겪어야 할까? 조금의 갓길도 없는, 사람은 외면한 채 자동차만을 위한 이런 길을. 다행히 잠깐으로 끝나지만 자동차 말고는 다니지 말라는 길도 본다. (현재 이 구간은 4차선으로 넓혀졌다.) 걸음을 달래던 길은 원동으로 자동차를 보내고 샛길로 들어서니 땅거미가 슬금슬금 깔린다. 어둠은 저녁을 준비하는 밥 내음으로 변해 종종거리게 하더니 어느덧 물금에 닿게 한다. 도착한 시각이 7시 25분, 설렘의 첫날을 무사히 마친다. 잘 곳부터 잡아놓고 밥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주린 배를 채운다. 시작치고는 너무나 좋았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길눈 씻기> - 하정마을과 요금징수소 사이에서 고속도로 갓길을 잠시 지난다. - 금정문화회관에서 하정마을까지 남산중학교-침례병원-동래베네스트골프장 방향도 좋다. - 걷기 좋은 구간 ; 구서갈림목-하정마을-노포마을-사배고개 마루까지 8.4킬로미터 <여행적바림> - 구서갈림목부터 양산 다방동까지 15km 구간동안 밥집이 없다. - 옛길을 걷는다면 1:5만 지형도가 필요하며 영남대로에 필요한 도엽은 21장이다. 이 지형도는 수원 국립지리원에서 구입해야 하는 불편이 있으며(우편구입은 도엽명을 알아야 한다.) 장당 가격도 비싼 편이다. 부부는 경비를 줄이고자 인터넷 지도를 인쇄한 부정확한 지도를 들고 다녔기에 길을 자주 놓치곤 하였다. 요즘에는 한 권의 책으로 된 1:5만 지형도가 책방에 나와 있다. - 잘 곳; 양산, 물금
자유촌 부부. (jayucho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