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가볍게 옷차림은 정중하게
이미연(영문80)
회갑을 지낸 동창들이 교내 박물관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곳에는 전통 자수를 더한 고전 의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박물관에는 해설을 위해서 현재 4학년 재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을 잘 때 베개 양옆에는 남자의 것은 네모지고, 여자의 것은 동그란 것으로 만든 수장식이 있어 화려함을 더했다. 하늘을 뜻하는 네모와 땅을 뜻하는 원형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동물이나 식물이 화사하게 수를 놓았다. 또 관직에 따라 하는 네모난 흉패는 유교의 질서를 존중하는 의미로 각각 허용되는 것이 달랐고, 그래서 왕의 의상은 용의 발톱이 다섯 개이어야 하고, 다른 왕족은 그 이하인 것으로 옷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서민들이라도 어려서 입는 의상은 화려한 색동옷을 허락했고, 결혼할 때만은 궁궐에서 입는 활옷의 간결한 형태의 혼례복을 허락했다고 했다.
스탕달의 소설 제목인 「적과 흙」은 군인의 의상 색깔과 성직자 의상의 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출세의 두 사다리를 색으로 드레스 코드를 표현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입었던 옷은 아버지가 다니던 미국부대(미군부대)로 온 구호 물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중에서 보기 어려운 예쁜 옷들이었지만 그것이 누군가 입었던 옷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어려서 고전 무용을 해서, 무대의상으로 조명이 비추면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달린 저고리와 치마를 입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현대 무용을 했기에, 나는 360도 회전하면서 펼쳐지는 치마를 입기도 하고, 뒤에 날개가 달린 흰 공단으로 만든 드레스 풍의 천사 옷을 입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시는 한복을 입기도 해서, 여름이면 갑사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겨울이면 공단으로 만든 치마저고리와, 토끼 털 조끼를 갖추어 입기도 했다.
아버지는 수입해온 옷감을 필 단위로 구입했었다. 같은 옷감으로 양복과 외투는 아버지의 것, 원피스와 투피스 정장은 어머니의 것을 해 입었고, 자투리로는 내 외투를 맞춰 입기도 했다.
두터운 외국 잡지에는 온갖 옷들을 주문하라고 사진이 있는데, 거기에서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양장점에서 내 몸에 맞는 단 하나의 옷을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을 천연색 사진기로 찍어서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남겨 주셨다.
박물관 투어를 설명하는 재학생인 학생을 바라보면서, 그 당시의 꿈만 많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이 말만 많은 나이든 선배들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70년 대 학교 앞 양장점을 지나치노라면, 이즈음 외국의 명품 거리를 걷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었고 호기심이 일었었다. 학교 앞 많은 옷집은 학생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중년 여성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라 들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그 비싼 가게들의 예쁜 옷 때문이 아니라 청춘이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괜히 사치한 학교라는 별명이 따라다닌 셈이었다.
나도 마음먹고 졸업하기 전에 그 거리에서 바람머리 스타일로 파머를 하고, 원하던 옷집에서 원단을 고르고 샵 매니저가 스케치 북에 내 의견에 귀 기울여 가며, 디자인을 그려가면서 디테일을 완성한 나만의 옷을 입어본 추억도 있었다.
졸업 후 취직을 하고는, 백화점 폐점 시간 가까이에 달려가서 원하던 옷을 사고, 명동 거리에 즐비했던 구둣가게에서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사기도 했다. 교복만 입던 나는 그 시간만큼 모양내는 일을 미뤄온 셈이라 그런지 막힌 댐이 터진 것처럼 한 동안 신발과 가방 그리고 옷에 대한 사재기를 멈출 줄 몰랐다.
결혼 후 시댁을 방문할 때는 집에 들어서면 갈아입을 틈도 없이 시동생들과 시 부모를 위해 부엌으로 향해야 하니, 시어머니는 번거롭게 차려 입지 말고, 편한 차림으로 오라고 내 드레스 코드를 정했다. 반대로 엄마는 친정에 올 때는 외출복을 꼭 입고 오라고 내게 드레스 코드를 요구했다. 자동차에서 내려 집 마당에 들어서면, 이웃들이 볼 기회도 없으련만 엄마는 친정식구들도 보고 또 누가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남편과 아이의 옷도 거기에 준하여 입고 가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를 손님처럼 맞이하기 위해서 남편과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명절 음식 외로 입맛에 맞게 냉장고에 잘 준비해 두었다. 엄마의 의도를 알고 나니, 내가 상대를 대접하는 방법에 만나는 사람을 위한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해 런던 여행에서 딸은 맛있는 식사와 애프터티를 대접한다고 몇 군데 예약을 했었다. 그 식당들은 드레스 코드를 요구했기에, 따로 준비를 해 가야 했다. 여행은 내게도 딸에게도 일탈이었다. 해외 여행가면서 굳이 드레스 코드가 필요한 곳을 넣어서 여행 계획을 짠 것이었다. 실제로 살짝 번거롭기는 해도 여행의 묘미도 살리고, 좋은 추억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몸을 편하게 해 주는 게 좋은 옷이라 생각하지만, 친구들은 자신의 감성을 나타내는 옷을 다양하게 입고 왔다. 우리끼리는 격조 있게 서로를 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박물관에만 옷에 대한 자료들이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내에는 청춘이란 옷을 입은 후배들과 중후한 세월의 옷을 입은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지만, 친구들은 자신들의 앳된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캠퍼스의 옛 길을 찾아 누볐다. 맛있는 이탈리아 식사를 우아하게 마쳤지만, 학교 앞 오징어 튀김을 먹을 생각에 들뜬 우리들은 문리대 문학관 앞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새처럼 종알거리고 있었다.
서로의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그 친구들을 때때로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마음은 가볍지만, 옷차림은 정중하게 차려입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을 대접하고 또한 친구들도 대접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소꿉장난 같은 그런 추억들이 모이면, 옷은 상상의 세계로 가는 날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첫댓글 수필집 원고 일번으로 도착했어요. 수정: 상 11행 미국->미군, 이곳에서 댓글로 수정할 곳은 수정하셔도 됩니다. 저자나 독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