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교회 편
* 지방 교회 (백과사전 500-501 쪽)* 906
*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
1853 W. Ball Rd 애나하임 캘리포니아 92804
작은 무리(The Little Flock) 또는 각지(지방) 교회 등으로 알려진 이 모임은 일반적으로는 그의 영어 이름인 워치만 니(Watchman Nee)(1903-1972)로 알려진 니 수추(Ni Shu-Tsu)에 의해 중국에서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Nee는 그의 할아버지가 회중교회 목사이고 그의 부모들은 신실한 감리교 신자들인 중국인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 여 사람들을 깨우는 목적을 가진 징치는 자라는 것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려고 본래 이름인 니 수추(헨리 니)를 니 토생(워치만)으로 바꿨다.
이름뿐인 종교적 청년기로부터 그는 감리교 복음전도자인 도라 유(Dora Yu)에 의해 회심 되었고, 곧이어 독립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Magaret .E .Barber)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녀를 통해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와 폐쇄파 플리머스 형제회의 저술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교회조직에 있어서 다비의 반교파적 접근을 채택했고, 곧이어 소규모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 무리의 인도자로 부상했다. 1920년대 말에 그는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이끄는 형제회의 한 부류와 접촉을 가졌고, 그들의 초청으로 1933년에 영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사건으로 인하여 니와의 관계를 곧 단절시켰다. 그 이유는 니가 그들에게 허가받지 않고 오스틴 스팍스가 관장하는 비형제회 모임인 HOCF(Honor Oak Christian Fellowship)와 교통을 했기 때문이다.
복주에서의 소규모 시작으로부터 니의 운동은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넓은 지역을 여행하며 기독교의 하나됨의 기본적인 표현으로서 (분열적인 교파주의에 맞서) 각 도시마다 오직 한 교회(회중)만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근거한 회중들을 만났다.
1922년부터 1952년(중국공산주의 혁명이 기독교의 확산을 차단했던 때) 사이에 200개 이 상의 교회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 니는 또한 50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그 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교회에 관한 그의 성숙된 견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사역의 재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또 한 『영에 속한 사람』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된 사람의 세 부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발전시켰다.
1949년에 권력을 장악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니를 (또한 그와 제휴함으로 관련이 있는 교 회들을) 고소했다. 그 이유는 니가 미국과 국민당 정부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상해에서 축출 되었고, 그 후 1952년에 투옥되었다. 그는 1972년 감옥에서 순교했다.
1930년대에 니는 치푸(Chefoo)에 있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장로가 된 전 개신교 목회자(former Protestant minister)인 윗트니스 리를 동역자로 얻었다. 그는 1932년에 니의 사역에 동참했고, 몇 년 내에 니의 가장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폐결핵과 싸우던 3년간의 부 재 후에 윗트니스 리는 중국혁명 직전인 1948년에 전시간 사역자로서 니와 재결합 했다.
니는 윗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는데, 그곳의 교회들은 번성하여 태평양 연안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성도들은 그 운동을 서부 해안으로 가져왔다. 윗트니스 리는 1962년에 미 국으로 이주해서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LSM)를 설립했다. 그는 각지(지방) 교회들 가운데 인도적 지위에 있는 전시간 사역자로 인정받아온 이래, 각지(지방) 교회의 확산을 위해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는 또한 워치만 니의 저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몇가지 신학적 강조 점들을 소개함으로 그 운동 안에서 혁신을 위한 근원이 되었는데, 예를 들면, “기도로 말씀먹 기” “주의 이름을 부름“과 같은 것으로 이런 몇 가지 실행들은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조직
지방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 교회생활의 단체성,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머리되심을 주장한다. 주된 강조점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교회(회중)생활의 의무를 분담함에 있어 각 지체들의 기능과 책임에 관한 것이다. 교회생활 즉 함께 모임(일주일에 여러 번)의 생활에서는 실제적인 표현을 위해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것을 거절하는 본이 세워져 왔다. (지방)교회들은 한 도시에 하나인 독립적 회중들의 모임으로서 조직된다. 각 회중들은 그들이 인정하는 인도자들 중에서 나온 2-5명의 소규모 장로그룹에 의해 인도된다.
그들은 회중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일반적인 행정 일을 한다.
또한 사도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소규모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교사와 리더쉽 훈련가로서 지방 교회들을 순회하고 교회가 아직 없는 도시에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기도하는데 다소간 인정된 사역자들은 공식적으로 그들의 수고들을 독립된 사역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윗트니스 리의 경우에 그의 사역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하나되었고, 그것은 현재 지방 교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도적 노력(endeavor)에 속한다.
다비의 반 교파적 자세가 문제를 일으켰던 플리머스 형제회처럼 니의 운동도 분파적인 이름을 갖지 않았다. 지방 교회들은 그들 자신을 다만 “교회”라고 부른다. “지방 교회”라는 말은 편의상의 호칭이지 단체적인 이름이 아니다. 지방 교인들은 그들 자신들을 “(어느 도시에 있는) 교회”라고 부른다.
지방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도시에 교회(회중)를 세우고자 하는 교인들의 자발적인 이주에 의해, 또는 사도적인 기능을 가진 사역자들에 의해 확산되어wu 왔다. 미국에 있는 교회들은 처음에 대만으로부터 이주해 온 성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윗트니스 리의 권고로 각지(지방) 교회들은 새로운 전략을 채택해 왔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의 원칙” 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새로운 모임을 탄생시킬 단일한 목적으로 한 작은 무리의 교인들이 새로운 지방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신앙
지방 교회들은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풍부한 저술 안에서 발견되는 가르침을 따른다. 간결한 요약은 (미국종교백과사전 중 ‘신조(Creeds)'안에서 재 인쇄된) 『지방 교회의 신앙과 생활』이라는 소책자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선언은 프리머스 형제회와 비슷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님의 처녀탄생, 대속적인 구속,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분의 재림, 성경의 축자영감 등의 신앙을 확증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특별한 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하나를 취급하는데 주어진다. 그들은 종파주의, 교파주의, 범 교파주의를 모두 거절하고 각 지방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의 하나됨을 주장한다. 지방 교회들은 자신들을 성경적인 교회의 회복 역사라고 생각한다. 사도시대 이래 완전한 교회생활과 그 하나됨이 상실되었지만, 회복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되었고, 진젠돌프 백작과 모라비안(Moravians)형제들, 요한 웨슬리와 감리교도들, 플리머스 형제회의 경건주의 회복을 통해 계속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각지(지방) 교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예를 들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누림)과 성경에 근거한 교회생활의 실행이 회복되고 있다고 여기는데, 회복의 일부 요소들은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예를 들면 “기도로 말씀 읽기”인데 이것은 기도할 때 성경 말씀을 사용하는 경건한 실행이다. 기도하는 중에 개인이나 단체들은 성경 말씀 중의 어떤 단어들이나 구절들을 택해서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찬양이나 감사의 말을 자주 곁들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체험이 성경말씀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것이다.
실행의 명칭 자체가 가르키고 있듯이, “주의 이름 부름”은 “오 주 예수”라는 문구의 반복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다.
“불태움(Burning)"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접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음의 메시지로 감동시킬 때 그 사람은 ”불태워진 것“으로 본다. ”불태움“은 또한 어떤 사람의 그리스도인 이전의 생활이나 미지근한 헌신의 상태들이 불 속에서 태워지는 실행이다.
문자적으로 재 침례인 “장사지냄(burying)"은 믿는 이들의 보다 새로운 단계의 헌신을 상징하며, 각지(지방) 교회 성도들은 한 번 이상 침례 받을 수 있다.
구성원
1991년에 지방 교회들은 6개 대륙에 교회(회중)들이 있었다. 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들 안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있다. 대만에 200여 교회 6만 여명의 성도들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는 265개 교회 1만 5천명 이상의 성도들이 있다. 남 아메리카와 중앙 아메리카의 스페인어 모임 안에 1만 6천 5백 명이 있다. 유럽,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다. 혹독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에도 생존하는 성도들이 있으며, 이 운동은 지난 기간 동안 실제로 수십만의 성도들에게 확산되었다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지방 교회들은 동유럽과 러시아에 복음 사역을 시작했고, 1992년에 모스크바와 성 페테스브르크에 교회가 생겼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사역을 발전시키고 있다.
특기사항
1970년대에 지방 교회들과 보다 큰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 단체 안의 일부 유력한 대변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1980년대의 일련의 법적 조치의 과정 속에서 절정에 달했다. 일부 저술가들은 논쟁을 통해서 신흥종교들을 소위 “이단(cults)"이라고 공격했으며, 각지(지방) 교회에 대해서도 여러 권의 책들이 쓰여졌고, 여러 항목들이 그리스도인 “이단퇴치” 문서들 안에 등장했다. 이에 각지(지방) 교회들은 문서에 의한 명예훼손과 그들의 사역이 불공정한 비판들에 의해 손상 당했을 때, 다른 방법으로는 사과를 받아내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며, 지방 교회들은 여러 개의 소송 사건을 통해 각지(지방) 교회를 공격하는 모두에게 비난책자의 회수와 사과문을 받아냈다. 「God-Men」책을 출판한 사이비이단연구소( the Spiritual Counterfiets Project )에 관한 사건은 법정 판결까지 갔고, 지방 교회들은 1985년에 사이비이단연구소가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1천 1백만 불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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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은 플리머스 형제회와 비슷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노선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가 무엇인가 알 필요가 있다.
독립교회파 근본주의자들 계열 (Independent Fundamentalist Family)
(백과사전 105쪽 일부... 107-109쪽 해당부분)
근본주의는 19세기 초에 개신교 안의 한 보수주의적인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사회학에서부터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지적인 사상의 새로운 흐름의 다양성을 흡수해온 소위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의문시 되어온 몇 가지 필수적인 그리스도인의 교리에 대하여
성경적인 권위와 신실성을 확증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근본주의로 알려지 게된 것은 영국의 교사이자 신학자인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의 사 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182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한 그 운동은 초기의 청교도나 웨 슬리파 운동보다도 더 철저한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꾀한 것이었다. 청교도인이나 웨슬리
파가 했던 것과는 달리, 이 새로운 운동은 다만 기존의 교회를 정화하거나 부흥시키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사도시대 교회의 재현을 추구했다. 사도적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주된 방식들은 성경에 집중함, 성경적인 생활양식, 성경적인 신학, 성경적인 교회론의 채택에 있었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
미국 기독교 안의 운동으로서의 근본주의의 출현은 통상 1910년으로 추정되며 「근본: 진리 의 간증」(The Fundamentals: A Testimony of Truth) 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소책자의 발 간에서 비롯되었다. 두 명의 부유한 장로교인인 LA의 석유업자 라이몬(Lyman)과 밀턴 스 튜어트(Milton Stewart)에 의해 출판된 소책자들은 무료로 배포되었고, 1920년대에 근본주 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간의 논쟁의 근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근본주의란 현대 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신 신학과 그 과학적인 탐구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기준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의 안에 많은 진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제한적이다. 근본주의의 필수적이고 긍정적인 본질과 그 운동은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며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는 한 지나가는 단계일 뿐이다.
근본주의에 대한 최선의 정의(form)는 성경 진리에 관한 어떤 사상에 대한 확증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초기에는 이 글의 처음에 언급한 존 넬슨 다비의 시대주의 신학에 속한 미국 개신 교회들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 적인 근본주의는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집결점(a rallying point)이 되었고, 19세기 후반에 미국에 있는 기독교의 주요한 주장 중 하나였다.
19세기 중반에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의 사상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천년왕국 전의 문자적 재림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다비의 시대주의적 신학에 대한 공개적인 자각을 가져왔다. 미국에서 다비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받되 그들 자신의 교회를 떠나 형제회 와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탁월한 그리스도인 인도자들이 시대주의 신학을 위한 육성 해설자가 되었다. 복음전도자인 무디(Dwight L. Moody)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는 형제회 복음전도자인 헤리 무어하우스(Hary Moorhouse)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아 왔다. 인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역자들인 고오든(Adoniram J. Gorden), 피어슨(Arthur T. Pierson), 무어 해드( William G. Moorehead), 부룩스( James J. Brooks)도 형제회적인 사고로 바뀌어졌다.
1869년에 천년왕국 관련 정기간행물인 「광야의 길잡이( Waymarks in the Wilderness)」와 관계 있는 한 무리의 사역자들이 성경 공부를 위한 첫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후에 믿는 이들의 모임(BMBS)이 되었다. 그 사역자들은 ‘성경의 축자영감, 성령의 인격성, 희생의 속죄, 그리스도 의 제사장 직분, 믿는 이들 안의 두 본성, 하늘로부터의 주님의 인격적이고 내재적인 재림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하여 모였다. 1883년에 연례 모임이 온타리오에 있는 나이아가라 호수(Niagara -on-the-lake)로 옮겨졌고, 그래서 “계시를 위한 나이아가라 회의“로 알려졌다.
‘나이아가라 회의’의 목적 중 일부는 에클레시아, 곧 교회에 관한 본래의 개념을 나타내기 위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회의는 사역자들이 다비가 교회라고 불렀던 것 즉 교파적 체계로부터 자유케된 믿는 이들의 모임을 형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그들의 주된 노선인 교파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비가 말한 바, 비공식적인 친밀감과 교리의 순수성이 교회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위해 만났다. 그들은 형제회에서 발전되어온 성경읽기를 실행했고, 세대주의와 종말론에 대한 다비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890년에 근본주의의 전과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나이아가라 회의’는 “강령적 선언문(creedal statement)"을 채택한 것이다. 14개 조항으로 된 이 선언문은 그 운동의 장래의 진로에 있어 결정적인 것이었고, 그 운동의 우선 순위를 정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전 천년 재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에 대한 해답으로 주장되었다. 그 회의는,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점점 적어지고 있고, 인간의 발전으로는 참된 인간의 진보를 가져올 수 없으므로,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전 천년주의 자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회의는 다비의 사상( 특별히 종말론에 있어서)과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발전되어 온 보수 개혁 사상인 프린스톤 신학으로 불려지는 것의 혼합에 의해 주도 되었다. 프린스톤 신학은 다윈주의와 자유신학의 도전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언어를 발전시켜 왔었다. 그것은 성경이 (그 원본에 있어서) 잘못이 없으며, 성경은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성경의 모든 책들은 동일하게 영감으로 된 것임을 확증했다.
‘나이아가라 선언’은 여섯 개 항목에서 상세하게 주장된,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피 에 의한 구원에 대한 개혁 신학적 강조점을 포함한다. ‘나이아가라 회의’에 참석한 거의 대부분은 개혁적 유산의 교회 출신들이므로 나이아가라 선언에 대한 대부분의 지지가 개 혁주의 유산의 교회들(침례교, 장로교, 개혁교회, 조합교회)에서 나온 것은 놀랄 일이 아니 다. 1920년대에 근본주의는 침례교회와 장로교회 안에서 주로 싸움이 계속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또한 얼마간의 지지를 제공해 왔던 다른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이차 축복 ( 성결 운동의 주된 사상- 이차 축복은 믿는이들이 믿고 온전케 된 후 생활을 위해 갖는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체험)과 재림주의자들의 두가지 사상인 혼의 잠듬과 소멸(soul-sleep and annihilationism)을 거부했다. 혼의 잠듬은, 혼이 사망 때부터 몸의 부활까지 무감각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멸주의는 악한자가 영원한 고통 안에 사는 것이 아니고 멸망한다( destroyed)는 것이다. 일부 감리교도와 재림 주의자들은 1920년대에 “다섯가지 원칙”에 동의하긴 했으나 감리교인과 재림교인들은 근본 주의자들의 운동에서 두드러지진 않았다.
14개 나이아가라 선언문 중에서 다섯 개 항목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신앙으로 채택되었다. 알려진 것처럼, 다섯 가지 근본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격(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포함),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리적 속죄,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실제적 부활과, 재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재림이다. 이러한 항목들은 에큐메니칼 강령인 니케아와 칼세돈 신조의 진리로 간주된다.
1920년대에 현대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논쟁의 정점에서, 그러한 원칙들은 논쟁의 핵심적인 항목들이 되곤 했다. 나이아가라 회의 인도자들의 단체적 의식은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여러 개의 성경 연구소들 안에서 결정화되었다. 이것들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시카고에 있는 무디 성경 연구소였다. 그외에 LA 성경연구소(BIOLA), 필라델피라 성경연구소, 토론토 성경 훈련학교,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북서부 성경훈련학교를 포함한 다른 연구소들은 그러한 목적에 기여했다. 이러한 학교들은 근본주의를 제도화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훈련을 도왔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근본주의 인도자중 가장 유력한 사람은 아르노 게이벨레인(Arno E.Gaebelein)인데, 그는 세대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후 그 교회를 떠났던 감리교 신자였다. 그는 1899년에 ‘우리의 소망’(Our Hope)이라는 잡지를 출판했다. 그는 또한 현 시대에서 단일한 출처로는 다비 신학에 있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위한 작업의 재정을 도왔다.
새로운 생활이 1910년에 ‘근본’(Fundamentals)이라는 출판물과 함께 그 운동 안으로 흘러 들어갔고, 다비 신봉자들의 근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10년 전에 출현된 자유주의와의 직접적인 충돌이 있게 되었다. ‘근본’(Fundamentals)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인간의 타락에 대한 칼빈주의 교리, 임박한 재림에 대한 나이아가라 회의 인도자들을 따랐다. 현대주의자들의 의견(thinking)이 차츰 증가하면서, 논객들은 미국 개신교 내에서 사상의 분열을 주도했고, 그러한 분열은 새로운 교파들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현대주의자들의 사고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신학과 세속적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가 발견한 것들을 토대로 한 성경 연구인 고등성경비평에 의해 두드러졌다.
근본주의자들의 논쟁에 의해 생긴 새로운 교파들은 두 종류에 속했다. 첫째는, 여러개의 대형 개신교단들에서 나온 근본주의자들 교회들인데, 그들은 나온 모체 교단의 교리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의 사고방식(mind-set)을 받아들이는 것만 모체 교단과 다르다.
둘째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 전체를 내포하며 이 글의 초기에 거론된 플리머스 형제회의 참된 미국식 형태인 새로운 종교단체들의 출현이다. 그들이 자유로운(loose) 교제 안에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초교파 교회들로 일컬어져 왔다. 그들은 나이아가라의 개혁신학적 강조점을 인정함으로 세대주의적 신학을 소유했고, 성경연구소들의 교회론의 산물이 되었다.
두 종류의 근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두 파벌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모든 배교(apostacy)들과 공산주의, 미국기독교협의회(NCC), 신앙을 타협하는 조직들과 같은 세속적인 악의 형태 들과의 분리를 강조한다. 나중에 발전된 것인 두번째 무리는 좀더 적극적이며 그것의 보수 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새로운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운동과 관련된 명칭이며, 그것은 자연과학에 충실하고 철학과 신학에 친숙하고,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해왔다.
분리주의자들은 미국기독교협의회(ACCC)와 칼 멕킨타이어(Carl Mclntire) 박사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으며 ‘기독교인의 횃불’(The Christian Beacon)이 그 언론기관 역할을 해오고 있 다. 맥킨타이어는 성경적 장로교회(The Bible Presbyterian Church)의 대표이다. ACCC의 구성원은 주로 작은 분리주의 단체원들로 이뤄졌다. 보다 포괄적인 접근은 미국 복음주의협회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것은 최소한의 신앙선언을 받아들이는 광범위한 단체들을 포함한다. NAE는 다만 교회단체들뿐만 아니라 회의들, 지역 교회들, 또는 관련되지 않은 단체들도 받았다. NAE가 자체 기관지로 UEA(United Evangelical Action)가 있지만 독립된 잡지인 ‘오늘의 기독교’(Christinity Today)가 신 복음주의의 가장 중요한 정기간행물이다.
- 미국 종교 백과사전(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
- 제 5판(1996년), J. GORDON MELTON 著 - Gale Re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