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Heavy Metal의 생성(∼1960)
1)HM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HM은 블루스(Blues)와 로큰롤(Rock'N'Roll)이 합쳐진 것이다. 브리티쉬 HM(British HM), 엘.에이.
메틀(L.A. Metal), 스래쉬 메틀(Thrash Metal), 데스 메틀(Death Metal) 등 아무리 수많은 장르로 나뉘어졌다고
할지라도 HM의 기본은 블루스와 로큰롤인 것이다. HM이란 용어가 쓰이기 전 까지는 보통 Hard Rock(이하
HR으로 약칭), 또는 Heavy Blues(이하 HB으로 약칭)으로 불려졌는데, 그 어원은 바로 '강한 로큰롤', '무거운
블루스'라는 뜻 그대로 블루스와 로큰롤에 기원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HM이란 용어는 72년 뉴욕의 밴드 블루 오이스터 컬트(BLUE YSTER CULT)가 데뷔했을 때 매니저인 샌디
펄먼이 다른 밴드와의 차별성을 위해 만든 단어로 미국의 작가 윌리엄 배로즈의 소설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비록 일개 밴드의 캐치프레이즈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단어만큼 젊은이들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컴퓨터 등 몇몇 예를 빼고는 없을 것이다.
2)HM의 고향은 영국(英國)이다!
아시다시피 블루스는 흑인의 음악이다. 그리고 로큰롤은 이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합쳐진 것인데,
공교롭게도 미국을 고향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예에서 보듯 백인들에게 총애(?)를 받은
로큰롤이 50년대를 선풍적으로 휩쓴 반면에, 고통에 찬 삶을 애절하고 우울하게 표현하는 블루스는 아직도
흑인들에게만 애호되고 있었다.
그런 음지에 머물고 있었던 블루스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전혀 새로운 지위를 확립시켜 준 것은 영국의
뮤지션들이었다. 존 메이올, 알렉시스 코너로 대표되는 이들은 인종차별의 영향이 아직도 강했던 미국-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공립학교에서조차 흑인은 거부당했었고, 진정한 평등이 시작된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 이후, 즉 6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였다-보다는 흑인에 대한 감정이 공평했었고(아니 거의 경의에 가득
찼다), 흑인 뮤지션들은 본국보다는 오히려 유럽에서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두 사람은 열심히
블루스의 지위 확립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영국적인 향취가 덧붙여진 화이트
블루스/블루스 록(White Blues/Blues Rock)는 다시 미국으로 역수입되기에 이른다. 또한 그들은 그 휘하에 제프
벡, 브라이언 존스, 찰리 와츠, 믹 테일러 등을 키움으로써 초기 HB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의 3대 기타리스트와 그들이 모두 관여했던 YARDBIRDS와 CREAM,
그리고 그보다는 약간 후대인 LED ZEPPELIN, DEEP PURPLE, BLACK SABBATH가 등장하면서 영국은 HR/HM의 탄생지(誕生地)로 대접받기에 이른다.
3)왜 CREAM인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블루스를 발전시킨 사람은 영국의 백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백인의
감성은 흑인과 같을 수는 없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테크닉으로 무마시키려 하였으니, HR은 이러한
백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발생했다. 즉 존 메이올과 알렉시스 코너에게서 사사(事師)한 젊은
뮤지션들은 테크닉을 더욱 연마시켰던 것이고, 그들의 힘에 입어 그때까지 단순한 3코드의 4소절의
연속이었던 블루스는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전위(前衛)에 위치한 그룹이
1966년 결성된 CREAM이다.
'신(神)의 손'이라 불리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 베이시스트 잭 부르스, 드러머 진저 베이커의 단 세
사람으로 구성된 CREAM은 그때까지의 음악의 개념을 바꾼 밴드로 칭해질 만큼 다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일례로 이들이 상용한 거대한 기자재(機資材:Equipment)의 벽과 더블 베이스 드럼을 중심으로 한 무대 구성은
현대에 있어서도 거의 모든 밴드들이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의 연주였다. 원래부터 테크니션으로 알려져 있었던 만큼 이들은 특히 라이브에 강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 세 사람은 즉흥연주(卽興演奏:Improvisation)라는 새로운 정형(定型)을 완성해내었다. 산처럼 쌓인
앰프와 스피커에서 토해내는 거대한 음량과 서로 불꽃을 피우는 세 사람의 경쟁적인 즉흥연주는 그때까지의
정격적(正格的)인 화이트 블루스/블루스 록에 적극성과 공격성을 가미함으로써 HR으로의 이행(移行)을
예고했다.
4)지미 헨드릭스의 등장!
아쉽게도 CREAM은 2년 뒤인 68년 해산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새로운 방향성은 뮤직 씬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 곧이어 SAVOY BROWN, KILLING FLOOR, 10 YEARS AFTER, FREE, FLEETWOOD MAC 등이
나타났고, 그들은 CREAM이 제시한 새로운 브리티쉬 헤비 블루스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HM의 진정한 발전은 한 천재적인 기타리스트가 출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의 이름은 지미 헨드릭스, ANIMALS의 채스 챈들러의 눈에 띄어 66년 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흑인 청년이었다. 왼손잡이인 그는 그의 독특한 연주 모습만큼이나 새로운 발견을 하였는데, 바로 퍼즈 페달을 사용한 디스토션(Distortion)에 의한 왜곡된 기타
사운드였다. 뒤틀리고 변태적인- 물론 그때의 기준이다 -그리고 힘이 넘치는 무거운 음은 문자 그대로
'추(醜)함의 미학(美學)'이었다. 그는 그의 짧은 생애동안 신이 자신을 세상에 내려보낸 의무를- 새로운
사운드의 가능성을 열어준 실험을 차례로 보여주었는데, 기타에 불을 지른다거나, 기타를 이빨로
연주한다거나하는 파격적인 라이브에서의 연주양식(演奏樣式) 등은 여타 장르와는 다른 독특한 성질과
특성을 오늘날의 HM에 부여해 주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전설(傳說)'로 승화시킨 최초의 HM뮤지션이다.
2. HR의 榮光과 衰落(∼1980)
1)빅 3의 등장
假說 ① HM은 기타리스트들의 경연장이었다?
물론 HM/HR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유독 기타 부문만 튀었을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설을
세운 것은HM의 발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발전적 계기 또는 유행의 흐름을 선도한 악기가 바로
기타이고 또 기타리스트들의 주법 변화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에릭 클랩튼,지미 페이지, 제프 벡의 고전적인
3대 기타리스트를 위시하여 지미 헨드릭스, 리치 블랙모어, 토미 아이오미, 마이클 솅커, 밴 헤일런, 잉베이
말름스틴, 스티브 바이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의 출현은 한시대의 기준으로 자리잡았고 그들의
경쟁 또는 음악인으로서의 호승심(互勝心)은 추종자의 양산과 함께 HM에 있어선 발전적 요소가 된 것은
틀림이 없다.(그점에 있어 연주기술을 거의 무시하는 Alternative/Grunge가 득세를 하는 요즈음 눈에 띄게 HM이
쇠약해진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假說② YARDSBIRDS의 전설?
물론 YARDBIRDS라는 밴드 자체는 오늘날에 있어 그다지 큰 영향력을 줄 수 없는 밴드이다. 그러나 HM/HR의
역사를 얘기할 때 YARDBIRDS를 거론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여기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이란
거물들이, 또 LED ZEPPELIN이란 밴드가 배태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에릭 클랩튼이 탈퇴하자 제프 벡이
가입했고 다시 그의 후임으로 지미 페이지가 들어왔고 결국 68년 YARDBIRDS가 해산한 다음해인 지미는 69년
푸른 하늘에 거대한 비행선-LED ZEPPELIN(이하ZEP로 약칭)을 띄었다. ZEP는 최초의 완벽한 HM밴드였다.
-물론 후기에 가서는 거의 HM이니 HR이니 하는 지엽적인 것을 떠나 '음악'자체에 집착하는 면을 보였지만-
그들의 왕성한 실험정신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특히 저음현의 기타중심의 연주는 HM의 기초는
리프(Riff)라는 공식을 완성시켰고 그러한 이론은 차후 나타나는 밴드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대화하는 듯한 플랜트의 고음역의 보컬 역시 그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2) 그리고...
ZEP의 출현은 브리티쉬 하드록의 황금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었으니 그들에 촉발(觸發)되어 많은 밴드들이
출현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HUMBLE PIE, URIAH HEEP, FREE등의 밴드가 그들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움직임은 공업도시 버밍엄과 해협건너 독일의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시작되었으니 바로 BLACK
SABBATH(이하 B.S로 약칭)와 DEEP PURPLE(이하 D.P로 약칭)의 등장이었다. 1970년 2월 13일 금요일에 셀프
타이틀의 앨범으로 데뷔한 B.S는 HR의 차원을 떠난 문자 그대로 HM의 요체를 갖춘 밴드였다. 그들의 음산한
메시지, 혼돈의 절정과도 같은 무겁고 어두운 토미 아이오미의 끈끈한 기타 리프는 오지 오스본이라는
카리스마적인 개성의 보컬과 함께 'HM의 분위기'를 내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들이
도입한 Satanism이라는 컨셉트는 'HM=악마주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편견을 가지게 하는데 절대적인
공로(?)를 했지만, 여하튼 주제의식과 작사방법에 있어 구태의연한 '사랑타령'에서 벗어나 사악함이라던가
반전(反戰) 등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한 것은 이들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이들의 영향은 거의
20여년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 Black Metal과 Death/Doom Metal로 계승되었다.) 애초 HR또는 HM을 표방하고
나선 ZEP나 B.S에 비해 D.P는 싱글위주의 팝적인 성향의 밴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클래식과의 접목을
거치는 작업을 하면서 음악성을 다지기 시작한 그들은 70년 발표한 [IN ROCK]에서부터 본격적인 HM을
시도하기 시작, 이후 발표한 [FIRE BALL],[MEACHIN HEAD]에서 오늘날 HM의 기초 교본이라 할 정석(定石)
또는 양식(樣式)을 만들어냈다. 즉 강력한 보컬리스트에 의한 드라마틱한 설득력, 키보드를 도입한 다양한
전개, 화려한 연주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기타리스트 지상주의(至上主義)를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리치 블래모어 이전에도 위대한 기타리스트는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지만, 그의 클래식에서
단련된 탄탄한 기술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아주 후일의 일이지만 리치가 제시한 기타 연주에 있어
클래식적인 악곡의 도입은 바로크/테크니션이란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데 다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밴드의 종속적인 위치에서만이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기타라는 악기의 부각과 기타리스트라는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3)HR시대의 終焉
이때부터 영국은 대중음악에 있어 새로운 강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즉 로큰롤을 기조로 다양한 음악의
요소를 도입하여 HR의 새로운 차원을 전개한 ZEP, HR의 규범을 세운 D.P, 그리고 당대보다는 훨씬 훗날에야
인정을 받은 별격(別格)의 B.S의 주도하에 그들에 영향을 받은 여러 밴드가 출현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즉 브리티쉬 하드록의 전성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등장한 밴드로는 THIN LIZZY,
WISHBONE ASH, TRAPEZE, NAZARETH, JUDAS PRIEST, STATUS QUO, U.F.O.등 후일 HM/HR 씬과 역사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었다. 한편 팝 음악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서도 서서히 HR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68년에 알 쿠퍼, 마이크 브룸필드, 데이브 메이슨, 카를로스 산타나 등에 의해 벌어진
수퍼세션이라는 이벤트가 대성공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록 혁명(Rock Revolution)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70년에 이르러 THREE DOG NIGHT, CHICAGO, GRAND FUNK RAILROAD(약칭
G.F.R.),MOUNTAIN과 같은 유능한 밴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HM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BLUE YSTER CULT가 72년 등장하였다. 물론 미국에선 영국과 같은 폭발적인 붐이라던가
황금시대 같은 극적인 역사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점 때문에 차분한 성장을 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가장
화려한 꽃이 먼저 꺾여지는 것처럼 영국의 HM/HR은 바로 그 화려했던 시점부터 쇠락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은 막대한 세금을 피하기 위한 거물 밴드들의 미국 진출과 언제나 새로운 것을 구하는
사회 풍조, 유능한 신인의 부재 등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고 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생긴 것이지만,
76년 D.P의 해산을 기점으로로 브리티쉬 하드록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틈바구니- 거물들의 해산과
내분, 부재라는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이 나타난 것이 SEX PISTOLS, CLASH로 대표되는 Punk/New Wave였고,
새로운 스타를 찾는 매스컴에 의해 이들은 너무도 쉽게 스타가 되었다. 이들은 연주력같은 전문적인
테크닉도 없이 문자 그대로 '어제는 관중석에, 오늘은 스테이지에 오른다'는 식의 아마추어였다. 그러나 모든
억압된 사회에 반항하는 분노에 찬 가사와 현실적인 소재는 오일 쇼크와 경제쇠퇴로 인한 실업(失業)으로
거리로 몰린 청년들에게는 바로 나 자신의 일이었고, 따라서 구름을 잡는 듯한 고상한(?) HR은 Old Wave로
불리며 금방 구식의 음악이 되어버렸다.
물론 섬나라 영국이 Punk/New Wave의 열풍에 휩싸였다고 해서 HM/HR이 전혀 죽은 것은 아니였다. THIN
LIZZY, JUDAS PRIEST, U.F.O.등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또 그 즈음에는 독일에서 나타난 SCORPIONS의
노력으로 불씨만은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AC/DC, MOT RHEAD등 오늘날의 HM/Thrash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중요한 밴드들- 전자는 로큰롤과 펑크의 융합을, 후자는 펑크와 HM을 합치는 시도를 하였던 70년대와
80년대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
등장했다. 한편 영국과는 달리 Punk/New Wave가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에서는 73∼74년 AEROSMITH와 KISS라는 두 거물밴드가 등장하는 수확을 거두었다. 그리고
78년에는 VAN HALEN이 등장하였다. '라이트 핸드'를 비롯, 새로운 테크닉으로 무장한 에디 밴 헤일런이라는
희대(稀代)의 기타리스트를 앞세운 VAN HALEN은 가장 미국적인 HM/HR을 연주함으로써 뿌리깊은 영국에의
콤플렉스를 떨구어낼 수 있었고, 또한 영국에 내주었던 로큰롤의 주도권을 다시 찾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80년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짓기라도 하듯 HR 최후의 보루였던 ZEP가 그 비행(飛行)을 멈추었다...
HM의 復興(∼1990년대까지)
1)Punk의 遺産
그토록 영국의 HR씬을 초토화시킨 Punk/New Wave였지만 그들의 생명은 아주 짧았다. 그것은 초기의 파워와
에너지,메시지를 화려한 패션과 돌출되는 언행, 그리고 경박한 매스컴의 부화뇌동과 맞바꾼 Punk/New Wave의
숙명적인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Punk의 유산은 현대의 HM의 발전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으니 Hard Core,
Grind/Death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찍이 HR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분노라던가 사회에
대한 비판과 같은 현실참여의 인식을 HR 뮤지션에게 심어주었다. 즉 고상한 음악으로 빠질 뻔 했던 HR에
새로운 젊은 혈기를 주입시킨 것이다.(물론 이런 평가는 최근에 들어서면서 부각된 것이다.)
2)N.W.O.B.H.M.
어떤 대도시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런던에도 상류층과 하류층이 사는 곳이 나누어져 있다. 전자를
웨스트엔드(Westend), 후자를 이스트엔드(Eastend)라고 하는데, 많은 밴드들은 이 이스트엔드를 고향으로
하고 있다. Punk가 메인스트림으로 빠지자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젊은 로커들이었다. 이들은 U.F.O.와 THIN
LIZZY, JUDAS PRIEST, B.S에 영향을 받은 새내기들로 이스트엔드에 진치고 있던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클럽 중에 언론계에서 일하던 닐 케이가 운영하던 {Boundwagon/Soundhouse}는 주 1회
HR만을 전문으로 틀어주는 [Hard Day]로 Punk에 식상한 젊은 청중을 불러 모았다. 이 기획은 날로 성황을 이뤄
78년에는 3회 79년에는 4회로 점차 증설되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눈여겨보던 {SOUNDS]지는 깊은 관심을
보여 이 클럽에서의 신청 순위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닐 케이는 {SOUNDS}와
공동으로 신진 밴드들의 데모 테이프를 모집하여 그중에서 선곡한 테이프를 {Bandwagon/Soundhouse}에서
틀었다. 그런 닐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한 청년이 가지고 온 데모 테이프로 누구나가 꿈꾸던 HR의 복권이
이루어진다. 빠른 스피드, 베이스를 중심으로 한 파격적인 리프, 드라마틱한 전개, 그것은 이때까지 듣지 못한
전혀 새로운 사운드를 연주한 이 밴드- 그렇다 바로 IRON MAIDEN과 스티브 해리스였다.의 데모는 금새
클럽의 인기를 독점했고 {Bandwagon}이 설립한 자주제작 레이블인
{Soundhouse Deeps}를 통해 <Iron
Maiden>등의 3곡이 수록된 싱글을 발표 완매했다. 그리고 마치 하나의 불씨가 산을 태우듯 영국의 전토는
다시금 젊은 HR 밴드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런 움직임을 {SOUNDS}의 부편집장이었던 제프 버튼은
'영국 헤비메틀의 새물결, 즉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약칭 N.W.O.B.H.M.)'로 명명했다. 이때 등장한
밴드로는 DEF LEPPARD, SAXON, PRAYING MANTIS, SAMSON, GIRL, ANGELWITCH, WILD HORSES,
DIAMOND HEAD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이러한 열기를 증명하듯 정례의 HM페스티벌 -{Monsters Of
Rock(약칭 M.O.R.)}이 신설되었고, 기존의 {내쇼널 재즈 블루스 록 페스티벌(일명 레딩 페스티벌)}도
거의 HM/N.W.O.B.H.M. 밴드들이 점거하였다.
3)N.W.O.B.H.M.이 남긴 것
이제 시대는 완전한 HR의 승리를 선언했다. IRON MAIDEN을 위시한 젊은 N.W.O.B.H.M 밴드들과 AC/DC,
JUDAS PRIEST, SCORPIONS등 암흑시대를 지탱해온 밴드들이 미국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N.W.O.B.H.M.도 아주 재빨리-불과 4년이 채 못되어 쇠멸했다. IRON MAIDEN, DEF LEPPARD,
SAXON등 아주 극소수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동안 N.W.O.B.H.M.은 여러가지 유산을
남겼다. 그것은 첫째 메이저 레코드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앨범을 발표할 수 있는- 물론 설익지 않은 실력의
밴드들을 무차별적으로 내놓아 이로인해 팬들의 기대감을 잃게하고 결국은 N.W.O.B.H.M.의 쇠락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지만- 마이너/인디펜던트 레이블의 역할이 대두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 일단의 밴드들은
솔로 또는 즉흥세션을 거의 배제(排除)한 연주를 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전 시대의 기타 영웅처럼 특정인이
튀는 것이 아닌 밴드의 전체 조화를 우선으로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악곡의 짜임새가 짧아지고
응축(凝縮)된 이 시기의 사운드는 후일의 Thrash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하나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은 이때부터 HR은 HM로 완전히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HM이 다극화(多極化), 다변화(多邊化),
다양화(多樣化)되었던 것이다. 즉 그때까지 영국과 미국위주의 HR에서 독일과 유럽 제국을 위시한
아시아권에까지 HM이 파급되고 또 블루스 일변도가 아닌 소재와 제재의 다양성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니
L.A. Metal과 Thrash는 N.W.O.B.H.M.을 모태로 생겨난 것이다.
4)L.A. Metal
원래 미국의 HR 씬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스트코스트(East Coast) 사운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코스트(West Coast)로 구분되어 발전하였는데, 70년대부터는 AEROSMITH, KISS를 맹주로 한 동부세력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78년 VAN HALEN의 등장으로 L.A.와 캘리포니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80년에 들어서는 영국의 N.W.O.B.H.M.의 영향으로 M TLEY CR E, QUIET RIOT, RATT라는 3대 밴드를
주축으로 ROUGH CUTT, W.A.S.P.등 일단(一團)의 신진 밴드들이 대거 출현하였으니 이 거대한 흐름을 지역적
이름을 따서 L.A. Metal이라 부른다.(처음에는 L.A.를 위시한 캘리포니아 출신의 밴드를 L.A. Metal이라고
했으나 후에는 지역은 틀려도 'L.A. Metal과 같은 성향의' 밴드도 L.A. Metal로 집어넣었다.)
L.A. Metal의 특징은 외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스와 스프레이로 부풀린 머리, 화려한 화장, 가죽 점퍼와
청바지라는 전통적인 의상을 벗어 던지고 산뜻한 T 셔츠와 스판바지, 가죽조끼로 무장한 이들은 음울하고
남성적인 HM의 이미지를 밝고 명랑한 여성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물론 사운드 자체는 전형적인 브리티쉬
HM이었지만 N.W.O.B.H.M에 비해서는 기타리스트의 중요성이- 조지 린치, 워렌 디마티니, 제이크 E. 리는
밴드의 후광이나 인기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입지를 세웠다.- 부각된 것이었고, 그위에 약간의 미국적인 현실,
허장성세(?)도 가미된 HM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이 L.A. Metal은 하나의 장르만이 아닌 잡다한
수많은 분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가장 과격한-무대에서 날고기를 씹는 충격적인 매너를 보여준
W.A.S.P.에서부터 블루스적인 취향의 GREAT WHITE, 파워메틀 밴드인 ARMORED SAINT, 달콤한 여성취향의
POISON, 가장 전형적인 L.A. Metal의 특성을 가진 MOTLEY CRUE, RATT, 그리고 지역적 음악적으로 전혀
달랐지만 L.A. Metal에 집어넣는(?) BON JOVI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밴드를 포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다양성으로 L.A. Metal은 80년대의 주도권을 쥘 수가 있었던 것이고 나아가서는 88년
{그래미}에 HM/HR부분이 신설된 것으로 상징되는 'HM의 시민권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혹자(或者)에 따라서는 "L.A. Metal은 상업적이다", "인기위주로 나아갈 뿐 철학이 없다"는 등의 비난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L.A. Metal은 탄생이래 언더그라운드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HM을 밝은 태양
아래 인도했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넓혔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류였다고 할 수 있다.
5)Thrash Metal과 그 分派들
N.W.O.B.H.M.은 그 짧은 생명이 끝나기 전에 두 개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하나는 전술(前述)한 L.A. Metal이고
하나는 Thrash Metal로 특히 지금까지 유례없는 스피드와 과격성을 가진 Thrash는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젊은 Kids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Thrash의 직접적인 뿌리로 알려져있는 MOT RHEAD는 빠른
스피드, 멜로디 라인을 거의 무시한 보컬, 파격적인 리프로 이미 70년대부터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었다.(한때
METALLICA의 라즈 울리히가 MOT RHEAD의 팬 클럽 회장을 맡았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악마주의를 내세우며 극한의 노이즈(Noise)와 스피드를 구사하던 VENOM도 Thrash의 형성에 많은 역할을
했는데, 아울러 VENOM은 오늘날의 Death Metal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고 METALLICA를 빼놓을
수는 없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공룡화된 이 거대 밴드의 성공은 문자 그대로- 그들이 메이저와 계약을 한
시점부터 Thrash가 번성하고 그들이 Thrash의 색채를 벗어 던진 그 순간부터 Thrash는 소멸된 것처럼 -Thrash와
축을 같이했다.
덴마크 출신인 라즈의 예에서 보듯 Thrash는 철저한 국제적인 음악조류였다. 그것은 미국적인 가치관의 L.A.
Metal이 유럽을 위시한 제 3세계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것에 비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즉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Thrash밴드는 공통적인 주제와 소재- 분노와 살벌한 사운드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Th
rash만큼 다양한 분파를 가진 장르는 없다. 일례로 Speed Metal, Power Metal, Melodic/Power
Metal, Intellectual Thrash, Bay Area Thrash, German Thrash 등등 지역의 이름을 따라 사운드의 차이점을 따라,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진다.
L.A. Metal의 융성이 {MTV}의 -즉 메이저적인 취향- 덕분이라면 Thrash의 대두는 '풀뿌리'의 힘을 입은바가
크다. 즉 '팬진(同好會誌:Fan Magazine 약칭 Fanzine)'과 Thrash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또한
{Megaforce}, {Metal Blade}, {Road Runner}, {SPV}, {Combat}, {Def America}등의 마이너 레이블과의 협력도 매우
큰 것이었다.(그 외에도 뛰어난 실력의 테크닉을 가진 기타리스트와 드러머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다)
Thrash의 등장은 연약한 HM에 대한 반역을 의미한 것이다. 또한 Punk가 제시하였던 사회에의 분노,
메시지-반전반핵(反戰反核)을 구체화하여 HM의 사회적 책임 내지는 참여를 설파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물론 '죽음','피','살의(殺意)', '폭력' 그리고 약간의 사타니즘으로 상징되는 철저한 기성에의
반역등 부정적인 면모도 없지 않지만서도,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하마터면 상업화될 뻔 했던 HM을 다시금
강력한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렸다는 점에서 Thrash는 HM의 구세주로 불리는 것이다.
6)六弦의 英雄들
앞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HM은 기타리스트들의 경연장이었다. 그리고 그 '기타리스트 지상주의(至上主義)'가
극도로 표출된 것이 바로크/테크니션 메틀이다. 이 장르의 원조는 리치 블랙모어로 그는 클래식과 HM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클래식 소품을 자주 레파토리에 올리곤 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리치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는 클래식과의 접목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것은 스웨덴 출신의 잉베이 말름스틴이었다. 그는
그때까지의 록 기타의 기법과 철학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디미니쉬(Diminish), 하모닉 마이너(Harmonic
Minor)이라는 클래식 스케일에 의한 스윕피킹(Sweep Picking)','아르페지오(Arpeggio)'라는 현란한 연주를
선보였고, 그의 등장이후 잉베이를 능가하는 꿈을 지닌 다수의 기타리스트들이 등장했으니 일명
4인방(四人幇)으로 불리는 폴 길버트, 토니 매칼파인, 비니 무어를 위시하여 제이슨 베커, 마티 프리드맨, 그렉
하우, 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등의 6현의 마술사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바로크적인
선율에서 떠나 퓨전(Fusion)과 재즈를 도입한 네오 클래시컬-어느 의미에서는 진짜 테크닉을 위주로
했던-까지도 발전되었다.역시 이 조류에도 유력한 배후- 즉 마이크 바니라는 협력자와 {Shrapnel}이라는
마이너 레이블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도 바로크/테크니션들은 그때까지
저열(低劣)한 음악으로 치부되었던 HM에 고결한 품격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또 감정과 감성으로만 기타를
연주했던 HM에 이론적이고 학구적인 풍토를(G.I.T.의 예에서 보듯) 조성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장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