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기(分財記)
[載寧李氏謹齋先生子女九男妹同腹和會成文]
1. 분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문중 이야기 제3편 "재령이씨 영해파 종가 충효전가(忠孝傳家) 도록"과
문화재 관리국 최순희 전문위원이 1980년 민족문화 제6집에 발표한 논문
"재령이씨근재선생자녀9남매동복화회성문(載寧李氏謹齋先生子女九男妹同腹和會成文)"을 참고하여
우리 집안 선조들의 분깃기(分衿記=紛財記)를 알아보고자 한다.
※분깃기: 이두표기
이 문기(文記)는 양친이 별세하신 후 1494(성종25)년에 동복(同腹) 9남매가 회동하여 분재(分財)한 것으로
영해파 시조 현령공(諱璦)께서 소지하시다가 후손에게 전승된 것이다.
이 문서는 우리 이씨 문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영해파 종택에 소장되어 있으며
영해파종택소장제문서(5백여점)와 함께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특별히 이 분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 인천파의 파조(派祖)이신 근재공의 차자 감찰공(諱 瑋)께서
2차 동복화회성문을 필집(筆執)하신고로 지금으로부터 528년전인 1494년 8월 5일에 쓰신
감찰공 할아버지의 친필 글씨를 만나볼 수 있다는 놀라운 기쁨과
그 글씨를 통해 당시 현장의 생생한 숨결들이 전해져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필집(筆執) : 증인(證人)으로서 증서(證書)를 쓴 사람
감찰공의 부친 근재공은 1460(세조6)년 문과 대과 장원을 하셨고, 세조임금은 왕실과의 혼인을 적극 주선하였다.
태종의 친왕자 함녕군 인(䄄)은 좌의정 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는데,
장녀가 파평윤씨 윤오(尹塢)에게 출가하여 낳은 딸이 마침 궁중에 머무르고 있어 이를 예관(禮官)이 추천하자
"세조가 반종실(半宗室)이다" 하고 혼담이 진행되어 그해 겨울에 왕실의 외손녀인 윤씨 부인에게 장가를 드셨다.
윤씨부인의 부친 윤오(尹塢)는 부정(副正,종3품)을 지냈으며, 조부는 좌명2등공신으로
파평군에 봉군되었고, 평안도 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우참찬 윤곤(尹坤)이다.
근재공의
장남 상(瑺)은 근재공이 돌아가시기 1년전인 1486(성종17)년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교리(校利)를 지냈다.
교리공파 또는 면천파라 하며, 영양, 답곡, 면천, 서산, 해미 등지에 세거.
차남 위(瑋)는 음직(蔭職)으로 사포, 별제 현령,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으며 1494년 당시에는 25세로 종사랑(從事郞)이었다.
감찰공파 또는 인천파라 하며, 인천, 원주, 남원 등지에 세거.
큰누이는 남편인 승의부위(承義副尉) 전행부사맹(前行副司猛)윤화명(尹化溟)이 참석하여 1차 필집을 맡았다.
3남 래(琜)는 은진현감을 지냈는데 당시에는 장사랑(將仕郞)이었다.
현감공파 또는 양주파, 은진공파라 하며, 남양주 덕소에 세거.
4남 속 또한 현감을 지냈는데 당시에는 아직 관직에 나가기 전이라 유학이었다.
손자가 문과에 올라 참의까지 역임했으나 후손이 없어 세계가 뚜렷하지 않다.
5남 종(㻜,1475년생)은 음직(蔭職)으로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당시에는 20세로 역시 유학이었다.
판관공파 또는 진주파라 하며, 주로 진주에 세거.
둘째 누이는 남편인 종사랑(從事郞) 이희(李熙)가 참석하여 착명을 하였다.
6남 애(璦,1480년생)는 무과에 급제하고 현령을 지냈는데 당시 15세로 허혼(許婚) 연령이라 착명에 참여하였다.
현령공파 또는 영해파라 하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영남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루었고, 영해, 영덕에 세거.
7남 구(玖)는 진사를 지냈으나 당시에는 미성년이라 동등한 분집(分執)을 받기는 하나 착명(着名)하지는 못하였다.
진사공파 또는 원주파라 하며, 원주에 세거.
작성된 분재기는 상속 대상자 수만큼 작성하여 각자 보관하도록 하였다.
만약 분재기가 불에 타 없어지면 소화입안(燒火立案)을 받거나 때로는 재분재를 해서 분재 사실을 명문화 하고자 하였는데
근재공 자녀 9남매에 대한 동복화회성문은 6남 애(瑷)의 종가 전승 문기외에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어 아쉽다.
※부사맹(副司猛) : 오위의 종8품 무관직
※사포(司圃) : 조선시대 사포서에 속해 있던 정6품직. 궁중의 원예와 채소에 관한일 담당.
※별제(別提) : 조선시대 정6품 및 종6품 관직
※종사랑(從事郞) : 조선시대 정9품 문관 품계
※장사랑(將仕郞) : 조선시대 종9품 문관 품계
※착명(着名) : 이행할 의무가 있는 문안 등에 이름을 적는 것.
2. 분재 방법
이 기록은 양친이 돌아가신 후 동생간(同生間)에 서로 화합하여 분급하는 문기(文記)로서
1494(성종25)년 6월27일의 동복화회성문과
그해 8월5일 다시 모여 지난 6월27일에 미처 나누지 못한 부모의 노비를 합의하여 배분한 분재기이다.
분깃기(分衿記)는 분배 시 동복(同腹)간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장유차서에 따라 분배하며,
부모가 사망한 후에 동복간에 분깃(分衿)하는 것을 화회(和會), 또는 화의성문(和議成文)이라 부른다.
이때 분배 받을 사람들은 빠짐없이 참여하여야 하며 문기에 착명 날인하여야 한다.
남자인 경우에는 자기 이름 밑에 수결(手決)하고, 여자인 경우에는 묵인(墨印)을 찍는다.
이와 같이 동복간의 화회문기는 분배받을 각 개인의 확인이 필요하며 관서문기(官署文記)를 사용치 않더라도
증필(證筆)을 갖추어야 한다.
증필(證筆)은 친족이나 현관(顯官)중에서 선정토록 되어있다.
분깃기에 기록된 노비는 우선 거주지와 어느 누구의 몇째 소생의 누구라는 것과, 연령을 밝혀주어야 한다.
자녀간의 분배는 봉사(奉祀)를 중시하기 때문에 봉사를 맡게 될 승중자(承重者, 주로 장남)에게 가급(加給)하였다.
또한 엄격하고 균등히 분급함을 원칙으로 취득된 전민(田民)은 그해에 官에 고하여 반드시 입안(立案)을 받아서
천적(賤籍)에 올려야 했다.
처음 분급된 6월27일의 문기에서는 큰사위 윤화명이 필집을 맡고,
다음 8월5일의 유루분 분집문기(分執文記)에서는 2남인 종사랑 이위가 필집을 맡고 있다.
보통 분깃기에서는 노비와 전답을 한 문기에 병기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 두 건의 문기에서는 노비만을 기재하고
전답의 기록이 없어 유감이나 그후 이애의 자녀간의 화합문기에서도 전답과 노비를 각각 별지에 기재하고 있으며
전답의 분급에 있어 상당량이 자녀에게 분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9남매 간에도 당연히 노비문건 외 전답문기가 있었을 것으로추측된다.
※동생(同生) : 조선 중기 이전까지의 문헌에서는 형제자매를 일컬어 동생(同生=同腹)이라 하고,
형을 동생형(同生兄), 제(弟)를 동생제(同生弟)로 표기하였으며,
그 뒤부터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 가운데 나이가 적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증필(證筆) :무엇에 대한 소유권이나 권리 따위를 증명하는 문서에서 증인과 그 문서를 쓴 사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
※승중자(承重者) : 제사를 이어받는 사람
※전민(田民) : 전답과 노비
※입안(立案) : 과거에 어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관청에서 발급한 문서.
내용은, 매매나 상속으로 인한 토지,가옥,노비 및 기타 재산의 소유권 이전, 재판 결과[決訟], 양자 입적[立後] 등이 있다.
※천적(賤籍) : 사노비의 이름과 나이, 전래별 세계(世系) 등을 기록한 천인 장부 또는 노비안(奴婢案)
※분집(分執) : 과거에 집이나 땅, 노비 등 재산을 나누어 가짐.
※필집(筆執) : 증인(證人)으로서 증서(證書)를 쓴 사람
3. 분재 내역
6월27일 1차에는 679명의 노비를, 8월5일 2차에는 79명의 노비를 합의하여 나눠가졌는데
장남 상 108명, 2남 위 88명, 장녀 84명, 3남79명, 4남 82명, 5남 79명, 2녀 78명, 6남 82명, 7남 78명으로
장남이 20여명이 많으며 그밖에 同生間에 거의 비슷한 비율로 분배되고 있다.
위와 같이 분급된 노비의 숫자는 아래의 경우와 비교하여도 상당히 많은 수의 노비가 분급된 것이다.
1541(중종36)년 신사임당 동생간의 화회문기에서 1인당 약 30여명,
1661(현종2)년 이순신장군 직계인 지백 동생간의 화회문기에서 1인당 약 35명,
1678(숙종4)년 좌의정 권대운 7동생의 화회문기에서는 1인당 58명의 분급과 비교할 때 확연히 비교가 된다.
이는 근재공의 아버지 이개지(1415~1487)가 진주 지역에 상당한 세거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하경리의 사위였고,
이러한 기반위에 근재공이 1460년 문과에 장원급제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당대의 명문거족이자 왕실의 외손녀 파평윤씨 윤오의 딸과 혼인하였다.
윤씨가로 부터 막대한 양의 노비와 토지 등을 상속받고 또 왕실로 부터 집과 토지등을 하사받음으로써
재물을 추구하지 않고 공직에만 전념했어도 자연스럽게 많은 재산이 불어나는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노비의 경제적 의미와 여자의 경제 사회적 지위
분재기에서 나타난 사실을 본다면 양반인 사대부와 천인인 노비와는 엄격한 신분적 차이가 있다.
노비는 노주(奴主)의 예속물로 가산의 일부요 상품으로 거래되었다.
취득된 노비는 노주가 직접 거느리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와 별거하여 독립생계를 꾸리고 사는 외거노비(外居奴婢) 있다.
외거노비는 년령과 노비에 따라 노주에게 신공(身貢)을 바쳐야 했는데
16~60에 이하 노(奴)는 1년에 면포(綿布) 1匹, 저화(楮貨) 20張, 비(婢)는 면포(綿布) 1匹, 楮貨 10張을 공납하였다.
노비(奴婢)의 가격은 천조(賤條)에
16~50세 이하 노비는 저화(楮貨) 4천장=米4천승(平石 26.6석, 全石 20석)
15세이하, 50세 이상 노비는 저화(楮貨) 3천장으로 규정되어 있다.(평석 20석, 전석 15석)
또한 분집에서 서얼([庶孼)에게 분급될 전민은 혈족이 같은 부변(父邊)의 전민에 한할 뿐 적자녀(嫡子女)의 친모(親母)에게
전득(傳得)된 전민은 허급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어, 부부라 할지라도 자기 몫의 재산을 구별 관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녀자의 재산 취득과 권한은 시가(媤家)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한편 처(妻)가 남편에 대해서도 같은 견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문기에서 본다면 9남매외에 얼매(蘖妹)가 있었으니 문기말(文記末)에 얼매인 맹비는 비(婢) 1口로 대신하여
속신(贖身)만을 했을 뿐 부변의 노비가 자녀에게 분배할 수에 미치지 못하여 1口의 노비도 허급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문기에서 분급되는 노비는 거의가 모변노비(파평윤씨부인의 노비)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변혁에 따라 상속제도가 점차 장자상속 중심으로 이행되면서 부터 장자중심의 대가족단위로 형성되고
부녀자의 재산취득이 금지되자 여성의 가정에서의 권한마저 감소되어 갔다.
※신공(身貢) : 조선 시대에 노비가 몸으로 치르는 노역 대신에 납부하는 공물
※저화(楮貨) :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발행되었던 지폐
※천조(賤條) : 개인이 소유한 노비의 상속 및 소송에 관하여 규정한 법 조항
※부변(父邊), 모변(母邊) : 아버지쪽과 어머니쪽 상속재산
※쌀 1승(升) : 10작(勺)=1합(合,홉), 10홉=1승(升,되), 10승=1두(斗,말), 15두=평석(平石)1석, 20두=전석(全石)1석
※얼매(蘖妹) : 서얼 누이
※속신(贖身) : 노비 혹은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5. 소회
9남매의 아버지 근재공께서 1487(성종18)년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파평윤씨 부인 또한 몇년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자
20대 중반 부터 열살 안팎의 막내 까지 남자형제 7명과 시집간 누이들을 대신한 2명의 사위들 까지
총 9명의 젊었거나 어린 남자들이 사전에 노비의 세계(世系)와 성별 및 연령대를 고려하여 정밀하게 나눈 후
이를 문서에 옮겨 적고, 다시 사람 수 만큼 더 만들어 각자 한 부씩 보관하고, 또 관에 보고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화합하여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는 모임을 갖는 것은 당시의 법 제도가 잘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의 법률이 의외로 치밀함을 알 수 있다.
9형제들이 모였던 장소는 문기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마도 함안 산인면 모곡리가 아니였을까 싶다.
4,5,6,7남이 아직 관직에 진출하기 전이었으니 적어도 그분들은 고향을 중심으로 살았을 것이고,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1,2,3남과 사위들 2명이 모두 고향으로 와서 화회(和會)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 문기를 잘 소지해서 후손에게 물려준 6남 애(瑷)자 할아버지는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8살이었고,
숙부(叔父) 율간공(栗澗) 휘 중현(諱仲賢)께서 1497(연산3)년 영해부사로 부임함에 책실(冊室)로 따라갔을 때가 18살이었다.
영해 대성(大姓)으로서 부유한 진성백씨(眞城白氏) 백원정(白元貞)의 무남독녀와 혼인시킨 것은
영해부사 부임 이후의 일이니 1494년 화회성문 작성 당시 미혼이라 추론할 수 있는데 최순희씨의 논문에서
이미 실가(室家)를 이루고 있다고 한 것은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향에 살고 있는 어린 동생 네명은, 장성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한 3명의 형 및 2명의 매형들과 모처럼만의 해후를
하여 그야말로 반가운 화회가 되었을 것이고, 당시 사회상으로 비춰봐도 9남매가 각기 80명 안팎의 노비를
나눈 것으로 보아 전답들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과에 급제하신 1남 교리공께서는 조정에서의 관직생활로 아버지의 명예를 이으셨고,
2남 감찰공께서는 음서(蔭敍)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사포서와 용산구 후암동 일대의 전생서 등에서 근무하셨다.
또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내신 때문인지 2남 위(瑋)자 할아버지의 子(監役公 諱殷弼)와 孫(直長公 諱待)의 묘소는
금대산에 계시지만, 이후 진사공 및 위산거사공의 묘소는 진위(振威)에 계셨고, 그후 병란으로 실전되어
남원 아곡에 설단으로 모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남에서는 재령이문이 퇴계학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현재에 와서도 번성하고 있다.
그에 비해 2남 감찰공파의 후손인 우리 인천파는 과거나 현재 현달하는 인물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 집안으로서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어
최근에도 2명의 대학총장이 나오는 등 인물들이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책실(冊室) : 조선 시대, 고을의 원에 의해 사사로이 임명되어 비서의 일을 맡아보던 사람.
※실가(室家) : 집이나 가정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