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 종심(전심, 778 ~ 897)스님은 조주의 학향 출신으로 속성은 학씨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고향의 호국원(조당집에는 용광사)으로 출가하여 경과 율을 익히지 않고 곧바로 참선을 하였다. 그러다가 은사스님을 따라 지양에서 남전 보원(748 ~ 835)스님을 참례하고 입실하였다. 그 후 남전스님이 입적하기까지 40여 년을 시봉하였다.
스님이 남전스님에게서 깨달은 인연에 대해서는 어록의 처음에 실려 있는데, 그 시기는 스님의 나이 20세 전후인 듯하다. 그리고는 곧 이어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고 그 도행을 널리 익힌 것으로 보인다. 어록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내가 90년 전, 마조대사 문하에서 80여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
남전스님이 입적하신 후 스님의 나이 60이 되어 제방에 행각을 나섰는데 이때 이런 말씀을하셨다.
“일곱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
스님이 행각하면서 문답했던 선지식으로서 이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스님들은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임제, 대자, 동관, 운거, 투자, 수유, 보화, 동산, 낙포, 설봉, 한산, 습득, 풍간 등 대략 20여 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임제스님과의 인연은 특이하다. 즉 두 분 스님은 출생한 곳도 같은 조주이면서 훗날 교화를 펴신 지역도 같은 진주이다.
스님은 나이 80이 되어 행각을 그만두고 고향 근방의 조주 관음원에서 청빈하게 살았다. 어록에 의하면 스님께서 처음 세속에 나왔을 때에 두행군이라는 신도가 스님께 절을 지어드리고서 진제선원 또는 두씨네 동산[寶家園]이라고 하였다 한다. 스님께서는 관음원에 주석하신 이후 오랫동안 이 곳에 살면서 납자들을 지도하다가 120살에 입적하셨다.
스님의 입적 연대에 대하여 어록의 행장에서는 무자년(868 또는 928) 11월 10일에 단엄히 앉은 채로 입적하셨다고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전등록』의 기록에 따라서 당 건녕 4년(897) 11월 2일, 세수 120에 오른쪽으로 누워서 입적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주스님의 행장이나 어록 등을 전하는 것으로는 『고존숙어록』제13권, 제14권 이외도 『조당집』제18권, 『전등록』제10권, 『연등회요』제6권, 『오등회원』제4권, 『송고승전』제11권 등이 있다.
그런데 『고존숙어록』 속의 기록에 의하면, 조주스님의 어록이 처음 정리된 것은 후당 보대 11년(953)이다. 또한『고존숙어록』에서 물물대관이 쓴 重刊 序에 의하면, 위색장주가 이것을 중간하면서 조주스님 등 20여 스님에 대한 기연을 따로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두 48권 중에서 조주 스님에 관한 것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3권은 ‘조주진제선사어록 및 행장 권상’이라 제목하였고, 제14권은 ‘조주진제선사어록지여’라 하여 그 나머지를 싣고 있다. 제 14권의 끝에 있는 게송 중 십이시가 이외의 4수는 조주스님이 지은 것이지만 나머지 2수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스님이 지은 것이 아니지만 스님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중간하면서 실은 것 같다.
이 어록에는 약 520여 가지의 기연들을 싣고 있는데, 거의가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임제스님의 할이나 덕산스님의 방에 비견하여 조주스님의 선은 구순피선이라 평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도 유명한 조주스님의 무자공안은 종문의 제1공안처럼 보편화되어 있다. 또 ‘뜰앞의 잣나무’, ‘청주의 베옷’,‘진주의 큰 무’ 등의 공안도 조주스님의 인연에서 채택되었다. 『벽암록』100칙 가운데 조주스님의 인연에 관한 공안이 12칙이나 된다. 설봉스님이 조주스님을 가리켜, “고불 고불”이라 한 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선림고경총서 18. 조주록 상. 장경각]
[출처] 조주록 해제|작성자 sansanot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