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古宮)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안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전주사고가 조선의 역사를 지켜냈기에 그러하다.
경사스런 땅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선왕조의 역사를 보존하는 사고의 설치는 조선 왕실의 영원함을 바라는 점에서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경기전 정문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어서 이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경기전 앞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됐다.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세워진 전동성당은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끌고 있다.
온전히 보존된 전주향교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으로 채색되는 전주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향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한다.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향교에는 다섯 그루의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향교 내 서문 앞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이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에는 한옥의 숨길을 이은 골목길이 있다. 오래 전 잃은 나를 찾아 나서는 전주한옥마을 골목길. 하늘을 품고 땅을 안은 전주한옥마을에는 처마 낮은 골목길이 있다. 도시 재개발 사업 등으로 곧은 대로가 펼쳐지면서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다닐 좁은 골목길은 도심의 풍경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지만 전주한옥마을에는 정감 있는 이름이 붙여진 좁은 골목길이 삶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풍남문을 등지고 오목대를 올려다보았을 때 태조로 왼쪽으로 경기전 뒷길, 태조1·3길, 동문3길, 토담길, 은행나무길, 관선2길, 민속길이 있다. 또, 향교로와 이어진 태조로 오른쪽으로는 태조2길, 강암길, 동문3길, 오목대1·2길 쌍샘1·2·3·4·5길, 향교1·2·3·4·5·6길, 남천2길, 학인당길 등이 전주천 물길 쪽으로 뻗어있다. | |
600년 된 은행나무의 회춘이야기
전통에서 예술로 한국의 고전미를 느낄 수 있는 전주한옥마을은 1박2일 정도 머물러야만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전주공예품전시관, 전통문화센터, 한옥생활체험관, 한방문화센터, 교동아트센터 등 한옥마을 안에 있는 다양한 문화시설에서 펼쳐지는 각종 전통문화공연과 전시를 보는 것 만해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회춘을 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이야기 등 한옥마을에 담겨 있는 다양한 스토리는 하룻밤을 꼬박 들어도 모자란다. 전주한옥마을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전통 한옥에서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 한옥숙박 체험 시설에서 하룻밤 묵으며 느린 걸음으로 몸과 마음을 쉬어가며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해보는 것은 전주한옥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운 행복여행이다. 날로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숙박 체험, 특히 고택 숙박 체험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여행 테마 중 하나이다.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한옥은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다. 한여름에는 대청마루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고, 처마 끝에 걸린 달을 보며 늦은 밤 쪽마루에서 담소를 즐기면 계곡과 해변이 없어도 무더위가 비켜간다. 겨울에는 또 어떤가. 따뜻한 아랫목에서 전통차를 즐기고, 고구마를 쪄먹는 즐거움은 여행의 색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눈이 오면 사그락 사그락 눈내리는 소리와 벗하며 비가 오면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고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문풍지와의 이중창이 정겨운 곳, 바로 한옥에서만 느끼는 색다른 정취다. 전국에 숙박시설로 활용되는 수많은 고택이 있지만, 규모나 시설 면에서 으뜸인 곳은 전주한옥마을이다. 700여 채의 한옥이 들어서 있는 전주한옥마을에는 한옥생활체험관과 동락원, 학인당 등 9곳에서 한옥숙박체험을 할 수 있으며,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도 10여 개소가 된다. | |
전주에서 가볼만한 곳
견훤왕궁터(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9-1)
900년에 견훤에 의해 이곳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 왕궁 터로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견훤왕궁지는 전주 동남 쪽 에 위 치 한 해발 306m의 승암산 동편에 있는 동고산성에 위치해 있다. 동고산성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였다는 것은 1980년 산성을 개괄 조사하다가 산성 내부 옛 건물터에서‘전주성명연화문와당’(全州城銘蓮花文瓦當)이 발견됨으로써 견훤의 왕궁터 주장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와당에는 연꽃무늬 장식과 함께 ‘全州城’이란 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견훤의 출생설화 〕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그 딸이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딸에게 태기가 있고 후에 아들을 낳았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현 전주)에 도읍을 정했다.
풍남문(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83-4)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 건축양태는 조선 후기의 문루 형식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으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43년(1767)에 당시 성내를 휩쓴 정해년 대화로 불타버려 영조 44년(1768) 전라관찰사 홍낙인이 증건했지만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 모습으로 수축하여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렀다.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1978년 문루 보수과정에서 옹성의 기단이 풍남문 홍예문으로부터 12m 지점에서 발굴됨에 따라 이 기단대로 연장 97.5m의 여담쌓기와 치석 6,856개로서 옹성 1,933㎡를 축조하여 복원하였다.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한 것이다. 이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의 서편에는 종각이 있고 좌편에는 포루가 있었다. 문루는 2층의 팔각지붕인데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윗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전주 풍남문은 전주사람들에게는 전주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풍남문에는 풍남문이라는 고유의 이름 외에 "명견루"라는 별호가 있다. 풍남문을 중심으로 전주한옥마을과 남부시장이 연결된다.
전주객사(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1가 1)
전주객사는 조선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성종3년(1473)에 전주 부윤(府尹) 조근(趙瑾)이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창설할 때 남은 재력으로 객사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는 대청 중앙 북쪽 벽의 감실에 〔闕〕자가 새겨진 전패(殿牌 - 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禮)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 곳에
유숙하면서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성계 태조의 출생지에 경영된 객사라 해서 고사에서 따 풍패지관이라고 편액했다.
전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익헌·서익헌이 있고 수직사로 구성되어있다.
전주향교(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전주향교의 현존 건물의 배치형태를 보면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서무가 있고, 정면에 일월문, 그앞에 만화루가 있으며, 대성전 뒷담을 사이로 명륜당이 있고, 서쪽으로 장서각, 계성사, 양사재 와 사마재, 그리고 주위에 교직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이곳 배향위패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이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벽으로 사성 과 십철 송대 육현을 배향하고 있으며, 동서 양무에는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 7인과 우리나라 18현 등 총 25인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계성사에는, 5성(오성)의 위패가 있으며, 대성전은 효종4년(1653)에 부윤 심택과 판관 한진기가 중건하였는데, 이기발이 중건기를 남겼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중수하였다. 또한 대성전은 융희 원년(1907)에 당시 군수였던 이중익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교에는 다섯 그루의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향교 내 서문 앞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이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향교 내 대성전 우측 은행나무는“수컷이 암컷으로 변하여 은행이 열게 되었다”하여 자웅나무라고 부르는데, 이 은행을 따서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또한 일월문 앞 250년 된 은행나무는 은행을 따서 공을 빌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전동성당(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200-1)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됐다.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세워진 전동성당은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곡선미를 최대로 살린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건물 중의 하나이다.
경기전(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26)
전주한옥마을의 상징인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됐다. 경기전에는 두 개의 숨은 문화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경기전 정문 밖 도로가에 있는 하마비요, 또 하나는 진전의 거북이 이야기이다. 하마비에는“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라고 쓰여져 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어서 이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진전에는 거북이가 붙어 있는데, 경기전을 완성한 목공이 그 영원함을 위해 지붕에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올려놓았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가 물에서 살고 진전이 목조건축인 점에서 화재막이용 거북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기전에서 보이는 앞산 승암산이 화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경기전, 경기전은 주변 경관이 수려해 역사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오목대·이목대(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산 53-2 외 18)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태조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오목대이며, 오목대와 연결되어 있는 구름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이목대가 나온다.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의 이곳에서 야연(野宴)을 베풀었다는 곳이다. 여기에서 이성계는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쳤다. 그러자 이를 모를리 없는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현재만경대에는 그 시가 새겨져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학인당(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 외 4필)
서울 북촌에 윤보선 고택이 있다면 전주한옥마을에는 학인당이 있다. 삼원당 뒤쪽에 위치한 학인당은 한옥마을에 있는 700여 채의 한옥 가운데 격식을 갖춰 지은지 100년된 대형 한옥이다.
조선 말,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전승받아 지은 건물로, 당시의 상류층 주택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학인당은 건축 당시에는 99칸집 2천평 규모의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대지 520평에 건물이 69평 정도다. 효자로 소문난 인재 백락중의 사후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일류 도편수나 목공 등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 오대산 등지의 목재를 사용해 2년 8개월에 걸쳐 건축했다고 전한다. 한인당의 솟을 대문에는 백낙중지려라는 현판을 걸었고 팔작지붕처리가 흥미롭다.
학인당은 70년대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백범 김구선생이 묶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통문화체험장으로 개방된 학인당에는 최근 전통찻집 선다원이 문을 열었다. 학인당에서 차 한잔 여유와 휴식을 즐기며 학인당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도 크다.
전주자연생태박물관(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951-1)
전주의 주산인 승암산의 절경을 배경에 두고 전주천 청정물결이 앞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전주자연생태박물관”이 2008년 5월22일 개관하여 한옥마을과 더불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되고 있습니다. 부지면적이 1만8,766㎡에 지하1층 지상3층, 연면적 2,074㎡의 규모로 1급수 청정한 수질에서 서식하는 쉬리를 형상화한 건축물을 신축하여 냉방과 난방을 지열시스템으로 가동하여 운영되고 있는 실천적인 친환경 건축물로도 주목을 받고 있으며, 1층은 자연생태체험관으로 전주의 자연생태 환경을 종합적으로 안내하고 있고, 지표생물로서 가장 깨끗한 물에서 서식하는 쉬리수족관과 전주천에서 발견된 수달을 소개하는 등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학습공간입니다. 또한 2층은 친환경에너지체험관으로 에너지 이용과 변천, 신재생에너지, 미래에너지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12종의 에너지 관련 체험시설과 에너지영상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시설들은 전국 에너지전시관중 가장 다양한 종류의 체험시설을 갖춘 규모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전주천 둔치에 마련한 수변생태공원에는 어류은신처 수생식물과 물억새, 수크렁, 갯버들 등 야생화 120,505본을 새롭게 식재하여 습지정화 및 수생식물에 대한 체험학습과 휴식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단체 20인 이상과 개인으로 구분하여 300원 ~ 2,000원의 관람요금을 받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고, 하절기인 5월 ~ 9월 까지는 1시간이 연장되어 오후 7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매주 월요일과 1월1일 설날과 추석날 당일은 휴관되고, 단체로 관람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사전에 예약신청을 하면 자원봉사해설사의 해설 안내를 받을 수 있고, 매주 토요일에는 다양한 행사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곤충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장을 마련하여 관람객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천년의 역사와 수려한 자연 경관이 보존되어 온 전주의 새로운 관광 트랜드인‘전주자연생태박물관’에서 바람결과 물길이 소살대는 자연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사람이 자연임을 깨닫는 체험”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는 특별한 생태관광 여행이 될 것입니다.
전주수목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반월동 848)
한국도로공사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수목원으로 고속도로 이용객이나 지역주민 또는 식물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우리수목원은 1972년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훼손된 자연환경 복구를 위해 수목 및 잔디를 생산 공급하는 묘포장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1983년부터 공사 직원들의 자기 계발을 위한 식물학습과 자생식물을 자원화 하는 연구를 위해 작은 공간에 식물을 종별로 모으기 시작하여 1992년에 일반인에게도 본격적으로 개방되어 현재 연간 20만명이 넘는 이용객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현재 186과 3,210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보유하고 있는 식물들을 위주로 12개의 주제원(습지원, 교재원, 계류원, 무궁화원, 들풀원, 죽림원, 일반식물원, 약초원, 남부수종원, 유리온실, 장미원, 암석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개의 주제원은 교육장, 학습장, 실습장, 관찰장 등 여러 기능을 부여하고 있어 유●초등학생의 자연학습을 위한 견학, 중●고등학생의 탐구학습, 식물관련학과 대학생 및 관련업계 연구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수목원에서 볼 수 없는 한국도로공사 수목원만의 특징이 있다면 공사에서 조성하여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무료로 개방하였다는 점과 한방과 민간에서 쓰이고 있는 450여종의 약초를 보유하고 있는 약초원 그리고 과수원, 논, 밭에 있어 흔히 지나치기 쉬운 잡초도 어엿한 식물 대접을 받고 있는 국내 유일의 들풀원이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식물 종을 확보하고 있어 어린이 탐방객들이 오감을 이용하여 직접 식물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어린이 여름식물학교, 자연의 색을 우리생활에 직접 입혀 볼 수 있는 천연 염색체험 프로그램이 있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수목원을 이용하는 많은 탐방객께 식물과 자연 사랑을 고취시킬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발전시킬 계획으로 식물종의 확보 및 이용편의를 위한 시설을 보강하여 직접 식물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생태교육의 장으로 개발 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도로공사수목원은 한국도로공사의 고속도로 건설공사 시 발생되는 나무와 암석 등을 파괴하지 않고 수목원에 재배치하여 식물을 관찰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자연학습의 장으로 이용 될 수 있도록 항상 변화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량한 고속도로에 수목원에서 가꾼 수목을 옮겨 심어 생기를 불어넣는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수목원의 푸른 잔디위에 누워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보며 살아있는 자연을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에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덕진공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1314-4)
덕진공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성된 연못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전주의 대표적인 도시공원이다.(1938. 5. 최초 공원지정). 148,761㎡의 경내에는 남쪽으로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연못과 북쪽의 보트장을 동서로 가로지른 현수교가 그 사이를 양분하고 있다. 전주의 볼거리로 강한 인상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덕진공원 연못에 피어있는 연꽃이라 할 정도로 덕진연못은 전주팔경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여름이면 활짝 핀 연꽃이 호수수면의 절반 가량을 덮어 장관을 이룬다.(연꽃 자생지 : 42,975㎡). 연못중앙의 아치형 현수교를 거닐면서 한없는 시정에 젖어볼 수도 있고, 근래에는 취향정 옆에 500여 석을 갖춘 야외공연장을 마련하여 공연이 수시로 열려 입장객들에게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 덕진공원 안에는 신석정시비, 김해강시비, 전봉준 장군상 등 9개의 석조기념물이 조성되어, 연꽃 향기와 공연장에서 베풀어지는 판소리등의 각종 공연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전주의 정취를 안겨주는 문화공간이 되고 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도성방위를 위하여 늪을 만든 이래 자연현상에 의하여 현재에 이른 덕진지(德津池)와 1927년 朴基順에 의하여 만들어진 취향정(醉香亭)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산천조에 『덕진지재 북십리부지세 건유공결. 기맥 천언고서자 가련산. 동속 건지산. 축대제이지 지명덕진 주9073척』 (德津池在 北十里府之勢 乾維空缺 氣脈淺焉故西自 可連山. 東屬 乾止山 築大提以止 之名德津 周九千七十三尺)이라 쓰임 덕진연못은 원래 덕진지(德津池)라 불렸음을 알수 있는데 덕진연못은 관개용이 아닌 풍수지리설에 연유해서 축조된 것임
다가공원(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1가)
전주의 상징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주 비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다가산엔 다가공원외에 유서깊은 활터가 있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의 무예의 수련장이 되기도 했다. 이 활터를 일컬어 천양정이라고 한다. 이조 숙종 28년에 전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다가천옆에다 정자 네칸을 마련하고 천양정이라고 이름 지었다. 과녁판은 서북방인 황학대 밑에다 세웠다. 그 후 9년이 지나 대홍수때 떠내려가고 다시 다가산 바로 밑에 세우니 산이름을 따라 다가정이라 했다. 그 후 57년이 지난 정조 2년엔 앞에 정원을 만들었고 황무지를 일구어 활터를 더 넓혔다. 또 순조 30년 8월엔 다가정 구내에 일사정을 건립하고 과녁판을 남쪽에 설치했다. 그때 이름을 다시 천양정으로 부르게 됐다. 이 후 이곳은 노인들이 사용하고 북향으로 활을 쏘는 다가정은 장년들의 활터로 사용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풍남제 행사에서도 특색있는 『무과 급제 재현』을 1995년부터 재연하여 볼거리가 되고 있다. 천양정 옆 다가천변으로 관찰사 원인손 불망비외 26기의 불망비와 선정비가 있으며, 공원 정상부근에 시조 문학과 국문학의 거목인 가람 이병기 시인의 시비가 서 있어 유서깊은 곳이다.
<자료출처> Naver 아름다운한국, 전주시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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