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Guide Book
차 례
성지순례 일정표………………………………………………2 이집트………………………………………………………… 4 피라밋/ 스핑크스/ 예수님 피난교회/ 모세기념교회/ 이집트박물관/ 수에즈 운하/ 마라/ 바란 광야/ 홍해/ 르비딤/ 시내광야/ 성 캐더 린 수도원/ 오윤무사/ 시나이 반도
요르단…………………………………………………………21 아카바:에시온 게벨/ 페트라/ 아인 무사:모세의 우물/ 성지의 도 로/ 암만/ 느보산
이스라엘………………………………………………………29 쿰란/ 사해/ 마사다/ 요단강/ 팔복산/ 타브가의 오병이어/ 베드로 수위권교회/ 가버나움/ 갈릴리/ 가나/ 나사렛/ 므깃도/ 갈멜산/ 가이사랴/ 예루살렘/ 비아돌로로사/ 성묘교회/ 예수님의 무덤/ 감람산/ 주기도문 교회/ 눈물교회/ 예수 승천교회/ 시온산/ 마가 다락방/ 다윗왕의 무덤/ 통곡의 벽/ 베드로 통곡교회/ 베들레헴/ 예수님탄생교회/ 라헬의 무덤
터키……………………………………………………………70 버가모/ 서머나교회(폴리캅 기념교회)/ 에베소/ 사도 요한 교회/ 누가의 무덤/ 파묵칼레/ 라오디게아/ 빌라델비아/ 사데/ 두아디 라/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성소피아 사원/ 블루 모스크 히 포드럼/ 그랜드 바자르/ 톱카프 궁
Ⅰ.이집트
1.피라밋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조물인 피라미드는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352,000개에서 268만 여개 정도의 각 2.5t 내지 10t 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석회암은 모깔담과 기자 남동쪽 15km 지점의 엘뚜르 등에서 캐내어 이용하였다. 화강암의 경우는 카이로 남쪽 85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 해 왔다. 돌을 쌓은 단층의 수는 원래 210계단 이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203계단이다. 하루 10만여명이 1년에 3,4 개월씩 20여년(총 2천여일) 동안, 연인원 2~3억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로서 용도는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밑변의 길이 230.3m, 겉표면에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자재로 재활용 되느라 벗겨 졌다. 칼리프 알마문이 뚫은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 갈 수 있으며 원래의 입구는 이보다 위쪽 10m 지점에 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50년간 통치한 쿠프왕은 모든 신전을 폐쇄하고 제사를 금지시키고 자기만을 숭배토록 했다.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하여 돌을 옮길 둑길을 만드는데 만도 10년이 소모되었는데 전체길이가 1km, 폭이 18m,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14.4m였다. 이 길에 여러가지 동물의 모습을 새겨 장식하였고, 다듬은 돌로 축조하였다. 돌길이는 90cm 이하가 없었다. 피라미드에는 상형 문자로 이일에 동원된 일꾼들이 먹어치운 무, 양파, 마늘의 양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액수는 은 1,600 달란트에 해당된다. 이것이 맞는 기록이라면 공사용 철제품과 노무자들의 주,부식 옷가지등을 지급하는데 따른 비용은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상상이 안간다. 돌을 잘라 나르고 지하 수로를 파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지하의 쿠프왕의 현실은 나일강의 물을 운하로 끌어드린 물로 마치 섬처럼 만들어 졌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기초를 쌓은 대는 이디오피아 산의 다양한 색깔의 돌을 사용하였다. 그는 쿠프왕의 동생으로 56년간 통치하였다. 쿠푸, 카프레 왕은 106년간을 통치하였다. 카프레 왕의 아들인 멘카우레 왕은 신전을 다시 열고, 노역에서 해방시켜 생업에 종사토록 하였으며, 종교적인 관습을 실행하도록 허용하였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 밖에 벗어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어서, 우연의 배열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현대 20세기의 건축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 m 높이의 '상승통로'는 완벽한 배열에서 1 cm 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 피라미드가 건조될 당시 천구(天球)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용 자리의 알파 별을 지표로 삼아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놀라운 배열로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해시계이고, 달력이고, 동시에 천문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원래의 높이는 147m 지만 이 피라미드는 동지무렵에는 80m 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봄에는 그 길이가 거의 0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그림자의 길이를 이용하여 하루의 시간을 재고, 계절을 식별하고, 한해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터는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 때 만들어졌던 오두막 밑을 파보기로 했다. 람세스 6세는 투탄카멘 보다 훨씬 뒤의 왕이므로 그 밑을 파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스핑크스
스핑크스란 이집트어로 후 헤레마쿠트 (Hu Heremaakhut) , 지평선 위의 호루스, 아랍이름은 '아불 훌'로서 '공포의 아버지'란 뜻을 지니며, 사막의 보호자로서 숭배되어 왔다. 현세의 무덤지기 신으로서, 내세의 보호자로서, 후기에는 신전지기로 기능하였다. 전체가 하나의 석회 바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길이 48.2m x 높이 21.0m 에 해당된다. 1517~1882년 사이의 터키 점령하에서 터키 군대의 사격 연습 표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나폴레옹이 스핑크스의 코를 대포로 쏘아 떨어뜨렸다고도 한다. 현재 스핑크스는 이 지역 아침나절의 높은 습기와 안개, 지하수의 영향등으로 심한 훼손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1981년 남측에서 6개의 돌이 떨어져 나갔고, 1987년에는 오른쪽 어깨 쪽에서 300kg의 돌이, 그리고 1988년에는 2톤 정도되는 석회석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에 대한 보존 노력은 1925년 프랑스 고고학자 Braize 가 주창한 이후, 1942년 75m 정도의 보호벽이 설치되었고, 지금은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석회석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3.예수님 피난교회
AD 303년의 로마 황제 맥시밀리안 때에 시리아의 알라사파에서 순교한 서지우스(Sergius)와 바쿠스(Bacchus)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며, 매년 6월 1일에는 이들 성인의 축일을 지키고 있다. 길이 17m, 폭 15m, 높이 3m 의 현재 건물은 AD 10~11세기에 재건한 것이다. 이 교회의 위치는 예수님 일행이 1개월간 피난 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져 있으며, 이집트의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서 넓은 회중석과 2개의 긴 복도(통로)를 가지고 있다.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서 사용하였으며 원주 부분이 검게 그슬린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기둥 중의 화강암으로 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하였던 동굴(the Crypt)은 현재 물에 잠겨 있으며, 그 들어가는 입구는 예배당 맨 왼쪽의 성소 안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6월 1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다.
4.모세기념교회
처음에는 알무알라카 교회의 부속건물로서 AD 4세기에 지어져 AD 9세기까지는 미카엘 교회(성 미카엘교회) 또는 가브리엘 천사 교회로 불렸었다.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인 이븐 툴룬 왕조 (AD 868 ~ 905) 때인 이집트의 제 56대 교황 (주교) 미카일 3세 때 아흐메드 이븐 툴룬이 '이븐 툴룬 모스크'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독교도들에게 금 2만 디나르의 고액의 세금을 부과하자 몇 개의 예배당을 매각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로 유대인들이 매입하여 회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알하킴 (AD 996 ~ 1021) 때에 다시 파괴 되었다 AD 1115년 예루살렘에서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방문한 이후에 재건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유래되었고, 당시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까닭에 아라베슼크 문양을 하고 있다. 이후 이 회당은 현대의 아랍,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AD 1965년 까지 천여년 동안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집트 잔존 유대인들의 수는 100여명 정도이고 이들의 약간이 시내 중심지의 샤리아 아들리 (아들리가)에 있는 회당에서 모이고 있다. 이 회당이 다시 지어진 당시에는 주위에 29개의 사원과 20개의 예배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133,000명의 무슬림들과 10.000명의 콥틱 기독교인, 42명의 유대인들이 올드 카이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종교가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공동체처럼 살았었다고 기록들은 말하고 있다. 이 자리에 세워졌던 최초의 회당 건설은 BC 350년경이며 당시의 이름은 선지자 예레미야 시나고그였다. 그러던 것이 BC 30년 경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아랍에 의해 로마의 통치자로부터 탈환된 이 지역에 콥틱 교회에서는 새로이 예배당을 지었던 것이다.
5.이집트박물관
시내 중심가인 다닛르리이르 광장 북쪽에 있으며 소장품은 대략 13만점 정도이다. 박물관입구 중앙의 연못에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자라고 있다. 이집트 역사에서 파피루스는 신성한 식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햇살 모양의 꽃이 태양신 아몬 레 (Amon Re)를 상징하고, 삼각형의 속 모양이 영원성을 상징 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 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창고 같다. 이집트 박물관은 많은 혼란과 역경 끝에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박물관이 되었다. 1799년 7월에 발견된 로제타 (Rosetta Stone) 비문의 연구가 불란서의 석학 잔 프랑소아 샹폴리옹(Jean Francoise Champollion)에 의해 시작되어 그 결과가 1809-1816년 사이에 18권의 책으로 발표되자, 전 유럽의 강국들은 이집트의 문화 유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집트의 고분들과 신전들은 일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프랑스의 많은 학자들이 이집트 정부에 박물관을 설립하여 문화재 유출을 막고, 관리하도록 건의한 결과, 1834년 이즈마일리아에서 발견된 고대 이집트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소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1855년 이집트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맥시밀리안 왕자의 청으로 전량 비엔나로 가게 되었다. 따라서 사실상 최초의 이집트 박물관은 비엔나에 세워 지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1858년 6월 1일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관 소속 연구원이었던 고고학자 아우그스트 마리에드(Auguste mariete)가 이집트의 고적 관리 감독관으로 부임하면서 고대 이집트 유믈들이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 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이집트 박물관의 모체가 되었다. 이집트 최초의 이 박물관은 1863년 10월 나일강 수리 회사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다가, 1887-1901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02년 현재의 건물로 이전하였다. 현재 박물관은 10만점 이상의 5300년 - 3500년 전의 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1922년 11월에 영국의 카나본 경과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투탄카멘 왕의 유품은 발굴된 전량이 한 장소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전세계에서 이곳뿐이다.더구나 투탄카멘 완 능의 발굴 때는 이미 고대 이집트의 왕 능과 고분들 약 900여 개가 발굴 된 후며, 다른 왕들과 달리 투탄카멘은 소년 왕으로서 18세 까지 불과 9년 밖에 집권하지 않아, 많은 학자들이 무덤이 없을 것으로 추정하여 수색을 중단하였던 관계로 유품들이 고스란히 이집트에 남게 되었다. 창세기 50:1 ~3 의 야곱의 미이라 처리에는 40일이 소요되었고 애도 기간이 70일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상 사망에서 매장 까지의 소요 기간은 미이라 처리에 16일, 붕대 감기 35일, 장례(매장) 70일로 모두 121일 정도가 소요 되거나 미이라 처리 66일, 매장 준비 4일, 매장 26일로 모두 96일 정도가 소요되기도 하였다. 미이라 처리는 나일강 서안지구에서 진행하였다. 무덤 대부분이 서안지구에 위치하고 있다. (1)사람이 죽으면 정결케 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나일강 서안 지구로 옮긴다. (2)원초의 바닷물에 목욕한 뒤에 태양이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듯이 '나일강' 물로 씻는다. 죽은 자의 재생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세례의 의미를 연상 시킨다. (3)향유 또는 향료로 방부 처리를 한다 (4)2.1m X 1.4m 의 미이라 board에서 처리한다. 뇌를 수저나 빨대 등으로 조각내서 옳긴다. 톱밥으로 해골을 채운다. 심장을 남겨두고 간, 허파, 위, 창자(장)등 4장을 옮긴다. 신장이 가끔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는데 몰라서 남겨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장은 소다수로 말려서 아마포로 싸서, 작은 관에 담아서 뚜껑있는 용기에 담아 둔다. 18 왕조 이후는 호루스의 네아들을 상징하는 사람, 자칼, 매, 원숭이 형상으로 표현된 각각의 용기가 사용 되었다.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미이라 만드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전문 직인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전문 직인은 견본을 보여주고 주문을 받는다. 가격이 서로 타협되면 의뢰가 된다. 미이라 처리는 아주 비싼 것, 덜 비싼 것, 가장 싼 것 등이 있는데 그 대략적인 비용은 5~6 만원에서 70 ~80여 만원이었다. 고급의 미이라 처리는 먼저 쇠 갈고리로 콧구멍을 통해 뇌수를 끄집어 내고, 쇠갈고리가 닿지 않는 부분은 약품을 주입하여 씻어낸다. 그다음 예리한 이디오피아 돌 (부싯돌 종류)로 옆구리를 절개하고 오장 육부를 모두 꺼낸 후 오장육부를 야자유로 깨끗이 씻고 또 갈아서 으깬 향료로 다시 씻는다. 이어서 순수한 몰약과 계피 및 유향을 제외한 향료로 복강을 가득 채우고 봉합한다. 그런 다음 이것을 천연 소다에 담그고 70일을 놓아 둔다. 그 이상 감그면 안된다고 한다. 70일이 지나면 유체를 씻고 품질좋은 아마포로 잘라 만든 붕대로 전신을 감싸고 그위 다시 야교 대신 사용하는 고무를 바른다. 그리고 나서 가족이 미이라를 인계 받아 목관에 넣고 옮긴 후 묘실 내의 벽쪽에 똑바로 세워 안치 시킨다. 중급의 미이라 처리는 삼목에서 뽑아낸 기름을 주입기에 가득 넣고 유체의 복부에 주입한다. 복부 절개는 하지 않는다. 오장육부를 꺼내지도 않는다. 향문으로 기름을 주입하고 역류하지 않도록 막은 다음 소정의 일수 만큼 천연소다에 담그어 놓고 70일째가되면 앞서 주입한 삼목유를 복부에서 빼낸다. 이 기름의 효과는 장이나 기타 내장의 부패를 방지 시키고 이와 함께 체외로 배출되는 것이다. 또한 천연소다는 살을 용해시키기 때문에 결국 피부와 뼈만 남게 된다. 작업이 끝나면 유체를 가족에 인계한다. 하급의 미이라 처리는 하제를 사용하여 내장 속을 세척한 다음 70일간 천연소다에 담갔다가 유체를 유족에게 인계한다.
6.수에즈 운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 하였다.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Lakes)를 거쳐 부바스티스(Bubast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백 여년 동안 사용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기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그 유적을 발견하고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므로써 훌륭한 통상로를 개척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새 운하의 건설공사는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 에 의해 1859년 시작되었다. 그는 토목기사로서의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이 운하건설에 대한 집념을 품어 왔었다. 첫 삽이 떠진 후 10년동안 드 레셉스는 오로지 7460만 입방 미터의 흙을 파내는 대규모 토목공사의 감독에만 전념했다. 드 레셉스는 먼저 건설기지로서 포트사이드에 인공 항구를 만들고, 2만명의 노동자들에게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나일강에서 수에즈 지협까지 수로를 팠다. 북에서 남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나간 드 레셉스는 육지에 깊이 7m의 수로를 파서 도중에 있는 호수들을 연결해 나갔다. 그리하여 남부의 비터호 (Great Vitter Lakes)와 소(小) 비터호가 홍해와 연결되어 호수가 바닷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수로를 파서 이들 호수를 다시 침사호와 연결 시켰다. 3,000마리의 낙타가 노동자들의 음료수를 싣고 사막을 지나 맨잘라호 까지 나르고, 거기서 다시 거룻배로 음료수를 포트사이드로 운반했다. 지방어민들이 징용되어 얕은 호수 위에 손으로 수로를 팠으며, 이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뗏목 위에서 잤다. 공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약 8만명의 농민들이 고용되었는데, 그들의 일급은 3 피아스터 (약 3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1863년부터 운하가 개통된 1869년 까지 노동자수는 차츰 줄어들고 대신 준설기와 굴착기가 등장했다. 1869년 10월, 프랑스 기선 루이즈에 마리호가 이 운하를 통과하여 외해로 나간 최초의 선박이 되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의 대표들이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는 식전에 참석했다. 개통일 자정 조금 전에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집트의 프리기트함 한 척이 포트사이드 밖 30km 지점에서 좌초했던 것이다. 개통식에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선박이 새 운하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몰랐다. 파리에서 날아온 급전들은 개통식이 연기되어야 할 것이라는 뉴스를 전했다. 다음날 드 레셉스가,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각국의 선박들은 사고현장에서 불과 5분 거리밖에 안되는 곳에 육박하고 있었다.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 압델 나세르는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불란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점 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6일 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 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 하에 폐쇄 8년만인 1975년 재개통 되었다.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시간은 약 15시간이 걸린다. 운하의 폭은 200 미터, 평균 수심은 20 미터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준설 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 Km에 달한다. 이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는 연결 지점은 4곳의 나루터와 한 개의 해저 터널이 있는데 이 터널은 진입로를 포함하여 총 연장 4.5 Km이다. 운하의 항구는 홍해쪽이 수에즈 이고 지중해 쪽에는 포트사이드 이다.
7.마라
'쓰다'는 뜻. 홍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물이 염수 (소금물)였을 것이다. 오윤무사를 마라로 간주 하기도 하지만, 이 지점 보다 80Km 남쪽의 '아인 하와라' 지역을 마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홍해 (갈대바다)를 건넌 후 3일 길 (민 33:8)을 걸어서 도달하였다는 점과 엘림과 근접한 지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이다. 게벨 함맘 파라운 (바로의 온천산)이 멀리 보이는 홍해 변의 풀이 많이 자라 있는 지역이다. 라스 말라암 (Ras malaab : 운동장 같은 곳이라는 뜻) 이라 부르는 지점 2 Km 남쪽 지점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3) 히하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 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마라에서 발행하여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으므로 거기 진쳤고(민 33:8~9)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마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출 15:24~25)
8.바란 광야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와디 마라(Wadi Mara) 계곡을 따라 나가면 아인 후드라 (Ain Hudra)라고 불리는 바란 광야에 이른다. 바란광야의 뜻은 '굴이 많은 땅'이라는 것으로서 이 지역은 노년기의 산악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온갖 색깔을 띠고 있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산의 골격이 다 돌출된 모습들은 파충류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균 해발 600~750 m 정도의 석회암 산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고 두려운 광야' (신 1:19)로 일컬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미디안과 애굽 사이에 있던 땅'(신 1:1) 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쫗겨나 살았던 지역(창 21:21)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 중 정탐꾼을 처음 보냈던(가데스 : 민 13:3,26) 곳이며, 38년 이상의 긴 시간을 보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사무엘이 죽은 뒤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들었던 지역(삼상 25:1)이기도 하다. 민수기 33장 2절, 하박국 3장 3절의 바란 산은 아카바만 서쪽 해안에 있는 바란 광야의 한 산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동쪽 해안인 아카바 만을 향해 계속 내려가서, 아카바 만의 누에바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75 Km 를 가면 이스라엘과의 국경인 타바에 도착하게 된다.
9.홍해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홍해는 '아흐마드 함디 터널' 북쪽 지역의 '팀사' 호수와 '비터(Bitter)' 호수 지역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갈대바다'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갈대(파피루스 등)가 무성했던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홍해의 위치는 현재의 와디 투밀라트 동쪽의 팀사호로 추정한다. 물이 갈라지는 사건은 만젤라 호에서 목격된 것을 토대로 할 수 있다.
10.르비딤
현재의 '와디 베이란' 또는 '와디 레파이드'로 시나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 종려 숲이 있다. 홍해에서 60Km, 시내산에서 54Km 떨어진 이 '바란 오아시스'는 '시나이의 진주'로 불리운다. 창세기 21장 12절의 하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 이드로가 양을 치던 장소이며,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 곳이다. 이곳에는 현재 모세 기념 예배당과 여자 수도원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아랍화 이전까지 이곳은 기독 신앙의 중심이었던 지역이다.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출 17:1) ※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출 17:8) ※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출 19:2) ※ 알루스에서 발행하여 르비딤에 진쳤는데 거기는 백성의 마실 물이 없었더라 르비딤에서 발행하여 시내 광야에 진쳣고(민 33:14~15)
11.시내광야
시내광야는 시내산 동쪽에 있는 에르 라하 (er Raha) 평원 지역으로 해발고도 800m 로서 현재 성 캐더린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시내산의 한 줄기이다. 시내광야 주변의 지형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모세산 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 (2,285m), 캐더린산(2,642m), 세발산, 세일산 등으로 해발 2000 m 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뿐이다. 이들 산악과 평야는 화강암, 편마암, 섬록암이 그시내산은 가데스에서 11일 길(신 1:2)이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7장 30절, 38절, 갈라디아서 4장 24~25절 등 4번 언급되고 있다. 모세 일행은 출애굽 1년 3월 15일에 이곳에 도달한다. 이곳의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은 '산/ 앞에 장막을 치고 거주한다. 이 평원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기간 체류하였다.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출 19:1~2) ※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레 7:38)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 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민 1:1)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민 1:19)
12.성 캐더린 수도원
4세기 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되고 순교를 하게 된다.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 이 사건 이후 시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 330년에 헬레나 모후가 불붙는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짓는다. 4세기 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고 5세기 중엽에는 시나이 교구가 성립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요새화된 장방형의 수도원을 건설 하였다. 이 수도원이 완성 된 것은 A.D. 557년 이다. 7세기 때 아랍인들이 점령을 해서 수도사들이 30명 까지 줄어들었다가 수도원장이 모하메드에게 수도원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였고 모하메드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십자군들이 등장함에 따라 수도원은 서방세계의 기독교와 아랍 지역의 모슬렘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197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 했을 때도 수도원은 보호 되었다. 이곳은 또한 이콘이라고 불리우는 목판 성화의 보고이며 2000여 개가 넘는 이콘들이 보관 되어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 내에 있는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주후 6세기 중엽에 건설 되었다. 이 교회로 들어가는 나무 장식 문은 건립 당시 만든 문으로써 1400년 이상 된 문이다. 교회 안에는 12 기둥이 있으며 이것은 12 달을 의미한다. 기둥 위에는 그 달의 성자 이콘이 있다. 이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떨기나무의 기념 에배당이 있고 이곳은 지금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나타낸 교회 전단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왼쪽부터 엘리야, 요한,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 둘레에는 12 제자, 12 예언자, 건축 당시의 수도원장 롱지너스, 집사 요한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둘러져 있다. 이 교회 근처의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종류로써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13.오윤무사
'모세의 우물'이라고 부른다. 수에즈에서 54 Km, 터널에서 홍해변으로 남쪽 26 Km 지점에 있다. 한때 10여개의 우물(샘)과 500여 그루의 종려나무가 자리했던 이곳에는 현재 거의 말라가는 우물하나가 시멘트로 단장된 가운데 있고, 주위에는 많은 야자수(성경에는 종려나무로 기록되어 있다)들이 있다. 그리고 이 종려나무 외의 다 른 수종의 나무가 보이는데 이 나무는 상수리과에 해당하는 에셀 나무이다. 초기 여행자들의 기록에는 야자수 숲과 연중 마르지 않는 10여개의 샘이 있는 아름다운 오아시스로 묘사되어 있지만 현재는 그간의 중동전 등으로 파괴되어 그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14.시나이 반도
시나이 반도는 6만2천㎢ 크기의 삼각형 모양의 대륙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학적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남은 홍해, 동은 아카바만(평균 깊이1,850 ㎞). 서는 수에즈만(평균 깊이 110 m), 북은 지중해로 둘러 쌓인 곳이다. 북부는 기후가 온화하며 평균 강우량 150㎜에 이르고, 비옥한 계곡과 오아시스가 많이 있는 남부는 평균 강우량이 60㎜ 정도이다. 현재 시나이 반도에는 25만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약 60%가 아랍계열의 유목민인 베두윈 족이다. 이들 베두윈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좇아 물과 꼴을 찾아서 광야를 이동하고 있으며, 대추야자, 올리브, 귀리등을 재배하여, 식량과 가축들의 사료로 쓰기도 한다. 이들을 규제하는 법은 이집트 국법이라기 보다, 그들만의 부족법이다. 이들은 정착을 위한 농경이나 집을 짓지 않으며, 임시 거주처는 야자수잎 등으로 만들어 지는데 물론 지붕없는 구조로 지어진다. 엘 아이리쉬 지역이나 바란 오아시스 지역의 유목민들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반 유목민 형태를 지니고 있다. 시나이 반도의 여기저기에서 중동전의 전흔을 찾아볼 수 있는데, 수에즈 운하 근처의 높은 모래 둔덕들은 군용 참호를 만들었던 자리들이다. 이 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집트와 터키가 다투었고, 중동전 과정에서는 이스라엘에 점령되기도 했다. 1982년 이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반환하였고, 1988년 이후로 이집트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타바의 힐튼 호텔은 이스라엘이 1970년대 후반에 세운 것으로 지금은 이집트 영역 안에 있다. 시나이 반도의 개발은 1967년 3차 중동전 이후에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구체화되어, 다합, 누에바, 샤름 엘 쉐이크 들에 정착촌을 건설하였고, 홍해변에 고속도로를 1971년에 완성 시켰다.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시나이 반도 북단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가는 길로서, 이 길을 팔레스타인 길, 블레셋 길, 또는 바닷길 (Via Maris)이라고 한다. 또한 이길을 고대 이집트에서는 'Way of Horus'라고 하여 군용도로로 활용하였다. 이 길을 통하여 사람들의 이동, 사상의 전파, 생산물의 교환이 주로 이루어졌다. 고대에는 이집트와 동방의 나라들 간에 긴밀한 접촉과 교류가 있었으며 시나이 반도가 그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였다. Ⅱ. 요르단
1.아카바(Aqaba) : 에시온 게벨
아카바와 에일랏은 홍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쌍둥이 도시이며, 이 중 아카바는 요르단의 유일한 해변 도시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이집트에서 연결되는 배편이 이곳을 항해하고 있으며, 걸프지역에서 아프리카 지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기도 하다. 아카바는 고대의 에시온 게벨에 해당하는 곳으로, 오늘날 이곳에는 고대 에시온 게벨에 있었던 솔로몬의 구리 제련소의 흔적이 있다(신 2:8, 왕상 22:48).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에시온 게벨은 출애굽 여정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쳤던 지역이며, 솔로몬 때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민 33:34-35, 신 2:8, 왕상 9:26). 10세기 말엽 애굽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사왕 때에 에돔을 점령하면서 여호사밧왕 때에 이르러 다시 복구되어 해상 무역을 재개하였으며 주전 6세기까지 홍해를 통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고대에는 왕의 대로가 연결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고, 로마시대 때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암만, 페트라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건설되어 이 길을 통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도록 하였다. 요르단이 아랍화된 7세기 이후에는 아카바 주교청이 자리하기도 하였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들에 의해 요새화 되기도 하였으나. 1170년에는 살라딘에 의해 점령되었다. 1250년 마멜룩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고 16세기에는 오토만 터어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아카바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평범한 어촌 마을로 자리하였다. 1차 대전후에는 아랍 혁명의 과정에서 이곳을 점령하여 오토만 터키의 세력을 몰아내나 곧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요르단이 독립한 후, 후세인 요르단 국왕에 의하여 1965년에 해안선이 조정되었다. 후세인 왕은 6000 sq km의 요르단 사막을 사우디 아라비아에 제공하는 댓가로 12 km 의 해안선을 요르단의 영토로 영입함으로 바다로의 출구를 확보하였다. 요르단과 이스라엘간의 국경 지역 오른쪽, 아카바 서쪽에 자리한 '텔 엘칼리파'(칼리프들의 언덕)의 유적 발굴 결과 고대 에시온 게벨에 있었던 솔로몬의 구리 제련소의 흔적을 발견하였으며, 이곳에서의 구리 제련 작업은 기원전 10세기에서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현재는 홍해를 이용한 휴양 도시로 발달되어 있다(민 33:34-35, 신 2:8, 왕상 9:26).
2.페트라 / Petra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 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 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3.아인 무사 : 모세의 우물
'아인 무사'란 아랍어로 모세의 우물이란 의미이다. 세개의 하얀색 돔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 들어가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샘물을 볼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낸 곳(민 20:11)이라 하나, 위치적으로 성서의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로 보기는 어렵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 시켰던 모세를 기념하기 좋은 장소이다.
4.성지의 도로
(1) 왕의 대로 (KINGS HIGHWAY 민20:17) 이집트 12 왕조의 파라오, 세소스토리스 1세가 처음 북방 무역의 길을 열기 위해 가나안 경영에 착수했으며, 신왕국에 들어 와서는 투트모스 1세 때부터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 시리아를 정복하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정복했다는 기록과, 지리적으로도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보다 요르단에 훨씬 가깝고, 당시 이집트의 국력에 비추어 모세의 출애굽 이전 시기인 중왕국이나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가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부터 왕의 대로(King's Highway)가 요르단의 남북으로 길게 종단하고 있었으며, 이 대로는 낙타를 이용한 대상들의 무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의 바벨로니아, 앗수르, 터어키 지역의 힛타이트, 이란의 페르시아 등의 여러 제국의 군대와 문물이 오가던 주요한 길이었다.
여기에 동방에서 시작된 비단길의 주요 경로가 되기도 하였다. 왕의 대로를 오가며 이 지역을 장악했던 나바테 족, 로마, 비잔틴, 아랍, 십자군, 오트만 터어키 등은 모두 독특한 문명의 흔적을 이 땅 여러 곳에 남겨 놓아 오늘날 이곳은 진주와 같이 빛나는 소중한 문화적 유적들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아카바 - 에돔 - 모압 - 암몬 - 길르앗 - 바산 - 다메섹 - 바벨론
(2) 사막의 도로(DESERT HIGHWAY 에돔, 모압 광야길) 고대 모슬렘들의 '순례의 길' 이기도한 도로로, 미디안 지역(사우디 아라비아)과 동부 아프리카를 연결하였고, 국제 무역을 통한 에돔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던 도로이다. 지금은 마안으로 부터 수도 암만 까지 사막 고속 도로가 뻗어 있다.
5.암만
암만은 현대의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까스르 라가단 : Qasr Raghadan)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고대 근동의 주요한 고대도시의 하나이다. 구약시대 '암몬의 랍바 성읍(신 3:11)'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랍바' 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 란 의미를 지닌다. 이곳 랍바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암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였다. 랍바를 중심으로 했던 암몬 왕국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다. 두 나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 4백년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암몬' 은 롯의 후손(창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민 21:24-35, 신 2:19-37). 이 시기에 암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민 2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갓 자손에게 분배하였다(수 13:24-28).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사사시대 동안(1,200-1.025 B.C.) 암몬 족속들은 모압의 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삿 3:12-30). 사사 입다의 시기(삿 10:6-12:6)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사울왕 때(기원전 1,025년경)에 암몬왕 나하스는 요단강 서편지역 '야베스 길르앗'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다윗의 암몬 정벌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삼하 10:1-14), 솔로몬(c. 970-945 B.C.)은 그의 후비와 빈장들 중에 암몬 여인을 취했고, 그들의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가증한 몰렉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신전을 지었으며(왕상 11:1, 6, 7),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 즉 르호보암 왕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 사람이었다(왕상 14:21).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과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대하 20장), 웃시야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대하 26:8), 요담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대하 27:5). 알렉산더 이후 랍바 암만은 기원전 259년에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통치되면서 '필라델피아' 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되는데, 이는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인 '필라델푸스(Philadelphus, 283 -246 b.c.)' 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제논 파피루스에서는 이 도시를 '비르타(Birta)' , 즉 '성곽 거주 지' 라 불렀다. 기원전 21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이 성을 포위하고 수로를 차단하여 정복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한 나바테안 때문에 오랫동안 지배하지 못하였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이 성을 점령하고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필라델필라델피아는 로마 시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 의 중심지로서 홍해와 다메섹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기원 후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주교가 있는 요단강 동편 지역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주후 325)와 칼케돈 공의회(주후 451)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세워진 성 엘리야 교회와 성 조지 교회는 6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교회였다. 635년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움마야드 시대(661-750)를 거쳐 압바시드(750-969), 파티미드(969-1071), 십자군(1099-1268), 마멜룩(1263-1516), 오토만(1516-1918) 시대를 지나 영국 위임 통치 기간동안 자치 정부를 인정받은 요르단 왕국이 독립한 이후 요르단의 수도로 선택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르단 최대의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정치, 경제적 전략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지금은 인구 1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겔 25:5, 암 1:13-15, 렘 40:14-41:4, 스 9:1-2 이하, 느 13:23-27, 느 4:3, 삼하 11, 신 3:11, 사사기 11:1, 삼상 11:2, 삼하 10:, 17:27, 암 1:13-15)
6.느보산
해발 835m의 느보산은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이다. 40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 는 이곳에서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민 21:20, 23장, 신 4:49) 느보산은 성경의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과 동일한 장소로 히브리어로'비스가'란 '꼭대기' 라는 의미이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리 족속의 온 지경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 머물러 살기를 원했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요단 동편 지역을 분배해 주게 되는데 느보는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다(민 32:3,38 대상5:8). 기원전 9세기의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 의하면 느보읍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의 도시였다. 그런가 하면 성경은 느보가 모압의 도시였다는 보도를 남기고 있다(사15:2 렘48:1,22). 1933년 시야가 산이 바가티의 지휘하에 발굴이 시작된 이래 1935년, 1937년에 수도원의 모자이크를 발견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기원 후 4세기 말엽 비잔틴 시대에 모세 기념 교회가 시야가 산 정상에 세워졌으며 교회는 각종 새와 동물들이 새겨진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6세기 후반에 첨가된 새 예배당에는 무덤 터가 파괴된 후 그곳에 새로운 침례소가 설치되었는데 대략 597~8년경에 건설되었다. 현재 느보산 정상에는 모세의 무덤 위에 처음 세웠다는 교회 터가 다시 복원되어 있으며, 1932년에 세워진 프란체스칸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고도 하며,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순례하거나 수도원을 짓기도 하였다. 물론 느보산 또는 비스가 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이 산맥의 한 지점일 것만은 분명하다. 느보산 모세 기념 교회 앞 공터 전망대에서 살펴보면 멀리 사해와 여리고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날이 맑은 날은 그 시야가 더 넓게 펼쳐져 예루살렘의 감람산 지역까지도 식별이 가능하다. 이곳 정원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의작품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놋뱀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의미 깊은 작품으로 모세를 거역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를 인하여 불 뱀에 물려 죽은 사건의 상징물이다(민21:6-10). 시야가 교회 왼쪽으로 있는 둥근 언덕은 브올의 아들 발락이 발람에서 모압평지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요청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민 21:20, 민 23:14, 민 32:3, 민 32:38, 민 33:47, 신 3:17, 신 3:27, 신 4:49).
Ⅲ. 이스라엘
1.쿰란 / QUMRAN 사해 서쪽 해안의 절벽 지대의 한 동굴 속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는, 친구를 불러 동굴 속으로 들어 가 보았다.
입구는 좁았지만 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안은 길이 8.5m, 너비 3m, 높이가 3m 나 되는 꽤 큰 굴이었다. 그곳의 한쪽 구석에는 깨진 질그릇 조각들 사이로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높이가 60㎝ 가량되는 큰 항아리들이었다. 무하마드와 아메드는 조심조심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들이 드러났고, 꺼내보니 얇은 양가죽을 꿰매서 이은 두루마리였다. 너비 44 ㎝에 길이 1m~8m 나 되는 그 두루마리들에는 뭔지 모를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보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골동품상에 가져가면 몇 푼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소년은 그것들을 꺼내 들고 동굴을 나왔다. 무하마드가 다섯 개, 아메드가 세 개...
두 소년은 베두윈 족장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아메드는 골동상 한 군데에서 싼값으로 두루마리 세 개를 팔고 돌아갔다. 무하마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 상인은 알아보고 나서 값을 매기겠다고 하였다. 족장과 무하마드는 그 상점에 두루마리 다섯 개를 맡기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골동상 주인은 그 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사무엘 대사교를 찾아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사교는 할 말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사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 글은 히브리 글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다. 사무엘은 이 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태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이 당신께서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구약은 그때까지도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사무엘의 가슴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히브리 글자로 씌어진 이 두루마리가 구약의 원본이라면?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동방 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다. 확대경으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트레버는 어지러운지 잠시 일손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하나님!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어떤 은총으로 내가 이 귀중한 것을 보게 되었을까? 사무엘 대사교님, 이것은 틀림없는 구약성서입니다. 아직 증거가 없다 뿐이지 제 생각에는 구약 원본이 틀림 없습니다." 그때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사본이었는데 이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전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트레버는 한참을 더 살핀 뒤 두루마리 가운데에서 구약성서의 이사야 서를 찾아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트레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의 것입니다. 어서 사진을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서 원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들은 곧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두루마리를 잘 다듬어 사진을 찍는데는 무려 아홉 달이나 걸렸다. 1948년 2월 그 사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3월 15일, 사무엘 대사교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처럼 거룩한 경전을 구해서 보내주신 대사교님께 축복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 문서는 구약 원본이며 기원 전1백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발견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발견이며,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발견입니다. 부디 나머지 두루마리도 찾아서 구약 39권을 모두 갖추게 되기를 빕니다."
그 무렵, 이름 난 성서학자인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장 수케닉 박사도 옛 두루마리 세 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메드 소년이 판 두루마리였다. 그 또한 이 두루마리가 구약 원본임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두루마리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이 구약 원본임을 증명하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나머지 두루마리 다섯 개를 사무엘 대사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무엘과 수케닉이 만난 날, 두루마리 여덟 개가 합쳐진 날, 그 날은 인류가 잃었던 보물을 되찾은 날이 되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두루마리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나서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수케닉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여러분, 이 두루마리에는 구약의 이사야서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에세네 교파에서 썼던 '공동체 계율','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싸움','감사 찬미가 모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크나큰 기쁨과 행운을 얻는 일이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입니다."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드 브오(R. De Vaux)가 사해 일대 탐험에 나섰다. 브오 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 그리고 그곳 베두윈들을 데리고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벼랑으로 갔다. 브오 신부는 그곳에 에세네 교파가 살았던 자취가 반드시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 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을 대비하여 여기 저기 흩어 놓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브오 신부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탐험대는 동굴을 열 개나 더 찾아 내었고, 그 안에서는 두루마리가 수백 개나 쏟아져 나왔다. 탐험이 계속 될수록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바위 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 도시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Essene) 집단의 수도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이 보다 높은 지점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겨울철의 우기에 흘러내려 오는 빗물이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물 탱크에 자동적으로 저장되었다. 한 주간 중 평일에는 근처의 수많은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엣세네 수도자들이 안식일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물로 씻는 정결 예식과 성서 연구를 하였고 공동의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이곳에 갖추어져 있었다. 또 키르바트 쿰란 (Khirbat Qumran)이라고 불리는 수도원 건물도 있었다. 수도원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붓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동안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그 방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했다. 뒷날 실험하여 보니,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는 같다고 밝혀졌다.
브오 신부의 탐험으로 밝혀진 사해 동굴의 옛 유적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 사해 바닷가를 거닐기 전에 이미 이곳 동굴들에서는 에세네 (Essenes)파로 불리는 한 무리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 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 '빛의 아들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세상의 종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이 되자 그들은 '어두움의 아들들' 이 아닌 로마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끝까지 항거하는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린 뒤 유태인들을 수천년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 10군단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진 듯하다. 쿰란 공동체'에서 찾아낸 두루마리들에는 '에스더서 (Esther)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다. (에스더서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또 에세네파가 지켜야 할 '공동체 계율' 같은 기록들도 많이 있다. 이곳에서 나온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구약과 거의 다름이 없다. 단 '쿰란 공동체'를 처음 만든 '정의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어떤 이는 그가 예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 전체의 구원을 바랐던 데 비해 에세네파는 자기들만의 구원을 빌었으므로, 정의의 스승을 예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정의의 스승'은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꽤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 광야에서 선교하던 세례 요한이나 근처의 요단강에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했던 예수도 이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는 발견된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scroll)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은 구약 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 등으로써, 대부분 양피 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들이다. '사해 두루마리'는 그 뒤로 수케닉 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에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Yadin)이 사무엘 대사교의 두루마리를 25만 달러에 사들여,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다.
2.사해
최장 길이 85 Km, 최장 폭 17Km 표면적 약 1,015 평방 Km 인 사해는 그 수면이 지중해보다 398m나 더 낮다. 즉 지구 표면 중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이다. 구약에는 염해(창 14:3)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생물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에 사해(死海)라고 불리며 염도가 약 33%로서 세계적으로 염분이 가장 많은 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해에 들어가면 손발을 휘젖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둥둥 떠 있게 된다. 혹시 손발을 휘젖다가 물방울이라도 튀어 눈에 들어 간다면 눈이 쓰라려서 그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보통 바닷물이 4-6 퍼센트의 염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해물은 그 5배나 되는 것이다. 사해가 그렇게 많은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는 그 물이 흘러 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요단강 등 주변에서 유황과 질산 성분의 물질들이 함유된 약 7백만 톤의 물이 매일 쏟아져 들어 오는데 빠져 나갈 구멍은 없고 요르단 계곡의 뜨거운 열기는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화학물질 등 고체 성분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사해의 포타슘 매장량은 전세계가 이곳에서 나는 것만 쓰더라도 100년을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포타슘은 비누, 비료들을 만드는데 쓰인다.사해 주변에는 사해 물을 분석해서 광물질을 추출해 내는 공장 들이 있다. 사해의 물은 피부병에 특수한 치료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또한 이곳의 검은 흙은 신경통 등에 특효라고 전해진다. 세계 각국에서 치료차 사해에 오는 사람들이 있고, 이 근처에는 이들을 위한 특수 병원도 있다. 사해 지역에 위치하였던 도시로는 소돔, 고모라, 아마드, 스보임(창 10:19) 이 있으며, 이 도시의 왕의 목록도 이어 기록되어 있다(창 14:2), 소알(창 13:10) 또한 이 지역의 도시였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이 지역은 "물이 넉넉하여 ..... 여호와의 동산" 같았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창 13:10, 사 1:10). 3.여리고(Jerico) 고대 제라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도시를 가지고 있는 여리고는 사해 북동 쪽 13 ㎞ 지점 유다 광야에 자리잡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여리고는 예로부터 키가 10 m 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많아 '종려의 성읍'(신 34:3, 삿 3:13) 으로 불리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첫 발을 디디던 도시였다. 물이 귀한 사막 한 가운데 물이 솟아나오는 여러 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주변의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유다 광야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천연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여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한다. 요르단 골짜기 (해발 -225 m )에 위치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매우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다. 헤롯 대왕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도시에 자신의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으며, 그의 삶도 여기서 끝이 났다. 성경의 여리고는 구약과 신약의 각각 다른 두 곳이 있다.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당한 최초의 도시 여리고는 Tell es-Sultan 이라고 불려지는 곳이며(수 5~6 장), 가나안 점령의 교두보였다. 예로부터 이 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로서 물과 음식을 얻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시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여리고 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도 하였다. 이 길 사이는 유다 광야가 놓여 있어 일반적으로 위험한 길이었다(눅 10:25~37). 예수께서 이 도시를 들러 지나가시곤 하였던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헤롯이 지은 별장이 있는 와디 퀠트 (Wadi Qult)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눅 19:1~10)와 또 거지 소경 바디매오를 만나 구원을 이루시기도 하셨다(막 10:46~52). 신약의 여리고는 AD 68~69년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가면서 모두 멸망시켜 버렸다. 비잔틴 시대에 여리고 근처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자리를 잡았으며, AD 480년 이집트 테베의 요한이 와디 퀠트에 자리잡은 성조지 수도원은 유명하다. 요한은 516년에 가이샤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노년에 이 수도원에 돌아와서 여생을 보냈다. 525년 그가 죽은 후 코시바의 게오르기아, 즉 성 조지가 이 수도원에 살면서 그를 기념하여 수도원의 이름이 확정되었다. 9세기 이후 십자군 시대에 매우 활발한 수도원으로 자리 잡았으나 십자군 이후 급격히 퇴락하였다. 한편 여리고 서편의 유다 광야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막 1:4~5, 마 3:1), 요단강에서 멀지 않은 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알려져 있는데(마 4:1~11, 막 1:12~13), 성경이나 다른 자료들에서는 예수님이 정확히 어느 곳에서 사십 일간 금식을 하셨는지 찾아 볼 수 없다. 훗날의 구전(later tradition)에 의하면 여리고 옛 도시 뒷켠에 높이 솟아 있는 카란탈 산 (Mount of Qarantal)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받던 시험산이라고 한다. 6세기에 산 동쪽 기슭 예수님이 있었다는 동굴 윗켠에 교회가 하나 지어져 있었으나 13세기에 없어져 버리고 다시 1874년에 희랍 정교회에서 지은 수도원(Sadandarion Monast ery)이 남아 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여리고는 난민 수용소로 변했으며, 1948년부터 1967년에 이르는 동안 7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흙벽돌로 지은 난민촌에서 살았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 도시는 쫓겨난 난민들의 무너진 집들만이 남아 있으며, 아름다운 '종려의 도시'에는 일부 아랍인들이 머물러 살아가고 있다. 1993년 9월 13일 와싱톤에서 조인된 이스라엘과 PLO 간의 평화협정으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PLO의 자치 행정구로 인정되어, 당분간 PLO의 행정수도로써 그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가 새로운 건설을 위한 주역을 담당할 도시로 변하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여리고는 알렌비 다리를 통한 요르단과의 교류의 창구로써 팔레스타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과의 통행으로, 외교 및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것이다.
4.마사다 (MASADA)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 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 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2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 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는 그의 저서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를 통하여 마사다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대군 지휘관이었으나 나중에 로마군에 넘어간 사람이다. 그는 비록 조국에 등을 돌렸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전투를 기록으로 남겼다. 요세프스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 마사다에서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서기 73년의 어느 봄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 : 주전 160~143) 이었다. 그 후 유대왕 헤롯 (Herodes) 이 주전 35년에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둘러 난공 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그녀에게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로마에 기대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로마의 배신을 두려워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의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롯이 죽은 뒤, 서기 66년 유대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여명의"열심당원" 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마사다에는 엄청난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가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들은 신선했고 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롯왕이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 마련되어 있었다. 사막과 다름없는 들판을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열심당원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대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960여명. 로마제국으로 볼 때는 한줌에 지나지 않는 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이들을 쳐부수도록 엄명을 내렸다. 마사다는 끊임없이 로마군 진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기지로 쓰였으며, 그것은 꺼져가는 반란의 불길을 또다시 타오르게 할 염려가 있었다. 또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서기 72년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그는 9천에 가까운 군대와 함께 6천이 넘는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일꾼으로 이끌고 왔다.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은 무기와 식량이 넉넉했으므로 아무리 오래 포위하고 있어 보았자 지치는 쪽은 로마군 이었다. 로마군은 먼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대광야 너머에서 날라와야 했다.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실바는 '흰 곶'이라고 불리운 그 바위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비탈 길이는 200 m 로 꼭대기가 마사다 성벽보다 겨우 20m 아래였다. 로마군은 비탈 위로 공성탑을 만들어 올렸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들이 활을 쏘며 엄호하는 사이 다른 병사들이 공성퇴(Battening Ram)를 끌어 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공성퇴는 무서웠다. 공성퇴에서 날아간 20㎏ 이 넘는 돌들은 끝내 마사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서둘러 무너진 성벽에 또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 대들보들을 두겹으로 구불구불 쌓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미사일 공격'으로 바꿨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자 나무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실바는 기쁨에 넘쳐 그의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다음날 아침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쳐 들어 가기로 했다. 로마 병정들은 유대인들이 한 명이라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새 물샐틈 없이 지켰다. 그날밤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남자들을 모두 한 군데 불러 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이다. 어둠이 물러가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있다. 그것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기 전에 그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란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자." 벤 야이르의 말이 다 끝나자 어떤 이들은 기꺼이 그 말을 따르려 했지만, 마음 약한 사람들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길이요.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없는 유대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였소. 다메섹에서는 일만 팔 천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애굽에서는 육만 명이 죽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소.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 주겠다고 꼬이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소. 우리를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고, 우리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 하오. 우리는 용기로써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소. 아직도 우리 손은 자유롭고, 이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소.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용기로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읍시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되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경탄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성을 불질러 로마인들이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해야 하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겨 놓으시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되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져 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부드럽게 껴안고 아이들을 감싸고 눈물이 그득한 채 긴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들의 손으로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 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내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식구들의 주검 옆에 눕자,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그 마지막 한 사람이 나머지 아홉사람을 죽였다. 그는 주검을 둘러보았다. 모두 숨이 끊어 진 것을 보고 성안에 불을 놓았다. 그는 이윽고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서기 73년 4월 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다음날 아침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 놓았다. 그러나 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성은 무서운 고요함에 쌓여 있었다. 타다 남은 불길과 즐비한 주검들이 그들을 맞았다. 로마군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결단과 용기로 이루어진 죽음 앞에서 기뻐 할 수는 없었다. 로마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그녀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실바는 두 여자와 다섯 아이들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여 년 뒤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페르샤 이슬람교도들이 유대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이,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나타내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요세프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때 마사다에 있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유대를 버리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요세프스의 기록이 진실임이 밝혀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미국인 학자 로빈슨 (Robinson)과 스미스(Smith)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1963년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하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를 찾아 그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였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사바(As-Sabba : 저주 받은 땅) 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은, 많은 탐험가들의 손으로, 요세프스가 남긴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갔다. 1963년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고고학자 야딘 (Yadin)에게 요세프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발굴을 부탁했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나중에는 참모총장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 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대광야와 사해 근처의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부터 1964년 5월, 1964년 11월부터 1965년 4월 까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프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 냈다. 야딘은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어 발굴을 도울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워낙 외진데다 참기 어려운 날씨가 계속되는 고이었으므로,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가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 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세계 스물 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 천 여명은 한번에 두주일 씩 스물 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으며, 가드나 (Gadna : 청소년 전투 부대) 학생들과 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 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은 곳에 발굴 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상 마사다 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 Km 로 불어 천막을 갈기갈기 찢었고,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짝 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우고 말라붙은 개울을 강으로 바꾸었다. 캠프와 캠프 사이를 흙탕물이 넘쳐 흐르고,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롯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찰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바위산 꼭대기 웅덩이들에 고이는 빗물을 옛사람들이 저장해 두었다가 잘 썼으리라고 알 수 있었다. 야딘은 맨 먼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을 파냈다. 그것은 요새가 아니라 화려한 벽화와 로마식 목욕탕이 딸린 헤롯의 왕궁이었다. 대왕은 이 벼랑 꼭대기에서도 찬물,미지근한 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야딘은 여기서 처음으로 시체 셋을 찾아 냈다. 해골 하나는 젊은이의 것으로, 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다른 해골은 젊은 여자의 것으로, 까만 머리카락이 금방 손질한 듯 땋여진 채로 남아 있었고, 또 하나의 해골은 어린아이의 뼈였다. 이 세 궁전을 발굴하느라 자원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해야 했다. 헤롯이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 경치 좋고 험한 요새인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3층왕궁 옆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무너진 이 건물을 되살리기 위해서 발굴팀은 트랙터와 기중기를 써야만 했다. 이스라엘 육군 공병대가 기중기와 트랙터를 뜯어서 올린 뒤 다시 짜맞춰 주었다. 창고에는 기름, 술, 밀가루 단지 깨어진 것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또 식량이나 일거리를 나눌 때 쓰였던 토큰들도 있었다. 한두 군데는 불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일부러 남겨둔 창고였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 헤롯의 별장인 서궁과 커다란 수영장도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둘러 흰돌로 성벽을 쌓고 군데군데에 탑 38개를 세웠다. 탑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은 모두 110개. 유대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그밖에도 작은 궁 셋이 더 있었고, 특이한 것으로는 미크베 (Mikve) 라 불리우는 유대교의 침례의식 목욕탕이 있었다. 발굴팀은 갖가지 항아리와 생활도구들, 그리고 '유대인의 자유'라고 씌여진 진귀한 동전, 온 세계를 통틀어 여섯 개 뿐인 은화 세 개, 가장 오래된 천 조각 따위를 찾아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소득은, 서기 73년 이전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구약성서 14개였다. 그것들은 시편, 레위기, 에스겔서, 신명기 부분들과 유대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와 외경인 '벤 시라의 지혜서', 그리고 사해 동굴에서 나온 에세네파의 두루마리 성경들이었다. 열 한달 동안 야딘은 유대 반란군들이 쓴 검소하고 한 맺힌 유물들과, 헤롯왕이 세운 사치하고 화려한 유적들이 나타내는 뚜렷한 차이를 지켜 보아야 했다. 고고학상으로는 헤롯의 유물이 더 값졌지만, 정신의 고귀함은 유대 반란군의 유물에서만이 볼 수 있었다. 마사다를 '영웅들의 성지'로 만든 것은 바로 이 고귀한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 승화되어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군 장병들의 선서 식장으로 활용되고, 이곳에서 그들은"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에 독립한 조국이 다시는 외적에 의해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5.요단강 (River Jordan)
이스라엘에서 가장 길고 큰 강으로서 대협곡의 시작인 헬몬산 남쪽 기슭으로부터 훌라 계곡을 따라 갈릴리 호수로 이어지는 상부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남쪽 하구를 통과하여 요르단 골짜기를 따라 사해에 이르는 하부 요단강으로 나누어진다. 이 강의 길이는 약 500 Km, 북쪽의 해발 900 m 로부터 해발 -210 m 의 갈릴리 호수, 그리고 -400m 의 사해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흐르고 있다. 현재의 강 폭은 8~15m 로 비교적 좁은 편이나 고대 요단강은 매우 크고 자주 범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렬이 요단강을 건너던 때의 기록 가운데,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수 3:15) 하여 요단강이 우기 (10월~3월)에는 항상 큰 강으로 변하곤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수자원인 갈릴리의 하구에 수문을 장치하여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을 통제하기 때문에 요단강의 모습이 볼품없게 변하여 순례자들에게 종종 실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요단강은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 " (왕하 2:8) 갔으며,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와서 그의 명령을 따라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또 신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인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장소(마 3:13~17, 막 1:9~11, 눅 3:21)로서 새로운 복음의 시작을 알리신 곳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알려진 사해 북쪽 여리고 가까운 곳의 요단강에는 현재 알렌비 (Allenby Bridge) 가 있어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오가는 국경 통과소가 세워져 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마 3:5)
6.팔복산 (Mount of Beatitute)
성경에는 따로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상상수훈을 설교하실 때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1) 하였다. 바로 이 산을 일컬어 팔복산이라 하였으며, 1938년 이탈리아 건축가 바루치 (Barluzzi)의 설계로 이곳에 8각형의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교회의 바닥에는 라틴어로 여덟가지 복에 관하여 모자이크로 새겨 놓았다. 이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갈릴리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다. 산 밑의 야외극장식 벌판을 바라 보면서 2천년 전의 복음의 현장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그 모습은 변화가 없어, 수천 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넘어선 장소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1~2)와 같이 갈릴리 바다를 향하여 가르치시기도 하고,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2~3 ) 와 같이 갈릴리 호수에서 뭍을 향하여 가르치시기도 하였다. 바다는 성격상 육지와는 달리 천천히 더워지고 천천히 식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침과 저녁의 바람 방향은 항상 반대방향으로 불기 마련이다. 즉 이른 아침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저녁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다. 복음서의 두 기록은 서로 가르침의 시간에 따라 바람의 방향을 자유롭게 이용하신 예수의 지혜와 사실성을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 거센 풍랑에 관한 성경의 기록(마 8:23~27, 막 4:35~41, 눅 8:22~ 25) 역시 이 지역의 지형적인 특징에 의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낮은 갈릴리 호수와는 대조적으로 사방이 매우 가파르고 높은 산들 - 동쪽의 1천m 가량의 골란 고원과 북쪽의 2,814 m 의 헬몬산, 그리고 서쪽의 아르벨(Arbel) 산 - 로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기온과 기류의 변화가 매우 심하게 일어남으로써 지금도 높은 파도의 풍랑을 만날 수 있다. 이곳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지 위에 1938년에 새로 건립된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는 이태리 프랜시스컨 수녀회가 돌보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3-10)
7.타브가의 오병이어 (The Loaves and the Fishes)
4개의 복음서에 모두 보도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가운데 하나인 오병이어 사건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의 현장에 세워진 기념교회로 희랍어로는 'heptapegon'(일곱 개의 샘) 이라 한다. '일곱'이라는 숫자인 hepta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히브리어 명칭의 'Ein Sheva'는 일곱 개의 샘이라는 뜻으로 역시 일곱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께서 산에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눅 6:17) 여러 지방에서 온 무리들에게 여러 내용으로 가르치신 후 '빈 들' (눅 9:12)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의 백성을 먹이셨다. 현재 이 사건을 기념하여 세워져 있는 기념교회는 팔복산으로부터 바다로 경사를 내려와 바닷가에 세워져 있으며, 5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위에 1936년에 다시 세워진 카톨릭 성당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남은 모자이크 가운데 오병이어의 모자이크는 매우 유명하며, 갈릴리 호수 주변의 생물들을 새겨놓은 모자이크는 당시의 생태계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값진 자료가 된다. 이곳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932년 이 비잔틴교회 유적지에 물고기, 새, 꽃 등 아름다운 모자이크 그림들이 발굴되었다. '두 마리의 물고기와 5개의 빵이 들어 있는 바구니' 모자이크도 이곳에서 함께 발굴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확인하게 된다. 이 모자이크들 위에 1936년에 건립된 교회를 '오병이어 교회'라고 부른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막 6:38)
8.베드로 수위권교회
이 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시 오셔서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와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던 곳(요 21:1~23)으로 작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4세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해변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주께서 베드로와 함께 잡은 고기를 구워 잡수시면서 대화를 나누시던 바위 (Mensa Christi)가 보존되어 있어, 주님과의 사랑 - 강요된 사랑이 아닌 - 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묵상과 기도처가 된다.
9.가버나움 (Capernaum)
예수의 갈릴리 선교 본부로서 3년 동안의 공생애 활동의 가장 중요한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 4:12~13),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이 도시를 '그의 고향', 혹은 '그의 도시'라 부르고 있다(마 9:1, 막 2:1). 이곳은 고대로부터 '해변의 길' (Via Maris, 사 9:1) 이라는 남북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헤롯 빌립과 안티파스의 경계로 많은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 - 군인, 상인, 여행자 등 - 이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곳이라 여겨진다. 예수의 사역 중에도 로마의 백부장과의 만남이 보도되고 있다. (마 8:5~13) 이 사실은 BC 135년 하드리안 황제 때의 이정표가 발견되어, 가버나움 옛 도시 안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곳에서 예수는 어부 출신의 그의 제자들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 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으며 (막 1:21, 29, 막 4:18~22), 또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시던 회당(마 8:5, 막 1:23, 눅 4:23, 7:2)과 베드로의 생가 (마 8:14, 막 1:29)가 남아 있으며, 특히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명이 예수께서 가르치시던 집의 지붕을 뚫고 들어간 사건 (막 2:1~12)은 유명하다. 이는 갈릴리 지방이 현무암 지대여서 그 돌로 집을 짓고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지붕을 덮는 형태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지역의 고대 가옥이 그러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주로 활동 하시면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으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하셨다. 1838년 미국의 탐험가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inson)이 이 도시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후 여러 차례 발굴을 통하여 알려진 현재까지 남아 있는 회당은 그 기초만이 예수 당시의 것이며, 석회석으로 2층 구조로 남아 있는 건물은 4 ~ 5 세기의 것이다. 또 6세기에는 베드로의 생가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638년 아랍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은 교회는 746년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가버나움 터는 1905년에 발굴되어서 가버나움 옛 회당을 발견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베드로의 집 터 위에 5세기 경에 세워졌던 유적들을 발굴하였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표적인 도시로서 심판의 날에 소돔과 같은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을 선언하기도 하였다(마 11:24). 예수의 사역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등의 도시는 비잔틴 시대 이후 더 이상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배은 망덕 한 도시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하여서 이미 그 도시는 파괴되고 잊혀진 지 오래이다.
11.갈릴리 (Galilee)
갈릴리 지방은 해수면보다 210 m 낮은 곳에 위치한 갈릴리 바다 (혹은 호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요단강 계곡의 평야화 이즈르엘 평원 (yizreel Valley)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각종 산업과 어업이 발달하였으며 다른 지방에 비해 천연적인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다. 그러나 정치적, 종교적 배경으로 볼 때는 구약시대의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종교의 변방으로서 실상 "멸시를 당하던 스블론과 납달리 땅" (사 9:1) 이었으며, 솔로몬 왕때는 성전을 짓기 위해 수입한 백향목, 잣나무 값으로 인하여 진 부채를 값지 못해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떼어 주었으나, 그의 눈에는 들지 않았다 (왕상 9:10~14). 갈릴리 북부의 대부분은 산지로서 크게 유용하지 못하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BC 721년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한 이후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방인의 갈릴리"(사 9:1)가 되었으며, 마카비 전쟁때 "갈릴리에 사는 전 이방인들이 합세하여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 하자 구출을 위해 진군" 하는 기록에서도 그 시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헤스모니안 왕조의 아리스토불러스 1세 ( BC 104 ~ 103) 는 갈릴리를 정복하여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 시킴으로써 갈릴리의 유대 재편입을 이룩하였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갈릴리는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 1세기겨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율법을 증오하는 갈릴리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종교적 이유로 비판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 (요 7:49)로 규정하고,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요 7:52)고 확신하였다. 또한 베드로를 '갈릴리 사람'(눅 14:70)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야 말로 메시아를 대망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자들이었다. 제1차 유대 반란의 진원지가 바로 갈릴리였음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지리적 위치로 보면 예수의 공생애 활동의 선교 본부였던 가버나움은 다양한 계층의 '허다한 무리' (마 4:25)가 통행하던 해변의 길 (Via Maris) 의 통로로써 이곳을 지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음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복음서의 천민(창녀 눅 8:2), 귀족(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자란 요안나, 눅 8:2), 왕의 신하(요 4:46~47), 부자(눅7:36), 군인(로마 군대의 백부장(눅 7:2~10)등의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 시대의 이 지역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미래의 선교 전략을 위한 기초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복음을 받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자발적으로 확산되게 하는 이중적 효과를 예견한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확산과정을 보면 사도들 중심의 선교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어 등장하는 익명의 많은 사람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음 또한 사실이다.
이 바다는 '갈릴리 바다' (마 4:18), '디베리야 바다'(요 6:1),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겐네렛 바다'(민 34:11, 수 12:3, 13:27) 등으로 불리운다. 본래 히브리어 키노르(kinnor)는 하프(harp))로 갈릴리 호수의 모양을 말해주고 있으며, 바다를 일컫는 얌(Yam)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바다'로, 일부는 '호수'로 번역되면서 '바다' 또는 '호수'로 그 명칭이 달라지게 되었다. 길이 21 Km, 폭 13 Km의 이 바다는 해수면이 낮아 해발 -210 m 이고 바다의 수심은 약 44 m 에 이르고 있다. 수십 종의 고기들이 살고 있으며, 그중 속칭 '베드로 고기'는 유명하여 여행자들의 음식이 되기도 한다. 헤르몬 산으로부터 훌라계곡 (Hulla Valley)을 따라 내려오는 물이 저장되어 있는 이 물은 현재 이스라엘 국민의 수원(水原)이 되고 있어 젖줄이라 말할 수 있다. 갈릴리 하구 지역은 예로부터 매우 기름진 땅과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에 적절한 지역이었으나, 그 이외의 지역들은 낮은 곳의 이 물을 끌여들여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이들로서는 별 효용가치가 없었다. 갈릴리의 중요한 산업으로 어업은 빼놓을 수 없다. 예로부터 이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은 여러 지방으로 수출되었으며, 고기잡이 하던 배는 수없이 많았다. 1985 ~ 6 년 갈릴리 호수에서 발견된 BC 1 세기 ~ AD 1 세기의 나무로 만든 배는 예수 당시의 바다에서의 생활을 잘 모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활동을 바로 이곳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한 약 12개 마을을 중심으로 개시하셨으며, 그의 제자들 가운데 6명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 - 이 이곳 갈릴리 출신들이었다.
12.가나 (Cana) 예수는 왜 그의 첫 기적으로 결혼식장에서 포도주를 만든 것일까? 예수는 과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눅 7:34) 이었는가? 예수의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예수를 태초부터 계신 이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실현된 것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가나 혼인 잔치를 천상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6~10)의 선험적인 사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서의 만남으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나다 엘은 바로 이 마을 출신이다. 현재 카톨릭의 프랜시스컨 교회와 희랍 정교회가 각각 하나씩 서 있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기념하고 있다(요 2:1-11).
13.나사렛 (Nazareth) 나사렛은 예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 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사자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사렛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사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크리스챤이라는 말도 히브리어로는 '노쯔리',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나사렛은 에스드라엘론 평원 북쪽, 갈릴리의 언덕에 있는 한 마을이다. 티베리아스에서 31 Km, 하이파에서 39 Km 떨어진 해발 375 m 정도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아랍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 마을 동쪽 산너머에는 새로이 조성되어온 유대인 도시가 있다. 성탄절을 전후한 시기에 성탄절을 느끼게 하는 도시의 하나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 (마 2:22~23, 요 19:19)으로 불린다. 이집트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곳 (눅 2:39)으로, 예수님은 그의 소년시절 (눅 2:51)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초기 그리스도 인들은 '나사렛당'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이것은 지금도 아랍어와 히브리어에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이곳 나사렛에는 오래전에 정착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과, 초기 로마시대 기간에 번성했던 것을 보여준다. 중기 청동기 문명 시대의 해골과 매장터가 도시 상부에서 발굴되었다. 1962년 가이사랴에서 발굴된 한 파편에는 히브리어로 나사렛이라 기록된 기록물이 등장하였고, 탈무드 시대의 기록물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4.므깃도 (Megiddo)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요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15.갈멜산 (Mt. Carmel) 갈멜산은 이스라엘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하이파 (Haifa) 시가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하이파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즈르엘 골짜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약 25 Km 가량의 산맥으로, 종교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산으로 BC 860년 아합왕때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850명이나 되는 사제들에 의해 이방의 종교는 꽃을 피우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는 이들과 맞대결을 통하여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가름 하였다(왕상 18:1~40)
예루살렘 성전이 가장 번창하였던 예수 당시의 제사장 숫자가 약 480명 정도였음에 비교한다면 기원전 9세기의 바알 종교가 이스라엘 내에서 얼마나 극성을 부렸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질서를 세웠으며, 종교적 위기로부터 구출하였다.
영국의 신학자 로울리(H.H. Rowley)는 "모세 없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종교가 태어나지 못하였더라면, 엘리야 없이 그 종교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풍전등화처럼 꺼져가고 있을 때, 등잔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돋아 불꽃을 다시 일으킨 자가 바로 엘리야였던 것이다.
갈멜산 꼭대기에는 1868년에 세워진 '므흐라카' (Muchlaka, 불의제단)라 불리우는 카르멜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본래 십자군의 성채가 있었던 곳으로 수도원 옥상에 서면 지중해 쪽(서쪽) 뿐 아니라, (왕상 18:43~44), 이즈르엘 평원 (북동쪽), 사마리아 산지 (남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왕상 18:40, 22:39), 입구의 벽면에 있는 갈멜산 사건의 부조는 눈여겨 관찰해 볼 만하다. 교회 뜰에 세워진 칼을 들고 서 있는 엘리야의 석상은 보는 이들에게 신앙을 재무장 하도록 요청하는 듯하다.
16.가이사랴 (Caesarea)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에 의해 BC 22 ~ 10년에 세워진 지중해 해변의 항구 도시이다. 헤롯의 건축물은 아직까지도 잘 보존될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다. 항구와 수로, 원형경기장 및 도로,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신전과 궁전 등은 당시의 모습과 건축 기술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가 남긴 극장은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이곳은 BC 3세기 헬라인들에 의해 항구로 사용되었으며, 페니키아와 이집트를 잇는 Straton's Tower 라 칭하는 항구였다. BC 96년 헤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 (Alexander Jannaeus)가 정복하여 유대 마을을 일으켰으나 헤롯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로마식 도시로 변모하였다. 헤롯 대왕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Casarea Maritima'(후원자 가이사)라 칭하였다. 로마로 향하는 팔레스타인의 관문으로써 AD 6년 이후 예수 당시에는 로마의 총독부가 주둔하던 곳이었다(행 12:19). 이 도시의 고넬료라 하는 이다리야대의 백부장은 베드로 사도를 불러 이방인으로서는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이 되었다(행 10:1~43). 아울러 바울 선교 여행의 기지이기도 하였으며(행 9:30, 18:22, 21:8), 그가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 2년동안 (BC 58~60) 이 도시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행 24:27), 그 때 로마의 총독 벨릭스와 후임자 베스도, 그리고 유다왕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론을 펴기도 하였다(행 25~26). 바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면서 이 항구와 작별하였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이 도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로서 오리겐 (185~254년) 과 그의 제자 유세비우스 (260~ 340년) 등의 교부 활동의 중심지였다. AD 640년 아랍에 의해 파괴된 이후 1101년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어 재건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십자군은 이 도시를 악고와 욥바와 더불어 중요한 항구로 개발하였으며, 아름다운 성문과 성채를 수축하였으나, 1265년 마므룩 (Mamluk sultal Baybars) 에 의해 점령되면서 십자군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오늘날에는 옛 항구자리의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십자군 건물을 이용한 식당과 예술품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어 옛 도시의 매력을 남겨 놓고 있다. 텔아비브와 하이파 중간쯤 되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에서 북쪽으로 아취가 연결된 벽이 있다. 이것은 헤롯 왕이 가이사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갈멜산 남쪽의 샘으로부터 약 19 Km 에 이르는 수도(水道)를 건설 한 것이다. 물의 낙차를 이용한 구조물로서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20여 m 정도 높이,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시대의 야외극장이 로마 시대의 성채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구조를 고려하여 거의 신축해 놓은 원형 극장을 볼 수 있다. 유적지의 입구 왼쪽에는 이곳에서 1950년대에 발굴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나타나는 비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터키 이스탄불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 본디오 빌라도, 유대의 수호자, 티베리움을 만들어 아구스도 황제에게 바친다' 라고 되어 있어, 이곳이 빌라도의 거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외에 가이사랴에는 유대인 회당 유적, 비잔틴 시대의 도로 유적 등이 흩어져 있다. 계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는 이 더 넓은 지역은 로마 제국에서 준 수도로 기능했던 거대한 도시 규모를 상상하게 한다.
※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를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사 8:40) ※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명과 마병 칠십명과 창군 이백명을 준비하라 하고(행 23:23) ※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행 23:33)
17.예루살렘
황금의 도시, 영원한 도시,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3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숨쉬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아무런 보잘 것 없는 풍경과 전무한 상태의 부존 자원을 가진 유대 광야의 동편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있는 이 도시를 성경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2) 하였다. 이런 아무 쓸모없는 땅이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았고, '일신교의 보루로서', '세계인의 성도' 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모의 언덕에서 유명한 철학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설교와 도덕적 계율들, 그리고 한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르치셨고 실수와 우상숭배로 인해서 눈 어두워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른 판단의 기준과 신앙적인 확신을 심어준 신앙의 틀을 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 이곳은 전인류의 절반이 종교적인 수도로 믿고 있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옛날의 영광이요 미래 희망의 상징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펼쳐진 곳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하게 지켜본 도시이다. 또한 회교도들은 이곳이 선지자 모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 믿고 있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신성한 도시인 동시에 테러와 전쟁의 피가 끊임없이 흘려진 곳이다. 즉, 칼이 오랜 동안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들의 자손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전쟁을 거쳐왔고, 사람들의 피로 바다를 이룬 적이 수없이 많았었다. 무려 50차례 이상을 포위 공격 당했으며, 36차례에 걸친 정복과 10차례의 심한 파괴를 당했다. 예루살렘의 시초는 고대사 속에 묻혀 있어 알 길이 없지만, '평화'라는 뜻의 '살렘'(salem) 이라는 이름으로 가나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8), 또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겔 16:3) 하였다. 사실상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곳이 된 것은 주전 10세기에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그의 수도로 삼고 (삼하 5:6 ~ 10),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옯겨온 (삼하 6:1 ~ 23)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윗성(City of David)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자신을 포함한 역대 왕들의 무덤이 되기도 하였다. BC 965 ~ 922 년에는 예루살렘을 확장 시킨 솔로몬 왕이 성전과 그의 궁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미화하였다.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문화, 사회등 무든 분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하여 "은을 돌같이 흔하게" (왕상 10:27) 하던 예루살렘은 남북 분열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정복 당하였으며 성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시 137:1 ~ 4) 하며 애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신 하나님의 미래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꿈은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향하여, BC 516 ~ 515 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다. BC 332년 예루살렘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정복 당했다가, 마카비 전쟁을 통하여 성전을 재탈환하고, 헤스모니아 왕가에 의해서 잠시 동안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정복되고 말았다. (BC 63년). 로마의 후광을 입어 BC 37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 된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은 위대한 건축가로서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갔으며, 솔로몬 당시의 성전보다도 더 장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립하고 성벽을 쌓았다. 이성전은 46년 동안이나 걸려 건축되었고 (요 2:20), "헌물과 미석으로 꾸며졌다" (눅 21:5). 이 예루살렘이 예수님 당시의 바로 그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했던 예루살렘도 예수의 예언 (눅 19:41 ~ 44, 21:6,20,24)대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로마의 티투스 (Titus)는 BC 70 년 예루살렘을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되지 못하였으며, 세계에 흩어진 그들에게 있어서 이 도시는 다만 과거의 도시일 뿐이었다. AD 132 ~ 135년 바르 코흐바 (Bar Kokhba) 에 의한 제2차 유대 반란 이후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로마의 도시로 재건되면서 엘리아 카피톨리나 (Aelia Capitolina) 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됨으로써 그 명성있던 이름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스러운 장소에는 로마의 제우스 신전이 세워지고 유대인의 출입이 금해지고 만 것이다. AD 33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예루살렘을 비롯한 예수와 관련된 팔레스틴을 '성지'(Terra Sancta)라 하여 곳곳에 기독교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세워진 성묘교회와 베들레헴에 세워진 예수 탄생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친어머니인 헬레나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러나 614년 페르샤의 침공으로 대부분의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636년 아랍에게 예루살렘이 점령되어 약 500여년간 아랍의 통치하에 있게 됨으로써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아랍문화로 채색되어 갔다.
1099년 예루살렘이 십자군의 휘하에 들어감에 따라 약 200년 동안 라틴제국의 도시가 되었다가, 1187년 살라딘 왕이 이끄는 모슬렘에 의해서 재점령 됨으로써 기독교와 모슬렘 사이의 이중구조 속에서 예루살렘은 변모해 갔다. 1517년 오토만 터어키 (Ottoman Turkey)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400년간의 터키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1917년 이후 예루살렘에 총독부를 두어 위임 통치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신생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자들의 노력과 국제기구의 승인에 의하여 1948년 5월 14일, 2천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다시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 옛날의 영화를 되찾게 되었다. 현재 예루살렘의 신시가지 (New City)는 불과 150여년 전부터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구도시 (Old City)는 1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하여 매우 비좁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오래된 도시이기 때문에 시설이 좋지 못하고 비위생적이었다.
150여년이 지난 지금은 신도시가 구도시의 약 100배가 넘는 신시가지로 발달하였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통합된 구도시는 주로 고적지와 박물관 등을 포함하여 새로운 위생시설을 갖춘 일반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시가지에는 정부청사 등을 비롯한 행정수도로서 그 면모를 현대화해 나가고 있어 옛것과 새 것의 환상적인 조화가 이루어져 있다. 특히 연한 노란 빛을 띄고 있는 석회암에서 반사되는 아름다움은 이 도시를 '황금의 도시' (The Golden City)라 부르게 한다. 18.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 m 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 마련된 14개 장소는 18세기에 와서야 확정된 것이며,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 검증되기도 하였다.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 (마 27:11~14)으로부터 시작되며 예수께서 사형이 확정된 곳이다. 헤롯 대왕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며,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고교회가 서 있다.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하셨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시는 예수를 보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 (요 19:5) 라고 했다. AD 135년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세운 에케호모 아취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가 서 있다. 십자가의 무게와 모양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시몬의 아들들은 '알렉산더와 루포(막 15:21)로 알려져 있으며,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 "(롬 16:13)라 부르고 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계속되는 비아돌로로사는 비교적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올라간다. 1875년에 두 개의 예배실이 세워졌다. 이 곳은 예수 당시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히 13:12~13)
※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 안에 있다.
19.성묘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er)
해골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3) 매년 수백만의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는 이곳 골고다의 성묘교회는 비아돌로로사의 마지막 장소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곳에 세워져 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곳은 해골(Golgotha/Calvary, 골고다/갈보리)이라 하는 곳" 이었다(눅 23:33).
당시 이곳은 '성문 밖'(히 13:12~13)으로 유대인의 처형 장소 및 무덤 지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예수는 당시 유대의 부자이며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 (Joseph of Arimathea)의 무덤에 장례 치러졌다(눅 23:50~56). 그가 행한 장례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장례법의 절차에 의해 행하여 졌다 (요 19:40)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시체는 부정하므로 죽은 후 바로 장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다.
물론 안식일에 죽은 시체는 안식일이 끝난 후 장례를 치른다. 예수의 경우 안식일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서둘러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 19:42, 눅 23:54), 시체를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싼"(요 19:40) 후 "아직 사람을 장례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새 무덤" (눅 23:53, 요 19:41) 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어려울 만큼의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마 27:60) 장례를 끝내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장례법에 의하면 이렇게 장례를 치른 후 약 6개월 내지 1년의 시간이 흘러 시체의 살이 썩어 뼈만 남게 되면, 무덤을 열고 들어가 뼈를 모아 둘 상자에 넣고 무덤의 한 방에 쌓아두며, 그렇게 무덤은 계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예수의 무덤이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 무덤' 이었다는 말 속에서도 이와같은 유대인의 무덤 사용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의 장례법과는 사뭇 다른 이러한 전통은 예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되었다. 주후 326년경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St. Helena)는 성지를 순례한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찾고자 원한다. 한편 이보다 약 200년 앞선 주후 135년경 당시의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었고, 동시에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 위의 비너스 신전을 건립하였었다. 이 때문에 헬레나 황후의 명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메카리우스(Bishop Mecarius)는 골고다 언덕의 위치를 쉽게 찾아내게 되고 신전 지하실에서는 예수님의 못 박히셨던 나무 십자가도 발견하게 된다.
콘스탄틴 황제는 AD 336년경 이 자리에 큰 교회를 건립한다. 이 교회는 614년경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 화재로 파괴되고 그 후 모데스토스라는 사제에 의해 재건 된다. 이 교회가 1009년 회교 군주 칼리프 하켐에 의해 파괴되자 이것을 알고 격노한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연합하여 십자군을 결성, 성지 예루살렘을 회교도 손에서 되찾고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1096년부터 약 200년간 동서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현존하는 교회는 십자군에 의해서 다시 세워진 것이며 그 후 여러 번에 걸친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 졌으나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현재 구교의 6개교단 (희랍정교회, 로마 카톨릭, 시리아 교회, 곱틱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이디오피아 교회)이 이 교회 내에 위치하여, 이들이 각각 분할해서 사용하고 있고 교회의 열쇠만을 이슬람 측이 소유하고 있다. 성묘교회는 1958년 이래 해마다 일부분씩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예수의 본래 무덤이라고 일컬어 지는 현재의 무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지진과 화재로 많이 파괴되어 경건한 러시아인들에 의하여 대리석으로 새로 지어진 것으로서 원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예루살렘의 King David Hotel 남쪽에 남아 있는 헤롯 왕가의 무덤에서 예수 당시의 무덤의 구조와 돌 문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883년 영국의 찰스 고든 장군 (General Charles Gordon)에 의해 발굴되어 또다른 예수의 무덤으로 주장되는 '정원무덤' (The Garden Tomb)은 개신교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데, 다메섹 문 바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인체에 비교하면서 남쪽으로부터 다윗 성의 위치를 하체 부분으로, 성전산을 몸체로, 머리 부분의 위치를 북쪽 해골 언덕 (Skull Hill : 골고다) 으로 추정하여 이 곳을 발굴한 결과 고대 무덤을 찾아 내기에 이른 것이다. 흥미 있는 발상이기는 하나 그가 발견한 무덤은 BC 9~7세기의 구약시대의 무덤일 뿐만 아니라, 이곳이 예수의 역사적인 무덤일 수 있는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방이 둘로 되어 있는데 첫째 방은 조문객들이 모이는 곳이며 둘째 방에는 바위로 만든 침상이 있어서 그 위에 시체를 안치하는 곳이다. 원래의 예수님의 무덤은 1009년에 칼리프 하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희랍 정교회화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식 첨탑이 있는 기념 교회를 1810년 이곳에 세웠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 19:42)
20.감람산 (Mt. Olive)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눅 21:37)
4개의 봉우리를 가진 조그마한 언덕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약 800 m 정도인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예루살렘 동편의 산으로 다윗왕이 하나님께 경배 (삼하 15:30 ~ 32) 하였으며, 솔로몬의 산당 (왕상 11:7 ~ 8)이 있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 산을 자주 찾아와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기도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하였으며 부활 후 마침내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시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장소를 베다니 근방 (눅 24:50)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른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이 감람산 꼭대기하고 한다.
예수님이 체포 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이곳 감람산의 서쪽 기슭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마 21:1 ~ 10, 막 11:1 ~ 11, 눅 19:28 ~ 38, 요 12:12 ~ 19)이 시작되었고, 예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 (막 13, 마 24, 눅 21)하신 곳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 말을 따서 교회 이름을 지었다. Pater Noster라는 말은 '우리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 발이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곳이라고 전해 오는 곳이다. 이 세상 말기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관하여 설파하신 곳도 이곳이라고 전해진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기리기 위하여 4게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 감람산 위에 처음 기념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 인에 의하여 파괴되고 12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진 교회 역시 후일 회교도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현재의 교회는 1875년 프랑스에서 카톨릭의 카르멜파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함께 건립한 것이다. 수녀원 건물 벽에는 한국어를 포함하여 세계 62개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새겨 놓고 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감람산 꼭대기로부터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예루살렘 성으로 내겨가는 기슭 중턱에 매우 독특한 작은 예배당이 있다. 교회의 네 면 귀퉁이에 눈물 모양의 돌이 있는 이 교회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사건(눅 19:41, 마 23:37)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로서 라틴어로는 '도미누스 플레빗' (주께서 우셨다) 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생애 가운데 우신 세번의 울음-나사로의 죽음을 향한 울음 (요 11:35)과 겟세마네에서의 울음 (히 5:7) - 에 비교할 때 단순히 '흐느낌' 과는 다른 '큰 소리 내어 심히 통곡하심'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환호하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큰소리를 내시며 통곡'하신 예수의 눈물의 의미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그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충분한 한 단어이다. 5세기의 수도원이 이곳에 세워진 이래 1881년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의 교회는 1955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가 설계, 완공한 것으로서 지붕을 눈물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곳은 또한 예수님이 여리고로 부터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 마을을 지나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던 길목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던 성벽의 동문(황금문)이 기드론 계곡 건너 바로 정면에 보인다.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이 감람산 꼭대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져 380년 경에 승천을 상징하는 지붕없는 8각형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십자군이 재수축하였으나, 1187년 모슬렘 교도들에 의하여 사원 형태의 돔이 씌워져 기형적인 형태를 갖춘 돔(Dome)이 서 있다. 승천시 밟아 발자국이 남겨진 바위가 사원 둥앙에 보존되어 있으나, 이에 관한 전승은 중세 이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역사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21.시온산 (Mt. Zion)
예루살렘 남서쪽 해발 765 m 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시온산은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잘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히브리어 'Zion'의 어원에 관하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유사 파생어로 '바위'(rock), '산성' (stronghold, Zaion), 혹은 '건조한 곳'(dry place)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처음 사용되는 곳은 예루살렘의 가나안 원주민이었던 여브스족이 머물던 "시온산성을 다윗이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라 " (City of David, 삼하 5:7, 왕상 8:1) 일컬어졌다. 지형적인 의미에서 '시온'과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산이 각각 구별되기도 하였다(미 3:12).
그러나 시온은 넓은 의미에서 예루살렘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였으며 (사 2:3, 33:14, 요엘 3:5), '시온의 딸' (사 1:8, 30:16, 아 1:5),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 (사 10:24, 51:11), '유대백성' (사 51:16, 59:20), '성전산','시온에 거하는 하나님' (요 4:17, 시 20:3) 등 많은 파생어를 낳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온산'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이룩된 대전환점은 다윗왕 때로써 왕권의 형성과 성전의 건축으로 인한 종교제도의 확립을 통해서 이룩한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이때 계약의 내용으로 허락한 것이 땅과 집이다. 이 계약이 행해진 곳이 곧 예루살렘, 시온성이었다. 다윗의 무덤과 역대 왕들의 무덤이 바로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왕상 2:10, 느 3:16, 행 2:29) 제1차 성전이 멸망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 때에 'Zion' 은 넓은 의미로 그들이 잃어 버린 조국의 땅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그 거룩한 땅 (The Holy Land) 에로의 귀향을 의미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은 바로 '시온'이라는 말이 된 것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22.마가 다락방
한편, 초기 기독교에서의 시온산 역시 매우 중요하여, 예수의 최후의 만찬 (막 14:12~25, 마 26:17~29) 과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행 2:1 ~ 13)의 현장일 뿐 아니라, AD 48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사도회의 (행 15:1 ~ 29) 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적 중심이 바로 시온이었으며, 이곳에 세워졌던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이방인 교회의 모교였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시온에로의 귀향'을 하나의 메시아 운동의 핵심으로 보았다. 즉, 그들은 하나임의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드신 다락방, 이곳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 강림의 큰 역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성벽을 시온 문으로 빠져 나가 약 100m 쯤 걸어가면 2층 석조 건물이 있어서 옥외로 난 돌계단을 올라 마가의 다락방을 찾아 보게 된다. 수 백년 동안 줄이어 이 곳을 찾는 성지순례 객들의 발길에 닳아서인지 계단 돌들이 움푹 패어 있다.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인 다락방 내부는 천정이 아취식으로 되어 있다. 방 가운데 3개의 기둥은 주위벽에 서 있는 기둥들과 곡선으로 연결되어 아취를 이루며 천정을 받치고 있다. 이태리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은 이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막 14:15) 23.다윗왕의 무덤 (Tomb of King David)
석조 건물의 큰 석실 안에 있는 길이 2m, 폭 1m 정도의 석관은 붉은 빌로도 천으로 덮여 있다. 천 위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은 살아서 여기 있다'라고 히브리어로 수를 놓아 써 있고 유태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 묘는 기념 묘로서 실제 다윗 왕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4.통곡의 벽 (Wailing Wall 또는 Western Wall) 오랫동안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이라 불리고 있는 이 성벽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전 서쪽벽을 일컫는다. 최고 14 m 의 길이와 400 t 이나 되는 돌을 비롯하여 평균 1 ~ 3 t 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높이 16 m의 이 성벽은 헤롯 대왕 때의 것으로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 건축이 시작되어 약 60여년 동안이나 걸려 지은 것들이다. 이 헤롯의 성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지렛대로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뜨렸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당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은 골짜기가 지나가고 있어 성전과 윗도시 (Upper city)와 연결하기 위하여 헤롯은 골짜기 위를 지나는 다리를 설계하여 설치해 놓았다. 소위 '윌슨의 아치' (Wilson's arch) 라 불리는 성전 서쪽 벽에 아직까지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문은 제1차 유대 반란 기간 중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어 성전 안뜰을 외부로부터 고립시켜 버렸다. 로마 시대에는 유태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비잔틴 시대에는 일 년에 단 한번 성전 파괴 기념일에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유태인들은 그날 이곳에 와서 그들 민족이 분산됨을 슬퍼하고 그들 성전이 폐허됨을 통곡하였기 때문에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벽은 헤롯이 주전 20년에 개축한 제2성전 벽의 서쪽 부분이다. 주후 70년 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제2성전의 다른 부분은 모두 파괴하고 유독 이 벽만을 남겨 놓은 이유는 후세 사람들에게 성전을 파괴 시킬 수 있었던 로마 군인들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골짜기로부터 4 m 넓이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성전으로 통하는 이 아름다운 문은 예수께서도 자주 드나드시던 문이 확실하다. 예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을 찾아와 제사를 드리러 성전으로 올라갈 때에 드나들던 문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시편 120 ~ 134편의 15편의 시는 바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지금까지 이곳은 유대인의 최고의 기도처가되고 있어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모이는 곳이다. 2천년 동안의 방랑생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에로의 귀향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특히 안식일이나 절기 때가 되면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종종 성년식 (Bar Mitzbah)을 행하는 춤추며 기도하는 소년과 그의 가족들의 모습도 지켜 볼 수 있다. 이곳은 여느 회당이나 마찬가지로 남녀가 각각 칸막이로 나누어진 구역에서 기도한다. 1967년 6일 전쟁때 이곳을 탈환한 유대 군인들의 감격은 2천년 만에 예루살렘을 되찿은 유대인 전체의 감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그들은 2천년 동안 예루살렘의 회복을 꿈꾸었으며, 2천년 동안 행하여 온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Next year in Jerusalem) 라는 기도가 이루어 진 것이었다.
25.베드로 통곡교회 (St. Peter in Gallicantu) 잡혀와 심문받으시던 예수를 뒤에서 따라온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마 26:34)는 예수의 예언대로 그를 부인하게 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마 26:57, 막 14:71, 눅 22:60, 요 28:27). 닭이 우는 시간이 되서야 베드로는 깨달음을 얻고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마 26:75), 그래서 1931년에 세워진 이곳의 기념교회를 '갈리간투' (Gallicantu, 닭이 운다)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시온산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는 돌 계단이 있어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체포 당하신 후 이곳으로 끌려오시던 길임을 알 수 있으며, 대제사장 관저 지하에 만들어진 감옥으로 사용된 깊은 웅덩이에는 죄수들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던 흔적이 역력히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1931 년 카톨릭에 의해 세워졌으며, 교회의 지하층에는 예수님 당시의 감옥으로 추정, 발굴된 감옥을 보존하고 있다. 교회 뜰에서는 마카비 시대까지 소급되는 돌계단을 발굴하여 보존하고 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마 26:72)
26.베들레헴 이곳은 다윗 왕의 고향 (롯, 삼상 16: )이기도 하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 (삼상 16:1)이며, 다윗의 우물 (삼하 23:13~17)이 있던 곳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미가의 개인 제사장 레위 인의 고향 (사 17:7~13), 사무엘은 왕에게 베들레헴을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성지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르호보암 왕 때는 이곳에 요새가 쌓아졌고 (대하 11:6), 한때 블레셋에 의해 점령되었고 (삼하 23:14), 예수님의 탄생지로 예언되었고, 그 예언이 성취된 곳 (미 5:2, 눅 2:1~5, 마 2:1~18, 요 7:41~42) 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 Km 떨어진 곳에 있다. 특히 감람나무가 많은 해발 700여 m 높이의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십자군 시대의 예배당 모양을 보존하여 수리한 것이다. 탄생의 동굴은 성탄교회 내부 지하에 있다. 예배당의 모양은 십자가 모양의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십자군 당시 교회를 보수할 때 입구의 높이를 1.2 m 정도로 낮추고 그 폭도 좁게 만들어 놓았다. 머리를 굽히고서야 교회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약탈자들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교회에 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방어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자세를 낮추고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주후 1100년 성탄절 날 볼드윈 1세는 십자군 시대의 예루살렘 왕으로서 그 즉위식을 이곳에서 가졌다. 주후 386년 제롬은 예수님 탄생교회 바로 옆에 있는 동굴에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때 번역한 불게이트(Vulgate) 성경이 지금까지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다.
이곳은 '라마'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에레미야 31장 15절), 무슬림, 기독교인,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기념 장소이다.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의 무덤 (창 35:19, 48:7)은 헤브론 길에서 베들레헴 길로 꺾어지면서 곧바로 보이는 곳에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유대인들을 늘상 보게 된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나 중요한 절기 때 이곳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다. 그들도 죽은 성인이나 조상들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다. 이 외부 건물 구조물은 1860년에 새로이 지어진 것이다. 이 무덤에 와서 기도하면 번성과 안전한 출산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이곳에서 기도하기도 한다. 간간이 세파르딤 파에 해당되는 유대인 여성들이 이곳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 하더니(창 35:16)
Ⅳ. 터키
1.버가모 (PERGAMUN)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장 12절)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나, 도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인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시대부터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인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버가모가 천연적 요새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고 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아크로폴리스를 형성 하였다.
리시마쿠스가 죽자 버가모 왕국이 탄생하였고, 이후 버가모는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이곳의 부의 근원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 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였다.
양피지는 이곳에서 처음 제조 되었으며, 특히 유메네스 2세(B.C. 197~159)에 의하여 창설된 도서관에는 약 20 만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신전 건물은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BC 133년 로마의 속주 아시아의 수도가 된 버가모는 천혜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황제신의 숭배를 거절한 기독교인들에게 대표적인 박해의 장소가 되었던 것을 배경으로 말씀한 것으로,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추측 된다. 그러나 속주 아시아의 수도는 후에 세력이 커진 에베소로 옮겨지게 된다.
2.서머나교회(폴리캅 기념교회)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계2:8)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 반대로 많은 박해를 받았을뿐 아니라 유대의 적대 세력을 만났지만 주님께 충성했기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교회이다.(계 2:9-10) 요한계시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것들 즉 가난, 비방 그리고 고난 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 며 이들이 부요함과 역사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 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시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서머 나 교회(폴리갑 기념 교회)는 17세기에 새로 지어진 건물 로 여러가지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캅은 115-116년 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 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 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 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3.에베소 (EPHESUS)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 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 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PAUL)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리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 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64년 사도 바울기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너마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해,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피살 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 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베소는 지진으로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4.사도 요한 교회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 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안 황제 (527-565)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하였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다. 1966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공식 성지로 선포 하였다. 5.누가의 무덤
누가의 무덤이 왜 에베소에 있게 되었는지 여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의 아버지는 엔자(Enca)이고 그의 어머니 이름은 이리스(Iris)이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로마의 판사 디오도루스 시리누스(Diodorus Cyrinus)의 종이었는데 판사의 아버지 프리스쿠스(Priskus)가 그를 자기 종으로 삼았다. 충실한 성품에 감동한 프리스쿠스는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자유를 얻은 엔자는 옛 주인을 떠나지 않고 주인의 일을 계속 맡아 주었다. 누가의 어린 시절은 울창한 숲으로 둘려쌓여 있는 안디옥 시의 작은 집에서 행복하게 보냈다. 그의 친구는 판사의 딸 루브리아였다. 그녀는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며 호의적인 소녀였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녔고 누가는 그녀의 숙제를 도와주었다. 누가는 노란 머리에 좋은 체격, 수려한 외모와 영특함으로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젊은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번개가 내리치면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프리스쿠스가 모아놓은 재산이 순식간에 재로 변하고 있었다. 누가의 아버지 엔자는 불 속에 들어가 주인의 재산을 하나라도 더 건지려다 그만 불길에 휩싸여 죽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은 누가를 불쌍히 여기고 있던 시리누스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어느 날, 그가 누가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시리누스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누가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왜 의사가 되기를 원하느냐?" "저는 안디옥 항구에서 많은 환자들이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저도 저렇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의 말에 시리누스는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세계적인 도서관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술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너를 그곳에 보내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겠다." 누가는 무척 기뻤다. 그는 의사가 되면 보답하겠다고 대답했다. 누가는 나이에 비해 성숙했고 문학적인 재능 또한 대단했다. 시인이었던 그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누가는 루브리아를 사랑했지만 판사였던 루브리아의 아버지는 그녀를 갈빌리우스 울피아누스의 조카 피소네와 결혼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루브리아가 14살 되던 해에 갑자기 찾아든 병환으로 그녀는 고통당하고 있었다. 기침을 하고 팔, 다리는 극심한 통증으로 떨리곤 했다. 의사의 진찰도 소용이 없었다. 누가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녀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병은 점점 악화되어 결국 그녀는 죽고 말았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루브리아를 데리고 가지 말라고 신에게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는 신에게 보복하리라는 마음마저 품게 되었다. 의사가 되는 길, 루브리아의 죽음은 그에게 환자들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서 의술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6.파묵칼레 (PAMUKKALE)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성서상의 히에라볼리이다. 산위에서 수 천년을 두고 흘러내린 칼슘성분이 바위를 덮어 산비탈을 온통 순백의 덩어리로 변화 시켰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놓아 대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어서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 2세라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도시의 번성은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볼리는 기독교의 대교구가 설치되어 기독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파파이스와 골로새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에바브라'가 복음 전파에 힘썼다.
히에라볼리는 석회를 함유한 온천지역에 세워진 도시였다. 석회가 굳은 모습이 마치 목화처럼 생겼다하여 목화의성(파묵칼레)이라 불리워 왔다.
이곳의 뒷산에는 사도빌립 순교 기념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건물이다. 기독교의 사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중 하나인 사도 빌립은 말년에 히에라볼리에 와서 전도를 하다가 이 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5세기 경 이곳에 사도 빌립을 추도하기 위한 교회가 세워졌다.
7.라오디게아 (LAODICEA)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 하는것을 내가 증거 하노라(골 4:13)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셀리우코스(SELEUCID)왕가의 안티오쿠스(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역사상 수차례의 지진으로 인하여, 이 도시의 유적은 대부분, 땅 속에 파묻혀 지금은 황무지화 되어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 치리라"(계 3:15~16)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 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골로새서에도 라오디게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골 4:16, 2:1, 3:13~15) 특히 마지막 절의 문안인사에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 교회가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8.빌라델비아 (PHILADELPHIA)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 3:7)
이 지역은 리디아(Lydia) 왕국 시대에 칼라테부스(Callatebus)라는 이름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후 B.C. 159~138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의 앗탈로스(Attalus) 2세, 필라델푸스 (Philadelphus)는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립,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합성어 로써 '형제애'를 의미한다.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 되어 이 도시에는 아무런 고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어 발굴도 불가능하다. 다만 기독교 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 하나가 파괴된 모습으로 나마 남아있다.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졌다. 비교적 높은 4개의 도움으로 구성된 이 교회의 벽에는 11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있으나 그나마도 점차 마모되어가고 있어 방문하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은 사데, 버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 볼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 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 하였는데 소아시아 내의 300여 교회에서 쓰는 성찬식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 지금도 이 곳에 수십km의 포토밭이 펼쳐져 있다. 또 빌라델비아는 아랍인들의 침략속에서도 끝까지 남아있었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였었다.
9.사데 (SARDIS)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니 죽은 자로다(계 3:1)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BC 1200년 경에 세워진 도시로, 그후 수세기가 지난 후 산 기슭에 제2의 도시가 형성되어 고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B.C. 6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 크로수스 왕은 서구인들에게 부를 상징하는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사데는 당시 부유한 상업도시로 직물, 귀금속 생산 및 사금이 유명하였으며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든 곳이기도 했다. '마이다스의 황금의 손' 전설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아시아 지역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아데미신전이 있었으며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곤 하였는데 사데 교회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자'(계 3:1)라는 경고를 받게 된것은 교회가 매우 번성하고 활동적인 반면 이러한 '밀교'의 부도덕한 영향을 받았으며 외관상의 일만으로는 완성된 일이 아니라고 충고한 요한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계 3:3)하며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약속했다. 로마 시대에도 이곳은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으며, 1914년 프린스턴 대학 팀이 발굴을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되었던 교회의 유적은, 거대한 아데미 신전의 뒷편에 있으며, 아데미 신전은 BC 335년 ALEXANDER 대왕에 의하여 재건 되었는데 이 신전은 희랍 시대에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로 크기가 약 100 미터 X 50 미터였다.
10.두아디라 (THYATIRA) 버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B.C. 7세기 경 리디아(Lydia)인들이 거주하며 "펠로피아(pelppia)"라 불렀다.
B.C. 3세기경 SELEUCUS 1세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 시켰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버가모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위치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두아디라의 역사적 중요성은 군사적인 것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이다. 두아디라는 지형상 훌 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6:11-15 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빌립보에서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루디아는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현재 두아디라는 과거의 어떤 유적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도시의 한 귀퉁이에 아마도 아폴로 신전으로 보이는 신전 하나와 회랑이 있는 길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비잔틴 교회 기둥들만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 되어 있다.
11.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아주 독특하다. 다른 어느 곳도 역사 속에서 그런 굉장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거대한 대륙이 만나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스탄불은 군사,종교,상업, 문화적으로 세계 역사의 초점이 되어 왔다. 기원전 600년 명성을 날리던 메가리아인인 비자스에 의해 창건되어, 그의 이름을 딴 비잔티움은 보스포러스 해엽을 관장하는 훌륭한 자연 항이다.
서기 330년에 로마의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틴의 도시'라는 뜻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아마도 콘스탄틴 대제는 이곳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처럼 이 도시도 7개의 언덕 위에 건설 되었기 때문이다. 4년 후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그자신이 서기 337년에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노플은 융성했고 서기 395년의 로마제국의 분열로 인해 동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서구의 기독교가 흔들릴때 고대 제국의 수도 시민들은 콘스탄틴의 멸망을 환영했다. 비잔틴 제국의 최후 영도자였던 노타리스 대공은 카톨릭과 그리스정교 간의 수세기에 걸친 반목을 언급하면서 '누가 추기경의 모자보다 터키 터반을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라고 공공연히 기뻐할 정도 였다.
이 도시는 세워진 후 1000년이 지난을 때 오토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 이 되는 새로운 역활을 맡게 되었다. 웅장한 성 소피아 사원은 모스크로 변모 되었다. 알려진 대로 정복자 메멧은 귀중한 모자이크 작품들을 파괴하기 보다는 그 위에 석회를 덧 바름으로써 그대로 보존 시켰다. (1933년에 아타튀르크의 명령에 따라 성 소피아 사원은 오늘날의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메멧은 부의 극치를 이룬 톱카피 궁을 건립하였다. 1465년에 완공된 이 보물로 치장된 복합 구조물에는 하렘까지 있어 약 400년간 오토만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또 하나의 경외감을 일으키는 건축물로는 푸른 모스크라고 불리우는 술탄 아멧 모스크이다. 톱카피궁 근처에 술탄 아멧 1세에 의해 1609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이 모스크는 6개의 웅장한 첨탑을 가지고 있으며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하므로서 이처럼 설명적인 이름을 얻었다.
12.보스포러스 해협
보스포러스 해협은 그 길이가 약 32Km에 달하며 마르마라해에서 흑해를 이어주는 수로다. 큰 배가 왕래하기에 충분한 수심(약70m)을 가지고 있어서 잠수함도 잠수한 채 지날 수 있다고 한다. 해안을 따라서 나타나는 풍경 중 대표적인 것은 오스만 왕가의 마지막 궁전인 돌마바흐체궁(Dolmabache Sarayi)이다. 서구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했던 오스만의 황제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수십 톤의 황금으로 장식한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로 알려져 있다. 이 공사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간 오스만 왕국의 몰락을 재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루멜리 성도 시야에 들어온다. 너무나 잔잔한 이 해협의 수면을 바라보면 돌고래 두세 마리가 수면으로 솟구치는 광경도 보게 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이고 유서 깊은 공간이다.
13.성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제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황제인 유스티니안 황제의 명에 의하여 t수학자이며 건축가, 구조학자인 안테미우스(Anthemieus of Tralles)와 이스도루스(Isidorus of Mulet) 가 532년부터 536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성 소피아란 하나님의 지혜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성소피아 성당은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된다. 다중 돔형의 이 사원은 건축하는데 비교적 짧은 시일이 걸렸으나,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전체적 직사각형의 크기는 71 X 77 미터에 달하며 돔의 직경이 약 30m로 바닥에서부 터 56m나 치솟아 있으며, 중앙부분의 거대한 돔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사원의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최고급 대리석 유물 및 장식 모자이크로 채웠다.
성소피아 성당은 통로와 중심, 혹은 통로와 목표가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지상의 순례자로서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 1453년 오토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모스크로 개조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4.블루 모스크
정식 명칭이 '술탄 아멧 모스크'인 블루 모스크는 톱카프 궁 근처에 술탄 아멧 1세에 의해 1609년부터 건립되기 시작 했다. 블루 모스크는 정확한 비례에 의한 6개의 탑이 인상적인 돔과 잘 조화되어 이슬람 건축 예술의 우수성을 반영해 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술탄 아멧 1세는 기독교의 소피아 사원을 능가하도록 지으라고 명령했고 성 소피아 사원 바로 건너편에 건립하였다. 이 모스크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 이던 시난(sinan)의 제자이던 메흐멧 아가(Mehmet Aga)에 의해 1609 ~ 1617년에 지어졌다.
모스크 내부의 위쪽 벽을 뒤덮고 있는 푸른 색상의 타일 장식과 중앙 돔으로 부터 나 있는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우러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장관을 연출해 내고 있으며,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함으로써 이 사원은 "푸른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그후 왕들은 이곳을 중요한 종교적 정책을 결정하거나, 종교적 축제를 거행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15.히포드럼
히포드럼의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부조.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인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저 15세기에 만들어졌다. BC390년,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의 룩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6. 그랜드 바자르
100여년 전 이미 동양적인 색채가 사라졌지만 지금도 이곳은 외국인들의 발길을 이끄는 대표적인 곳이다. 수천개의 상점에서 수만개의 물품들이 팔리고 있다.
17.톱카프 궁 톱카프 궁에 거주하였던 첫번째 술탄은 쉴레이만 대왕이다. 이스탄불의 지평선을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장대하고 음향학적으로도 흠 잡을데 없는 슐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장식한 사람도 바로 그 였다. 이 모스크는 그의 우두머리 건축가였던 천재 시난에 의해 건립되었다. 시난은 톱카프 궁 이외에도 이스탄불의 각종 건축물 290채 이상을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톱카프 궁전은 역대 25명의 술탄이 거주하면서,1853년 새로운 궁전으로 옮겨지기까지 오토만제국 통치의 심장부로서 그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켜왔다. 이 궁전은 비잔틴 시대에 건립된 난공불락의 해안 성벽으로부터 뻗치고 무장이 단단히 되어 있는 5km의 성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므로 '톱가프'(대포문)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궁전은 궁정, 정자, 모스크 그리고 우물의 복합체로 크게 4개의 궁정과 하렘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1924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이곳에는 왕족의 소유였던 도자기와 보석, 무기, 원고,서예품 그리고 많은 예술품들이소장되어 있다. 특히 술탄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방에는 사도요한의 두개골과 손 , 그리고 다윗왕의 칼, 요셉의 모자와 모세의 지팡이등 종교적인 유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