聽籟軒公遺稿序
글/忠州 朴頤休(박이휴)
번역/羅千洙
不侫衰孄杜門尸居(불녕쇠란두문시거)/재주 없는 내가 늙고 게을러서 밖에 나가지 않고 송장처럼 살면서
視蔭謝却鉛槧久矣(시음사각연참구의)/그림자 살피며 문필의 業을 물리친 지 오래되었다.
錦西金君鍾應聲遠甫(금서김군종응성원보)/금성의 서쪽에 사는 金鍾應군 字가 聲遠인 사내가
示其先祖聽籟軒公遺稿(시기선조청뢰헌공유고)/그의 선조 청뢰헌 공의 遺稿를 보여주었는데
詩若文若干篇曰(시약문약간편왈)/詩와 文이 약간인 책으로 말하기를
近方倂與市西先生遺集(근방병여시서선생유집)/“근래 바야흐로 市西선생의 유집을 아울러
始梨棗之役(시이조지역)/비로소 출판하는 역할을 합니다.
將圖壽傳(장도수전)/장차 오래도록 전하기를 도모하려고
願得一言而弁(원득일언이변)/바라건대 한마디를 얻고자 서두릅니다.”라 하였다.
玆卷遂雙擎莊讀(자권수쌍경장독)/이에 마침내 두 손으로 책을 받들어 엄숙하게 읽으니
篇中有吾文忠先祖建院請額疏(편중유오문충선조건원청액소)/책안에 우리 문충 선조의 서원을 사액해 달라는 상소를 청한 바가 있었고
又以玆事抵白軒李相公(우이자사저백헌이상공)/다시 이 일은 백헌 李상공에게도 해당하여
書其於稱述道德事(서기어칭술도덕사)/글로서 그의 道와 德의 일을 칭찬하는
功名節之際(공명절지제)/功業과 名節의 즈음하여
只擧其大權(지거기대권)/다만 그 大權을 들추는 것은
而景行羹墻之慕(이경행갱장지모)/행동을 우러러 보고, 앉으나 서나 그리워함이
洋溢辭表於是竊有感焉(양일사표어시절유감언)/辭表에 넘쳤으나 이에 삼가 느끼는 점이 있는데
不敢以不文辭(불감이불문사)/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噫(희)/아,
昔在西宮之變(석재서궁지변)/옛날 西宮의 변고가 있었으니
鈇鑕在前鼎鑊在後(부질재전정확재후)/앞에는 형틀이 도구인 도끼가 있고 뒤에는 죄인을 삶아 죽이는 솥이 있어
緘口噤舌敢言者尠(함구금설감언자선)/입을 봉하고 혀를 다물게 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드물었으나
而市西公一疏抗論(이시서공일소항론)/市西公은 오로지 상소로 抗論하였으며
扶植倫綱(부식윤강)/五倫과 三綱을 부식하였다.
建虜之難(건로지난)/1636년 建州의 오랑캐가 난을 일으킬 때
招集義旅(초집의여)/의병대를 불러 모우고
敵王所愾(적왕소개)/왕의 敵愾 하는 자를 대적하였지만
宗社再安其危(종사재안기위)/宗廟와 社稷은 다시 그 위태함을 편안히 여겼다.
忠偉功宜載竹素(충위공의재죽소)/충정의 위대한 功은 마땅히 책에 실어야
而無欠(이무흠)/흠결이 없는 것이다.
公以市西公胤子(공이시서공윤자)/公은 市西公의 상속자로서
克世其業(극세기업)/그 業을 대대로 이루어 내며
風議名理(풍의명리)/거리낌 없이 의론하는 명분과 의리는
血禪光肧(혈선광배)/혈통으로 禪位되어 영광으로 움트기 시작하였으니
承接餘緖(승접여서)/대대로 잇는 것은 남은 끄트머리이다.
事親以孝百行純備(사친이효백행순비)/어버이를 섬기는 孝로서 百行을 순수하게 갖추었으며
學問之慱門路旣垣(학문지박문로기원)/학문을 넓히는 학문의 지름길은 이미 담을 둘렀다.
言論之正(언론지정)/말의 논의는 正大하였지만
畦畛不設逮(휴진불설체)/상대와 다른 견해는 뒤따라가 붙잡아서 딱 맞게 하지 않았다.
當丙子北虜之難(당병자북로지난)/병자년 북쪽 오랑캐의 재앙을 당하여
因父命從義兵(인부명종의병)/인하여 아버지의 命으로 의병으로 나아갔으며
爲南漢勤王計(위남한근왕계)/남한산성의 근왕을 위하여 계획하였으나
以和議罷歸(이화의파귀)/화의가 이루어져 의병을 파하고 돌아 왔다.
父命其子(부명기자)/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명하면
子承其命(자승기명)/아들은 그 명을 받들었다.
仗義於天步(장의어천보)/한 나라의 운명이 大義에 의지하여
艱難之日(간난지일)/몹시 힘들고 고생스러운 날에
可謂忠孝雙全(가위충효쌍전)/忠과 孝를 두루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父子匹美(부자필미)/아버지와 아들이 짝하여 아름답구나.
昔孔北海引虎賁士與坐/옛날 孔北海(孔融)가 천자를 가까이 호위하는 군사들을 데려다가 함께 앉으니
感蔡伯喈老成/蔡伯喈(蔡邕)가 노련하게도 고맙게 여기면서
典刑以虎賁(전형이호분)/천자를 가까이 호위하는 군사로서 형벌을 관장하다니
刑似伯喈(형사백개)/형벌이 伯喈(蔡邕의 字)와 닮았다고
而尙發有之歎(이상발유지탄)/오히려 탄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矧乎階庭間(신호계정간)/하물며 섬돌과 마당 사이에서도
心傳身受(심전신수)/마음으로 전하고 몸으로 받으면
淵源流通(연원유통)/그 연원이 흘러, 흘러 전하여지겠지만
不可但以典刑攸存言之者乎(불가단이전형유존언지자호)/단지 형벌을 관장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其詩文迺公餘事(기시문내공여사)/그의 시문은 이에 公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
而聲病韻格淸高平淡(이성병운격청고평담)/四聲의 규칙에 맞든 안 맞든 韻格은 맑고 고상하면서 평범하였지만
筆下無一點塵(필하무일점진)/붓을 잡았을 때는 한 점의 티도 없었다.
今人狂恠(금인광괴)/지금 사람들은 기이한 것에 미쳐서
雕鎪神頭鬼面之態(조수신두귀면지태)/귀신의 머리와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기고
酸醎若澁肥膩腥臊之味(산함약삽비니성조지미)/시고, 짜고, 떫은 것 같고, 살지고 기름져서 비린 맛이어도
絶無影臭之相近(절무영취지상근)/전혀 그림자나 냄새도 없이 서로 가까이 하니
吁其盛矣(우기성의)/아, 성대하구나.
此卷乃龍鳳之一鱗毛(차권내용봉지일린모)/이 책은 이에 봉황의 한 비늘이요 깃털이니
讀之可以想其人於百世之下矣(독지가이상기인어백세지하의)/읽으면 가히 그 사람을 백세 이후까지 생각할 것이니
又何必多乎哉(우하필다호재)/또 어찌 반드시 많아야 하겠는가.
嗚呼(오호)/오호,
公抵回蔭路(공저회음로)/公은 蔭官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만났는데 피하였고
罔究厥施(망구궐시)/베풀고 시행하였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而入選桂坊出宰褊城(이입선계방출재편성)/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뽑혀 들어가 외딴 지방에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其啓沃之良箴(기계옥지량잠)/그의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함이 착하게 箴規하였으니
政理之懋(정리지무)/다스리는 이치가 성대하였다.
績必有可紀者(적필유가기자)/공적은 반드시 기록할 만 것이 있어야 하는데
而文憲無徵(이문헌무징)/文獻(文憲은 오기임)에 거둘만한 것이 없었다.
須旁搜公家掌(수방수공가장)/모름지기 公의 집을 손바닥 보듯 두루 찾아야 하고
故又採父老口頌(고우채부로구송)/원래 또 지역 어르신들의 입으로 칭송하는 것을 수집하면
錦上添花(금상첨화)/금상첨화이다.
幷爲不朽之圖(병위불후지도)/아울러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을 도모한다면
則豈耿光乎聲遠乎(칙개경광호성원호)/ 어찌 밝게 빛나지 않겠으며, 명성이 멀리 가지 않겠는가.
欽念哉(흠염재)/欽慕하여 생각하노라.
噫(희)/아!
重光協治殷春冷節日忠州朴頤休謹敍/辛未年(1871년) 2월(殷春) 한식날(冷節日)에 忠州 朴頤
休 삼가 서문을 쓰다.
<해설>
○不侫(불녕)은 재주가 없다는 뜻으로 자신을 겸칭(謙稱)하는 것.
○衰孄杜門(쇠란두문)은 늙고 게을러서 밖에 나가지 않는다.
○尸居(시거)는 송장처럼 살다,
○鉛槧(연참)은 글을 쓰는 붓과 종이로, 문필(文筆)의 업을 말함.
○金君鍾應聲遠甫에서 聲遠을 필자는 金鍾應군의 字로 풀었다.
광김 전자 족보를 보면
문숙공파-시중공파-밀직사사공파-주부공파-소암공파-시서파 ''(시서25세)- (시길 26세)- 상-일중-급-후원-양-계열 -인-종응(鍾應34세).임을 찾아냈다.
○梨棗之役에서 梨棗는 직역하면 배와 대추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책이나 그림 따위를 인쇄하여 세상에 내보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판목으로는 배나무와 대추나무가 제일 좋은 데서 유래한다.
○文忠先祖(문충선조)는 이 글의 지은이의 선조로 諡號가 文忠인 바,
文忠公 思菴 朴淳(1523-1589)을 지칭한 것으로 보여 진다.
○白軒李相公(백헌이상공)은 白軒 李景奭(1595-1671)이다.
○羹墻(갱장)은 사람을 앙모(仰慕)하는 일,
예전에 요(堯)임금이 죽은 후 순(舜)임금이 3년을 앙모하여, 앉으면 담[墻]에 요임금이 보이고 먹으면 국[羹]에 요임금이 보였다고 한 데에서 나온 말.
○西宮之變(서궁지변)은 서궁의 변고는 광해군 때에 일어난 영창대군 살해(1614년)와 폐모사건을 말한다.
○鈇鑕(부질)은 도끼, 刑具,
○鼎鑊(정확)는 죄인을 삶아 죽이는 솥,
○建虜(건로)는 淸나라의 대한 비하의 말,
○竹素(죽소)는 冊,
○胤子(윤자)는 嗣子 즉 대를 이를 아들, 상속자, 후계자,
○風議(풍의)는 거리낌 없이 의논하다,
○血禪(혈선)은 혈통으로 선위되다 란 의미,
○光肧(광배)는 光胚와 같은 의미로 ‘영광으로 움트기 시작하다’라는 의미
○承接(승접)은 위를 이어 아래로 접속 시킨다는 의미
○學問之慱에서 慱은 근심할 단, 넓을 박, 두 개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넓다, 넓히다’로 푸는 것이 맞겠다.
○畦畛(휴진)은 논밭의 경계, 논두렁, 상대와 다른 견해,
○天步(천보)는 한 나라의 운명,
○孔北海(공북해)는 孔融(153-208)을 지칭하며 魯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북해태수를 지냈기 때문에 당시 孔北海라 불렀다.
○蔡伯喈(채백개)는 蔡邕을 지칭함,
○虎賁(호분)은 호랑이처럼 용감하고 날래다는 뜻으로, 천자(天子)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군대를 이르는 말
○“典刑以虎賁(전형이호분)/천자를 가까이 호위하는 군사로서 형벌을 관장하다니
刑似伯喈(형사백개)/형벌이 伯喈(蔡邕의 字)와 닮았다고”의 음미
蔡邕은 文人이다. 虎賁 즉 호랑이처럼 달리는 군사들의 외형 모습만 보니 마치 文人 蔡伯喈을 닮았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천자를 호위하는 虎賁의 군사들이 마치 蔡伯喈 자신처럼 형벌을 관장하는 일을 한다고 蔡伯喈가 그렇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글 지은 이는 갑자기
“昔孔北海引虎賁士與坐/옛날 孔北海(孔融)가 천자를 가까이 호위하는 군사들을 데려다가 함께 앉으니
~
不可但以典刑攸存言之者乎(불가단이전형유존언지자호)/단지 형벌을 관장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의 부분을 넣었을까?
필자의 역사의 상황 논리로 풀어 보면
병자호란 때에 인조는 근왕병에 인도되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이
결국은 패전의 원인이 된 것이다.
虎賁의 호위병들이 겨우 임금을 모시고 피신한 곳이 남한산성이었으니
꼼짝도 못하고 결국은 오랑캐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이다.
이것을 비유한 것 같다.
전국의 의병대들은 임금을 근왕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전국에서 남한산성으로 달려 갔다.
그런데 남한산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인조는 항복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글 지은이는 文人 蔡邕의 눈을 빌어 인조왕의 호위군이 호분의 군사가 아니라 典刑의 군사정도라고 비유한 것 같다.
○聲病(성병)은 시를 지을 때 평(平), 상(上), 거(去), 입(入) 등 사성(四聲)을 조합하여 구성하는데, 그 구성이 일정한 규칙에 들어맞는 것을 성(聲)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병(病)이라 한다.
○筆下(필하)는 직역하면 ‘붓 아래’ 이지만, 즉 붓을 잡고 써내려 간다는 의미이다.
○恠는 怪의 이형자이다.
○蔭路(음로)는 조상의 공덕으로 얻은 벼슬이 음관이며, 음관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음로이다.
○桂坊(계방)은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啓沃(계옥)은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한다는 뜻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셔라.〔啓乃心 沃朕心〕” 하였다.
○文憲無徵에서 文憲은 文獻의 誤記 같다.
○耿光乎는 원문에서 耿이 火+耳로 되어 있어, 필자가 耿光乎일 것으로 문맥을 파악하여 수정 해설한다.
耿光乎(경광호)는 밝은 빛이로다,
○重光(중광)은 辛, 協治(협치)는 未
그러므로 辛未年에 이 글을 쓴 것이다.
市西集 跋文을 필자의 선대 羅明集이 쓴바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上之卽祚八年, 辛未春正月 上澣, 羅州羅明集謹識/주상께서 즉위하신 8년, 신미년(1871년) 봄 정월 상순에 나주인 나명집 삼가 쓰다.
이 글 지은이도 시서유집과 청뢰헌 유집을 아울러 발간한다는 의미의 글이 있으므로 필자는 신미년을 1871년으로 추정한 것이다.
<참고자료/羅明集이 지은 시서유고집의 발문>
-원제목 : 上之卽祚八年, 辛未春正月上澣, 羅州羅明集謹識-
-임금(고종)이 즉위하신 8년 신미년(1871년) 봄 정월 상순에 나주인 나명집 삼가 쓰다-
글/ 나명집
번역과 해설 / 나천수
吾鄕古稱(오향고칭)/우리 고을은 옛날부터 칭하기를
多文章奇傑之士(다문장기걸지사)/문장을 잘하는 기걸의 선비가 많은데
而有若市西先生金公(이유약시서선생김공)/시서 김선생 같은 분은
以學問行誼(이학문행의)/학문으로 행의가 높은 분이라고
著聞于世(저문우세)/세상에 이름이 널리 들렸다.
宣廟乙巳(선묘을사)/선조 을사년(1605년)에
中司馬(중사마)/사마시에 합격하고
庚戌首倡儒疏(경술수창유소)/경술 1610년에 유생들의 상소를 앞장서서
請五賢從祀(청오현종사)/다섯 어진 이를 配享하자고 청하였다.
當昏朝斁倫之日(당혼조두륜지일)/광해군이 인륜을 무너뜨리는 날에
以伸救李完平事(이신구이완평사)/완평 이공의 일을 변명하고 구원할 때
被削泮籍(피삭반적)/성균관의 학적이 삭제되었다.
自是無意進取(자시무의진취)/이로부터 나아갈 뜻을 버리고
遂廢科業(수폐과업)/과거 공부를 그만 두었다.
仁祖改紀(인조개기)/인조가 즉위하자
擧遺逸(거유일)/유일로 천거되어
屢除寢郞(누제침랑)/누차 참봉에 제수되고
郵官(우관)/찰방에 제수되었으나
皆不就(개불취)/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因構小亭於城西舊居(인구소정어성서구거)/이러한 연유로 성 서쪽 옛 집터에 작은 정자를 지어
篇以五樂(편이오락)/오락정이라 편액을 달고
作記示志(작기시지)/오락정기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보였다.
噫! 公天姿弘偉(희! 공천자홍위)/아, 공의 천품은 넓고 커서
聲望藹蔚(성망애울)/명성과 인망이 자자하였다
孝友出乎天賦(효우출호천부)/효도 우애가 천부적으로 뛰어났으며
文章去其雕飾(문장거기조식)/문장은 치장하는 것을 버렸다.
明乎道學趨向之方(명호도학추향지방)/도학의 대세를 좇아 따라가는 방향을 분명히 알았으며
儼乎陰陽淑慝之辨(엄호음양숙특지변)/엄연히 음양의 착함과 악함을 분명히 하였다.
自丙子以後(자병자이후)/스스로 병자년(1636년) 이후에는
凡有述志諸作(범유술지제작)/무릇 뜻을 표현하는 여러 작품에는
忠憤激烈(충분격열)/충성을 다하려는 분개심이 격렬하여
不禁風泉之思(불금풍천지사)/풍천의 생각(임진란 때에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은혜)을 금할 수 없었으니
則其素所蓄積可知也(칙기소소축적가지야)/이것은 평소에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遂絶名途之念(수절명도지염)/공명의 길로 나아가는 생각은 마침내 버렸으니
固守東岡之志(고수동강지지)/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을 고수하여
探賾經籍(탐색경적)/經書를 탐구하고
逍遙林泉(소요임천)/隱士의 정원을 거닐며
以敎子侄(이교자질)/어리석은 아들을 가르치고
樂漁樵(락어초)/고기 잡고 나무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爲本分道理(위본분도리)/본분의 도리로 삼았다.
每過山水適意處(매과산수적의처)/산수를 지날 때마다 마음을 두는 곳에서는
巾服翛然(건복소연)/두건과 복장을 초연히 하고
引酌賦詩(인작부시)/술잔을 들면서 시를 지었으니
竟日忘歸(경일망귀)/날이 저물도록 돌아갈 줄 몰랐다.
一時名碩(일시명석)/한 시대의 유명한 석학들이
莫不推詡(막불추후)/추켜세워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遺馥餘韻(유복여운)/남긴 향기와 남긴 음운은
尙有存者(상유존자)/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嗚呼 世道日下(오호 세도일하)/오호, 세상의 도의가 날마다 떨어지니
雖欲復見先世長老(수욕복견선세장로)/선대의 어르신들이 다시 보려고 해도
如此風流(여차풍류)/이와 같은 풍류를
烏可得耶?(오가득야?)/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余嘗與公之後孫司諫達中氏(여상여공지후손사간달중씨)/나는 일찍이 공의 후손 사간 달중씨와 더불어
語及于此(어급우차)/이에 대해 언급한바 있는데
以先集之尙未刊布(이선집지상미간포)/선조의 문집이 아직 발간 배포되지 않아
深用嘖嘖(심용책책)/매우 말이 많았었다.
然今其族老啓烈氏(연금기족노계열씨)/지금 그 친족 啓烈씨가
收宗議(수종의)/종중의 의견을 모아
殫誠力(탄성력)/정성을 다하여 힘을 써서
將以活字(장이활자)/장차 활자로서
印其遺集(인기유집)/그 유집을 인쇄하면서
屬余以編摩之役(속여이편마지역)/나에게도 편찬의 일을 부탁하여
竊念吾祖南磵公(절염오조남간공)/삼가 생각건대 나의 조상 남간공은
亦與市翁交契甚重(역여시옹교계심중)/역시 시서옹과 더불어 교분이 몹시 두터워
尤有所感(우유소감)/더욱 더 느끼는 바가 있기에
略叙顚末(약서전말)/대략의 전말을 써서
付于左方(부우좌방)/그 증거로써 붙인다.
첫댓글 향토사를 접목시켜 해설을 펼쳐 놓으니 광김문중이 어느문중보다 빛나 보입니다..
훌륭하신 선대 할아버지들과 돈독한 우의가 후대에도 맥을이어져 이렇게 고귀한 자료들이 번역이되어 우리가 모르고
지날칠뻔 했던 '청뢰헌공 할아버지의 훌륭하신 "행장과 유고집서문"이 번역이 되기까지 '천수'친구의 훌륭한 노력에 광김의 후손으로 고마움과 은덕을 후손들과 함께 느끼네 . 감사하네--- 청뢰헌공11대 용상
惺齋 나명집 (1811~1877)공께서 金啓烈 32世) 鍾應의 조부님 부탁으로 발문을 지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