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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학 연보
발자취
1950년 음력 5월 26일 경북 경산군 남천면 삼성동에서 부친 최남식(호 以剛)과 모친 이강의 아홉 아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남. 누대의 가산이 있는 곳은 대구 원대동이며 경산은 임시 피난처였음. 부친은 성주의 제서 선생 이정기(李貞基) 문하의 유학자로서 문집 이강집(以剛集)을 남김. 본관은 전주. 자호는 제강(濟剛).
1954년 아버지를 여윈 뒤 삼성동의 과수원집을 떠나 경산읍 옥곡동으로 이사함.
1963년 경산초등학교를 졸업(50회). 온전히 중학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설립자의 한 사람인 큰형이 교사로 있던 경산농예기술학교에 입학. 이곳에서 2년 넘게 학교 직영의 양계장 일을 하며 학비를 면제받음. 매일같이 삽으로 닭의 배설물을 쳐내고, 4-500알의 계란을 자전거 짐칸에 싣고 읍내를 오가는 일이 가장 힘들었음. 1학년때 소년조선일보가 마련한 전국 어린이 글짓기대회에 장원을 하여 왕자크레파스를 상품으로 받음.
1965년 고입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은 뒤, 서울 형들만 믿고 무작정 상경. 서대문구 냉천동의 넷째 형(최훈: 전 철도청장) 하숙집에 파고 들었는데 말단 공무원이었던 형도 차마 동생을 내치지 못함. 셋째 형(최주: 전 KIST 연구위원)이 시간 강사로 나가던 동아전수학관에 공짜로 다니면서 고입 준비를 함.
1966년 양정고등학교 입학. 난생 처음 구두를 신어보고, 소매에 백선이 붙은 새 교복도 사 입음. 재학중 학원문학상을 비롯 몇 군데 문학 콩쿨에 입선된 것을 계기로 해서 문예반 활동을 함. 여기서 두 학년 위인 조정권(시인) 선배와 이미 졸업을 한 이건청(시인) 선배 등을 만나게 됨. 3년 동안 교지 편집 일에도 열심을 보임. 이영일(전 현대산업 이사), 김상설(청주세관장), 김종완(동국산업 이사), 정재혁(전 대림산업 부장) 등 지금까지 친히 지내는 친구들이 이때 만난 문예반 동료들임.
1969년 모 국립대 사학과에 응시했다가 낙방. 하릴없는 재수생활에 들어감. 형편상 입시학 원 근처에도 가보질 못한 채 2본 동시상영 영화관이나 전전함. 가난한 노모의 마음이나 편케 해드린다고 공무원 시험도 두 번이나 봄.
1970년 운좋게 고려대학교 국문과 입학.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온 본 적 없는 노모가 대학 입학식에 처음 참석하시곤 대학이 엄청 크다고 입을 벌리심. 여전히 등록금 마련이 어려운 고단한 나날을 보냄. 교양학부 발행의 <교양(敎養)>지 편집 책임 일을 보면서 처음으로 정한숙 교수께 단편소설 2편을 뵈 드림. 독서토론회 '호박회'에 가입하면서 김인환(문학평론가. 고대 교수) 김흥규(문학평론가. 고대 교수)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대 교수) 윤석달(항공대 교수)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만남.
1971년 <고대문화>에 단편소설 '계룡산 기행' 발표.
1972년 '호박회' 회원 중 창작에 관심있는 이들 끼리 따로 모여 <고대문학회>를 만듬. 정 한숙, 김종길 두 분 교수를 지도교수로 해서 초대 회장을 맡음. 윤석달, 박정규(소설가. 서울산업대 교수) 정병규(정병규 북디자이너 대표), 유시춘(소설가) 등의 선배, 김정분(혜원여고 교사), 김인수(강원대 교수) 등의 동기들, 최승자(시인), 박상기(소설가) 같은 후배들과 어울려 밤낮 술을 마시며 문학적 포즈는 다 취해 봄. 등록금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총학생회의 권유로 학예부장을 맡음. 따라서 성북경찰서에도 두 번 다녀옴. 어머니 별세. 어머니와 함께 오류동 집에서 기거하던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짐. 이 해 가을부터 불광동 소재의 무허가 입시학원의 국어강사가 되면서 강의실 귀퉁이에 내 거처도 얻게 됨. 윤석달(항공대 교수), 김영호(우신고 교사), 권오성(성세병원장), 전용호(아가페교회 담임목사), 우철환(고대 영문과 교수) 등이 이 때의 강사진이었는데 이들 패거리와는 지금까지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희희덕거림. 당시의 학원장이던 이승배(한솔엣세투자자문회사 대표이사) 형이 이 모임의 보스임. 박정권의 위수령 발동, 군인들 교내 난입. 나 또한 수경사로 끌려가 하루 종일 치도곤 당함. 대구에 가서 신병 입대 강제 신체검사를 받음. 휴교기간 중 신춘문예에나 도전하겠다고 강화도 전등사에 들어가 1 주일을 머뭄. 여기서 단편 <전등신화(傳燈新話)> 탈고.
1973년 1월 1일자 경향신문 지상에 내 얼굴이 크게 나옴. 한 번 도전에 이뤄진 신춘문예 당선이 사람을 아주 겁없게 만들었음. 동아일보에는 단편 <전등신화>가 최종심에서 떨어져 되레 위로 전화도 받게 됨. 무허가 학원 선생들끼리 불광동에서 맥주홀 하나를 통째로 빌어 축하연을 가짐. 당선작 <폐광(廢鑛)>을 본 독자들이 펜 레터 같은 것을 많이 보냈는데 대개는 제목을 '발광'으로 읽고 있었음. 심사위원이었던 안수길, 박영준 두 분 선생님을 차례로 찾아 뵈었는데 특히 어린 나에게 '윈스턴' 양담배를 권하시던 안 선생님이 퍽 인상적이었음. 졸업이 임박하면서 장래가 걱정됨. 국군통합병원에서 가진 신체검사 재검에서 체중미달로 현역 소집면제의 판정을 받고 저윽이 기뻐함. 교사 자격증까지 갖췄지만 쉬 교직에 나설 마음은 아님. 때마침 한국일보에서 장편소설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응모하기로 마음을 먹고 집필에 들어감.
1974년 대학 졸업. 골방에서 2,500장 장편소설 <동강(冬江)> 탈고. 혼자의 생계도 다급해진 터라 5월말 신문광고를 보고 대화여상 국어선생 자리에 이력서를 냄. 이튿날부터 출근, 하루 7-8시간의 수업을 맡으며 진이 빠짐. 아이들한테는 미안한 일이나 도무지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 두 달만에 사직서를 냄. MBC에도 이틀을 출근하다가 그만 둠. 기대했던 장편마저 최종심에서 떨어져 낙심이 더욱 큼. 시험쳐서 학원출판사 입사. 여성지 '진주(眞珠)' 편집 일에 재미를 붙임. 일년만에 편집장이 됨. 그후 같은 회사에서 내는 '학원(學園)' '소설 주니어'의 편집장을 역임. 이곳에서 권오운(시인), 이윤기(소설가), 박정만(작고, 시인), 임홍재(작고, 시인), 김상렬(소설가) 등의 문인들을 직장 동료로서 만남. 한편 필자로서 자주 들락거리던 소설가 박범신, 박양호와 교유하며 지금까지 친하게 지냄.
1976년 단편 '땅에다 쓰는 말씀'(현대문학) 발표. 6년간 연애를 하던 김민임과 결혼.
1977년 단편 '퇴원'(월간문학) 발표. 병으로 학원출판사 휴직. 장녀 모은 출생.
1978년 장편 '겨울소나기'(진주) 연재. 단편 '실없는 사람'(월간문학) '빛, 그리고 천둥'(엘레강스) '잠시 머무는 땅'(현대문학) 발표.
1979년 장편소설 '비를 적시는 바다'(동평사) 출간. 단편 '검(劍)과 새'(현대문학) '아직은 한낮'(중앙일보 단편 연재) '무더위 속의 익사'(월간문학) '질주'(한국문학) 실명소설 '박재삼'(문학사상) 발표. 한편, 1천만원으로 원고료를 사상 최고로 올린 한국일보의 장편설 공모에 재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봄부터 집필에 들어감. 출판사 직원들이 적극 감싸주는 가운데 신촌의 와우아파트 단칸 방에서, 박박 울어대는 어린애를 발로 밀쳐내가며 원고를 써나감. 마감 날짜 이틀을 넘겨 간신히 2,500장의 <서북풍(西北風)> 탈고하여 급히 신문사에 갖다 줌. 한 해가 다 갈 무렵 문화부의 우계숙 기자가 장편 당선의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줌. 상금도 받기도 전에 이곳저곳 고마운 이들을 찾아 다니며 한 턱씩을 냄. 전업작가로 변신하기 위해 학원출판사 사직.
1980년 1월 1일부터 한국일보에 <서북풍> 연재. 일약 유명세를 치르면서 원고 청탁에 시 달리게 됨. 단편 '유년의 城'(주부생활) '가수'(뿌리깊은나무) '고향찾기'(엘레강스) '산행'(월간문학) '숨쉬는 기차'(신동아) '바람, 벌거벗다'(주부생활) '잠행'(고대문화) '골목 하나 사이'(주간 한국) 중편소설 '백운을 바라봄'(소설문학) 발표. 첫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금박출판사), 장편소설 '겨울소나기'(자유문학사) '저무는 산에 꽃불 놓다'(중앙일보사) 학생소설 '물 아래 가던 새'(학원출판사) 꽁트집 '요즈음의 이대리'(행림출판사) 등의 저서를 연이어 출간함. 소년동아일보에도 소년역사소설 '이름없는 별' 연재. 장남 기림 출생. 와우아파트를 떠나 화곡동 단독 주택으로 이사하면서 난생 처음 대문 기둥에다 내 이름의 문패를 달게 됨. 화단 구석에다 오리 두 마리도 키움.
1981년 단편 '외가'(작가 동인) '불빛'(현대문학) 발표. 장편소설 '안개울음'(문학예술사) '서북풍'(행림출판사) 출간. 스포츠 동아에 장편 역사소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연재. 장편 '안개울음'을 쓰기 위해 이른 봄부터 팔공산 환성사에서 두 달간 기거함. 박범 신 박양호 등과 어울려 자주 낚시도 다니지만, 온종일 방구석에 쳐박혀 원고지 빈 칸만 메워야 하는 전업작가 생활이 더없이 따분하게 여겨지는 때쯤 대전의 동아학원(현 우송학원)에서 전화가 걸려옴. 대학 교수가 돼 보지 않으려나? 오래 망설이지 않고 승낙. 중경공업전문대학(현 우송공업대) 교양과 전임 발령을 받고 이사를 결심. 박범신, 유익서, 김성동 등의 문우들을 불러 화곡동 집에서 서울 떠나는 행사(?)를 가짐. 이문열, 손영목, 정종명, 윤후명, 표성흠, 유익서, 서동혼, 김원우, 김상렬 등의 작가들과 <작가 동인 10인>에 가입한 후 첫 작품집 [작품]에 단편 <외가> 발표.
1982년 대학원도 안 다니고 대학 교수 하기가 민망하여 모교의 교육대학원에 진학. 한 주일에 두세 번 서울을 오르내리며 야간 강의를 받음. 송하춘(소설가) 선배가 지도교수인데다 여타의 교수님들 또한 은사 혹은 선배분들이라 다른 이들보다는 너무 편케 학교를 다님. 강의가 끝난 뒤에는 광화문 '장미의 숲'에서 서울 친구들과 한 잔 하는 것도 큰 즐거움에 속했음. 한 해 뒤에는 박범신이 교육대학원 후배로 입학하여 한 강의실에서 희희덕대는 때가 많아짐. 대전 비래동에 단독주택 마련. 마당에 토끼와 닭을 풀고 마당 둘레에 각종의 나무도 심음. 상추며 풋고추도 마당의 텃밭에서 자급자족. 단편 '상전벽해'(문학사상) 발표.
1983년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이 나를 좇아 대전으로 이사함. 비래동 신도아파트 앞뒤 동에 살면서 날마다 만나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심. 작가 이문열과 대전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유성에서 음주 환담. 박범신 박양호 김홍신 김상렬 등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짐.
1984년 역사소설 '시절이 하 수상하니'(스포츠 동아) 연재 완료. 부산일보에 새 역사소설 '역류(逆流)'(단행본으로 낼 때는 '이필제'로 개제) 연재. '호서문학회'에 가입하여 대전 문인들과도 자주 어울림. 고대 교육대학원 졸업. 졸업논문 '일제말 역사소설의 성격'. 여름 방학을 이용, 학내 교수들과 미국 여행. 브리지포트 대학에서 보름동안 어학연수를 하고 나머지 보름은 나이아가라, 그랜드캐년, 화와이 등지를 유람.
1985년 단편 '속리에서 일박'(문예중앙) 중편 '더러운 병'(현대문학) 발표.
1986년 단편 '밤의 끝편에서'(소설문학) '그물의 눈'(문학사상) '봄의 벼랑'(샘이 깊은 물) '개'(현대문학) '전설짓기'(문학사상) 발표. 두 번째 창작집 <그물의 눈>(나남출판사) 출간.
1987년 단편 '일반화법 1'(소설문학) '칠갑산 개구리'(문학정신) '숨소리'(현대문학) '가락지'(월간문학) '부여행'(동서문학) 발표.
1988년 단편 '사슬'(불교문학) '일반화법2'(현대문학) '일반화법3'(현대문학) 발표. 서울올림픽 개최.
1989년 단편 '일반화법5'(우리문학) '일반화법6'(세계의 문학) '꿈꾸는 산'(농민신문) '가두리에서'(현대문학) 발표. 세 번째 창작집 <식구들의 세월>(민음사) 및 장편역사소설 '이필제(李弼濟)' 상하권(행림출판사) 출간. 고려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 교수 부부가 내 소설 일역을 의논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옴. 유성에서 술잔을 나누며 대화를 가짐.
1990년 소설을 쓰기 위해 방학 중 보름 동안 익산 남원사에서 거거함. 단편 '손님'(현대문학) '뿌리'(문학사상) 발표. 중도일보에 장편 '숲에는 사철 바람이' 연재. 단편 '가두리에서'가 일역(日譯, 大村益夫)됨. 윤후명, 박양호와 함께 한국추리 소설가 방일단에 편승하여 일본 여행. 그곳에서 내 소설을 번역한 오오무라(大村, 와세다대학) 교수를 만나 후한 대접을 받고 환담을 나눔.
1991년 중편 '흉터('뒤에 다리를 절며'로 개제)'(민족과 문학) 발표. 장편 '숲에는 사철 바람이'(행림출판사) 상하권 출간. 문인여행단에 끼어 미수교 관계의 중국 여행, 백두산을 비롯한 연변 일원, 북경, 서안, 돈황 등지를 둘러보고 옴. 내 소설 <손님>이 영역되어 영국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한 <the star>에 수록됨.
1992년 단편 '겨울빛'(현대문학) '누가 맨처음 천지(天池)를 보았는가'(문학사상) '설경'(호서문학) 발표.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신설되어 초대 학과장을 맡음. 입학 정원 80명. 이때부터 창작 특강을 개설하여 매학기 소설가 시인 2명씩이 서울서 내려와 강의를 맡았으며 저녁이면 어김없이 술자리를 벌임. 정진규, 조정권, 최승자, 안도현, 이진명, 나희덕 등의 시인과 윤흥길, 윤후명, 박덕규, 박상우, 김소진(작고) 등의 작가들이 그렇게 대전 내왕을 했음.
1993년 중편 '하늘에는 잔별도 많아'(대전문학선) 발표. 장편 역사소설 '시절이 하 수상하니'가 '미륵을 기다리며'로 제목을 바꾸어 전 4권 완간됨(행림출판사). 연재 당시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결말 부분 300여 장을 새로 보태기 위해 금산사 앞 민가에 방을 얻어 열흘을 지냄.
1994년 단편 '다니엘을 위한 산조(散調)'(대전일보) '소설가의 일'(현대문학) 발표.
1995년 단편 '소라고둥소리'(문예중앙) '장군의 묘'(포철신문) '전설을 위하여'(한국소설) 발표. 월간 <낚시춘추>에 낚시소설 연재(2001년까지 계속). <양정 90년사> 현대사편 집필.
1996년 중편 '몸 안에 자라는 쇠'(문학과 창작) 발표. 장편 '대전블루스에 대한 낯선 추억' 집필. 같은 대학의 후배 교수인 강윤후 시인 평론가 정순진 교수와 함께 일본 여행. 천리대 교환교수로 있던 송하춘 선배와 합류하여 아스카 일원 여행.
1997년 단편 '재회'(신세대문학) 발표. 대전생활이 더욱 적적해진 탓에 딸애의 진학을 계기로 16년간 살던 대전집을 처분하고 서울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사함.
1998년 홍성원, 김병총, 최창학, 송하춘, 서종택, 오탁번, 김인환 등의 고려대 출신 선배 문인과 협의하여 <고대문인회> 결성, 고대 인촌기념관에서 창립식을 갖고 사무차장의 일을 맡음(회장 홍성원. 사무국장 송하춘).
1999년 단편 '근린공원 주변'(문학마을) 발표. 네 번째 창작집 <손님>(문예창작사) 출간. 여름부터 그 좋아하던 낚시를 뒷전에 돌리는 대신, 한 주일도 빠짐없이 산에 오름. 가까운 소설장이들의 권유에 따라 황충상, 정동수, 정종명, 유만상, 정성환, 박양호, 손영목, 유익서, 이채형 등이 회원으로 있는 '소우회'에 가담하여 매달 한 번씩 이들 소설꾼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나누고 곗돈도 내고 함.
2000년 새해 첫날 야간 등산을 감행하여 눈덮힌 월악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음. <고대문인회> 사무국장의 일을 맡음. 대학 구조조정에 의해 문예창작과가 우송정보대학 소속이 됨. 따라서 내 신분도 우송정보대 교수로 변경됨. 여름에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 자원평가연구원을 만든 넷째 형(최훈)의 강권에 의해 Wine & Art를 표방하는 격월간지 <Le Seoul>의 주간을 맡게 됨. 서종택, 박범신, 박양호 등 지인들을 편집위원에 위촉하고 10월에 창간호를 냄. 단편 '도둑과 도예가'(한국소설) 발표.
2001년 한국작가교수회가 결성되어 부회장으로 위촉됨.
2002년 문학전문 계간지 <문학나무>에 단편 '失名人 앞에서' 발표. 형상출판사에서 역사소설 '이필제' 1, 2권을 '역류'로 제목을 고쳐 전 3권 출판. 전자출판사 Enoveltown이 마련한 한국현역작가 100인 장편소설 연재 기획에 의해 내 장편소설 '대전블루스에 대한 낯선 추억'을 개작 연재함(총 13회). 한국작가교수회가 펴내는 <소설시대>에 '소설 쓰기의 첫걸음' 연재. 딸 모은 고려대학교 국문과 졸업. 아버지 문집 <以剛集> 국역(國譯)본을 펴냄.
2003년 <낚시춘추> 2002년 12월 호를 끝으로, 7년째 이 잡지에 연재해 오던 낚시 소설 쓰기를 마침. 잡지의 모 회사인 <다락원>에서 이들 낚시소설 45편을 골라 한 권의 책으로 엮음-<사내는 수요일에 낚시를 간다>. 여기저기 등산모임에도 많이 참가하여 이해부터 고대 통일산악회의 일원이 되어 매월 한 번 대학 선후배와 함께 산을 오르는가 하면 내 제자들의 산 모임인 문창산우회의 고문도 맡아 젊은 제자들과도 함께 산을 탐. 그러나 이영일 박성정 등의 30년 지기 및 내 아내가 하는 함께 명풍산악회의 주말 산행은 한 번도 어기는 적이 없음. 우송학원 50년사 집필위원장으로 위촉됨과 동시에 양정(고교) 100년사 집필위원으로 위촉받음. 한국소설가협회 정기총회에서 감사로 선임됨.
2004년 재직 대학의 문예창작과 신입생 모집 중단, 마지막 졸업생 12명에 대한 마지막 소설창작 강의.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위촉으로 <한국고속철도 건설사> (1,200장)집필 완료. 자원평가연구원에서 고속철도 KTX 차내지 <My KTX>를 발행하게 됨에 따라 편집자문위원에 위촉되고, <시와 소설이 있는 역 풍경>을 연재함. 2학기부터 중국 남경 소재 효장대학에서의 한국어교육을 위해 9월 8일 출국. 남경 베이웨이루 캠퍼스의 외국인교수숙소에 거처하며 강의실과 술집, 수퍼를 왔다갔다함. 주말에 등산을 할 만한 산이 없음이 딱함. 장편 역사소설 <화담과 명월> (820장) 탈고. 편집후기까지 내 손으로 쓴 <우송50년사>(1,700장분) 출간 소식을 이곳에서 들음. 강원대 사학과 졸업반인 아들 기림이 전국대학생 문예콩클에서 소설부문 1등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쓴웃음을 지음.
2005년 겨울방학을 이용 잠시 귀국. 봄학기도 계속 남경에서 보냄. 도서출판 '솔과 학'에서 펴낼 <시와 함께 하는 우리나라 산하기행> (850장) 탈고. <양정 100년사> 현대사 부분(700장) 탈고. 컴퓨터 자판을 너무 두드린 탓인지 '손목터널증후군'으로 고생. 학기말, 1년간의 중국생활을 청산하한답시고 매일같이 빼갈에 녹아남. 7월 5일 귀국. 8월 27일, 학사장교를 택한 아들 기림이 육군소위에 임관. 9월 1일 신학기 개강과 함께 우송대학교 부설 우송한국어교육원 원장의 보직을 맡음. 8월 29일, 중국에서 나와 같이 생활한 137명의 효장대학생들이 입국하여 한국 교육이 시작됨.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에서 소설창작 강의. 연말에 장편소설 <화담명월>이 도서출판 '나남'에서 출간됨.
2006년 고대문인회 부회장에 선임됨(회장 김인환 고대 교수). 도서출판 '자유지성'에서 펴내는 '대학 교수가 쓴 유년동화'의 두 번째 책으로 나의 < 풀푸레나무 숲에서>가 출간됨. 5월에 딸 모은이가 시집을 감. <양정100년사>가 완간되어 오랜 짐을 벗게 됨. 시 전문 계간지 <서정시학>의 여름호부터 중국기행문을 연재함. 단편소설 <산 위의 달> 발표.(한국소설 12월호). 동화 <어린 날의 강가> 발표.(문학나무 8월호). 월간지 <My KTX>에 '시와 소설이 있는 역 풍경' 연재 계속. <한국소설> 최우수작 선정에 심사위원이 됨. 우송한국어교육원장의 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2006학년도 제2학기부터 우송정보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우송대학교 중국어학부 교수로 적을 옮김. 소설가 복거일씨가 주도하는 '자유문화인 포럼'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가. 우리 식구들의 온 사랑을 받았던 페키니즈 종 '또몽'이 이 세상을 떠남.
2007년 단편소설 <고운 머물던 곳>(월간문학), 30매 소설 <재회>(한국소설), 문학기행 <시인통신>(문학나무) 발표. 봄 학기가 시작되면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소설창작연습'과 함께 대학원의 '소설창작세미나'를 함께 강의하게 됨으로써 금요일 하루를 안암동에서 지내게 됨. 점심시간 때마다 강윤후 교수를 비롯하여 모교의 여러 선후배 교수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큼. 여름방학 중 출장으로 2년만에 다시 중국 남경을 찾아감. 샤오장대학의 담당자들, 한국인 교사들, 학생들을 교대로 만나는 일정은 고단하지만 감회와 보람은 지대. 단편 <소설가의 일>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의해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지원금 3백만원 수령. 우송한국어교육원이 교육부와 대전시 교육청에 의해 대전시 다문화센터로 지정되어 센터장을 겸하면서 이주 외국여성과 그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함. 2학기 고려대 서창캠퍼스에서 소설창작연습 강의(문예창작과). <소설문학> 신인상 심사. 연말 한국소설가협회 총회에서 감사로 피선.
2008년 2월 정기총회에서 임기 2년의 고대문인회 회장으로 피선됨. 우송대학교 한국어과의 첫 신입생(중국 학생17명, 일본 학생 1명)들을 맞이하여 수업을 시작함. 한남대학교 대학원(문예창작 전공)에서 '소설창작이론연구' 강의. KTX에 연재중인 '시와 소설이 있는 풍경'을 서정시학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계약 체결. 딸 모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진학(지도교수 강헌국). 04년 중국 남경에서 처음 만나 함께 1년간 한국어 수업을 받았던 제1기 효장대학 한국어 유학생들이 3년간의 우송대 유학을 마치고 6월에 졸업. 귀국. 2학기 한남대학교 대학원(문예창작 전공)에서 '소설특수이론' 강의. 12월 27일, 중국으로 돌아간 졸업생들이 남경에서 <재 중국 우송대 동창회> 창립식을 가지면서 나를 초청. <왕뿌랴오>에서 반가운 얼굴들 만나 환담. 29일부터 중국 배갈 취재를 위한 개인 여행에 들어감. 남경-숙천-서주-보주-녹음-평정산시-보풍-낙양-서안-성도-남경을 도는 스무날의 강행군을 하며 12곳의 중국 명주 공장을 방문. 성도에서 신태수 허성수 교수를 만나 환대를 받은 후 신 교수와 함께 남경으로 이동. 마안산에서 이태백 묘소를 방문하고 이어 무석, 소주로 가서 졸업생 및 학부형들을 만나 정담을 나눔.
2009년 1월 16일,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 <명주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국문화기행>을 <Wine & City> 1월호부터 연재. <KTX매거진>에 <시와 소설이 있는 역풍경> 연재 계속. 고대문인회 신예작가상 시상. 제1학기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작가 워크샵> 강의. 고대통일산악회 수석 부회장. 전국교직원신문에 칼럼 연재 시작(1년). 우송대 학과 명칭 변경- 우송대학교 솔아시아메니지먼트대학 한국언어문화전공. 여름 방학 중 중국 동부의 리옌윈깡, 칭따오 등지 여행. 2학기 동안 중국 북경외국어대학 파견 건으로 한 학기 수업을 면하긴 했으나 북경 파견이 내년으로 미루어짐. 단행본 발행 준비를 위해 <명주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국문화기행> 원고를 1000장 분량으로 수정 개편함. 도서출판 <사람사는 세상>과 출판 계약. <명주 기행>은 KTX매거진에도 새로 시작됨. 9월 26일 딸 모은이 외손주 예일을 낳음.
2010년. 만 60세 환갑 맞이하는 나이가 됨. 1월 9일 중국 남경에서 열리는 제2회 재 중국 우송대 동창회 개최준비를 위해 전날 출국. 김성경 이사장을 비롯 교내외 인사가 대거 참석하는 관계로 동창회 임원들과 여러 차례 숙의, 하여 당일 2백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룸. 행사 후 최우석 교수, 이강록 교수와 함께 쑤저우로 이동. 쑤저우 대학의 한국어학과 교수들을 초치하여 양 대학 교류 관계를 논의함. 다음날, 쑤저우 소재 태산엘씨디의 정덕원 사장(고교 동창)의 초대를 받아 만취. 남경으로 돌아온 후 포우 한강설 민학 주요 왕가빈 등의 재학생들을 대동하고 복건성 무이산 여행을 떠남. 민학 아버지의 친구인 현지 왕 장군의 후의로 2박 3일의 무이산 관광을 호사스럽게 함. 쌍하이, 타이저우, 남경을 거쳐 귀국. 1월 31일. 새 저서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가 새로운 사람들 출판사에서 출간됨. 2월 23일 이 책에 대한 출판기념회가 솔파인 레스토랑에서 개최됨. 2월 26일 고려대학교 문인회 총회에서 다시 회장으로 유임됨. 5월초 중국소주대학과 우리 대학의 공동으로 연 IT연구소 개원식에 참석. 소주대학 관계자들이며 정 사장 등을 다시 만나 회포를 품. 이틀 후 혼자 남경으로 이동 하동 례윈꽁 등의 졸업생들과 효장대 파견의 허성수 교수를 만나고 귀국. 공자아카데미의 대전지역 교장단 모임의 초청으로 <중국 배갈>에 대한 특강을 함.
고려대 입학 40주년 관련 글들 발표. 대전일본 창간 60주년 기념 축하 글. 한중 제자들이 나의 남경 체류 체험담을 엮은 새 책 <니하오 난징>을 출간하면서 이를 회갑기념문집으로 대체하여 태화장에서 봉정식을 가짐.
7월 부부회갑 기념으로 아내 민임과 일본 북해도 3박4일 여행.
9월 잠실롯데호텔에서 외손주 예일의 돌잔치 가짐.
10월부터 조선일보사 발행 월간지 <이코노플러스>에 <중국을 보는 또하나의 창-배갈>이란 주제로 중국 술 이야기를 연재함. 10월, 2박3일 일정으로 상하이 다녀옴. 11월 중국 쓰촨성 청두 출장. 사천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 학과의 설명회를 가짐. 이후 개인 일정으로 아미산 낙산대불 등을 관광.
2011년. 고대문인회 정기 총회 및 신예작가상 수상식을 1월 24일 고려대 서관 소강당에서 개최. 2월 17일 중국 쑤저우 출장. 소주대학 국제교류처장, 당서기 및 한국어학과의 박계옥 교수 등과 회동. 태산엘씨디를 방문하여 정 회장과 산학협력 체결. 남경으로 이동한 뒤, 마안산, 당투 등지를 여행. 당투에서 포우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이백의 무덤을 찾음. 이어 2년만에 다시 채석산의 이백 의관총을 둘러 봄. 4월 샨시성 시안 출장. 서안외국어대학에서 우리 대학 설명회 가짐. 여러 해만에 다시 진시황 병마용총 관광. 7월 김택중 민학 왕소선 등과 함께 3박4일 베트남 여행. 호치민시 가까이 사는 우리 학과 학생 고야 부친의 환대로 남부 해변 도시까지 방문. 8월 아들 기림이 6년 가까운 장교 생활을 마치고 제대. 그는 다시 항공조종사 훈련을 위해 9월10일 미국 텍사스로 떠남. 아들의 출국 전 여섯 가족(외손주 예일 포함)이 일본 오사카 교토 여행. 철도시설공단에서 고위 간부들에게 중국 배갈 특강.
7월부터 동아일보의 월간지 <신동아>에 '시와 함께 하는 우리 산하 기행' 연재 시작. 10월 한남대학교에서 문학 특강.
10월 재작하는 우송대학교에서 30년 근속 표창을 받음.
11월 쓰촨 청두 출장. 사천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 방문. 이어서 하남성 개봉시의 하남대학교 방문 후 귀국.
2012년. 1월 14일 중국인 졸업생 소병염의 결혼식 참가를 위해 우송 TWD 김상한 대표 등과 출국. 무석에서의 결혼식 참가 후 소주 방문, 이후 민학 부모의 초대로 율양으로 이동. 귀국. 1월 말, 우송대와 사천외국어대과 공동으로 신청한 충칭시 세종학당 설립이 교육부 승인을 받음. 초대 충칭 세종학당장이 됨. 4월 존 엔디컷 우송대 총장과 함께 충칭으로 가서 세종학당 개관 테이프를 끊음. 사천외국어대 한국어학과 주최의 <한국의 날> 행사에 참가한 후 귀국. 큰 형님 별세. 6월. 세번째로 하얼빈을 방문하여 동방대, 관광대 등의 인사를 만나고 유학 대상 학생들과 환담. 7월 말. 6박7일 일정으로 중국 운남성 여행. 쿤밍-대리-여강 일원을 둘러봄. KTX 잡지에 7년 가까이 연재 됐던 <시가 있는 역 풍경> 산문들이 서정시학사에서 <시가 있는 간이역>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됨. 9월 낚시 전문 케이블 tv FTV 명사초대석에 출연 30분 동안 낚시 이야기를 함.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국무총리 포상을 받음. 벤처정보대학원의 전문양조인 과정에서 배갈 특강. 철도시설공단에서 배갈 특강. 11월 다시 중국 충칭으로 가서 사천외대 학생 및 교민들 상대로 '한중문화의 특색' 특강을 하고 중국 서부지역 한국어말하기대회 심사를 함. 저서 <시가 있는 간이역>이 문광부 우수 도서에 선정됨.
2013년. 2월 중경 남경 및 상주 지역 여행. 4월 세 번째 중국 충칭 여행.- 세종학당 주관의 중국학생 한국관련 퀴즈대회의 진행을 지원하고 한국문화 특강을 함. 8월 중국 계림지역 여행. 한국 항공대학 CEO과정에서 배갈 특강을 함. 한국소설 8월호에 단편 <먼 수로에 울리는 방울소리> 발표. 1, 2학기 계속 한남대학교 문예창작과 학부 및 대학원에서 소설창작 강의를 함.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하던 산문 <시와 함께 하는 우리 산하 기행>이 30회 분으로 12월에 종료됨. 10월 두 번째로 설악산 공룡능선을 종주함. 여름부터 대전시가 개설한 대전시민대학에 격주로 출강하며 소설창작 강의를 함. 11월 충남 금산군 도서관의 요청에 따라 두 번에 걸쳐 부여 강경 적벽강 죽도 등지에서 <길 위의 인문학> 강의를 진행함. 아들 기림이 미국 텍사스에서 2년 반 동안의 비행기 조종사 훈련을 마치고 귀국. 11월 아우 만당(晩堂)의 개인 서예전이 인사동에서 열림. 도록에 축하글 ‘돌에서 달로 가는 여로(旅路),를 씀.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하던 ‘시와 함께 하는 우리 산하 기행’를 3년만에 12월호로 마감함.
2014년 1월 1일 새해 첫날 계룡산을 오르다. 2월 중국 푸젠성 샤먼 일대 여행. 8월 중국 섬서성 여행, 시안 일원을 둘러보고 화산에 오름. 이후 제갈량 절명지 오장원과 양귀비가 최후를 맞은 마외역을 여행함. 신동아에 연재했던 ‘시와 함께 하는 우리 산하 기행’ 원고를 정리하여 단행본 출간을 위해 <서정시학>사로 보냄. 5월 아들 기림이 국내항공사 KEA 조종사로 취업. 6월 둘째 형님 최황 별세. 10월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임됨. 리커용 중국 사천외국어대학 총장이 중국측 회장을 맡아줌. 협회지 <백주저널> 창간호를 발행함. 대전시민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매주 계속함. 한남대 일반 대학원 및 특수대학원에서 소설 창작 강의. 대전시문화상 문학부분 심사위원장에 선임됨. 우송학원 창립 60주년 기념식전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음.
2015년 2월 중국 강남은행에 근무하는 중국인 졸업생 민학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출국, 강소성 율양 현지에서 거행된 결혼식에서는 외국인 교수로서 인사말도 곁들임. 남경으로 귀환 후 김택중 이강록 등과 함께 왕선자의 안내를 받아 하남성 정주, 낙양을 여행하며 두보의 옛 고향 및 용문석굴을 둘러 본 뒤 남양시로 이동. 하남 명주 사점주의 생산 공장을 견학하고 제갈량의 은둔지도 관광함. 5월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제2차 대회를 중국 중경시 사천외국어대학에서 개최함. 32명의 한국인 참가자들을 인솔하여 중경으로 건너 감. 리커용 사천외대 총장의 적극적인 후의에 힘입어 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고 성공적으로 일정을 마무리함. 백주 저널 제2호 발간. 단편소설 ‘더 깊고 깊은 잠’을 문인협회 발행의 <계절문학> 여름호에 발표. 문학 칼럼 ‘행복한 셈법’을 <한국소설>에 발표. 7월부터 퇴직 후 내가 거처할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 소재의 농가 주택 개수 작업에 들어감. 한편 집 뒤 텃밭에 김장용 배추, 무는 물론 상추 치커리 아욱 근대 등의 채소를 가꾸기 시작함. 연산에 들를 때 마다 비래동의 가구를 옮기기 시작함. 8월 31일자로 34년 봉직의 우송대학 교수직을 정년퇴임함. 공식적인 모든 퇴임 행사를 사양함. 오랜 인연의 김성경 이사장과는 음식점 <만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잔을 나누며 작별 인사를 함. 국가로부터 녹조근정훈장을 받음. 9월 1일자로 아들 기림이 제주항공의 정식 부조종사로 출근. 2학기부터 대전대 문학창작학과 및 한남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소설창작 강의를 시작함. 9월 중국인 졸업생들의 초청을 받아 남경으로 건너감. 10년 만에 다시 안휘성 구화산을 오른 뒤 남경을 거쳐 귀국. 연산 거처의 개수 작업을 마치고 <제강책실(濟剛冊室)> 당호를 적은 현판을 벽에 붙임. 10월부터 집들이 명목으로 어울려 술 마시는 모임이 이 시골집에서 연이어짐. 대전시민대학의 소설전문가반이 폐강됨에 기존의 수강생들과 따로 황산소설창작회를 구성하여 이곳에서 강의를 계속함.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배갈 특강을 함.
2016년 연초 집사람과 함께 일본 나고야 여행을 하면서 아들이 비행사가 된 득을 톡톡히 봄. 왕복 항공료가 무료인 탓. 나고야 교외에 있는 이누야마 고성을 본 것이 가장 인상에 남음. 6월초. 한중백주문화교류회의 세번째 국제교류회를 안동 지례예술촌 고택에서 가짐. 서른에 가까운 국내 인사와 10명이 넘는 중국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룸. 8월 손영목 유만상 이채형 김상렬 등의 소설가 친구들이 연산 우거를 찾아와 1박2일 즐겁게 놀다 감. 9월 강경 젓갈축제에 즈음하여 강경 현지에서 옛 글장이 벗 박범신을 근 15년 만에 재회하여 김상렬과 더불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음. 10월부터 오래 계획해 오던, 정여립 송익필 관련의 장편 역사소설 집필을 시작함. 11월 2008년 겨울의 제1차 중국 백주 명산지 방문에 이어 2차 순방을 실천에 옮김. 충칭 출발 루저우(백주 루저우라오자오의 산지)에 도착하면서부터 일정 시작. 이랑탄(낭주와 습주). 마오타이(마오타이), 준의(동주) 등 적수하 인근의 명주 생산지를 둘러 본 후 귀양시에 안착. 이어 황과수폭포를 관광한 뒤 남경으로 이동. 여기서 민학 화엽 포우 등의 옛 제자들을 만나 본 후 귀국. 12월 가족과 함께 오키나와 일원 여행. 12월 16일 음주 후 귀가 길에 낙상 사고를 당함. 강동성심병원에서 어깨 회전근파열 봉합수술을 받음. 이후 해가 바뀔 때 까지 서울집에 머물며 근신 가료
2017년 지난해 연말 입은 어깨 부상과 그에 따른 수술의 후유증으로 1, 2월을 서울집에서 지냄. 봄 되면서 다시 연산을 내왕하면서 텃밭 농사도 시작. 3월부터 대전문학관에서 성인들 상대로 매주 2시간(12주)씩 산문쓰기 수업을 함. 4월부터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파생된 기축옥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역사소설 집필을 개시. 이건청(시인), 최동호(평론가) 등 고교 선배들과 함께 엄규백 이사장의 요청을 받아 모교 양정고등학교에 문학관을 만드는 일을 추진함. 7월 손영목 유만상 등 소우회의 작가 친구들 연산 거처에 와서 1박. 8월 일본의 오사카, 교토, 나라 일원 여행. 9월부터 대전문학관 후반기 산문강좌를 시작함. 11월 고향 경산 방문. 경산문인협회와 와촌에서 간담회를 갖고 다음날 팔공산 답사. 김택중, 이강록 두 후배 교수 동행. 12월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정기 총회 및 송년회를 가짐. 이강록 교수와 둘이서 남경 방문. 민학, 포우, 화엽, 왕선자, 팽소방 등 중국인 제자들과 재회하여 구룡민속촌, 보은사터 등지를 둘러봄. 연말까지 장편소설 2,500장 분량 집필. 새해 1월까지 작업을 해야 1차 탈고가 가능할 듯.
2018년. 외손주 예일을 데리고 내 소설의 현장인 파주 일원을 답사함. 송익필, 이율곡, 성혼, 정철이 거주지를 가까이 하면서 친교를 나눈 현장이기도 함. 3월 봄 학기부터 한남대 사회복지대학원 문예창작전공(야간)에서 소설창작론 강의를 함. 3월 말, 원고지 3,200장 분량의 장편소설 [고변] 1차 탈고. 문우 이남호(문학평론가. 고대 교수), 윤석달(전 항공대 교수) 두 사람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함. 5월 두 사람이 연산에 내려와 함께 소설의 배경지로 여행을 떠남. 정여립이 은신처, 절명지 등을 둘러보고 마이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눔. 9월, 1, 2차 수정작업을 마친 뒤 도서출판 ‘새로운 사람들’에 원고를 보냄.
제4차 한중백주문화교류회를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중국 강소성 남경시와 안휘성 마안산시에서 개최. 한국에서는 15명의 회원들이 참가함. 남경에서는 남경대학살 기념관 등지를 둘러보고 다음날 마안산 당투의 이백 묘소에 참배. 이어 채석기의 이백 의관총으로 이동한 뒤 시내에서 중국 인사들과 교류회를 가짐. 6월, 예정에 없던 가족 해외 나들이를 가짐. 아들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마카오에 갔다가 사흘 후 돌아온다고 해서 왕복을 아들과 함께 하기로 했던 것. 화려한 인공 도시에 숨이 막힐 지경. 7월 내 고향 경산의 문협회원 33인이 문화답사차 논산을 찾아와 계백 유적지, 관촉사 등지를 둘러보며 한나절을 함께 함. 뜻밖에 김홍신문학관 개관식에도 참가하여 오랜만에 옛 친구도 만나 봄. 폭염의 기세를 꺾는 태풍 솔릭이 오기 전 중국 청해성 여행길에 오름. 청해호와 차카소금호수를 한 바퀴 돌고 대초원을 지나 치롄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 비현실적인 풍광에 깊이 빠져 듦. 10월, 안동의 김원길 선생의 요청으로 안동신우대학에서 중국 백주에 대한 특강을 함. 안동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최우석 교수도 만나 회포를 나눔.
2019년. 1월 아들 기림(제주항공 조종사)이 강보람과 결혼함(강남 라마다호텔), 3월 장편소설 [고변](새로운사람들)이 출간됨. 내외가 외손주 예일을 데리고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후쿠오카 일원을 여행함. 장편소설 [고변] 출판기념회를 대전(둔산)과 서울(광화문 동영관)에서 가짐. 대전기념회는 황산소설창작회가 주관함. 사회 설민선. 서울에서는 왕녕이 사회를 봄. 6월에는 백주 취재를 위해 한 주일 일정으로 중국 산둥지역을 여행함. 칭다오에서 시작된 여행은 공자의 탄생지 취부에서 끝남. 여행 내내 기침 감기로 무진 고생. 남경으로 이동한 뒤에는 중국인 졸업생들이 마련한 나의 칠순축하연에 참석함. 민학, 화엽, 포우, 한강설, 팽소방, 왕선자 등이 자리를 만든 주인공들. 8월에도 백주 취재를 위해 중국 후난지역 여행. 창사-창더-장가계-봉황고성-지서우 등지를 둘러보고 남경으로 귀환. 8월 말, 서울 문학의 집(남산) 주최 ‘작가와의 만남’에 초청되어 소설 [고변]에 대한 이야기를 함. 9월 강릉에서 개최된 허균, 허난설헌 축제의 인문학 콘서트에 초대되어 특강을 함. 11월 장편소설 [고변]이 제22회 동리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동리기념사업회 회장이며 소설가인 백시종 씨로부터 전해 들음. 뒤이어 이동하 등 심사위원들한테서도 축하전화를 받고 수상자가 됐음을 실감함. 후원사인 동아일보의 이설 기자한테 관련 사진들을 보냄. 상금 6천만 원. 며칠 후 다시 김원길 선생의 청을 받고 안동에 내려가 신우대학에서 기축옥사 관련 역사 특강을 함. 12월 16일 경주 더 케이 호텔에서 동리목월문학상 시상식이 거행됨. 목월문학상은 오탁번 선배가 수상. 가족들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 황산문학회 멤버와 경산문인회원들도 참석. 식이 끝난 뒤에는 가족 친지들과 보문호 가에서 자축연을 가짐. 이튿날 가족과 함께 불국사, 문무왕릉 등지를 둘러보고 상경. 12월, 근 20년 만에 다시 대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심사를 함. 시부 심사를 온 김명인 선배도 만남.
2020년. 1월부터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라19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됨. 비행기표까지 사뒀던 4월 중국여행을 부득이 취소. 우리나라에서도 사회거리두기 및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됨. 고교 선배인 이건청(시인. 전 한양대 교수), 최동호(문학평론가. 전 고려대 교수) 두 분이 나의 동리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고 인사동에서 자리를 마련함. 중국 23개 성의 153종 백주를 소개하는 나의 [중국백주기행] 원고가 10년 만에 완성됨. 3,500장 분량. 당초 4월 출간을 계획했으나 전염병 난리에 엄두를 내지 못함. 서울의 서현학습(출판사)이 기획한 ‘초중생이 읽는 한국사 100인의 인물’ 집필에 참여. 내가 맡은 ‘소설 홍경래’를 7월에 탈고함(350매). 6월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김홍도, 김첨, 김성립, 허난설헌 등이 묻혀 있는 안동 김 씨 묘소를 찾아 참배함. 7월 점점 병세가 깊어가는 열두 살 짜리 페키니즈 후몽이를 연산의 내 거처로 옮김. 시골에 와서 나와 함께 산책을 하는 등 상태가 좋아지는 걸 보고 기뻐함. 주말 서울집 갈 때도 동행. 8월 가족들 동해안 여행. 9월 후몽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서울의 병원으로 데려감. 다음날 녀석이 내 서울집에서 운명. 온 식구들이 슬퍼함. 이틀 뒤 녀석의 시신을 연산 동리지 옆 양지바른 곳에 묻음.
코로나 대유행.
2021년. 나도 [중국백주기행] 유튜브를 시작함. 첫 회는 <백주의 기원과 명칭>. 5월 문우 황충상 딸 결혼에 참석. 코로나 맹위에 소수의 인원만 초대. 식장에서 몇 년만에 소설가 윤후명 형과 재회하여 반김. 식후 김영두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과 뒤풀이. 6월 백주회 사무국장 이강록 교수 늦장가 감. 백주회 산행지를 경주로 정해 결혼식 전날 감포 바닷가에서 취하고 잠. 다음날 토함산에 올랐다가 식장에 가서 축하함. 7월 마침내 큰 두께의 [중국백주기행] 단행본이 출간됨. 12월. 자랑스런 양정인상을 받음. (집회금지로 지난해 연말 총동창회 개최가 무산됨에 따라 52회 동기 동창회 임원 모임에서 수상)
2022년. 3월 주일에 세 번 논산으로 신장투석을 다니며 투병하던 안채 도기선 형이 세상을 떠남. 전날 대전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황급히 운명할 줄은 몰랐음. 삼일절 휴일 갈마동 장례식장에 가서 눈물을 흘림. 그가 떠난 시골집이 텅 빈듯. 유해를 뒤산 납골묘에 안치. 그 아들 도기형과 술 한 잔. 4월 소설가 친구 박양호가 죽음. 혼자서 외롭게 운명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더욱 마음이 쓰림. 이채형 유만상 손영목 등의 문우들과 고대 안암병원에 가서 문상함. 5월 공주 정안의 김상렬 집에서 소우회 멤버들이 모여 하룻밤을 즐김. 경북 경산, 나와 고향이 같은 소설가 이동하 선배의 문학비 제막식에 참가. 옛 삼성역에서 제막식 거행. 식후 경산문학회원과 점심을 같이 함. 10월 시인 이건청 선배의 시선집 출판기념회가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열림. 문경서 선배와 참석. 11월 고려대 은사 정한숙 교수 탄생 100주년 기념문집 발간 축하회를 모교 강당에서 가짐. 이 자리에서 오랜만에 서종택 오탁번 박정규 윤석달 이남호 등의 선배회 문인들을 만남. 11월 백주산우회 장흥 원지 산행. 이튿날 인근에 있는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거처를 방문함. 1991년 문인시찰단 중국여행 이후 30여 년만의 제회. 시집을 받고 유튜브 영상도 찍음. 12월. 어렵게 친손자를 만남. 현비라는 이름도 내가 지었음. 중편 분량의 소설 [홍경래]가 서연바람 출판사에서 출간됨.
2023. 3월 와인리뷰가 부탁한 [택리지]의 이중환 취재를 위해 강경 팔괘정 일대를 답사함. 예전 대전에서 함께 근무했던 강윤후 시인(본명 강헌국, 고대교수)가 대전에 내려와 저녁자리를 같이 함. 의사 친구 이동복 원장이 그의 시에 매료돼서 한 번 만나기를 원했는데 그 일이 성사됨. 시인 오탁번 선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남. 손자 현비가 100일을 맞이함. 6월 백주산우회 팔공산 갓바위로 원지 산행. 전날 대구 당도하여 박기옥(수필가) 선생의 환대를 받음. 이강록 교수 부부 참석. 다음날 갓바위에 오른 뒤 예전 내가 소설 집필을 위해 머물렀던 환성사 방문. 30여 만의 방문이라 감회가 큼. 유튜브 [소설공간tv] 영상도 만듬. 7월 단편 [외가]의 영상을 찍기 위해 이경희 씨와 성주 홈실을 찾아감. 옛 사람이 다 떠나고 없는 산중 마을의 적막만 잔뜩 묻히고 돌아옴. 아내와 함께 3박4일 대만여행을 함. 타이베이 일원, 타이루거 대협곡 등지를 둘러봄. 9월 근 4년만에 중국 여행. 남경에 도착하여 반가운 옛 제자들을 만나고 이튿날 원저우의 안탕산 여행. 10월 왕센쯔가 친구들과 한국 방문. 안동의 김원길 시인의 초청으로 안동 신우대학에서 중국 술에 대한 특강. 안동대 최우석 교수와 안동소주 [이수동주] 유튜브 영상을 찍음. 12월. 손자 현비가 돌을 맞이함. 광무문 중식당에서 친지들만 모여 작은 잔치를 가짐. 올해가 나의 소설가 등단 50주년. 스스로 그를 기리기 위해 산문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연내로 출간키로 하였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한 해이 지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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