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전민욱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불교 스크랩 당간지주
전민욱 추천 0 조회 16 13.09.03 08: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석사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부석사 경내에 1m 간격을 두고 동서(東西)로 상대(相對)하여 서 있는 지주로 정상부에는 2단(二段)의 유려한 원호(圓弧)가 비스듬히 조각되어 있고 옆으로 세 줄의 종선문대(縱線紋帶)가 장식되어 있다.

간(杆)을 고정시키는 구멍은 윗부분에 장방형(長方形)의 간공(杆孔)을 하나 마련하였을 뿐이다.

특히 당간지주의 아랫부분인 지면(地面)에는 간대석(竿臺石)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대석은 원좌(圓座)로 되어 있으며 주변을 연화(蓮華)의 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소박 미려한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의 작품으로 보게 한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

  ① 幢(당)이란 본래 사찰의 문앞에 꽂는 旗幢(기당)의 일종으로서 속칭 掛佛(괘불)

  ② 그 표면에는 佛畵(불화)가 그려져 있으며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幢竿(당간) 꼭대기에 달았다.

  ③ 통일신라시대부터 각 사찰에서 성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으로 만든 幢(당)은 남아 있을 리 없고, 당간과 그 지주만 각 사찰의 입

      구에 현재까지 남아 있다.

  ④ 당간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붕괴되고 파손되어진 예가 많아지고, 대개의 경우 두 지주만이 현존하여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할 뿐

  ⑤ 당간은 만든 재료에 따라 목당간(木幢竿), 석당간(石幢竿), 철당간(鐵幢竿) 등으로 구분된다.

 

 

 

현존하는 당간의 예로는

   청주시 남문로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41호) : 고려시대

   공주군 계룡면 갑사 철당간(보물 256호) : 통일신라시대 추정

   나주시 성북동 동문 밖 석당간(보물 49호) : 고려시대

   담양군 담양읍 내리 석당간(보물 505호) : 고려시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제41호인 용두사지 철당간은 고려 광종 13년 (962)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간이 남아있는 데다 당간에 명문이 있어 건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당간의 높이는 13.1m이며,당간지주는 화강암 재질로 높이 4.2m에 이르고, 양 지주 사이에 같은 형태의 철통 20개를 쌓아올렸다.

철통의 높이는 63㎝, 직경은 40㎝이며, 밑에서 3단째 남쪽 표면에 용두사 철당기가 양각되어 있다.

당기의 내용은 당시 청주지방의 호족인 김예종이 유행병에 걸리자, 철당을 바쳐 절을 장엄하게 할 것을 맹세하고, 사촌형과 함께 자금을 지원하여 당간을 만들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당시 지방 호족들의 존재 형태와 당시의 지방행정조직, 관직의 변화 양상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공주 갑사 철당간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철당간, 지주. 높이는 15m, 지주 3m.

갑사(甲寺)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원위치에 철제당간에서 기단까지 모두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단은 단층으로 크고 길쭉한 두장의 돌을 결구하여 만들었는데 장방형으로 되었다. 지금도 윗면의 접착부분 두 곳에는 두 장의 돌을 결구시켰던 쇠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측면 사방은 상하에 굽을 돌려 정연한 규격을 보이는데, 좌우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을, 앞면·뒷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음각하였다.

윗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고, 양지주 사이의 밑바닥 부분에는 당간을 받치는 간대(竿臺)가 있다.

윗면의 중심이 되는 이 부분의 형태는 원좌로서 그 주변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다. 양 지주는 동서로 마주서 있는데, 마주보는 내측면과 외면, 그리고 앞뒤 측면에도 아무런 조각이 없는 소박한 지주이다.

정상부의 윗면은 평평하고 외측면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크게 죽여서 원만한 사분원을 이루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킨 간은 상부 한 곳에만 구멍을 뚫어 장치하였는데, 철제당간의 오절철통(五節鐵筒)을 굵은 철사로 세번 돌려서 고착시켰다.

당간은 지름 50㎝의 철통 24개를 연결한 것으로 현재 24마디가 보이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는 28개의 철통이었으나 1893년 7월 25일 4마디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초기(初期)인 문무왕(文武王) 20년(680)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중기(中期)의 당간지주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금동용두보당

장대모양의 이 당은 꼭대기에 용의 머리모양이 장식되어 있어 용두보당이라 한다.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73.8㎝의 작은 크기로, 2층의 기단(基壇) 위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당간을 세운 모습이다.

당간은 8개의 원통이 서로 맞물려 이어져 있는데, 여덟번째의 원통에는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용머리는 목에 비늘을 새겨 놓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뿔이 앞뒤로 생동감있게 뻗쳐있어 더욱 힘차게 보인다.

표면 전체에 다갈색으로 얇게 옻칠을 하고 그 위에 금칠을 하였는데, 지금은 군데군데 그 흔적만 남아있다.

신라 이래 발달해온 당간양식의 모습과 세련된 공예미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보통 당간의 머리장식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 당은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천흥사지 당간지주

고려 태조 4년(921)에 창건되었던 천흥사의 당간지주로 현재 천안시 천흥리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서있는 두 지주는 60㎝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다.

기단은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기단 주위에 안상(眼象)을 새겨넣어 당간지주의 장식화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동·서 지주 사이로 깃대를 직접 받치던 받침은 남아있지 않다.

안쪽면에 조각이 없으며 상단 꼭대기끝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다. 지주의 바깥 면은 위에서 아래까지 중앙에 1줄의 선을 새겼다.

지주 각 부의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퇴화된 기법으로 만들어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특히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으로 되어 있어 이 당간지주도 절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지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담양 읍내리 석당간

담양읍 석당간의 높이는 15m, 지주의 높이는 2.5m이다.

단층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은 지대석을 겸하는 직사각형으로 정면 중앙에 직사각형의 1단 받침을 마련하여 당간 대좌(幢竿臺座)와 양 지주를 받쳤다.

약 80㎝의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 서 있는 지주는 사각형에 가까운 돌기둥으로 양 지주가 마주보는 바깥 면에는 둘레의 가장자리를 따라 외연선(外緣線)을 둘리고, 중앙과 앞?뒷면에도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외연선대를 각출하여 장식하였다.

주두(柱頭)는 내측면 정상에서 바깥면으로 호선(弧線)을 그리며 급한 경사를 이루어 안쪽의 맨 꼭대기가 첨형(尖形)을 이루었다.

당간은 가늘고 긴 8각 돌기둥 3개를 연결하고 연결 부위에 철띠를 둘렀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쇠로 만든 둥근 보륜(寶輪; 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는데 풍경(風磬) 같은 장식물이 달려있고 위에는 철침이 솟아있다.

 

?특기 사항;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석비의 내용으로 미루어 현재의 이 석당간은 1839년(헌종 5)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담양 읍내리 석당간의 지정 명칭은 행정리에 따라 명명한 관례에 따른 것이나 ‘읍내리’라는 행정지명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지명이며, 실제로 현 소재지는 담양읍 객사리이다.

같은 절터로 추정되는 지역의 유적인 읍내리 5층 석탑(보물 506호)의 소재지는 지침리로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행정지명을 달리 하고 있으므로 문화재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담양읍 석당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나주 동문 밖 석당간

당간은 5개의 돌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세웠는데, 아래는 굵고 올라 갈수록 차츰 가늘어져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당간에 철띠를 두른 후 지주의 안쪽에 마련된 받침돌 윗면에 구멍을 파서 이를 고정시켜 놓았다.

당간 위에는 보개(지붕양식의 장식)와 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달아 놓았다.

본래 당간은 절 앞에 세워지는데,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없고 다만 풍수설과 결합하여 나주의 땅 모양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안정을 빌기 위하여 당간을 돛대로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미륵사지 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는 보물 제236호로서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 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아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풍군의 숙수사지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부석사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당간지주의 크기를 보고 사찰의 규모를 가늠하였다고 하니 위의 당간지주의 크기를 보아 미륵사가 대 가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 당간지주

금산사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금산사 입구에 있는 금강문을 들어서면 동쪽 편에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그 위치에서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높이가 3.5m에 이르니 언뜻 보기에도 당당한 모습을 지녔다.

당간지주의 기단은 잘 다듬은 길쭉한 돌로 바닥을 만들었고, 그 위를 안상이 조각된 두 장의 돌을 맞붙여서 마무리했다.

기단 위로는 당간을 세우는 받침을 지주 사이에 둥근 형태로 조각하였고, 받침 주변에는 괴임을 새겨두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남북으로 마주 보고 서 있는 당간지주의 꼭대기 부분은 안쪽 면에서 바깥쪽 면으로 떨어지는 선을 둥글게 깎았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당간지주에 구멍을 각각 위·중간·아래의 3곳에 뚫었다.

이처럼 구멍을 3곳에 뚫은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볼 수 있는 특징적 양식으로, 경주 보문사터 당간지주와 익산 미륵사터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드물게 기단부와 당간받침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조각수법 또한 훌륭하다. 우리나라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춘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경내에 있는 많은 석조물 대부분이 고려시대 중건 때에 만들어진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석련대(石蓮臺) 외에는 이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 금산사에서 단연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

이 당간은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남아 있는 것으로, 서원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로 보인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이 당간지주는 원 위치에 원 모습대로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 면은 중앙에 세로띠를 새겼다.

이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또한 꼭대기 안쪽 면에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파 놓았으며, 바깥 면은 둥글게 경사졌다.

원래는 당간을 받치는 지대석(地臺石)이 있었으나 현재는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 있을 뿐이다.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당간지주로,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최근 발굴 조사 결과 높이는 현 지표에서 340㎝였음을 확인하였다. 원위치에서 70㎝ 정도의 간격을 두고 원상대로 두 개의 지주가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 면은 양측의 모를 죽이고 가장자리에 너비 14㎝의 세로띠를 양각하였다.

중앙에는 약간 넓은 세로띠를 조각하였고, 다시 그 중심에 세로로 능선(稜線)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앞뒤 양 측면에는 두 지주가 똑같이 너비 9~11㎝의 외연선문을 돌려 하부는 지주를 따라 내려졌는데, 상부에는 안상 모양의 조각이 있다.

외측면의 상부는 33㎝쯤 밑에서부터 104㎝까지 양각된 넓은 띠처럼 약간 튀어나오게 돋을새김을 하였다.

꼭대기 부분은 뾰족한 형태이고,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로 꺾어져 3잔의 굴곡을 이루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하 두 군데에 간구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상부에는 장방형 간구를 뚫어서 간을 시설하였으며, 하부는 현재 지면에서 55㎝ 높이의 내면에 장방형 구멍을 두 지주 내면에 마주보게 뚫어 간을 끼우도록 되어 있다.

당간지주는 무기단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당간을 받치는 간대석은 유실되었으나 간대석 받침돌은 남아 있다.

지주와 간대석 받침돌을 중심으로 지주를 다듬을 때 생긴 화강석과 자갈을 이용한 보강석이 깔려 있다. 전체 직경 780㎝ 정도의 범위로 70~90㎝ 정도 깊이로 파서 점토를 불 다짐한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당간지주를 지탱하도록 했다.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

삼랑사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세워져 있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만 원래의 자리에 남아있는 듯하다.

마주 보는 면의 바깥 면에 세로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꼭대기는 바깥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내려가다가 한 단의 굴곡을 이루어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앙부분만 파여져 전체적으로 가늘어져 있다.

지주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아래위 두 군데에 파놓았다.

각 변의 길이가 적당하고, 높이와도 잘 조화되어 통일신라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앙부분의 두께를 얇게 하는 등 장식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신라 문성왕(文聖王)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基壇)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의 동남쪽에는 보문사의 옛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간지주가 속한 절이 원래 보문사였는지, 아니면 별개의 사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이 당간지주는 넓은 논 한가운데에 62㎝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아래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밑의 구조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양쪽 지주의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꼭대기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너비 13㎝의 큼지막한 구멍을 두었다.

특히 지주의 윗쪽 바깥면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는데, 이처럼 당간지주에 연꽃잎을 장식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이 시기에 제작된 것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