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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명(7~8월) | 라호르 | 이슬라마바드 | 훈자 | 카슈가르 | 탁스쿠르간 | 우루무치 |
최고기온 | 43.5 | 39.5 | 30.5 | 30.5 | 30.1 | 32.5 |
최저기온 | 32.5 | 29.5 | 18.5 | 21.5 | 20.0 | 20.5 |
☆짜파티는 얇은 밀가루 빵이며, 라만은 고기와 야채를 넣고 매콤하게 볶은 국수로 우리 입맛에 잘 맞고, 스즈키
(Suzuki)는 일본제 트럭을 개조한 소형승합차이며, 짜이왈라는 차 장사꾼이다.
‘수쿠레아’는 ‘감사합니다.’이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메르스)의 매개체로 밝혀진 낙타는 근접하지 말자.
☆PTDC과 PC 호텔: PTDC는 우리의 한국관광개발공사 쯤에 해당하는 파키스탄 관광계발에서 관리하는 호텔로
우리 여관보다 못하지만 PC호텔은 테러를 방지하는 탐지견과 3중 문이 있는 고급호텔이다.
<짜파티를 만들고 있는 소년>
[2일] 6월14일 토요일
●일정: 전일 라호르 관광[바드샤히 모스크→ 라호르 성→ 박물관→ 자항가르 무덤→ 와가의 국기 하강식]
[바드샤히 모스크(Badshahi Mosque) 관광]
호텔을 떠나 이번여행의 첫 관광지인 모스크에 도착했으나 입장을 하지 못하고 밖에서 대기하면서 주변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젊은 여자 분이 부모와 같은 나이를 먹은 남자하고 큰 소리로 다투었다.
다툰 이유는 사진작가이신 분이 조금 전에 찍었던 시크교도 2분 노인에게 사진 찍는 것을 허락 받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고, 또 찍은 사진을 시크교인 들에게 보여주느라고 시간이 걸렸다.
그들을 찍고 싶은 여자 분이 참지 못하고 비켜달라고 했는데... 나는 사진작가이니까 내게 관여하지 마라고
하면서 부끄럽게도 큰 소리로 그것도 이국땅에서 싸우게 되었다.
둘 다 보통은 성격은 아니어서 쉽게 끝나지 않았으나 실수와 망 말을 한 젊은 여자 분이 말을 하지 않아서 큰
소리는 줄어들었지만 망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됐는지 한심스럽다.
결국 모스크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으며, 여행은 첫 시작부터 이렇게 뒤틀리게 된 이유는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시크교도 복장을 한 사람들 때문이다.
이곳은 이슬람 사원이지만 시크교도 성인의 묘도 있어 이곳을 참배한 시크교도들이 돌아갈 때 까지는 개장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모스크 주위에 큰 나무들이 궁금하여 가이드 아부두후에게 물었다.
이 나무가 배얀트리라고 하여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는데 이런 것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쁨인데
이 나무에 대하여 조금 언급해 보기로 하고, 우리는 라호르 성으로 향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장면, 흰 모자와 검은 모자>
<배얀트리(배년, 벤얀, 반얀, Banyan Tree indian)>
이 나무를 처음 본 것이 하와이(빅 아일랜드)였으며, 그 때 이름을 알았는데 이 나무는 인도 보리수나무과에
속한 희귀식물로 모든 식물은 짠 소금기가 있는 곳이나 환경이 맞지 않는 곳에서 씨앗을 틔울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나무나 높은 곳에서 싹을 틔워 뿌리가 아래로 자라서 땅에 뿌리를 박는다고 하며, 이런 식물을
태생식물(胎生植物)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뿌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걸어 다니는 나무 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타잔이 잡고 날아다니던 나무가 이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걸어 다니는 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이 나무는 라호르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검은 뿌리들이 늘어진 거대한 배얀 트리>
☆바드샤히 모스크: 라호르 성 앞에 있으며, ‘황제(제왕)의 사원’을 가진 사원은 인도의 4대 모스크 가운데 마지막
건축물로 1674년 6대 아우랑제브제가 축조했다.
이슬라마바드에 샤 파이살사원이 생기기 전까지 파키스탄 최대의 이슬람사원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은 무굴문화를
잘 나타내며 건물내부는 1만 명, 안뜰에 9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붉은 사암의 벽과 흰 대리석 돔이 좌우대칭이고, 구조와 장식은 페르시아 양식이며, 동서 424m, 남북 340m의
크기로 회교사원이 가진, 긴 회랑, 둥근 돔, 모퉁이에 있는 4개의 미나레트 위에는 무아진이 예배를 알리는
장소인 차트리(소형탑)는 인도풍이라 특이하다고 한다.
<시크교도와 바드샤히 모스크 입구 그리고 성벽>
[라호르 성(Lahore Fort) 관광]
차에서 내리니 그 사이 온도가 올라가 몹시 무더웠으며, 이런 날씨에 오후 1~2가 되면 보통 41도가 넘는데 이때는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더위를 피한 후에 3~5 사이에 와가보더로 간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간 문은 사진에서 본 정문이 아니고 매표소도 없고 허름했으며, 그늘에서 먼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무굴제국이 강성할 때 아그라와 라호르 2곳에 수도가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악비르(악바르) 황제가 이곳으로 오면서 진흙과 사암으로 성을 만들기기 시작했으며, 다음 황제들이
거울궁전 등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고, 신문고역할을 한 디와니 암 궁전도 만들었다.
정문은 황제만 사용했고, 뒤 문은 일반인들이 사용했으며, 이 지역은 라호르의 구시가지(올드시티)로 지금부터
현장에서 설명을 하기로 하고, 이동한 곳이 디완 이 암인데 암은 과일 만고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
이 성에서 가장 오랜 된 건축물 ‘디완 이 암(Diwan i am)’은 타지마할을 만든 5대 샤자한이 건축했으며, 이곳은
황제가 백성의 민원을 들어 주고 귀족이나 정부각료들과 의논하던 장소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황제가 있으면 꼭 있던 장소로 인도의 아그라 성(1564~74년)과 암베르 성(1600년)에도 봤던 궁전으로
많은 기둥으로 된 공간이 서로 비슷한데 황제를 알현하는 대리석 발코니도 있는 것이 특이했다.
<라호르 성의 디완 이 암>
다음은 시크교도들의 박물관으로 갔으나 이곳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으나 규모가
작다는 것과 인물을 그린 그림과 무기 그리고 생활도구 등을 전시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각자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는데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인터넷에서 본 디와니 하스 궁으로
1645년 5대 샤자한(1628-58), 이 만든 궁으로 치하르바그 정원과 마주하고 있다.
이궁은 ‘디완 이 암’과 같은 구조의 건물이지만 고관들이 사적으로 알현하던 곳으로 아그라성의 하스마할 궁전을
본떠서 흰 대리석에 황금을 많이 사용해서 만들었으나 현재는 황금은 약탈당했다고 하는 곳이다.
갖춘 곳으로 밖에 것은 백성용이고, 이곳은 아마도 귀족들이 알현하던 곳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다음은 왼편으로 들어가니 성 밖의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60m의 건국승리 탑도 일부 보이고, 성벽의 일부도
볼 수 있었으며, 성벽구조도 일부 볼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다.
<라호르 성의 디와니 하스 궁과 성 밖의 건국승리 탑>
이제는 그늘에 앉아 거울궁전인 쉬쉬 마할(Shish Mahal)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우리가 아그라에서 보았던
타지마할의 주인공 뭄타지마할 왕비가 황제에게 자기의 사랑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녀는 샤자한에게 ‘하늘을 별을 따 줄 수 있느냐?’고 물었으며, 황제는 ‘따 줄 수 있다.’고 대답하고 만든 것이
거울궁전으로 방과 벽, 천장에 거울로 장식하여 밤에 불을 켜면 별 같이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가이드는 좀 다르게 설명했는데 거울과 보석을 사용해서 가장 값비싸게
만들었고, 거울궁전 앞 Paien Bagh(Ladies garden) 연못에 달빛이 비추어 거울이 반짝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울궁전 정면을 바라보고 왼 편에 있는 작은 건물을 지을 때 90만 루피가 사용되었는데 큰 모스크를
짓는 되는 60만 루피 밖에 들지 않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보석을 사용했는지 짐작케 한다.
금과 다이몬드 등의 보석으로 장식했으나 지금은 다 도난당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건물이 여성들만 기도할 수
있는 진주모스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곳은 여성들만의 공간인 하렘이다.
이곳에 자한기르 황제의 침실로 사용했던 후와부(꿈의 방)가 있을 것인데 생각이 나지 않아 물어보지도 못했고
코란의 천국을 상징한 정사각형의 차하르바그 정원이 아마도 간판에 적힌 Paien Bagh이라고 생각되었다.
<90만개의 보석으로 장식된 겨울궁전인 쉬쉬 마할과 장식품은 떼어가 폐허처럼 된 건물>
설명을 듣고 왼편으로 이동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곳에 1674년 6대 황제 아우랑제브가 만들었다는 알람기리
성문은 안보였고, 바드샤히 모스크와 아름다운 흰 건물인 시크교도들의 사원만 보였다.
그리고 60m의 파키스탄 건국승리 탑도 보이는데 이곳은 시민공원으로 놀이시설, 스포츠시설까지 갖춘 곳이며,
값비싼 건물을 구경하였고, 거울궁전 내부는 공개하지 않아 외벽만 구경한 후 관람을 마쳤다.
들어 온 곳으로 오다가 구식대포가 있어 이 대포 없이 싸움에 덤비는 것을 ‘무 대포’라고 한다고 했더니 그 말이
그런 뜻인 줄 처음 알았다고들 하는데 이 성을 보고 느낀 것이 너무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라호르 성: 라비 강가에 있는 라호르성은 넓이 약 16만㎡로서, 축조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025년 이전에
축조되어 힌두교도 군주가 머물려고, 1241년 몽골과 1398년 티무르가 성벽을 파괴했다.
1566년 무굴제국의 황제 악바르가 흙벽돌대신 구운 벽돌과 사암으로 성벽을 쌓았고 나중 황제들은 성벽에
12개의 망루를 세웠으며, 1634년 북쪽성벽은 아름다운 타일로 만들었다.
알람기리 성문을 통과하면 성채 안에는 궁전과 모자이크, 금박으로 장식된 대리석모스크가 있었고, 소형첨탑
차토리가 많이 있으며, 성은 옛날에는 해자로 둘러싸였으나 현재는 북쪽만 빼고 대부분 공원이다.
디와니 암 궁전은 일명 ‘40개 기둥의 방’이라고 하지만 1841년 포격으로 40개 기둥은 9개만 남았으며, 31개는
다시 만든 것이고, 천정에는 힌두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을 부조해 놓았다고 하지만 보지 못했다.
샬라마르 정원(Sharamar Garden)도 이 부근 어디에 있겠지만 보지 못했는데 인터넷에서는 1641년 왕가의
별장으로 샤자한이 만들었으며, 숙소, 폭포, 잘 장식된 연못들이 있다고 한다.
이 정원은 성채와 함께 198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높이가 다른 3단의 정원과 분수는 정문
가까운 곳이 제일 높고 뒤로 갈수록 낮아진다고 한다.
첫 번째 정원이 끝에 있는 큰 테라스에서 아래를 보면 가장 화려한 중간 정원이 보이며, 맨 앞자리에는 황제의
의자가 있으며, 호수 한가운데는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바드샤히 모스크와 시크교도 사원>
☆무굴황제: 우즈벡의 샤이바니가 페르가나 정복으로 쫓겨난 1.바베르는 1504년 카불 일어나 아프가니스탄과
간다라를 점령하였고, 1526년 로디왕조를 점령하여 무굴제국을 세웠으며, 2대는 후마윤 황제이다.
3대 악바르(1542-1605)황제는 다음황제가 될 살림왕자가 자기의 여인 아나르칼리를 사랑하여 그녀를 벽장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는데 왕자의 비극적인 사랑은 여러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4대 자한기르(자항가르 재위1605~27)는 이란의 ‘세계의 빛’라는 의미를 가진 누르자한과 결혼했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어 태업했으며, 황후와 황후의 가족이 권력을 장악했다. [자한기르 무덤 참조]
자한기르는 지적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한 사람으로 그래서 그가 소유한 보석이 세계최고였는데 진주는 220만
캐럿, 에메랄드는 93만 캐럿, 루비는 37만 캐럿, 다이아몬드는 28만 캐럿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엄격한 수니파가 아니어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인도에서 페르시아 문화를 장려했고,
술과 마약을 과용했으며, 수도인 아그라를 싫어했고, 카슈미르여행에서 라호르로 오다가 죽었다.
5대 샤자한은 아버지가 좋아한 라호르에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으며, 그는 건축 왕으로 360명의 왕비 중에
17년 동안 14명 째 자녀를 낳다가 죽은 뭄 타즈마할의 무덤인 타지마할을 건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도를 이전하려고 델리를 건설했으며, 그의 중병으로 황제제위 싸움에 아우랑제브가 승리했으나 샤자한이 다시
회복했으나 때는 늦어 1658년 아우랑제브는 아버지가 세운 아그라 궁에 유폐시키고 6대 황제가 되었다.
<라호르 성 정원 팻말에 있는 샤자한의 그림>
[라호르박물관(Lahore Museum) 관람]
박물관에 도착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1864년 영국지배 때 무굴양식과 영국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7개의
전시실 중에 인더스문명 4개만 같이 보고 나머지는 각자 관람하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전시실이 8개라고 했는데 일행 한 분이 건축양식은 압둘라 스타일이라고 써있다고 했으나 가이드는
아무 말이 없었으며, 인더스문명도 중요한 것만 설명을 하고 알고 싶은 분은 따로 질문하라고 한다.
처음 간 곳은 오직 이 불상만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며, 이 박물관을 대표한다는 ‘단식하는
불타 상(Fasting Buddha’ 앞에서 설명을 길게 했지만 통역은 간단했다.
간다라예술은 탁실라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고, 이 예술은 2세기 때 알렉산더 대왕이 넘어와 만들어졌는데도 힘줄,
갈비뼈 그리고 핏줄까지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그 때도 의술이 많이 발달한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갑자기 돌발 질문이 나왔는데 며칠 굶은 것이냐고 했는데 가이드가 6일이라고 답하자 모두들 에~~ 하는 바람에
설명은 중단되었는데 붓다는 6년의 고행과 7일의 좌선으로 깨달음(불타)얻어 35세에 부처가 되었다.
가이드가 6년의 고행을 안다고 해도 그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힘들 것 같았는데 얼마를 굶으면 이렇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지만 얼마를 굶었는지 붓다 자신도 모를 질문은 하는 사람이 좀 이상하다.
<박물관을 대표하는 단식하는 불타 상>
다시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졌는데 알렉산더가 온 것이 갑자기 3세기로 바뀌었으며, 대왕이 떠나면서 기술자들과
조각가들을 두고 떠났고, 그들이 인도의 불교와 그리스의 조각기술이 만들어 낸 것이 간다라예술이다.
붓다에 대한 설명을 더 했으나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중구난방으로 아는 척하는 바람에 통역은 하지
않았고, 15분 후에 들어온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기로 각자 헤어졌다.
각자 흩어지는 바람에 사진 찍을 일이 걱정되었는데 먼저 혼자 다니며, 대충 사진을 찍다가 일행을 만나면 사진을
부탁하기로 마음정하고 피골이 접한 것이 아니라 교차한 불상부터 사진에 담았다.
유리 속에 있어 잘 나 오지 않을 것아 여러 장 찍었으나 예상대로 반사가 심했으며, 내가 찾는 것은 석굴암의
불상처럼 곱슬머리와 로마황제의 옷을 입은 불상을 찾아는 데 있었다.
‘단식하는 불상’ 빼고는 비만형의 불상은 여기서부터 석굴암까지 비슷한 것이 신기했는데 아마도 그래야 인자한
모습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 다음은 인도의 사르나트 박물관에서 본 사자상인데 ‘인도의 국장’이라는 아소카 왕의 4마리 사자상은 인도
화폐에도 있지만 견원지간인 이 나라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궁금했으나 알 길은 없었다.
원형의 스투파 탑에 새겨진 조각은 붓다의 일생을 말하는 것 같았으며, 글씨가 많이 적힌 돌 판은 로제타석을
연상하게 했는데 저 돌 판도 옛글을 해석할 때 도움을 준 것인지 아니면 그 시대의 생활상을 기록한 것인지
궁금했으며, 로제타석 같이 귀한 돌 판 이기를 바랐다.
<1. ‘인도의 국장’ 4마리 사자상 2. 붓다의 일생 3. 간다라의 로제타석?>
2층까지 다니며 관람했으나 특이한 것은 없었으며, 생활전시실, 무기전시실, 역대 황제와 영웅들 사진과 그림이
있는 전시실 등을 보면서 혼자 궁금해 하고 해석하며, 추측해 보았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 왔으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더 보고 나올 것 하고 후회했지만 다시 들어 갈 수는 없으니
그늘에서 기다리면서 엄청난 더위에 고생을 하다가 좀 시원한 식당에 들어서니 살만했다.
그저 생각나는 것이 시원한 냉면이지만 없으니 더 그리워져서 한국에 돌아가면 냉면부터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점심을 먹었는데 아침에 다툰 것이 미안했던지 사진작가분이 음료수를 제공했다.
▶라호르 박물관: 1894년 개관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8개 전시실은 간다라불교미술, 인더스 강
유역의 출토품, 중국도자기와 비단, 파키스탄 각지의 민속의상과 무굴제국의 예술품, 이슬람 예술품, 무기,
필사본, 의복, 보석 등이 가득 전시되어있으며, 퀼트 카펫도 있다고 한다.
이중 압권은 ‘단식하는 불타 상’으로 높이 약 80cm의 이 좌상은 뼈와 가죽 그리고 혈관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박물관에 있는 불상의 다양한 의상들과 무기들>
★간다라 예술: BC327년 알렉산더는 12만 명을 거느리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스와트(베샴)를 지나 BC326년
탁실라를 점령하였고, BC324년 페르시아의 수사로 철수했으며, BC323년에 병사했다.
대왕은 지금의 유엔과 같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으며,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점령한 곳에 병사들을
남겨 놓고 와 혼혈이 되도록 했고, 그들을 통해 그리스문화를 남기려 했다.
병사와 함께 남겨진 사람은 노새와 낙타몰이꾼, 의료진, 행상인, 놀이패, 여자와 아이들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보조
인력이 포함되었을 것이며, 각종의 기술자와 조각가도 있었을 것이다.
본래 불교는 석가모니는 보리수와 법륜, 스투파 등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지만 불상은 만들지 않았으나 남겨진
알렉산더 부하들이 불타를 믿게 되었고, 그들은 불타도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의 제우스신 또는 아폴론을 닮은 조각상처럼 불상을 만들었기에 이 무렵의 불상은 코가 높았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여 얼굴이 서양인이었다.
불상이 입은 옷은 로마황제가 걸쳤던 의상으로 이것은 동서 문화를 혼합한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킨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동양 것이 첨가된 불상이지만 아직도 서양인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여튼 모든 불상의 원조는 이들 즉 간다라예술인데 인도를 거쳐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의 석굴암까지 영향을
받게 된 것으로 경주의 깨진 기왓장의 미소가 바로 그리스사람의 미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간다라 예술의 불상 의상들>
미국이 폭격을 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칸타하르가 간다라라고 해서 이곳에서 예술이 발달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북서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이다.
중요 도시는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로 이 도시는 미국의 빈 라덴 사살작전이 시작된 곳이며, 파키스탄은
페샤와르와 탁실라인데 잘랄라바드와 탁실라는 직선거리로 150km 정도이다.
간다라 예술은 박트리아왕조(BC246~BC138)가 통치하면서 남겼던 불교예술은 박트리아왕조 멸망시킨 쿠산 통치
때 BC1세기~AD7세기에 가장 번성했으나 사산(배화교) 왕조와 이슬람지배로 소멸했다.
간다라 예술의 유물이 보관 된 3대 박물관은 페샤와르와 탁실라 그리고 라호르인데 이번에 탁실라와 라호르를
보게 되어 그렇게 보고 싶었던 간다라 유물은 원 없이 보게 되었다.[박트리아왕조 참조]
<박물관의 정면>
[자한기르 무덤(Jahangir Tomb) 관람]
다시 호텔로 돌아와 무덤에 갈 사람만 다시 차를 타고 무덤으로 향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확 하는 열기에 내리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날씨가 섭씨 46°라고 했으나 우리 여름보다 10° 높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습도가 없어서 그런지 참고 견딜 만 했으며, 무덤의 정문은 아름다운 이완(Iwan, ∩ 모양의 이슬람 큰 출입구)으로
되어있었으며, 안으로 들어서면 4개의 큰 차트리(인도식 미나렛)가 있는 것이 자한기르의 무덤이다.
직사각형의 자한기르의 무덤의 정면에 있는 건물과 그 뒤에 있는 돔은 황후와 그의 아버지 아쉬 칸 무덤(Asif
Khan's Tomb)이라고 했으나 여행 후 찾아보니 아사프(아쉬) 칸은 황후의 아버지 형제이라고 한다.
넓은 공간 좌우로 보이는 수많은 구멍은 대상이 머물던 카라반 사라이라고 하는데 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려고
이곳에 거주하게 했다고 하며, 넓은 공간은 대상들의 장마당으로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워서 더 멀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붉은 사암의 건물로 향해했는데 무덤이 있는 방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으며,
무덤은 타지마할에서 본 것처럼 흰 대리석의 바탕에 상감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관은 아름다운 색상과 꽃무늬로 장식했으며, 관리자가 플래시로 비추어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나오다가 아이들 3명이 있어 몇 사람이 사진을 찍었는데 이들은 보통아이들이 아니었으며, 그 중 눈빛이 매서운
아이가 딸아 오면서 1달러도 아니고 2달러를 달라고 하여 못 알이 듣는 척 했다.
Pa-19 <자한기르의 무덤과 카라반 사라이>
이제는 황제의 장인의 무덤과 카라반 사라이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엄청난 크기의 배롱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카라반 사라이 방 중에는 사람이 있는 곳도 있었는데 무엇을 먹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들어와 같이 먹자고 했으나
혼자인데다 먹고 싶지도 않았으며, 더위로 돌아다니기는 것도 힘들었다.
차를 타고 호텔로 향하다가 사탕수수를 짜서 비닐봉지에 담아 주는 주스를 사서 주었는데 위생상태가 걱정이
되었는데 파는 사람이 국가인증의 명찰을 달고 있어 마음 놓고 마셨다.
그 더운 날씨에 불까지 태워가면서 열심히 만들어 내기 바빴는데 인도에서부터 먹어보고 싶었으나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먹어보게 되어 매우 기뻤으며, 시원하고 달콤한 것이 맛이 있었다.
혜초여행사의 여행 때 이런 작은 배려를 전에는 잘 못 느꼈는데 이번에는 책 보내 줄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이번에는 여행 내내 필요할 때마다 감사하도록 만들었다.
<아사프 칸 무덤>
▶자항기르 무덤: 라호르 외곽 바따라는 곳에 있는 샤다라 공원에 있으며, 내부는 화려한 그림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나 관리상태가 좋지 않아 마음 아프게 했다.
자한기르 황제가 죽은 후에 샤자한에게 감금되어 이곳에서 황제의 무덤을 돌보다 죽은 황후 누르자한이 있었는데
그는 페르시아 여인으로 어릴 적부터 황제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름은 ‘미르운니사’이다.
그녀는 결혼은 다른 사람과 했으나 1611년 남편이 죽자 황제가 황후로 삼은 후 '세계의 빛'이라는 뜻으로
‘누르자한’이라고 불렀으며, 황제는 파업하고 황후의 일족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녀의 아버지 ‘이티마드 웃 다울라’의 일파와 쿠림(후에 샤자한)왕자가 1622까지 정권을 휘둘렀으나 황후와
왕자의 불화로 병든 황제의 말년은 불행했으며, 왕자는 몇 번의 난을 일으켰다.
<자항기르 무덤 건물>
[국경 와가 보더(Wagha Border)의 국기 하강식]
호텔에서 일행과 나서는데 거인의 수문장을 보고 대전엑스포에서 봤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은 딸 때문에 그랬다.
대전엑스포 때 중학생이든 딸이 파키스탄 거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생각이 나서 딸에게 보여주려고 그랬는데
후에 딸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거인에게 대전엑스포를 아는지?
물어 볼 것이지 했으나 그때는 바쁘게 나아가다가 만나서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이 후회가 되었으나 어쩔 수
없게 되었으며, TV에서 보았던 국기 하강식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도 외국인은 손님이라고 앞자리를 주었으며, 자 국민은 대부분 뒤에 서서 영원을 한며, 외국인 우리에게도
파키스탄 국기를 주면서 흔들어 달라고 했으나 좋아하지는 않는 종교를 믿는 그들이지만 오늘 하루는 기꺼이
파키스탄을 응원하기로 했으며, 앞에서 ‘파키스탄 잔다바르!’라고 소리치면 모두들 따라 하였다.
이것은 ‘파키스탄이어 영원 하라!’라는 뜻이라고 하며, 지루할 만큼 소리를 지른 다음 국경 문이 열리면 이때부터
복장부터 특이한 행사용원의 시간이다.
<파키스탄 측 행사 동영상>
행사요원의 복장 중 모자는 공작같이 생긴 깃털이 달려 있으며, 공작 깃털은 역사에서 찾는다면 인도를 첫 통일한
공작왕조(孔雀王朝)는 왜? 이런 이름을 가졌는지는 모르나 마우리아왕조(BC317~BC185)를 말한다.
이 왕조는 아래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며, 그리고 1738~39년 이란의 나데르 샤가
수도 델리를 약탈하여 전리품에 유명한 공작 왕좌 (Peacock Throne)가 있다.
재미있는 나데르 샤와 나무꾼의 이야기는 카페여행기 16번 1 우즈벡 ‘검푸른 옥색 돌’을 검색하면 볼 수 있으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로 인도는 공작새와 인연이 깊다.
인도여행 때 공작새가 많은 것을 보고 환경도 한 이유 있겠지만 이런 역사도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했다.
오늘 이들 모자에서 공작새의 역사성을 생각해 보았고,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모자모양이 같을 역사가 같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했으나 모자의 색깔은 인도는 빨간색이고, 파키스탄은 검은색이다.
아마도 색깔은 복장의 영향 같았는데 파키스탄은 복장이 검정색이라서 당연하지만 실제로 공작 깃털은 검정계통은
많지만 인도의 빨간색은 아마도 눈에 잘 띄고 인도복장인 카키색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공작 깃털의 모자를 쓴 양국 행사요원>
양국이 복장 모습은 비슷하나 색깔은 파키스탄은 검은 색이지만 인도는 카키색인데 이 카키색은 위키백과에
어원이 페르시아어 khak이며, 이 단어는 '흙먼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힌두어를 거쳐 카키색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색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상태였을 때의
군복의 색깔이었으며, 1848년부터 쓰이는 색의 이름으로 모래와 같은 색깔이다.
이런 이유로 사막과 해변에서 작전하는 군의 위장색깔로 많이 애용되며, 한국 해군 하절기 근무복과 해병대
하정복 상의가 카키색인데 60년대 말 우리가 복무할 때도 하절기 군복은 카키색이었다.
행사요원들은 군인인지 경찰인지는 모르나 행사요원의 차례가 되며, 여러 가지 모습을 2나라가 서로 번갈아 보여
주는데 별난 복장에 억지스럽고 과장된 행동은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국기의 하강이 끝나고 열렸던 문이 닫히면 하강식은 끝이 나는데 과연 이 많은 사람들은 동원했을까? 아니면
애국심에 자연히 모였을까? 궁금했으며, 국기 하강식은 하나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것이 시작할 때는 어떤 의미로 했는지도 궁금했으며, 양국에 모여 이렇게 소리 지르면 애국심이 생길까?
아니면 상대국에게 분노와 증오의 마음이 생길까? 아니면 둘 다일까?
비록 애국심에 시작했다고 해도 외국인 눈에는 애국심보다는 분노와 증오일 것 같은데 그러면 양국에 덕보다는
실이 클 것 같았으며, 관광의 자원으로 하기엔 그 많은 사람을 동원한다는 것이 힘들 것 같았다.
와가의 국기 하강식은 인도와 파키스탄 1,000km의 국경사이에 있는 특별한 무대로 국경이 닫히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모여든다.
행사요원의 화려한 복장과 과장된 몸짓은 한편의 코미디 같은 ‘볼거리 축제’로 자리매김했으나 매일 그 많은
인원들이 찾아오는 것은 지금도 궁금하다.
<카키색 복장의 인도 군인들>
이곳에서 30km 떨어진 암리차르(Amritsar) 도시에는 시크교도의 성지 황금사원이 있는데 그것을 못 보는 것이
조금 섭섭했는데 비록 가깝기는 하지만 국경을 넘는 문제와 시간 때문에 일정에 넣지 못한다고 한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으나 더위 탓인지 저녁 먹기도 싫었는데 사진작가분도 입맛이
없으신지 먼저 먹는 사람들에게 어떤 맛인지 알려 달라고 여러 사람을 상대로 물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인데 한 사람이 앙칼지게 ‘먹어 보세요.’라고 대답해서 옆에서 듣기가
거북했으며, 다행이도 이 식당에는 아이스크림이 있어 좋았다.
인터넷에 라호르는 값싸고 질 좋은 아이스크림을 많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먹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으며,
더위도 잊을 겸 많이 먹었는데 주인님 이제야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라호르(Lahore): 펀잡 주의 주도로 인구 850만, 1021년 마흐무드 가즈나비에 의해 정복당한 후 가즈나비드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며, 무굴제국의 3대 악바르가 수도를 델리에서 라호르로 옮기면서 재건했다.
최고의 번영기는 1524년부터 1752년까지 200여 년 동안 마지막 통일왕조인 무굴제국의 초기 수도 역할을 하던
때이며, 1739년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시크교도가 융성하여 우두머리인 란지트 싱(1799~1839 재위)이 다스릴 때 행정중심지이었으나 그가
죽은 후 쇠퇴했으며, 1849년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는 교통요충지로 와가 쪽으로 시크교도의 성지 암릿차르에 황금사원이 있고, 인도국경과 25km이다.
<라호르 시내 풍경>
☆펀자브(펀잡): 인도북부와 파키스탄 중북부에 걸친 광대한 지방으로 인도 령과 파키스탄 령이 있는데 인더스의
5대 지류가 흘러 '5강의 지방' 뜻으로 BC326년경에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파자마(Pajamas): 어떤 여성분이 파자마가 펀자브가 어원이라고 해서 찾아보았는데 그 어원은 인도(힌두)어의
파자마(Paayjaaamaa)이라고 하지만 이 단어도 페르시아어에서 왔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는 하의를 다리는 감춘다는 뜻으로 ‘파자마’라고 했고, 영국은 Pyjamas 했으나 미국은 Pajamas라고
했는데 파자마는 인도의 전통의상 중에 하나이라고 한다.
펀자브 지방과 관계가 있는 옷은 펀자비(punjabi)로 ‘펀자브 지방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하나 지금은 여성들이
입는 인도전통의복을 뜻하며, 상의(카미르), 하의(살와르), 스카프(두빠따)까지 갖추어야 된다고 한다.
<펀자브의 전통 복장한 여인들>
☆구루 나나크(1469~1539): 라호르 근교에서 태어나 이슬람영향을 받아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반대하여
시크교를 창시한 10명 중에 첫 번째로 모든 신은 동일하며, 계급과 종족의 차별 없이 믿을 수 있고,
우상과 고행을 반대하며, 묵상으로 섬길 것을 주장했다.
[3일]14년 6월15일 일요일
●일정: 라호르→ 중식→ 케우라 소금광산→이슬라마바드 도착(6h)→ 파이샬 모스크 탐방→ 마르갈라 언덕의
야경조망→호텔(PC)
[이슬라마바드로 가는 길]
호텔을 떠나 여성들의 요청으로 시내 거리에서 파는 길표 스카프를 사기 위해 차를 잠시 멈추었으며, 막내가
가장 예쁜 것을 골랐다고 여성들은 부러워했으나 사실 막내는 무엇이나 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타고 가는 고속도로(AH 1)는 대우건설에서 건설했다고 해서 친근감이 갔는데 이렇게 잘 된 도로는
이 나라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건설했다니 뿌듯했다.
그리고 지금은 삼미그룹에 팔았다는 DAEWOO EXPRESS(대우고속)은 인기가 좋아 상표는 지금도 그대로 쓴다고
하며, 차가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슬라마바드 남쪽에서만 운행된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달리는 차 중에 대형버스는 엔진이 있는 뒤 문을 열고 달리는 것을 보면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를
짐작케 하였으며, DAEWOO EXPRESS 간판이 있는 휴게소에 들렸다.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는데 얼마나 빨리 녹는지 마시는 편이
훨씬 쉽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사진을 남기고 싶어 주차장에서 뒤 문 열린 버스를 찾았으나 없었다.
<DAEWOO EXPRESS 간판과 버스>
[케우라(큐라, Khewra) 소금광산 관람]
차는 소로를 달려 어느 주차장에 멈추었는데 걸어가기가 힘들 정도로 날씨가 더웠는데 식탁도 없는 응접실처럼
테이블 만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으며, 그곳도 좁아 2곳으로 나누어 앉았다.
식당은 에어컨이 없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지만 이곳도 에어컨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고 그릇, 수저 등
모든 것이 부족했으나 무더운데 멀리서 날라다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했다.
시원함과 맛을 찾기에는 너무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배만 고프지 않기를 바라는 정도로 먹고 나와 올라오면서
보았던 상가에서 진열해 놓은 소금조각을 구경했는데 대부분 조명등인데 너무 크고 조잡했다.
우리에게 구걸을 하던 애들에게 무엇을 좀 주려했으나 어떤 사람을 보더니 도망쳐서 숨어 버려 주지 못하고
걸어서 동굴 입구까지 가는데 다리를 건너다가 아래를 보았더니 물도 없는 냇가이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으며, 뒤를 돌아다보니 점심 먹은 곳에 제법 큰
놀이기구도 보여 식구들이 함께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점심 먹은 식당과 놀이기구>
입구에 도착하니 광산 안에서 나오는 바람이 시원해서 좋았는데 철로 위를 걸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다.
이 소금광산이 발견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말들이 죽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 말들이 밤에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을 알고 따라 나선 것이 이 광산이라고 했는데 글쎄? 믿거나 말거나...
이광산은 세계의 2번째 규모이며, 가장 큰 곳은 폴란드의 비엘리츠카라고 했는데 이곳은 15년 전에 가 본적이
있어 오늘 보는 광산과 비교하기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광산 가이드가 설명했는데 우리는 전동차를 타고 들어간 후 걸어서 1km 쯤 구경한
후에 다시 전동차를 타고 나오게 되는데 이 광산은 총 17층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 중에 6층이 가장 볼거리가 많아 이 층만 구경하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은 년 25만 명이라고 하며, 이곳에
보이는 산들이 다 소금광맥을 가진 광산으로 면적이 250만㎢이라고 한다.
이 때 전동차가 들어와 설명을 중단하고 차에 오라 출발을 했으며, 소금을 캘 때 사용하던 것이라 승차감이
나빴고, 정차할 때는 더더욱 나빴으나 다리 아픈 나에겐 걷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 가면서 느낀 것은 일반적으로 동굴은 보통 18°이라서 한기를 느끼나 이곳은 워낙
더운 곳이라 덥지 않을 정도이지 시원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소금으로 만든 구조물>
소금강산은 건강에도 좋지만 특이 아토피에 좋다고 하며, 석회암 동굴처럼 소금도 종유석과 같이 천장에서
자라는 것, 석순과 같이 아래서 크는 것,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석주가 되듯이 기둥이 되는 소금도 있다.
연못 같은 곳에 고인 물은 사해처럼 몸이 뜨고, 이곳 진흙으로 머드도 만들고 비누도 만든다고 했으며, 좀 더
가자 소금으로 조각한 곳에 조명을 해 놓았다.
색깔이 무척 아름다워 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며, 모두들 사진 찍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파키스탄
사람들에 의해 이젠 우리들이 구경거리가 되었고, 막내는 사진모델이 되었다.
그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카메라 앞에만 서면 몸이 굳어지는 것을 본 막내가 내게로 오더니 모자를 거꾸로 씌우고,
왼손을 들라고 해 놓고, 목동의 권사님은 내 옆에서 오른손을 들라고 한다.
본인은 그 앞에서 양팔을 교차해서 무술인 같이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동안 어색해서 혼이 났으며, 차라리
어색한 것이 나에게는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꼈으며, 이런 연출된 사진은 처음 찍어 보았다.
벽과 천장이 칼라인 가장 아름다운 터널을 통과 했는데 요르단 페트라 계곡에서 본 칼라암석이 생각나게 했는데
이 벽에 입술을 데고 기도하면 이루어지며, 특이 사랑이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광산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통역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나 눈으로만 보면 되니 별로 답답할 것도 없었는데
여성분들은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같이 사진 찍기에 바빴을 뿐 우리는 이방인이 되었다.
사진작가님이 룸메이트를 사진전문가라고 인정해 주었는데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 다고 한다더니 룸메이트는
동굴에서 렌즈가 맑은 사진기를 사면 적은 빛에도 사진이 잘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막내가 연출, 각색, 감독을 했던 사진, 아래는 칼라 소금터널>
▶케우라 소금광산: 2억5천만 년 전 테티스라는 바다가 히말라야산맥이 되면서 소금이 생겼는데 미네랄과 특히
요오드가 많이 포함되었고, 우리나라는 목욕소금으로 알려졌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소금은 어느 나라 제품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소금은 우리나라 죽염이다.
<차들의 치장>
이슬라마바드로 향하면서 옆에 있는 트럭이 얼마나 치장을 잘 했는지 어떤 차들은 평면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한 것도 있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차들을 치장을 하는 것은 옛날에 낙타에게 치장하던 습관이라고 하지만 넉넉하지도 않으면서 그 많은
비용을 허비하면서 운전에 불편을 줄 만큼 치장하는 것은 이방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트럭치장 엇 떼요? 대단하지요!>
[샤 파이잘 모스크(Shah Faisal Mosque) 관람]
18시 30분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기 전 간단하게 설명을 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현대식모스크로 1972~
1977년까지 5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살 왕의 원조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일층은 국립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내부는 들어갈 수 없음으로 외부만 본 다면서 차에서 내렸는데 이 모스크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들과는 전혀 달라 과연 저것이 모스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는 돔 대신 삼각형을 맞추어 지붕을 만들었으며, 4개의 미나렛은 첨탑 형식이어서 전에 본 모스크와는 같은
곳이 하나 없는 아주 특이한 형태의 초현대식건물이라 생소한 느낌을 준다.
모스크로 가는 도중에도 툭툭치는 사람들 모두가 사진 같이 찍자는 사람들로 일행을 놓칠 가 봐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이들이 왜? 이렇게 같이 사진 찍는 것에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잘 생겨서는 절얼대로 아닌데 이 사람들이 착각하게 만드네, 처음 보는 동양인이 신기해서? 아니면 옷이
화려해서? 글쎄? 얼굴마저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이슬람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주위에 본국 남자가 없으면 여자들도 용감하게 달려온다.
가는 길에 예쁘게 핀 부겐베리아는 다른 나무에 의지하고 일반나무처럼 혼자 서서 피어 있는 것이 특이했으며,
신발은 우리 가이드가 맡아주어서 안심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흰 대리석의 바닥은 생각 외로 뜨거웠으며, 맨발인 룸메이트가 고생하는 것 같아 양발 위에 신은 덧신을 벗어
주었으며, 석양에 빛을 안고 있어 사진은 검게 나오는 것이 흠이었다.
흰 대리석에 비치는 모스크의 모습이 보기 좋아 사진에 담아 보았으나 흐려서 별로였으며, 내려오다가 바닥을
닦는 사람을 보았는데 긴 줄 끝에 걸레를 달아 좌우로 쳐 주면 한번에 5m 정도는 닦이는 것 같았다.
손과 발을 닦는 세정소를 지나니 더 볼 것이 없어 신발을 찾아 신고 나오니 우리 여성 팀은 사진모델 하기에
바빴는데 이런 현상은 중앙아시아 때부터 그랬으나 파키스탄이 유독 더 심했다.
▶샤 파이잘: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마르갈라 구릉기슭에 있으며, 파이살 왕이 죽은 후 명명되었고,
터키 건축가 ‘반다트 달오케이’가 설계했으며, 88m의 4개 첨탑, 대기도실의 천정 높이 40m, 너비 5,000㎡,
모스크 내부 1.5만 명, 전체로는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파키스탄 친구들과 부겐베리아 그리고 샤 파이잘 모스크 전경>
[다만에코(Daman e Koh) 관광]
박은 이미 어두운데 차를 타고 남쪽에 있는 마르갈라(Margallah) 언덕위로 향했으며, 차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
전망대로 향했으며, 이곳에서 장대한 야경감상을 감상할 것이라고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다.
도시는 전력사정이 안 좋은지 컴컴했으며, 낮부터 찾던 만고 때문에 카페에 들어갔으나 과일 대신 주스로 마시고
내려와 호텔로 향했는데 이곳도 몸수색과 짐 검사를 했으나 시설은 좋았다.
★이슬라마바드(Islamabad): 카라치가 수도로서 부적합하여 1959~69년 사이 임시 수도를 라왈핀디에 두고 14㎞
떨어진 곳에 1961년부터 유명한 건축가들이 참여시켜 이슬람양식을 현대적 기능에 맞추어 건설을 시작했다.
도시이름은 국가의 이념에 따라 '이슬람(평화 뜻) 도시'라는 뜻으로 이슬라마바드라고 했으며, 도시는 탁실라의
고대도시 시르캅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하고, 해발 450~600m이다.
북동쪽에는 해발 915~1,525m의 마르갈라 구릉지대가 있고, 쿠랑 강을 막아 라왈 댐이 건설했으며, 도시면적
906㎢, 행정구역 인구는 53만 명, 광역인구는 80만 명 정도이다.
<다만에코에서 내려다 본 이슬라마바드의 동영상>
[4일] 14년 6월16일 월요일
●일정: 이슬라마바드→ 탁실라 관광[졸리안→ 시르캅→ 탁실라→ 탁실라 박물관→ 베샴 도착(약6.5h)→호텔
<노란 꽃과 아카시아 이야기>
잘 정돈 된 이슬라마바드를 떠나면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노란 아카시아 꽃 같이 피는 나무가 온통 노랗게
보였는데 작년 조지아에서는 보라색 아카시아에게 사로잡혔었다.
진짜 아카시아는 노란색 꽃으로 우리나라에 피는 흰색은 일본에서 들어 올 때는 ‘가짜(유사) 아카시아’라고 했으나
현제는 아카시아가 표준어가 되어 진짜 이름인 아까시 마저도 모르게 되었다.
인도사람은 ‘인디언’에게 빼앗기고 루마니아 사람들은 ‘집시’에게 빼앗기듯이 아카시아도 ‘아까시’에게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는데 노란 꽃은 아카시아를 닮았으나 잎이 아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본 노란꽃나무>
[자울리안(죠리안, Jaulian) 사원 탐방]
이른 아침인데도 날씨는 무더웠으나 다행이도 차의 에어컨은 수리하여 훨씬 낳아졌으며, 사원에 도착하여 이동
중에 작은 수로가 있었고, 물놀이 하는 아이들은 추워보였는데 눈 녹은 물이라서 차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위에 있는 사원에서 아브두후의 설명을 들었으며, 이곳은 크게 2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사원이고, 하나는 수도원(대학)인데 사원으로 들어가 설명을 했다.
여러 나라 침략을 받은 관계로 그들이 남긴 문자들도 남아있으며, 고르스키와 바니니라는 단어가 나와서 물었는데
고르스키에 대한 설명은 안했으나 바니니는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글을 만든 사람으로 생각했다.
가이드 설명에 아~ 아~ 호응하는 사람들 위주로 설명은 통역할 시간을 주지 않아 못 알아듣는 사람만 답답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TC가 통역을 하려고 하면 ‘그놈의 소리’가 엉뚱한 소리를 해서 방해했다.
본래 붓다는 불상을 만들지 않아 탑이 대신했으며, 탑은 4각형, 원형, 우산 형의 3가지 형태로 있었고 알렉산더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문화와 불교문화 양쪽이 조화를 함께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말은 탑과 불상이 양쪽의 문화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탑의 불교문화와 불상의 그리스문화가 같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후 설명은 이 사원이 아니라 탁실라 이야기이로 탁실라 전역의 탑과 불상은 돌과 석회 그리고 모래로 만들어
졌으며, 바위를 깎아 만든 것도 있고, 재료를 혼합한 것도 있다고 한다.
탑은 붓다나 고승의 사리를 모시거나 부자들이 돈을 기부하면 만들어 진다고 한다.
<1. 자울리안 구성도 2. 돌하고 석회 그리고 모래로 만들어진 우산형과 4각형의 수투파>
AD560경 중앙아시아에서 온 부족들이 와서 다 파괴하여 흔적만 남았다고 하며, 와서 보면 그나마도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 간다.
연대는 AD455년경이 맞고, 부족은 훈족이며, 1910부터 1920년까지 영국이 발굴을 시작했다고 했으나 인터넷은
1944~45년이라고 했는데 TC는 가이드가 역사와 연대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한다.
머리는 없고, 구멍 뚫린 배꼽에 손가락을 넣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유적지에서 많이 듣는 뻔한 이야기만
위에는 이런 이야기를 적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팻말이 있다.
사실은 손가락이 아니라 돈을 넣으라는 이야기이겠지! 돈을 넣지 않고 빌면 효험이 있을까?
보살같이 생긴 일행 한분은 돈을 넣고 비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는데 그 돈 어떻게 꺼낼까? 둘 다 궁금하네...
이제는 흩어져 사진 찍기에 무지하게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직사가형 스투파가 있는 경내의 불상은 머리가 있는
것이 별로 없었고, 너무 많이 파괴 되어 유럽문화를 파괴한 ‘반달리즘’이 생각났다.
그나마도 상태가 좋은 것은 박물관으로 가져갔고, 대신 모조품으로 대치하였으며, 내부구경을 마치고 외부로 나가
사람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이동하여 인터넷에서 이야기 하던 강당, 주방, 식당, 목욕실, 화장실 등을 찾았다.
설명이 없으니 무슨 방인지 알 수 없었고, 비슷한 것도 없었는데 방바닥에 있는 작은 도랑은 수로인지 배수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주위는 계곡과 사원 전체를 보고 내려 왔다.
여기서 관리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한국 돈을 수집한다고 하면서 지폐를 요구해 얻은 돈을 이제는 천원에 1달러를
교환해 달라고 쫓아 다녔는데 머리는 좋으나 얼굴엔 철판을 깔았다.
주차장에 있는 작은 상가에서 먹은 음료수는 그렇게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던 더위를 잊게 해 주었다.
<1. 배꼽 뚫린 불상 2. 파괴된 불상들 3. 수로 4. 모조품 불상>
▶자울리안 사원: BC2세기 쿠샨(Kushan기원전~561년)은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지배하던
왕조 때의 유적지로 모흐라 모라두 언덕 위의 불교유적지로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자울리안 사원 동영상, 마당 중앙 4각 안이 물탱크 자리이다.>
[시르캅(Sirkap) 유적지 탐방]
차로 한 20여분 이동해서 시르캅 유적지에 도착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이 유적지는 탁실라유적 중에
가장 유명하며, AD2세기 때 만들어졌다고 하고, 이슬라마바드가 이것을 모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시는 기획 적으로 나누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면서 중앙 대로를 따라 바자르와 기도하는 곳 등을 만들었고,
성벽높이는 9m, 길이는 5.5km로 축조되었으며, 가장 유명한 템플은 ‘쌍두취탑’이라고 한다.
워낙 크고 넓으나 이 2곳만 보아도 충분한 가치를 느낀다고 하며, 설명을 마치고 유적지 속으로 들어갔으며, 대로
주변으로 돌담만 보일 뿐이어서 다 비슷하게 보여 앞의 팻말을 보고 그렇구나! 생각했다.
유명한 유적은 전부 왼편에 있으며, 제일 먼저 보이는 팻말은 경비실(guard room)이고, 다음이 상가(shops)
그리고 앞사달 사원(Apsidal Temple)이며, 다음에 보이는 원형 스투파(round stupa)가 있다.
태양사원(Sun Temple)은 팻말 자리에 막대기를 세우면 해시계가 된다고 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곳이 힌두교
유적지라고 했으며, 왼편 언덕 위가 인터넷에서 본 잔디알 사원이라고 했다.
<시르캅 배치도, 메인도로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시르캅 유적지, 원형 스투파, 태양 사원>
이 사원은 ‘쌍두취탑’과 함께 가장 볼만한 것이라고 했는데 가지 않았고, 타원형의 스투파를 지나 도착한 곳이
그 유명한 ‘쌍두취탑’으로 조각을 보면 독수리 모양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머리의 수가 2개라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가 없으나 다만 ‘쌍두취탑’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보일 뿐이었고,
TC는 이란의 조로아스타교와 그리스 제우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조로아스타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새이고, 제우스의 상징도 독수리이므로 2곳에서 영향을 다 받았는지 한곳만
받았는지 알 수 없으며, 러시아황제의 상징인 쌍두독수리는 아시아와 유럽을 의미한다.
‘쌍두취탑’은 인터넷에서는 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계단 양쪽으로 코린트식 기둥과 이오니아식으로 3등분되어
있다고 하며, 맨 위에는 스투파모양이 있고, 기단엔 쌍두의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초기불교양식으로 우측은 인도의 토라나 양식이고, 중앙은 인도 차이티야 석굴의 양식이며, 왼쪽은 지중해의
페디먼트 양식이라고 했으나 전문가가 아니어서 알 수는 없다.
토라나(torana)양식과 차이티야(Chaitya)양식은 불교사원의 형식을 말하나 어떻게 구별하는지는 모르며, 페디먼트
양식은 고대 로마나 그리스건축물의 지붕이나 문 위쪽 공간(주로삼각형) 안의 장식물을 말한다.
한 블록 쯤 더 가면 ‘쌍두취탑’의 사원은 비슷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인터넷에서는 BC1세기경에 만들어진 자인교
스투파라고 했으며, 탁실라 유적에서 새에 대한 유적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이곳도 유적의 발굴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으며, 관리도 열악한 상태이었는데 무더운 날씨라 힘들었지만
이제 가는 곳이 박물관이니 그곳은 에어컨 있어 시원했으면 좋겠다.
☆스투파(Stupa): 불교의 사리탑으로 돌, 벽돌, 나무 따위를 깎아 여러 층으로 쌓아올린 집 모양의 건축물이다.
<쌍두취탑과 자인교 수투파>
▶시르캅 유적지: 그리스, 페르시아, 파르티아 시대의 흔적이 동시에 발견되는 고대도시로 비르 마운드 북쪽에
위치하고, 시르캅은 ‘잘린 머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르캅은 박트리아(BC246-BC138)의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도시로 BC2세기~AD2세기에 번영했던 그리스
왕조와 쿠샨 왕조의 수도로 유적의 성문에 들어서면 너비 약 6m의 넓은 거리가 500m 가량 이어진다.
양쪽으로는 당시에 일반주택과 상점들이 그 위에 축조되었을 석축토대가 늘어서 있으며, 거리에는 돔 모양의
스투파유적과 왕궁유적도 남아 있는데 BC30년경의 대지진 전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르캅은 박트리아와 인도-스키타이의 수도였는데 BC183년 박트리아 드미트리우스 1세는 간다라, 펀자브와
인더스 계곡을 정복하여 신수도를 탁실라의 강 반대편인 시르캅에 세웠다.
인도 스키타이의 왕 마우에스는 수도를 시르캅에 정하고, 탁실라에서 주화를 주조하였으며, BC6세기부터 AD5
세기까지 중요한 베다와 힌두교 및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이곳은 교통요충지로 북서쪽(아프간)과 페샤와르로 가는 길, 동쪽(인도) 카슈미르로 가는 길이 있고, 이슬라마바드
서쪽35km 지점에 있으며, 파키스탄의 중요한 유적지로 198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시르캅의 동영상>
[탁실라 박물관(Taxila museum) 관람]
이 박물관의 트레드 마크가 된 부겐베리아가 반가웠으며, 안으로 들어가 가이드의 짧은 설명이 있었는데 막내가
통역을 했으나 그의 동시통역이라 녹음한 것을 알아들을 수 없어 옮기지 못했다.
여기 유물은 탁실라의 120여 곳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 놓아 간다라 유물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고
해서 기대치가 컸으나 유물의 중요성을 모르니 깨진 것과 덜 깨진 불상으로만 보였다.
정문을 들어서면 중앙 왼쪽은 간다라유물을 전시해 놓아서 불상에 대한 것이 대분이었고, 오른쪽은 생활 유물을
구별해서 전시해 놓았는데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편했다.
차라리 돈이라도 내라고 하면 좋을 것인데 사진작가님은 이미 돈을 주었는지 마음 놓고 사진을 찍기에 사진 한
장만 부탁했는데 관리인 한 사람이 남이 안 보이는 쪽을 찍으라는 시늉을 하면서 돈을 요구했다.
돈을 준 곳은 생활관이라 정말 찍고 싶은 곳은 간다라 유물인데 이미 일행들이 밖으로 나아가고 있어 용기를
내어 찍고 싶었던 것들을 찍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찍을 만한 곳을 알려준다.
시간이 없어 대충 찍고 나오려고 하니 돈을 또 요구해서 얼른 주고 나왔는데 처음부터 주고 찍을 것인데 방법을
몰라 두 번씩이나 주었지만 그래도 찍은 것이 다행이었으나 유리 속이라 잘 안 나온 것이 흠이다.
박물관 관람은 점심식사 때문인지 15분밖에 주지 않아 급하게 돌아보고 나왔는데 박물관은 간다라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품들이 소장되었고, 불상은 3~5세기의 것이 많다고 하며, 다음 유적지로 향했다.
<1. 박물관에서 유명한 붓다 머리 2. 자울리안 사원의 진품 3. 명상에 중인 붓다 4. 생활전시관>
★탁실라: 라왈핀디와 32km에 있는 Taxila는 산스크리트어 Taksha(탁샤) +그리스 약어 Sila의 합성어로 탁샤는
뱀의 종족이지만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는데 이곳을 정복하고 뱀으로 회생했다고 한다.
탁실라는 실크로드의 지류로 경제와 문화가 번창했으며, 그리스와 로마문헌, 중국의 법현, 현장법사의 기록에
나오고, 불교문헌에는 간다라왕국의 수도로 언급했다.
이란 페르시아제국(BC700경~BC331)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1세기 이상 지배하는 동안 여러 학문이 발달했고,
BC326년에 알렉산더의 침입을 받았을 때 지도자 아비는 도시를 넘겨주고 처분만 바랬다.
BC323경에는 찬드라굽타가 세운 마우리아 제국이 지배했고, 박트리아는 쿠산계의 대월지에게 망했으며, 대월지는
BC139년 한나라 장건의 제안을 거절했고, AD1세기 후반까지는 스키디아(사카족)와 파르티아족의 지배를 했다.
탁실라는 신석기시대의 고분 사라이달라(Saraidala), BC 2세기의 시르캅, AD1세기의 시르수흐(Sirsukh)의 시대별
성벽이 있으며, 도시는 BC 5세기~AD 2세기까지 인더스(Indus) 유역에 다양한 불교유적을 남겼다.
탁실라는 페르시아, 그리스, 중앙아시아로부터 번갈아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전설에 의하면 파르티아 시대에
사도 토마가 탁실라를 방문했다고 하며, 탁실라는 AD1~5세기에 전성기였다고 한다.
455년경 훈족에게 약탈당한 후로 재건되지 못했고, AD4세기에 온 동진의 법헌은 불교사원이 융성한 곳이었다고
기록을 남겼으나 7세기 때 온 현장법사는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을 남긴 후로는 기록에서도 사라졌다.
인공구릉 위에 세워진 잔디알 사원은 불교사원이 아니고 이오니아식 원주를 사용한 그리스사원과 유사하다고
했지만 가 보지는 못했으며, 탁실라는 넓고 유적이 많다고 하나 중요한 3곳만 보았다.
탁실라는 1944~45년에 영국 고고학자 R.E. 모티머 휠러 경에 의해 발굴되었다.
<알렉산더 제국과 원정길>
☆박트리아 왕조(BC246~BC138): 알렉산더가 세운 도시국가 중에 박트리아주에 속하였고,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의 고대국가이며,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로 발흐에 수도를 정하고 인도까지 점령 한 큰 제국이었다.
대월지(쿠산계)에 정복되었으며, 이 지방을 근거로 쿠산왕조가 일어났고, 간드라 미술이 이 왕조의 유산으로
생각하며, 불교와 접촉하여 불교문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알렉산더 제국과 원정길과 아래 다르마 참조]
☆쿠샨 왕조(기원전~AD 5세기중엽): 북서인도와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왕조로 5제후의 하나인 귀상(쿠샨)에서
발전하였고, 간다라 지방 지배하여 '간다라 예술'을 형성하였다.
AD226년에 파르티아 대신에 사산왕조가 이란에서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였으며, 쿠샨왕조도 속국이
되었고, 사산왕조의 세력이 이완되므로 그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5세기 후반에 에프탈에게 망하였다.
에프탈은 '힘센 사람'을 뜻하며 5세기 중엽부터 중앙아시아를 통일한 민족으로 사산왕조 동쪽에 접하여 있었는데
사산조와 돌궐(突厥)에게 협공당하여 558-561년 멸망한 나라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Dharmarajika Stupa) 유적지 탐방]
15분 정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탁실라의 마지막 유적지로 야외에 있어 더위가 걱정되었지만 어찌하라!
여자들은 스르캅에서 안 들었던 양산을 들고 나섰는데 아프리카에서도 겪지 못한 가장 혹독한 더위를 느껴
보는 것 같았으며, 이곳은 설명도 없이 15분간의 여유를 주었다.
각기 흩어졌고, 앞에 보이는 거대한 무덤과 같은 생긴 스투파는 아래 기초는크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봉분처럼
만들었으며, 그 앞에는 돌로 만든 작은 원형의 스투파가 있으나 둥근 돔이 없고 평편했다.
딱히 기록할 만한 것도 없었는데 스투파 옆에 지붕이 건물 아래에도 사각형의 스투파가 있으며, 인터넷에서
본 거대한 발만 있는 것을 찾아 나섰다가 스투파 뒤편에 찾았다.
몸통은 없지만 남아 있는 발의 크기를 보면 불상은 얼마나 컸을까?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스투파 뒤편의 넓은 지역엔 많은 기단도 보였지만 어떻게 쓰였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으며, 원형의 큰 스투파를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와 다르마라지카의 탐방을 마치고, 식당으로 향했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치르 토페(Chir tope)로 잘 알려진 탁실라 박물관에서 3km 지점인 있으며, 높이 15m,
지름 15m의 원형 탑으로 주변보다 높게 조성하였다.
BC 136년 노아차 시 출신의 우르사카라고 하는 한 박트리아인이 쿠샨 정복자 쿠잘라의 아들에게 건강을 위해
사리를 사원에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대의 불교유적지라고 한다.
<1. 다르마라지카 위치도 2. 메인 스투파>
<다르마(달마, dharma)와 아소카(BC272-232) 왕>
다르마는 법(法), 본성, 올바른 행위, 불타의 가르침을 뜻하나 ‘올바른 삶의 원리’ 또는 ‘보편적 윤리’로 부모와
어른에게 순종하고, 살생을 삼가 하라는 것이다.
아소카 왕은 '다르마 사절(使節)'이라는 고위 관리들을 임명하여 백성이 지키도록 장려하였고, 가르침은 책으로
만들어 곳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다르마라지카로 바위 위에 새겼다.
그가 세운 불탑은 무력 84,000개라고 하는데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의 아소카석주가 유명하다.
아소카 왕은 남동부 칼링가를 정복 할 때 그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면서 그 후로는 무력정복을 중지하고
불교 전파에 힘쓰고 '다르마(달마)'를 백성에게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승려의 불교사절을 이집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버어마, 수마트라, 자바, 실론에 보내어 넓은 지역에 아소카
왕은 '법(달마)'에 의한 불교정치를 하였으며, 불교전파는 그의 공로이다.
그는 불교인의 이상적 군주로 숭상하고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넓은 지역을 여러 태수가 독립적 지배자 권한을
가지게 되어 왕이 죽은 후에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BC180년에 슝가 왕조에게 멸망했다.
☆마우리아 왕조(BC317~BC185):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제국의 왕조, 시조는 찬드라굽타로 마우리아는 '공작
(새)'을 뜻하여 '공작왕조'라고도 하며, 마가다왕국은 난다왕조 지배하에 있었다.
BC330~324년 동방원정 때 알렉산더가 북서인도를 침공하므로 인도의 통일제국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BC317년 찬드라굽타는 북서인도의 인더스 강 상류지역에서 발원하였다.
찬드라굽타는 난조왕조를 무너뜨리고 마가다국 왕이 되었으며, 인접지역부터 평정하여 나아가 인도전역에 걸친
마우리아제국을 형성하였고, 3대 아소카가 왕위를 계승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월지국의 불교 전파>
[카라코람 하이웨이(N-35 Karakoram Highway, KKH)]
점심 후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넘어온 해발 2,200m의 샹글라 고개를 넘어 소도시 베샴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큰 강이 보였는데 제람 강(Jhelam River)이라고 한다.
파키스탄의 강 이름은 하나가 아니고 지나는 동네이름을 따르기 때문에 각각 다르게 부른다는 것이 특이했으며,
탁실라의 카슈미르 하이웨이를 지나면서 이 도로를 만든 수르 왕조에 대한 이야기했다.
연대와 통치기간 등이 너무 엉터리라 무시하고 다시 이야기 하면 무굴제국의 제2대 후마윤은 1540년 벵골
비하르 지방의 수르왕조 셰르 샤에게 패하여 페르시아로 도망했다.
1555년 셰르 샤가 죽은 뒤에 수르왕조를 공격하여, 델리를 탈환한 뒤 무굴 왕조를 다시 부활시켜서 수르왕조는
15년만 유지했다는 것은 역사이야기이지만 가이드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다.
셰르 샤가 통치할 때 백성을 위해 일했으며, 웅장한 간선도로[GT(Grand Trunk) Road]를 캘커타까지 1,700km의
길을 만들기 위해 길 위에서 살았던 왕으로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왕인데 별명은 라이온 킹이라고 했다.
살벌한 분위기답게 무장한 차량이 앞서 가고 있었고, 하산 압달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는데 이 삼거리가 카람코람
하이웨이가 시작하는 이라고 하며, 이 도로를 따라 배도 타고 국경도 넘으며, 중국까지 갈 것이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1965년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전쟁을 치른 파키스탄과 중국은 2나라의 밀월시대의 상징으로
이 도로를 건설하면서 비용은 중국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불교와 회교의 전파통로였던 옛 실크로드를 따라 1966~1978년 사이 파키스탄 하산 압달(Hassan Abdal)에서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카쉬가르까지 1300km인 이 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1km 당 1명의 희생자가 생겼다고 할 만큼 많은 희생자를 생겼는데 파키스탄 810명, 중국 82명이라고 하며,
이름의 하이웨이는 속도가 아니고 고도가 높아 붙여진 것으로 시속30km 정도라고 한다.
중국은 이 도로를 카라쿤룬궁루(喀喇崑崙公路)라고도 하는데 파키스탄은 탈레반 피습 위험 때문에 최근에도 밤에
차량통행을 금하고, 낮에도 경찰이 여행객의 차량을 호송하며, 우리 차에도 탈 것이라고 했다.
<1. 거대한 간선도로(GT. Road) 위의 달리는 무장한 군 차량들 2.칠라스의 카라코람 하이웨이와 검문소>
<아보타바드와 빈 라덴 이야기>
아보타바드가 가까워지자 인터넷에서 보았던 빈 라덴 사살작전의 이야기를 뒤에 앉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그 시작은 알카에다로부터 ‘쿠웨이트 남자’라는 암호를 알아냈다.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쿠웨이트 남자’로 등록된 전화번호를 받아서 감청을 시작했으며, 통화는 산속이나 외진
곳에서 이루었고, 그 차가 아보타바드로 돌아와 그가 거주하는 집을 알아냈다.
그가 사는 2층 집을 감시하면서 알아낸 것은 1. 인터넷과 유선전화 등이 없다는 것 2. 거의 모든 것을 집에서 길러
자급한다는 것 3. 그가 산책할 때 그림자로 키를 측정해서 키는 크지만 정확하게 193㎝인 것은 밝혀내지 못했다.
4.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크리켓 공이 이 집에 들어가면 공은 불에 넣고 대신 돈으로 준다는 것
5. 방송 때 빈 라덴 얼굴의 영양상태가 좋아 그가 사는 곳이 산속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냈다.
6. 매일 집 밖에 널린 빨래는 빈 라덴의 가족 구성과 상당히 일치했는데, 성인 남성 1명과 여러 명의 성인여성,
9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계것을 알았다.
이 정보만으로는 빈 라덴이라는 것을 50% 이상은 확신했으나 100% 자신할 수 없었지만 미국대통령 오마바는
비록 확률 50%이지만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다.
2011년 5월1일 소음이 적고 스텔스 기능 가진 최신형 헬리콥터 2대를 투입하여 아프간 잘라라바드에서 출발해서
만약을 위해 다른 헬리콥터 수송기 한대는 아보타바드 근방 강가에 두었다.
파키스탄 전투기는 레이더가 기능이 떨어져 달이 없는 날, 파카스탄 전투기가 도착한기 전 2시간 이내로 정하고,
작전을 시작했는데 헬리콥터 1대가 기계고장으로 빈 라덴 마당에 추락했으나 다행이도 요원들은 무사했다.
빈 라덴이 살던 모형의 집에서 연습을 했기에 옥상에 내려서 시작하려 했던 작전은 아래층부터 시작하였으며,
40분 만에 무사히 작전을 끝내고 떨어진 헬리콥터는 폭발시키고 잘라라바드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끝내고 가이드에게 들은 아보타바드의 이야기는 이 도시는 작지 않고 큰 도시라는 것과 국방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으나 무슨 뜻인지 몰라도 중요한 군사도시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알기는 군사도시로 빈 라덴이 살았다는 집 부근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있다는 정도이며, 이슬라마바드에서
60km 거리는 탁실라를 경우 해 돌아온 거리이고, 직선으로는 30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뒤에 앉은 사모님은 아들에게 빈 라덴에 대한 메시지를 보냈더니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이미 파괴된 집이지만 어디쯤 될까? 살폈으나 상가들만 보일뿐이었다.
어떤 작은 로터리 중앙에는 로켓을 세워 놓았으나 보기는 좋지 않았고, 삼성간판의 가게도 보였으며, 잘 지어진
건물은 가이드가 말한 국방부와 관련된 건물 같이 보였다.
<1. 빈 라덴이 살았던 도시 아보타바드 시내 2. 삼성간판 3. 국방부 건물?>
이 도시를 지나 만세라(만쉐라)라는 도시에 과일을 사기위해 차를 세웠으며, 주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볼펜을
나누어 주었고, 만세라까지는 동네 주위에는 감자 등의 농사를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특이한 작물이 눈에 들어와 유심히 살피니 그것은 우리나라 것보다 키가 작은 담배였으며, 파키스탄에서는 담배를
피우지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째서 담배농사를 짓을 까? 내가 잘못 본 것일 까? 신기하다.
만세라를 벗어나면 넓은 지역은 보이지 않고, 전형적인 산골이 나타나면서 날은 저물어 밤늦게 호텔로 들어갔는데
이미 예고한대로 에어컨도 없지만 물도 나오지 않아 받아 놓은 물로 세수만 하고 잠들었다.
<아보타바드 시내에 있는 작은 로터리로 별명을 붙여보았는데 1: 평화 로터리 2: 전쟁로터리>
★베샴(Besham): 2005년 10월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으로 파키스탄에서는 8만7천명,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1천 여 명이 사망하고 3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던 지역이다.
파키스탄 여성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2009년 12살 때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에 의해 머리에 총상을
입은 곳은 스와트(Swat) 강이 흐르는 스와트계곡이다.
스와트계곡은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베샴의 중간으로 베샴에서 매우 가까우며, 2014년 노벨 평화상을 17살인
그녀와 인도의 아동노동 근절 및 교육 운동가 카일라시 사티야티(60)가 공동으로 수상했다.
<아보타바드, 만세라, 베샴, 밍고라 지도>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탈레반 이야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사이 파키스탄에 일어나는 테러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록해 본다.
아프간의 카불과 이슬라마바드는 직선거리로 200km 정도이고, 그 중간에 있는 페샤와르가 혼돈으로 변하게 된
것은 2001년 9월 11일 미국 국제무역센터 폭파시킨 빈 라덴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동쪽과 서쪽으로 인종이 나뉘는데 동쪽 평지는 인도계의 펀자브, 신드 족이 살고, 서쪽 산악지역은
이란계인 파슈툰 족이 사는데 이들은 영국인 ‘듀란드’이 강과 산맥을 따라 대충 만든 경계선이 있다.
이 경계선 ‘듀란드 라인’이 국경선이 되면서 산악에서 자유롭게 살던 파슈툰 족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살게 되었으며, 파키스탄 국민은 동쪽과 서쪽은 종교만 같을 뿐이지 서로 반감이 컸다.
정권을 잡은 동쪽을 서쪽이 공격하는 양상이 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인구 중에 가장 많은 파슈툰 족의 탈레반
(학생조직)은 정권을 잡았으나 아프가니스탄 북쪽에는 2번째로 많은 타지크 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타지크 족의 지도자 마수드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인도 등의 지원을 받아 탈레반의 시골 종교지도자 오마르에게
복속되지 않아 그를 불안하게 했으나 이것을 해결 해준 사람이 빌 라덴이다.
이슬람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알카에다 두목 빈 라덴은 벨기에 방송국기자로 위장한 자살폭탄으로 2001년
9월 9일 마수드를 사살했고, 이틀 뒤 9.11 테러로 마수드의 죽음은 묻혀버렸다.
미국의 공격으로 아프간에서 쫓겨난 탈레반정권은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은 넘어와 탈레반의 소굴로 됐으며,
도시만 벗어나면 파슈툰 부족 자치지역이기에 파키스탄 경찰력도 통하지 않는다.
현재도 탈레반과 파키스탄 정부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올 6월 8일 탈레반이 카라치의 진나국제공항을
공격한 것은 파키스탄의 경제 중심지인 카라치를 공격하여 경제에 타격을 주기위해서이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 오바마, 알카에다 오사마, 탈레반 오마르 어째서 같은 오씨에 마자가 돌림이 되었을까?
<같은 오씨에 마자가 돌림인, 오바마, 오사마, 오마르 혹시 오씨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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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송선생의 자세한 역사 설명이 첨부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 신청했으나 집사람이 위험하다고 몸을 빼는 바람에 무산되었습니다
까딱하면 송선생님과 같이 여행할 수 있을뻔 했는데 ㅠ.ㅠ
고맙습니다
국경 와가 보더(Wagha Border)의 국기 하강식은 라다크지방 여행할때 인도측에서의 국기하강식을 보았는데
파키스탄측 보다는 인도측의 관중이 더 많았습니다
그 때의 동영상도 남아 있습니다 ~ㅎㅎㅎ
이 선생님! 사모님과 함께 건강하시죠?
에궁~ 까딱했으면 얼마나 좋아겠어요?
와가 보더 사건 보고 잘 다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 침대 위에서 죽는 것보다는 여행하다
죽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하네요.
여행 온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파키스탄 여행은 좀 두럽기는 하겠지만
하는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사건이 터진 날 여행을 하고 있었죠.
하는 사람은 괜찮은데 못하는 사람이 걱정을 해요.
용기를 내세요.
늘 건강하시고 여행 많이 하세요.
감사합니다. ^^
집사람도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게 훨씬 행복하다고 하면서도 막상 닥치면 불안에 몸을 사립니다 ㅎㅎㅎ
아직은 더 여행하고 싶은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네요! ㅎㅎㅎㅎㅎ 보고 싶은 것 더 보고나서 가는 것이 맞겠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2007년에 카라치에서 물탄을 거쳐 라호르와 탁실라 페샤와르를 다녀왔습니다.
치안 때문에 다시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되었는데 잘 다녀오셨네요.
네~ 라호르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