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북부(타이베이, 화련, 야류, 저우편) 4일(14년 12월 3~6일)]
●1일: 김해→ CI 189→ [11:20] 김해 출발 →[13:00] 타이베이 도착 및 관광[1. 국립고궁박물관 2. 용산사
3. 화시지에 야시장]→ 호텔
●2일: 타이베이→사림관저→ 지우펀→중식, 예류지질공원→금융천 온천→타이베이귀환→발마사지→ 호텔
●3일: 타이페이→ 기차(2.5h)→ 화련 도착 후 중식→ 아미족 민속공연→ 타이루거 협곡 관광[1. 장춘사
2. 자모정]→ 타이페이 귀환→ 호텔투숙
●4일: 타이페이 관광[1. 충렬사 2. 중정기념당 ]→ CI 186 [15:45]→ 타이베이 출발→ [19:00] 김해 귀환
[1일] 14년 12월 3일 수요일
●일정: 김해(2층 2 GATE 집결)→ [11:20]김해 출발→ CI 189(2.5h)→ [13:00] 타이베이 도착 및
관광[1. 국립고궁박물관 2. 용산사 3. 화시지에 야시장]→ 호텔
[팀 구성]
여행사 일정에 없던 이날이 생긴 것은 우리 팀 8명 때문이었는데 2명이 부족해서 단독으로 하지 못하고 같이
하기로 한 것이 무려 26명이 되어 짧은 시간에 팀들을 파악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대충 기억나는 분들은 자매 부부 팀, 장성한 아들 2명과 여행하는 1가족, 친정 엄마랑 여행하는 모녀, 울산과
부산에 사는 친구와 같이 여행하는 2분, 그리고 이제는 수탉과 다름없는 할머니부대 들이다.
인원은 많고 시간은 짧아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은 모녀 팀과 울산과 부산의 친구 분 정도인데 그것도
돌아오는 시간이라 대화하기엔 짧은 시간이어서 매우 아쉬웠다.
<대만과 타이베이 지도>
[대만으로 향발]
우리 팀은 2번째 여행이라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으나 예약부터 환전까지 모두를 혼자 했기에 잘 못 될까봐
걱정도 했는데 무사히 마쳐 다행이었지만 성격으로 인해 마음 고생은 했다.
가장 큰 실수는 검사대를 걱정해서 모든 것을 미리 챙겨둔 배낭에는 단체 여행경비와 귀중품이 들어 있었는데
이 배낭을 대기좌석에 두었고, 아침 먹고 올 때까지 30분 이상을 두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했다.
이제는 잃어버리면 안 될 물건은 다 주머니에 넣었고, 노랑풍선 직원과 만나기로 한 2번 게이트에 가 보아도
아무 표지도 안 보였는데 메시지 온 것을 보고 전화를 했더니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비행기 표를 받고 검사대로 향했으며, 중화항공을 타고 미지의 세계인 타이완으로 향했고, 눈 한번 감을 시간도
없이 기내식을 먹고 나자 도원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여행 때 마다 이정도 거리였으면 좋겠다.
(공항 이름의 유래)
대만 가이드 최 선생님과 만나 첫 방문지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하면서 이번 여행은 인원이 많아 힘들겠지만
한사람의 힘이 대단해서 그 한사람만 없어도 출발하지 못한다고 하며, 시간 잘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 차의 음향기가 나빠서 이번 여행도 힘들 것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여행 때마다 앞 좌석을 양보하다보니
뒤에서 가이드 소리를 못 알아듣는 불편했지만 거리 상 물어보지도 못하는 것이 더 불편하다.
우리가 도착한 국제공항에 대한이야기를 했는데 한국과 대만의 항로가 열린 지 올해로 만 10주년 되는 해로
이 공항은 타이베이(臺北)이 남서쪽 약 40km 거리에 있어 지금 우리는 북쪽으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예전엔 장제스 이름을 따라 중정국제공항이이라고 불렀으나 야당인 천수이볜 정부가 정권을 잡은 후 장제스의
후광을 지우기 위한 일환으로 2006년 9월 6일 도원국제공항으로 바꾸었다.
도원(타오위안)국제공항 이름을 공항이 있는 지명으로 도원은 복숭아밭이라는 뜻으로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었다는 유명한 ‘도원결의’가 있다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찍은 도원공항과 마을>
(중화민국의 간단한 역사)
타이완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겠다고 했으나 대단히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가이드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연대나 숫자의 기록은 가이드 이야기 기억에 의한 것이라 참조만 했다.
이해하기 쉽도록 서로 관련 된 것끼리 분류 및 편집해서 기록했다.
타이완의 정식국명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고 하며, 1912년 1월 1일 만주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무너지고, 국민당에 의해 난징에서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이것은 아시아에 세워진 최초에 민주공화국이었는데 1946년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공산당에 패하여 1949년
중국 본토에서 160km 떨어진 섬 타이완으로 쫓겨 와 임시정부를 수립했다고 한다.
(대만의 인문지리)
타이완의 면적은 36,188㎢으로 경상도와 제주도를 합한 것과 비슷하고, 제주도보다는 20배 정도 크다고 했으며,
모양은 길쭉하게 생겼는데 남북으로 약 395km 정도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145km이라고 한다.
북쪽은 동중국해, 동쪽은 태평양으로 우리와 같이 산이 높고 경사가 심하다고 했으며, 남쪽은 바시해협, 서쪽도
우리와 같이 경사가 완만하고, 뻘이 많다고 했으며 중국의 본토 사이에 타이완(포르모사)해협이 있다.
인구는 전체가 약 2,300만 명으로 남한의 1/2이고, 지형은 남북으로 벋은 험준한 산악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평지가 없으며, 3,000m가 넘는 산이 258개가 있고, 이 산들을 대표하는 산은 위(옥, 玉)산이라고 한다.
이 산들 때문에 동서를 잇는 도로가 적은 대신 섬을 일주하는 열차가 있어 이 열차를 많이 이용한다고 하며,
서쪽은 평지가 많아 대부분의 사람이 이곳에 살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라고 한다.
타이완 섬은 북위 23도 27분을 지나는 북회귀선이 섬의 중간 부분을 지나가는데 이것은 하지(夏至)날에 태양이
지나가는 선으로 열대와 온대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우리가 갔던 화롄이 북위 24도이고, 위산(玉山)이 북회귀선이 지나가는데 대만 중간쯤으로 보면 된다.
<대만 전도>
6~9월은 여름철로 온도는 30도 정도이지만 습기로 인에 무덥다고 하며, 10~3월은 겨울철로 월 평균기온은
약 15도 정도이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생각보다 춥다.
한날의 기상도 지역과 시간에 따라 고르지 못해 비와 추위에 항상 대비해야 할 정도인데 연평균 강수량은
2,590mm, 서부해안이 1,270mm이나 동쪽산악의 경사면은 6,350mm 이상까지 내린다고 한다.
7~9월 이곳을 지나는 태풍은 1년에 보통 3~4차례나 되어 동쪽은 태풍으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했는데 화련으로 가면서 본 동쪽은 경작지도 없지만 농사 짓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광물은 매장 된 것이 적으나 풍부한 대리석과 석회석은 있으며, 풍부한 석회석으로 만든 시멘트는 도시의
수많은 고가도로에 사용되고, 도로 포장에 사용되는데 시멘트공장은 동쪽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제 1도시 타이베이는 수도로 서울과 같은 곳이고, 제 2도시는 부산과 같이 남쪽에 있는 가오슝이라고 하며,
중부에 있는 타이난 도시는 예전에 타이완을 다스리던 타이완부가 있었다.
타이베이의 면적은 약 271.8㎢ 서울의 1/2이며, 인구는 269만 명이 살고 있고, 전체 인구의 98%가 중국본토
한족출신이기에 분단 된지 60년이 넘어도 서로 소통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한다.
나머지 2%인 원주민 45만 명은 산악지역에 살고 있는 고산족이라고 하며, 전통을 지킨 14개 부족을 대만정부는
인정하고 보호정책을 하고 있다고 하며, 원주민들은 좋게 애기하면 낙천적이라고 한다.
나쁘게 애기하면 게으르고 특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매우 민감해서 정부에서 무료로 공부를 시켜주어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에 수명은 매우 길어 평균수명이 90세가 넘는다고 한다.
<원주민 아미족의 공연>
(대만 섬의 역사)
타이완 섬의 최초기록은 한족이 타이완 섬을 발견했다고 ‘임해수토지’에 기록된 것이라고 하며, 7세기 초 수나라
때부터 한족이 타이완 섬을 정략적으로 정찰을 시도했다.
1360년 원나라는 평후 섬에 처음으로 순검사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했고, 명대에 한족이 증가했으며, 1590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태평양으로 갔다가 이 섬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름다운 섬'이라는 형용사가 명사인 ‘프르모스’로 지도에 기록했으며, 프르모스는 대만의 유명한 반도체
회사의 이름이기도 한데 1624년 네덜란드는 남부 타이난 지역을 점령했다고 한다.
그런 후 안핑에 제란디아 성을 구축했으며, 이 섬의 원주민은 한 쪽의 배를 ‘타이원’이라고 했는데 네덜란드인은
이 발음을 잘 못해서 ‘타이완’이라고 한 것이 타이완 명칭의 유래라고 한다.
인터넷에는 섬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판서따완(番社大灣)에서 유래됐다고 되어 있으며, 1626년 스페인도 지룽
지방, 서랴오 섬에 산살바도로 성을 구축하고, 1629년 단수이항에 산토도밍고 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축출하고 지배권을 확립했다고 한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1661년 어머니가 일본인이 명나라 장수 유신 정성공은 섬에 상륙하여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제란디아 성을 점령한 것이 한족의 첫 지배이며, 정성공은 청나라에 항거했다.
1683년 6월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는 타이완에 진격하여 정군을 항복시켜 타이완지배는 3대에 22년으로 짧게
끝났으며,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 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를 설치했다고 한다.
1885년 이주민이 늘어나고, 북쪽이 개척되었으며,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했으나 1895년 청일전쟁 때
청나라의 패전으로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타이완은 최초로 일본의 해외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 김영삼 대통령이 파괴한 日자 형태인 중앙청과 똑 같은 것을 지었는데 지금은 총통이
행정을 보는 건물로 아직도 사용한다고 하며, 그래서 이곳은 행정타운이라고 한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여 중국에 복귀에 복귀되었고, 1949년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정부는
이곳으로 쫓겨 와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다고 한다.
원주민 입장에서 본 타이완 역사는 다 외세의 침입의 역사인데 16세기부터 일찍이 서양의 문물을 접하여 대만은
개인적인 사상이 많아서 절대로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워낙 온순한 성격이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며, 젊은 사람들에게 10초 이상 쳐다보지 않으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관광 때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대만의 경제)
대만의 경제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외환보유고는 약 4천억 달러로 세계 4위라고 하며, 2014년 7월 14일로 외채가
하나도 없는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고, 1인당 GDP는 2만 3천 달러로 우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주산업은 우리와 비슷한 전자와 IT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타이베이 도시로 접어들어 섰는데 이 도시는 지하철이
잘 되어 있다고 하고 한다.
(수도 타이베이 입성)
타이베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리의 한강 같은 딴수이(단수이) 강이 있는데 이 강은 물이 깊지 않아 배가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며, 우리로 치면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왼쪽에 보이는 자금성 같이 만들어진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은 중국집 이름을 가진 ‘원산대반점
(圓山大飯店)’이지만 짜장면 집이 아니라고 했는데 중화권에서는 호텔을 ‘대반점’이라고 한다.
원산대반점 그랜드호텔(The Grand Hotel)은 장개석의 마지막 4번째 부인이 송미령의 소유였다고 하는데
그는 1975년 장개석이 서거하자 미국으로 가서 살다가 2003년에 106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송미령의 소유였던 원산대반점 그랜드 호텔>
타이베이 도심지엔 우리는 철거 중이지만 이곳엔 고가도로가 고가도로 위에도 있을 정도로 어지럽게 많이 있는
것이 눈에 먼저 가장 띄는 것인데 좁은 땅에 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고가도로는 1~3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했지만 3층은 보지는 못했으며, 고속도로나 고가도로에 톨게이트가
없는 것은 차의 증체를 줄이기 위해 없앴는데 올 2014년에 다 없어졌다고 한다.
요금은 자동으로 정산되며, 쑹산(松山)공항 넘어 굴뚝같은 건물이 세계에서 2번째 높다는 101층 건물로 예약이
되면 오늘 저녁에 옵션으로 가기 되어 있었지만 예약을 하지 못해 35달러 벌었다.
<송산 공항과 101층 건물>
이곳에는 우리나라 차들이 안 보였는데 배알이 없게도 자기들을 식민지로 했던 일본차가 많다고 하며, 일본차는
대만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도 하고, 브랜드도 따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타이베이 집들이 우중충한 것은 대만의 날씨 때문이라고 했지만 우리 눈엔 오래된 것으로 보였으며, 오래된
아파트의 낮은 층은 대부분 방범창이 되어 있고, 아무리 낡은 아파트도 필수로 있는 것은 에어컨이다.
외국에서 그렇게 흔하고 보던 삼성, 금성의 에어컨은 이곳에서는 보지 못했으며, 오늘의 간단한 일정을 말해
주었는데 점심이 기내식이라 부실했기에 저녁을 일찍이 몽골리안 바베규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용산사와 야시장을 둘러보고 호텔에 도착하면 11시쯤이 될 것이라고 했으며,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박물관에서는 사진촬영이 절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방도 맡겨야 함으로 다 차에 두고 내리라고 했으며, 중국본토 사람들이 많아 매우 혼잡한데 가이드와 함께
몇 가지 설명을 한 다음에는 시간이 되는대로 자유 시간을 주겠다고 한다.
다 보려면 하루도 부족하다고 하면서 단체관광은 일정상 상시 진열된 중요 유물이 3층만 둘러보는데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단수이(淡水河) 강: 중국어 발음 ‘단수이허’로 중화민국의 북쪽을 흐르는 강으로 신주 현의 핀톈 산에서
발원해 타이베이 현, 타오위안 현, 타이베이 시, 신주 현을 흘러 타이완 해협으로 들어간다.
총 길이는 159km이고 유역 면적은 2,726㎢로 대만에서 3번째로 넓으나 수심이 얕아서 큰 배는 못 들어온다고
했으며, 큰 배는 북쪽에 강 밖의 바다에 정박했다고 한다.
그러면 작고 긴 쪽배로 물품을 날랐기에 타이베이 시의 시작점이라고 하며, 고대도시는 그곳에 있다고 하고,
많은 무역선이 오갈 때 선원들이 많아서 정육점이 많았다고 하며, 보양식품인 뱀탕도 많았다고 한다.
<1. 단수이 강 지류와 원산대반점 그랜드 호텔 2. 단수이 강과 타이베이(대북) 시 전경>
[고궁박물관 탐방]
세계4대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런던의 대영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그리고 대만의 고궁
박물관이라고 하며, 건축양식은 중국궁전양식으로 4층에 35개 전시실이 있다고 한다.
중국 5,000년 역사를 신석기시대부터 역대왕조들의 모든 문화 예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세계적 가치가 인정된
유물 67만(혹은 70만점) 점을 3~6개월마다 약 12,000점을 교체하여 전시한다고 한다고 한다.
이것을 다 볼 수 없기에 가장 볼만 한 것이 전시된 3층으로 가서 중요한 유물 몇 개만 설명하고 그 후로는
자유 시간을 줄 것이니 보고 싶은 것을 보는데 시간은 1~1.5시간 정도라고 한다.
고궁박물관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중국본토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곳에서 수신기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처음엔 유물의 번호를 누르면 우리말 설명이 나오는 줄 알았다.
이것 하나 빌리는데 대만 돈 100원이라고 했는데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좀 이상했는데 이것은 번역기가
아니고 가이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였으며, 동작 상태를 확인하고, 가이드를 따라 3층으로 향했다.
<고궁박물관 전경>
장소도 비좁았으며, 수많은 사람 사이를 비집고, 유물 옆으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하께 온 젊은
분이 억세게 밀어 내어 더더욱 힘들어 이번에는 이분 때문에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그런 행동이 어머니를 위한 것이라는 알고는 좀 이해가 되었으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낀 것을 보면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는데 그 어머니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박물관 유물 중에 가이드가 설명한 것들만 아래에 따로 기록을 하고, 본 것도 기억에 없지만 나머지는 보지도
않았기에 기록을 하지 못하나 박물관에서 사온 책의 것을 옮기는 것도 너무 많아 포기했다.
다만 중요한 몇 가지만 더 기록하고 고궁박물관은 개인적인 생각으론 가본 박물관 중에 가장 볼 것도 감탄할
것도 없는 박물관으로 기억될 것이며, 차라리 세계4대 박물관이라고 자랑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가보고 실망하는 것과 보지도 않고 실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음으로 비록 실망을 할지라도 가보고
했으면 하는 바람인데 우리일행은 아래층에 있는 청동불상을 구경했다.
가이드가 없으니 나보고 설명하라고 했으나 낸들 인터넷조차 소개된 것을 못 보았으니 어쩌라! 설명 없이 보는
유물은 그저 그래서 일찍나와서 박물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일행이 나오도록 기다렸다.
아래 설명하는 것은 모두 3층에 있는 것인데 박물관도 복잡하고 시끄러운데다 단체 팀들의 가이드설명까지
혼합되어 반은 듣고, 반은 보면서 관광을 했기에 다른 정보도 이용했다.
<고궁박물관 전시실>
1. 종주종(宗周鍾): 전에는 손에 들고 하는 종이었으나 매달아서 연주하는 타악기로는 이것이 처음이라고 하며,
서주의 천자가 사용했고, 가이드는 36개의 돌출된 유정(乳정)이 있다고 한다.
이 유정 1개에 10일로 계산하면 360일이 되는데 이것은 옛날에 사용했던 1년으로 제사 때 사용한 것이라고
했으나 다른 곳에는 그저 하나의 장식품이라고 했으며, 유명한 것은 123자의 글자라고 한다.
글자의 내용은 주나라 여왕(厲王) 때 남방의 복국이 쳐들어왔을 때 이를 토벌한 후 이 종주종을 만들어 조상에
감사제를 올렸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종주종>
2. 모공정(毛公鼎): 모공정은 북경의 중국국가박물관에서 본 금문이 새겨져 있는 ‘극정’이라는 청동기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으며, 정(鼎)은 고대에 고기를 삶던 솥이다.
이 정(鼎) 안에는 주나라 선왕(宣王)을 도운 숙부인 모공(毛公)의 공적을 기리는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는 가장 많은 500자의 금문이 솥 안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글자는 한문발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에 국보로 간주하는 이유라고 하며, 후에 향료나 가구모양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고, 가이드는 모공정이 제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중요기물 된 이야기를 했다.
중국의 전설 속의 전해지는 하(夏) 나라는 황허 강의 치수에 큰 공을 세운 우를 사위로 삼은 요 임금은 우에게
왕위를 물러주었으며, 우는 황허 강 유역에 있던 9개 부족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런 후 이런 솥 9개를 만들어 각 부족에게 주어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으나 이것들을 옮기는 도중에 물에
빠져 없어졌고, 그 후 진나라의 시황제가 새로운 권력의 상징으로 만든 것이 새(璽)라고 한다.
새(璽)는 도장의 일종으로 황제만 사용했고, 나머지는 인(印)이라고 했다고 하며, 옥으로 만든 것을 옥새(玉璽)도
역대 황제들의 권위와 국권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3. 취옥배추(취옥백채, 翠玉白菜):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배추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으로 비취(翡翠)라는
보석으로 만들었으며, 보석으로 보면 대단히 큰 것이다.
그러나 그 유명세에 비해 작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 유물은 청나라 광서제가 못 생겼다고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가이드는 왕비인 서비(근비, 瑾妃)가 후궁으로 들어 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다.
장인이었던 근비의 아버지가 황제에게 직접 딸을 부탁할 수 없어 대신 이 유물을 부탁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근비의 방에 있었기에 그녀가 혼수 때 갖고 온 예물로 여긴다고 한다.
줄기의 투명함은 집안의 청결과 신부의 순결을 의미하고, 푸른 잎은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하며, 잎 위에는
번식력이 강한 여치 2마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손의 번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청 태조가 명나라 장인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인데 안 만들면 구족이 멸할
것이고, 만들면 매국노가 될 것이라는 고민 끝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흰 몸통은 명을 뜻하고, 초록 잎은 청을 뜻한다고 하며, 청을 뜻하는 초록 잎을 여치가 먹어 청이 망하길
바란다는 장인의 뜻이 담겼다고 한다.
<2. 모공정 3. 취옥배추>
4. 육형석(肉形石): 돼지삼겹살 같아 생긴 이름으로 자연석의 옥돌을 무늬 결에 모공을 만들고, 색을 입혀 만든
가공의 기술과 창조력을 발휘한 청나라 작품이다.
5. 비연호(鼻煙壺): 본래 명칭은 유리태(玻璃胎) 법랑채비연호(琺瑯彩鼻煙壺)로 뜻은 모르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코담배(비연, 鼻煙)를 담았던 아름다운 유리병으로 청(淸)나라 유물이다.
가이드는 담배는 북방에서 들어 왔고, 궐련(卷煙)은 남방에서 들어왔다고 하며, 비연(코담배)은 연초로 만든
가루에 박하나 향신료를 넣어서 코로 흡인했다고 하고,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청나라에서는 황제로부터 일반 백성까지 크게 유행하였고, 건륭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고, 청나라
여진족은 말 타던 기마민족이라 편리하도록 허리에 찼다고 한다.
아름다운 비연호의 그림은 유명한 화가가 그려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귀족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한다.
기타 유명한 유물로는 아이디어에 놀라는 죽사전지번련다보격원합, 화려함의 희자전자, 미세조각의 진수인
소배나한과 조감람핵주를 참고삼아 소개한다.
<4. 육형석 5. 비연호>
◆죽사전지번련다보격원합(竹絲纏枝番蓮多寶格圓盒): 황제의 장난감이라고 불리며, 옥으로 만든 27가지의
물건이 들어있고, 높이는 24.5cm, 접으면 지름이 18.5cm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안에 있는 원형선반은 360도 회전이 가능하며, 부채꼴모양으로 펼치면
뒷부분은 병풍모양이 되고 접으면 원형모양의 통이 된다고 한다.
<죽사전지번련다보격원합>
◆희자전자(囍字鈿子): 정식명칭은 점취감주보취옥복접화훼전자(點翠嵌珠寶翠玉蝠蝶花卉鈿子)인데 청나라
유물로 만주족부녀자들이 경축 때 예복 입고 머리에 이 전자를 썼다.
진주, 금, 옥, 비취, 산호, 호박, 마노 등으로 화려하고 섬세하며, 극치의 색채로 만들어졌다.
◆소배나한(瘙背羅漢): 조황양목(雕黃楊木)의 소배나한은 높이가 5cm 밖에 안 되는 작은 조각으로 목질이
섬세하고 무늬가 좋아 훌륭한 조각 재료인 황양목(黃陽木)에 조각했다.
무명의 장인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승복을 입은 채 양어깨를 드러내고 등을 긁는 나한이 등을 긁을 때
얼굴에 퍼지는 만족스러운 표정과 즐거움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희자잔자, 소배나한>
◆조감람핵주(雕橄欖核舟): 사진으론 매우 크게 보이지만 실제론 높이 1.6cm 길이 2.4cm으로 매우 작지만
배안에 있는 8명의 사람은 쌀알의 크기인데 놀랍게도 탁자 위의 접시와 잔까지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배아래 부분에 북송의 소룡타가 쓴 후적벽부 전문의 300자가 새겨졌다고 하며, 과일열매가
타원형이어서 배를 조각하기에 매우 적합하여 이런 조형을 핵주(核舟)라고 한다.
<조감람핵주>
(기타 이야기)
이상은 하나씩 따로 항상 전시한 중요한 것을 관람했고, 이제는 유리 속에 한꺼번에 전시된 유물을 관람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으나 사진이나 있었으면 기억이라도 떠 올릴 수 있을 것인데...
사진마저도 없어 다른 것은 다룰 수가 없었는데 가이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를 했는데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4대문명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 몽골에서 발견된 유적은 황하 문명보다 천년 이상 되므로 황하 문명을 이룩한 한족의 자존심
때문에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고 했는데 4대 문명보다 단지 오래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 역사가 토인비가 이야기했듯이 문명이 국가 단위를 넘는 것은 4대 문명 밖에 없다는 뜻으로 4대 문명은
문명의 시간과 끼친 범위를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고조선, 한나라 시대의 위만, 고구려의 주몽까지도
중국황제의 후예로 넣고 있다고 했으며, 다음은 석기시대의 유물을 관람했다.
홍산 문화 유물도 있었는데 이 문화는 발해 만에서 2,000km 떨어진 울산까지 전파된 문화이고, 선비의 출세를
뜻하는 등용문(登龍門)은 잉어가 황하의 폭포를 올라가 용이 됐다는 뜻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포악하고 잔인하다는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자금성에 있는 것을 아래에 옮겼다.
밖으로 나와 청나라 여자들의 전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리도 어릴 때 전족을 보고 여자가 모자라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가이드가 진짜 이유는 남성의 성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전족의 역사는 청나라가 아닌 송나라 시대인 10세기쯤이라고 하는데 1911년 법으로 금지할 때까지 여성들은
더 조은 상대자들을 만나기 위해 발의 뼈가 부러지고, 기형이 되는 통증의 고통을 겪었다.
발이 큰 사람은 절대로 며느리로 받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능한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5세가 되면
엄지발가락은 놔둔 채 4개의 발가락은 접어서 헝겊으로 발을 단단하게 동여맸다.
이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을 신게 하여 발이 자라지 못하게 했으며, 성인이 되어도 발 길이가 10㎝가 넘지
않도록 했으며, 발 모양이 예쁘라고 걷는 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발의 기형은 자세에도 변화가 생기고 등도 기형적으로 변해갔다고 하는데 이런 전족은 일하지 않는 귀족들에게
행해졌으며, 일하는 천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전족의 육중한 몸매가 뒤뚱거리며, 걸을 때 여성성기의 근육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이것으로 관람을
마치고, 아래층에는 동상이, 위층에는 도자기와 그림이 있으니 자유롭게 보라고 한다.
<전족의 여인들>
※서태후: 서태후는 1835에 태어났으며, 만주족귀족으로 이름은 나라씨로 17살 수녀(궁녀) 들어 왔으며,
1856년 제9대 함풍황제의 아들 재순을 낳아 황귀비가 되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영, 불군침입으로 함풍황제는 열하로 피신하여 죽었는데 이 열하가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갔던 박지원이 쓴 3권의 책이 열하일기이다.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북경과 열하를 여행한 후 귀국하여 쓴 여행기로 열하는 ‘얼지 않는 강’의
뜻이며, 청나라 황실의 여름철 피서산장이 있다.
1860년 제10대 6살 동치황제의 황태후(자희태후)로 28세에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며, 함풍황제의 자안황후가
동쪽 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그는 서쪽 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불렀다.
동치황제는 성격이 나쁜 서태후보다 온화한 동태후를 좋아하여 동태후가 추천한 사람을 황후로 삼았는데 그는
19세의 젊은 나이로 1875년 갑자기 사망하였고, 서태후는 3살의 조카를 광서제로 즉위시켰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황제>
1898년 광서제는 개혁하려다 원세개와 서태후에게 옥란당(玉瀾堂)에서 감금되었으며, 1900년 의화단 반란으로
서구열강이 북경을 공격하자 시안으로 피신하였다.
1908년 10월 13일 74세 생일로 큰 연회를 베푼 후 과식에 의한 이질이 발병했으며, 푸의(부의)를 황태자로
삼았고, 11월 14일 38세 된 광서제 죽었으며, 3살 된 푸이는 11월 15일 즉위하였다.
11월 15일에는 서태후도 죽었는데 그가 48년 동안이나 통치하면서 청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러 중국의 경극발전 크게 기여도 했지만 내시에게 돈을 주고 황제가 지나가는 때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고 하며, 그 노래 때문에 청나라가 기울게 되었으니 시작은 참으로 작은 일이다.
그녀의 노래를 잘했지만 계획도 치밀하여 배란일에 황제의 환심을 사서 단 한번으로 왕자를 출산했다고 하며,
이로써 그녀를 권력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함풍황제는 그녀의 권력욕과 성격을 알기에 자안황후 밀서를 주어서 언제든지 그녀를 죽일 수 있도록 했으나
마음 착한 황후는 그녀에게 속아 밀서를 찢음으로 그녀도 서태후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128명의 주방장이 있었으며, 1끼 식사에 130가지 식사를 한 이유는 암살을 면하기 위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게 함이었고, 어떤 음식이든지 3 숟가락 이상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1끼 식사비용이 백은(白銀) 3kg으로 이는 쌀 5,000kg인데 일반인 1.5만 명이 식사할 수 있으며, 2명의 유모 젖을
먹었고, 늙은 내시가 실수하자 똥 먹였다고 하며, 머리카락 하나라도 빠지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머리 좋은 하녀가 옷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빠지는 머리카락 소매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여 그녀를 속였다고 하며,
그녀는 옷 하루 여러 번 갈아입고, 하루에 1남자와 잔 후 비밀을 위해 그 남자를 죽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해군예산을 가져와 이화원을 건설하여 해군은 예산부족으로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고, 현대화를 하지
못해 청일 전쟁에 패하는 원인 되기도 했다.
아산만에서 청나라 함포에 맞은 일본 배들이 침몰하지 않은 것은 청나라 배들이 쏜 것은 진흙포탄이었다고 한다.
<서태후 사진>
▶고궁박물관: 고궁박물관은 1965년 국부 손문 탄신 백주년 기념일에 맞춰 개관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정부는 무너지고, 혁명군 진압을 위해 청 정부가 기용한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는
쑨원으로부터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2월 12일 황제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1912년 청은 멸망했으나 1924년 마지막황제 푸이가 자금성에 떠나면서 궁중유물은 조사정리 되었고, 1933년
일본이 산해관을 넘어오자 1934년 유물을 다시 분리하였다.
그리고 약2만6천 상자에 담아 남쪽으로 옮겼으며, 중국 국민당은 1948년부터 3차에 걸쳐 중요한 유물
22%인 2,972상자를 피난민을 이주 시킨다고 빌린 미군 군함에 피난민보다는 유물을 실어왔다.
공산당들이 유물을 실은 배들을 포격하지 못한 것은 유물도 유물이지만 송미령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송미령의 중요성을 올려 주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곳 전시품 모두 둘러보려면 하루 종일도 모자라기에 유명한 유물들이 있는 3층부터 꼭 보시고, 사진도
찍을 수 없지만 가방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기에 차에 두거나 박물관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여권이나 신분증과 함께 100NT 주면 한국말 가이드를 빌릴 수 있다.
<박물관 벽에 있는 사진>
(대만의 기후 이야기)
저녁 식사할 식당으로 향하면서 대만의 기후와 2014년 11월 29일 치러진 지방선거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대만은 남한의 1/3 밖에 안 되는 대만에는 크게 2개의 기후가 있다고 하며, 대만 인문지리에서 애기한 하지
때 태양이 지나가는 북위 23도 27분이 북회귀선이고, 동지 때는 남회귀선을 태양이 지나간다고 했다.
이것은 기후를 결정하기도 하는데 북회귀선 이남은 열대지방이고, 이북을 아열대 지방으로 남쪽은 3모작이
가능다고 했으며, 저녁식사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메뉴가 복잡해서 갈등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의 선거 이야기)
이번 선거에서 22개의 선거구 중에서 집권당인 국민당이 차지한 것은 6개뿐이고 직할시장은 6개 중에 1개만
차지할 정도로 대패를 했는데 이번 지방선거는 굉장히 중요한 선거라고 했다.
그것은 2016년에 있을 대선을 점쳐볼 수 있기 때문이며, 친중(親中)의 국민당이 대패한 원인은 홍콩을 반환
할 때 20년 동안 자치를 인정해 주기로 약속한 중국정부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집권당 국민당이 중국정부하고 친밀하여 계속 양보만 해서 무역자유 거의 됐고, 서비스사업은 거의 개방이
되어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들어오면서 대만의 청년실업이 증가한 것이 불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들이 패인으로 작용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베이의 시장 선거인데 야권 단일후보 격인 무소속의 커원저
(柯文哲.55)가 낙승했는데 이 분은 내과의사로 우리로 치면 안철수씨와 비슷하다고 한다.
부인도 산부인과 의사로 그는 시장이 되면 혁신적으로 시를 바꾸겠다고 해서 젊은 층에서 많이 지지를 받았다고
하며, 아직은 정치적인 기반은 없다고 하나 총통이 될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한 것이라고 한다.
현 총통 마잉주(馬英九)와 전 총통 천수이볜도 모두 타이베이 시장을 거쳐 총통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하며,
현 총통 마잉주와 남녀 성(性)대결을 펼친 야당의 독신(獨身)여성 대선후보였던 차이잉원이라고 한다.
이 여성은 한국의 박근혜와 비교되는 여성으로 다음번에는 여성총통이 나오지 않을 까? 생각한다고 한다.
대만에는 국민당과 민진당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하며, 대만에는 같은 한족이라도 국민당이 건너오기 전
청나라와 일본시대에 건너온 사람과 그 후에 온 사람으로 대별된다고 한다.
<커원저, 마잉주, 차이잉원 사진>
2009년부터는 중국과 모든 것이 개방되어 왕래가 자유로워 졌는데 중국 사람들은 무척 시끄럽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중국, 한국, 일본 사람이 여행하다가 잠 잘 곳을 찾았다고 한다.
겨우 찾아낸 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돼지가 사는 우리였는데 너무 힘든 나머지 3이어서 돼지 울에
들어가 잠을 청했으나 얼마 안 되어 일본 사람이 튀어 나왔고, 다음에 나온 사람은 한국 사람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중국 사람은 나오지 안 했는데 결국 튀어 나온 것은 돼지라고 하면서 그 만큼 중국 사람이
안 씻는 다는 이야기로 같은 중국 사람이지만 대만사람은 중국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 저녁은 대만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재료를
볶아 만들어 주는 음식인데 한 손은 뒷짐 쥐고 볶아 주는 달인의 솜씨도 볼만 했다.
[용산사 관람]
저녁을 먹고 용산사에 도착했는데 지붕위에는 용들이 산더미 같이 많아 용산사라고 이름이 부친 것이 이해가
되었는데 가이드는 용의 입인 입구로 들어가서 호랑이 입인 출구로 나와야 한해가 편안하다고 한다.
거꾸로 들어가면 큰일 났다고 했는데 가이드를 따라 오른 쪽 편에 있는 용의 입으로 들어가 설명을 들었는데
밤이지만 사람들이 많은 편이어서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가이드는 계속 설명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기에 설명 듣는 것은 포기하고 사진만 찍었지만 밤인데다
조명등까지 방해를 하지, 기술마저 부족해서 선명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용산사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황금색이 많았는데 실내 조명등까지 황금색이었고, 용산사의 기록은 가이드
이야기와 다른 정보도 최대한 찾아서 서로 보완했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은 가이드 발음만 의지했다.
<용산사 앞 전경>
화타선사(華佗仙師)는 우측 첫 번째 방으로 양옆 벽에 그림이 그려 있으며, 이곳은 건강과 회복을 비는 곳으로
중국 3국 시대에 신의(神醫)라고 불렀던 유명한 의사 화타(華佗, 혹은 華陀)를 모셨다.
화타는 중국의 2세기 말~3세기 말 삼국시대의 안휘성 박주(亳州) 사람으로 삼국시대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 시대를 말한다.
화타는 관우(關羽)가 어깨에 독이 든 화살을 수술해주어 완쾌시킨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조조 (曹操 155~
220)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조조는 만성두통 때문이라고 한다.
조조는 화타를 불러 진찰을 했는데 화타는 조조의 머리통 속에 풍이 들어있기에 머리를 절개해서 풍을 긁어내야
낫는다고 했으나 의심이 많은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으로 의심하고는 화타를 죽였다고 한다.
화타가 죽기 전 자기의 의술을 청낭서를 기록하여 자기에게 극진하게 대해주던 옥졸 간수 오압옥에게 전해 주어
그로 하여금 백성을 치료하게 하려고, 간수에게 주었다고 한다.
간수는 모든 것을 부인에게 말하고 청낭서를 맡겼으며, 화타가 죽은 후 남편은 사표를 내고 집에 도착했을 때
부인은 이 서류 뭉치 때문에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 불을 끄고 남은 청낭서엔 가축을 거세하거나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 따위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 유명한
화타의 환자들을 치료했던 비방이나 세계 최초의 마취제 마비산 제조 기록은 사라졌다고 한다.
<화타선사>
문창제군(文昌帝君)은 화타선사 왼편에 있으며, 이름같이 문(文)을 주관하는 도교 신으로 옥황상제 앞에서 관직을
주관하던 신으로 글씨가 있는 종이를 함부로 다루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이곳은 학생에게 최고의 신으로 시험이나 출세를 바라는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장소로 파와 샐러리를 함께
올려놓는 이유는 '파'는 대만어로 '총'이고, 총은 '총명할 총‘ 의미한다.
샐러리를 대만어로 '진차이'인데 '열심히'라는 의미로 '총명하게 열심히 해 달라'라는 의미이다.
다음은 억울하게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소원을 들어주는 서왕노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보고를 하고 여행을
떠나도 좋을 지를 묻는 수장전하라고 했으나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문창제군 등의 신들을 모신 방>
천상성모(天上聖母)는 마조(媽祖)의 사당으로 당나라 말 헌종(805~820년) 때의 실존 인물로 남부 연안 복건성
바닷가에 사는 임씨 부부는 딸은 없고, 아들만 있었다고 한다.
임씨 부인이 어느 날 밤에 부처님이 던져 주는 연꽃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마조인데 보통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이 보통인데 마조는 태어 난지 100동안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잠잠할 묵(黙)이라고 했는데 이 이이는 돌이 되기 전 울음이 터지면서 신기하게도 말문까지 터지고,
사람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까지도 가졌다고 한다.
그 아이가 사춘기 때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고, 4명의 오빠는 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 그녀가 갑자기 기절을 했고,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깨웠을 때 조금만 있다가 깨울 것이지 그랬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너무 일찍 깨우는 바람에 오빠 하나를 구하지 못했다고 했으나 부모들은 그 말이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며칠
후 배가 돌아왔을 때 아들 3명만 돌아와서 그녀의 말을 이해가 되었다고 한다.
오빠들은 풍랑으로 인해 바다에 빠졌고, 그때 그녀가 나타나 3명을 구하고 큰 형을 구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선녀가 되어 승천하는 바람에 큰 형은 구조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딸아이는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신으로 모시였다고 하며, 동남아 화교들이 대부분 복건성
출신들이라 마조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다고 하고, 극성스럽게 모시는 곳이 바로 대만아라고 한다.
마조 생일이 3월인데 이 한 달 동안은 사당이 있는 곳에는 신을 가마에 태우고 돌면서 폭죽을 터트리고 난리가
난다고 했으며, 마조는 바닷길을 편안하게 하는 신이라고 한다.
우리도 옛날에는 집 안에 신을 모시는 공간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신은 3자매인데 큰 언니가 실을 들면 동생은
자로 재면 막내는 가위로 자르면 그의 수명이 되기에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을 주관하는 3신 할매라고 한다.
<천상성모>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소개를 하는 것을 보면 주생랑랑(註生娘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삼관대제(三官大帝)는 관직의 승진을 주관하는 신이다.
원로신군(월하노인, 月下老人)은 모든 사람이 잠든 사이에 활동을 하면서 남녀의 다리를 굵은 실로 묶어주면
그 둘은 커플이 되지만 월하노인은 술을 좋아해서 취한 상태에서 묶어준 사람은 이혼을 한다고 한다.
관우사원은 삼국지의 관우(關羽)인데 그의 상징은 의리이기 때문에 재물을 관장하는 사업의 신이라고 했는데
의리와 사업이라! 잘은 모르지만 조금은 억지 같다.
차라리 억울한 사람의 원수를 갚아주는 것이라면 좀 이해가 되겠는데 관우와 최영장군은 억울하게 죽었기에
억울한 사람들의 사정을 잘 들어 준다고 무당들이 섬기는 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들을 모신 사당 전경>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를 모시는 자양부자(紫陽夫子) 있으며, 이제는 신의 대답을 확인하는 2개의 반달 같이
생긴 나무 조각이 신에게 물어보는 기물라고 한다.
윷처럼 던져서 도가 나오면 음양이 합쳐져서 맞는 것이라 순조롭게 잘 된다는 뜻이고, 윷이 나오면 꽝이라고
했으며, 모가 나오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있기에 다시 던진다고 한다.
오늘 점을 보아도 좋은지 먼저 물어보고 도가 나오면 점괘를 뽑을 권리가 가지게 되고, 점괘를 뽑아 번호가
나오면 그 번호에 해당하는 서랍에 있는 종이에 적힌 것이 오늘의 점괘라고 한다.
그러나 점괘를 펼쳐 보아도 개인이 해독을 할 수 없기에 도교의 성직자 도사를 찾아가 해석을 의뢰한다고
하며, 복채를 많이 주면 기가 막히게 해석을 잘해 준다고 한다.
가져온 음식도 이렇게 물어보고 치운다고 하며, 가져온 음식은 음복한 것이라고 집으로 가져가서 먹게 되며,
만약에 안 가져 것은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준다고 하는데 아무나 먹어도 된다고 한다.
이젠 20분간의 자유 시간을 주었는데 우리일행은 벌써 밖으로 향해 바쁘게 사진을 찍고 일행과 합류했으며,
다시 모여 정문을 나와 우측에 있는 야시장에서 1시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다.
<신의 응답을 물어 보는 기구인데 ‘도’가 나와서 응답된 상태>
▶용산사: 1740년 청 건륭황제 3년에 건축되어 약 260년의 역사를 가진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사원이지만 자연과 인재로 파괴된 것을 1957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수많은 사원 중에 삼진사 합원의 전형적인 타이완의 사원으로 불교와 도교가 함께 공존하는 멋진 건축물로
돌기둥에는 조화롭게 조각된 용 뒤에 역사적 인물들의 춤추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진한 향냄새와 더불어 대만인의 종교 생활을 볼 수 있으며, 오전 7시에서 오후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용산사 내부 전경>
[야시장 관광]
야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가이드가 가르쳐준 대로 우리일행은 버블 티(Boubble Tea)를 맛보기 위에 입구에
있는 상점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르니 한 컵을 2사람이 나누어 먹기로 했다.
빨대가 무척 굵은 것은 차 안에 있는 쫄깃한 덩어리가 올라 올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인데 나누어 전
내용물을 잘 저어야 하는데 그냥 나누어 먹어보더니 전부들 맛이 없다며, 그냥 반납했다.
‘거품 차’라는 뜻의 버블 티는 만드는 과정에 ‘거품 내기’를 하기 때문인데 재료로는 파우더, 타, 코코넛, 망고,
재스민, 그린 티, 초콜릿, 스토로 베레, 블루베리, 커피, 바닐라, 우롱 등이다.
버플 티는 대만이 원산지로 남미만 빼고, 캐나다 미국 등 북미연안, 우리가 있는 극동부터 싱가포르까지의
태평양연안국,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까지 인기 있는 상품이라고 한다.
본래는 화시지애 야시장을 관광하기로 되어 있으나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으며, 그 중간에 있는 광서 야시장만
돌아보았는데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은 없었고, 손녀들 줄 선물만 살폈으나 살 것이 없었다.
발이 움직이는 고양이가 있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으며, 이번 여행에는 관심분야가 먹거리인 분이 계셔서
그분이 일행의 먹거리 책임을 맡았는데 화생(花生)이라는 땅콩과 능각(菱角)을 샀다.
능각이라는 말 밤은 크게 맛있지는 않았는데 대만어로 닝까, 영어로 water caltrop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물에서 나는 열매라고 생각 했으며, 또 다른 먹거리를 찾았으나 구미를 당기는 것도 없다.
<능각과 땅콩 장사>
시간이 다 되어 모일 장소로 이동하다가 펑리수를 100NT에 팔고 있어, 몇 개를 사려다 가이드와 함께 쇼핑할
곳에도 있다고 해서 하나만 샀는데 나중 후회를 많이 했는데 그나마도 이것이 아니면 맛도 못 볼 번했다.
우리는 이곳만 배회를 했으나 먼저 간 사람들의 야기기를 들어보면 화시지애 야시장까지 간 것 같았으며, 차에
오르니 101층 전망대는 예약을 하지 못해 호텔로 간다고 하면서 내일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 일정에 있는 사림관저는 토요일이라 차가 밀려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내일로 일정을 바꾼다고 했는데
사림관저가 일정에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기에 전혀 준비도 못했다.
내일 일정은 8시에 출발하여 맨 처음 갈 곳은 사림관저이고, 그 다음은 지우펀이며, 다음은 예류해안공원이고,
다음은 금융천 노천온천욕을 마치고 타이베이로 귀환하여 저녁식사를 한 후 발마사지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묵을 타우가든은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어 차만 타면 보통 1시간 걸린다고 하며, 내일 기상
시간은 6시, 식사는 6시 반, 출발은 8시라고 한다.
▶화시지에 야시장: ‘Taipei Huaxi ST. Tourist night Market(화서가 관광야시장)’은 용산사를 바라보고
좌측으로 가면 가운데 노점상이 있는 곳은 광서 야시장으로 먹거리와 잡화를 파는 곳이다.
좀 더 가면 화시지에 야시장 입구로 공산품, 옷, 불교용품, 보양식, 성인용품 등을 파는 곳으로 관광시장이라
가격이 더 비싸다는 것이며, 주위에는 매춘 장소가 있어 포르노 상품도 있다.
★중화민국(타이완, Taiwan): 본토 푸벤성- 160km, 수도-타이베이(Taipei) 화폐- 1 신타이(약 40원) 인구-2천 3백
3십만 명(2013) 세계 51위 면적-3.6만㎢(경상도3.1만), 137위 기후-아열대성기후, 열대성기후 종교-불교 35%,
도교 33%, 기타 종족-한족 98%, 오스트로네시아어족 2% 정체-공화제 의회형태-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
총통 정부수반-행정원장 나라꽃-매화 Plum blossom, 농업- 쌀, 사탕수수, 바나나, 우롱차가 생산된다.
한국을 시샘하고 험하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 한류의 열풍으로 많이 개선되었지만 대만이 좋아하는 태권도
때문에 한 때 험했다고 한다.
<광서 야시장>
[2일] 14년 12월 4일 목요일
●일정: 타이베이→ 사림관저→ 지우펀→예류공원→ 노천온천욕(1h)→ 타이베이귀환→ 발마사지 옵션→ 호텔
[장개석의 여인들]
호텔을 나와 사림관저까지 1시간 반 동안 장제스(장개석)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가이드가 설명한
기록이 없어서 인터넷에서 본 자료를 정리해서 올렸는데 아래 중정기념당의 기록과 중복될 수 있다.
장개석은 1887년 저장성 평화 현 봉화시 계구에서 태어났고, 할아버지 때부터 작은 소금 장사를 했으며,
소년기엔 한학을 공부했고, 17세부터는 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14세 때 5살 연상인 모복매(毛福梅)와 결혼하여 아들 장경국과 딸 장젠화를 낳았고, 요야성(姚冶誠)이라는
내연녀를 두었으며, 모복매와 이혼을 하고, 19살 연하인 진결여(陳潔如)와 결혼했다.
1927년 송미령과 결혼할 때 모든 여인들을 정리할 것을 요구해서 장개석은 2번째 부인 진결여와 헤어질 때는
좀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장개석은 둘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고 했다고 한다.
먼저 진결여를 미국에 보내 놓고 자기는 가지 않았다고 했으나 송미령과의 결혼은 정략적임으로 미국에 잠시 가
있으면 훗날 대업을 이루면 송미령과의 결혼을 청산하고 그녀를 다시 불러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진결여는 혼자 캘리포니아의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상하이로 돌아와 숨어서 조용히 보냈다고, 송가수의 딸
송미령과 결혼한 후로는 복잡한 여자관계를 청산했다고 하며, 신앙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손문과도 한 가족이 되었음을 알렸는데 장개석과 송미령과 서로 필요해서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재력이 없었던
장개석은 송미령 집안은 경제력이 필요했고, 송미령은 어려서부터 야심이 강해서 장개석이 필요했다.
장위국의 이야기도 했는데 그는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고, 친구인 대계도가 부인인 뉴우항을 두려워한 나머지
내연관계인 중송금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부탁해서 기른 양자이지만 장개석은 친아들처럼 잘 보살폈다.
장위국은 송미령과도 각별한 사이라 그와 결탁하면 장경국의 권력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해서 장위국은 승진을
시키지 않았으며, 그는 상장계급으로 전역하여 정부의 감시를 받고, 강연하며 살았다.
<진결여와 장위국>
[장개석의 말년 이야기]
1969년 사람관저로 퇴근하던 장개석은 중앙선을 넘어온 지프차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암살을 의심했으나
운전자 과실로 판명되었고, 이후로 건강은 악화되었다.
국제사회의 변화로 장개석은 정신적 고통도 받게 되었는데 그 시작은 1970년 10월부터 캐나다와 이탈리아가
중공을 국가로 승인하고 대만과는 단교했으며, 각국의 단교가 이어졌다.
1971년 10월 UN총회에서 중공은 유엔대표권이 승인되었으며, 대신 대만은 축출되었고, 1972년 2월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공을 방문하여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를 인정하였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장개석도 권력 이양을 서둘렀으며, 6월 1일 입법원(국회)은 장경국을 행정원장으로 승인하여
장경국시대가 열렸고, 1972년 10월 전립선수술을 했다.
이 수술로 인해 만성전립선염으로 전이되어 1975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할 때까지 병마에 시달렸으며, 대만단교는
일본, 유럽, 남미, 아프리카까지 이루어졌다.
<장개석의 노년모습>
[대만과 한국의 관계]
지금부터는 우리가 어릴 적에 본 장개석과 대만에 대한 추억을 기록했는데 사실을 떠나 기억을 기록한 것도
있기에 틀린다고 해도 그냥 이야기로만 보아 주었으면 한다.
대만에 거주하는 장기거류 자는 3,400명 정도로 적다고 하며, 1992년 한국과 중화민국과 단교로 인해 한국의
있던 화교들이 많이 떠났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전부터 시작했는데 그 기억을 더듬어 기록해 본다.
한국과 대만은 서로분단 된 아픔과 중공을 견제해야 하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관계가 돈독했는데 1949년 8월
7일에는 장개석이 진해를 방문했고, 1953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했다.
이런 우호관계가 악화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우리가 어릴 적에 장개석총통의 사진이 걸려 있는
중화민국 사람은 면소재지와 도시의 골목경제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나이 든 여주인은 전족이었다.
이 많은 중화민국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은 1962년 화폐개혁 이후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당시 소문은
땅에 묻어둔 중화민국 사람들의 돈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화폐개혁 당시 1인당 바꾸어 주는 돈의 액수가 정해져 있어 못 바꾸는 돈은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중화민국 사람들이 피해가 컷을 것이다.
군사혁명 정부가 실제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소문으로는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중화민국 사람들까지 먹여
살릴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을 떠나도록 조치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른다.
그 조치 가운데 외국인은 땅을 사지 못하도록 했으며, 또 그들이 외국으로 송금하는 것을 제한했기에 그렇게
악착 같이 돈을 벌던 중화민국 사람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중화음식점 주인도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그런 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차이나타운이 사라진 국가가 되었으며, 그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많은
나라가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사정이 역전이 되었다.
중국관광객을 많이 유치하려고 중국인들이 살지 않는 차이나타운을 중국인이 아닌 우리가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정들었던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한국을 좋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6.25 때 대만은
국민들이 절식을 해 가면서 도왔는데 그런 대접을 받았으니 감정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때에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8월 24일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관계가 악화됐다.
그렇게 정들었던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한국을 좋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것이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8월 24일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관계가 악화됐다.
‘중국과 수교를 맺으려면 반드시 대만과 단교를 해야 한다.’는 중국의 정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대만에서는 배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교 때는 한국과 관계는 최악이 되었고, 대만인들은 태극기 불태우고, 한국유학생 폭행하여 일본인 행세를
하고 다닌 일, 대만 한인학교 공격, 태권도 심판시비 등으로 나타났다.
<대만국기와 난 꽃>
이렇게 악화된 민심이 호전된 계기는 태평양판이 대륙판으로 밀고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대만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데 1999년 9월 21일 강도 7.4의 대진이 대만 중앙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촌에는 많은 가옥이 무너져 희생자가 2.000명 이상이 났을 때 매몰된 사람이 많았는데 우리나라 119구조대가
14일 동안 땅속에서 오줌을 받아먹고 생존한 소년을 구조하는 장면을 전국적으로 생중계해했다고 한다.
열심이 구조하는 장면을 보고 울지 않았던 사람이 없다고 하고, 소년을 구조했을 때 전 국민이 박수를 치며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그 후로는 반한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0년 초엔 한류 문화 콘텐츠산업이 일어나 가을동화, 겨울연가, 대장금 등의 드라마가 들어오면서
지금은 한국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우호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가끔씩 옛날의 감정이 나올 때가 있었는데 2010 제16회 중국 광주 아시안게임 때 대만에서 인기 있는
태권도에서 49kg 급 금메달 유력후보인 양수춘이 실격패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는 발이 커서 추가 센서를 사용한 양발을 가져왔으나 1, 2차 장비검사를 통고한 후 베트남 선수와 게임에서
9대 0으로 리드하였으나 게임이 끝나기 직전 한국 심판이 이의를 제기해 실격패 당했다.
선수, 체육부장관, 행정원장, 전 국민이 합세해서 국제사법재판소까지 갈 용의가 있다며, 난리가 났는데 어째든
개인선수 잘 못보다 경기 전에 문제가 없다고 판정한 것이 잘 못이기에 선수가 억울한 것은 맞다.
운영위원회의 실수가 한 선수의 장래를 망치게 한 이 사건 때문에 대만 사람들이 한국말이라는 것은 알기에
한국 사람은 당분간 한국말도 못하고, 몸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고 한다.
[사림관저(士林官邸, 스린관디궁위안) 관광]
차 안이 추워도 대만 차에는 히터라는 것이 아예 없기에 틀어 줄 수 없다고 했으며, 차 유리는 성에로 인해
차장 밖의 경치를 볼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사림관저에 도착해도 내리고 있었다.
차에 오를 때 우비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 중에 부산에서 나에게 우비를 준 사람도 있었는데 우비 주인이
비를 맞는 것이 미안해서 도로 주었지만 받지를 않아 나도 사용하지 않고 비를 맞았다.
대만으로 오기 전 일정에는 이곳이 없었기에 전혀 정보를 알지 못했으며,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우리가
보았던 고궁박물관 가까운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장개석 총통관저이다.
<장개석 총통 부부가 살았던 관저>
지금은 대만인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곳은 중국식 정원과 송미령씨가 좋아했던
미국식 정원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으며, 그중 그녀가 가장 좋아한 곳은 장미화원이라고 한다.
10시 반에 모이기로 하고, 1시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는데 날씨만 좋으면 참 좋은 산책길인데 겨울비까지 내려
조금은 불편하게 되었으며, 가이드마저 없으니 발길 닫는 데로 걸었다.
사람관저는 1950년부터 장개석 부부가 살았고, 1975년 총통이 죽은 후 2003년 송미령 여사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살았으며, 1996년부터 본관을 제외하고 공개를 하였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군인이 거주하던 곳을 개조한 카페 화장실을 들리는 것부터 시작했으며, 가는 길에 보이는
나무들과 꽃들의 이름이 궁금했지만 물을 볼 사람이 없으니 어쩌라!
나무 기둥은 비록 험상 졌으나 그런대로 멋이 있는 나무도 보이고, 얼마가지 않아서 관저의 본관도 보였는데
입장료를 내면 들어갈 수 있으나 우린 들어갈 시간도 없었다.
처음엔 자연 그대로를 살린 영국식정원이 나오고, 우측 정자가 있는 곳은 중국식 정원으로 보였으며, 어떤
곳은 개구리나 곤충을 만들어 아이들의 학습장으로 쓰이는 곳도 있었다.
<어린이 학습장>
다음에는 나무들을 손질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낸 프랑스식 정원도 있었고, 국화전시실을 지나 도착한 곳은
총통부부가 예배를 드렸던 ‘찬송으로 승리하는 예배당’의 뜻을 가진 개가당(凱歌當, 카이거탕) 교회이다.
이곳에서 잠깐 일행을 만나 단체사진을 찍고 또 헤어졌으며, 이번에는 축소지향적인 일본식 정원을 지나
도착한 곳은 코코넛 나무 같이 생긴 나무가 멋지게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도로이다.
이 나무는 열매가 달리지 않는 아레이카 야자남의 일종으로 이곳이 마지막 길이며, 주차장을 지나 다시 입구에
도착했는데 겨울인 줄도 모르는 코스모스가 정겹게 맞아 주어 잠시 한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했다.
<프랑스식 정원, 국화전시실, 개가당교회 내부, 아레이카 야자나무, 코스모스>
(파룬궁의 이야기)
약속시간이 20분 정도 남아서 파룬궁 수련원들이 전시해 놓은 사진들을 구경했는데 어떤 것은 장기를 들어내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서 혐오감도 있었으나 그들은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무엇인가 알리려 했다.
비가 오는 오늘 같은 날에도 저들을 길거리에 서게 한 것이 무엇이지 궁금해 져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 하나의
기공수련을 1992년 리홍즈 선생에 의해 처음 중국본토의 대중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통해 사회에 모범이 되고, ‘타인의 입장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라’는 '선타후아
(先他後我)’를 실천을 수련의 중요 항목이어서 사회적으로 매우 호감을 가졌다.
선타후아의 호감은 세계 50여개 국가에 전해져 1억 이상이 배우면서 90% 이상이 치료되었거나 호전되었으며,
자아가 조절되어 술과 담배를 끊었고, 사회와 정신 건강에 효과가 뛰어난 것이 입증되었다.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들>
당시 주석 장쩌민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1955년 리즈홍 선생의 저서 전법륜이 10대
베스트셀러에 들면서 선망과 칭송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자 장쩌민은 몹시 불편해졌다.
1997년 파룬궁이 사교라고 규정할 만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 공안국에서 조사를 했으나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으며, ‘백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장쩌민은 ‘그러니 더 진압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파룬궁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단절시키며,
추종자들을 소멸하라는 지시로 1999년에 유사 이래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금 그들이 전시해 놓은 사진은 아마도 이때의 잔혹함을 알리려 하는 것인 것 같았으며, 가이드도 잠시 이들의
이야기를 차 안에서 했는데 기억이 없어서 인터넷에서 찾은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이번 여행에 카메라는 나 혼자 밖에 가져오지 않은데다 우리 일행은 관광과 사진에는 관심 없어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사진 찍어줄 동료가 없어 고민 중에 다행히 한 사람을 만나 몇 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 찍어 주기는 쉽지만 찍어 달라는 것은 발을 잡는 것 같아 미안도 했으나 조금 지나면 아예 보이지도 않아
사진 찍는 것이 좀 힘들었으며, 맨 마지막은 항상 나 혼자였다.
각자 사진은 파일로 가져가면 좋을 것인데 다 아날로그 때 사람들이라 모두들 인화해 달라는 바람에 생각지도
않은 많은 사진 값 때문에 다음부터는 사진기를 가져가야 할 지 고민스러워졌다.
<파룬궁의 잔혹한 탄압을 알리는 사진들>
[지우편으로 향하면서]
한 50분 쯤 거리에 있는 지우편으로 향하면서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 이곳에는 아홉 농가가
살아 주후(구호, 九戶)라고 했으며, 산 중이고, 경사가 심해서 교통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렵게 외부에서 물자를 조달해 오면 아홉 농가가 공평하게 나누었다고 해서 동네 이름이
지우펀(往九份, 왕구분 Jioufen)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20~30년 금 광산이 발견되면서 많은 광부들이 유입되면서 계단식 밭과 논이 도시로 변하였고, 가파른
길들은 계단이 되었으나 폐광이 되면서 한적한 마을로 변한 것을 정부가 관광지로 개발했다.
지우편이 관광지로 각광 받기기 시작한 것은 1947년생인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가
1989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그 영화가 지우편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슬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비정성시(悲情城市)’는 1945년부터 일본 통치에서 해방되었고,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이 타이베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4년 동안을 4형제를 둔 한 가정을 다룬 영화이다.
그 배경이 된 2.28사건에 대한이야기를 좀 재미있도록 넌픽션으로 구성해서 들려주었고, 인터넷 정보는 다 같지
않아 가이드 이야기와 인터넷의 중요 골격만 정리해 보았다.
<경사가 심한 지우펀 마을>
(대만의 2.28사건)
1. 사건이 일어나가 전의 대만 분위기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되었으나 대만은 다시 중국정부에 귀속되어 독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국민당
독재, 부패, 횡령 등은 대만인들을 불편하게 하였고, 불만을 키웠다.
또 전부터 살던 본토 대만의 내성인은 소수가 공무원이 되었지만 중국 본토에서 이주해온 외성인 대부분이
찾지 해서 내성인 기회가 적었고, 불공평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재산을 국유자본의 명분으로 접수하여 공업, 금융, 무역 등을 독점했고, 술, 담배 등을
대만정부가 독점판매 하였고, 본토 내전에서 대륙의 경제가 대만에도 파급되었다.
1년만에 100배나 되는 오른 물가와 농업의 흉작으로 인한 굶주림까지 겹쳐 대만인들은 살기가 힘들어서
불만이 고조 되어 있는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
2. 사건 날자, 장소, 원인
1947년 2월 27일 저녁 무렵, 장소는 타이베이 역 부근, 원인은 불법으로 담배를 팔던 여인이 전매국 단속
공무원(1명 혹은 9명)에게 반항하다가 단속공무원에게 맞았다.
그녀를 아는 지인과 목격자들이 모여 항의를 했고, 이를 지켜보던 사복경찰 조자건이 그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총을 발사했으며, 상인 지문계가 사망했고, 시민들은 범인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3. 사건의 확대
28일 타이베이 시민들은 파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모였던 시민들은 오전엔 전매국을 공격했고, 오후에는 행정장관
진의에게 청원했으나 치안을 담당했던 군인들의 발포로 여러 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시위대도 무장하여 충돌은 확대되면서 3월1일에는 진의가 계엄령 선포했으며, 3월 8일 상하이에 주둔하던 21대
2개 사단을 대만으로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4. 대만 정부의 사과
1995년 2월 28일 리덩후이 총통은 아픔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던 희생자 가족에 사죄했으며, 2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하였고, 집회 장소는 화평공원을 조성하여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를 세웠다.
1997년 대만정부는 사건 50일을 맞아 공식사과를 발표. 2.28기념탑과 기념관을 건립했다.
<2.28 화평공원(和平公園)의 정문과 공원 안의 조각품>
[지우펀 관광]
해발 780~800m의 가파른 길을 따라 차가 힘들게 오르면 왼편에 보이는 해변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경사진
곳에 새워진 황금색 사원이 보이면서 지우펀에 도착을 했다.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이 작은 동네를 연결하는 것은 가파르게 만들어진 좁은 계단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고,
우리는 상점이 밀집해 있는 골목 입구에서 하차를 했다.
30분 후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좁은 길인 기산가(基山街) 골목을 따라 반은 밀려서 가다가 손녀들의
기념품을 살만한 것이 있을 것 같아 기념품만 찾다가 일행도 놓치고, 끝까지 가 보지도 못했다.
한 가지 편한 것은 사진 찍을 거리가 없는 것이었으며, 기억에 남는 것은 촬영장소도 아니고, 기념품가게도
아니고, 수 없이 많은 먹거리도 아니었지만 신기한 것은 생애 처음 보는 과일 들었다.
우리나라 여주와 똑 같이 생긴 열매는 우리 것은 노란 색인데 여기 것은 더 크고 흰색이며, 석가모니의 머리를
닮았다는 석가도 보이고 용을 닮았다는 홍화용과(红火龍果)도 있었다.
또 하나의 먹거리를 샀는데 일명 대만 새우깡으로 뻥튀기처럼 똑 같이 튀긴 것으로 크기는 작은 접시만한데
맛은 새우 맛과 똑 같았으며, 조금 더 가다가 특이한 것이 없어 되돌아 왔다.
입구에서 일행들과 만나 그들이 산 깨강정을 너무 많이 먹었으며, 시간이 다 되어 가이드를 따라 차를 탈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다가 도중에 큰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샀다.
이 과일들은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감은 2명이 먹어도 될 만큼 컸지만 맛도 있었는데 후에 다시 먹으러
오고 싶었던 것은 과일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생각나는 것은 감이었다.
지우편은 한국 드라마 ‘온 에어(기룡 sbs on air)’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하며, 지인이 이곳에 일본사람이 많이
찾는 것은 이곳에서 일본영화도 촬영했기 때문이라고 해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 찾지를 못했다.
<기산가 골목 기념품 가게와 과일 가게>
[예류지질공원(野柳地質公園)]
지명 야류(野柳)는 ‘야생 버드나무’라는 뜻을 가졌지만 버드나무와는 아무 상관없으며, 단지 발음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면서 옛날에는 이곳에 좀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이 좀도둑을 예류라고 불렀는데 지명으로 사용할 수 없어서 대만 정부가 들어오면서 모든 지명을 표준화할
때 야류(野柳)라고 정했다고 하며, 좀도둑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애기했다.
쌀을 실은 차들이 경사진 이곳에 오면 속도가 줄었을 때 차에 올라 대롱을 쌀가마니에 꽂아 쌀이 졸졸 흐르게
해서 쌀을 훔친 아주 작은 좀 도둑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도 대관령에서 이런 좀 도둑이 있었다.
울산 좀도둑 하나를 소개해 보면 장생포는 고래 고기로 유명한데 고래는 배에 실을 수 가 없어 배에다 매달고
왔다고 하는데 이때를 이용해서 칼을 차고 잠수하여 고래 고기를 베어간 좀도둑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지질공원은 바닷가에 있으며, 특히 겨울철만 되면 북쪽에서 부는 계절풍이 강해서
이런 경관이 만들어졌는데 너무 경치에 심취해서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꼭 조심해 달라고 했다.
가보면 해안가 쪽의 빨간 선은 그 이상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뜻인데 간혹 어기고 들어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분들도 있다고 했고, 사진 찍으면서 뒤로 주춤한 것이 영 못 돌아오는 신세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사암이라 바위가 몹시 약하기 때문에 만져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마치니 식당 앞이다.
<예류 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왕비두상(王妃頭狀)>
[예류지질공원(Yeliudizhi Park) 관광]
식사를 마쳤는데도 비는 그치지 않았으며, 바람이 강한 곳이라 우산도 쓸 수 없으니 우비 주인에게 미안하지만
할 수 없이 우비를 입었는데 일반 우비가 아니고 코트식이라 괜찮았다.
1.7km 정도의 넓은 관광지를 1시간 밖에 시간을 주지 않아서 다리도 불편한데 열심히 걸어야 했는데 많은
관광객이 사진 찍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2개의 왕비머리에도 사람이 몰렸다.
이 왕비는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의 부인인 네페르티티 여왕을 닮았다고 해서 ‘여왕두상’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에서 일행 한사람이 사진 찍기를 원하여 안 그래도 짧은 시간을 허비했다.
왕비두상은 방향이 맞아야 그렇게 보였고, 혼자 풍경을 찍으며 가다가 돌아갈 시간을 감안했는데 대부분 사람이
가는 곳까지만 갔으며, 차에 올라가 니 내가 마지막으로 탔다.
가는 도중에 장애인들을 몇 명 만났는데 돌아올 지점에서 장애인이 사진을 찍으려고, 휠체어를 뒤로 밀었는데
바퀴가 길을 벗어나고 떨어질 것 같아 더 못 가도록 잡아 주었더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행하면서 가끔 장애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행하는 궁금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사람을
외국에서 만나기는 처음이어서 적지 않게 놀랐는데 이런 것들이 다 국력이라 생각했다.
<예류지질공원 모습들>
▶예류지질공원: 해상공원의 기이한 사암과 용암은 바람과 파도의 침식이 만들어낸 자연예술 공원으로 타이완
북부의 최고명소이자 세계지질학상 중요한 해양생태계자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곳은 3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A, B 구역만 보아도 1시간 정도 걸리며,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거대한
버섯군락지 같은 선상암이 늘어 서있어 해풍이 만든 자연 조각공원이다.
해식구(海蝕構, Sea Groove-바다 홈)도 있으며, 해식을 통해 만들어진 촛대와 촛불 모양 암석층도 있고, 크고
작은 구멍이 가득한 벌집암석, 네모반듯한 암석이 논두렁 모양으로 놓인 바둑판석과 같은 곳도 있다.
울퉁불퉁한 생강 모습을 한 생강석 등 독특한 바위가 즐비하며, 36개 형태의 바위가 있다고 하지만 이런 것을
기억해 가면서 감상하기엔 시간도 짧지만 그런 모양을 찾는 것도 사실 불가능 같았다.
그저 보는 것만도 벅차서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으며, 봤다는 것만으로 족하게 생각했는데 이곳은
일본과 달리 대만은 해변주변의 융기된 사암이 지금도 침식(侵蝕)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지질공원의 동영상>
[금용천(金湧泉)의 노천 온천욕]
금용천 온천장은 예류에서 한 20분 거리에 있으며, 도착 전 수영복과 모자를 강력하게 갖추라고 했는데 없어서
빌리는 요금이 우리나라에서는 살 수 있는 가격이라 모두들 놀랬다.
대여 가격이 너무 비싼 것과 가이드의 강력한 권고와 그 사이에는 의심을 가질 만 했으며, 몸만 담구는 데도
필요 이상으로 관리인들이 복장을 단속하는 것에도 의심이 갔다.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간 사람들의 여행기에는 복장만 갖추라고 했지 검사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모자를
사려다가 언제 쓸 까? 싶어 사지 않고, 대신 혹시나 해서 산에 갈 때 사용하던 것을 가지고 갔다.
이것은 목도리도 되고 마스크도 되는 것으로 끝부분은 접어 넣으면 모자처럼 사용도 가능했는데 역시 생각이
맞아 떨어졌으며, 모자 쓴 사람은 나오라고 했으나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버티자 그들도 포기했다.
비용을 아끼겠다고 둘이서 하나의 옷장을 사용했는데 동전을 넣어야 문이 열리는데 실수를 해서 2번이나 넣고
문을 열었으나 너무 비좁았으며, 이곳에서는 1시간도 많은데 30분의 시간을 더 주었다.
어제 더위에 고생을 좀 했기에 오늘은 더위에 대비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이 대만에서는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해서 아침부터 떨기 시작한 것이 예류에서는 바다 바람까지 합세했다.
이제는 추위가 우리들이 물 밖으로 나오기만 기다렸는데 사정도 봐주지 않아서 아열대기후에서 얼어 죽었다는
해외토픽에 나오지나 안을까? 걱정을 할 정도로 혼난 사람들이 많았는데 날씨가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금용천 노천온천장 내부>
추위 때문에도 더 있고 싶지 않아 일찍 나와 여성분들을 기다리면서 사진도 찍었는데 대기실에 있는 붉은 색
금붕어는 흉한식인어(兇悍食人魚)라고 쓰여 있는데 사람을 먹는 포악한 고기라는 뜻이다.
온천장에는 사람의 각질을 먹을 먹고, 40°에도 사는 닥터 피쉬(Dr fish, 가라루파)가 있어 발을 담갔는데 각질을
먹을 때 간질간질했으며, 소파에는 젊은 여자들이 자고 있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위 사진은 흉한식인어, 아래사진은 닥터 피쉬>
이들은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로 보였는데 피곤해서 그러겠지 생각하고, 밖으로 나아가 물의 힘으로 돌고 있는
원형의 큰 대리석이 신기해서 올라가 밀어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감나무, 귤나무가 있는 밭도 구경했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물은 지하수를 식혀서 쓰는
것이 아니고, 물을 데우기 위해 대형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들어간 온천물이 더러운 이유를 알았는데 이 온천장에는 장미 탕, 우유 탕, 라벤더 탕, 사우나
등과 수영할 수 있는 풀도 있다고 했으나 수영복만 젖었을 뿐이다.
이제는 타이베이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그 하기 싫은 발마사지는 가이드 눈치 때문에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아프고 눈감고 참으면서 살살이라는 말했지만 어느 새 잊어버리고 또 세게 하여 참느라 고생만 했다.
중국여행에서 발마사지 때문에 고생 안한 적이 없고, 차라리 우리 손녀가 훨씬 시원하고, 비용도 싼데 돈 주고
고생하는 이 옵션이 들어 있으면 한국에서부터 고민되었는데 오늘도 늦은 시간에 호텔에 들어갔다.
<금융천 온천장 전경>
첫댓글 우와~ 기억력 대단하십니다.. 기억이 새록새록나네요.. 즐감하고 갑니다
기다리던 분인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오셔서 댓글도 달아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