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연길, 용정) 3일(15년 4월 27일~4월 29일)]
●1일: [5:20] 울산→ [07:00] 김해 국제선 2층(2gate)→ BX331→ [09:00] 김해 출발(3h)→ [10:50]
연길도착→ 도문 이동[1. 중국국경지대 조망 2. 강변공원 관광]→ 이도백하 이동(4.5h)→ 호텔
●2일: 이도백하→ 백두산입구(셔틀버스)→ 기상대[6인승 짚(20분)]→ 천문동(도보)→ 천지조망→
장백폭포→ 자연온천지대→ 중식→ 용정이동 중 일송정, 해란 강, 용정중학교(차창관광, 약 3.5h)→
연길이동(약 1h)→ 호텔
●3일: 공항이동→ BX332(에어부산)→ [11:45] 연길출발→ [15:35] 부산도착
※일기계산법: 이번에 백두산의 일기는 어떨 가? 하는 물음에 어릴 적 책에서 본 것이 생각났다.
봄의 속도는 수평으로는 직선 40㎞ 마다 북쪽으로 하루 차이가 나고 높이는 표고 50m 마다 하루 차이가
난다고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이 계산이 전혀 맞지 않아 더워서 고생을 했다.
[팀 구성]
이번도 아주 적은 10명이 한 팀이라 아주 좋았는데 이번 여행은 처음인 것이 많은 여행으로 첫 번째가
슬프게도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남자가 1명 더 많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울산사람이 가장 많은 7명으로 5명은 같은 마을에 사는 부부2팀과 처제 한 사람이고, 나머지
2명은 손녀와 나 이며 나머지 3명은 부산 아저씨들로 서로 친구사이이다.
크게 3분류가 모였기에 단합도 잘 되고,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배려하고, 즐겁게 잘 보냈으며, 여행의
3가지 복 중에 이번이 가장 좋은 셈이었고, 날씨 또한 좋아서 2가지 복을 누렸다.
남은 하나는 가이드인데 이 분은 첫 인상과 달리 여행자를 기분 나쁘게 해서 강탈해가는 스타일이 아니고,
여행자를 감복시켜 실익을 챙기는 스타일이이서 3복이 다 좋은 편이었다.
<여행지도>
[백두산 여행의 목적]
이번 여행은 걱정과 설 램이 컸던 것은 11살 밖에 안 되는 큰손녀와 둘이 가는 여행이고, 손녀의 멀미 때문에
더 걱정이 많았으며, 이 특별한 여행을 가게 된 것은 손녀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다.
인생은 태어나 두 번 죽는다고 하는데 하나는 생물학적 죽음으로 심장이 멎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지는 것을 말한다.
요사이 유머에 ‘사람은 죽어서 돈을 남긴다.’라는 것이 있는데 유명한 사람은 죽어서 돈에 얼굴이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이들은 특수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려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죽음을 좀 더 길게 하고 싶어 그러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야 이름도 남길 수 없으니 가장 오래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손녀이다.
그런 손녀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게 하는 것이 처음으로 하는 세계여행이 아닐까? 생각했고, 또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생각날 수 있는 것이 백두산이라고 인간적인 계산을 했다.
덤으로 손녀가 커서 선구자나 눈물 젖은 두만강의 노래를 들으면 생각날 것이고, 이런 것들이 힘든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여행을 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여행이지만 애국가의 백두산, 선구자의 지명들,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윤동주의 시들,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시그널 뮤직 ‘눈물 젖은 두만강’ 등 참 보고 싶었던 것들이 많은 여행이다.
<백두산에서 손녀와 손녀 바보>
[1일] 15년 4월 27일 월요일
●일정: 김해→ BX331→ [09:00] 김해 출발(3h)→ [10:50] 연길도착→ 도문이동(50분)[1. 국경지대 조망
2. 강변공원 관광]→ 이도백하 이동(약200km 4.5h)→석식→ 군안호텔(주점)
[만원춘(滿圓春) 식당으로 향하면서]
김해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뜨고 2시간 20분 후 우리 귀에 익숙한 옌볜 또는 연길이라는 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를 만나 차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좌석이 3배열로 고속버스와 같이 넓고 편안했다.
여행 중에 이렇게 좋은 차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지만 사진 찍는데 매우 중요한 유리창은 여전히 더러워
선명한 사진을 얻는 것은 포기 했으며, 좀 이르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연길 시내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면서 들은 이야기는 1952년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형성되었으며, 536만 명의 해외에 있는
우리 민족 중에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이곳으로 약 80만 명이 산다고 한다.
자치구는 6개 도시와 2개의 군이 있으며, 그 중 연길이 중심 도시이고, 화룡 도시는 1920년 10월 21~27일에
있었던 김좌진장군이 이끌었던 청산리 청산리전투는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장소라고 한다.
연길 중심에 있는 진달래 광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웨딩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며, 진달래 축제가
있는 장소로 커다란 진달래 조형물도 보였으나 사진에 담기 전에 지나갔다.
또 용정이라는 도시는 박경리의 토지 5부작에서 제 2부를 시작하는 곳이 간도 용정으로 이곳에서 최서희와
김길상이 결혼하고 아들 둘을 낳은 곳이라고 한다.
<비행기에서 본 연길 시>
이곳은 역사적으로 부여와 고구려를 지나 발해가 AD698년 지금의 연변조선자치구 길림성 돈화시(돈화성)
부근 동모산(육정산)에서 개국을 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변을 말할 때 우리 넋과 얼이 가장 많이 스며든 땅이라고 하며, 가이드 없이도 여행이 가능한
곳이기도 한 것은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어 있고, 자치구 행정장관도 조선 사람이라고 한다,
연길시장도 조선족 사람이며, 조선족자치구이라 간판은 한글로 쓰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기에 한글을 먼저
쓰고, 한문과 영어 등을 표기하여 낯설지가 않는 동네이며, 중국에서도 깨끗한 동네라고 한다.
더 신기한 것은 한국지명이 먼저 들어 간 간판이 많았으며, 이런 간판은 백두산 가는 길에 있는 동네마다
볼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 전국씨름대회 때 이곳에서 장사가 된 사람을 연변장사라고 했다고 한다.
위도가 41도 쯤 되는 연길 시는 부산보다 1달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요 며칠간 온도가 30℃ 넘어
엄청 높다고 했으며, 내일 갈 백두산은 남한에 있는 산과 다르다고 한다.
그러기에 등산을 많이 했더라도 가이드 말을 따라 주면 낭패가 없다고 하며, 많은 기대를 가지고 오지만
지금은 얼어 있어 물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버스터미널을 중심버스역이라고 쓰여 있는 곳도 지나고, 씨름대회 때마다 한국에서 온 선수들이 머물렀다는
호텔도 지나갔고, 연길예술의전당도 지나갔는데 이곳에서는 송대관과 태진아도 공연했다고 한다.
이 전당에서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도 2번이나 공연하여 감명 받았다고 하며, 초창기는 현인과 현철,
주현미, 최진희, 걸 그룹 2002년도엔 샤크라(Chakra)라는 걸 그룹도 왔다고 한다.
연변 주위 인구는 200만 명, 연결 시 53만 명, 한국에 체류 중인 사람은 불법 체류자를 빼고 37만, 일본에 체류
하는 사람은 6만, 미국에도 연결 시 행사장에 모인 사람만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구가 빠져 나가 1952년 당시 90% 이었으나 지금은 38%로 줄었다고 하며, 오늘 점심은 원탁인데
변소에 휴지가 없으니 꼭 챙기라는 주의와 함께 초등학교 옆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연길예술의전당>
[연길 시가지들의 이야기]
도문까지 27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소요시간은 1시간 15분 정도가 소용된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관광시간까지 포함한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백하로 바로 이동하면 심심하기에 용정으로 들어가 일정 중에 나와 있는 보이 차, 죽탄, 곰 농장의 쇼핑
중에 하나인 곰 농장을 들리겠다고 하며, 질이 좋다는 참깨를 추천해 준다.
연길시내를 지나며, 1,200개의 병실을 가진 가장 큰 병원은 심장이식 수술도 가능하다고 했고, 오른편에는
연변지역의 라디오와 TV를 방영하는 방송국으로 아나운서와 앵커의 표준말은 평양말씨였다고 한다.
1997년 1월1일부터는 서울 말씨로 표준어가 바뀌었다고 하며,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이 이곳에 있는데 저녁에
명동에 전시된 패션은 다음날 오전이 다 가기 전에 연길에도 쇼윈도에 전시된다고 한다.
매일 아시아나와 코리아나 항공이 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하며, 32년 전 1983년도 연길에서 맨 처음 지어진
새마을 단지인데 헐어내고 지금 다시 재건축을 하고 있는 곳이란다.
이 아파트를 헐 때 말이 많았다고 하는데 중국은 농성이 없지만 협상은 할 수 있어서 처음엔 얼마를 더 줄
테니 이웃집에게 말하지 말라고 협상한다고 한다.
계속 거부하면 대문 앞에 비워줄 날자와 함께 철거 비용은 자부담하라고 적힌 빨간 종이의 경고문이 붙은
다음엔 그 시간이 되면 사람만 들어내 놓고 불도저로 사정없이 밀어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철거민에겐 ‘빨리 우리를 법원에 신고하십시오. 그리고 법으로 해결합시다.’라고 말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라서 철거민이 이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길에서 가장 큰 현대병원>
중국 땅의 소유는 국가이기에 모두 임대해서 사용하며, 산은 50년 논, 밭, 대지는 30년이지만 만약에 산을
임대해서 나무도 심고 집도 지어 부가가치가 상승하면 재임대할 때는 가족이 우선권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100년이라는 시간은 실질적으로 개인소유나 마찬가지라서 땅만 많이 있으면 굳이 외국까지 가서
돈 벌 필요가 없다고 하며, 세금도 내지 않지만 오히려 장려금을 받는다고 한다.
연길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 도소매 시장을 지나면서 3년 전에 경남도원들이 와서 이 공판장이 활성화 되면
경남도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이 이곳에서도 경매가 될 수 있도록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느닷없는 급정거로 잠시 놀랐으며, 다시 안전벨트를 매고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중국영토는 960만㎢로
남한의 98배에 해당한다고 하며, 연변은 42,700㎢로 남한의 절반 정도가 된다고 한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사는 다민족 국가이며, 장춘이 유명해 진 것은 이곳에 있던 일본 사관학교를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가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춘에서 두만강 동편의 훈춘 시까지 484km의 고속철도가 금년 10월1일에 준공예정인데 이것은 장춘, 길림,
도문을 하나로 하는 경제그린벨트를 조성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한다.
<연길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 도소매 시장>
[보기 힘들다는 백두산(白頭山)]
가이드가 행사하면서 백두산에 가장 많이 온 사람은 7번으로 그분은 백두산을 보려고 노랑풍선을 통해 혼자
대련을 통해 온 사람인데 아쉽게도 그날도 천지를 못 보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과 천지를 보러왔다가 못 보는 것을 안타가워 하자 그분이 마이크를 잡고 나는 7번이나
찾아왔어도 보지 못했는데 여러분은 한 번인데 너무 아쉬워 하지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뒤에 있던 한분이 ‘저 양반 때문에 못 보았다.’라고 말해서 웃었는데 글쎄? 유머인지 사실인지 좀 헷갈리네...
백두산은 비가 오면 안개 때문에 못 보고, 또 일기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으면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지만 보통 30분의 시간만 주기에 못 본다고 하며, 다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지금은 비가 없는 계절이고, 추위만 견딜 수 있도록 옷을 입고 오면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서
모두들 박수를 보냈으며, 자기 별명이 ‘본다 김’라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말은 어렵다고 하지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백두산을 본 것이 중요한 아니라 누구하고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난 정말로 소중한 사람과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로 기를 받았기에 천지가 보이는 것이니 2박3일 동안이라도 한 가족처럼 서로 잘 어울러 지내라는
말대로 우리는 가장 짧은 가족을 구성한 셈이 되었으며, 우리 팀장 사모님의 헌신이 컸다.
<우리집 보배와 함께 본 천지>
[도문(圖們) 이야기]
도문의 옛 이름은 회막동으로 장춘, 길림으로 통하는 관문인데 강 건너가 함경북도 남양시라고 하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물류의 60%로는 단동세관이며, 도문은 작은 세관이라고 한다.
두만강에는 북한과 통하는 다리는 6개이고, 철교는 하나이며, 압록강은 다리가 4개 철교가 2개인데 압록강은
고구려역사와 함께 관광 할 만하다고 꼭 해 보라고 하며, 북한 용어들을 알려 준다.
노크는 손기척, 도넛은 가락지 빵, 메시지는 통고문, 핸드폰은 손 전화, 장갑은 손싸개, 양발은 발싸개, 등불은
불알, 형광등은 긴 불알, 샹들리에는 큰 불알, 1개 가로등은 외 불알, 2개면 짝 불알이라고 한다.
이것의 유래는 발음이 어눌한 캐나다 신부 때문이라고 하는데 부활절 전날 신부님은 ‘등 아래 앉아 있는
성도들이여 내일은 부활절이니 한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세요.’라고 광고를 했다고 한다.
헌데 캐나다신부는 ‘불알 아래 앉아 있는 성도들이여 내일은 불알절이니 한분도 바지 없이 참석해 주세요.’라고
발음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웃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웃어 주어야 예의지....
<1. 두만강 철교 2. 중국 측 철교 입구>
[도문 시(圖們 市) 경제개발구]
앞에 보이는 곳이 도문으로 옆에는 산업단지인 ‘도문 시 경제개발구’가 들어왔고, 이곳에서는 북한 인력이
많이 사용 있는데 지배인이 있는 기숙사에서 단체 생활을 한다고 한다.
생필품을 사려 가는데도 3~4명이 같이 가며, 절대로 단독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되어있고, 퇴근 후에는
밖에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한다.
남녀가 다 있으며, 연길 시의 규모가 큰 식당에도 북한 종업원들을 사용하는데 임금은 한화 60만 원선이라고
하며, 개성공단의 한화12(110달러)만 원은 너무 적다고 했다.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은 압록강 하구에 있는 황금평이라는 섬인데 4년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너무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어 10년이 지나봐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도문 시 경제개발구>
[탈북자 이야기]
이제는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출연자들은‘ 새터민’이라고 부르는 탈북자들인데 이들은 남쪽에 2만
4천 명 정도가 있다고 하며, 이들을 수용되었던 수용소가 왼편에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운영하는 수용소는 철조망으로 담장을 한 3층의 흰 건물은 관리 동이고, 뒤에 있는 파란색 건물이
탈북자들을 수감하는 건물이며, 100명이 차면 북한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가이드가 지난 26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마산에 있는 경남대학교 관광객 17명을 데리고 국경지대라
들어 갈 수 없는 곳을 북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갔다고 한다.
두만강 상류 강 건너에 있는 남평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왔는데 2틀 뒤에 난 신문에는 그날 남평의 북한
군인이 강을 넘어와 4명을 사살하고 돌아갔다는 뉴스를 보고 아찔했다고 한다.
<1. 관리동 건물 2. 탈북자 수감건물>
[집, 쌀, 강냉이, 진달래 이야기]
집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이곳의 집들은 모델이 한국인 것은 2002년에 한나라당 총재에서 물러나 있을 때
북경에서 도지사 급을 배출하는 중앙당교 세미나에 박근혜씨를 초청했다고 한다.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중국사회주의 새 농촌건설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강연한 것이 그들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며, 이곳에 사는 38% 조선족의 집을 알아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지붕 양옆이 팔(八)간 모양으로 만들었으면 조선족의 집이고, 삼각형(Δ)이면 중국인의 집이라고 하며, 이 넓은
들은 논이 아니고, 강냉이 밭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말한다고 한다.
용정의 평강입쌀과 흑용 강의 오산입쌀이 질이 가장 좋아서 김치만 있어도 먹을 수 있는 쌀이지만 수확량이
적어 여기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다 북경으로 가져간다고 하며, 이곳은 1모작만 가능하다고 한다.
강냉이는 멕시코가 원산지이지만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은 미국인데 부가가치만 따져서 콩이 강냉이 보다
좋아서 모두가 콩만 심으면 강냉이는 미국에서 비싼 돈 주고 사와야 한다.
그래서 강냉이를 심는 사람에게는 1마지기(667㎡, 약 200평) 당 한화로 3만원의 보조금을 준다고 하며,
이 강냉이는 주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사료용이며, 일부는 북한으로 간다고 한다.
강냉이 대는 전에는 불태웠으나 지금은 모두 수거하여 발효시켜 에칠알콜(에탄올)을 만들어 휘발유 대신
연료로 사용하기에 동북산전에는 강냉이를 심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특징은 진달래가 많다는 것과 마을마다 열사 탑이 있어 중국 어디서나 진달래와 열사 탑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면 연변이라고 알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1. 용정의 평강 벌 2. 용정평강 벌 마을 3. 조선족 지붕 4. 한족 지붕>
[두만 강 어원, 소수민족의 혜택]
겨울온도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37℃까지 내려가 오줌이 얼어서 방망이로 부셔가며, 눴다고
하나 지금은 –23℃ 정도 내려가고, 중국에서 가장 추운 곳은 흑룡강 성의 막하로 –56℃까지 내려간다.
두만 강(豆滿江)의 어원은 인터넷에서 찾아 알고 갔지만 가이드가 이야기한 도문 강(土門江)의 어원이 두만
강과 같은 줄 생각했는데 전혀 달라 좀 의아했다.
도문은 만주어로 여러 갈래의 강이 합쳐졌다는 뜻이고, 우리나라 옛말은 회막동으로 옆에 흐르는 강이
두만 강 지류인 부루하통 하(河, 강)이라고 하는데 물고기조차 살기 힘들만큼 황토물이다.
연결 시 중앙을 흐르는 부루하통 하(강)는 용정의 해란 강과 합류해서 흐르다가 가야 하가 나오고, 다음에
두만 강으로 합류한다고 하며, 소수의 조선족이 불이익이 없냐는 질문에 전혀 없다고 한다.
한족은 한명의 자녀밖에 낳지 못하지만 소수민족은 2명까지 낳을 수 있으며, 대학입학 시 가산점을 받아
유리하고, 지방변두리는 지방정책이라고 하여 월급에 보조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왜? 우리가 너희 말을 들어? 라고 반항하기 때문인데 한족은 예로부터 변두리를 얕잡아
보고 모두를 오랑캐라고 했는데 우리는 동쪽 오랑캐라는 뜻으로 동이(東夷) 족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大+弓+人 즉 ‘큰 활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랑캐라고 부르면서 무서워했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죽이다’, ‘멸하다’라는 뜻도 있으니 좋은 점만 찾아 낸 것 같다.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의 유래와 김삿갓 북한 방랑기]
노래 가사는 두만 강 푸른 물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황토색이 된 이유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무산철광
(무산군)에서 철분을 세척한 물이 오염시켜서 검은 두만 강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연어들이 두만 강을 따라 올라왔으나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며, 유럽은 강물의 가장 깊은
곳을 경계로 삼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은 강자체가 국경선이라고 한다.
두만강에서 유람선을 타면 북한쪽으로 왕래를 하기 때문에 때로는 북한 군인들이 나와서 돈과 담배를 달라고
해도 절대로 지껄이지 말고 못 들은 척하고, 북한 군인들을 향해 사진을 찍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1935년 '예원좌'이란 이름을 가진 유랑극단이 도문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독립군 남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왔으나 남편은 일본군에 죽고 없는 여인은 갈 곳이 없어 '도문 여인숙'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연을 들은 유랑극단의 김용호씨가 그 자리에서 작사자를 했으며, 이시우가 작곡하고, 김정구씨가 이곳
공연에서 처음 부른 것이 지금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는 1964년 5월 18일부터 방송된 반공극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주제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낮 12시
55분부터 5분간 매일 방송했으나 인기가 좋아지자 2년 뒤부터는 저녁 9시 55분에 본 방송을 했다.
다음날 낮 12시 55분에 재방송을 냈으며, 마지막은 반드시 4행의 풍자시를 낭송했다.
<1. 도문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부루하통 강 2. 인도교가 보이는 황토색 두만강>
[북한의 민둥산과 도문 시(圖們 市)]
앞에 보이는 민둥산이 북한 땅이라고 하며, 왜? 민둥산인지를 설명해 주었는데 첫 번째는 땔 나무가 없어서
그랬다고 하고, 두 번째는 도강이나 탈북을 감시하기 위해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맞을 것이라고 했으나 감시용이라면 초소도 없는 산꼭대기까지 빨갛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8부 능선까지 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마가 지면 다 씻겨 내려와서 수확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이드는 왜? 농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얼마나 답답하면 알면서도 그 짓을 하겠는가?
식량이 얼마나 부족하면 그런 짓을 하는지 짐작이 되어 연민의 정까지 느끼게 되었는데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지만 조국도 잘 만나야 하고, 아버지도 잘 만나야 하는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왼편에 보이는 도문 시청사의 크기가 가이드의 표현으로 어머 어마하다고 했으며, 1945년도 광복이 될
때도 일본 관동군하고, 러시아 홍군하고 큰 전투가 벌어진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한국의 협찬으로 곳곳에 세웠다는 그 교회가 이곳에 있었으며, 출발한지 55분 만에 강변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연길에서 이곳까지 27km라고 한 것은 아마도 착각한 것 아닌지?
오는 길도 좋았기에 온 시간으로 추측해 보면 아마도 40km는 되어보였으며, 차 안에서는 에어컨을 틀어서
잘 몰랐으나 내리니 울산보다 더 더웠는데 한 여름의 날씨이다.
울산서 손녀와 검색했을 때 31℃라고 했으나 믿지 않고, 옷을 더 입고 왔는데 손녀가 예보를 믿지 않아서
고생하게 됐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다 되 줄은 몰랐다.
<1. 진달래가 만발한 북한의 민둥산과 초소 2. 도문 시청 3. 유리창에 십자가가 있는 교회>
[강변공원과 두만강의 유람선]
우리는 유람선을 타기 위해 바로 선착장으로 향했으며, 북한군인들 보고는 사진 찍지 마라는 선장의 부탁과
함께 대나무를 엮어 만든 유람선은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향했다.
우리의 바람은 북한 군인들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손녀에게 마음대로 찍으라고 따로 카메라를
주었더니 김해공항부터 찍기 시작했는데 주의를 해야 하는 이곳에서도 열심히 찍었다.
상황을 봐 가면서 말리기로 하고 그냥 두었으며, 남자일행 중에 술 못 먹는 나만 빼고 북어를 안주 삼아
술들을 마셨는데 이곳에 웬 북어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주위경치에 잠시 잊었다.
앞에 보이는 2개의 다리 중에 가까이 있는 것이 차들이 다니는 다리를 지나 멀리 보이는 철교까지는 가지
않고 중간에서 U턴하여 다시 내려오는 것이 유람선의 코스이다.
멀리서 북한 초소병이 보였는데 너무 어리고 왜소하게 보였으며, 밭에서 일하는 여인한 사람과 북한초소를
본 것이 전부이지만 이만갑을 보면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두만강 국경을 구경한 것이다.
검은 부분이 보이면 초소병들이 숨어 있는 지하초소인지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으며, 혹시 운 좋으면 빨래
나온 여인도 볼 수 있을 까? 했지만 빨래터도 보이지 안았다.
<1. 두만강의 유람선 2. 북한 초소와 경비병 3. 우리를 바라보는 경비병>
이곳은 물이 깊고 세차서 탈북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스마트폰에 넣어간 ‘눈물 젖은 두만강’을
틀었으나 폰의 음량도 너무 적은데다 유람선의 엔진소음으로 잘 들리지 않았다.
유람선에서 내릴 때 남은 안주를 나와 손녀에게 주어 맛을 보게 되었는데 상당히 맛이 있으며, 이곳에
북어포가 많은 것은 북한에서 잡힌 명태가 이곳에 수입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강 건너 산 위의 도로엔 하얀 대형트럭이 힘겹게 오르고 있었으며, 공원에는 날이 더워서인지 많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늘 아래에서 우리나라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있었다.
처음으로 일행 전부가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요사이는 여행 중에 단체 사진을 잘 찍지도 안하지만
한명도 안 빠지는 것은 드문 일인데 이번은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2일 동안에 무려 5번이나 찍으며, 헤어지는 날까지 찍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터넷에서 본 장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변소만 잠깐 들리고 바로 승차했는데 방금 만난 다른
팀은 10명이 넘어도 12인승을 타지만 우린 10명뿐이지만 37인승을 탄다고 자랑스럽게 가이드가 말했다.
세관으로 이동 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4년 전에 도문 시는 북한과 합작해서 1일 공장시장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하며, 강 건너 보이는 남양주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한다.
3분 정도 이동하여 세관에 도착한 후 사진 찍을 시간을 주었는데 인터넷에서 본 장소대부분 여기에 있었으며,
북한에서 입국을 기다리는 대형트럭 2대와 중장비 1대가 다리 위에서 대기 중이었다.
탈북자들을 막기 위해 쳐진 철조망은 5m 정도의 간격을 두고 한 번 더 쳐져있었고, 유람선에서 그렇게 애쓰며,
찍으려 했던 북한 마을이 잘 보였는데 아파트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민들은 보이지 안했다.
뒷산의 진달래는 산꼭대기까지 붉게 피었으며, 시인이 못 된 것이 아쉬웠으며, 세관 주위에도 이제 막 도착한
봄이 여름 날씨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올해는 2번의 봄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강변공원: 이 공원은 도문(투먼)시 남쪽에 있으며, 도문강과 두만강 사이에는 섬이 있고, 섬은 북한 땅
도문이며, 두만강 건너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으로 중국의 도문 강 쪽에서 북한을 조망한다.
<1. 강변공원과 시민 2. 도문시소년궁(우편 건물)과 강변공원광장 >
[북한 이야기]
두만강 국경조망을 마치고, 오면서 말 한대로 용정의 곰 농장을 향해 출발했으며, 북한의 종성까지는 국경을
따라 가기 때문에 북한을 좀 더 볼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철조망을 따라가면서 북한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철조망은 두만강 하류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하며, 가장 많이 탈북 하는 장소는 강 상류인 회령과 청진이라고 했다.
청진은 동해의 항구인데 두만강 상류라는 것이 좀 의아하여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으며, 북한에서도 관광을
오는지 물었는데 관광은 없지만 무역이나 행사 때문에 오는 사람이 관광을 겸하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요사이는 중국관광객이 두만강상류를 통해 자가용이나 자전거를 이용해서 칠보산(명천군 동해 쪽)이나 삼지연을
통해 백두산을 가는 관광코스가 개발되었으나 지정된 코스만 가야지 절대로 이탈하면 안 된다고 한다.
유람선에서 보았던 북한으로 들어가는 철교 앞에 있는 철도건널목을 지나갔는데 하루에 한번 정도 운행되는데
1, 3, 5, 7, 9는 중국 쪽에서 북한으로 가고 짝수 때는 북한에서 중국 쪽으로 온다고 한다.
강 쪽의 건물 대부분은 북한군 초소이고, 뒤 건물은 민간이 사는 곳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대형건물은 공공의
건물 같아 보였으며, 하나 같이 깨끗했지만 차도 없고, 사람도 없어 무섭도록 조용했다.
그래도 북한 땅을 이렇게 오래 동안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으며, 봄이 온 북녘 땅에도 꽃은 만발했는데
동네도, 도로변에도, 가수원에도 피였고, 산꼭대기까지 진달래가 피어 풍경은 낭만적이었다.
민간인들의 지붕도 지중해 분위기가 느껴지는 분홍색이 많았으나 산에는 메아리도 살 수 없는 민둥산으로
나무 한그루도 보이지 않았으나 중국 측은 나무 때문에 사진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옛날 북한 군인들은 ‘담배주세요. 달러 주세요.’ 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져 그런 일이 없다고 하고, 북한의
집단농장은 부지런한 사람은 게으르게 되고, 게으른 사람은 더욱 게으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것과 내 것이 다르기 때문이며, 내 것은 밤 새워서라도 하지만 우리 것은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고 미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유람선을 타기 전 2. 유람선에서 내린 고마운 우리일행들 3. 도문세관>
[북한의 강양동 기차역]
이 역은 북한으로 가는 첫 역으로 청산리 전투 때 홍범도장군이 이곳에서 출발한 곳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산에 많은 구호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흰 구조물과 건물 벽에 적힌 구호들이 보였다.
한 곳에 있는 ‘3대 혁명의 기치 따라 힘차게 앞으로’라는 구호는 육안으로 읽을 수 있었으며, 다른 곳은
시야를 방해하는 나무에 가려 잘 볼 수가 없었는데 계속되는 나무들은 밉기까지 했다.
기차역사 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멀리서 보이지만 카메라에는 나무가 가려 김정일 사진
일부만 보였으며, 강가엔 남자한 명이 나무아래서 무엇을 하는 것도 보였다.
이곳에 내려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었는데 하필이면 이때 카메라 배터리가 다 되었으나 다행이도 손녀의
사진기로 북한 풍경을 담을 수 있었는데 시내 같은 두만강 건너엔 철조망과 초소가 보였다.
역 주위에는 깨끗한 기와집의 지붕은 분홍색과 잿빛이었고, 봄을 맞은 동네는 벚꽃 같은 흰 꽃들이 활짝
피어 통토의 땅에도 봄은 어김없이 오며,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를 생각나게 했다.
마산에서 태어나 양산에서 자란 이원수씨가 작사했고, 경기 화성에서 태어난 홍난파씨가 작곡한 ‘고향의
봄‘은 벚꽃에 빼앗긴 남쪽보다는 지금은 이곳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동토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김삿갓 북한 방랑기’인 4행의 풍자시를 써보려 했으나 실력이 안 따라 준다.
<1. 두만강 건너 북한 마을 2. 강양동 마을 3. 북한의 선전구호 4. 강양동 기차역의 초상화>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의 어원]
두만강의 어원은 2가지가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여진어(女眞語)로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뜻의
도문색금(圖們色禽)에서 색금을 떼어내고 도문이라는 글자만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길이가 803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압록강 이름도 새와 관련이 있는데 강물색깔이 오리머리
같이 푸르다고 ‘鴨(오리 압)綠(초록빛 록)’ 강이라고 붙여진 이름이고, 2번째로 긴 강은 낙동강으로 525㎞이다.
두만의 다른 하나는 동문유해(同文類解)에서는 원나라 때 지방 관제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라는 관직명이
있었는데 여진어로 만호를 두맨이라 발음하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두만강(豆滿江)의 국경 역사]
이 강은 우리는 두만강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투먼장(圖們江, 도문강)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긴 강으로 길이는 521㎞이며,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백두산의 동남쪽 대연지봉(2,360m) 동쪽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石乙水)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함경북도의
최북단에서 중국 간도(間島) 방면에서 흘러오는 해란강(海蘭江)을 합류한 뒤 유로는 급전하여 남동류한다.
두만강은 중국,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어 매우 중요한데 고려시대까지는 여진족이 살던 곳이어서 그들의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지역은 전주에서 쫓겨 온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이 살던 땅이다.
조선의 발상지로서 중시되었으며, 세종 1434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부령, 회령, 종성, 경흥, 온성,
경원 등의 6진을 새로이 설치했고, 1587년 여진족이 녹둔도(鹿屯島)를 침입하였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패하여 조산만호(造山萬戶)의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이듬해엔 여진족을 격퇴하였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자기 조상의 발상지를 보호한다고 하며, 도문강(圖門江) 이북 지역을
봉금지구(封禁地區)로 만들었으나 조선농민들이 경작지를 찾아 다수 이주하였다.
이주민에 의해 양국의 국경분쟁으로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우고 토문강을
국경으로 삼았으나 1856년 애로호사건과 제2의 아편전쟁에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하였다.
1860년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러시아는 우수리 강 주위의 연해주 700리 땅을 중국에게
할양받아 두만강 하류 16.5㎞를 우리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와는 협의도 없이 중국과 러시아의 북방 전략 요새지인 녹둔도를 상실하게 되었으나 다시 찾아할
땅이며, 고종 6~7년(1869~70년)에 관북지방의 대흉작으로 강을 넘는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1881년 청나라가 길림성 지역을 개방했고, 20세기 일제 학정을 피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수많은 우리민족들
이강을 건너가 지금의 조선족자치구가 되었다.
강 유역은 미개발한 무진장한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은 잠재력을 가진 미래의 땅이라고 했지만 민둥산을 보면
그 말을 믿기가 좀 어려웠다.
<1. 두만강 상류 쪽 인도교 2. 철교 3. 두만강 하류 쪽>
(연해주(沿海州) 역사)
참고로 중국과 러사아 국경의 역사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던 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프리모르스키 주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으로 이를 한자로 훈차하면 연해주인데 이 지역은 698~
926년까지 228년에 걸쳐 존속했던 대한민국 국가였던 발해(渤海)의 영토이다.
1685년 러시아가 만든 알바진을 청의 강희제 공격으로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처음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러시아가
항복하여 진지만 파괴하고 러시아 군사들은 돌려보내 주고 철수했으나 1686년 러시아가 다시진지를 구축하였다.
청의 공격으로 150명만 남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대제)는 고자세를 굽히고 강화를 맺어 국경선을 정하자는
국서를 보냈으며, 강희제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9월 정전을 명하였다.
그러는 사이 강력해진 몽골군에 의해 사신의 길이 막혔고, 몽골군은 러시아와 결탁하여 베이징이 위태롭게
되자 급해진 청은 1689년 러시아와 강화 교섭을 진행한 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패전국이 아닌 청과 대등한 지위에서 체결한 최초의 조약으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흑룡강의 외지류(外支流)인 고르비차 강과 외흥안령(外興安嶺)을 양국 간의 국경선으로 한다.
2. 월경자(越境者)의 인도와 처벌 문제
3. 양국 민간인의 자유 교역 허용, 1856년 러시아는 크림 전쟁(1853-56) 패배 한 후 2차 영토 확장을 추진하여
1858년 힘이 약해진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아이훈 조약으로 헤이롱(흑룡)장 이북의 와싱안링 산맥과 아무르강
사이의 땅 60만㎢의 땅을 할양받았다.
1860년 2차 아편전쟁에 진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 연해주와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 등 40만
㎢를 할양받아 중국은 동해와 단절되었고 1861년 청과 러시아 국경을 표시하는 경계비 20개를 세우기로 했다.
청나라 관리들이 귀찮아 아무데나 두었으며, 그것도 8개만 세워졌는데 이것을 바루기 위해 1886년 청은
러시아와 담판을 하여 훈춘은 동해로 나가는 출해권도 얻어냈고, 지금의 자리에 토자패(土字牌)를 세웠다.
1938년 토자패 근처 장고봉에서 벌어진 일본과 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출해권을 차단하여 지금까지 동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있으며, 1685~1861년 기간 중에 이 지역에 거주했던 코자크 병력은 14,000 명,
러시아 군 병력은 2,500 명이었다.
1858년에 크하바로브스크, 1861년 프리모르스키와 아무르가 지역(oblast)으로 승격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1860년 지역으로 승격되었고, 1882년 우크라이나인들한테 이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정착민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었는데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에서 뱃길로 이주한 정착민들도 있으며, 1897년 무렵
그린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31만 명을 넘었고, 1920년 이 지역 대대수를 차지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이 그린
우크라이나라고 불리는 나라로 독립하려고 시도했으나 1922년 그린 우크라이나 해체로 무산되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은 주로 강으로 이루어졌는데 맨 서쪽 작은 지도의 1경계(검은 선)는 아르군 강(Ergun
River)이고, 이 강 동쪽으로 흐르면서 러시아의 살카 강과 만나 2 경계(분홍 선)인 아무르 강이다.
이 강은 하바로프스크까지 국경을 이루며, 이곳에서 우수리 강과 만나 3 경계(파랑 선)가 되며, 우수리 강은
송화 강(Songacha River, 쑹아차허)괴 만나 4경계가 되고, 마지막 남쪽인 5경계(붉은 선)를 이루는 것이
후부투 강(Hubutu River)이다.
처음은 강이 국경이었지만 강이 흐름이 바뀌면서 두 나라 간에 문제가 되었으나 지금은 강을 국경으로 하지
않으나 국경 모양이 강의 모양과 비슷하다.
<1. 중국, 한국, 러시아 국경 지대 2. 동쪽 끝이 프리모르스키(연해, 沿海) 주(州) 이다.>
[용정의 삼일절과 모아 산]
북한 땅은 종성 시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매력 두만강에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자’라는 현수막을 끝으로
두만강 구경도 끝나고 이젠 본격적으로 용정으로 향하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었다.
가이드부인이 은행원인데 이곳에서는 좋은 직업이 못되는 것은 보험회사처럼 실적에 따라 월급이 나오기
때문인데 지금은 카드를 많이 권한다고 하며, 멀리 180m의 기상관측 레이더 탑이 보였다.
이 탑은 용정 어디에서나 보이는 모아 산(517m)에 건설 중이며, 연길시와 용정시의 경계에 있다고 하는데
이 탑이 보이면 용정시로 인구 9만 중에 조선족은 5만 명이고, 연길에서 27km 떨어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은 이곳에서는 3월 13일에 일어나 ‘삼일삼일절’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더디어 해란 강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선구자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일송정에서 함께 다루기로 한다.
용정의 감옥을 지나가면서 5년 이상 형을 받으면 저곳에 수감되고, 5년 이하는 교도소에 수감된다고 하며,
왼편엔 두만 강에서 먹었던 명태덕장도 보였으며, 명태는 가까운 북한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수온 때문에 한국에서는 살아 있는 명태를 잡아오면 수십만 원 준다고 해도 잡히지 않을 만큼 희귀한
어종이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이곳에서 수입해서 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곰들의 낙원에 도착했다.
<1. 나무사이로 보이는 종성 시 2. 기상관측레이더 탑 3. 용정시질병예방통제센터>
[곰 농장]
아세아 흑곰은 가슴에 흰색의 반달모양의 무늬가 있어 일명 반달곰이라고도 하는데 키는 2m 정조이고,
무게는 200kg 미만으로 2km 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
또 청각도 예민하여 200m 정도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시각은 형편없어 ‘눈먼 곰’이라는 별명도
있으나 수영과 나무 타기를 잘하는 곰은 천연기념물 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국의 국가중점보호등급 2급으로 지정되어 있고, 이 농장은 1,600마리의 곰을 사육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분만한 곰을 2~3년 키워서 백두산에 방목했다가 2~3년 뒤에 다시 잡아 온다고 한다.
곰은 큰 놈과 중간치 그리고 아기 곰으로 나누어 사육하고, 털이 빛이 나도록 기름진 것이 기억에 남았으며,
'곰 낙원'이라고 하지만 자유를 잃은 곰들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웅담으로 만든 상품을 선전하면서 쓸개즙으로 만든 술도 주었는데 일행이 술 한 병을 사서 조금은 위안이
되었고, 무안한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가이드의 ‘가자’는 그 한마디에 해방됐다.
<1. 공 농장 2.사진 찍으라고 포즈 취하는 모델 곰>
[용정의 만무과수원, 노래 번지 없는 주막]
곰 농장을 나와 이도백하로 향하면서 용정에 많이 있는 과수원과 나무에 대한이야기를 했으며, 과실나무
이름은 아무도 못 알아맞혔는데 사과배나무라고 히고, 용정의 특산물이라고 한다.
조선족 주덕해는 5그루에 사과와 배나무를 접목했으나 2그루만 살아남았으며, 1956년부터 조성된 과수원이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만무과수원이 되었다고 한다.
5월 5일 정도가 되면 몇 십리에 이르는 만무화원에 배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고 하며, 그리고 농촌에서 있었던
서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따뜻하게 덥힌 부삽을 닭장에 넣는다고 한다.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닭이 부삽 위에 옮겨 앉을 때 꺼내면 울지 않는다고 했고, 갑자기 용정에 있었던 중학교에
대한이야기를 했는데 중복을 피하기 위해 용정중학교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용정에서는 선구자나 눈물 젖은 두만강보다 더 유명한 노래는 ‘번지 없는 주막’이라고 해서 조금은 의아했는데
학교시절 합창하기 좋은 노래라 악을 쓰며, 불렀던 노래이라서 그 시절의 노래인줄 알았다.
이 노래는 독립군들이 직접 만들어 불렀던 노래라고 하며, 독립군의 접선장소가 주막이었고, 기약 없이 동료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서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처음엔 조선 사람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숨어서 노래했다고 하는데 가사에 나오는 울던 사람은 술 따라주는
여인이 아니라 독립군의 동료나 잃어버린 나라라고 한다.
지금과 같은 노래가 된 것은 작사한 박영호씨가 월북하여 금지곡이 될 뻔했으나 추미림씨가 다시 작사하였고,
이재호씨가 작곡한 것을 백년설이 불러 지금과 같은 노래가 되었다고 한다.
[번지 없는 주막] 추미림 작사, 이재호 작곡
1.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구려 능수버들 채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2. 아주까리 등잔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구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믿겠소 못믿겠소 울던 사람아
<1. 만무 과수원 2. 담장이 예쁜 동구 밖 과수원집 3. 만무과수원의 과일인 사과배>
[평강 벌 조선족의 이야기]
용정 시내를 벗어나면 왼편에 비암 산과 일송정이 멀리 보이는데 돌아올 때 잠시 멈추어서 사진 찍을 시간을
주겠다고 하면서 오늘은 그냥 통과를 하면서 우리 팀장에게 선구자 노래를 불어보라고 했다.
가사를 다 모를 것 같아 준비한 것을 드렸고, 같이 부르면 좋을 것 같았는데 혼자 부르니 힘들어 보였으며,
가사에 나오는 지명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함께 다루기로 한다.
우리민족만이 살고 동네로 연변에서 가장 비옥하다는 ‘칠십 리 평강 벌’인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이가 먹었던 쌀을 생산하는 ‘고량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이 없었던 황제는 기를 받기 위해 조선족 18살 미만의 처녀 20명을 선출하여 흰옷을 입히고,
상처 없이 완벽한 쌀만 하나하나 골라 1kg 씩 포장해서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
이 마을도 한국농촌 같이 청장년은 외국에 돈 벌러 나아가고, 노인들만 있다고 하며, 제일처음 외화벌이 시작은
1991년 동아건설이 수주한 리비아의 배수공사 현장으로 당시 받은 봉급이 260달러라고 한다.
같은 해 여자들이 처음 나아간 곳은 사이판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밟거나 다리미질을 했다고 하며, 남자들은
스페인의 어부로 나아갔고, 1993년부터는 젊은 사람들이 산업연수원생으로 처음 한국에 갔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 각국과 신장위구르까지 진출하면서 가족은 해체되고, 마을도 붕괴되어 가는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육의 붕괴로 면마다 있었던 학교가 폐교가 되고, 고등학교는 군이나 시에 가야 있다고 한다.
학교가 폐교되면 조선족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인데 지금 젊은 엄마들은 자녀가 중국인이 되어야 살기가 쉬울
것으로 생각해 중국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아예 중국학교에 보낸다고 한다.
대신 중국 사람들은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영어를 가르치고,
중학교가면 일어를 가르치고, 대학가면 불어나 스페인어를 가르쳐 5개국 언어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조선족 교육은 ‘고통과 고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이는 부모가 없어 고통이고, 부모는 외국에서 고생하기에
생긴 말로 지금의 조선 족 교육의 현주소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녀들이 외국으로 나아가 총각들은 결혼을 못하는데 한국은 동남아 여성을 데려 오지만 이곳은 여건이 안
되어 탈북여성과 결혼하지만 불행한 것은 국적이 없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결혼한 탈북여성들이 자녀와 가족을 버리고 한국으로 가버려 자녀들의 국적이 문제가 되고 있어 지금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 동네의 작은 꿈은 한식구가 같이 모여 식사 한번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는데 완성되면 2시간 만에 갈 수 있다고 하며, 앞으로는
고속철도 들어오고, 지금은 비행기도 들어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어머니가 부산 초량에 1년 있을 때 한국에 한 번 와 보았다고 하며, 3년간 진주에서 살았던 어머니는
지금도 참 좋았던 동네라고 자주 말씀하신다고 하며, 형은 나주 LG 냉장고공장에 있다고 한다.
<1. 평강 벌 2. 평강 벌 옆에 있는 예쁜 한족마을>
[이도백하로 가는 길에 있는 것들]
술 동네: 동네마다 특색을 설명했는데 38도의 술이 생산되는 술 동네로 중국 입맛에 맞도록 3개월마다 새로운
술이 출시되고, 술자리는 많으면 7차까지 가는데 7차는 병원의 링거이라고 한다.
작년에 먹은 술중 가장 높은 도수는 76도인데 도수가 높은 중국술을 물과 함께 마시면 머리가 깨진다고 하며,
대신 다 마신 후 따뜻한 녹차 한잔 마시면 좋다고 하고, 머리는 한국소주가 더 아프다고 한다.
중경현덕부: 이 땅은 우리나라의 역사로 볼 때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있었고, 우리 독립군이 활동하던
땅으로 698년 대조영 세운 발해는 초기도읍지 동모산이었다.
724년 제3대 문왕 대흠무 때 두 번째 도읍지가 이곳 ‘중경현덕부’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하차할 수 없다고
했으며, 고구려는 석성(石城)이나 발해는 토성(土城)으로 내성과 외성이 있다고 한다.
발해는 수도를 4번이나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14년 동안 있다가 755년 상경으로 이주했는데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이라 하고,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넓은 벌판에 2채의 관리 동이 보이고 그 주위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외성이라고 하는데 수도는 보통 방비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지만 이곳은 4방이 적으로부터 방비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발해의 수도였던 중경현덕부의 관리 동과 외성>
청산리전투: 지금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 마을도 지나갔으며, 갑산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자 청산리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이 이야기가 가장 신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매일 일본사람들에게 고통 받다가 이 이야기만 들으면 얼마나 통쾌했을지 짐작이 가는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겐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때문에 더 잘 알게 된 전투로 내용은 잘 모르지만 꼭 알 필요도 없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중국 땅에 군사를 투입하려고 10월 마적을 매수하여 독립군으로 위장시키고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해 1920년 10월 21~26일까지 청산리에서 있었던 전투를 통틀어 말한다.
백운평, 갑산촌(甲山村) 천수평, 완루구, 직소, 천보산, 어랑촌 등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을 지휘하는 김좌진 장군과
대한독립군을 지휘하는 홍범도 장군이 연합하여 1,500명의 독립군이 10여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3,300명이라고 하지만 1,000여 명이 사망했고, 기마병 1개 중대가 몰살했으며, 승리의 장소엔
기념탑을 건립했으나 잘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그 마저도 가지 않는다.
다만 청산리 근처로 나 있는 임업작업도로를 따라 가다가 가이드 손가락 끝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지도를
만들면서 청산리를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아 걱정했으나 지나가는 만으로도 감사했다.
옛날 만주를 다녀온 사람들이 주먹만 한 감자와 팔뚝만한 옥수수가 달리는 곳이라고 얘기하던 곳이 이곳으로
일본 사람들이 노예교육을 시켰기에 연세가 많은 사람들은 일본 말을 잘 한다고 한다.
조선말을 하다가 체벌도 받았으며, 탄광의 일본 십장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는 알바는 식기 전에 도착해야
하므로 달리기를 잘 해야 하고, 다음은 대화를 해야 하기에 일본 말을 잘해야 한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4계급의 민족으로 구분했는데 1위는 일본인 2위는 중국사람 3위는 조선인 4위는 만주족인데
당시 일본인들만 쌀밥을 먹을 수 있고, 도시락 반찬은 소고기 장조림과 계란말이였다고 한다.
조와 옥수수만 먹던 조선인 알바는 도시락이 먹고 싶어 십장의 밥 먹는 습관을 관찰했다가 어느 정도 먹고
난 뒤에 넣어 둔 이물질이 나오도록 해서 더 먹지 못하게 하고 남은 밥을 먹었다고 한다.
김좌진 장군이 기병중대를 전멸시켰고, 포위된 김좌진 장군과 합류한 홍범도 장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어랑촌
(漁郞村)에 있는 휴게소에서 내렸는데 출입문과 칸막이도 없는 변소가 신기하다.
휴게소: 휴게소 뒤 산은 장뇌삼을 대량으로 기르는 밭이 있어 휴게소에서 팔고 있었지만 구미가 당길만한
가격이 아니었으며, 모든 기념품 가격들이 옛날의 중국이 아니어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 휴게소에서 산 사과배를 구경도 하고, 팀장의 수고로 맛보았는데 크기는 작지만 당도가 높아 맛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이 도로는 임도로 포장 얼마 되지 않았기에 관광차가 다닌 것도 최근이라고 하며, 15km가
더 단축된다고 하며,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해발 2670m의 선봉령(先峰嶺)을 넘게 된다.
<1.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추측되는 어랑 촌 산 2. 어랑 촌 3. 어랑 촌 휴게소>
선봉령: 연변인근에서 백두산 다음으로 높고 험준한 산으로 백두산과 형제 산이라고도 하며, 아직 눈 덮인
산에는 백두산과 같이 줄기가 하얀 자작나무와 줄기가 붉은 주목나무가 많이 자란다.
이 험준한 산령을 넘으면 삼도백하(三道白河)가 흐르는 삼도(三道)라는 동네도 지나가게 된다.
삼도(三道): 삼도백하는 백산(백두산)에서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인데 너무 많아서 번호를 붙인 것이 일도, 이도,
삼도인데 이십백하까지 있다고 하며, 송화 강도 천지가 흘러서 생긴 강이다.
선봉령을 넘으면 연변자치주 송강진(松江镇)이 있으며, 송강이라는 큰 학교도 있고, 한글간판이 많이 있어
조선족이 많이 사는 것으로 보이고, 30분을 더 가면 이도백하에 도착한다.
<1. 송강진 2. 한글이 많은 상가 3. 송강학교>
[이도백하(二道白河, 얼다오바이허)]
날은 저물어 이도백하에 도착했는데 가장 눈이 띠는 것은 이곳에서만 자란다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소나무인데
일명 미인송(美人松)으로 군살 없이 곧게 뻗은 붉은 줄기는 높은 곳까지 잔가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저녁은 무한리필의 돼지삼겹살인데 손님이 많아 숯불이 준비되지 못해 기다렸는데 상에 있는 상추가 얼마나
큰지 어른 얼굴을 다 가릴 정도였으며, 늦게 도착한 불도 화력이 살아나지 않았다.
고기 굽는 시간이 많이 걸려 급한 김에 고기는 대충 먹고, 밥만 얼른 두 그릇을 비웠는데 쌀이 좋았는지 밥은
참 맛있으며, 간판은 ‘제주(濟州)**’라고 되어 있으나 밥이라는 우리말도 통하지 않았다.
커피도 없지만 물도 가이드가 통역으로 겨우 얻어먹었고, 나왔는데 아마도 중국인의 식당 같았으며, 우리 팀은
술과 안주가 너무 좋았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많이 기다렸다.
본래를 식사 후 걸어서 호텔까지 가기로 했으나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 차를 타고 군안주점 호텔에 들어갔는데
평생처음 호텔을 온 손녀가 화장실부터 들어다 보고 ‘할아버지 양변기다.’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호텔이 좀 신기했는지 사진을 찍고 나더니 ‘참 좋다.’라고 했으나 실망하지 않도록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도백하: 백두산 부근에서 발원한 이도백하와 삼도백하(三道白河)가 만나 이도송하(쑹화, 松花) 강 상류를
이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백두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들리는 동네이다.
봉황새로 변신한 옥황상제로의 둘째 아들을 살려 주어서 옥황상제로부터 ‘큰 물줄기(白河)’를 선물 받은
청년 ‘성수’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 있으며, 최고의 수자원이다.
비룡폭포에서 시작하는 송화 강은 길림성을 지나 목단 강을 지나 1927km인 흑룡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이강을 주제로 한 노래한 ‘송화강상’이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1. 선봉령 입구 2. 이도백하야경 3. 이곳에서만 자란다는 미인송 4. 얼굴을 다 가리는 상추>
[중국의 강(江)의 상식, 시차와 호텔인 주점(酒店), 송화강상(松花江上)]
☆중국의 강(江)과 하(河): 본래 중국에는 '하(河)'는 황허를, '강(江)'은 창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며,
창강은 중국남쪽문명을 대표하고, 황허는 북쪽문명을 대표했기에 남방 대수(大水)의 이름에 '강(江)' 자를 붙였다.
북방에 대신 '하(河)' 자를 붙여 '남강북하(南江北河)'라는 말도 있으나 강(江)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수량이
일 년 내내 풍부하지만 하(河)자가 붙은 곳은 홍수와 가뭄으로 수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북방에도 송화강(松花江)이나 헤이룽강(黑龍江) 같이 '강(江)'을 붙은 곳도 있는데 이것은 수량보다 이규태
코너에서는 황하(黃河)와 양자강(楊子江)을 물 하(河)와 강 강(江)의 차이로 보았다.
물수(水)변에 붙은 가(可)와 공(工)의 차이는 可는 사람이 짐을 지고 허리를 굽힌 형상이 하(何)이며, 굽은
나뭇가지 뜻하는 가(柯)는 다 같이 많이 굽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곧은 목을 뜻하는 항(項)과 바로 공격한다는 공(攻)처럼 공(工)은 곧고 반듯하다는 뜻으로 황하는 굽은 강,
양자강은 직선의 강인데 정치에도 두 강으로 비교하는 단어가 황하형과 양자강형이다.
황하가 푸르기를 백년이나 기다린다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도 있뜻이 탁해서 물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황하 같이 사리사욕과 당리당략만 있는 정치가를 황하형(黃河型)이라고한다.
맑아 물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양자강 같이 깨끗한 정치가를 양자강형(楊子江型)이라고 했는데
지금 정치도 똑 같다.
중국 전체의 삼대수(三大水)는 황하, 양자 강, 압록(鴨綠江) 강이라고 하며, 압록강의 압(鴨)은 오리이고,
초록빛 록(綠)은 수놈오리 머리색깔인데 두만이나 압록이나 어원은 모두가 새다.
☆창강(長江)과 양쯔강(揚子江): 한 때는 양자강이 장강인 줄 알았으나 중국 사람들의 양자강은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 이남을 흐르는 강만 말하며, 길이는 300㎞로 짧다.
장강은 양자강 전체를 말하며, 길이 6400㎞인데 양자강이 외국엔 장강으로 잘 못 알려진 이유는 19세기 말
청(淸)나라 때 배를 탔던 선교사들이 양자강이 강 전체의 이름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의 시차: 중국과 한국의 시차는 한 시간이지만 중국의 가장 동쪽인 흑룡강 성의 부원현(扶远县)에 5시에
해가 뜬다면 가장 서쪽인 카스에서는 9시에 해가 떠 중국 안에서만 4시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중국은 미국처럼 동부시간과 서부시간이 없이 북경을 기준으로 하는 동일한 시간을 사용하기에 우리도 모든
시간은 북경시간을 기준으로 하며, 모닝콜은 6시 식사는 7시 출발은 7시 반이라고 한다.
☆주점: 중국은 호텔을 주점이라고 해서 꼭 술집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옛날 우리도 술도 먹고, 잠도 잘 수 있던
곳을 주막이라 했고, 오늘날 호텔도 술도 팔고, 잠도 자는 곳이니 주점과 같다.
☆송화강상(松花江上): 우리에겐 첨밀밀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가수 등려군이 ‘송화 강에서’라는 노래를 불렀고,
작사, 작곡은 장한휘(张寒晖)가 했는데 가사가 동북지역의 자연과 아픔을 생각나게 해서 소개한다.
우리 집은 동북지역의 송화 강에 있는데 그곳은 나무가 울창하고 탄광이 있고
또한 산과 벌판에는 콩과 수수가 넘쳐 나네요.
우리 집은 동북지역 송화 강이 있는데 그곳은 친척들이 있고, 또한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네요.
9.18(九一八),9.18,그 비참한 때부터 9.18,9.18,그 비참한 때부터
나의 고향을 떠나서 그 수많은 보물을 버리고 떠도네! 떠도네!
하루 온종일 관네 이 지역을 떠도네!
어느 해,어느 달, 비로써 사랑스런 내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느 해,어느 달, 비로써 수많은 보물을 내가 찾을 수 있을까?
어머니, 아버지, 언제나 비로써 한 자리에 즐겁게 모일 수 있을까?
이 노래는 항일전쟁 중에 만든 가곡으로 9.18 사변(事变) 후의 일본군이 점령한 동북삼성(东北三省) 사람들이
당한 고난과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9.18 사변은 1931년 9월 18일 봉천 외곽의 류조구에서 만철(滿鐵) 선로폭파사건을 조작해 일본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고, 병참기지를 만들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을 말한다.
[2일] 15년 4월 28일 화요일
●일정: 이도백하→ 북파이동(약50km 40분→ 백두산입구(셔틀버스)→ 기상대[6인승 짚(20분)]→ 천문봉(도보)→
천지조망→ 자연온천지대→장백폭포→ 중식→ 용정이동 중 일송정, 해란 강, 용정중학교(차창관광,
약 3.5h)→ 연길이동(약 0.5h)→ 대주호텔(0433-619-5555) ※ 기차역 3분, 시외터미널, 공항(5~6분)
[이도백하의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싶었으나 손녀가 피곤하지 않도록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자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같이 여행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식사가 부실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세상에~ 이런 식사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 이하도백은 건물과 도로는
한창 건설 중이지만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었던 이도백하의 호텔 군안주점(君安酒店)>
[오늘의 일정]
더디어 백두산을 가기위해 차에 올랐으나 마음은 이미 천지에 가 있었는데 날씨가 좋아 꼭 천지를 구경할
수 있도록 기원했으며, 이동 중에 오늘일정을 말했다.
6인승 지프차를 타고 백두산 정상주차장에서 내려 5분간 올라가 천지를 보고, 다시 지프차를 타고 내려와
셔틀버스로 7분간 장백폭포 주차장으로 이동한 후 1시간이면 폭포까지 왕복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입구에 내려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먹고, 3시간 이동하여 용정에 도착해서 대성중학교
본 후 일정에 없는 용정의 지명이 유래된 용두레 우물을 보여준다고 한다.
30분 정도 이동해서 보이 차집에 들린 후 저녁식사는 북한식당에서 냉면을 먹고, 모두 전신마사지를 받고나서
호텔에 들어가면 모든 일정이 끝난다고 한다.
[간략한 백두산 이야기]
백두산남쪽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은 서해로 흐르고, 북서쪽에서 떨어지는 장백폭포는 송화강의 발원지로 이며,
이 강은 아무르 강 쪽으로 흐르고, 두만 강은 동해로 흐른다고 하여 백두산을 ‘3강 지원’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보이는 강은 송화강(松花江)의 줄기인 이도백하로 일급수이라서 호텔의 물은 그대로 마셔도 되지만
한국 사람들은 변소에서 받아 마시기를 꺼려한다고 했는데 백두산과 천지의 재원은 아래에 기록한다.
그리고 백두산의 천지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200년 전 안도현 현지를 살펴봐도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며, 7~8 사이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한다.
전에 괴물 연구소가 생겼을 때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면 한화 천만 원의 포상금을 걸었으나 우리는 천지가
얼어 있어 그런 기회가 없다고 하며, 2000년경 북한에서 1급수만 사는 산천어치어를 방류했다고 한다.
지금은 큰 잉어만 하게 자란 것을 보면 다른 생물체도 살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괴물이 있고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비감을 더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의할 점은 18분 지프차를 타는 동안 99개의 커브를 급하게 돌기 때문에 원심력에 의해 주머니나 가방의
물건들이 튀어 나와 잃어버릴 수가 있으니 주머니지퍼를 잘 잠그고, 탑승 넘버를 꼭 기억하라고 했다.
뭘 그럴까? 하면서도 일단 주위를 했지만 물병이나 지퍼가 없는 바지주머니의 동전은 실제로 잃어 버렸다.
<1. 백두산 가는 도로 2. 백두산 주차장과 입구 3. 천지로 올라 가는 커브 길>
6인승이라 한 차로 이동이 안 되고 2대로 이동하기에 하산할 때도 혼자하면 안 되고, 절대로 가이드보다
앞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하며, 몇 년 전에 가장 오래된 300년 산삼을 캤다고 한다.
백두산의 마지막 분화가 1702년이기에 300년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하며, 심마니 6명이 주야로 3일 캤는데
잔뿌리까지 165cm 이고, 무게는 665g로 호가는 한화로 16억이었으나 10억에 팔렸다고 한다.
산 사람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제약회사 사장님이지만 먹은 사람은 최고 권력층이 아닌 가?
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마누라 일 것이라고 해서 웃었지만 그렇게 비약하면 아들이 아닐까?
그리스의 독재자에게 ‘당신은 최고의 권력을 가져서 좋겠다.’고 아부를 했을 때 ‘모르는 소리하지 마라’고
하면서 ‘내 위에 마누라가 있고, 그 위에 아들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자작나무 숲 사이로 백두산이 잠깐 보였는데 기도를 많이 해서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희망을 가졌으며, 가이드는 4가지 등정코스 중에 북한코스만 못 가봤다고 한다.
내년에 동파코스를 갈 예정인데 중국국적으로 북한을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지만 감시원 때문에 자유롭게
못하게 하며, 나진시 어시장의 이용시간이 중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다를 정도로 분리 한다고 한다.
옛날 중국과 수교가 안 되던 시절엔 백두산을 보려면 홍콩으로 먼저 왔다가 비행기로 북경에 와서 다시
비행기로 장춘에 오고, 기차로 연길에 도착한다고 한다.
연길에서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7시간을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고 하며, 14박 15일을 찾아와 백두산 천지를
못보고 가는 일이 허다했다고 하며, 그때 가이드는 삽을 가지고 다니면서 차가 빠지면 도왔다고 한다.
백두산에 많은 자작나무는 비중이 커서 가라않고, 대신 돌은 비중이 적어 물에 뜨는 부석(浮石)으로 서로
반대되는 현상이 특이하다고 하며, 백두산은 중국의 10대 명산 중에 6위라고 한다.
중국국경일이 있는 10월1이면 백두산은 중국 사람들이 많을 때는 4만5천명이 찾아오기에 발 디딜 틈도 없고,
주차장도 만원이라 걸어서 3km를 가야할 정도인데 한마디로 전쟁이라고 한다.
<1. 백두산 출입구와 대기실 2. 6인승 지프 3. 감사합니다. 강동사랑님! 뒤로 보이는 백두산>
중국관광에 있어서 역사는 사람은 북경, 남경, 서안, 심양이고, 산은 황산과 장가계이며, 물은 구채구와
계림이고, 요사이는 태향산을 많이 찾는다고 하며, 이제는 백두산전체 모습이 보였다.
3분 후에 도착한다고 하며, 무조건 천지를 볼 수 있는 일기라고 했는데 겨울백두산이 여름철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지만 위안을 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도백하에서 꼭 30분 걸렸다.
가이드는 매표를 위해 빨리 걸어갔으며, 들뜬 마음이지만 노치지 않으려고 사진도 찍지 못하고 따라 갔는데
대기소에서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천천히 와도 괜찮을 시간이었다.
☆자작나무: 선봉령에서 백두산까지 하얀 껍질을 하고 있는 자작나무를 무척이나 보게 되는데 여기서 이 나무에
알아보려고 하는데 이름은 마르지 않은 자작나무로 불을 때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타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타는 이유는 얇은 껍질에 있는 오일 성분이 있어 생나무도 잘 타기 때문이며, 얇은 껍질은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며, 껍질의 오일성분 때문에 천년이 넘어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천마총 그림이나 팔만대장경의 재료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파키스탄 여행 때 룸메이트가 잘 못 알려진
것이라고 했는데 박물관에 근무하는 분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작나무수액은 인체수액과 비슷하며, 수액에 있는 자일리톨은 화장품의 원료이자 껌을 만드는 무가당원료이고,
러시아에서 유명한 처녀의 마지막 술이라는 보드카는 자작나무 숯이 질을 결정한다.
자작나무의 껍질 백화피는 황달, 설사, 신장염, 폐결핵, 기관지염, 편도선염, 치주염, 위염, 종기, 기침 등의 치료에
쓰이며, 껍질을 태운 재로 참기름과 개어 화상에 바른다.
껍질을 달린 물로는 암, 신경통, 류머티즘 관절염, 소화불량, 기침, 감기, 기관지 등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이다.
<1. 백두산 오름길에 있는 자작나무 숲 2. 비룡폭포 전망대에 있는 자작나무들>
[백두산 천지 관광]
해발 1,000m지점에서 관광차를 타고 올 때는 올라가는 기분보다 평지를 딜리는 느낌이었고, 어느 때는 내리막을
가는 것 같았으며, 해발 1,700m의 주차장에서 지프차를 타고 갈 때는 정말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경사진 커브 길을 겁도 없이 달리는 것도 마음 조리게 하는데 음악은 얼마나 시끄러운지 줄려달라고 해도 조금
시늉만내고 달리는데 자작나무는 눈 속에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를 흔들렸을 까? 그래도 시간은 흘러 백두산 정상이 다가오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이를 실감할 만큼
아찔하게 느껴졌으며, 주차장에서 가이드를 만나 조금 숨찰 만큼 됐을 때 천치가 보인다.
천지의 아름다움을 사진기는 담지를 못했는데 등소평이가 썼다는 천지 표지 석 앞에서 돌아가며, 증명사진을
찍었으며, 일행은 준비한 술로 고수레를 한 후 건배를 했다.
가이드가 장군봉을 알려 주었지만 이미 증발해 버렸으며, 왼편으로 이동해서 북한 측의 천지를 구경했는데
인적 하나 없이 고요만이 얼음과 눈 위에 가득해서 또 한 번의 비애를 느꼈다.
춥지도 않았고, 애국가도 생각나지 않았으며,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열심히 사진에 담는 것이었으며, 좀 더
머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가이드의 재촉을 들으면 하산 길에 올랐다.
손녀가 적극주장해서 패딩을 입지 않고 메고 온 것이 다행이었는데 젊은 여인은 허벅지가 다 보이는 옷을 입고
있어도 춥지 않아보였고, 큰 가방을 맨 일행의 그 속에는 패딩이 들어 있을 것 이다.
천천히 내려오면서 눈도 먹어 보았으며, 눈 치우고 있는 저 많은 인부들은 어디서 어떻게 데려 왔을 까?
궁금해지기도 했으며, 백두산의 북파코스는 우리 집 뒷산 오르는 것보다 쉽다.
아이를 업고 오를 수 있고, 하이힐을 신어도 되며, 크게 다리만 아프지 않는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어 좋았으며,
지프차를 타고 하산하여 셔틀버스로 비룡폭포로 행했는데 중국이름인 장백보다는 비룡폭포가 더 좋다.
<백두산 천지와 주위의 모습들>
[백두산(白頭山)의 모든 것들]
이름과 봉우리: 눈 덮인 8개월과 가벼운 백색의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돌이 물에 뜬다는 하얀 부석(浮石)이
흰머리와 같이 보인다고 백두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금나라 때 불렀던 ‘골민 샹기얀 알린[큰(긴) 흰 산]’의 만주어를 의역한 중국어가 창바이[장백(长白)]산이며,
또 태백산(太白山, ‘큰 흰 산’)’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은 길림성(연변 조선족자치주)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군에 있고, 한반도와 중국동북의
3성 중에 가장 높은 곳이 장군봉이라고 한다.
천지주변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6개가 중국에
속해 있고, 8개는 북한 측에 속해있고, 2개는 중국과 북한의 공동구역에 있다.
중국에 속해 있는 제일 높은 봉우리는 백운봉으로 2,691m이고, 우리가 올라갈 천문봉은 2,670m라고 하며,
2,500m 미만인 봉우리로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이 있다.
백두산 분화: 해방 전 병사봉은 해발 2,744m이었으나 장군봉으로 바뀌면서 다시 측량한 것이 2,750m인데 6m
높아진 것은 측량의 오차보다 조금씩 융기되어 높아지고 있다고 한국과 일본은 보고 있다.
10년 전 천지주변의 온천온도가 섭씨 60°이었으나 지금은 최고 83° 까지 올라갔고, 헬륨 농도는 일반적 대기의
7배나 되는 이런 증상들은 마그마가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2년부터는 지진도 일어나고, 일본의 다니구치 교수는 일본지진과 백두산분화가 연관성이 있다며, 백두산
폭발확률이 2019년까지 68%, 2032년까지 99%라고 했다고 한다.
한중일 역사사료에 의하면 급작스런 발해의 멸망을 930~940년 사이에 있었던 백두산의 대폭발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고 하는데 그 피해는 한나라가 망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한국방송은 2016년쯤 백두산이 폭발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지만 중국학자는 2020년으로 보는데 백두산이
폭발하면 270km 떨어진 동화 시나 240km 떨어진 연길 시는 30cm의 화난재가 싸인다고 한다.
백두산 역사: 만주에 있는 장백산맥(창바이 산맥)의 주봉으로 한반도 지리산까지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모든 산들의 뿌리가 되는 기본 산줄기이며, 백두산은 한민족은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었던 곳이다.
그리고 곰이 된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이 태어난 곳으로 신성시되는 곳이지만 만주족의 기원신화도 있어
청나라 때는 영산으로써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백두산의 장군봉을 병사봉(兵使峰)이라 한 것은 윤병사 광신(尹兵使 光莘)이 함경도절도사(咸鏡道 節度使) 시절
백두산에 올라 이 봉우리에서 창을 들고 춤을 추어 붙여진 이름이고 한다.
그가 놓아준 닭은 백두산의 산닭이 되었다고 전한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때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백두산 남동쪽 약 4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에 세워졌다.
1962년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과 1964년 중조변계조약에 관한 의정서로 두 단계로 국경이 확정되어
백두산과 천지를 분할하여 천지의 54.5%는 북한 것이 되었고, 45.5%는 중국 것이 되었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은 ‘한쪽의 공민(公民)이 살고 있거나 농사를 짓고 있는 섬과 모래섬은 그 국가의
영토가 된다.’는 규정을 두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총 451개 섬과 102.66㎢ 사주가 있었다.
규정에 따라 264개의 섬과 87.73㎢ 사주가 북한의 영토가 되었고, 187개의 섬과 14.93㎢ 사주가 중국의
영토권가 되었으나 1999년까지 양측이 모두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조약은 양국이 모두 그 체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는 비밀 조약이므로 한반도 통일 과정이나 그
이후에 국경 분쟁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980년에 백두산 천지(天池)를 양측이 분할했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에 알려진 후 한동안 한국전쟁참전의
대가로 중국 측에 할양했다는 주장은 대북(對北) 불신감에 의존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현재도 북측이 토문(土門)을 국경으로 주장하지 않아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포기했다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가 있으며, 중국은 한반도 통일 후에 있을 국경분쟁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중인 것으로 본다.
할양된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중국은 많은 투자를 하여 많은 자국민의 관광객을 유치했고,
최근에는 백두산에 스키장을 갖춘 5성급 호텔 5개가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6월~10월에는 골프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완다 스키장은 최대 1741m길이의 43개 슬로프를
갖추고 있고, 날씨가 좋을 경우엔 스키장 정상에서 백두산 천지를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천지(天池): 화산에 의해 생긴 칼데라 호(caldera)로 수면은 해발 2,257m,동서길이는 3,450m,남북길이는
3,370m 면적은 9.165㎢,둘레 14.4km,평균 깊이 213.43m,최대 수심은 384m이다.
천지는 한국과 중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로 약 20억 톤(m³)의 수량(水量)의 공급원은 3가지가 있는데 1. 빗물
2. 흘러드는 지표수 3. 솟아나는 지하수로 조금은 믿기지 않지만 지하수가 공급원의 62%를 차지한다.
천지 물은 오직 한 곳으로 나오는데 이 물이 장백폭포를 만들고 송화 강으로 흘러가는데 1년 출수 량의
93%를 차지하며, 수량은 0387억 ㎦이라고 하고, 나머지 7%는 증발한다.
우루무치의 ‘천지’는 천경(天鏡)과 신지(神池)를 줄인 말이라고 하는데 백두산 천지도 아닐 런지?
등정코스: 중국코스는 서파, 남파, 북파로 파(坡) 언덕의 뜻하며, 북파(北坡)코스는 지프차로 기상대까지 20분
이동하고, 도보로 천문동까지 10분간 이동하며, 북한의 동파코스가 가장 좋다고 한다.
☆단군신화: 백두산에서 단군신화를 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일절하지 안아 간단하게 서술 해 보면
하나님(환인)의 아들 환웅이 3천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서 산시를 열었다.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기 위해 100일간 쑥 한 자루와 마늘20개로 도전했으나 곰만 성공하여 여인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으며, 한반도에서 처음 왕검이 다스리던 나라가 단군조선이다.
<백두산 천지의 전체모습>
[비룡(장백)폭포 관광]
장백산 주창에 도착해서 녹원담이라는 작은 폭포를 구경한 후 비룡폭포로 향했는데 이곳 눈은 있으나 마나한
것인지는 몰라도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으며, 손녀도 윗옷을 벗어 허리에 맨다.
한 부부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옷을 벗는 것 보고 나도 따라 윗옷을 벗었으나 더위는 계속되어 정신이 없었는데
눈이 따뜻한 것인지, 온천물이 따뜻한 것이지 지하의 마그마 때문이라면 절대로 안 되는데...
비룡폭포를 오르다 보면 ‘지룡천(地龍川) 온천 굴’이라는 자연유황온천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온천물의 최고
온도는 83℃이고, 최저 37℃인데 이곳에 생 계란을 넣으면 15분이면 다 익는다고 한다.
물에 삶는 것과 다른 점은 내부에 있는 노른자부터 익는다고 하며, 체험삼아 한두 개 먹어 보라고 했지만 그렇게
익는 원리를 말하지 안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전자레인지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계란이 물의 온도보다 마그마에서 나오는 마이크로전자파가 속부터 익게 하는 것 같은데 절대로 레인지에
계란을 넣으면 안 되지만 계란에 전자파를 가하면 내부부터 익는 것이 레인지원리이라고 한다.
이곳 게란 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것은 권리금 때문이라고 하는데 1년 계약에 한화 2억6천만 원이라고 해서
모두들 놀랐는데 계란과 옥수수를 얼마나 팔아야 그 돈을 벌 수 있을 까?
아마도 기념품 가게까지 포함했으리라고 믿고 싶었으며, 이곳을 지나면 멀리 폭포의 모습이 보이고, 다리 아래
흐르는 유황온천은 바위를 노랗게 물들게 했으며, 포기하고 싶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고생은 끝난다.
<1. 녹원담 2. 지룡천 동굴>
더 가까이 갈 수는 있겠지만 시간상 여기서 멈추어야 했으며, 폭포가 너무 멀어 줌으로 당기면 사람을 넣을 수가
없는 것이 흠이지만 가능한대로 사진에 담아 보았다.
다행이도 부산 분들이 좋은 사진기로 찍어 주어서 고마웠으며, 이것은 순전히 손녀 덕분이었고, 거리가 먼 것도
있지만 겨울이라 유량이 적어서인지 폭포는 생각보다 작았다.
내려와 체험하라는 ‘지룡 천 온천 굴’의 계란을 사려했으나 복잡했으며, 휴게소 앞에서도 팔고 있어 그곳에 갔으나
파는 것이 아니라 산 계란을 먹는 중이어서 다시 가려했더니 울산 분들이 이미 사 오신다.
계란껍질이 잘 까지지 않아 딱 한 개만 깨어 사실인가 확인부터 했는데 눈에는 노른자나 흰자나 익은 것이
비슷했으며, 사진을 찍은 후 버리려다가 맛만 보았으나 별 다른 점은 없었다.
휴게소에서 팔고 있는 돌이 부석(浮石) 같아 사와서 물에 뜨는가? 실험을 해 보니 처음엔 떠다니다가 나중엔
일부만 바닥에 닿고 다른 부분은 떠 있었는데 자작나무가 가라앉는 것은 실험해 보지 못했다.
<1. 비룡폭포 2. 온천수로 익힌 계란 3. 물에 뜨는 백두산 돌 4. 돌이 물을 흡수해서 가라앉는다.>
[중국과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 ]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먹고, 용정으로 향하면서 한국에서 문제되었던 중국인들의 성형수술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또 중국 사람들의 엄청난 쇼핑에 대해서도 애기했는데 한국팀 3~4개를 합쳐도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중국의 부자들의 숫자가 대한국민 전체보다 많다고 하며, 중국신문에 난 기사로 중국광주에서 BMW 745를
몰고 가다가 경미한 접촉사고를 냈는데 피해 차도 BMW 745이었다고 한다.
바쁜 가해차량 차주가 명함을 건네며, 보험에 신고하지 말고 참고 내일 연락하면 새 차로 사주겠다고 했는데
피해차량 차주가 명함을 가져오라고 해서 보더니 ‘저 사람 회사 매수 버려’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유머인지 모르나 그 만큼 부자가 많다는 소리겠지...
중국에도 삶의 편차가 커서 부자가 많은 광주는 타 지역사람을 ‘거지’라고 하고, 국제도시인 상해는 타 지역
사람을 ‘촌놈’이라고 하며, 권력자가 많은 북경은 타 지역사람을 ‘하인(아래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을 사귈 때 한국 사람은 하루가 안 가지만 중국은 4년이 넘어도 친구라는 말을 안 하는데 친구는 목숨을
줄 정도가 되어야 쓰는 말이라고 하며, 싸움에 지면 일본 사람은 깨끗하게 항복을 한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10년 후에 보자고 힘을 길러 꼭 복수한다고 하며, 한국 사람은 절대 항복하지 않는 오기를
가졌는데 이 오기가 중국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56개의 소수민족 중에 인구로는 7위이지만 대학생이 제일 많고, 예금을 가장 많이 하는 민족이이라고 하며,
중국 사람들이 칭찬으로는 춤과 노래를 잘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욕할 때는 술 잘 먹고, 잘 싸우는 민족이라고 한다고 하며, 반도 피를 물려받은 조선족도 성질 급하고,
술 잘 먹고, 많이 먹고, 싸움 잘 하는 것은 똑 같다고 한다.
[용정의 조선족 이주 역사]
용정은 우리민족이 처음이주해서 터를 잡은 곳으로 북간도라고도 하는데 고구려나 발해의 후손이 아니고 처음
이주자는 조선 인조시대 때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잡혀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잡혀 온 부녀자만 50만 정도로 대부분 돌아가고 속전(몸값)을 마련할 수 없는 빈곤층과 노예만 남았다고 하며,
이들이 북경 옆의 하북성 흑용현 ‘박가촌(朴家村)’에 있다고 한다.
또 한 곳은 심양 옆의 본계시소시층의 ‘박가포’라고 하며, 중국 성에는 박씨가 없는데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여진족이라 부르나 정작 본인들은 조상들이 고려인이라고 전해주어 ‘고려인’이라고 했다고 한다.
빨래방법, 식사방법 등이 여진족과 다르지만 조선족과 같기에 1983년도에 여진족에서 조선족으로 고쳐지게
되었는데 이분들이 1차 이주민이라고 하며, 두 지명을 지도에서 몇 시간을 헤맸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두 번의 호란 후에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는 부르면서 멸시해고, 오랑캐와 임신하고 온 여인들이
자식을 호로자(湖奴子)라 하였는데 이들이 ‘화냥년’이고, ‘호로 자식’으로 따돌림과 냉대를 받았다.
2차 이주민은 1860년 경 엄청난 재해가 일어나 압록강과 두만강 연해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었는데 처음엔 매일 온 사람, 봄에 와서 가을에 돌아가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가는 것이 불편해서 몇 년 또는 영구히 거주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1644년 이곳에서 살던 청나라 여진이
2억2천 명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이주한 사람은 130만 명이라고 한다.
<조선족분포현황>
그들은 한족에 쫓겨날 때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1677년부터 봉산위장(封山圍場)을 건립하여 통치자를
사용할 특산물을 채집하는 것 외는 경작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금하는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시했다.
연변에는 남강위장(南崗圍場)을 설치하여 인삼, 진주, 녹용 등을 채집하여 조정에 바쳤는데 광서제 초년까지
200여년 지속되었는데 이 틈을 이용해서 조선족이 월강해서 농사를 지은 것이 첫 시점이라고 한다.
200년 동안 완벽하게 생태계가 조성된 무주공산(無主空山)을 처음 개간해서 정착한 사람들이 조선족이라고
하며, 압록강과 두만강 가까운 곳은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이 차지하였다고 한다.
늦게 온 남쪽사람들은 더 북쪽을 차지했으며, 1860년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으로 러시아와 국경이 바뀌면서
1876년경 청나라관리가 이곳에 지역탐방을 와서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많은 조선인이 사는 것을 보고 ‘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방을 부쳤으나 돌아갈 곳 없는 조선인은
‘우리도 천자백성이니 이 땅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청원했다고 한다.
관리는 ‘치발역복(雉髮易服)’ 해야 한다고 했는데 두발형태인 ‘치발’과 복장형태인 ‘역복’이 만주족과 똑 같게
하는 것으로 청나라 사람으로 국적을 변경할 때 판단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조선인에 해당했는데 치발역복을 할 수 없기에 대표 한 사람을 뽑아 치발역복을 하고, ‘농토독점권’을
얻으면 이 땅을 세분하여 나누어 농사지으면서 처음으로 ‘치능지수’라는 계급이 생겼다고 한다.
청나라는 이민을 정착시켜 변방을 튼튼하게 하는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은 중국조선족형성과 발전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1910~21년까지 한일합병 이후 독립군과 화전민들이 왔다고 한다.
또 일본이 점령하면서 일본첩자와 보따리장사도 왔다고 하는데 이들이 3번 째 이주민이라고 했으며, 1931~
1945년 사이 자유이민자들과 일본인들이 만주를 통치하기 위해 강제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전라도 마을 이름의 동네, 경상도 마을 이름의 동네, 충청도 마을 이름의 동네가 생긴 이유라고
하며, 장항이나 정읍 같은 동네가 이곳에 있는데 이들이 마지막 이주자들이라고 한다.
1945년 광복 때까지 살았던 230만 명 중에 150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80만 명이 남아서 이 동네를
건설하면서 ‘이 땅을 개간하고, 이 땅을 지키고, 이 땅을 번영시킨 주인공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조선족사람들을 ‘중국으로 시집 온 며느리’라고 말하는 것은 친정과 시집에 충성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는데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송정까지 쉬기로 했다.
<여진족의 치발역복 변천사>
[선구자 노래 대한 이야기]
어쩌면 이번 여행에 백두산보다 더 보고 싶었던 것은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지명들로 이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기대였으나 잠시 내려서 멀리 바라보고 사진을 담는 것이 전부였다.
너무 먼 거리이어서 줌으로 당기면 흔들려 흐리게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배경 속에 사람을 넣어 찍을 수
없는 것도 문제이어서 좋은 사진을 얻는 것을 포기했는데 무척이나 아쉽다.
일송정(一松亭)은 용정 시내에서 비암 산을 보면 한 그루의 큰 소나무가 푸른 기와의 정자처럼 보여서 그렇게
불렀으나 1931년 일본영사관에서 사람을 보내 구멍을 뚫고 화학약품을 넣어 죽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용정시인민정부에서 향토교육의 시키기 위해 1991년 정자 짓고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 정자와 소나무를
통칭하여 일송정(一松亭)이라고 했는데 이 소나무는 죽거나 죽임을 당해 8번이나 새로 심었다고 한다.
비암 산과 일송정은 그저 형태만 확인했으며, 용주사는 있다고도 해도 안 갔으니 볼 수 없겠지만 허물어져
없어 진 것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해란(하이란) 강 위의 용문교는 앞뒤와 양쪽난간 입구에 용의 그림이 새겨진 것을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걸로 만족해야 했으며, 오로지 확실하게 본 것은 용두레 우물뿐이다.
선구자노래는 본래 ‘용정 팔경 가’ 또는 ‘용정의 노래’라고 했으나 가사를 좀 바꾸면서 제목이 ‘선구자’가
되었고, 작사가 윤해영씨는 친일파이어서 노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노래주인공은 1923년 임시정부쇄신을 위해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이신 일송 김동삼선생이라고 한다.
[가곡 선구자]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는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 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1. 일송정과 비암산 2. 해란강과 용문교 3. 용문교 양 입구 4개의 용 조각 중에 하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탐방]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우리를 기다린다고 해서 급하게 전시관으로 향했으며, 이 학교의 직원이라 소개를 받고
해설을 들었는데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가이드가 이야기했던 것과 함께 기록했다.
옛 간도의 수부였던 용정은 우리민족이 전체였다고 하며, 187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장인석, 박윤언이라는
사람이 남녀노소 14명을 거느리고 와 해란 강 근체에 안착했다고 한다.
1886년 우물을 발견하면서 용 룡(龍)자와 우물 정(井)을 합쳐서 용정촌이라고 했으며, 1907년 도제 이상설
선생님이 용정 최초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라는 민족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서전서숙의 이름은 용정을 서전벌이라고도 부른데서 서숙은 개인이 한문을 가르치는 사학을 말한다.
그해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가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하면서 학교는 8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
1899년 2월 함북 종성에 살던 김약연, 문병규 등 142명이 이주하여 마을이름을 ‘명동(明東-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하였으며, 수익의 11조는 공부하기 위한 돈 즉 학전(學錢)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01년 학전으로 세운 명동서숙이 1908년 명동중학교로 발전하였고, 1925년 중학부가 폐쇄될 때까지 1,000여
명의 학생들을 배출하여 간도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문재린은 용정최초의 유학생이며, 캐나다 토론토의 제1호 한국인 유학생으로 목사가 되기
위해 임마누엘 신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아리랑’의 나운규, 시인 윤동주, 송몽규, 문재린의 아들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 동문으로, 명동중학교는 독립운동
단체인 ‘학우회’를 결성했으며, 이 학교 출신들은 1919년 3·13만세시위운동, 15만원 탈취사건,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1930년 간도 5·30폭동사건 등을 이끌었다고 한다.
당시 만주에서 가장 유력한 독립운동가 이고, 교육자인 동만(東滿-동쪽 만주)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김약연은
목사이자 윤동주의 외숙으로 명동촌을 개척한 사람이다.
<1. 1928년 환갑잔치 맨 우측 김약연목사 그 옆엔 딸, 딸 왼쪽엔 부인 2. 헤이그 3특사 좌측 이준,
중앙 서전서숙의 이상설, 우측 이위종 3. 문재린 목사부부 4. 명동중학교 5. 아리랑의 나운규>
[은진, 영신(광명), 대성중학교(恩眞, 永新(光明, 大成中學校)]
1910년 후반기 정동, 창동, 광성의 3개 중학교가 생겼으며, 1920년 2월 선교사가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진리(眞理)를 배운다.’는 뜻을 가진 은진(恩眞)중학교를 세웠다.
시인 윤동주, 문익환 목사, 독립운동가 송몽규도 은진중학교 출신이라고 하며, 이들은 명동중학교도 다녔는데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잘 알 수 없었으나 당시 중학교가 지금 같이 딱 3년만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은 입학, 편입, 전학 등으로 명동중학교도 다니고 은진중학교를 더 다닌 것으로 생각되며, 1920년 5월에는
영신중학교, 7월에는 이 자리에 세웠던 대성중학교만 용정의 중학교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
1921년 10월 천도교서 세운 동흥중학교(东兴中学校)는 세워는 그날부터 항일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고 하며,
이 학교 출신으로는 북한의 이종옥 총리와 김책위원장이 있다고 한다.
같은 천도교에서 1958년 5월에 세운 부산대연동에 있는 동천고등학교가 동흥중학교가 전신이기에 부산과
인연이 많다고 하여, 검색해 보았는데 전신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은진, 광명, 대성, 동흥 중학교 사진>
[항일운동사(抗日運動史)]
‘안중근 의거’라고 써진 곳에서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서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교육가였으나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건너와 연해주일대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으며,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오덕순과 계획하여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그는 재판 때 당당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고 한다.
[15만원 탈취의거와 영화 놈놈놈의 이야기]
안중근 사건 오른편에는 ‘15만원 탈취의거’라고 쓰여 있는데 이 사건은 1919년 명동중학교 출신으로 결성된
무장독립조직인 북로군정서 소속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이 벌인 사건이다.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이 1920년 1월4일 오후 8시
용정의 동량어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현금수송마차를 습격하여 5명의 무장경비를 사살했다.
15만 원을 탈취하는데 성공했으며, 최신 소총 한정과 실탄 30발에 50원으로 독립군 3,000명을 중무장 시킬 수
있는 거금으로 이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체코군단은 무기를 헐값에 팔려고 해서 계약단계까지 갔으나 배신자 엄인섭은 무기구입을 위해 내세웠던 자인데
철혈광복단 가진 거금을 보고 즉각 일본군에 밀고 했고, 일본군 남항 19사단의 군함을 나진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할 정도였다고 한다.
윤준희, 림국정, 박웅세, 한상호는 함께 체포된 5백여 명의 항일투사들도 함께 청진감옥으로 호송되었으며,
윤준희, 림국정, 박웅세, 한상호는 1921년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최봉설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서 적기군을 창설했다고 하고, 15만 원은 현 한화로 75억 원 쯤 된다고 한다.
15만 원 탕취 사건은 2008년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좋은 놈(독립군), 나쁜 놈(일본 놈), 이상한 놈
(배신자)’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라고 하며,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등이 출연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거와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 청산리 전투(鳳梧洞, 靑山里 戰鬪)]
1920년 6월 4일부터 3일간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홍범도 장군, 같은 해 7월21~26에 있었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은 10월 21일 백운평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고 한다.
김좌진 장군의 시 한편을 옮겨 본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돌구누나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독립군과 공산주의]
이곳은 싸우지 않는 임시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김좌진 장군이 만든 준 군사정부가 신민부라고 하며, 공산
계열로는 이동휘씨가 있었는데 1919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를 수용하였으며, ‘삼천리강산에 삼천 개의 학교와 삼천 개의 교회가 세워지면 독립을 맞은
날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는 교육을 중요시 했다고 한다.
1918년 항일독립운동의 방법으로 공산사회주의를 접목시켜 최초로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고, 1921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사직하고, 중국에 공산당이 설립됐다고 한다.
1927년에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 전향하면서 2갈래로 갈라서게 되었고,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김좌진 장군은 암살당했다고 한다.
가이드는 1940년도 무안에서 조선광복군과 조선의용대로 갈라졌다고 했으나 1938년 결성된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은 김원봉(金元鳳)이었으며, 1940년은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조선광복군을 창설했다.
조선광복군 총사령관은 지천정(지靑天)이었는데 1942년 임시정부는 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할 것을 결의하고
의용군 총대장은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으며, 광복군은 1946년 6월에 해체되었다.
2015년 광복 70년에 맞추어 개봉된 영화 ‘암살’에서 의열단으로 나오는 약사 김원봉은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났고, 1919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폭탄제조법과 군사학교육을 받고 중퇴했다.
그해 11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1920년 부산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서장을 살해했으며, 1922년
조선총독부, 아이토 총독, 육군대장 다나까 등의 암살미수사건과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소수의 의열단에 의한 투쟁은 한계를 느꼈으며, 1926년 장제스를 찾아가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함으로
조직이 해체되었으며, 광복 후 입국하여 대구반란사건 때 일본의 앞잡이였던 경사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1948년 월북하였으나 1958년 김일성에게 정치투쟁에서 패배하여 숙청당해 죽었다.
‘암살’ 영화 여자 주인공 안옥윤의 모델인 된 남자현은 1872년 경북영양출신으로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참전해서 죽었으며,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만주로 가 연변지방에서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웠다.
여성계몽에도 힘썼고, 서로군정서 대위로 중대장에 있었으며, 1926년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 서울에
왔으나 실행하지 못했고, 1933년 61살이었던 그는 일본의 만주전권대사 무토노부요시를 암살하려했다.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며,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조선인 여관에서 순직하면서 독립축하 금으로 248원을 아들에게 남겼다.
1946년 31절 기념행사 때 김구선생님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장군들 1. 홍범도 2. 안무 3. 서일 4. 김좌진 5. 이범석
교육자 6. 이상설 7. 이동휘 독립운동가 8. 김원봉 8. 남자현>
[용정중학교, 후원자, 기념품 가게]
역사는 변천하여 1946년 3월16일 은진, 명신여자, 동흥, 광명, 대성, 광명여자의 6개 중학교가 합병되어 길림성
연정중학교로 되었으며, 지금까지 나라와 조국을 위하여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고 한다.
정부와 조국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용정중학교는 현대 과학실험학교, 연변자치주 시범 명예를 갖고 민족인재양성에
기여하고 있으며, 우리민족의 얼을 키워가는 이 학교는 최신식교육시설을 갖추었고, 남녀공학이라고 한다.
이곳 출신들과 윤동주시비와 학교를 지원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으로 끝냈으며, 학교의 장학생을 위한
모금함이 있었는데 손녀와 함께 작은 후원금을 냈지만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전시실을 나오다가 눈에 익었던 고종황제의 사진을 보았는데 작은고모부가 왕손을 자랑하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대청마루에 걸어두었던 사진이며, 이준열사의 헤이그 참석사진도 귀한사진이다.
귀중한 사진이 많았으나 유리의 반사로 좋은 사진을 얻을 수가 없었으며, 기념품가게도 있어 작은 선물을 살 수가
있었는데 무좀약 사용설명서가 약자한문이라 읽을 수 없어 사용 할 수 없었다.
▶용정중학교: 구 대성중학교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차지주 용정에 있고, 시인 윤동주의 출신학교로 유명하고,
그가 학교를 다닐 무렵 독립 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정일권 장군도 이 학교 출신이다.
애국지사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이 학교는 철망으로 나누어진 신관은 용정중학교이고, 구관은 대성중학교로
화단엔 윤동주 시비와 6개 중학교 연합기념비가 있다.
윤동주는 대성중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는데 왜? 대성중학교에서 윤동주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는데 6개 학교가
연합하여 은진중학교가 대성중학교로 된 것을 연합기념비를 보고 알았다.
<1. 좌측 위는 을사조약 문서, 아래는 일본이 강제로 조약하는 경운궁과 그림 우측은 고종황제
2. 죄측은 헤이그의 고종특사 3인 우측은 제2회 만국평화회의 건물과 내부 3. 구 대성중학교
4. 현재의 용정중학교 5. 용정의 6개 중학교 연합기념비>
[시인 윤동주(尹東柱)]
그는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가 문익환이 다니고 있던 평양 숭실중학교를 전학했다.
이 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가 되어 다시 용정의 광명 중학교로 문익환과 전학하였고, 정일권을 만났으며,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정지용을 만났고, ‘소년지’에 시를 발표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1943년
사상범으로 체포되었고, 1945년 복강(후쿠오카)형무소에서 죽었다.
같은 형무소에 있던 고종4촌이며, 독립 운동가이자 청년문사인 송몽규는 윤동주가 강제로 주사를 맞고 죽었다고
말했는데 시인의 아버지가 화장해 가지고 와 고향집 앞마당에서 추모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추모회를 집도한 사람이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이었고, 그는 위의 명동중학교에서 소개도어 있으며,
시인의 생가도 복원했다고 했으나 우리는 가지 않다.
송몽규도 주사 맞고 죽었으며, 70년대 통기타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 간으로 서시를 작곡하기도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라는 대목은 한 때 우리 집 가훈으로 정했던 구절이나 너무 힘들고
불가능해서 포기한 후 가훈은 정하지 않기로 했던 시이다.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의 시 중에 마음을 아리게 하는 대목만 옮겨 본다.
[시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 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락....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 윤동주 서시의 시비 2. 대성중학교 정원에 있는 시인의 조각 3. 문익환 4. 윤동주 5. 송몽규>
[용정시청과 구 일본 영사관]
용두레 우물로 향하면서 중국의 한류스타 원조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당연이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1992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사랑이 뭐 길래’가 1966년도 이곳에서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의 대발이 아빠 이순재가 원조라고 했으며, 다음이 ‘대장금’의 이영애로 ‘한식의 홍보대사’라고 한다.
용정시와 거제도청년회의소와 자매결연 맺은 기념으로 명명했다는 ‘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을 지나면
지금은 용정시청으로 사용하는 하지만 일제 때는 영사관 건물이었다고 한다.
왼편 시청 담벼락에 붙은 있는 빨간 구조물이 일본 말로 토치카라고 하며, 토치카는 일본병사가 경비를 서는
곳이라 했는데 아마도 토치카(tochka)는 영어로 진지라는 뜻일 것 같은데..
뒤에 중국기가 있는 곳이 일제 때 영사관건물인데 이 건물을 짓기 전에 일본영사관이 청나라 관리한테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땅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하며, 청나라 관리는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일본은 많이는 필요 없고, 소가죽 한 장만 덮을 땅만 빌려달라고 했으며, 청나라 관리는 그럼 어디
한 번 지어보라고 했는데 준공 때 와 보니 엄청난 건물을 보고 놀랬다.
청나라 관리가 소가죽 한 장이 이렇게 크냐고 물었는데 일본영사가 소가죽 한 장을 가지고 와 가위로 얇고
길게 잘라 이어서 그 안에 세운 건물이라고 하여 ‘소가죽 한 장의 건물’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이 건물 아래는 형무소가 있는데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진 사람만 4,000명이 넘는다고 했으며, 여기서 얻어
터지며 심문을 당한 사람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서간도와 북간도로 나누는 기준은 두만강 쪽에서는 여기가 북간도이고, 압록강 쪽에서는 북간도 인데 만주라는
어원은 여진족이 명(明) 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明=日+月’ 明은 불을 뜻한다고 한다.
이 불을 끄기 위해 물 3개를 가진 삼수변에 찰 만(滿) 자와 삼수변에 섬 주(洲) 사용했고, 그들이 세운 나라도
삼수변에 맑을 청(淸)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면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어원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만주는 뭔 소리인지 이해도 힘들어 포기했으며, 다시 돌아서 거룡우호공원이라고
쓰여 있는 입구로 들어가 마지막 관광지인 용두레 우물을 구경했다.
<1. 빨간 토치카 담벼락이 있는 용정시청 2. 옛 일본 영사관 건물>
[용두레 우물 관람]
용정시의 이름의 어원이 되며,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것이지만 우물 자체는 무엇이 볼 것이 있겠는가?
볼 것이 있건 없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꼭 보아야 할 역사적 장소이기에 오고 싶었다.
일정에 없어서 못 보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가이드가 보여준다고 해서 무척 고마운 생각이 들었으며, ‘용정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우물(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우물 속을 들어다 볼 수 없어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물은 맑지만 쓰레기가 있는 것이 좀 아쉬웠으며, 짧은
시간이라 바쁘게 사진을 찍고 차에 올랐으며, 이로서 이번 여행일정을 다 마쳤다.
용두레 우물은 선구자 가사에 등장 하는 일송정, 해란 강, 용두레 우물 등에 의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용정의
이름은 용두레 우물을 퍼 올리는 장치의 모양이 용머리를 닮은 것에서 왔다고 한다.
용두레 우물은 1880년 초기 함경도 이민자들이 황무지 벌판에서 발견했으며, 1881년 청나라의 봉금령 해제와
1885년 북간도 조선 백성들에 대한 이주 금지령까지 해제가 되었다.
많은 함경도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이 우물터를 중심으로 북간도(연변) 최초의 조선 백성들의 공동체
마을이 들어섰으며, 조선 이민자들은 결집력과 개척정신으로 황무지를 수년 만에 옥토로 변하시켰다.
장인석, 박인언씨의 두 농가가 용정에 정착하면서 우물을 발견했는데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한글로 씌어
진 높이2m 가량의 석탑 옆에는 이곳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983년 용정현에서 1988년 시로 승격 되면서 6개의 진과 2개의 현에는 24만의 인구 있으며, 연길과 함께 중국
조선족의 양대 중심도시이고, 연길과 용정의 거리는 약 20km 정도이다.
<1.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된 우물(龍井地名起源之井泉) 탑 2. 용두레 우물 3. 용정지명기원지우물 탑
4. 거제도청년회의소와 자매결연 맺은 기념공원 ‘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 5. 우물 속>
[만무 과수원과 보이 차집]
연길을 빨리 가기 위해 지름길을 택했는지 마치 시골 길 같았으나 주위에 있는 사과배나무들이 어제만 해도
전혀 꽃구경을 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만무 과수원에 꽃이 만발할 때는 30분 정도 걷는 다고 했는데 조금만 늦게 왔으면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배꽃 밭을 구경할 뻔 했지만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 그것도 감사할 뿐이다.
기차가 지나가서 잠시 대기하면서 옆에는 ‘연변공전공사(延边供电公司)’라는 간판이 보였으며, 전압은 6만 6천
볼트라고 적혀있었는데 우리나라 변전소와 같은 곳으로 전공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이곳을 지나 조금만 가면 큰 도로 나오고, ‘장백산 로’라고 적힌 간판 밑을 통과하면 연길 시로 용두레 우물을
떠난 지 25분 만에 보이차를 판매하는 곳에 도착했다.
중국 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은 이야기이라 관심도 없었지만 누군가 좀 팔아 주어서 무안하지 않게 나아갈
것만 걱정했는데 손녀가 얼마나 잘 먹고 많이 먹던지 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손녀가 사 가자고 했으나 끊이는 것도 쉽지 않아서 생산지인 곤명에 갔을 때도 사지 않았는데 손녀가 좋아하는
것을 사 주지 못하는 것이 더 마음이 아렸으며, 미안을 면할 만큼만 사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판매점 옆에 과일 가게가 있어 구경을 했으며, 이곳 특산물이 사과배만 빼놓고는 색다른 것은 없었고, 종류도
몇 가지뿐이었는데 풍성하게 보일러고 그랬는지는 모르나 사과만 여러 상자에 나누어 있었다.
<1. 만무 과수원의 사과배 꽃 2. 연변공전공사(변전소) 3. 연길시 입구에 있는 ‘장백산 로’ 간판>
[연길의 아파트 이야기]
저녁식당으로 가면서 시내중심부를 흐르는 부르하통강(布鬱哈通江)이 보였으며, 일명 ‘불알통’ 강으로 이 소리를
듣고 웃으면 조선족이고, 멍하면 한족인데 이 강도 한강을 모델로 삼아 시민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야경이 화려해서 중국의 두 번째 홍콩이라고 한다고 했지만 좀 이른 시간이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상가와
다리엔 네온사인이 조금 켜져 있어 그나마 조금 볼 수 있었다.
연길시청, 도서관, 장백대교 등을 알려 주었지만 찾다가 사진도 못 찍었는데 강 따라 널어선 아파트와 서 있는
현대식 아파트가 많이 보여 자연스럽게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곳의 아파트는 골조공사만 해주고 내부 공사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며, 그런데도 중간 가격은 1평당 330만
원이 넘는다고 하고, 연길은 중국에서 5번째로 소비가 많은 동네라고 한다.
언어가 통하기에 배낭여행이 가능한 동네이기도 하며, 호텔 숙박료도 조식과 함께 4만원 정도하지만 여인숙에
가까운 만 원짜리도 있다고 한다.
노래광장이라는 간판은 노래방이 아니고 룸살롱이라고 하며, 우리처럼 차 뒤에 쓰여 있는 문구들이 있는데
우리의 초보운전을 ‘손이 차보다 새 것입니다.’이고, ‘저는 미인이 아니니 쫒아오지 마세요.’도 있다.
그리고 뒤에서 박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키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도 있으며, 저녁은 북한에서
직영하는 식당으로 냉면이라고 하며, 직원이 3년마다 바뀌면서 분위기도 바뀌었다고 한다.
대형술집 같이 네온사인이 찬란한 멋진 건물이 보였는데 이곳이 우리말을 가르치는 연길시 신흥소학교라고 하며,
12도의 지진에도 견디도록 설계된 것은 2008년 사천성의 문천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가장 피해를 입은 곳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이었는데 그 후 중국에서는 잘 지어진 멀쩡한 학교건물들도
부시고, 지진에 견딜 수 있는 학교를 새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연길시의 부르하통강과 아파트 2. 네온사인이 켜진 상가 3. 연길시 신흥소학교>
[류경호텔의 북한식당과 마사지]
이곳에서 내려 식당으로 향했는데 ‘류경호텔’ 1층에 있었으며,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차려진 음식은 깨끗하고
깔끔하고 맛도 있었으나 반찬이 아니고, 술안주였다.
술 드시는 분이 많았던 우리일행은 열심히 술을 시켰으며, 북한처녀들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어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종업원들이 안 된다고 하여 대놓고는 찍지 못해도 안 볼 때 마다 찍었다.
연출자들에게 5,000원 꽃다발을 주며는 사진 찍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모두가 일어서거나
앞으로 나가 사진 찍기 시작하면서는 방해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작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팀은 술도 많이 샀지만 꽃다발을 많이도 선사해서 그들이 몹시 좋아했으며, 뒤에 들어온 팀도 그들이
좋아할 만큼 꽃다발을 선사했지만 마음한 구석에는 편하지를 못했다.
손녀에게는 또 하나의 학습일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을 했는데 네팔에 갔을 때 북한식당에 데려갔다고
화를 내는 사람을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에 마사지를 받았다.
본래는마사지 받기가 너무 힘들어서 손녀와 함께 시가지를 구경하려 했으나 이미 돈을 다 지불했고, 쿤밍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받는 것이 기억나서 같이 받기로 했다.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손녀와 같은 방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늘 손녀를 귀엽게
여기고 돌 보아주시던 강동 사모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나를 담당했던 아가씨는 조선족이라 일반적인 대화가 가능해 살살할 것을 부탁했으며, 이야기를 듣는 동안 대충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중국여행 때마다 했지만 이런 마사지는 싫다.
겨우 2번째 밤인데 벌써 마지막 밤이었으며, 호텔에 들어갔는데 어제보다 더 좋다고 손녀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이런 기분을 남들은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딸하고 이렇게 여행을 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손녀랑 하게 되었는데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면
둘째 손녀 다음에 딸이나 아들과도 여행을 하고 싶다.
<1. 류경호텔의 북한식당 술안주 2. 북한 아가씨들과 함께>
[3일] 15년 4월 29일 수요일
●일정: 공항이동→ BX332→ [11:45] 연길출발→ [15:35] 부산도착
[죽탄(竹炭])판매장과 농산물 판매장]
아침에 일어나 일행들과 산책을 했는데 기차역이 옆에 있었는데 좀 더 일찍 일어나 산책을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으며, 호텔을 떠날 때 헤어지는 단체기념 사진은 여행 중 처음 있는 일이다.
대나무를 태운 것이 죽탄인데 흡수성이 좋고, 감촉이 좋으면, 냄새를 제거 하는 기능을 살려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다양한 제품이 있으며, 판매장에서 설명을 듣기 전 목에 띠를 맸다.
설명을 듣고 나면 목에 고통이 있을 정도로 뜨거운 것이 신기했는데 한의사인 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하나를 구입했으며, 죽탄제품은 행주, 수건, 옷, 방석, 도마, 베게, 칫솔을 구매했다.
다 상용해 보지 않았지만 행주는 냄새가 없는 것이 사실 같았으며, 수건 값은 절반 정도이라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선물용으로는 적합하지만 다른 것은 아직 성능을 확인하지 못했다.
전자레인지와 같은 원리로 전자파가 피부 속을 뜨겁게 하는 제품은 집사람이 즐겨 사용하지만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어떤 곳이 좋아졌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전기를 전공했지만 신기한 제품인 것은 사실이다.
공항 앞에 있는 농산물 판매장으로 갔으며, 우리일행도 조금 산다는 생각을 했지만 공항에서 본 사람들은
장사꾼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이 사 가지고 가는 것은 아마도 여행경비를 보충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많은 짐들 때문에 짐 부치는 시간이 많이 걸렸으며, 더디어 가이드와 인사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1. 대주호텔 옆에 있는 연길기차역 2. 농산물 판매장 벽에 있는 연변조선자치구 지도>
첫댓글 손녀랑 좋은 여행 하셨네요 훗날 두고두고 좋은 추억이라 말 하겠지요.백두산기행문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강할 때 여행 많이 하세요.
손녀와 함께 백두산을 여행한 모습이
언제나 가슴에 여운으로 남아 그대의 마음에 영원히 흐르겠군요 부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