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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역사
상고시대: 마한의 나주목에 속함
삼국시대: 백제에 속함
통일신라: 경덕왕 16년 (757년) 압해군 갈도현 개명
고려태조: 23년 (940) - 능창현(영광 남25리) 개명
조선시대: 태종 13년 (1413년) -능창현
1592년 임진왜란시 유씨 최초 입도
숙종8년 (1682년) - 지도현에 속함
고종 25년 (1888년) - 해남현에 이속
고종 32년 (1896년) - 다시 지도군에 속함
일제시대: 무안군에 속함
최초 면사무소 위치: 1914년 광대리 당두마을
현재 면사무소 위치: 1928년 덕산리 덕대마을
1969년 1월 1일 다도해 분리 후 신안군에 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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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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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3㎢ (신안군의 8.20%)
※경지 31% (15.96㎢), 임야 45.5% (23.47㎢), 기타 23.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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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및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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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 1,818호 (비농가 315호 17%)
※인구 : 4,518명 (2012년3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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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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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도서면으로 신안군청과의 거리는 54.4㎞의 지점이다. ※동경 125°55', 북경 34°45'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동경 125°55', 북경 34°45'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동으로는 바다건너 암태, 팔금, 안좌면과 서쪽은 바다건너 흑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남으로는 도초면과 북으로는 자은면이 이웃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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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및 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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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 23개노선 83.7㎞ ※교통 : 선박 10척, 차량562대 (버스, 택시11, 화물372, 기타1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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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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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도서 3개 (비금도,수치도,상수치도)와 무인도서 79개로 형성되어 있다. ※해안선은 132.64㎞에 이르고 있다.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으며 동으로 성치산맥과 서로 선왕산맥이 뻗쳐 있다. ※그 사이에 중서부 평야가 펼쳐 있고 북쪽은 황해에서 밀려온 모래로 명사십리 백사장을 이루고 있다. ※동해안 일대에 19.6㎞의 큰 제방을 구축하여 여기에 기름진 농토와 염전을 만들어 본면의 소득원을 삼고 있다. ※소금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비금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천일염을 생산해낸 곳이 다
※비금도에 염전이 생긴것은 1946년의 일이다. ※원평해수욕장이 있는 명사십리는 붉은 해당화를 품고 있고 하얀 모래가 십리를 두고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하누넘 해수욕장 또한 주변의 기암절벽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원평해수욕장의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의 낙조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지는해를 보고 바다속으로 빨려가는 황홀감에 뭍혀 버린다고 한다. ※비금의 용소와 본섬 내부에 있는 기린봉, 떡메봉 등도 볼만한 구경 거리이다. ※비금의 역사적인 유적지로는 광대리 뒷산 용굴을 넘는 고개마루에 성치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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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인물 | |
유옥우(신원리 자항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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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옥우(1914-1984)눈 민주혁신 정치가이다. 광주고보를 수료. 3,4,5,11대 국회의원을 지냄. 민한당 부총재, 국회 부의장을 지냄. 비금도의 방조제 축소에 힘써 염전개발에 공헌하였다. |
정 계 : 고 유옥우(전 국회 부의장) |
유학자 : 김 연, 박종현 |
교육계 : 조주선(전 교육장) |
재 계 : 곽청훈(청영건설 회장), 박순석(신안건설 회장) |
의료계 : 황일정(황치과의원 원장, 비금중·고 체육관건립 유공) |
언론계 : 이정남(경우일보 주필) |
자영인 : 박대두( 전 면장, 비금종합고등학교 발전위원장) |
유배인물 : 정약전, 최익현 |
농민운동가 : 서태석, 고백화 |
항일 의병활동 : 고응만 |
항일 독립투사 : 김정기, 김상수, 장병준 |
문화·예술계 : 고 박종옥(민족시인), 고 김한기(화가), 김왕현(조각가, 현 동신대 교수), 김숙현(서예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