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 : 현대 교회의 갱신을 위한 한 모델 |
글: 이상명(클레어몬트대학원 종교학과 신약학 Ph.D. 과정)
I. 여는 글
미국 교회는 새로운 도약이냐 아니면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느냐 하는 중대한 시점에 서 있다. 물론 하나님은 헌신된 사람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일구어 가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하늘의 소리에 깨어서 응답할 수 있는 교회만이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바나 박사의 목소리를 구태여 빌리지 않더라도 세속과의 경계선이 무너져서 복음과 도덕의 순수성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교회는 피상적인 변화가 아닌 바나 박사가 경고한 근본적인 변화, 즉 “마음과 영혼, 심장의 개혁”이 없이는 미국 교회는 급변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영적 생명을 잉태케 하는 산실이 될 수 없다. 역사가 증언하는 바는 교회는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전쟁을 치러 왔다. 즉 냉대와 박해라고 하는 고강도 전쟁(high intensive war)과 저급한 세속문화와 반복음적인 풍조에 서서히 병들어 결국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하게 하는 저강도 전쟁(low intensive war)이 그것이다. 교회는 고강도 전쟁을 치를 때, 복음과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순교를 선택하였고 그들의 피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병든 문화라고 하는 독소(毒素)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게 만드는 저강도 전쟁의 와중에 있을 때는 교회는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 교회는 이 두 가지 종류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지만, 초기 교회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미 기독교화된 서구 문화 속에서 교회는 악의 세력이 마련해 놓은 저강도 전쟁 속에서 개신교의 근본 정신인 부단한 개혁과 갱신을 상실한 채 세상의 저급한 문화에 힘없이 끌려가 버릴 정도로 나약해져 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복음의 탄력을 상실케 하고 세속과 교회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그 전쟁 속에서 계속해서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는 것이 작금의 교회의 현실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교회가 처한 이러한 심각한 상황 속에서 사랑과 일치의 정신을 회복하고 강력하게 도전해 오는 저급한 세속문화에 대처하고 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가정교회를 살펴보는 것이 본 소고의 목적이 되겠다.
II. 가정교회의 역사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시작된 초기 기독교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정교회를 도외시하고서는 아무 것도 논할 수 없다. 필슨(Floyd V. Filson)이 지적한 것처럼, “가정교회는 주후 1세기 동안 그리고 심지어 그 다음 세대의 교회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기존 유대의 회당 공동체(synagogue community)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들에 의해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점차로 가정을 예배와 접대, 가르침과 선교의 센터로 삼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가정교회 상황에 있어서 조직과 지도력, 그리고 선교 확장이 원활히 수행될 수 있도록 한 주된 요인은 바로 접대였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을 여행할 때, 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접대는 그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한 동력이 되었다. 로마서 16장 23절에서 “나와 온 교회를 잘 돌보아 주는” 가이오의 경우와 빌레몬서 22절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숙소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보았을 때, 이러한 접대가 초기 교회의 선교 영역 확장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德目)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접대의 의무는 선교 여행의 다음 노정을 위한 재정적 지원까지도 포함되었다. 로마서 15장 24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곳(스페인)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바울은 실제로 로마교회의 회중들에게 그의 예정된 선교를 위하여 재정적인 보조금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재정적 지원은 바울과 그의 가정교회 사이의 상호 의무라는 사회적 계약을 설정하였다. .또한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the deutero-Pauline school)이 각 교회공동체에 보낸 편지는 이러한 가정교회에서 제공되는 접대에 힘입어 기록되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손에 신약성서가 쥐어진 배경이 되는 것이다.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는 그의 동료들에 의해 지역 가정교회들에게 전달되었다. 바울은 그의 이름으로 그의 동료들을 따뜻하게 대접해 줄 것을 규칙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면, 디모데(고전 16:10), 뵈뵈(롬 16:2)와 에바브로디도(빌 2:26 이하)의 경우가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마가복음 6장(병행본문: 마태복음 10장과 누가복음 9-10장)에 보면 예수께서 12제자들(마가와 마태의 경우) 혹은 70인(누가의 경우)을 각 선교지로 파송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하신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라.” 공관복음서의 이와 같은 묘사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가정교회의 형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가정이 중요한 선교의 거점이 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 유대주의(Judaism)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Q 공동체)는 방랑하는 복음 전도자들(wandering missionaries)과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절로서 이해하였던 정착 공동체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사도행전은 이러한 가정교회를 통하여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고 확장하여 나갔는지를 잘 묘사해 놓고 있다.
사도행전 2장 46절: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5장 42절: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20장 20절: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위의 사도행전 2장 46절과 5장 42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가정에서 회집하였다. 이 사실은 가정 식탁교제(household table-fellowship)라는 유대적 양식(樣式)이 그 중심이 되는 사도행전으로부터 볼 수 있다. 누가는 또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감람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모였던 곳은 다락방이었으며(행 1:13), 그때 120여명의 신도가 모여 유다의 후임자를 선출한 것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행 1:15-26). 이것은 그들이 회당이 아닌 서로간 모일 수 있는 기존의 장소, 즉 일반 가정집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누가의 기록을 볼 때, 기독교 공동체가 한 장소에서 함께 모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령강림(Pentacost)의 결과로 믿는 이의 수가 약 3,000명에 달하게 되었고(행 2:41; 참고. 행 4:4; 5:14; 6:7), 그러한 회중들이 한 장소에서 모이는 것은 여건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감옥에서 놓여난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가서 그곳에 모인 신자들을 향해 한 말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베드로는 ... 주께서 자기를 감옥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야고보와 다른 신도들에게 알리시오’ 하고 말하고는, 거기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진술이외에도, 우리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가정교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스데바나(고전 1:16; 몬 2), 고넬료(행 10); 리디아(행 16:15); 빌립보의 간수(행 16:31-34)와 그리스보(행 18:8)의 각 가정이 그 경우에 해당된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당면한 현실적 문제는 각 지역마다 선교 센터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필슨은 바울의 선교 활동과 관련하여 공동체 구성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가정을 확보하는 것이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정교회에서 모인 회중의 수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30명에서 50명선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대 도시들에 있어서 개인 가정집을 건축하는 것은 공공기관의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으며 도시 전체가 대부분 공공건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예를 들면, 바울의 주된 선교지였던 고린도의 경우, 발견된 전체 유적지의 99%가 상업, 시, 신전과 관련된 건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선교 거점으로서 개인 가정집의 확보가 그 도시 전체 선교에 어떤 연관이 있으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왜 한 가족 구성원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도 바울이 세운 새로운 공동체는 몇몇 새 개종자들의 집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나갔다. 따라서 각 가정이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새로운 교회 공동체는 생성되었고 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신약성서에서 가정교회의 소유주로 보이는 헌신된 이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굴라와 브리스가(행 18;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혹(R. F. Hock)은 바울이 아굴라와 같은 직업인 ‘천막깁는 일’(tentmaking)을 하였으며, 그 일을 위해 그와 함께 일터를 공유한 점을 통해서 그 일터를 지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한 전통적인 교제의 장소로 간주하였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 비추어 볼 때, 이들 부부는 고린도에서 그들의 집을 신자들에게 가정교회로 제공하였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다 함께, 주안에서 진심으로 문안합니다.”
디디우 유스도(행 18:7): 학자들은 로마서 16장 23절의 가이오가 사도행전 18장 7절에서 언급된 디디우 유스도의 첫째 이름(praenomen)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린도에서 전체 기독교 공동체를 수용할 집을 가지고 있던 교인은 회당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어서 교인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바울에게는 매우 귀중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디디우 유스도(가이오)의 집은 개별 가정집에서 모이는 그런 가정교회가 아닌 그 지역 전체 기독교 공동체의 모임을 위한 장소로 제공되었을 것이다.
스데바나(고전 1:16; 16:15): 스데바나와 그 가족은 바울에 의해 세례받은 몇 안되는 가족으로서바울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고린도전서 16장 15절에 보면 스데바나의 헌신과 선행이 그가 속한 공동체에 알려진 것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요,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
그리스보(행 18:8 이하): 회당장으로서 바울이 전하여 준 복음을 듣고서 온 식구와 함께 주님을믿는 신자가 되었다. 회당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그의 개종은 사도행전 18장 8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이들의 개종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주석 5 참조).리디아(행 16:14): 바울이 빌립보에서 얻은 첫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색 옷감 장수였다. 리디아와 같이 유대-헬라의 디아스포라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들’(God-fearers)은 대부분 일반 서민들 가운데 가장 낮은 계층(예를 들면, 노예) 출신의 개종자들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리디아 또한 신자들을 위한 모임의 장소로 자신의 가정집을 제공하여 빌립보에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뵈뵈(롬 16:1-2): 그녀는 바울을 포함한 많은 신자들의 보호자였거나 후원인이었다. 로마서 16장2절은 그녀가 가정교회에서 한 역할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바울)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아마도 뵈뵈는 가정교회 회집시 어떤 직책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와 여행자들(복음 전도자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무명의 간수(행 16:31-34): 빌립보에 있는 동안, 바울과 실라는 이 무명의 간수가 베푼 접대를 제공받았다.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처럼, 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개종하였다. 이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과 식탁교제를 나눈 것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어떤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가서 동일한 식탁에서 마주하여 식사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처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 가정교회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위의 이들이 제공한 장소 외에 사도행전 20장 7절 이하는 드로아에 모인 신자들의 회집을 기록해 놓고 있다. 사도행전 1장처럼 그 모임은 3층 다락방에서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 진다. 또한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행 20:6), 두로에서 7일(행 21:4), 가이사랴 빌립의 집(행 21:8 이하)과 예루살렘 나손의 집(행 21:16)에서 명확하지 않는 날 동안 숙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위의 가정교회 소유주들에 관한 간략한 개관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독교 초기 역사 속에서 자신의 가정집을 신자들의 모임을 위해 열어 놓은 그들은 재산을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적 직책을 수행하면서 선행을 베푼 이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봉사와 헌신이 없었다면 과연 기독교는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었을까?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분명 회의적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인 가정집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모임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이 첫 번째 기독교 바실리카(basilica)를 지었을 때인 주후 4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가 태동되던 초기부터 그후 거의 300년간 회당이나 종교적 회집의 목적으로만 지어진 건물이 아닌 일반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가정집은 콘스탄틴 이전 기독교에 가해진 박해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나름의 은밀한 장소를 신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격렬하게 대적하는 세계의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건축물을 짓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일을 고의로 피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주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란 칙령(the Edict of Milan)은 기독교 건축 양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웅장한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태동케 하였다. 크로테이머(Krautheimer)는 초기 기독교 역사(주후 50-313년) 속에서 교회 건축 양식이 3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1단계(주후 50-150년): 가정교회, 즉 내부공사를 함으로써 구조를 변경하지 않은 채, 지역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사용된 몇몇 신자의 가정집.
2단계(주후 150-250년): 보다 증원된 인원을 수용하기 위하여 개조된 가정집.
3단계(주후 250-313년): 콘스탄틴에 의한 바실리카 건축 양식이 도입되기 이전, 보다 큰 건물과 (사적 혹은 공적 용도를 위한) 홀이 딸린 건물.
교회 건축 양식에 있어서 이러한 단계적 구분이 엄격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2단계에서도 보다 가난한 기독교 공동체는 여전히 개인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진 것으로 고고학적 조사는 보여준다. 애찬(agape)을 위해 부엌이 딸린 가정집만으로도 만족한 1단계의 기독교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의 보다 다양한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가정집을 개조하는 2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다양한 요구는 성찬(eucharist)을 애찬으로부터 분리한다던가, 가정교회 연단에 성좌(throne)를 놓고, 회중석을 그 연단을 바라보도록 정위시킨다던가, 교리문답 구성원과 정식 구성원 사이의 분리와 세례반(baptismal fonts)의 사용 등 신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추어 기존의 가정집을 개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정교회로 제공된 가정집의 소유주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부유한 계층에 속하였으며, 그들 가운데는 숙련공과 장인(craftsmen) 또한 포함되었다. 위에서 논증한 것처럼, 신자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가정교회의 방은 기존 건물에 딸려 증축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교회 건물이 원래의 가정교회 위에 세워졌다. 또한 흥미 있는 사실은 6세기초까지 로마의 비거주지역(the non-residential center)에서는 어떤 교회의 건물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사는 거주 지역에서만 (가정교회를 포함한) 교회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주후 400년경 위대한 교부이자 신학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은 가장(the head of the household)이 가정교회의 사제라고 하면서 가정성소(the domestic sanctuary) 혹은 가정교회의 지속을 주장하였다.
III. 가정교회의 조직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중요한 선교의 거점이요 활발한 교제의 중심지였던 이러한 가정교회의 외형적 형태에서 우리의 눈길을 돌려 이제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내부 조직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약성서를 포함한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이단과 박해, 그리고 다양한 종교문화 속에서 가정교회는 어떤 조직을 갖추어 대응해 나갔는가?
사도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위임한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를 직접적으로 물려받음으로써 기독교 운동(the Christian movement)을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안에서 예언적인 혹은 카리스마적인 갱신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원래 제자들과 같이 그분으로부터 직접 받은 그러한 유형의 사도적 위임(apostolic commission)은 없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경험한 후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계시에 의한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갈 1:12; 2:2). 사도 바울을 포함한 이들 사도들이 죽기 전까지는 지역교회(즉, 가정교회)의 어떤 개인들이 명예로운 직책을 수행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그 이후의 감독 지도 체계(an episcopal system of leadership)와 같은 권위나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감독(overseers)이나 주교(bishops)라기 보다는 목사(ministers)나 봉사하는 이들(servants)이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전자와 같은 감독이나 주교 체제는 그 기원이 이방적이었던 반면에, 장로(elders) 체제는 그 기원을 유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죽기 시작한 이후에, 가정교회 내의 조직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사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가정교회는 공동체 기능, 예배와 조직을 (사도들과 같은) 어떤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지닌 인물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유지해야 하는 일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정교회는 바울서신(과 복음서)의 수집과 회람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동시에 지역의 가정교회들을 운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감독 지도 체제를 도입하였다. 주후 1세기가 끝날 무렵, 가정교회 내에서는 누가 권위를 지니는가에 관한 다툼이 있었다. 예언자들과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은 선포와 기적을 행하는 영적인 힘을 주장하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두루 다니면서 여행하기를 계속하였다.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이 주목한 것처럼, 그러한 카리스마적인 유형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원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에토스(ethos)와 권위를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적인 유형의 인물들의 활동은 때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요한서신은 거짓 예언자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시험해 볼 것을 권고한다(요일 4:1; 참조. 요이 10). 또한 2세기 중엽 교회의 교권과 제도에 도전하여 일어난 몬타니즘(Montanism)으로 알려진 “새로운 예언 운동”이 소아시아(Asia Minor)에서 일어났을 때,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존의 교회가 취한 대응은 감독만이 그러한 교회 질서와 해석을 위한 권위를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독교는 서서히 보다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는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다.
위에서 논증한 것처럼 초기 기독교는 어떤 지역, 예를 들면 고린도, 로마나 에베소와 같은 보다 큰 도시에 있는 몇몇 가정교회로부터 발전해 왔기 때문에 그 지역 여건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소위 정통교회는 이러한 다양성에서 단일화로 나가게 된다. 그것은 이단(특히, 영지주의)의 발호와 교회의 수적 증가로 인하여 어떻게 하면 이러한 다양한 성향의 가정교회를 일치시키고 조직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소위 정통교회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진정한 서신(the authentic Pauline letters: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에서 발견되는 초기 가정교회의 모습에서는 아직 이러한 조직화된 교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정교회를 제공하고 후원자가 된 이들은 임시 지도자들일 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어느 정도 바울과 회중 사이의 조정자로서 활동하였다. 예를 들면, 디모데(고전 16:10), 뵈뵈(롬 16:2), 에바브로디도(빌 2:26 이하)의 경우가 그러한 예에 해당되겠다. 바울과 가정교회 후원자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바울과 빌레몬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가정교회 후원자인 빌레몬에게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징벌하지 않고서 그를 맞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서 그 편지를 빌레몬에게 전하는 이는 다름 아닌 오네시모임을 주목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요청을 할 때, 바울은 자신의 후원자인 빌레몬에게 그의 사도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빌레몬을 공경하는 어조로 편지를 써내려 가고 있다: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4절);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하고,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가,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해주리라는 것을 압니다”(21절). 이 편지에서 우리는 영적 권위와 사회적 권위 사이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바울은 빌레몬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점에 있어서 그는 특권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빌레몬 또한 바울의 후원자로서 그의 가정과 가정교회 안에서 사회적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빌레몬의 사회적 권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바울의 영적 힘과 설득이 빌레몬이 신앙의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데 주효했음을 볼 수 있다.. 바울과 그의 가정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이 고린도전서 1장 11-14절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세례를 준 사람들, 즉 그리스보와 가이오는 다름 아닌 가정교회의 주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둘을 제외하고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고전 1:14). 이러한 사실로 짐작컨대, 바울은 그들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례는 바울과 가정교회 후원자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설정케 하였을 것이다. 명백히 바울은 그들을 그의 후원자요 동료로 인식하였고, 그들은 바울과 회중 사이에서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이트(L. Michael White)는 바울이 그의 지역 가정교회 안에서 카리스마적인 사도적 권위만을 인정하였으며, 사회적 혹은 제도적 지도력의 출현에 반대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대신 바울은 가정, 접대와 후원과 같은 현존하는 사회적 관례를 준수하였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과 가정교회에게 베푸는 그러한 봉사를 사랑(agape)과 교제(koinonia)라는 표현으로 담아 내고 있다. 가정교회 후원자들은 명예,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 하였고, 자신의 영역 내에서 실행될 수 있는 사회적 권위가 주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클럽이나 종파에서 후원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직책이나 특권을 최초의 가정교회의 후원자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가정교회 후원자들이 행사한 보다 명확한 권위의 흔적은 이후 요한삼서 9절에서 볼 수 있다: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독단적이고 전통적인 덕목의 하나였던 접대를 거부하는 가정교회의 후원자들의 출현은 결국 목회서신에서 감독을 위한 자격조건을 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우리는 목회서신에서 보다 제도적이고 조직화된 가정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후 2세기초에 쓰여진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교회의 지도적인 직분과 목회적 감독에 관심하므로 목회서신이라 불린다. 이러한 목회서신에는 감독(딤전 3:1-7), 집사(딤전 3:8-13)와 장로(딛 1:5-9)로 교회직분을 보다 세분화하고, 그러한 직분의 자격조건을 기술해 놓고 있다. 보다 원시적인 가정교회에서 이제는 보다 조직적이고도 제도적인 가정교회로 서서히 이행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IV. 가정교회의 신학적, 사회적 특성
그렇다면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묘사되는 이러한 가정교회의 신학적이고도 사회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신약성서에서는 가정교회를 하나님의 가족과 신앙의 가정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롬 8:15-16; 갈 4:5-7, 6:10; 엡 2:19, 3:14-15, 5:1, 6:23). 신약성서의 진술을 들어보자:
로마서 8장 15-16절: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장 5-7절: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에베소서 2장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3장 14-15절: “그러므로 나는 무릎을 끓고 아버지께 빕니다.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5장 1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에베소서 6장 23절: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위 구절들에서 우리는 아주 친근한 아버지, 자녀, 식구와 같은 표현을 듣게 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상투적인 표현이 아닌, 초기의 가정교회가 얼마나 가족적이고도 지체의식이 강한 신앙공동체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고린도교회처럼 갈등과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고전 1:11-13), 분명 가정교회는 사회적 신분과 인종의 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여 각 지체를 하나님의 자녀요 한 식구로 생각했던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가정교회 사이의 관계를 몸의 하나됨,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명시하였다(고전 10:16-17; 11:24, 27, 29; 12:12-13, 14-27; 롬 12:4-5; 골 1:18, 24; 2:19; 3:15; 엡 1:22-23; 2:15-16; 4:4, 12, 15-16; 5:23, 30). 이것은 당시 기존의 가정이 기독교 사회 조직의 핵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가정 위에 세워진 교회는 결속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외부의 여러 가지 악조건(박해와 갖가지 이단의 도전 등)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여기에서 주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과 같은 공동체 인식은 초기의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어떤 신자의 집에서 모임이 이루어질 때, 가정으로서의 교회 이미지는 가정 생활의 중요성과 부모가 주된 영향을 미치는 가정교육의 히브리적 모델을 반영한다. 또한 가정은 어떤 문화 속에서도 존재하는 보편적 단위이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하는 인식은 결국 문화적 차이를 넘어 결속과 단합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사도행전 2장에서 반영된 성도간 유무 상통하는 초대교회의 정신을 낳았던 것이다.
둘째로, 가정교회는 집과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계층으로부터 노예계층까지를 포괄하여 혼합되어 있는 사회의 건강한 단면을 명백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가정교회는 인종적, 계급적, 성적 차별을 넘어서 평등으로 나갈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서 가정교회는 모든 사회적 범주(social categories)를 넘어서 차별을 제거하였다. 다인종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교회가 이러한 인종적 편견과 성적 차별을 극복하여 열린 교회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복음이 한 계층, 한 인종을 위하여 게토화될(ghettoization)때, 복음의 능력은 상실되는 것이다.
셋째로, 가정교회는 문화적으로 적절한 모델이었다. 가정으로서의 교회는 친밀감을 향상시켜서 서로간 자매와 형제로 인식케 하였다. 가정교회는 문화적 다양성 안에서 복음을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음으로서 분산화된 선교적 자유(a decentralized missional freedom)를 제공하였다. 성서가 한 나라의 언어로 잘 번역되었을 때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영적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처럼, 각 지역에 분산된 가정교회는 형제의식이나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에 근거하여 그 교회가 속한 문화를 읽어 내고 역동적으로 대처함(즉, 어떤 부분은 극복하고 어떤 부분은 수용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그 생명력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크게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을 중심으로한 헬라적 기독교 공동체로, 보다 세밀하게는 수갈래의 다양한 색깔의 기독교 공동체가 당시 공존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각 지역과 그 지역의 문화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가정교회에서 초기 기독교가 출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다양성과 일치성이 어떻게 조화롭게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교회를 성숙케 하고 끊임없이 확장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넷째로, 가정교회는 아주 독특한 친교와 예배를 위하여 가장 역동적인 환경을 제공하였다. 사도행전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정교회로 확산된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특징은 이러한 가정교회의 환경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예배는 특히 설교, 상호 권고, 그리고 성만찬의 센터가 된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이루어진 공동체의 친교로 표현되었다. 기독교 초기부터 가정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전이나 회당에 의존하지 않은 채, 함께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장소가 됨으로써 성전이나 회당이 줄 수 있는 기존의 형식화된 신앙에서 탈피하여 그들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양식을 자유롭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가정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담아 냄으로써(마 9:17) 기존의 회당공동체가 가지지 못한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역동적이고도 다양한 기독교 양식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가정교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참된 교회로 간주하기 전에는 자신들을 위하여 특별한 건물을 짓는데 관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초기 가정교회(1단계)에서는 건물을 짓거나 증축하는데 가장 중요한 장애물인 건축비용의 투자가 문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새로운 가정교회는 새로운 사회 단면을 드러냄으로써 내부로 향할 수 있는 경향(the obstacle of introversion)을 극복하여 외부로 뻗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맥가브란(Donald MacGavran)은 가정교회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성향이 초기 교회의 성장의 원인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특별한 건물의 중요성은 주후 3세기부터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교회건물 건축은 세대마다 큰 부담이 되었으며, 효과적인 선교를 방해하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타이드발(Derek Tidball)은 교회 건축과 선교 제약의 상관관계를 잘 제시해 주고 있는데, 선교가 제약받는 이유로 그는 (1)많은 정력, 재정과 인원이 건물을 좋게 보수하는데 들기 때문이며, (2)공적 (교회)건물은 그것의 사용과 위치에 있어서 어떤 변화가 주어지지가 어려우며, (3)공적 (교회)건물은 특히 가정교회와 비교했을 때 비인격적이며, (4)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청중과 복음 사이의 어떤 부차적인 장애물을 놓는 복음을 듣기 위하여 생소한 장소로 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타이드발의 관점에서 볼 때, 공적 교회 건물은 가정교회에 비해서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기동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 건물을 보존하고 관리하는데 수많은 경비가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요인들은 교회가 실질적으로 해야 할 교육, 선교, 봉사에 제약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초기의 가정교회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고 관리하는데 경비를 전혀 지출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다섯째로, 가정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기 가정교회의 주인들은 자연스런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이 권고하거나 명령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겼다. 필슨(Filson)은 이방인이었던 가정교회 주인들은 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들”(God-fearers)이었으며, 충분한 교육과 실질적인 행정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여성들이 가정교회 설립에 주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참조. 행 16:14-15, 40; 롬 16:1-2, 3-4; 고전 1:11; 16:19; 골 4:15; 요이). 초기 교회의 선교 모델은 오늘날의 교회와 현대 선교사에 있어서 남성이 지배하는 그러한 모델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와 선교 영역에 있어서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면 교회의 잠재적인 지도력은 보다 풍부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여섯째로, 초기 가정교회는 개종에 있어서 통합된 결속의 개념을 강화시켰다. 초기 가정교회에 있어서 가족 전체의 개종은 흔한 일이었다(행 10:1-2; 16:13-15, 31-34; 18:18). 한 조직으로서 가정교회는 개종과 같은 이러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명백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가족 전체 개종은 현대교회가 지니고 있는 개종에 관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완하고 교정해 준다. 다시 말해서 초기 가정교회에 있어서 개종은 가족 단위의 “복합된 경험”으로 이해되어 졌다. 개종은 어떤 순간 주어지지만 지속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각 개인에게 부여된 거룩한 임무의 위임인 것이다. 개종은 사회-교회적 실체이며, 특별한 사회적 상황 안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 소고에서 제시된 첫 번째 특성과 관련이 있는데, 가족 구성원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혹은 부모)에게 선교 전략의 초점을 맞출 때,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성서적 단위는 강화되는 것이다. 이 점은 점점 가족이 해체되고 이로 말미암아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는 미국 사회에 대하여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하겠다. 가족이 무너질 때, 교회 또한 그 기반은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 식구 의식은 가정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초기 가정교회에 무한한 잠재력을 제공해 주었던 가족개념을 현대교회는 강화하고 새롭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일반 가정에 세워진 초기 교회는 그러한 가정단위로 츨발하였기에 지역을 복음화하였고 전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일곱째로, 가정교회는 성서적이고도 기독교적인 접대를 실질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만일 초기 가정교회 구성원들이 사도나 그의 동료들에 대하여 아낌없는 후원과 접대를 베풀지 않았다면 과연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고 선교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을까? 맬러비(A. J. Malherbe)는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접대는 하나의 사회적 덕목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약성서 가정교회에 있어서 접대를 최우선시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당시 사회적으로 관례화된) 접대를 기독교적인 사역 원칙으로 변형할 만큼 (다른 종교에 비해) 이 덕목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리들(D. W. Riddle)은 그의 논문, “초기 기독교 접대: 복음 전달의 한 요인”(“Early Christian Hospitality: A Factor in the Gospel Transmission")에서 접대를 초기 기독교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중의 하나라고 지적하면서 접대가 기독교 성장의 궁극적인 매체(an ultimate medium)라고 주장하였다. 현대교회에 있어서 이러한 초기 가정교회의 접대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관례화된 덕목을 따라가는 정도에 머물기보다는 그러한 덕목들을 발굴하여 적극 활용하고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는 초기 선교전략의 문제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었다는 점이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가족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다. 바울은 새로운 도시를 여행할 때, 그는 선교 활동을 위한 회집 장소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한 도시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할 때, 그의 주된 목적은 한 가정을 얻는 것이었다. 가정은 결속력 있는 개종자들의 그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과 주변 이웃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센터가 되었다. 로마를 정복했던 초창기 기독교 운동은 실제로 소규모의 가정교회 운동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아가서, 세대를 이어서 내려가는 교회의 갱신과 구제 활동(outreach)은 소규모 그룹과 가정교회를 통하여 전개되었으며, 그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서로간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슈나이더(Snyder)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가정에서 비공식적으로 함께 모인 8명에서 12명에 달하는 소규모의 그룹은 현대 세속 도시 사회(modern secular-urban society)에서 복음으로 교제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조직이다. 그런 그룹들은 전통적인 교회 봉사, 제도적인 교회 프로그램이나 대중 통신 매체보다도 오늘날 도시 속에 교회가 선교하는데 더 적절하다.
슈나이더가 시사하는 점은 바로 현대교회가 비대해지고 제도화되면서 상실할 수 있는 친밀감에 대하여 가정교회는 가족 같은 분위기로 기존 교회를 바꿀 수 있는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교회 교인들의 특징은 (대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직업과 교육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거주지를 바꾸는) 이동성(mobility)과 (자신에 대하여 밝히기를 꺼려하여서 무수한 무리 속에 자신을 숨기는) 익명성(anonymity)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의 가정교회가 지녔던 모든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서로간 형제와 자매로 인식하는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초기의 가정교회로 돌아갈 때, 이러한 걸림돌을 극복하여 하나님 나라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을 여길 수 있는 의식이 생길 것이다.
V. 닫는 글: 현대교회의 갱신을 위한 한 모델로서의 가정교회
지금까지 우리는 가정교회의 역사, 조직, 그리고 신학적, 사회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다. 본 소고를 통하여 기독교 초기 역사에 있어서 소규모 단위의 가정교회가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점점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가는 동시에 복음의 탄력성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어 가는 현대 교회는 앞서 바나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여 보다 쇄신된 기독교가 될 것인가? 각 교회가 처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확장시켜 나가고 복음을 전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 초기의 가정교회는 나름의 해답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기독교 태동의 엄청난 힘이 그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2,000년이라는 시간과 지리적, 문화적 공간을 뛰어 넘어 초기의 가정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대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가 지니고 있는 장점과 정신이 현대교회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점들을 최대한 살려서 현대교회에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어떤 점에서는 현대교회보다 더 힘든 악조건 속에 초기 가정교회가 처해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 28:19-20)을 힘차게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분명 있을 것이다. 본 소고의 IV장에서 논증된 신학적, 사회적 특성은 현대교회가 유심히 살펴보고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지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기존의 교회체제를 유지하면서 초기 가정교회를 개교회에 적용하려는 실제적인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제와 관련된 대부분의 서적들은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 역사 속에서 가정교회의 역사와 조직에 대하여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지만) 기독교 역사로부터 단절된 느낌을 준다. 본 소고는 초기 가정교회를 현대교회에 적용하는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청사진을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개교회에 넘기려고 한다. 그러한 작업은 본인의 능력 밖의 일이며, 개교회가 처한 여건에 따라 다양한 지침과 해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가정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분명 현대교회의 갱신을 위한 한 모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