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조광조, 정여립, 광해군, 정조, 홍경래, 갑오농민전쟁 등 도약의 계기가 몇번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소현세자도 우리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세자는 1627년 정묘호란의 와중에 전주에서 강석기의 딸과 가례를 올렸지만 처음엔 강빈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자는 원래 윤인발의 딸과 정혼한 사이였으나 윤인발이 1624년 이괄의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기에 파혼이 된것이다.
참혹했던 병자호란의 와중에도 부왕 인조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하던 소현세자는 삼전도 치욕의 댓가로 볼모로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인조는 삼전도(송파구 잠실)에서 청태종에게 머리를 아홉번이나 피가 나도록 찧었다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청은 인질을 통해 조선과 명의 소통을 막고자 함이었다. 이 일이 세자의 운명을 화려하게 또는 비참하게 바꾸는 계기가 된다.
1637년 청의 수도 심양(瀋陽)에 끌겨간 소현세자는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하여 조선의 부국강병과 개방에 대하여 지대한 꿈을 가지게 된다. 1644년 명(明)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목을 매고 청(淸)은 이자성을 물리치며 북경 자금성에 쉽게 들어온다. 청은 이제 자신만만하여 세자와 봉림대군 형제를 조선으로 돌려보낸다. 이듬해 세자는 기쁜 마음으로 귀국을 재촉하지만 그의 귀국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의심이 많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조는 그의 귀국을 심히 못마땅히 여긴다.
사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그는 정통성 시비에 항상 휘말리고 언제 淸이 왕위를 세자에게 선위하라고 명할지 모르는 파리 목숨같은 운명이었다.
그런데 청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있는 세자의 귀국은 곧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대상이었다. 인조는 김유, 김자점 등 반정공신들의 정권 유지 압력도 무시할 수 없었고 특히 낙당 김자점은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를 며느리로 맞아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인조는 곧 그를 냉대하고 문안조차 받기를 거부했다. 세자의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곧 그는 귀국 후 3개월만에 몸져 눕고 전의 이형익의 침을 맞고 3일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숨을 거둔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친정과 관련된 의사였다. 일설에 의하면 인조가 세자에게 벼루를 던졌다지만 그 사실은 신빙성이 없다.
여기서 세자의 치료를 맡은 전의는 그 책임을 물어 처벌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일이 없고 오히려 그의 처벌을 주장한 자가 처벌되었다. 세자의 이모로 그의 염습에 참여한 이진원의 아내는 회고록에 이렇게 남겼다."세자의 사체는 검고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나왔다고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전형적인 독살 시체의 모습이 아닌가?
사실 세자는 그리 약골이 아니었다. 학질을 앓았다느니 소문을 무마시키려 애를 썼지만 그의 자연사에 수긍하는 이는 궁중에 아무도 없었다. 장례는 매우 초라하게 치러지고 그가 가져온 천리경, 화포, 과학, 천주교 서적(마떼오 리치의 天主實義)은 모두 불태워졌으며 그가 북경에서 데려온 천주교 신자인 옛 명나라 궁녀들은 모두 추방당한다. 그의 사후 당연히 그의 원손 석철이 세손에 책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동생 봉림대군(효종)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침묵과 공포로 몰아갔다.이후 인조와 그의 사악한 후궁 양화당 조귀인(김자점의 사돈)은 세자빈 강씨마저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 어느날 인조의 수라상에서 독이 나왔다고 소동을 피워 동궁전 상궁들이 죽을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강빈이 감시 상태에 있던 것을 보면 독살 음모는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
강빈은 인조가 거처하는 대전 근처에서 서럽게 목놓아 울고 대전 문안까지 거부하다가 폐위되어 친정에 나가 있다가 사약으로 끝을 맺고 친정 식구들은 몰살당한다.
강빈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로 피신해 있었는데 이때부터 조소용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중전(인열왕후)이 승하한 뒤라 왕실의 어른이 아무도 없는 상태의 암투였다. 강빈도 봉림대군 내외와 함께 8년간의 볼모생활을 견딘 몸이었다. 강빈은 비굴하게 살아남느니 당당한 죽음을 택했다.
그녀의 세아들 역시 유배당하여 효종때 둘이 죽는다. 세자의 증손자 밀풍군은 영조때(1728) 이인좌의 역모에 연루되어 죽는다. 세자를 따르던 임경업 장군은 김자점의 고문으로 숨을 거둔다.
인조는 이 모든 일을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겠지만 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은 서양문물을 일찍 접할 기회를 잃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적지에서 학문과 연구에 힘쓴 그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대신 무모한 북벌등을 기획한 효종이 집권하면서 유교와 보수를 고집하는 나라로 변해갔다. 여기에는 우암 송시열의 노력도 컸으니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숭명사대주의자에다 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느냐(현종때 예송논쟁)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하지 말아야한다는 등의 문제로 남인과 평생 정권투쟁을 하고 같은 서인세력을 노, 소론을 가른 업적 밖에 없다.
세자의 묘는 당연히 원으로 해야함에도 그의 소경원(서삼릉내)은 고종대까지 소현묘라고 낮추어 불렀으니 인조의 미움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만하다. 강빈도 고종때 민회빈으로 복위되어 묘가 광명시에 있는데 누가 세자와 합장해줄 사람은 없는지?
소현이 죽은지 4년 후인 1649년 인조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는데 이때 봉림세자가 자기 손가락을 물어 인조에게 피를 먹였다고 전한다. 효종은 근처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만약 효종 대신 소현이 집권했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보다 앞설 수 있었고 식민지의 설움도 없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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