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學年度
碩士學位論文
韓國 水彩畵 硏究
- 近, 現代 作家 中心으로 -
韓國 水彩畵 硏究
- 近, 現代 作家 中心으로 -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5年 12月 日
京畿大學校 造形大學院
西洋畵專攻
朴 裕 美
指導敎授 : 朴 成 鉉
京畿大學校 造形大學院
西洋畵專攻
朴 裕 美
朴裕美의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審査委員長 (印)
審査委員 (印)
審査委員 (印)
2005年 12月 日
京畿大學校 造形大學院
국 문 초 록
본 논문은 한국 근대 및 현대 수채화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수채화는 종이 위에 물감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동양화라는 전통회화처럼 친근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술전문가 혹은 애호가들의 인식은 수채화라는 것은 마치 유화 작품을 하기 위한 전단계로 혹은 밑그림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에 본 논문은 한국 수채화의 역사와 예술적 가치 등을 밝히고 도입과정과 수채화의 명맥을 이어온 근, 현대 수채화가들의 작품과 흐름을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서양화 도입기인 1900년 레미옹(Remion)이 최초의 수채화를 보여준 이후, 한국에서는 1910년대 중엽에 주로 일본에서 유학한 화가들이 서양화 모임을 형성하였다. 1920년대에는 일부 화가들에 의한 수채화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드디어 근대 미술의 한 시기가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채화로 제작한 작품들이 선전에서 수차례 입상을 하게 되고, 개인전과 단체전 등에서의 많은 활동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수채의 방법을 통하여 서구의 조형미술 세계로 접근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채화는 서구에서 지형도(topographical painting), 기록화, 건축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출판문화, 판화의 성행으로 인하여 번영하였다. 특히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수채화가협회’를 통해 본격적인 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마침내 19세기 영국 수채화는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수채화는 유럽대륙과 미국 그리고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일본은 19세기 중반 경 일본에서 열린 영국인의 국내 수채화전시를 통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에게 정치적. 문화적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수채화가 유입되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수채화는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시작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즉, 아마추어 화가나 습작정도로 여겨지던 것이 독립된 형태로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화가들은 수채화를 습작 단계로만 여기지 않고 재료의 한계를 최대한 이용하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해 보고자 하였다. 서동진(徐東辰, 1900~1970), 박명조(朴命祚, 1906~1969), 금경연(琴徑淵, 1915~1948), 손일봉(孫一峰, 1907~1987) 등의 투명수채화가 있으며 이인성(李仁星, 1912~1950), 박수근(朴壽根, 1914~1965) 등이 보여준 불투명수채화는 이처럼 선전(鮮展) 등 대규모 전람회에까지 출품되어 뛰어난 회화재료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입증시켜 주었다. 결국, 근대 한국수채화는 서양화의 기반이 없었던 우리 화단에 토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제강점시대가 끝나고 광복 이후 50년대 후반 한국 수채화 협회(1956년)가 결성되었으며, 70년대 한국 수채화 창작가회(1975년)라는 명칭으로 10여명의 수채화 작가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이것이 1980년대 한국 수채화 협회라는 명칭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한국 현대 화단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화단의 전성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수채화 장르는 초기 일본을 통하여 도입되었기 때문에 그 교육 방법과 제작 기법이 편협되어 있어 아직도 초기 수채화에 대한 관념과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한국 근, 현대 미술기를 거친 우리 화단에서 수채화 분야가 도입되고 성장한 시대적 배경을 되짚어 보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현재 우리 수채화단의 흐름과 현재의 초현실적 사실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비교 분석하여 한국 화단에서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수채화의 평가나 가치를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향후 우리 한국 수채화 장르가 한국 현대 화단에서 활성화되고 저변 확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채화 고유의 재료적 특성을 강조할 수 있는 형식과 기법의 개발, 표현 영역의 확대, 작가들의 의식의 전환, 제도적인 학교 교육에서의 창작의 자율성 확보, 대학에서의 수채화과 신설 및 확대, 수채화 전문평론가의 필요, 지속적인 미술 행정의 지원 정책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화단에서 수채화 장르의 독자성이 확보될 것으로 여겨진다.
목 차
국문초록 ........................................................................................................... i
I.서 론 ............................................................................................................. 1
1-1연구 목적 ................................................................................................... 1
1-2연구내용 및 방법 ..........................................................,,,,,,,,,,,,,................. 3
II.수채화의 역사 ................................................................,,,,,,,,,,,,,,,,,,,,,.......... 4
2-1서양수채화의 역사 ...................................................................................... 4
2-2한국수채화의 역사 .................................................................................... 23
III.수채화의 재료와 기법 및 특성 ...................................................................... 26
3-1수채화 재료 ............................................................................................. 26
3-2수채화의 기법 및 특성............................................................................... 37
IV.한국 근, 현대 수채화 작가 분석 .................................................................. 41
4-1근대 수채화(1900년 ~ 1945년) .................................................................. 41
4-2현대 수채화(1945년 ~ 현재) ..................................................................... 56
V.한국 수채화의 문제와 전망 ......................................................................... 82
5-1수채화의 문제 ......................................................................................... 82
5-2한국 수채화가의 활동과 전망 .................................................................... 85
VI.결론 ........................................................................................................ 86
참고문헌 ..................................................................................................... 89
Abstract ...................................................................................................... 91
I. 서 론
1-1 연 구 목 적
안료를 물과 혼합해서 그리는 회화방법(영어 : watercolor, 불어 : aquarelle)1)은 동서양간에 일찍부터 전래되어 왔으나 그 근원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사아젠트(J. Singer Sargent, 1856-1925 )는 ‘수채는 나에게 가장 좋은 매체로서 유채보다 이 매체를 사용했을 때 한결 더 훌륭한 예술적 표현이 가능하다’2)고 하였다.
수채의 역사는 고대 동굴벽화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알타미라(Altamira)동굴(도1), 이집트 등의 고대 그림들은 주로 벽화가 중심으로 제작되었는데 동양에서도 인도의 아잔타(Ajanta), 중앙아세아의 석굴, 중국의 敦煌, 고구려의 고분 등에 남아 있다. 이들 그림은 덜 마른 회반죽 위에 그려진 수성(프레스코화)으로 중세종교화에 많이 사용되었다.
도1) <상처 입은 들소(동굴화)>알타미라 BC 15,000~10,0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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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Jean Leymarie, watercolors from Dürer to Balthus,
(Geneva; skira Rizzori international publication, Inc. 1984), p. 23.
2) 휴 레이드만, 박철준 역, 「회화기법백과」,(서울;신진출판사, 1974), p. 48.
15세기 문예부흥기의 벽화제작에 참가했던 화가들은 유채화 대작의 밑그림으로 수채기법을 활용하면서부터 근대 수채화의 길을 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수채(도2)를 예로 들 수 있다. 17세기 홀랜드의 램브란트(Harmenssz Van Rijn Rembrandt, 1606-1669)나 프랑스의 크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도 담채화의 작품을 남겼다.
도2) 레오나르도 다빈치 - 최후의 만찬(1493-7년) 벽화 .템페라, 460x880cm
수채화가 회화로서 독립되고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영국의 콕스(David Cox, 1739-1859), 콘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터너(Joseph Mallard William Tuner, 1775-1851), 보닝톤(Richard Bonington, 1801-1828) 등에 의해서였으며 수채화가 영국에서 흥성하게 된 것은 자연의 신선한 풍토와 수채화가 갖는 맑은 투명성을 국민들이 애호한 것에 연유되며 독립된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수채화만이 갖고 있는 회화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부터 전래되어온 수채화는 유화로 제작된 그림에 비해 그 존재성이 그저 학교수업을 통한 중등 교과과정으로 지나쳐 온 것도 사실이지만, 현재까지 여러 작가들을 통해 수채화의 기법적 특성과 한국적 수묵과 잘 융화되어 화단에 한 분야로 자리하게 된 것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수많은 열정과 다양한 실험에 의해 새로운 자리를 잇게 되었다. 이로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수채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수채화를 정리해보고자 함이다.
1-2 연구내용 및 방법
한국수채화는 1900년을 전후하여 도입되었다. 초기의 수채화는 1920년대 조선미술전을 통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20년대의 손일봉, 1930년대의 이인성 등은 뛰어난 작품성으로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였다. 이러한 전통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수채화란 유화의 습작단계 또는 학생들의 회화라는 선입견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와서 수채화에 대한 인식을 재평가하고 발전시켰으며, 수채화만이 가지고 있는 회화적 특성을 잃지 않고, 현대적 새로운 기법과 아크릴을 통한 색조의 변신, 마티에르의 새로운 시도가 계속되었다. 2005년에 이르러 한국미술협회에서 수채화분과를 설립 추진하여 이때부터는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한국화, 양화, 판화, 조각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분리되어 심사 및 수상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수채화협회에서는 매년 수채화공모전을 통해서 신진작가를 발굴하며 수채화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수채화 작가를 중심으로 서술할 논문은 수채화의 시대적 배경을 크게 도입 시기, 근대, 현대로 구분하여 수채화의 기원과 현대까지의 발달 상황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수채화의 도입시기부터 현재까지를 고찰해 본다.
또한 한국수채화 작가들의 작품을 미술평론의 시각과 함께 고찰하며, 방법적으로는 작가 또는 작가 유족들을 방문하여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였다.
II. 수채화의 역사
2-1 서양 수채화의 역사
인간은 이미 3,500년 전부터 종이를 만들고 종이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 ‘시페루스 파피루스(Cyperus Papyrus)’3)라는 섬유질 식물의 껍질들이 두루마리로 제공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은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파피루스에 그려진 이러한 그림(도3)들은 주로 투명물감으로 채색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러한 그림은 세밀화(miniature)라고 불렸다. 이집트인들은 갈색과 고동색 안료는 흙을 채취하여 제작하였으며, 적색은 시나바와 같은 광물에서 추출하였고, 청색 안료는 아주라이트(납동광)를 가동하여 제조하였다.
도 3) 파피루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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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3) 파피루스(Papyrus) : 유럽이나 이집트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쓰던 종이
대용품,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자생하는 papyrus줄기로 만든 것
그리고 녹색은 말카라이트(공작석)를, 황색은 크로피멘트르, 주황색은 렉살가를 가공하여 제조하였다. 한편 그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태워 흙색 안료를 만들었으며 백악을 가공하여 백색안료를 제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안료가루를 아라비아 고무와 계란흰자에 반죽한 뒤, 그것을 물에 풀어서 사용한 것이 이집트인들의 물감제조방식이었다.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이러한 물감은 한마디로 말해 수채화물감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당시에는 물감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종류도 갈색, 남색, 황토색 등 자연에서 추출한 흙이나 식물의 색소에서 만든 것들 밖에 없었다.4)
그 후 1천년이 지난 뒤, 기원전 170년경에 페르가뭄의 왕인 애우메네스 2세는 파피루스 대신 양피지5)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9세기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의 세밀화는 그리스에서나 로마, 시리아, 비잔티움 등 지리적인 차이를 불문하고 수용성 안료와 아연을 혼합물감으로 그려졌으며 그 결과 불투명 수채화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기원후 9세기는 카롤링 왕조의 황제인 샤를마뉴의 지배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샤를마뉴대제는 세밀화의 제작에 큰 비중을 두었는데 그가 거느린 화가 가운데는 불투명 수채화 기법과 투명 수채화 기법을 효과적으로 혼용했던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혼용 기법은 중세까지 전파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세밀화의 제작에 있어서 수채물감의 사용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우리는 수채화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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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 최경한, “수채화 그 역사”, 「미술세계」(1985. 3), p. 15.
5) 양피지 :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석회석과 경석가루를 사용하여 부드럽게 처리한 것
15세기에 독일의 뉘른베르그에서 출생했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화가인 코르넬리우스(Cornelius)가 ‘열정과 엄숙’이라는 말로 형용했던 위대한 화가요 동판화가(도4, 5)였다.
도4) 뒤러-숲속의 연못(1495-97) 도5) 뒤러-The Great Piece of
수채화, 26.2 x 37.4cm Turf(1503) 수채 및 과슈
41 x 31.5 cm
독자적이고 현대적인 수채화는 1490년대에 뒤러에 의해 나타나게 된 것으로 풍경화뿐만 아니라 식물, 동물, 의상의 연구에 까지도 절정에 이르게 된다. 당시에는 아무도 수채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될 수 있고, 풍경이 작품의 동기(motive)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6)
그러나 뒤러는 자연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관찰하여 세부를 충실하게 표현함으로써 세상의 아름다움을 소박하게 펼쳐 놓고 있다. 뒤러가 남겨 논 약 1000여점의 작품 가운데 약 60여점이 수채화로 잉크 스케치가 수채화 물감과 함께 혼용된 것도 있고 식물화(자란 잔디떼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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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6) 슈트르 가르트 외국문화연구소, 「“Dürer and seine zeit"전시회 카다로그」
(서울; 주한독일문화원, 1981), p.2.
년)와 동물화(어린 토끼 1502년)(도6)에서는 불투명 방식으로 표현되어 졌으며,7) 안료에 호분을 섞은 수채로 풍경을 그린 그림도 남겨 놓고 있다.8)
도6) 뒤러-어린 토끼 (1502년) 도7) 피터 파울 루벤스 - A Stream with
overhanging trees(1635-40)
수채화, 20.4 x 30.7 cm
근대수채화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뒤러는 무엇보다도 수채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뒤러는 분위기의 미묘함이나 색채의 풍부한 변화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수채화가 유화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고 일찍부터 깨달았었다. 이러한 방식은 플랑드르 화가들, 특히 피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가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기법이었다. 피터 파울 루벤스는 1천점에 가까운 작품(도7)을 남긴 화가였다.
루벤스가 제작한 작품의 대부분은 교회와 왕궁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 마리아 드 메디치(Marie de Medici)의 일생을 묘사한 24장의 그림은 각각 3.94 x 2.95 m에 달하는 대형 패널에 그린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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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7) 전게서., p.2.
8) 金仁煥, 「한국의 수채화전」(서울; ‘84 한국문예진흥원 기획전 카다로그, 1984), p.2.
로서 현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이 연작의 핵심을 차지하는 <앙리 4세>라는 패널은 그 크기가 3.94 x 7.27 m에 이르는 초대작이다. 루벤스는 이러한 대작을 제작하기 위하여 자신의 공방을 효과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그가 거느렸던 젊은 조수 가운데에는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도8)와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도9) 그리고 스나이더스(Frans Snyders, 1579-1657)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나중에 개별적인 명성을 획득하게 된다. 루벤스는 기초적인 스케치를 마련한 뒤한 장의 수채화를 제작하고, 이 수채화를 바탕으로 비율을 축소시킨 유화작품을 그려놓는다. 루벤스가 준비한 기초 작업을 바탕으로 그의 제자들은 실제작품을 완성시키게 되는데, 그의 스승 루벤스가 최후의 일필을 가할 여지는 반드시 남겨두곤 하였다. 한편 요르단스는 어렸을 때에 벽걸이에 만화를 그려 넣기 위해 수채화기법을 이용한 적도 있었다. 자신의 스승인 루벤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요르단스는 작은 크기의 수채화 스케치를 이용하는 루벤스의 기법을 착실히 준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채화를 이런 방식으로 이용하는 태도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유럽전역에 일반화되어 있었다.
도8) 반 다이크-A Path among 도9) 요르단스- St Ives,
Meadows, 수채화 Patron of Lawers, 수채화
24.4 x 39.7 cm 27.3 x 31.1 cm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미술교육가인 첸니노 챈니니(Cennino Cennini 1370-1440)는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후인 17세기의 모든 화가들이 수채물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였지만 오로지 한 가지 색상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예술의 서>(1930)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림의 구성을 결정한 뒤에 담채기법을 이용하여 인물에 음영처리를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물감 두 방울에 땅콩크기 만큼의 물을 혼합해야 한다. 그리고 음영처리에 필요한 붓은 반드시 담비꼬리털로 만든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림자를 더 진하게 처리해야 할 경우엔 물감을 더 많이 혼합하면서 역시 같은 기법을 이용하면 된다.
첸니니의 책은 이미 14세기부터 이용되어 왔던 회화기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도10)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수채화가 완성작으로 인정을 받게 된 18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동안 유럽화가들은 첸니니의 제작방식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도10) 지오토 - Saint Stephen (1320-1325년)
템페라, 84x54 cm
수채화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램브란트(Rembrandt, 1606-1669)(도11)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비록 램브란트는 수채화 작품을 단 한 점도 제작하지 않았지만 그는 브라운 비스터(암갈색)나 세피아 색조의 담채기법을 이용하여 수백장에 달하는 스케치를 제작하였는데 그의 스케치에는 인물의 입체감과 음영효과를 돋보이게 하는 기교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램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작품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시기에, 크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도12)이라는 화가는 로마에서 풍경화를 중심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크로드 로랭은 주로 대단히 큰 규격의 풍경화를 제작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우르반 8세나 스페인 필립4세와 같은 왕이나 교회로부터 주문받아 제작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도11) 렘브란트 - 창가에 앉은 소녀 도12)크로드 로랭 -
(1645년) 사막에 Hagar와 Ishimael(1668년)
캔버스에 유채, 106.4x140 cm
프랑스 화가인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도13)의 제작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는 크로드 로랭과 함께 영국 풍경화파를 출현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두 사람의 화가가 18세기부터 수채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한 일단의 영국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니콜라스 푸생은 종교적 또는 신화적인 내용을 담은 인물화뿐만 아니라 풍경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1804년 봄에는 최초의 수채화가 모임인 ‘전통 수채화협회’가 발족하였으며, 1년 뒤에는 역시 사상 처음으로 수채화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물론 그것은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804년 이전만 하더라도 당시 약 30년 동안 화단을 지배해왔던 런던 로얄 아카데미는 수채화가들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며 유화작품을 동시에 출품할 경우에만 수채화작품도 전시토록 허용해 주었다.
도13) 니콜라스 푸생-Midas와 Baccchus(1624년) 캔버스에 유채,98.1 x 135 cm
사실 18세기말에 이르러 수채화는 이미 자체적인 미적 가치를 가진 분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호가드(William Hogarth, 1697-1764)(도14)와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30-1774)(도15) 그리고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도16) 같은 유명화가들로부터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화가들은 작품의 소재를 풍경화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실내의 인물이나 정물에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소재에 있어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와 존 헨리 푸셀리(John Henry Fuseli, 1741-1825)(도17)는 경탄할 정도의 재능과 상상력을 발표하였다. 삽화를 곁들인 이러한 저작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욥기>, <단테의 시선> 그리고 문명비판서인 <이성의 시대>를 들 수 있다. 이 무렵 이제 수채화는 명실 공히 ‘영국의 전통회화’로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도14) 호가드 - The Beggar's Opera 도15) 레이놀즈-
(1729년), Lady Caroline Howard
캔버스에 유채 (1778년) 수채화
도16) 게인즈버러 - 도17) 푸셀리 - Oedipus cursing his son
Miss Catherine Tatton (1786년) Polynices , 수채화 51.4 x 46.3 cm
18세기말 영국의 먼로 박사는 수채화 작품의 수집뿐만 아니라 1794년 자신의 집에서 수채화가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열고 젊은 수채화가들을 후원하여 수채화 발달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곳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을 대표하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도18), 거틴( Thomas Girtin 1775-1802)(도19), 코트만(John S. Cotman 1782-1842) 그리고 드 윈트(Peter De Wint 1784-1849)(도20) 등의 우수한 수채화가를 배출했다.9)
도18) 터너 - Dolbadern Castle(1799년), 연필과 수채
도19) 거틴 - 첼시의 하얀 집 (1880년) 수채화
도20) 피터 드 윈트 - Near Mill Hill (1825년), 수채화 22x3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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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9) J. M.. 파라몽, 최기득 옮김, 「수채화」(서울;미진사, 1993), p. 25.
그중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였다. 수채화의 열기는 영국 국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1790-1850년대에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 화단에도 영향을 주었다.10)
토마스 거틴은 터너와 함께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가장 훌륭한 수채화가로 평가된다. 거틴은 터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터너는 거틴의 제작방식과 색채 사용법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1797년에 먼로 박사의 미술학교에서 수업한 이후 터너는 수채화와 함께 유화도 제작했으나 결코 수채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특히 베니스에서 수채화를 많이 그렸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강력한 색채와 광선 효과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터너의 예술세계에 대해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다음과 같은 찬사를 던졌다. 우리 모두는 영국화파의 위대한 지도자인 터너의 추종자일 뿐이다.
폴 샌드비(Paul Sandby, 1725-1809)(도21)와 존 로버트 코젠스(John Robert Cozens, 1752-1797)(도22)는 영국의 대표적 작가이고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도23)은 영국 풍경화의 두 거장으로서 이들은 수채화로 놀라운 표현과 시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11)
이들은 자연에 대한 깊은 애착과 빛과 대기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고 그때까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회화와는 달리 풍경화의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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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0) 김영대, 「한국화단의 수채화 수용과 정착에 대한 고찰」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p. 6.
11) Kate Gwynn, painting in watercolor(New Jersey; charwell Books, 1982), p.16.
도21) 폴 샌드비 - Cow-Girl in the Windsor Great ) Park (1770년) 수채화, 30x24cm
도22) 존 로버트 코젠스 - View of the Villa Lante on the Janiculum(Gianicolo) in Rome (1782–83년)수채화, 25.3 x 36.8 cm
도23) 존 콘스터블 Dedham Church and Vale(1800 년) 펜, 잉크 및 수채
도24)존 마린- Boat and Sea, Maine(1938년) 수채화
경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수채화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미국으로 전파되어 존 마린(John Marin, 1870-1953)(도24)으로 대표되는 미국 수채화를 이루었다.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에 의하면 터너가 프랑스 인상주의와 독일의 표현주의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12)고 말하고 있으며, 영국의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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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2) Herbert Read, 尹一柱譯, 「예술이란 무엇인가」 (서울; 을지문화사, 1982), p.225.
경화는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도25)의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각에 따른 낭만주의풍의 풍경화에 또 다른 자극을 주어 마침내 프랑스 자연주의의 풍경화파인 바르비종(Barbizon)파의 풍경화를 낳게 했다.13)
도25) 들라크루아 - Jeune Arabe dans son appartement, 수채, 13 × 18 cm,,
그런 반면에 유럽 대륙에서는 투명 수채의 보급이 꽤 늦어졌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투명수채화가 영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인 탓도 있지만 템페라(Tempera)와 과슈(Gouache)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뒤피(Raoul Dufy, 1877-1953)(도26),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도27),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도28),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도29) 등이 즐겨 불투명 수채화인 과슈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대륙형 보수파라고도 부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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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3) 張文戶, 「서양미술사」(서울; 형설출판사, 1986), p.224.
14) 최경한, “수채화 그 역사”(서울; 미술세계, 1985, 3월호), p.16.
도26) 뒤피 - Basin of Deauville (1935년), 도27) 모로 - A Peri (1865년),
캔버스에 유채 종이 위에 Graphite, 잉크 및 과슈
도28) 루오 - La Fille au 도29) 마티스 - 왕의 슬픔 (1952년)
Miroir (1906년) 절지(切紙) 과슈, 292×386cm
수채화 70 x 53 cm
1770년대의 수채화지로서의 제임스 와트만(James Watman)에 의해서 베를 원료로 하여 왓트만(Watman)紙가 제조되었고15) 물감으로서는 1835년에 윌리엄 윈저(William Winsor)와 헨리 뉴톤(Henry Newton)에 의해 글리세린을 첨가한 수채물감이 개발되었다. 이와 같 은 양질의 수채화지 생산과 물감의 개발은 영국 투명 수채화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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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5) 최경한, 전게서., p.16.
지대한 발전을 가져오게끔 한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풍토성으로 기후는 자체 매체에 많은 것을 주었다. 예를 들면 안개와 구름, 영국제도의 다양한 풍경 및 부드러운 색감, 이러한 것들이 유동적인 수채화에 무한한 표현 범위를 넓혀주었으며 이러한 요인은 영국 수채화 발전에 계기를 더했던 것이다.16)
19세기의 예술가치고 수채화에 손을 대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며, 특히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도30)와 도미에(Honore de Daumier, 1808-1879)(도31) 같은 독창적인 작가들에 의해서 인상파인 부댕(Eugene Boudin, 1824-1898)(도32)과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 1819-1891)(도33)는 이름났던 수채화 화가인 반면 인상파 화가 자신들은 유화에 수채의 투명성과 공간성의 마력을 이식시켰다.17)
도30) 제리코 - Leda and the Swan 도31) 도미에 - The Sideshow (1865년)
(1780년) 과슈와 수채 종이 위에 수채, 목탄, 펜, 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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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6) James Fletcher - watson, water color painting,(New York; van Nostrand
Reinhold company Inc, 1983), p.6.
17) Jean Leymarie, op. cit., p.9.
도32) 부댕- Princess Pauline 도33) 용킨트 - La Cote(1861년)
Metternich on 수채화 16.8 x 23.5 cm
the Beach (1865년)
폴 세잔느(Paul Cezanne, 1839-1906)는 그의 만년의 작품에서 서정성을 높이기 위해 수채화를 이용했으며 그의 담채는 건실한 힘과 환경의 운치, 量感, 빛의 충실한 표현 등으로 수채화의 품격을 높여주었으며 그의 수채화의 표현은 20세기 초기에 나타났던 혁신적인 운동들 즉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미래파, 추상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8)
특히 끌레(Paul Klee, 1879-1940)(도34), 샤갈(Marc Chagall, 1887-1985)(도35) 등 바우하우스 주변의 화가들은 불투명한 과슈를 사용하면서 의도적으로 투명수채 기법을 도입하여 표현함으로 생기는 번짐이나 갈필적인 효과의 미적 표현을 하였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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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8) Jean Leymari, 전게서, pp.9-10.
19) 최경한, 전게서., p.17.
도34) 끌레 - Mural from the Temple 도35) 샤갈 - 초록의 바이올리니스트
of Longing (1922년) (1923-1924년)
유채, 198x108.6 cm,
120여점이나 되는 수채화를 남긴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도36)를 위시해서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37) 등 많은 화가들이 수채화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기묘한 환상의 세계를 그린 끌레의 작품은 80%가 수채화로 된 것이다.20)
도36) 반 고호 - Old Vineyard with 도37) 피카소 - 아비뇽의 처녀들
Peasant Woman (1890년) (1907년) 종이에 수채, 17x21cm
연필, 수채 및 과슈, 43.5x5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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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20) 세계대백과사전, Vol 7 (서울; 학원사, 1966), p.476.
또한 수채화가이자 템페라 화가인 와이어스(Andrew Newell Wyeth, 1917-현)는 갈색 계통 색상만을 사용하여 수백 가지의 은은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기법은 매우 사실적이며 정교하지만 그의 그림은 사진과 같은 자연주의를 극복하고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가장 유명한 작품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도38)는 독특한 사선 원근법의 능숙한 처리와 빛을 이용하여 정확한 시간을 표현하는 그의 화풍을 잘 알려준다. 와이어스의 뛰어난 기법도 주목할 만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축적된 삶에 대한 통찰력과 야외 풍경화에서 대지의 밑바탕을 꿰뚫어보는 직관, 그리고 낡은 집과 그 실내의 묘사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친 삶의 과정을 드러내는 밀도 있는 주제의식 등이다.
도38) 와이어스 - Christina's World (1948년) 82x121 cm, 판넬 위에 템페라
현대에 이르러 수채화는 종이 외에 다른 많은 재료가 선택되고 또한 특수한 효과를 내면서 물감이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탈피하게 되었으며, 수성물감이 지닌 최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였다. 따라서 현대에는 구태여 투명이니 불투명이니 하는 제약을 두지 않으며 또한 구상이든 추상이든 자유로이 제작하는 추세이며, 콘테, 크레용, 양초 등을 혼용하기도 한다.
또한 재료의 개발도 활성화되어 수용성이지만 발색의 선명함과 접착성이 견고한 아크릴릭 칼라(Acrylic color)도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수채화는 재료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발전을 해 왔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기법, 재료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여 연구 발전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2-2 한국수채화의 역사
한국에서 서양문화의 수채화법이 받아들여진 것은 유화법에 앞서는 1900년 전후로 여겨진다. 정부가 서양식 교육제도를 처음 채택하기 시작한 소학교령이 공포된 것이 1895년의 일이었고, 그 교과 과목에 ‘圖畵’가 포함돼 있었다. 그 ‘圖畵’과목은 연필 외에 크레용과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서울의 문방구점에는 연필 외에 수입품 크레용과 수채물감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학교에서 중학교에 이르는 기초교육의 한 과목으로서의 洋畵의 시초를 말해주는 것이다21) 라고 언급한바와 같이 한국의 수채화의 여명기 시작을 1900년경으로 잡아볼 수 있을 것이며, 수채화의 제작과 추구가 전개된 것은 1920년경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에 상황을 살펴보면 1922년에 창립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서양화부에 있어 입선과 특선의 상당수가 수채화였고, 그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화가로서 수채화의 명수로 손일봉을 들 수 있으며, 그는 10대의 서울 사범학생으로 1925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로 입상 특선을 거듭하였고, 1927년 동경의 제국미술전에서 역시 수채화로 입선하면서 특출한 수채화의 기량을 평가받은 작가라 하겠다.22)
한국 근대 수채화는 1930년대를 융성기로 설정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유채화가 지니고 있는 재질과 기술을 극복하지 못한 초기 단계에 있어「鮮展」입선작 가운데 상당수가 수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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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21) 이구열, 「한국수채화의 역사와 오늘의 양상(한국수채화선집)」
(서울:도서출판 우석, 1983), p.5.
22) 이구열, 상게서., p.3.
둘째, 그 당시 동양적인 표현방법과 서구적인 수채화의 표현기법이 한국인 체질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수채화의 표현방법이 동양화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동양적 조형성과 유사한 수채의 방법을 통한 서구 조형세계로의 접근이 초기 鮮展에서의 수채화 붐을 유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23)라고 언급한 사실에서 동서양의 표현기법이 한국인 체질에 호응한 것으로 사료된다.
셋째, 수채화의 본산지 같은 대구지방의 화가들에 의해서 지대한 영향을 준 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서 「서동진 수채화 전람회는 전시 기간 중 전시장에서 略畵, 漫畵 및 초상화의 공개시범에 있어 매일 관람객이 운집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는 새로운 표현 매체인 수채화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다. 이듬해(1928년) 서동진은 같은 장소에서 <성탑과 부락>의 46점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였다」24)라고 하였고, 그 밖에도 鮮展을 통해 수채작품을 발표한 대구지방 화가로는 「서진달(徐鎭達), 노용석(盧鎔奭), 이현택(李鉉澤), 김용조(金龍祚), 금경연(琴經淵), 김교일(金敎一), 윤세붕(尹世鵬), 박재봉(朴在奉), 한정도(韓定導), 유시회(柳時會), 김수명(金壽命)」25) 등이 있다
「李仁星(1912-1950)은 1930년대 천부적 畵才를 최대로 발휘한 화가로서, 특히 수채화에서 보여준 타고난 재기와 기법은 우리의 근대 수채화 전통의 비약적 이정표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수채화도 조선 미술전에서 연 특선뿐만 아니라 東京의 帝展과 文展에 수차 입선하였다」26)라고 했으며, 그가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가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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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23) 오광수, 「한국미술현대사」(서울; 열화당, 1985), p.47.
24) 권원순, 「대구서양화 60년사전 카다로그」(대구;동아백화점 발행, 1984), p.139.
25) 오광수, 상게서, p.89.
26) 이구열, 전게서, p.5.
들에게 준 영향도 대단했다. 이 지방의 수채화 붐은 이인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세 가지의 사실로 보아 1930년경에서 1940년경을 한국 근대 수채화사의 융성기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광복 이후, 유화제작과 병행시켜 수채화에서만 가능한 표현적 묘사와 신선한 화면을 선호하는 화가들이 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들어와 살펴보면 「56년 한국 수채화협회라는 같은 매체를 사용하고 있는 작가들의 친목적 성격을 띠었다」27)라고 하였으며, 50년경과 60년경의 활약상을 보면 70년경만큼 그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한국수채화 창작가회(1975년)라는 명칭으로 10명의 수채화 작가가 전시를 발족시켰고 이것이 1975년 한국수채화협회라는 명칭으로 새로 창립되어 해마다 작품전을 개최하고 있는 한국수채화협회의 회원들은 오늘도 한국 수채화사의 발전을 위해 그들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겠으나, 이 협회에 소속됨이 없이 독특한 예술적 실현의 수채화를 묘사하는 화가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수채화가 있게 한 원로 중진작가와 전국의 저명한 수채작가들의 작품을 대부분 수록하였다」28)라고 언급하고 있는 「한국 수채화선집」에 수록된 도판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의 영향력보다 오히려 영국 수채양식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전시들과 화집은 한국의 수채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도 수채화라는 장르의 이미지가 부각되어 지고 있고 작가들 사이에서도 수채화라는 독특한 매체에 의한 예술성을 인식시키며 한국 화단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한국 수채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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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27) 오광수, 전게서, p.128.
28) 박영성, 「서문(한국수채화선집)」(서울;도서출판 우석, 1983), p.3.
III. 수채화의 재료와 기법 및 특성
3-1 수채화 재료
수채화(watercolor)의 사전적 의미는 ‘채색을 물에 풀어 그리는 그림’이란 뜻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수채화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지만, 수채화의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안료를 물에 풀어서 쓴다는 것이 수채화의 본질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이 경우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포함시켜야 한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 프레스코(presco)29)화, 중세에 많이 이용되었던 템페라(tempera)화, 전통 수채화, 과슈(gouache), 그리고 한국화의 채색화와 합성수지로 만든 아크릴 칼라(Acrylic color)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수채화로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와 이슬람 문화권을 비롯한 세계각지의 독특한 안료까지 포함시키면 유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수채화에 해당될 수 있으므로 수채화를 좁은 의미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수채화는 물에 풀어지는 안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튜브로 된 것과 고체로 된 것 모두 관계없다. 다음에는 이를 종이에 그려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이라면 여전히 동양의 채색화나 템페라, 아크릴, 심지어는 포스터칼라화에 이르기까지도 수채화의 범주에 들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어렵지만 수채화는 서양화의 하나로 안료를 여러 가지 수용성 접착제와 함께 물에 풀어 종이에 그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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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29) 프레스코(Fresco) : 벽화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회반죽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리는 기법
1) 물감
수채물감
아라비아 고무를 이용해서 만든 그림물감으로이다. 수채물감은 원래 투명하지만 아교를 섞어 불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이 경우는 불투명 그림물감 또는 과슈라고 한다.
수채물감은 그 사용범위와 다양성에서 다른 어떤 그림재료에도 뒤지지 않는다. 투명수채는 안료의 생생함과 광택을 살려주고 능란한 필치를 잘 나타내기 때문에 가장 매력적인 재료로 각광받고 있다. 투명수채와 다른 모든 중후한 회화재료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그 투명성에 있다.
수채물감은 물과 혼합해서 사용되므로 사용이 간편하며 물을 많이 사용할수록 색상이 옅어지고 더 투명해지는데 투명 효과를 살려 광채를 띠며 신선한 느낌을 주는 투명 수채 물감과 색상에 힘을 실어 선명한 느낌을 주는 불투명 수채 물감으로 구분된다.
수채물감의 특징으로 광택(Brilliance), 투명성(Transparency), 발색도(Colour Strength)를 들 수 있는데, 광택(Brilliance)은 선명도(Richness), 명암도(Intensity), 색의 깊이(Depth)로 정의할 수 있으며 광택은 보존성(내구성)과도 관련이 있다. 수채물감의 투명성은 제조과정에서 물감원료를 독특한 방법으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수채물감의 특성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발색도는 안료에 의해 좌우되며 색 배합 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채물감으로 우리나라에선 튜브형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하드 컬러(케익)와 분말이 널리 쓰인다. 이것은 매우 비싼 반면 내구성이 좋은 고급 안료만을 사용하며, 안료 분말뿐만 아니라 체질과 미디엄이 함께 고체로 농축되어 있다. 좋은 수채물감은 변색이 없는 고급 안료를 사용한 것으로서 투명성이 최대한 높은 맑은 색을 낸다.
세계의 유명한 수채화 물감이라고 하면 영국의 윈저 & 뉴튼(Winsor & Newton, 튜브 또는 하드 컬러), 서독의 슈민케(Schmincke)와 펠리칸(Pelikan,하스컬러) 등을 들 수 있다.
과슈(Gouache)
14세기 말 유럽의 한 수도승이 필사본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릴 때 차이니스 화이트(Chinese White)나 징크 화이트를 보통의 투명한 수채 물감과 섞으면 그 불투명한 효과로 인해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색 장식이 보다 더 찬란하게 돋보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과슈는 이미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프레스코나 디스템퍼30)와 더불어 물이 쓰이는 유일한 하나의 독립된 매체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과슈의 정의는 폭넓게 정의 내려 과슈는 불투명 수채화라고 한다.
과슈는 그 불투명함과 아래의 그림을 덮어 가리는 특징으로 인해 투명한 수채화와는 아주 다른 별개의 매체이다. 이러한 효과는 유화 물감과는 다르지만 유화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기법이 종종 사용된
註30) 도사(陶砂)나 카세인을 접착제로 하는 수용성 도료로 가장 오래된 채색방법이다.
미장이가 방을 하얗게 칠할 때 쓰는 회반죽이 가장 단순한 디스템퍼라 할 수 있다.
다. 그러나 과슈는 유화 물감보다 훨씬 빨리 마르며 신속한 기법에 잘 맞는다.
과슈를 주로 많이 사용한 그림에 투명한 수채 물감을 조금 사용하면 색이 놀랄 만큼 효과적으로 됨에도 불구하고 이와 반대인 투명한 수채화에 과슈를 조금 쓰는 방법은 훨씬 덜 사용되어 왔다.
칠을 통해 바탕 표면이 밝게 반사되는 수채물감이나 템페라와는 달리, 과슈의 광채는 오로지 물감 표면의 안료 자체가 지닌 반사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단일한 색으로 대비되는 색들은 본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의 색이기 때문에, 특히 과슈는 컬러복사 작업에 적합하다.
과슈에는 '화려한 절정기'가 없었다. 이 매체를 사용했던 화파나 18세기 말 영국에서처럼 순수 수채화가 인기가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특별한 시기조차 없었으며, 다른 매체로 된 작품과 견줄 수 있는 과슈로만 그린 그 어떤 위대한 걸작품도 없었다. 그러나 과슈의 고유한 특징으로 인해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것이다.
독일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인 뒤러는 풍경과 동물을 연구하는 데 과슈를 사용하였다. 루벤스와 더불어 그와 같은 프랑드르인(Flandre)인 반 다이크가 그린 과슈 작품들도 있다. 이 매체를 사용한 17세기와 18세기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스파드 푸생(Gaspard Poussin, 1615-1675)과 반 히섬(van Hysum, 1682-1749)이 있다.
프랑스 화가 조셉 구피(Joseph Goupy, 1689-1783)는 런던에 정착하면서 과슈를 들여왔다. 베니스의 마르코 리치(Marco Ricci, 1679-1729)와 플로렌스의 주카렐리(Zuccarelli, 1702-1788)는 둘 다 과슈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런던에 일정 기간 동안 체류했었다. 특히 쥬카렐리는 영국 수채화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폴 샌드비(Paul Sandby, 1725-1809)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샌드비는 확실히 과슈 화를 잘 그렸고 자주 사용하였지만, 그의 평판은 주로 18세기 영국 화파를 특징짓는 순수 수채화에 머문다. 영국에서는 과슈와 과슈-수채화의 혼합이 프랑스에서처럼 대중적이지 못 하였다.대체적으로 말한다면 과슈가 크게 유행한 적도 없었지만 크게 뒤떨어진 적도 없었다. 피카소(Picasso, 1881-1973),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년생), 그라함 서덜랜드(Graham Sutherland, 1903-1980), 미국의 벤 (Ben Shahn 1898-1969)을 포함해서 많은 현대의 대표 작가들이 과슈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피카소는 그의 후기 추상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을 지닌 의상 디자인<펄시넬라>(Pulcinella, 1917)에서 과슈로 붉은 색의 넓고 단일한 색면을 사용하였다.
사회적 사실주의자인 벤샨은 현재 뉴욕 시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커다란 벽화<여성 기도교인 금주 동맹 행진>(Women's Chrestian Yemperance Union Parade)에 과슈를 사용하였다. 그의 작품 <공터>(Vacant Lot, 1939)에는 투명한 담채와 과슈를 혼합하여 이 불투명 물감으로 바위나 돌에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템페라(Tempera)
‘템페라’는 난황 ·난백 ·아교질 ·벌꿀 ·무화과나무의 수액 또는 양이나 염소, 기타의 수피(獸皮)로 만든 콜로이드 물질 등을 단독 또는 적당하게 안배한 것을 매개제로 써서 채색의 정착을 기한 불투명 물감 또는 이것으로 그린 그림이다. 따라서 매제가 다르면 당연히 기법도 다르므로 이 점 때문에 템페라를 정의하기가 곤란하다.
템페라는 로마시대에 창시된 습식법(濕式法)인 프레스코 화법(13∼16세기경)에서 발전한 건식법(乾式法) 프레스코 세코(secco)이다. 프레스코는 습식 간접식이지만 프레스코 세코는 마련된 서포트(주로 패널)에 직접 그릴 수 있다는 점과 섬세한 묘법이 가능한 탓으로 초기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사실 채화(彩畵)의 경우 프레스코보다 광택이 있고 겹쳐진 붓자국이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 즉 색채심미성이 뛰어나다. 매제의 용법은 난황에 냉수를 약간 첨가해서 우유와 같이 만든 다음, 벌꿀이나 수액을 섞는 경우가 있고 안료를 물에 용해시켜 두었다가 여기에 그런 매제를 섞어서 채색하기도 한다. 채색층에 투명감을 갖게 하고 싶을 때에는 이 매제에 난백을 소량 첨가한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 관이라든가 파피루스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이탈리아 분묘의 벽화 등 유화가 발명되기 이전의 고대와 중세 유채화의 상당 부분이 템페라에 포함된다. 피렌체의 성마르코대성당의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 팔라초 리카르디의 고촐리의 작품, 그리고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 즉 보티첼리 ·조토 ·필리포 ·치마부에 등의 작품에서는 동일 화면에 유화를 병용하는 용법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오늘날의 계면(界面) 활성제에 상당하는 옥스 갤(ox gall)이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템페라의 채색화면에는 그 위에 화면피복(서페이스 코팅)으로 수지유(樹脂油)를 바르면 유채화와 다름없는 윤택 있는 색의 심미성을 보이며 내구성도 생기므로 후세에는 이 수법이 쓰였다. 이렇게 15세기 말경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유화가 색채효과를 완성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는 이 화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템페라화는 이젤 페인팅의 기원을 촉진시켰고, 유화 그림물감에 체질적인 진전을 초래하여 마침내 오늘의 유화용 그림물감으로 옮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개성적 표현을 추구하려는 근대회화사에서 독자적인 창조를 기법적으로 가능하게 하여 근대의 템페라화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여기에 템페라의 의의가 있다.
아크릴물감(Acrylic)
아크릴물감은 아크릴 에스테르 수지를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 비닐물감에 비해 부착력이 강하여 모든 바탕 재료에 착색할 수 있고 건조가 빨라 벽화·공예 등에도 유용하게 쓰이며 수지 특유의 투명성이 있어 상업적으로 개발된 1960년대 이후 미술가들에게 회화 재료로 각광받았다.
아크릴물감은 물을 보조제로 사용하므로 유화물감에 비해 사용이 간편하고 내구성이 강하며 빨리 말라 여러 번 겹쳐서 그릴 수도 있다. 수채화물감보다도 빨리 마르므로 단기간에 제작할 수 있지만 일단 마르면 완전 고착되므로 수정하기가 어려워 숙련된 솜씨가 요구된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건조완화제인 리타더(retader)를 사용하여 물감의 건조 속도를 느리게 하기도 한다.
아크릴물감은 희석시킬 때 물이나 아크릴 미디엄을 사용하는데 건조할 때 강한 수지 피막이 형성되어 아세톤 등의 강력한 용제를 사용하지 않는 한 녹지 않는다. 이 피막은 기상의 변화나 강한 자외선에도 변색이나 퇴색될 염려가 없다. 또 유연성이 풍부하여 갈라질 염려가 없으므로 유화물감처럼 두껍게 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건조 후에는 물감의 부피가 줄어들어 터치의 가장자리가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종이나 천에 바탕칠할 때는 면이 수축될 위험이 있으므로 화면의 앞뒤 양쪽 면에 모두 칠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수축이 골고루 생겨서 한쪽으로 휘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접착성이 강하여 캔버스·종이·천·나무판·가죽·아스테지·필름·석고·벽면 등 약간의 흡수성만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용할 수 있다. 때로는 톱밥을 섞어 질감의 변화를 주기도 하며 콜라주할 때 접착제로 쓰기도 한다. 아크릴물감의 붓은 탄력과 내구성이 강한 나일론 붓을 주로 쓰는데 뜨거운 물로 씻으면 붓이 휠 염려가 있다. 또 물감이 한번 마르면 물로 씻어지지 않으므로 계속 물에 담가 두고 써야 하며 만약 굳어지면 리무버(remover)로 녹여야 한다. 또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쉴 때도 팔레트에 물을 뿌리고 셀로판이나 폴리에틸렌 천을 잘 씌워 건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투명성도 높아 엷게 칠하면 수채화물감의 효과도 낼 수 있으며 15가지 정도의 기본색만 있어도 다양한 색과 톤으로 혼색할 수 있다.
아크릴물감으로 낼 수 있는 회화 기법으로는 두껍게 발라 입체성을 표현하는 임패스토기법(impasto), 2-3색을 덧칠하여 상승적이고 깊이가 있는 색조를 내는 마티블기법, 모래·석고가루 등과 혼합하여 사용하는 텍스처기법(texture), 콜라주기법(collage), 화면에 물을 뿌리고 마르기 전에 물감을 칠해서 번지게 하는 번지기기법(wet in wet),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기던 점묘법(stippling), 에어브러싱기법(air brushing) 등이 있다.
아크릴물감은 수용성이므로 수채화물감이나 포스터컬러를 섞어서 독특한 효과를 낼 수 있으나 유화물감과 혼합하는 것은 금물이다. 또 유화물감으로 그린 후에 아크릴물감을 사용하는 것도 안 된다. 그러나 아크릴물감으로 바탕을 칠하고 완전히 마른 뒤 유화물감을 사용할 수는 있다.
아크릴물감은 현대에는 디자인용으로도 널리 쓰인다. 방수성이 있고 포스터컬러와 같은 종래의 물감보다 안전하며 더욱 선명하기 때문에 팝아트·일러스트레이션·스타일화 등의 분야에서 좋은 효과를 낸다
2) 종 이
수채화에서는 수분을 알맞게 흡수하는 종이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는 식물성 섬유인 펄프(pulp)로 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약 백년전까지 수채화용 종이는 마섬유(linen)를 주성분으로 만들었으며 발명자의 이름대로 와트만(Whatman)지라 불렀다. 보통 고급 수채화지에는 와트만紙(영국), Arches紙(프랑스), Strath More(미국), Fabriano(이태리) 등이 있다.
고급 종이에는 대개 제조회사의 이름이 찍혀 있으며 이름이 바르게 보이는 면이 표면이다. 수채화 종이는 주로 펄프로 제조되지만 고급 수채화 종이는 목면을 원료로 핸드메이드(hand made)로 제조되며 상당히 비싸다. 래그(Rag)지는 물을 흡수하는 정도가 아주 적당하기 때문에 수채화에 좋다. 또 종이의 표면 처리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발이 아주 고운 것이 있고, 중간발. 거친발 등이 있다. 세밀한 것을 그릴 때에는 아주 고운 발의 종이를 사용하며 물감을 시험해 볼 때는 거친 발의 종이를 사용한다
전문 수채화지는 가공방식에 따라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열로 압축된 것(Hot-Pressed. HP) ,저온 압축된 것(Cold-Pressed, CP:영국에서는 Not Hot Pressed라는 의미로 'Not'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거친 것(Rough)이 그 것 이다. 열로 압축된 HP는 아주 매끄럽고 부드러워 엷은 선이나 담채에만 적합하다. 저온 압축된 CP(또는 Not)는 반쯤 거친 표면에 섬세한 묘사나 담채가 잘되며 마른 듯한 물감으로 붓질을 빨리 하면 표면이 지닌 거친 표면이 잘 드러나 한 장의 종이에서 부드럽고 거친 효과를 동시에 낼 수 있다. 거친 종이에는 뚜렷한 결이 있는데 이 결의 오목 부분에 안료가 정착하고 볼록 부분은 희게 남아반점이 생기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제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수채화 용지의 수입을 금지하고 독자적으로 수채화종이를 만들어 쓸 수밖에 없게 했는데 수채화의 여러 조건을 연구하여 생산한 것이 모(Mo)지이다. 이 종이는 창호지 같은 한지를 여러 장 겹쳐서 두껍게제조한 것인데 현재까지도 모(Mo)지는 일본의 많은 수채화가들이 애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닥종이, 화선지도 우수한 수채화용 종이이다. 수채화지와 비슷해 보이는 판화지는 수채화 용지보다 수분을 더욱 잘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3) 붓
수채물감은 물로 간단히 씻어지므로 붓을 닦는 데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또한 색을 바꾸어 칠할 때마다 물에 씻기만 하면 되므로 한두 자루면 충분하다. 일반적으로 세이블 붓이 애용되며 수채화용 붓 중에서 제일 좋은 붓은 시베리아산 콜린스키(Kolinsky,적색 밍크) 붓이다, 이 콜린스키는 많지 않으므로 자연히 비싸게 마련이다. 보통은 이런 붓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마모(말-우이모(소의 귀) 등으로 된 것을 많이 사용한다. 물감을 묻혔을 때 물을 머금은 채로 탄력이 강해야 좋은 붓이다. 끝을 뾰족하게 모아서 물을 묻혀도 붓끝이 갈라지지 않고 탄력이 있어야 하고 잘 닳지 않아야 한다.
수채화에서는 아주 가는 붓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가는 붓은 O호부터12호까지 있다. 초보자는 등근 붓 4호, 8호, 12호와 1/2인치나 1인치의 평붓으로 시작하면 된다. 붓은 자연모로 되어 있어서 좀이 먹기 쉬우므로 여름철에는 특히 주의해야 하며 좀약을 넣어두는 것도 좋다
4) 팔레트
팔레트는 물감을 섞거나 물감을 엷게 풀어 쓰는 데 사용되는데, 오목하거나 칸이 있는 수채화용 팔레트는 색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짜놓을 수 있게 고안된 것이다. 색의 수도 1-, 18, 24등 세트 물감의 색수와 같이 되어 있어 튜브의 물감을 짜놓고 붓으로 녹여서 사용 할 수 있다. 물감에 따라 마르면 녹지 않는 것도 있는데 예를 들어 비리디안이나 퍼머넌트계 그린 등의 물감들은 사용할 때마다 튜브에서 짜서 쓰는 것이 좋다. 합성수지나 금속으로 된 팔레트가 수채화에 적합하며 크기와 형태 다양하다.
5) 물
수채화용의 물은 철이나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양질의 것이거나 증류수가 좋다. 수채화는 물 때문에 색상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돗물을 사용할 경우에는 물통에 받아 하루정도 두었다가 사용하는 것이 좋다.
3-2 수채화의 기법 및 특성
흔히 수채화라 하면 투명수채화를 일컫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이다. 수채화의 특성은 맑고 담백하며 신선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흰색이나 흰색에 가까운 종이 위에 비교적 많은 물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한다. 이렇게 수채화 중에서도 투명수채화를 선호하는 이유는, 안료층을 얇게 하여 작품을 제작했을 때 광선이 색채의 피막을 통과하여 종이에 반사되어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엷은 안료층은 겹쳐 칠할 때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화폭이 천변만화하는데 이러한 수채화의 특성은 마치 마술을 보는 듯 신비롭다.
오늘날에 와서는 재료가 발달함에 따라 그러한 재료들과 연필, 크레용, 펜, 파스텔 등의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사용함으로써 표현방법이 확대되고 있으며, 매체에 의한 미술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가장 기초적인 회화와 조각의 구분마저도 모호한 지금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재료에 의해 미술 장르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수채화의 특징은 색의 부드럽고 밝은 명료한 색조에 근거하고 있다. 색은 건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칠해 나가야 하지만(wet-in-wet) 지나치게 흐를 정도가 되지 않아야 색의 가장자리에 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수채화의 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물을 이용한 기법
물을 적게 쓰면 붓질의 경계면이 그대로 살아 있는 효과를 낼 수 있어서 세밀한 묘사에 유리하다. 반면 물을 많이 쓰면 부드러운 색감을 낼 수 있고 붓질의 경계선도 흐릿해지게 할 수 있다 물감을 칠할 때 물을 많이 쓰기도 하고, 처음부터 종이에 물을 먹이고 그리기도 한다. 이때 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많아서는 안 되며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종이 타월을 쓰는 것이 좋다.
알라 프리마 기법 (alla prima)
단번의 붓질로 적절한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 수채화 기법 중 가장 어려운 기법 중의 하나이다, 이 기법은 가늘고 정확한 연필 드로잉을 한 다음 하이라이트를 주기 위해여백을 그대로 살려주면서 담채하는 것이다. 어두운 톤을 밝게 하려면 그림을 완성한 후에 스폰지나 압지. 흡수력있는 티슈로 닦아낸다. 그림이 완전히 마른 다음 날카로운 칼날로 크로스 해칭이나 스크래핑해서 색조를 밝게 할 수도 있다
겹쳐 칠하기 기법
밝은 색을 칠하고 그 위에 어두운 색을 칠하면 밑의 색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효과와 함께 명암을 얻을 수 있다. 수채화에서는 항상 밝은 색을 먼저 칠하고 어두운 색으로 가야하며 너무 여러 번 겹쳐 칠하면 수채화의 투명한 효과가 줄어들므로 겹칠하는 횟수는 세 번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
담채 기법
같은 색조에서 변화를 주거나 한 색조를 미묘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다. 단색의 고른 담채를 하기 위해서는 칠할 부분을 적시고 큰 평붓으로 물감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바른다. 붓획들이 서로 흘러서 겹치도록 빠르게 겹칠한다. 단계가 있는 점층적인 담채는 붓질을 할 때 우선 팔레트에서 물감을 진하게 섞어서 처음에는 어두운 부분을 먼저 칠한 다음 물감을 희석해서 처음 바른 것 바로 밑에 좀 더 밝은 두 번째의 선을 칠한다. 점점 밝은 색조로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칠해나간다. 색의변화가 있는 담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색을 섞되 세 가지 이상 색을 섞지 않는 것이 좋다
점묘법 (stippling)
점묘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색으로 섞여 보이는 여러 가지 점으로 색을 칠하는 방법이다. 담채와 대조적으로 사용하거나 담채 위에 사용한다. 가는 붓을 사용하여 바깥 부분부터 중앙으로 색을 덮어나간다.
드라이 브러싱 (dry brushing)
이 기법은 극소량의 물감을 붓의 가는 끝에 묻혀 사용하는 것으로 세부적인묘사를 하는 데 효과적이다. 질감이 거친 종이 위에 이 기법을 사용하면 종이의질감이 그대로 살아나 더욱 독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드라이 브러싱 기법을 위해서는 끝이 등근 붓이나 끌모양의 붓을 사용한다.
스펀지를 이용한 기법
햇살에 반짝이는 나무 같은걸 표현할 때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럴 때 스펀지를 사용하면 좋다. 스펀지에 물감을 묻혀 가볍게 눌러주면 붓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질감효과를 얻을 수 있다.
수채화의 보관 및 복원
종이는 산성에 약하기 때문에 그림이 완성된 후 휙사티브(Fixative)를 뿌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휙사티브는 목탄화, 연필화나 파스텔화의 정착액으로만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공기 중의 산성과 만나지 않도록 하고 습기를 차단하는 의미로 볼 때 꼭 필요한 것이다. 이 때 레진(Resin : 송진)성분이 들어 있는 것은 황변하기 쉬우므로 피해야 한다. 휙사티브는 세워서 뿌리되 10분 간격으로 2-3회정도 화면에서 약간 떨어져서 뿌리는 것이 좋다.
먼지가 달라붙은 수채화는 반죽한 고무나 빵조각 또는 깨끗한 흰 천으로 먼지를 제거할 수 있다. 먼지를 제거한 후에는 퇴색된 화면에 묽은 붕사 수용액(붕사와 물의 비율이 1:60)에 잠시 동안 앞면을 적신다. 그리고 나서 과산화수소로 적신 백색의 압지로 덮어두면 누렇게 퇴색한 현상이 어느 정도 사라진다.
수채화에 주름이 생긴 경우에는 그림 뒷면에 습기를 가한다음에 축축한 유리판 위에 올려놓는다. 그림이 찢어진 경우에는 종이와 전분으로 그림의 뒷면에 젓대고 그림의 종이와 같은 종류의 종이를 줄로 깎거나 긁어서 만든 풀에 약간의 아교를 혼합하여 갈라진 틈에 집어넣고 가능하다면 종이의 결과 똑같은 결의 형태로 누른다.
IV. 한국 근, 현대 수채화 작가 분석
4-1 근대 수채화(1900년 - 1945년)
근대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1910년 즉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합방 후부터 1945년의 조국해방까지 이며, 1945년 이 후 오늘까지의 미술을 현대미술로 구분할 수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소위 일제시대의 미술은 나라가 망했다는 민족적인 슬픔과 그 슬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를 새로운 환경에 맞도록 하자는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이때의 미술가의 대부분은 미술을 예술로서 생각하고 그것에 생명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나라가 망해서 앞길이 막혔으니까 그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미술이라는 세계로 간 것이었다. 그러자 1930년부터는 일본에서 공부한 젊은 미술가들이 나와 비록 일본의 식민지적 압박 밑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세계미술의 흐름을 바라다보며 한국의 신미술을 창조해보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기에 근대초기에는 조선미술의 연장인 서화가 성행되고 후기에는 서양화와 조각이 성행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은 민족의 자유를 잃어버린 일본식민지시대였기에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암흑시대였다. 다만 이 암흑시대 속에서도 오늘의 한국미술을 맡고 있는 미술가들이 미술가로서의 개인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만이 뜻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광복되자 모든 미술가들은 그 민족적 기쁨 속에서 이제야 마음대로 미술을 완성시켜보고자 하였으나 좌익계열 미술인의 정치적인 방해 때문에 1948년까지는 미술활동을 못하다가 1949년 제 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대한민국 문교부에 의해 개최되자 민족진영의 미술가들은 활기를 얻어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일어나 미술활동은 또 다시 중지되고 그것은 정부가 서울로 돌아온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한국미술의 현대적 출발은 195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미술은 새로 열린 국제적인 시야 속에서 어제의 고립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입장에서 미술교육이 활발해진 것과 미술전람회가 많이 열렸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1960년을 중심으로 한국의 현대미술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인류적인 미술을 창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화법인 수채화가 도입된 것은 1900년 전후로 파악된다.
당시 정부가 서양식 교육제도를 처음 채택하기 시작한 후 1885년에는 소학교령이 공표되면서 교과목에 圖畵시간이 포함되었다. 그 도화과목시간에는 연필 외에 크레용과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지도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서울의 문방구점에는 연필 외에 수입품 크레용과 수채물감이 등장했다. 이 도화는 소학교에서 중학교에 이르는 기초 교육의 한 과목으로서 양화의 시초였던 것이다.31)
우리나라에 수채화 작품이 최초로 소개된 때는 1900년이었으며, 초대된 작가는 정부초청으로 내한한 프랑스 도예가인 레미옹(Remion)32)이었다. 그는 韓.佛협력으로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내한했으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3-4년간의 체류 기간에 레미옹은 陶土彫塑와 야외사생을 수채화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공예가였지만 교외로 자주 나가 한국의 풍경을 수채화로 스케치하곤 했는데, 그는 전통적인 수채화법을 활용하여 수채화의 순수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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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31) 이구열, 「한국수채화의 역사와 오늘의 양상(한국수채화선집)」(서울:도서출판 우석,
1983), p.3.
32) 레미옹(Remion) : 1900년 정부초청으로 내한한 프랑스 도예가, 서양미술의 보급에
선구자 같은 역할을 했다.
전문적인 서양화가의 출현은 1910년대 중엽에야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서양화 개척자들은 일본의 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으며, 주로 유화를 제작하여 서양화계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그 한쪽에서는 수채화법을 시도하고 수채화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한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문화정책의 하나로 조선총독부가 1922년 6월 1일 창설한 것이 선전이다. 그 후로 1944년까지 지속되어온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양화 부문의 입선. 특선의 상당수가 수채화였다. 물론 값이 비싼 유화물감을 사서 쓸 수 없었던 중학생 층들이 주로 수채화를 그렸지만 그중에서 뛰어난 솜씨와 작품성으로 각광을 받은 것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수채화 작품의 다수 입상은 수채화가 유채화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장르와 영역의 작품으로 첫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초기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수채화가는 손일봉이었다. 그는 서울 사범학교 학생으로 1925년부터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로 거듭 입선과 특선을 하였고, 1927년 동경의 제국미술전에서 역시 수채화로 입선하면서 특출한 수채화의 기량을 평가받은 작가라 하겠다.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수채화는 더 많은 발전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도입단계에 있었던 유채화법의 재질이나 기법을 터득하지 못한 미숙한 상태였고, 동양적인 표현방법과 유사한 서구적인 수채의 표현방법이 우리의 체질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채의 표현방법을 통하여 서구의 조형세계로 접근하고자 함이 鮮展에서 수채화의 붐을 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30년대의 수채화는 기법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서동진과 손일봉 등에 의해 투명수채로 밑색이 들어나는 기법을 사용하던 것에서 불투명수채를 혼용하여 중후한 느낌과 다양한 질감표현의 새로운 수채화를 그렸다. 특히 원경에는 투명 수패화로 근경에는 물기를 적게한 후 갈필적인 붓터치로 질감을 살렸다. 빛을 받는 하이라이트 부분에는 흰색과 여러 가지 색재를 섞어서 채도가 낮은 색채로 사물을 묘사해 깊이감과 무게감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불투명 수채화는 이인성, 박수근 등을 통해서 대규모 전람회에 출품해서 회화재료로써 활용되고 있음을 입증시켜주었다.
특히 이인성은 1930년대의 작가로 수채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라 하겠다. 그는 손응성과 더불어 鮮展과 동경의 帝展과 文展에서 그 기량을 십분 발휘하여 수차에 걸쳐 입선하였다. 이인성은 그의 스승인 서동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30년에는 일본 수채화 회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이러한 작가들의 활동이 바로 한국 수채화 초기의 성장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한국 수채화로의 비약적인 도약을 하는데 결정적인 이정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기 대표적 수채화가로는 서동진, 박명조, 손일봉, 정현웅, 이인성, 정상복, 박봉재 등을 들을 수 있다.
서동진 (徐東辰, 1900-1970)
최초의 수채화가 소허 서동진은 1900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서동진은 벽성학교 재학 시 학생운동 관련으로 퇴학을 당하고 어렵게 휘문 보통학교에 들어간다. 유가족의 증언으로는 휘문시절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 미술교사로 일본에서 돌아온 춘곡 고희동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서동진의 연보에 의하면 휘문학교 졸업 후 2년간 도일하여 미술연구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구로 돌아온 서동진은 본격적으로 수채화 작품제작에 들어갔다. 그는 이후 일종의 미술관계센터인 대구미술사를 설립하여 대구 지방작가, 시인, 화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게 된다. 당시 상호 등의 마크를 보면 <석판 인쇄, 회화 도안 기타 미술, 대구미술소>라고 되어 있다. 즉 인쇄소와 더불어 각종 상업미술 및 순수회화 등 일종의 미술종합센터 역할을 한 듯하다. 33)
20년대를 기점으로 활발해진 대구지방의 신미술 운동 가운데 하나로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로 수채화의 활발한 전개를 들을 수 있다. 수채화를 본격적인 미술장르로 존중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요즘에도 있는데 이미 양화의 도입기에 수채화에 대해 깊은 인식으로 중점적으로 제작하였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일이 된다. 수채화라는 독특한 재료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수채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그것도 한 지방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함이 그러한 이유이다. 그것도 이러한 현상이 유독 대구 출신 작가들을 통해 짙게 나타나고 있음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가 없겠다. 34) 이곳에서는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끼리 결속되어 일본인 미술단체에 대항하여 <영과화>(1927년), <향토회>(1930년) 창립주도하여 민족적인조직으로서의 의의는 자못 크다 할 수 있으며 우리끼리는 아주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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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33) 윤범모, 계간미술 가을호, 1981. p.79.
34) 오광수, 「한국 현대미술사」(서울; 열화당, 1991), p.88.
1927년 6월 ‘서동진 수채화전람회’라는 명칭의 전시회가 동아전 이후 5년가량을 지속하면서 정기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는 대구화단이라는 지방주의를 벗어나 1930년대 한국 화단사 속으로 크게 포용되어야 할 수준급의 그룹전이었다.35)
서동진은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수용기에 수채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첫 수채화가로 혹은 탁월한 미술운동가로서, 또는 대구화단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정력적인 사회사업가와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그의 인생을 장식했다. (도39)
도39) 서동진 - 뒷골목(1932년) 종이에 수채, 62x49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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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35) 윤범모,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서울; 미진사, 1988), pp. 176-179.
박명조 (朴命祚, 1906-1969)
대구에서 활동하는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선전에 입선(1926년)하고 그해 대구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가졌던 서양화가 又玄 박명조는 향토화단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50여 점의 작품은 새로운 조형성 을 추구하는 실험보다는 단순한 색채로 자연을 재현하는 사실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지만 순수회화에 뿌리를 둔 수채화의 전통적인 기법과 빈틈없는 구도로 차분한 분위기를 빚고 있다. 동시대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적 화풍에 머문 감이 없지 않지만 그 대부분의 수채화들은 간결한 형태파악과 함축된 의미를 부여 새로운 시각과 신선한 표현방법을 보여 주기도 했다.36)
박명조가 그린 모든 작품은 수채화의 전통적 기법과 빈틈없는 구도를 가진 것들이다. 수채화가 갖는 재료와 붓질의 특성을 최대로 살려 형태를 간결하게 파악하고 의미를 함축하며, 새로운 시각과 신선한 표현방법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박명조는 물의 번짐을 이용해 분위기 묘사에만 신경 쓴 듯 단순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림자의 배경에 청색을 채색함으로써, 일본의 자파(紫派)에서 받은 영향이 보인다. (도40)
도40) 박명조 - 해인사입구(1950년) 종이에 수채, 52x37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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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36) 이경성, 「한국서양화대관(I)」(서울; 미술공론사, 1991), p.46.
손일봉 (孫一峰, 1907-1985)
경상북도 경주 출생인 손일봉은 한국화단에서 도입기의 국내 유일의 신인등용문인 선전에 입선하였다. 그는 “그 그림은 훈련원 근처의 청계천을 그린 것인데 처음에 반입하기 일 주일 앞서부터 매일 그것을 가서 보고만 오다가 반입 전 토요일 오후부터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에 이와 같은 영광과 영예를 입게 된 것은 모두 이 학교의 도화선생님인 후쿠다씨의 지도를 받아 배워 온 덕택인 줄로 압니다.”37)라고 입상소감(선전 제4회)을 말하였다.
선전 3회에 입선한 정물화가로서 국내에선 처음으로 공식적인 회화장르 영역으로 최초의 수채화를 발표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한국화단에서 선전을 통하여 수채화가 처음으로 국내작가들에 의하여 등장한 것이 1924년의 일이다. 1925년 선전 4회에서는 이승만과 같이 4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특선을 3회 함으로써 선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가 중의 한사람으로 성장한다. 손일봉은 경성사범학교 학생시절인 10대의 나이에 선전에서 입상과 특선을 거듭하였고, 1927년에는 동경의 제국미술전에 역시 수채화로 입선하여 특출한 수채화 기량을 발휘하였다. 수채화가 표현적 특징에서 동양화와 많은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외래 양식의 수용에서 일어나는 갈등현상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말하자면 비교적 동양의 조형성과 유사한 수채의 방법을 통해 서구의 조형세계로의 동화를 이룩해 갔다는 사실이다.38)
그러나 손일봉의 수채화는 그 나름으로 문전의 평면적 인상화풍에서 벗어나 보다 짜여진 구도와 대비적인 명암대비 등 후기 인상파의 조형체험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손일봉의 작품소재는 정물과 풍경위주이다. 구도는 대체적으로 안정된 사선형을 택하고 있다.
초창기의 풍경화에서는 전통의 동양화법과 새로운 서구의 서양기법이 교차되어 많은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기법면에서는 초창기에는 그저 수채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기법이 엿보이나 강렬한 명암대비의 효과는 높은 수준의 수채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횟수가 거듭되면서 출품된 수채화도 서양화기법의 진면목을 보여주려는 듯 중후한 톤의 색조가 화면을 압도한다. 그는 풍경에서는 주로 소도시의 작은 마을이나 촌락의 풍경보다는 대도시의 대형 청사건물을 주로 그렸다. 그것은 어찌보면 개화기의 새로운 기법과 더불어 풍경그림 소재에 있어서도 새로운 소재를 찾아 그림으로써 작품에 보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듯하다. 그의 수채화는 대구지방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그는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유채화를 그렸고 이후에도 많은 유화작품을 그렸다. 귀국한 이후에는 오랫동안 공방기를 맞이한다. 39)
1971년 손일봉은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교수로 초청되어 다시 왕성한 제작활동과 함께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좋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학에서 정년퇴임 후 그는 4년 동안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가 본격적인 창작생활로 몰입하여 1985년 11월 29일 타계한다. 40) (도41)
도41) 손일봉 - 백자가있는정물(1978년) 유채, 65x6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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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37) 이번 광영은 은사의 덕택, 「매일신보」, 1925. 6. 4. - 최열, 한국근대미술
의 역사, 열화당, 1998. p.196.
38) 한국현대미술사, 서양화편(서울 :삼종문화사, 1977) p.27.
註39) 김창락, 「손일봉화백 유작전」(서울, 신세계미술관, 1987)
40) 김영대, “한국화단의 수채화의 수용과 정착에 대한 고찰”,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학위논문, pp16-17.
이철이 (李哲伊, 1909-1969)
강원도 횡성 출신인 이철이는 선전 출품작부터 일본에서의 미술 수업기를 거쳐 6.25에 이르기까지 초기 작품들은 풍경, 인물을 소재로 한 아카데믹한 화풍이 지배적이다. 당시의 작품을 보면 대체로 풍경 속에 몇 사람의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문화학원 재학시절의 목탄 데생작품에서는 비교적 정확한 묘사력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비하면 50년대 이후에는 정물화가 압도적이다. 그는 미술교사로 지내면서 학교의 화실에서 꽃이나 과일 등 몇 가지 소재를 반복해서 그린 듯 비슷한 구도와 소재의 작품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이르면 반추상, 추상으로 변모 해간다. 특히 이 시기에는 국내 화단이 전반적으로 앵포르멜의 열기에 휩싸였으며, 대다수의 구상작가들도 한때 추상에 경도되었던 시기였다. 그의 재현적인 정물도 추상화로 바뀌는 과정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스푸마토 기법처럼 정물과 배경의 경계를 점차 파괴하면서, 화면은 원근이 배제된 평면이 되어 간다. 두터운 마티에르 효과를 노린 일련의 작품은 일견 그와 가깝게 지내던 朴壽根의 화풍과도 연결시켜 봄직하다. 그는 한지와 먹으로 그리기도 했고, 붓이나 나이프보다는 숟가락으로 물감을 칠하기도 했다.
칸딘스키를 존경했다는 李哲伊의 추상은 수채물감이 화면에서 번져서 생기는 우연성과, 흘리고 뿌리는 즉흥성의 효과를 노린 작품이 있는가 하면, 두꺼운 유화의 마티에르를 살린 서정적 추상경향이 있다. 그가 시종 병행했던 구상작품들과 함께 그의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新造形派,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 등 주요 전람회에 출품한 대작의 추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41) (도42)
도42) 이철이 - 작품 (1966년) 종이에 수채, 36x28.8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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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1) 이경성, 전게서., p.57.
정현웅 (鄭玄雄, 1911-1976)
서울 출신인 정현웅은 대다수 한국의 걸출했던 양화가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적 조형어법을 체득했던 것과는 달리 철저하게 국내에서 미술의 기본을 익히고 작가로 성장했던 독학파였다. 그는 선전을 통해 화단에 데뷔한 이래, 줄곧 작품 활동을 했으며, ‘선전 특선화가’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화가였다. 정현웅이 양화활동과 함께 또 다른 측면에서 미술사적 평가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少年」「朝光」 「女性」 등 각종 잡지와 서적에 수많은 삽화, 아동화 등을 남긴 출판화가로서의 면모이다. 그는 오랫동안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고전과 역사소설 흑은 교과서에 빼어난 출판화를 그려냄으로써 미술의 대중화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던 선구자 중의 한사람이다. 42) (도43)
도43) 정현웅 - 누구 키가 더 큰가1963년) 종이에 수채 54x38.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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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2) 이경성, 전게서., p.66.
이인성 (李仁星, 1912-1950)
이인성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 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
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2년 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그는 불과 17세에 소년으로서 제 8회 선전(1929년)에서 첫 입선을 차지한 후 선전 시대의 종막을 고하는 마지막 회(1944년)까지 조숙하면서도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43)
그는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도쿄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등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만한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49년에는 제 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 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한다.
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 한 출세지향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다.
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6회 연속 특선 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37년엔 불과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는 등 '조선의 지보(至寶)''화단의 귀재"로 불리며 신화적인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그와 동시대의 작가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이 50-60년대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해 70-8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 대비된다.
투명수채화를 주로 그렸던 이인성은 1932년 일본에 온 후부터 불투명수채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투명수채화에서 물의 양을 점점 줄이고 흰 물감을 사용함으로써 좀 더 거칠고 중후한 효과를 표현하였다. 이인성이 일본에 머무를 당시 일본 수채화계에는 불투명수채, 즉 과슈의 사용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아마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44) (도44)
도44) 이인성-노란옷을입은 여인(1934년),종이에 수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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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3) 윤범모, 전게서, p.402.
註44) 김영나, 「이인성의 성공과 한계」, 「이인성」한국의 미술가 시리즈(삼성문화재단,
1999), p.32.
정상복 (鄭相福 , 1912- )
작품들이 맑고 순수한 화가 정상복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말해서 순수하다. 그 순수하다는 말 속에는 속기가 없는 선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옛적 문인화를 그린 선비들의 생각과 미의 세계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과거 조선조 시대의 회화사를 이끌어간 문인화가들은 전문적인 직업화가가 아니라, 정신생활을 하는 선비들의 욕심없는 여기로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화가 정상복도 세속을 떠난 고고한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그림의 세제에 몰입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상복의 작품세계를 몇 가지 특징으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순수성, 둘째, 직관성, 셋째, 운염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결국 화가 정상복은 가장 자연적인 자세로서 무리없는 자기의 세계를 표현함으로써 또 하나의 자연이 되었던 것이다.45) (도45)
도45) 정상복 - 해인사 (1986년) 종이에 수채, 57x38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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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5) 이경성, 전게서., p70.
박봉재 (朴鳳在, 1913-1988)
서울 출신인 박봉재는 이미 1930년대(대구사범학교 재학시)에 선전 4 회 입선의 경력을 가졌으며, 1979년 이후 일목 수채화전, 태평양전, 一水會展 등에 한국의 정서를 담은 역작 을 계속 발표하는 등 水彩畵로서 一家를 이룬 원로임에 틀림이 없다.
박봉재는 주로 설악산, 부산, 인천, 서울 근교에서 소재를 찾으며, 2회의 외유에서는 印 · 獨 · 스위스 · 美 · 日 등지에서도 신선한 솜씨를 기록하기도 한다.
특히 1981년도 일본 수채화전(일본 수채화단의 최고의 권위전) 출품작품은 수상작품으로 선정되었으나 외국인에게는 수상하지 않는 이 회의 관례때문에 수상이 보류되었다는 구두통지를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박봉재의 화실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들이 쌓여 있다.
작품이란 곧 작가의 분신이며, 고백이며, 지혜라는 뜻을 그의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작품 속에 화업을 중단했던 33년간의 상처같은 것을 의식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사색보다는 행동이, 안도보다는 초조의 빛이 짙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현실을 이겨낸 순교자적인 의지와 용기가 작품으로 응결되기를 열망하는 결의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이제는 값싼 외적 명성보다는, 값진 자신으로 심화 · 승화 시켜가려는 내적 다짐이 더욱 소중한 것 같다.46) (도46)
도46) 박봉재 - 풍경 (1985년) 종이에 수채, 76x5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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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6) 이경성, 전게서., p78.
4-2 현대 수채화(1945년 - 현재)
1945년의 광복이후 미술계의 다양한 발전 속에 유채화와 수채화를 병행시켜 제작하는 작가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장이 열리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방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미술인들도 다양한 발전 속에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수채화만 고수하는 작가와 유화, 수채화를 같이 병행하여 제작하는 화가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현대회화에 있어서 아크릴릭 작업은 시간성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선호하고 있으며 많은 작업에 사용되고 있다. 이는 아크릴릭 작업이 수채와 유채를 넘나들면서 기법의 표현이 좀더 자유로워 선호하고 있다. 1949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약칭 국전)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와 문광부) 주최로 열리게 되었는데 선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화부에 수채화가 포함되어 출품되었고 이경희의 ‘포항의 부두’가 특선으로 입상하였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수채화나 유화의 작품 크기가 비슷한 크기로 출품되었지만, 戰後 50년대에 들어와 점차 작품들의 규격이 커짐에 따라 유화의 대작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으며 수채화는 점차 소외당하는 실정이었다.
현재는 재료의 개발로 인해 수채화지도 롤(ROLL)이 수입되어 크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며, 수채안료도 개발되어 발색과 보존면에서도 유채화 재료 못지않은 양질의 물감이 수입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수채화지나 수채안료가 일본을 통해 구입되는 실정이었으므로 양질의 재료를 구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실정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점차 유채화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으며, 대학에서도 서양화 전공에는 수채화보다 유화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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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7) 유성웅, 「세계의 수채화(2)」(서울;도서출판 숭례문, 1993), p.683.
1950년 후반, 1956년에 수채를 매체로 사용하는 작가들의 모임이 결속되었지만 그 활동이 친목적 성격에 그치고 유명무실하게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60년대와 70년대 전반까지 수채화 작가들은 뚜렷한 모임의 단체 활동 없이 개인별 활동에 머물다가 ‘한국수채화 창작가회’라는 명칭으로 1975년 9월, 미술회관(안국동)에서 창립전(9월 13일-19일)을 하였다. 이 전시회의 참여작가는 손일봉, 배동신, 박기태, 박영성, 김인승, 이수창, 강연균, 윤재우, 최쌍중, 정문희 등이다.48)
이 모임은 초창기 10여명의 회원으로 결속되어 회원전 발표만 하다가 80년대부터 ‘한국수채화협회’라고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수채화협회는 여러 편의 수채화 화집을 발간했고, 국제교류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30여회의 협회전과 21회에 걸친 공모전을 개최하여 신인작가 발굴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회원도 전국을 통합하여 2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여러 신문사와 각종 단체의 문화강좌와 평생교육원에서도 수채화 강좌가 상당한 인기를 모으는 프로그램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각종 행사 및 일련의 전시회와 화집발간은 한국의 수채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도 수채화라는 장르의 이미지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또한 작가들 사이에서도 수채화라는 독특한 매체에 대한 예술성이 부각되면서, 수채화는 한국 화단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한국수채화의 발전을 예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현대 수채화가로는 김환기, 박수근, 이종무, 배동신, 고화흠, 천경자, 박영성, 박기태, 전상수, 박철교, 박광식, 최광선, 전호, 안영, 강연균, 박상윤, 이두식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화가들은 수채물감, 과슈, 아클릴릭 등을 회화재료로써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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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8) 한국수채화협회 창립전, 전시도록, 1975. 9. 15.
김환기 (金煥基, 1913-1974)
1913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한 김환기는 일찍이 동경에 유학하여(일본대학 예술학부) 1930년대 후반 일본화단의 전위적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 창립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유영국, 이규상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의 계보를 형성하는 한편 서울대학, 홍익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보였다. 1956년에는 프랑스로 진출하여 약 3년간 체류했으며 1959년 귀국 후는 홍익미대 학장, 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술계 중심에서 활동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그 해 미국 뉴욕에 정착한 이후 1974년 작고하기까지 뉴욕 화단에서 활동하였다.
김환기의 예술세계는 초기인 동경시대와 중기인 서울, 파리시대, 그리고 후기인 뉴욕시대로 나누어진다. 초기인 동경시대는 입체파, 구성파의 영향을 거쳐 추상미술에 도달하였으며 해방 후는 추상적 바탕에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시킨 독특한 화풍을 펼쳐 보였다. 특히 이 시기 김환기가 많이 다룬 소재는 달, 산, 항아리, 학, 매화 등 고유한 정서를 담은 것이었다.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귀의하려는 동양인의 의식을 근간으로 하면서 우리 고유한 정서를 양식화한 점에서 그의 예술은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이 되었다. 그의 기조색으로서의 청색 역시 몽환적이면서도 한국의 자연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3년 뉴욕에 정착하면서 김환기의 예술은 또 다른 변신을 보인다. 구체적인 자연대상은 지워지고 선, 점, 면들로 구성되는 순수한 추상에로의 변모이다. 방법상에서도 지금까지의 두터운 마티엘(질감) 위주에서 벗어나 안으로 스미는 듯한 엷고 투명한 안료로 뒤덮히는 은은한 여운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김환기의 뉴욕시대작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통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고 그의 뉴욕에서의 변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환기의 작품은 선, 점, 면에서 더욱 발전된 점만의 세계로 진행되어 화면 전체가 점들로 채워지는 이른바 점화의 세계에 도달하였다. 살아있는 세포와 같이 점들은 증식되어 거대한 파도모양의 리듬을 만들기도 하고 영롱한 성좌처럼 명멸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70년을 기점으로 그의 의욕적인 창작의지는 대폭의 점화들을 다량 제작해 내었다. 김환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만년에 해당되는 70년대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어 나왔다.
순수한 추상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작품 속에서도 간단없이 자연에 향한 그의 깊은 정신적 항상성이 맥박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광대한 파동으로 전달되는 생명의 리듬처럼 그의 작품은 시공을 넘어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도47)
도47) 김환기-어디서무엇이되어 다시만나랴(1969) 과슈
박수근 (朴壽根, 1914-1965)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박수근은 인물화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초기 조선미전 출품작에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도48)로 입선을 하게 되었다. 그 작품에서 특히 흰색 빨래의 표현을 보면 투명 수채화로 채색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불투명 수채화로 처리가 되었다. 견고하고 중후한 기와와 나무 묘사에서 투명 수채화의 특징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유화적인 새로운 수법의 수채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화된 형태에 짧은 터치로 여러번 겹치게 칠했으며 화면 전면에 외곽선을 그려 강조를 했다. 또한 원경에 보이는 산의 표현은 마치 흰천의 주름을 묘사한 듯 보인다. 그는 남다르게 토속성 짙은 화풍을 낳고 있었다. 그의 일제시대 화풍 역시 수채화에서 유화로 전이되고 있었으며, 일제 시대에는 농촌풍경과 절구질하는 여인의 단순한 구도를 주로 다룬 후 해방이후 특유의 거친 마티에르, 간명하게 단순화한 농촌풍경과 사람, 전통적인 상하구도법(上下構圖法) 등으로 한국적인 미의 표출로 일관되고 있다.49) 비록 박수근은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않았었지만, 조선 미전에서 나타난 화단의 변화를 포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하게 된다. (도49)
도48) 박수근-봄이오다(1932) 수채화 도49) 박수근-(1959년), 연필과 파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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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49) 이중희,「조선미술전람회 창설에 대하여」,「한국근대미술사학」3(청년사, 1996) p.91.
이종무 (李種武, 1916-2003)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이종무는 춘곡 고희동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이종무 작품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형태와 색채로 나누는 것이 편리하다.
그의 작품 양식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구상이다. 이 구상이란 말은 寫實이란 말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면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뉘앙스가 크게 다르다. 구상이라는 것은 寫實과 마찬가지로 자연 형태를 긍정하되 액면 그대로 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다소의 화가의 주관을 가미함으로서 대상의 자연을 부분적으로 자기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종무의 작품세계를 구조적으로 뒷받치고 있는 형태감각은 수평구도이다. 수평구도를 즐겨서 쓴다는 사실은 조형작업이라는 人工을 떠나서 그의 선천적인 인간형까지도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 즉 거만하지 않고 평민적인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지라 웅대한 것과 장엄한 기상보다는 조촐한 것과 소박한 것을 즐기는 마음의 취향이 긴장을 고조하고 화면의 격만을 따지는 수직구도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의 색채에 관해서는 그는 황갈색을 좋아한다. 그것은 인간성의 부드러움이나 감성을 표시하는데 적합하다고 본다.
이종무의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寫實에서 시작하여 구상에 이르고 그 구상에서 부분적인 추상에 이르렀다가 또 다시 구상으로 되돌아 왔다.50) (도50)
도50) 이종무- 소래포구(1985년) 종이에 수채, 76x5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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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50) 이종무, 「이종무 작품집」(미술저널사, 2003), pp.8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