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
구 용
나는 1942년 11월 1일 함경남도 함흥과 흥남에서 가까운 함주군에서 농부인 아버지 김기복(金基福 1900.8.29-1974.3.17)과 어머니 이귀순(李貴順 1917.6.14-1980.2.18)의 4남 1여의 장남- 장가가서 내 또래 조카가 있는 이복형이 한 사람 있지만 월남하지 못했음- 으로 산골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구용(金九鏞)임. 필명은 구용은 등단할 때 한학자이고 교수이며 시인이신 김구용이라는 분과 구별하기 위함이었음. 아버지는 조그마한 과수원을 가진 전형적인 농부로 조, 감자, 콩, 옥수수, 수수, 기장 같은 밭농사를 주로 지었고, 전처가 병사(病死)하여 어머니와 재혼하였고, 평생 두 분이 싸우는 것을 본 일이 거의 없음.
고향에서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다 1.4후퇴로 외갓집이 있는 흥남으로 갔다, 배로 부산을 거쳐 거제도 일운면 지세포에서 피난생활을 했으며 일운 초등학교를 다님. 아버지가 부두에서 지게 짐 지다 넘어져 심한 부상으로 장승포 메리놀병원에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아 남들보다 늦게 거제도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함. 대청동 산꼭대기 판잣집에 살았으며 남일 초등학교에 4학년 2학기 때 전학함. 아버지는 목탄장수로, 두 번이나 큰 화재를 당하여 보수동 산꼭대기 판잣집으로 이사함. 6학년 1학기에 열병으로 의식이 없어 부모님께서 죽었다고 포기했는데 다음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며, 그 때까지 내 꿈은 야구선수였고, 중학교 진학시험에서 운이 좋아 대신중학교에 합격함.
그 동안 아버지는 목탄장사로 번 돈으로 보수동 평지에 방 2칸 짜리 집을 장만함.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포오르와 비르지니’ ‘보물섬’ 같은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옆집에 사는 여자아이를 남몰래 좋아하면서부터 운동은 주먹쟁이만 하는 걸로, 그 당시에는 대체로 그렇게 인식되어 스스로 포기함. 사실 나는 6학년 때는 피구선수였으며 몸집도 크고 행동도 민첩하여 중학교 때는 야구도 잘 했으며, 고등학교 때에는 럭비선수로 뽑히지 않으려 일부러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다녔음.
가게에 보탬이 되고자 부산 공업고등학교 전기과로 진학하여 취업반에 있으면서, 나는 도스토에프스키의 단편 어느 몽상가와 애인을 기다리는 나스첸가라는 처녀와의 4일간의 밤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이야기인 ‘백야(白夜)’를 즐겨 읽었고, 직접 조립하여 만든 진공관 라디오를 통하여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순박한 시골청년(네모리노)의 참된 사랑을 뒤늦게 알고 감동하여 우는, 여자 주인공(아디나)을 보고 부르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과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혁명투사인 주인공(카바로도시)이 처형을 앞두고 산탄젤로 성 옥상에서 사랑하는 여인(토스카)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흐느끼는 ‘별은 빛나건만’의 아리아를 특히 좋아했음.
1학년 때 한글날 기념으로 교내 독후감 쓰기에서 글재주도 없는데- 나는 악필에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지금도 서투른 편임- 어쩌다 1등으로 수상하여 글쓰는 계기가 되어, 교지 ‘용광로’ 편집을 맡았고 ‘사랑의 슬픔’ ‘가난한 행복의 문으로’ 시를 교지에 발표함.
5.16혁명으로 벌목이 금지되어 아버지는 목탄장수에서 연탄장수로 주로 고지대에 등짐으로 연탄을 나르면서, 당신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 속에서도 우리 4형제들을 모두 고등학교까지 보냈음. 누나는 일찍 진학할 엄두도 못 내고 공장 다니다 출가함.
옆집에 사는 여학생이 사범학교 나와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는데, 내가 졸업하기 전 공장 다니면서 받는 봉급의 3배나 더 많아 앞뒤도 가리지 않고 그만두고, 1년을 좌절과 비탄으로 보내고, 그 다음해 부산교육대학에 입학하여 문예부 부장으로 ‘한새벌’ 교지를 편집했으며 ‘밤과 꽃들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 시와 ‘불꺼진 창’ 단편을 교지에 발표함.
아버지는 연세도 있고 곗돈도 떼이고 장사도 잘 안돼 다시 보수동 산꼭대기 구멍가게가 있는 집으로 이사함. 뒷날 아버지는 동맥경화로 어머니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음.
1964년 3월초에 창녕군 장가 초등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으나, 곧 폐결핵으로 마산 결핵요양소에 입원까지 하며 1년을 병휴직 하였다 옥천 초등학교에 복직하여, 26세 때 육군 사병으로 원주 하사관학교에 근무했으며 29세에 제대함. 길곡 초등학교에 복직하여 그 이듬해 고향이 북인 서정자(徐貞子 1946- )와 중매 결혼하여 슬하에 영조(英祚 1971- )와 영준(英俊 1974- )이 두 형제를 둠.
마산시 완월, 월영 초등학교 근무 시 1977년 경남 아동문학회 창간호‘하얀 찔레꽃들’ 에 ‘금붕어 1. 2’를 발표하고, 신춘문예도 응모해보았으나 동시 쓰기가 너무 힘들어 그만둠. 거제시 장평, 농호, 양산시 하북, 기장, 용연, 덕계 초등학교 교사로서 재직.
특히 덕계 초등학교에 근무 중 밤중에, 요즘도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안 피우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오랜 친구의 전화로 스쳐가듯 한 말이 나를 잠 못 이루게 하였음. 그러던 중에 우연히 ‘엄마와 분꽃’이란 이해인 수녀님의 동시집을 읽고, 동시가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깨닫고 새삼 대학교 때부터 써오던 이야기가 담긴 동시를 무엇에 홀리듯 썼음. 아울러 누가 읽어도 쉽고 재미있으며 감동을 주는 동시집을 내리라 작정하고, 1996년 나이 54세에 동화문학과 아동문예에 ‘앵두가 익을 무렵’ ‘바람’ 등의 동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동시를 쓰기 시작하여, 그해 동화 같은 동시 ‘숙제 안하고 학교 간 날’ 이란 첫 동시집을 계몽사에서 발간함. 그리고 울산 일산 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오랜 전에 이미 쓴 작품들을 모아 같은 제목에 다른 내용 ‘붕어빵 장수’ 동시집을 발간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사실은 제일 먼저 쓴 작품임.
1999년 1월 1일 울산 성동, 웅촌 초등학교 교감과 검단 초등학교 교장재임(2002.9.1-
2005.2.28)기간을 포함 10년 동안 52마리 새 이야기 ‘새들의 합창’, 장애인의 아픔과 고통을 다룬 ‘인숙이 누나’, 생각하는 동시 ‘들길을 걸으며’, 52송이 꽃 이야기 ‘꽃들의 노래’, 농촌생활 이야기 ‘내 고향 사람들’, 어촌생활 이야기 ‘바닷가 오막살이’, 52마리 곤충 이야기 ‘곤충의 꿈’, 52마리 동물 이야기 ‘동물학교’, 등 매권 마다 분명한 테마가 있는 10권의 동시를 썼음.
그런데 짧은 기간에 내가 글재주가 있어서 많은 동시들을 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남들보다 글재주가 있는 게 아니고, 어린이들에게 글짓기 지도를 하다보니 자연히 동시를 쓰게되었음. 그리고 소재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질병과 가난으로 소외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냥 묻어둘 수가 없었고, 들과 산으로 뛰어다니며 들꽃을 보고 새소리 들으며 곤충과 동물을 쫓아다녔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관심을 가졌음.
돌이켜보면 나는 남들에 비해 똑똑하지도 못하고 작품 한 편을 위해 수십 번 고쳐 써야했으며, 남과 타협할 줄 몰라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는 부끄럼 많고 소심하며 꼼꼼한 성격에, 부모님 덕분에 장남이라고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으며 군 입대, 결혼, 세례(요셉), 문단에 등단, 승진 등 모두 지각생이었음. 그러나 순수한 마음 하나로 40여 년을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 기쁨이요 축복이었음. 끝으로 정년퇴임과 더불어 그 동안 발표된 동시집과 미발표된 두 권의 동시집 -‘곤충의 꿈’과 ‘동물학교’- 를 묶어 동시전집을 냄으로써 작품활동도 끝내려 했고 여의치 못해 미루어왔음.
다음은 나의 일생을 읊은 시임.
어린 시절 가난할 땐
꿈이 있어 행복했고
젊어서 방황할 땐
사랑이 있어 행복했고
늙어 가진 것 없어도
그리움이 있어 행복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