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고려(高麗) 21대 희종(熙宗) 때의 목우자 보조(普照) 국사(國師)가 지은 『수심결(修心訣)』을 조선(朝鮮) 시대(時代) 7대 세조(世祖) 때의 중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우리말로 옮긴 책. 10대 연산군(燕山君) 6(1500)년 합천 봉서사(鳳栖寺)에서 간행(刊行). 〈목우자수심결 牧牛子修心訣〉·〈보조국사수심결 普照國師修心訣〉라고도 한다. 40세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며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참선(參禪)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지눌은 이 책의 서두에서 〈법화경〉의 '화택비유'(火宅比喩)를 인용하여 삼계(三界)의 뜨거운 고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이처럼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부처를 이루는 일이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곧 참 부처이고 자신의 성품이 곧 참다운 법(法)임을 알지 못하여 밖에서만 찾으니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본론은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론을 9문9답을 통해 제시했다.
제1문답에서는 불성(佛性)은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 자체가 곧 불성의 작용임을 설명했다. 제2문답에서는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점차로 닦아나감)의 이문(二門)에 있음을 밝혔다. 제3문답에서는 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돈오란 자기의 본성이 곧 제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란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시 이래로 훈습(熏習:향기가 옷에 배는 것처럼 業力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된 망념(妄念)을 점차로 걷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제4~6문답은 돈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며 만약 방법을 써서 깨닫고자 한다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으니, 눈을 잃지 않았음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영지(靈知:신령스런 앎)도 이미 자신의 마음이므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견성(見性:자신의 불성을 보고 깨달음)이다.
제7~9문답은 점수의 방법론에 대해 선정(禪定)과 지혜를 균등하게 유지하는 정혜등지(定慧等持)로 설명했다. 정혜(定慧)를 체(體)·용(用)의 관점에서 보면, 정은 곧 자성(自性:자기가 본래 갖춘 성품, 곧 佛性)의 본체이고 혜는 곧 자성의 작용이므로 체·용이 분리될 수 없듯이 정·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점수의 방법론은 정과 혜를 동시에 골고루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혜쌍수는 수행자의 근기(根機:敎法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나뉜다. 자성정혜를 닦는 자는 돈오문에서 '힘씀이 없는 힘씀'(無功之功)으로서 정과 혜를 아울러 부리고 스스로 자성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사람이고, 수상정혜를 닦는 자는 깨닫기 전의 낮은 근기의 공부로서 마음마다 의혹과 번뇌를 끊고 고요함만을 취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깨달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비록 돈오 후에 점수라고는 하나, 망념은 본래 공(空)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눌은 이 책에서 자신의 수심관(修心觀)을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체계화했고, 이는 곧 한국불교의 선수행(禪修行)의 지침이 되었다. → 목우자수심결언해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보조국사의 휘는 지눌(知訥)이고,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시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황해도 서흥(瑞興) 출생이다.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大覺)한 뒤에 수도에 더욱 정진하였다. 1185년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 ·교(禪敎)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하고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 ·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지눌은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고려의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수심결은 수행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세인들에게도 널리 읽혀져야 할 마음 닦는 길의 지름길이다. 인간이 누려야할 행복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이 해방의 길은 외부가 아닌 자신의 마음에 있음을 극명하게 가르쳐주는 지침서이다. 마음은 바로 자신의 처소이다. 여기에 절을 짓고 등불을 내걸지 않는다면 고통의 그림자는 사라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수심결(修心訣)이란 ‘마음을 닦는 비결’이란 뜻이다.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한 보조국사(1158-1210)는 40세가 되던 해(1197년)에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간화선을 창도한 <대혜어록>을 보고서 세 번째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다. <수심결>은 대혜선사의 어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상무주암에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어록이 출현하였지만, <수심결>은 현대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어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 간행한 대장경에도 등재가 되어 있고, 많은 선각자들이 <수심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례가 보고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국내에서는 단일 저술 가운데 가장 많은 연구와 번역과 강의가 이루어졌고, 이웃국가인 대만에서도 역주작업이 진행되어 출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버스웰(Buswell)교수에 의해서 화와이 대학에서 영어로 번역되었고, 명상에 기초한 스트레스 완화(MBSR)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존 카밧진(Jon Kabat-Zinn) 같은 심리학자들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 <수심결>의 어떤 점이, 무엇이 이런 역사적인 관심을 지속시켰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깨달음의 사상적 기초와 구체적인 방법의 핵심이 간명하면서도 쉽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수심결>의 기본적인 방향은 대승불교의 불성과 간화선의 수행론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어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진 까닭에 새롭게 연구하고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 기존의 많은 번역이나 연구의 방향과 대동소이하다면, 여기서 특별하게 강론해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전체적인 기조나 관점이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필자는 <수심결>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설을 해야겠다고 판단을 하였다. 이렇게 하면 오랜 대승불교의 전통적 사상인 불성과 간화선이 보다 현실적인 담론이 되고, 오늘의 현장에서 응용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지 않을까 생각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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