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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전씨 채미헌공파
계보(旌善全氏 採薇軒公派★★★
1세-도시조(都始祖)전섭(全攝)
환성군(歡城君)-BC18년
2世- 호익(虎翼)~서기28년-77년
3世- 반(攀) ~ 서기76년-88년
4世- 순성(舜成) ~환제연희년간
5世- 여균(汝均) ~백제 조
6世- 운교(雲喬) ~백제 조
7세- 원근(元根)
8세-전선(全愃)~정선군(旌善君)
정선전씨(1世)
정선전씨 시조서기704-755
9世- 방춘(方春) ~ (2世)서기737- ?
10世-경지(敬智) ~ (3世)
11世-이민(以敏) ~ (4世)
12世- 환(瑍) ~ (5世)
13世- 억균(億均) ~ (6世)
14世 천기(天奇) ~ (7世)
15世- 우상(禹相) ~ (8世)
16世이갑(以甲)(9世)927년 戰死
三忠公(全以甲,全義甲,全樂)
★전락(全樂,四寸)천안전씨 시조
17世-보인(輔仁)문경공(文敬公)
(10世) 벼슬:좌복야(左僕射)
18世- 언(彦) ~ (11世)
19世- 함정(咸政) ~ (12世)
20世- 총(寵) ~ (13世)
21世- 지순(之淳) ~ (14세)
22世- 량(諒) ~ (15世)
23世- 석록(錫祿) ~ (16世)
24世- 존걸(存傑) ~ (17世)
25世- 수룡(守龍) ~ (18世)
26世- 의(義) ~ (19世)
27世- 공렬(公烈) ~ (20世)
28世- 숙방(淑方) ~ (21世)
29世- 영보(英補) ~ (22世)
30世- 윤장(允藏) ~ (23世)
31世- 우도(宇道) ~ (24世)
32世- 천길(天吉) ~ (25世)
33世- 완(浣) ~ (26世)
34세- 우화(禑和) ~(27世)
35世- 귀(貴) ~ (28世)
36世-오륜(五倫)(29世)(刑曹判書)
채미헌공파 1세 (採薇軒公派 1世)
1373년(공민왕22년)과거급제 1392년(공양왕4년)고려 멸망
37世맹겸(孟謙)(30世)(2世)합천군수
38世-유의(由義)(31世)(3世)
태종5년-세조14년
39世-수공(守恭)~(32世)(4世)
세종25년-중종20년
40世- 철(轍) ~ (33世) (5世)
41世- 사웅(士雄)~(34世)(6世)
42世- 거(琚) ~ (35世) (7世)
43世-시서(時叙)화림제(36世)(8世)
가선대부,동지주추부사 - 선조34-인조17년 거연정1872년건립
44世-익지(益智)(37世) 9世)인조
45世- 균(均) (38世) (10世)현종
46世 진석(晋錫)(39世) (11世)
경종. 族譜1권 族譜143p
47世택의(宅義)(40세) (12世)
영조, 족보(族譜 1권 146p)
48世세규(世揆)(41世) (13世)
순조. 족보(族譜1권 146p)
49世형수(亨壽)(42世) (14世)
순조. 족보(族譜1권 146p)
50世-재모(在模)(43世) (15世)
고종. 족보(族譜1권 147p)
채미헌공파1世, 전오륜의15世, 손(孫) ~ 재모(在模) 와 부인 하씨 묘(墓)
51世-홍진(弘鎭)(44세) (16世)
族譜1권147p, 族譜2권227p
父: 弘鎭1900.03.03-1952.11.10(卒)
母:鄭又甲1910.08.20-1984.11.26(卒)
全 弘 鎭(전홍진) 鄭 又 甲(정우갑)
채미헌공파1세, 전요륜의 16世, 손(孫) ~ 홍진(弘鎭) 과 부인 정우갑(鄭又甲) 의 묘(墓)
子 : 永奎, 永鶴, 富雄, 永福, 女 : 幸子, 孫 : 完植, 世龍, 寅植, 世仁, 容載, 鉉旭, (女: 惠卿, 賢株, 玟宣, 慧珍)
좌(左) 15世, 재모(在模),
우(右) 16世, 홍진(弘鎭) 의 묘(墓)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1704-1 (옆)
월평소류지 東쪽, 서하월평길(위)
월평소류지(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52世-영규(永奎)(45世) (17世)
1930.10.11 -2021.03.01.(卒)2권 227p)
괴산호국원 1-7-13-309(2021.03.03)
(배우자)염경남
1935.02.13-2023.04.09.(卒)
괴산호국원 1-7-13-309(2023.04.11)
-영학(永鶴)~
1933.08.23-2004.07.12(卒)族譜2권228
이천호국원 05100263 (2004.07.14)
(妻)이윤랑(李允郞)1933.-2013.10.30(卒)
이천호국원 05100263 (2013.11.01)
- 행자(幸子)~1940.10.27-
~2020.01.02(卒). 族譜2권 229p
(배우자)-박두@(朴斗@) 1936.05.15
-부웅(富雄)~1943.08.20-
~1997.12.31(卒). 族譜2권 229p
(배우자)-심@숙 ~ 1947. -
- 영#(永#)~
1947. 06. 14.(07.31.)~ 族譜2권 229p
(배우자)-박## ~ 1950.11.23(12.31.)
53世-子. ##1978.-(46世) (18世)
(배우자)-김##1978.09.12. 229p
53世 - 女. ## ~1976.10.11-
(배우자)-李## 1969.11.09. 族譜2권 229p
54世-孫. ## 2015.08.21. (47世) (19世)
- 外孫. 이##(李##)2003.01.12.-
- 外孫. 이##(李##)2007.03.11.-
전씨 도시조(都始祖) 환성군(歡城君)전섭전섭(全攝)의 단소(壇所)
주소 : 충남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219
정선전씨(旌善全氏) 시조(始祖)
전선(全愃)의 묘(墓)
주소 :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산120-7 (묘지. 윗묘는 부인 내성신씨의 묘)
채미헌공파(採薇軒公派 1세(世)
전오륜(全五倫)의 묘(墓)
주소 :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旌善郡 南面 樂洞理)선운산
전오륜(全五倫 : 採薇軒公派 1世)의 묘(墓)는 경남 합천에 있었는데 1986년 합천다목적댐 건설로 묘지가 수몰지에 포함되어, 후손들이 고향인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서운산에 이장을 하였다.
거연정(居然亭)
[조상을 받드는 후손의 마음이 아름답다, 함양 거연정]
거연정은 화림동 계곡의 첫 번째 명승으로,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마을에 거하는 정선전씨(旌善全氏) 문중의 누각이다.
고려 후기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이 강원도 정선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오륜의 후손들은 대대로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迎勝里)에서 살았는데, 조선 인조 때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마을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형성해 세거하였다.
그중 가선대부(嘉善大夫) 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는 병자호란[1636]으로 인조가 청나라에 굴복하자, 1640년(인조 18)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채미헌을 향사하는 서산(西山)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마을 건너 넓은 계곡에 억새풀로 정자를 엮어 ‘화림재’라 이름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전시서는 채미헌의 8대손으로, 봉전마을 정선전씨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이후 200여 년이 흘러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8]에 의해 서산서원이 훼철되자, 전시서의 후손 전재택(全在澤)·전재학(全在學)·전재갑(全在甲) 등이 1872년 서산서원의 목재를 가져와 화림재 자리에 새로이 누각을 세웠다.
이 누각이 바로 거연정이다. ‘거연정’이라는 누정 이름은 전시서가 쓴 화림재 기문(記文)에서 말한 중국 남송 주희[1130-1200]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란 시구에서 따왔다. 주자는 53세[1183] 때 무이산(武夷山) 골짜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는데, 그 이듬해 무이산의 정경을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1899년에 쓴 「거연정 중수기」에 의하면, 전시서는 화림재에 거처하는 동안 「무이도가」를 즐겨 애송하였다고 한다. 위 시구는 주자의 「무이정사 잡영(雜詠)」 12수 중 「정사(精舍)」라는 시의 일부이다.
전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서사십년(琴書四十年)[거문고와 책을 벗한 지 40년] 기작산중객(幾作山中客)[거의 산속의 객이 다 되었네] 일일모동성(一日茅棟成)[어느 날 띠풀 집을 지었더니]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어느 듯 나도 천석이 되었네] 주자는 70년 일생 중에 40년을 무이산에서 생활하였는데, 그 속에서 자연과 조화된 자신을 위의 시로 읊어내었다. 전시서 또한 화림재에서 주자의 이러한 삶을 추구하였고, 전시서의 후손들은 선조의 뜻을 계승하려는 의미로 누정 이름을 삼았던 것이다.
맑은 계곡물과 천혜의 기암괴석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선조의 뜻을 이어가는 후손들의 후덕한 정성이 더해진 거연정 일대는 2005년에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국가지정 명승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거연정(居然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3호(2005년 10)
국가지정 명승 제86호(2012년)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06
정선전씨(旌善全氏) 채미헌공파(採薇軒公)파 1세 전오륜(全五倫정선아리랑 저자)의 8대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화림재(花林齋)전시서(全時敍)선조34~인조17)가 1640년 서산서원을 세우고 개울가애 나무로 만든 정자에 억새를 씨워 거연정을 만들었다.
충렬전공 휘 이갑순절비
(忠烈全公 諱 以甲殉節碑)
팔공산 동화사 아래, 팔공산 자연공원에 나의 36대 선조의 공적을 기리리위해 1989년 세워진 순절비 뒷쪽 왼편에 인공암벽 구조물이 보이고 오른쪽 뒷편에는 어린이 놀이 시설이 있다.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871번지 행정마을에 千年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이 곳에 寒泉書院이 있는데 書院講堂앞에 "高麗太師諡忠烈全公殉節碑"가 있다.
朝鮮 憲宗 4年(1838년)에 後孫과 士林이 忠烈公 全以甲과 忠康公 全義甲을 追慕하기 위해 寒泉書院을 건립하였는데 高宗 辛未年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毁撤되었다가 1954년에 後孫들이 寒泉齊를 建立하고 祭壇도 改築하여 高麗太師諡忠烈全公殉節碑 碑를 세웠다.
높이 203cm x 폭 73cm x 두께 44cm
아래는 碑文
高麗開國功臣太師忠烈全公諱以甲殉節碑(고려개국공신태사충렬전공휘이갑순절비)
이 碑는 高麗 開國功臣 太師 忠烈 全公이 高麗 太祖를 도와 後百濟 甄萱과 이곳 公山 桐藪戰에서 殉國盡忠한 大節을 顯영 하는 殉節碑이다. 때는 新羅 千年社 이 기울던 九 世紀末에 견휜은 武珍 完山에서 後百濟를 세우고 弓裔는 松嶽에서 後高句麗라 한뒤 鐵圓에서 다시 泰封이라 외치니 바야흐로 옛 三韓땅은 後三國으로 亂立되어 角逐의 時代를 맞는다.
일찍이 公은 騎郞이 되어 弓裔 幕下의 王建을 松嶽에서 만나 그가 能히 三韓 統合의 主가 됨을 알고 蒼生弘濟의 雄志를 相約하였다.
이로부터 王建과 더불어 東伐西征 하여 西紀 八百九十六年 丙辰에는 松嶽에 勃禦( )城을 쌓고 楊漢州와 西原등 漢南諸郡을 討平하였다. 西紀 九百六年 丙寅 精騎將軍 庾금弼과 尙州 沙火鎭에서 甄萱을 몰아치고 다시 四年 후 錦城 浦口에서 甄萱軍을 大破하니 王建은 곧 波珍飡 兼 侍中이 되고 公은 威武는 四海에 떨쳤다. 이에 朝野의 民心은 王建에게로 기울고 弓裔는 이를 恐懼하고 ( )하여 날로 狂暴해지니 公은 王建에게 進言하여 外職인 百船將軍이 되게 하고 錦城에 出戰하여 群賊과 ( 荒)을 鎭撫하였다.
더디어 天命이 이미 弓裔를 떠났음을 안 公은 申겸崇謙 洪儒 裵玄慶 卜智謙 등 諸將과 함께 王建 潛邸에 이르러 廢昏立明과 應天順人의 大義를 들어 王建을 推戴하여 君臣의 禮를 行하니 때는 九百八十年 戊寅이며 高麗 開國 天授元年의 일 이다.
天授三年에 後百濟가 大良 仇史 二城을 攻(략)할 때 新羅 阿飡 金律이 救援을 請함에 公은 精氣大將 申崇謙과 함깨 甄萱軍을 追擊敗退케 하였다.天授十年 丁亥 九月에 甄萱이 다시 新羅와 高麗를 離間하려고 高( )을 侵攻하여 中路를 遮斷시킨 후 高麗 援兵이 이르기 앞서 新羅 都城 蹂躪하여 鮑石亭에서 曲水之宴中이던 景哀王을 自盡케 하고 羅都를 蕩( )의 땅으로 焦土化시켰다 이에 高麗 太祖는 壯節公 申崇謙과 忠節公 金樂을 左右 大將으로 命하고 公을 副將으로 삼아 精騎을 親(師)하고 星夜南馳하여 甄萱軍과 이곳 桐藪에서 만났다.乾坤一擲 大混戰에서 高麗軍이 衆寡不敵으로 數重包圍되어 危急地勢에 이르자 諸將은 곧 太祖를 微服으로 脫出케하고 壯節公 申崇謙이 御車에 大乘하여 ( )戰하였으나 代王殉節하는 激戰속에 擧軍盡滅하니 壯節公 및 忠節公이 世稱 八公三節의
英名을 千歲에 남기고 公의 아우도 함께 殉節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智妙美利寺앞이다. 뒷 날 太祖가 몹시 슬퍼하였다. 諱 以甲이신 公은 統合開國功臣 太師 兼 尙書左僕射 諡 忠烈公 封 旌善君으로 追贈되고 諱 義甲이신 公의 아우는 散騎常侍門下侍郞 兼 忠康公 竹山君으로 被封되고 또한 表忠 智妙寺를 創建하여 冥福을 빌게 했다. 公의 爲國忠節을 顯揚하는 일은 朝鮮朝에 와서도 線線했으니 그 後孫에 대한 太祖, 太宗, 孝宗 列聖朝의 承蔭敎旨가 累분이어서 沙汰考講을 免하는 關文과 完文이 數次였고 江湖 儒林이 寒泉書院 및 道溪書院까지 세워 千載英靈을 奉亨하였다. 公의 始祖는 諱 으로 百濟 開國功臣 歡城君이시고 諱가 인 旌善군은 中祖가 되며 累世后에 典校寺事 諱 禹相이 公의孝이며 는 具氏이고 配인 箕氏는 上大夫人인 佑의 女이시다. 무릇 歷史는 萬歲의 通鑑일진데 슬프다! 公의 이같은 卓節과 嵬勳이 어찌 正史에 缺落되고 公山 破軍(사)에 無塋孤魂이 되었단 말인가? 이제 桃源 遺跡과 遠丘邑 郡誌 等의 多數의 遺記가 비로서 公開되고 그 歷史의 現場인 이곳 八空山 市立公園에 公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立)碑 修史之任을 맡은 本人이 비록 不文이나 흙속에 묻혔던寶鑑을케어낸 듯이 기쁘고 感慨無量하여 敢히 筆을 들어 삼가 銘하노니 일개 豪族이었던 王建에게 湯武의 政을 勸하여 高麗 太祖가 되게 하였음은 能히 麗朝의 礎石이요 王을 代身하여 목숨을 버린 것은 저 魯의 汪(귀) 漢의 紀信에 다를바 있으리요! 兄을 따라 아우마져 殉節한 一門의 壯熱함이야 어찌 당의 顔氏家인들 이를 따를 것이며 閃光같은 智略과 三韓에 떨친 武勇은 어찌 諸葛武候를 부럽다 하겠는가? 麗太祖의 三韓 平定은 곧 韓民族의 再統一일진데 그 英主를 救한곳이 하필이면 公山이던가! 이곳 公山은 國泰民安을 祈願하던 新羅의 中岳인데 公이 스스로 이祭壇에 祭物로 獻身안 것은 民族統一의 念願이 아니고 그 무엇이리요! 그 한몸 던져 太平聖代의 武陵을 기다렸던가! 賜號는 어이하여 桃源이었 던고! 公은 비록 千歲前에 가셨어도 당신이 남기신 殺身(영)忠의 崇高한 얼은 이 땅 萬歲의 守護神이 될지어다.
西紀一九八九年 孟春
大韓民國 歷史編纂委員會 委員長 朴永錫 謹撰
[資料調査 : 昌山 全炳春]
화림제전공유적비
(花林齊全公遺蹟碑)
화림재전공유적비
(花林齋全公遺蹟碑)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0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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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해석(碑文解釋)
옛 안의현(安義縣) 서쪽 화림동(花林洞)에 새들(新坪)마을이 있으니 임천(林泉)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다운데 옛날 화림재 전공(花林齋 全公)의 은거하시던 곳이다. 인조병정(仁祖丙丁)후에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게한 변이 극도에 이러렀고 국가의 치욕이 큰지라 뜻있는 선비들이 많이 깊이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은 대개 진(秦)나라 높임을 부끄러워하는 고상한 뜻이니 공(公)도 이에 그 한분이시다. 공의 휘는 시서(時叙) 자는 경삼(景三)이니 정선전씨(旌善全氏)라 고려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 채미헌오륜(採微軒吳倫)께서 망복의(罔僕義)로서 들랐고 그의 아들 군수 맹겸(孟謙)이비로소 안의로 옮겨왔으며 부사직철(副司直轍)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물러와 숨었는데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이 정자 이름을 사락(四樂)이라고 시를 지어 찬양하셨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이시며 조부는 사웅(士雄)이니 계공랑(啓功郞)인데 증직(贈職)이 형조참의(刑曹參議)며 아버지는 거(琚)이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공이 선조신축년(宣祖辛丑年)에 나셨다. 젊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과 굳은 지조가 있었으며 효우의 독실함과 신의의 믿음이 여러 사람의 추중(推重)한바 되었다. 일찍 동계 정문간공(桐溪 鄭文簡公)에게 배웠는데 동계께서그 지기(志氣)의 굳셈을 극히 칭찬하셨다. 비록 초야에 은거하나 항상 세상을 근심하는 뜻이 있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가 이뤄짐에 동계가 자기 배를 찔렀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모리(某里)로 돌아와 은거함을 듣고 더욱 강개비분하여 깊이 숨을뜻이 있어 영승(迎勝)에서 새들로 옮겨 서재를 짓고 화림재(花林齋)라 이름하고 거문고와 글을 즐겨하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소요자적(消遙自適)하며 혹 때로는 슬프게 노래하며 천추에 다하지 못한 회포가 있으니 이것이 세상을 걱정하는 뜻인 것이다. 공은 숙종무오(肅宗戊午) 三月二十二日에 七十八世로 일생을 마치셨다. 공이 일찍 선음(先蔭)으로서 산계(散階)를 얻었고 만년에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벼슬에 올랐다. 그 후손들이 번성하고 문호도 창대하여 지금 십여대에 후손이 수천에 가까우니 공의 적덕여음(積德餘蔭)이라 하겠다. 공이 세상을 떠난 수십년에 옛 서재도 또한 허무러져서 여러 증손 현손들이 마을 동쪽에 다시세우고 옛 현판을 걸었으며 또 채미헌서산사(採微軒西山祠)를 그 곁에 지어 서재를 강당으로하였드니 사우가 훼절됨에 강당도 폐해졌다. 七세손 진사 재학(進士 在學)과 八세손 계진(啓鎭)이 또 옛터의 서쪽 수석의 아름다운 곳에 거연정(居然亭)을 지어 공의 뜻을 추성(追成)하여 추묘소(追墓所)로 하였는데 임전재(任全齋) 송연재(宋淵齋) 두 선생이 기문을 지었으니 공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이 길이 전함을 보겠도다.
오늘날 여러 후손들이 장차 공의 유적이 민몰(泯沒)할까 걱정하여 비를 세울세 병은(炳垠),병희(炳熙) 두 후손이 나에게 사실의 기록을 청하거늘 사양타 못하여 이 같이 기록하고 명하되 선비의 숭상한바여 오직 뜻에 있도다. 숨고 나타남이 각각 그 의로서 함이로다. 옛 노련(魯連)이 바다 밟고서 함이여 진나라 높임을 더럽게 여겼네 오랑캐 창궐함이여 나라 치욕 심했도다. 노련의 밟음이 어찌 뜻 없으랴 저 깊은 산이여 은거하기 마땅하도다. 나의 자취 숨김 길이 맹세했네 화림동이여 그윽하고 깊으며 천석(川石)의 깨끗함이여 풍속 더러움 멀어졌네 파사한 즐거움으로 내 일생 마쳤도다 무엇을 구하며 누구를 원망하리 채미는 할아버지라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동계는 스승이라 의리와 법이 같도다. 저 유풍 긴 산수속에 천년을 지나가도 우르러 공경하리.
군자정은 거연정에서 100m정도 아래 화림천 변에있다.
군자정(君子亭)
경남도문화재 자료 제380호(2005. 10. 13.지정)
동호정 [東湖亭]
경남문화재자료 제381호(2005. 10.13.지정)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842
농월정(弄月亭)~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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