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밭으로 가는 은빛 사다리
신 동 일
나는 진달래꽃나무입니다.
내가 이곳 나리네 집에 오게된 것은 고향 뒷산을 못 잊어 하던 나리 아빠 때문입니다. 서울 아파트촌에 살면서도 나리 아빠는 이른 봄이면 열병이 번져가듯 삽시간에 붉게 불타오르던 고향 뒷동산의 진달래꽃을 잊지 못했답니다.
그 나리 아빠가 이 년 전 고향 뒷산에 올랐다가 그 수많은 진달래 무리 중에 아주 조그맣던 나를 화분에 담아 서울로 가져 온 것입니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오고 밤마다 하얀 별가루들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내릴 듯 아름답던 고향 뒷동산. 그 고향 뒷동산에 많은 친구들을 남겨놓고 이 비좁고 답답한 나리네 집 거실로 이사왔을 때의 외로움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처음 며칠간은 정말 화가 나서 눈을 꼭 감고 꽃은 커녕 잎새 한 장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요. 그런 내 결심들을 봄눈 녹듯 사르르 녹게 한 아이가 그때 마악 유치원에 들어갔던 나리입니다. 나리는 아빠의 고향에서 왔다는 나를 동무처럼 반가워했습니다.
나리도 나랑 자기랑 동갑내기쯤 된다는 걸 알고 있었나보지요?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큰 동백나무나 벤자민은 쳐다보지도 않고 틈만 나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혼자서 종알종알 소꿉놀이를 하곤 했으니까요
밤이 되면 나는 또 다른 나리네 집의 모습을 보았답니다.
밤 10시 반쯤 되면 나리네 집은 제일 조그만 나리 방부터 거실까지 불들을 모두 끈답니다. 나리 아빠가 제일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기도 시간이기때문입니다.
나리 아버지는 거실에 걸려있는 예수님 사진 밑에서 기도하지요.
그리고 나리 엄마는 안방에서, 나리는 조그만 나리 방에서 기도하지요. 나는 가끔 고 조그만 손을 모으고 기도할 나리가 어떤 말들을 하는 지 궁금했지요. 그렇지만 조그만 자기 방에서 가만가만 기도하는 나리의 기도를 알아 들을 수가 없지요. 나와 같은 거실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에수님 사진 아래에서 기도하는 나리 아버지의 기도소리도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나는 나리네 기도 시간이면 음악소리처럼 나지막이 들려오는 나리 아빠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거실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지요.
그때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별! 별! 별!
음악소리처럼 귓가를 간질이는 나리 아빠의 기도 소리가 저 별나라까지 닿는걸까요?
이때의 별들은 더 크고 밝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리가 아빠의 기도소리를 똑똑히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작년 가을쯤 나리의 생일날 밤이었지요.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자른 후 밤 10시 반쯤 모두 불을 끄고 기도할 때였어요. 아빠가 천천히 나리의 방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았어요.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작고 예쁜 나리 손을 붙잡고 이렇게 기도했지요.
“착하고 예쁜 나리 마음에 좋은 꿈을 갖게 해 주세요. 나리의 이 작은 손이 크고 튼튼하게 자라나서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
나리 아버지가 얼마나 정성스레 기도하는지 나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나리 아빠가 바쁜 일이 생겼나 봅니다. 전에는 회사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몸을 씻고는 나리와 놀아도 주고 내게도 틈틈이 물을 주곤 했는데 지난가을에서부터인가는 그러시지를 못하십니다. 회사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이곳 저곳에 전화를 걸어 보시고는 부리나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야 나는 나리 아빠가 왜 그렇게 바빠졌는 지 알 수 있게 되었지요.
몇 달 전 비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밤 늦게 돌아온 나리아빠가 김치 냄새가 흠씬 밴 옷을 벗으며 말했습니다.
“오늘은 비가 와서인지 노숙자들이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이 왔었어요. 밥을 나눠주는 쪽은 그래도 괞찮은 것 같아 보였는데 내가 나눠 준 김치 쪽은 미리부터 김치가 동이 나서 부끄러워 혼이 났오. 한 달에 겨우 두어번 하는 봉사인데 치조차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다니…”.
그날 나는 날아갈 듯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나리 아빠가 왜 나리랑 나에게 마음 쓸 겨를이 없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가끔 엉뚱한 공상을 하곤 한답니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바람이 되어보고 싶지 뭐예요. 바람이 되면 가고싶은 곳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을 것 아니어요?. 얼마 전 크리스마스 전날 밤도 그랬어요.
그 날밤은 흰눈이 펑펑 내렸지요. 그런데 그날밤 나리 아버지가 몇몇 친구들과 마련한 겨울 내복을 노숙자들에게 나눠주러 떠난다는 거여요. 그 때 내가 만약 바람이었다면 나리 아버지를 따라가 자랑스럽게 내복을 나눠 주는 나리 아버지의 모습을 얼마던지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정말 뚱딴지같게도희 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바람으로 태어나지 못한걸 한스러워 할 때였어요
밤 12 시쯤 되었을까.
노숙자들에게 내복을 나누어주러 간 나리 아빠는 돌아오지 않고 갑자기 전화벨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 왔어요. 나리 엄마가 어른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예? 몸이 편치 않으신 노숙자 한 분을 지금 곧 모시고 온다구요?”
전화를 받는 나리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조금 당황한 목소리였어요.
그렇지만 잠시 후 나리 엄마의 목소리는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꼭 도움이 필요하다면 모시고 오셔야죠. 빈 방을 치워 놓을께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나리 엄마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세간살이나 들여놓던 작은 방의 물건들을 다른 방으로 옮겨놓고 말끔히 걸레질을 한 다음 깨끗한 이불 한 채를 들여다 놓았습니다.
잠시 후였습니다.
초인종소리가 나더니 나리 아버지가 꾀죄죄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나타났습니다.
“자, 이리로 올라오셔요.”
기다리고 있던 나리엄마가 웃는 얼굴로 할아버지를 맞았습니다.
“아이구, 내가 이렇게 염치 없는 짓을 하다니. 쿨럭쿨럭!”
할아버지는 너무 황송한 듯 허리를 굽힌채 거실로 들어서며 기침을 하였습니다.
“아까 전화로도 말했지만 종각 역 지하 보도에서 쿨럭쿨럭 기침 하시며 혼자 누워 계신 할아버지 모습을 보니 내복 한 벌만 덜렁 드리고 돌아설 수 없었소. 심한 감기나 나으실 동안만이라도 우리 집에서 쉬게 해드리려고….”
나리 아빠가 기회를 보아 나리 엄마에게 속삭였습니다.
“잘 하셨어요. 당신이 늘 어려운 사람에게 새 힘을 나눠주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는 거 나 알아요.”
“정말 고맙구려.”
나리 아빠는 욕조에서 할아버지를 깨끗이 씻겨 드린 다음 작은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잠이 깬 할아버지는 나리네 식구들에게 너무도 미안스러운 듯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콜록 콜록! 이렇게 주착없이 따라 오기는 했지만 콜록 ….”
할아버지 말에 나리 엄마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그저 남아있던 빈 방에 할아버님을 모셨고 식사 때라야 수저 한 개 더 놓는 정도이니 부담스러워 마셔요. 그리고 이거 감기약이어요. 어서 드시고 감기나 뚝 떼어버리셔요.”
할아버지가 감기약을 잡수신 후 방으로 들어가시자 나리 아빠와 엄마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렇게 품위 있고 선하게 생기신 할아버지께서 노숙자로 떠돌아 다니시다니 정말 모를 일이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나리 엄마와 아빠의 궁금증은 쉽게 풀렸답니다.
우연한 말 끝에 할아버지께서 마음속에 간직했던 비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게 된 건 다 그 아이엠에푸인가 하는 괴물 탓이지요. 회사를 부도 낸 애비가 몸을 피하자 집은 순식간에 빛쟁이들에게 넘어갔지요. 그러다 며늘 아기까지 집을 나가자 단 하나뿐인 손녀는 고아원으로 떠나고 나는 노숙자로 떠돌고 쿨럭쿨럭….모래알 처럼 흩어진거지요.”
한 차례 기침을 한 할아버지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나리 방 쪽을 가리켰습니다. “ ” 선이라구. 우리 손녀도 꼭 저 나리라는 애 만 했지요. 외동딸이라 그런지 무던히도 귀염을 받았었는데 졸지에 보모와 생이별을 하고 고아원으로 들어간 거지요. 그런데 정작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그 보름 후 쯤 일어났다오. 선이가 그 고아원에서 이 세상을 떠난거여요. 어휴 내참 지금도 믿어지지안으니 원.”
잠시 말을 끊는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놓았습니다.
“ 그 애는 유난히도 별을 좋아했지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내가 찾아 갔을 때 그 애를 맡고 있었 고아원 원장님이 이 가족사진을 건네주며 말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선이가 하늘 나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이 사진을 가슴에 꼭 안고 잠들곤 했었다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 사진 뒤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더라면서 ….”
나리 엄마가 선이가 사진 뒤쪽에 썼다는 글을 조그맣게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아빠. 나 아무래도 먼저 별나라로 갈 것 같아요. 할아버지랑 엄마 아빤 이 세상에서 아주 오래 오래 사시다가 언젠가 내가 간 별나라로 꼭 찾아오세요. 외롭고 심심해도 이 선이는 그때까지 꼭 참고 기다릴 거여요. 선이 -.
서투르지만 꼭꼭 눌러 쓴 선이의 글을 읽던 엄마가 부리나케 나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잠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나리가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응 , 너도 안 자고 있었구나?”
“엄마는, 내가 잠 든 줄 알고 마음 놓고 울려고 내방으로 들어 온 거지? 나도 혼자 울고 싶던 참인데”
나리 말에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선 마음씨 착한 사람에게만 이웃을 향해 울 수 있는 눈물을 주셨단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모두 잠든 밤. 나리는 조그만 촛불을 켜놓고 아주아주 정성스럽게 그림 한 장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는 하늘나라 하얀 별밭에서 땅에까지 길게 이어진 은빛 사다리 한 개가 길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사다리 하나만 있으면 할아버지네 가족 모두 저 아름다운 별나라에 가서 외로운 선이를 만날 수 있을 텐데. 밤마다 선이가 기다릴 저 아름다운 별밭 마을에서….’
나리는 촛불을 끈 다음 별이 보이는 창가로 걸어가서 두 손을 모았습니다.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라도 할아버지가 별나라에 가서 선이를 만날 수 있는 은빛 사다리 한 개를 내려 달라고 기도 할 참입니다. 나무 사다리는 정말 안됩니다. 캄캄한 밤이라서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가 발을 잘못 디딜 수도 있으니까요.
나리가 가만가만 기도하는 창너머에서는 벌써 성탄절 아침을 밝힐 아침해가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