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권태응/창작과 비평
권태응 시인은 나의 외육촌(外六寸) 형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외가에서 다녔으므로, 우리는 어린이 시절을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푸른 하늘 은하수>와 <학도야 학도야> 등 창가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고, 나는 "형, 형"하면서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권태응 어린이는 충주보통학교에서 알아주는 수재였고, 그의 가정은 기와집에 부자였다. 그는 서울에서도 제일가는 제일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고, 이 '높은 학교'에서도 처음에는 우등생으로서 두각을 나타냤다. 그러나 상급반으로 올라가면서 그의 성적은 뚝 떨어졌고, 가끔 주먹을 휘두르는 문제학생이 되었다. 동급생 가운데 10만석꾼 갑부의 아들들이 있었고, 그들이 돈을 물 쓰듯 하며 노는 꼴이 보기 싫어서 두들겨 주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모범생'의 길을 하직하고 '사상가'의 길로 들어섰던 것으로 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상가'들이 고민한 문제는 주로 민족과 빈부(貧富)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관헌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문제로 조선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권태응 학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의 경제학 전문부로 진학하였고, 그곳에서 경제학도로서의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전에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내 기억으로는 도쿄 스가모 형무소애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무서운 폐결핵에 감염되었다. 형무소를 나온 뒤에 고향인 충주로 돌아와 요향 생활로 들어간 권태응 형은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본래 쓰고 싶었던 것은 성인(成人)을 위한 시(詩)라고 하였다. 비교적 가볍게 쓸 수 있는 동시의 길을 택했다. 그 당시 나도 일본의 제3고등학교로 진학한 터라, 권태응 형과 자주 만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끔 편지 왕래가 있었고, 내가 방학 때 귀가하면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내가 동경대학에 들어간 뒤에 학병을 피하여 충주 교외에서 구장(區長) 일을 보고 있을 무렵에는 그의 동시가 꽤 여러 편 모였다. 권태응 시인은 그 원고를 나에게 보여 주었고, 새 원고가 되면 그때마다 인편으로 보내왔다. 원고를 읽은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고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감자꽃>, <오리>였다. 나는 <오리>를 더 좋아했다.
둥둥 엄마 오리
못 물 위에 둥둥
동동 아기 오리
엄마 따라 동동
풍덩 엄마 오리
못 물 속에 풍덩
퐁당 아기 오리
엄마 따라 퐁당
권태응 시인은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노래를 즐겨 불렀고 하모니카도 잘 불었다. 그러나 결핵이 심해진 뒤에는 그것이 어려워져서 주로 축음기로 클래식을 들었다. <오리>는 그의 음악적 감각이 가장 살아 있는 작품이다.
권태응 시인은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우리 농촌을 사랑했고, 농촌의 자연과 인간,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죄책감 섞인 사랑을 느꼈다. 권태응 시인의 집은 그의 마을에서 둘째가는 지주였고, 그는 항상 소작농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권태응 시인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토리, 감자, 민들레, 까치, 송아지 등을 소재로 삼고, 사랑이 가득한 동시를 지었다. 특히 우리는 그의 <어린 고기들>과 <고추잠자리> 등을 통하여 미물들에 대한 권태응 시인의 사랑을 읽고 사랑을 배운다.
꽁꽁 얼음 밑 어린 고기들
해님도 달님도 한 번 못 보고
겨울 동안 얼마나 가깝스럴까?
(2절 생략)
-<어린 고기들>
혼자서 떠 헤매는 고추잠자리, 어디서 서리 찬 밤잠을 잤느냐?
빨갛게 익어버린 구기자 열매, 한 개만 따머고서 동무 찾아라
-<고추잠자리>
여름에는 양말도 신도 없이 모든 어린이들이 맨발로 살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강아지와 송아지가 맨발로 살듯이, 사람의 어린이들도 맨발로 살았다. 권태응 시인은 이 가나한 어린이들과 강아지랑 송아지를 '사랑'이라는 유대로 한데 묶었다.
우리 동무 모두 모두 맨발 동무
풀밭에 모래밭에 맨발 동무
손잡고 나란히 맨발 동무
우리 동무 모두 모두 맨발 동무
강아지도 송아지도 맨발 동무
섣고 뛰고 노래하고 맨발 동무
-<맨발 동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지주의 손자였던 권태응 시인이 느꼈던 미안한 생각을 노래한 것으로서는, <밥 얻으러 온 사람>과 <틀리는 걱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밥 얻으러 온 사람
가엾은 사람
다 같이 우리 동포
조선 사람
등에 업힌 그 아기
몹시 춥겠네
뜨순 국에 방 한술
먹고 가시오
-<밥 얻으러 온 사람>
우리 집 할아버진 병환으로, 만난 음식 보시고도 못 잡수시니 걱정
이웃집 할아버진 가난해서, 세끼 음식 제대로 못 잡수시니 걱정
-<틀리는 걱정>
그밖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괴로움을 노래한 작품으로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더위 먹겠네> 등이 있다. '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했던 권태응 시인의 동시 가운데 남존여비를 꼬집은 것도 있다.
(중략)
언제든지 서내 아긴 모두 위하고
언제든지 나는 머 찌어린 걸
그런 거 그런 거 난 싫어
-<난 싫어>
물길어서 밥을 짓고 길쌈이란 빨래랑 모든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엄마를 동정한 <바쁜 엄마>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태응 시인은 민족의식이 강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의 <북쪽 동무들>, <우리가 어른 되면>, <언제나 살 수 있나> 등은 모두 그의 민족주의 색채를 드러낸 작품이다. 그 가운데서 내 인상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책 자랑>이다.
할아버지 책 자랑은 어려운 한문책, 그렇지만 그것은 중국의 글이고
아버지 책 자랑은 두꺼운 일본책, 그렇지만 그것은 일본의 글이고
언니의 책 자랑은 꼬부랑 영어책, 그렇지만 그것은 사양의 글이고
우리 우리 책 자랑은 우리나라 한글책, 온 세계에 빛내일 조선의 글이고
-<책 자랑>
권태응 시인은 1951년에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타계하였다. 전쟁의 와중에서 약을 제대로 못 쓴 것이 애석하다. 다만 그의 시비(시비)가 고향인 탄금대(탄금대)에 서서 그의 문학을 증언하고 있으니, 적지 않은 위안이다.
『감자꽃』은 윤석중 선생의 주선으로 1948년에 출판된 적이 잇었다. 그러나 그것은 권태응 시인의 초기 작품 30편만을 실은 작은 책자에 불과했다. 이제 유고로 남았던 64편을 더 보태어 제대로 모양을 갖춘 동시집 『감자꽃』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으니, 이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다.
김태길/서울대 명예교수ㆍ철학
『열린 생각 열린 책읽기』, 인디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