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몽골의 푸른늑대다.
너희는 신의 군대다.
우리의 신인 쾌쾌 탱그리와 시조
불테치노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너희에겐 패배란 없다.
나를 따르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복합할, 합성궁)(만구다이)
이운재 아버지(이동춘-_-;;)
다각,다각,다각......
간간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헤치고, 붉은 기마는 폐허가 된 마을을
가로질렀다. 기름타는 냄새...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체타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각......
제법 지위가 높아보이는 지휘관을 둘러싼 십여기의 기마가 마을 중앙에
만들어진, 백골탑 앞에 멈춰섰다. 높이 쌓여진 죽은 머리들......
여자와 아이도 끼어 있는 그것은 한 마을의 전부였다.
가죽모자 대신, 색실을 넣어 멋을 부린 띠를 하고 머리를 짧게 자른
몽골군 별동대의 부장급 지휘관은 무심한 눈으로 역겨운 살육극을
찬찬히 감상하듯 둘러보았다. 그에게 한 마을의 몰살은 어제도,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있을 일상에 불과했다.
"바이다르님은?"
"마을외각 임시진지에 계십니다."
기다렸다는듯 터져나온 즉각적인 대답에 흙탕물같이 흐린 눈을 가진
지휘관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제왕 칭기즈칸의 둘째아들 차가타이의 손자 바이다르는 강한 포옹으로
부하장수를 반갑게 맞았다. 차가타이의 또 다른 손자이자 나머지 별동대를
이끌고 있는 뱀같이 냉정한 카이두와는 달리 그는 호방하고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적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바이다르는 인근에 산개해 있는 마을을 깨끗하게 소탕하고 뒤늦게
돌아온 자신의 부관에게 시금털털한 마유주를 권했다. 태생은 몽골이
아니지만, 지금은 몽골인보다 더 몽골인같은 부관은 지독한 맛이 나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들이켰다. 바이다르가 즐거워 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이다르는 이 고려인 장수를 칭기즈칸시절 총사령관이었던 전설적인
제베의(신궁으로 불리며 젊은 나이에 만호장이 된 천재적인 전략가)
현신이라고까지 부르며 아꼈다. 농부든 백정이든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몽골군의 특성상 충성을 맹세하기만 한다면 그가
고려인이라는 것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자세에서도 활을 쏠 수 있고, 지략이 뛰어난 이 젊은 장수가
바이다르의 사마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이방인이 크게 출세하는 것을 시기하는 무리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이운재라는 이름의 고려인 장수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
만큼은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다.
바이다르는 부하장수들을 모으기 전, 자신의 사마(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은
총애하는 신하들을 흔히 사마,사구...즉, 개또는 말에 비유했다.)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진격한 바투의 본대가 가져온 연이은
승전보는 별동대의 확실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이다르와 카이두 형제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차남인 바투의
우월적인 지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바이다르는 바투의
그것보다 훨씬 더 눈부신 전공을 쌓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의 기준으로 지금까지의 적들은 바투의 적들보다 상대적으로 변변치
않아 보였다.
얼어 붙은 비스툴라를 건너 산도미에르를 점령하는 동안 그 지역에서
흡수한 군세외의 진짜 정예들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다르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유능한 부관인 이운재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마음이 편할 수 있었다.
그는 약탈과 발빠른 선발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지도를 바이다르앞에
펼쳐 놓았다. 그들이 앞으로 진격해야할 크라코우를 넘어 신성로마제국의
동쪽국경, 리그니츠에 표시가 돼 있었다.
"리그니츠 옆 평원에 폴란드와 독일기사단의 연합군이 모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했습니다. 이들은 보란듯이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 군세를
늘어 놓고 있다고 합니다. 수는 대략 3만. 원정이후 최대 군사입니다."
바이다르의 입이 귀에 걸릴듯 찢어졌다.
자신들의 별동대는 5천가량. 그것도 정복한 땅에서 강제징병한 인원을
제외하면 3천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10배의 적을 격퇴하는 것은
그의 구미에 딱 맞는 영웅적인 행위였다.
그는 침이 떨어질것 같은 얼굴을 간신히 추스리며 떠보듯 부관에게 물었다.
"3만이라...짧은 시간에 모은 군사치고는 대단하지 않나?"
바이다르의 농담같은 말에 그의 부관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발악입니다."
실레지아공 헨리2세는 사기는 커녕, 기본적인 군기조차 잡히지 않은
대부분의 연합군에 시작부터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믿을 것은 폴란드 정예와 독일기사단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다원화된 지휘체계로 벌써부터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적들의 숫자도 그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평원에서의 기마 한 기는 보병 30을 상대하고도 남는다. 몽골군은
전 병사가 기마군이었다. 열배의 숫적우위는 말그대로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믿어본적 없는 신을 향해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절망을 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소식은 급하게 징병된 보병뿐 아니라 숙련된
기사들까지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동쪽에서 온 악마들은 그들이
지나는 땅의 어떤 것도 원래 모습 그대로 남겨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이 스쳐간 자리에는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리그니츠. 후에 사체의 마을이라는 뜻의 독어 '왈슈타드'로 더 잘 알려지게 된
평원에 몽골군대가 나타난 것은 점심식사전, 정오가 되기 직전이었다.
연합군은 그들의 표현대로 깽깽거리는 개짓는 소리의 몽골어가 아닌,
유려한 독어로 된 항복권유문을 들을 수 있었다.
흰색옷을 입고 백기를 든 색목인은 몽골군에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는
캐러반중 한 사람으로 다양한 국가의 말에 능통했다.
꽤나 다양한 미사여구를 섞고 있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쾌할 정도로 간단했다.
'항복하는 자는 살것이요, 싸우는 자는 죽으리라!'
연합군 진영이 크게 술렁였다.
상인들을 이용한 교묘한 첩보전의 성과였다. 그들은 항복한 자들에
베푼 몽골군의 관대함과 끝까지 저항한 자들에게 행한 피의 응징의
이중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태에 당황한 것은 수뇌부였다. 몽골군이 전투전 항복을 권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그 효과가 이렇게까지 클지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싸움은 시작부터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살받이로 전면에 배치돼 있던 농도들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남다른 체구의 험상궂은 거한 하나가 창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것들! 지금부터 항복에 항자라도 꺼내는 놈들은 몽골군
보다 내가 먼저 죽여 버리겠다!
지금 항복해 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고나 지껄이는 거냐?
우리는 악마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단 말이다!
알겠냐? 이 썩어빠질 것들아!
물론...물론 나는 지금도 비천한 농도다. 하지만, 악마의 노예는
아니란 말이다! 네놈의 아내와 딸들이 화냥년이 되고, 네 놈 이마에
소처럼 낙인이 찍히고 싶다면 지금 당장 항복해라!
단!...지금 우리의 목숨에 우리의 아들에 손자, 또 그 손자에 손자의
목숨까지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헨리2세는 이 이름모를 농도의 피맺힌 연설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일회성 소모품 정도로 여기던 자의 진심어린 절규가 그에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장막으로 감춰져 있던 어떤 것을 일깨웠다.
그는 여러 사람을 시켜 농도의 말을 똑같이 외치도록 지시했다.
수십리 밖의 쥐의 눈알을 본다는 뛰어난 시력을 가진 몽골인의 눈에
연합군의 변화가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바이다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들이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군. 그렇지 않은가, 사마?"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운재가 딱 잘라 말하자, 바이다르는 푸핫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이 제베라고 부르길 망설이지 않는 고려인 무사가 몽골군
최고의 무기인 강력한 합성궁을 치켜드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어림잡아도 4,500걸음이 넘는 거리. 화살로 맞출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운재가 가지고 있던 활은 보통 몽골병사의 활보다 몇배나 더
강력한 것이었다. 몽골과 고려 기술의 정수가 집약된 활에서 화살이
떠나는 순간, 이미 하나 이상의 목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고없이 화살을 날린 운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가?"
"방패에 맞았습니다. 뚫기는 했지만, 죽일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저렇게 나 죽여 달라는듯 눈에 띄는 갑옷을 입은 자를 쓰러뜨리지
못하다니......제 불찰입니다, 처벌해 주십시오."
바이다르는 말등에 고개를 묻고 키득거렸다.
"아직 전투는 시작하지도 않았네. 나의 제베.
좋아, 그럼 이렇게 하는건 어떤가? 나중에 자네의 화살이 꽂힌 시체를
세보는 거야. 그렇게 해서 그 수가 누구보다 많으면......
하핫, 이제야 웃는군. 처벌이라니, 바보같은 소리는 치워 버려.
내 아래 뛰어난 자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저 거리까지 방패를 뚫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뿐이야.
그리고 자네는 내 말일세. 훌륭한 장수는 사소한 이유로 말의 목을
치지 않지. 자네의 주인은 얼마만큼 훌륭한가?"
운재는 씨익 시원스럽게 웃었다.
"물론 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칠 수 있을만큼 훌륭하십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온 화살이 방패를 뚫자 헨리2세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따가운 햇빛을 가리려고 때마침 방패를 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끔찍한 상상에 그의 심장이 오그라
붙었다. 그는 황급히 화살이 박힌 방패를 바꾸었다.
이미 운명은 그의 손을 떠나 있었다.
"달려오는데요."
"달려오는군"
마상용 장창을 휘두르며 용맹하게 달려오는 중무장한 기사단을 보며
두 명의 주인과 신하는 한가롭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선 순간, 수천의 화살이 까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본래 유럽에서 기사가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것은 높은 방어력 때문이었다.
철갑으로 둘러싼 기사와 말은 화살을 튕겨내며 적진까지 돌파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무기는 하나같이 크고 무겁도 둔하기 짝이 없었다.
철갑을 베는 것이 아니라, 때리는 용도로 사용된 탓이다. 그들의 검은
칼이라기 보다는 둔기에 가까웠다. 기사들은 갑옷과 무기의 무게를
고스란히 실어 일격에 적을 때려눕혔다.
그러나 그것도......적에게 닿았을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유럽의 길기만한 어설픈 활대신 짧고 강력한 합성궁을 든 만구다이
(안장에 앉아 활을 쏠 수 있는 뛰어난 궁사)들은 기사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의 갑옷을 꽤뚫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기사들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전투력을 상실했다. 무거운 갑옷 덕분에
그들은 남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말에 다시 올라탈 수도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끝에 연합군이 겨우겨우 몽골군에 다다른 순간
그들은 믿기 싫은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미친듯이 화살을 쏘아대던
몽골군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뺑소니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연합군은 울면서 그들을 추격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몽골군의
병사들이 말잔등위에 거꾸로 누워 활을 쏘는 신기를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서 허기가 병사들을 덮쳤다. 애초부터
밥먹는 시간을 노린 치사한 공격이었다. 몽골군은 말을 달리면서
먹을 수 있었지만, 기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삼만대 오천.
그러나 전술과 무기에서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던 싸움이었다.
리그니츠 평원은 왈슈타드가 되었다.
몽골군은 피로 물든 평원에 불을 놓았다. 건조한 4월의 바람을 타고
불은 모든 것을 삼켰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들까지 전부.
바이다르는 석양보다 붉게 타오르는 불을 보며, 바투에게 보낼 서신을
생각하고 크게 웃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한껏 승리감에 취해 있을 동안 운재는 몇명 되지 않는 포로를
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그가 처음에 노렸던 화려한 갑옷을 입은
적장도 포함되 있었다. 번쩍이던 놈의 갑옷은 피와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투구를 벗기고, 통역할 상인을 데려오라."
옆에서 한가하게 마른고기나 우물거리며 늘어져 있던 몽골병사가
언제 그랬냐는듯 놀랍도록 빠르게 그의 명령을 시행했다.
그러나 운재는 언제나 뽐내던 멋진 수염을 가진 상인이 도착하기도
전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구속에서 나온 태양같이 빛나는 머리를 가진 남자는 헨리2세가 아니었다.
"......?"
운재는 무릎을 꿇려서도 반항적인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는 들개같은
남자를 언젠가 한 번 본적이 있는지 잠깐 고민했다.
과거에 그와 만난적이 없다면 설명이 되질 않았다.
이 익숙함이, 이 그리움이......지끈.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천지가 지금 그들이 만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한 점속으로 빨려들어가는듯 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 우주가 들어 있었다.
처음엔 땅이, 그 다음엔 하늘이 사라졌다. 위도 아래도 분간할 수 없는
공간에서 자신과 색목인사이에 가로놓인 선만이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모든 것을 꽤뚫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나의 사마......"
익숙한 목소리에 우주가 사라졌다.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불타는 초원과 병사,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바이다르 뿐이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공허함 한가운데 놓여진 무언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꿈? 아니면 주술적인 환상?
바이다르가 가볍게 손을 잡아주자, 그제서야 운재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전율이었다.
수십만의 대군, 거대한 성벽, 황야의 늑대들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한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감동!
단지...단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몸이 떨리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바이다르는 짐승의 뼈와 가죽으로 만든 천막안에 들어앉아 마유주가
아닌 과실로 만든 서방인들의 술을 들이켰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불을 부추기는듯 했다.
심문에 의해서 적장의 갑옷을 입고 있던 사내는 죽음을 두려워한 적장이
자신 대신 세운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그런 수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헨리2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남자는 올리버라는 이름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빌어먹을
농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머지 포로들이 전부 죽임을 당한 후에도
놈은 살아 있었다.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는 운재의 노예가 되어
후방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바이다르는 모든 전공을 포기하면서까지
놈을 갖고싶어한 운재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와장창! 술을 담은 질그릇이 산산조각 났다.
바이다르는 높이 튄 날카로운 조각이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도 모른채 씩씩거렸다.
"모르겠다고? 모른다고 했느냐? 왜 놈을 살려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했느냐!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다.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 너 외에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을...
내게...내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게!"
빠르게 마른 바닥으로 스며드는 붉은 술이 마치 체액을 연상시켰다.
후두둑!
시뻘건 피가 눈밭에 뿌려지자 늑대들도 덩달아 흥분해 사납게 짖어댔다.
입김을 불면 공기중에 그대로 얼어붙어 떨어질 정도로 추운 겨울, 굶주린
십여마리의 늑대들이 상처입은 인간 하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겨우내 제대로된 사냥감을 구하지 못했던 늑대들의 눈에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길게 내민 혓바닥에서 떨어지는 침이 놈들의 욕망을 지나칠
정도로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신중한 태도로
남자의 주변을 빙빙 돌며 그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들고 있는 긴 칼. 푸른 광채가 도는 그 칼에 벌써 몇이나 되는
동료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은 늑대보다 쉽게 지치기 마련이었다.
결국 뱃속에 들어가는 쪽은 상대방이라고 늑대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남자는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늑대들의 우두머리가 배를 갈리면서까지 낸 상처였다.
"후욱......후욱......"
뜨거운 숨결을 토해낼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얼렸다.
길게 찢긴 어깨는 이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피하려고
피하려고 몸부림치던 죽음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는듯 했다.
고려의 이름난 무장이었던 자신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천지신명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한 때 정4품 중랑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고려무신 이동춘은 허망하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의 잘못이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잘못된 길로 가는 친구를 차마 배신할 수 없어 고발하지 못하고 신의를
지킨 것이 구족을 멸할 정도의 대역죄였단 말인가? 아버지의 부음으로
고향에 내려갔다 오는 사이 무장반란이 일어났다 제압당한 사건이 자신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 이 어리석음이 결국 화를 자초하였구나......"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 천천히 이동춘의 무릎이 꿇려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늑대들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벌어진 커다란 입에서 악취와 침이 튀었다. 이동춘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깨갱!"
"?!"
단말마의 비명에 이동춘은 눈을 떴다.
가장 가까이 있던 늑대가 화살에 머리를 꽤뚫린채 쓰러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동춘은 주위를 살폈지만 보이는 거라곤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눈밭뿐이었다.
그가 의아해 할 새도 없이 연달아 날아온 화살이 정확하게 또 다른 늑대를
명중시켰다. 난데없는 도깨비 놀음에 혼비백산한 늑대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이동춘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후, 지평선위로 작은 점들이 나타났다.
점들은 앗 하는 사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그에게 다가왔다.
붉은색 털의 명마와 더러운 가죽옷을 입은 무리들. 이동춘은 무리중에
아주 작은 아이도 자신의 말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리는 죽은 늑대와 이동춘을 번갈아 가리키며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 말투는 거칠고 상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동춘은 이들이야 말로 자신이 찾아 헤매던 몽골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이기 이전에 왕가의 장로인 차가타이 칸의 수행원으로 뽑혀
쿠릴타이(Khuriltai 일종의 장로회의로 몽골최고의 권력기구였으나
원 왕조이후에는 사라졌다. 킵차크 한국, 일 한국 등에서도 시행되었다.)
에 참석하게 된 바이다르는 무료하기 짝이 없던 여정에 일어난 이례적인
사건을 매우 흥미롭게 관찰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덮인 평원 한가운데 맨 몸으로 늑대들과 대적하던
남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같은 어른들에게 뭔가 사정하고 있었다.
복장이나 말이 한족같아 보이진 않았다. 바이다르는 그가 말로만 듣던
솔렁거스(무지개가 뜬 아름다운 나라라는 의미로 고려를 지칭하는 말)인은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는 서툴기 짝이 없는 몽골어 몇 마디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드(눈)...누드...하라,하라 사잉 바인!(시력이 좋다)"
"?"
바이다르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카이두가 슬쩍 그의 옆구리를 건들였다.
"봐, 아이가 있어."
그 말에 남자를 자세히 살피자, 과연 자신보다 작은 아이가 그의 갑옷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아이가 훌륭한 병사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몽골어지 싶었다.
어른들은 이 남자를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난색을 표했다. 사실은 귀찮아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바이다르는 어떤 결정이 내려질까 기다리다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솔렁거스인에게 다가갔다. 카이두도 혈혈단신으로
가혹한 평원을 건너려한 남자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말머리를 움직였다.
피곤과 상처로 찌들어 얼굴이 새카맣게 변해버린 남자의 품속에 작은
생명이 깃들어 있었다.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나이일까?
까만 눈동자가 큼직한 눈자위 가득 들어차 있는 꼬마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터뜨리지도, 칭얼대지도 않고 조용한 얼굴로 사방을 보고 있었다.
절망적인 얼굴을 한 그의 아비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심지어 꼬마는 바이다르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천진하게 웃기까지 했다.
바이다르와 카이두는 그 모습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수베타이님과 바투님의 군은 사요와 티사의 합류점에 진을 치셨다고 합니다.
현재 사요강을 경계로 대적하고 있는 헝가리군은 서방최강의 군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베타이님은 군을 셋으로 나눠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적을
유인한 다음 섬멸하실 겁니다. 한 달, 혹은 두 달까지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리한 작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적의 수나 세력을 생각할때 더 나은
작전은 생각하기 힘듭니다. 물론 우리 군이 그들보다 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만...우리라고 화살을 무한정 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헝가리군이 바투님의 군대를 쫓을동안 여기와 여기. 바로 이곳으로
돌아 카이두님의 군과 합류한 다음......바이다르님? 듣고 계십니까?"
대전투가 끝난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다음 전투계획을 세우던
운재는 평소와 달리 멍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바이다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술냄새를 풍기는 바이다르의 뺨에 새롭게 난
상처도 걱정스러웠다.
"바이다르님......?"
운재가 가까이 다가가 바이다르의 상처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바이다르가
번개같은 몸놀림으로 그의 소매를 잡고 비틀어 쓰러뜨렸다.
부흐(몽골 씨름) 챔피언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운재는 등과 머리로
중력이 가하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말았다.
"으으으..."
운재는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구부려 신음했다.
바이다르가 왜 자신에게 손을 댔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을 만큼 큰 고통이었다.
바이다르는 마치 자신이 당한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쓰러져 있는
운재를 덮쳤다. 그는 운재의 배 위에 걸터 앉아 양손으로 운재의
손목을 찍어 눌렀다.
"?"
머리에 입은 타격에 따른 당연한 반응으로 망막이 뿌옇게 흐려져 있던
운재는 코앞에 다가온 바이다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바이다르는 자신의 이마를 그의 머리위에 얹고 목에서 피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어째서 내가 아니냐? 왜 내가 아니더냔 말이다!!!"
깜박. 운재는 눈에 고여 있던 짠물을 흐르게 하고서야 고통으로 일그러진
바이다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서로의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눈은 마치 광인의 그것과도 같았다.
"내가 널 살려주지 않았느냐......내가...바로 내가 네 아비와 너의
목숨을 구제해 주지 않았더냐? 네 주인은 나여야만 하지 않느냐!!!"
바이다르의 흐느낌에 가까운 속삭임이 마치 입을 맞추듯 아래에 있던
운재의 입속으로 직접 흘러들었다. 바이다르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운재로서는 그 상황이 좋을리 없었다.
"바이다르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약간의 휴식만 취한 다음
바로 행군해야 하......!!"
운재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말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바이다르의 강한 입술이 그의 입전체를 덮었 버렸던 것이다. 질풍처럼
움직이는 그의 혀가 목구멍을 덮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이다르의 열손가락이 운재의 짧은 머리칼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머리를 으스러뜨릴듯한 강한 손길에 운재는 자유로와진 두 팔로 바이다르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는 바위같이 굳건했다.
바이다르의 혓바닥이 운재의 입속 아래쪽 혀뿌리를 핥고 크게 휘어지는
순간, 운재의 단단한 치아가 조개처럼 꽉 다물렸다.
"크아악!"
바이다르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의 타액과 섞인 피가 운재의
얼굴위로 흩뿌려졌다고 느낀 순간,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흐억!"
짝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헛바람을 들이키는 듯한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나왔다.
운재의 뺨이 금방 시퍼렇게 부어 올랐다. 입속까지 터져 버렸는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얼굴 아래쪽에 피가 고인다.
씩씩대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던 바이다르가 그의 무자비한 손길에
반 쯤 기절한 상태인 운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운재의 목이 바이다르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덜렁거렸다.
"왜냐! 왜냔 말이다!
나는 왜 안된단 말이냐? 나는...나는 왜......"
바이다르가 흐느끼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죄없는 생명을 눈 하나 까닥 하지 않고 죽여 없애던 정복자가
비루하게 울며 매달리고 있었다. 바이다르는 끊임 없이 왜냐고 물으며,
운재의 가슴에 매달렸다.
바이다르님이 지금 하고 계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면......뭔가 달라질까?
운재는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입속에 고여있던 피거품이 끄륵소리를 내며 목으로 넘어갔다.
턱!...바이다르는 운재의 고개가 완전히 뒤로 넘어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울었다. 끝없이 소리지르며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