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호교수님의 "서울산수"에서 원형의 무덤 4기가 정선 집안의 묘이고 광주정씨 족보를 찾아보셨다는 글이 있었슴을 뒤늦게 확인하였습니다.(네 개의 동그라미가 누구 묘인지 확인된 것은 아니구여) 참조바랍니다. 2017.07.12.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의 정선 묘소를 찾아서
조장빈(한국산서회)
양주송추도楊洲 松楸圖(정선기념관 소장)
정황鄭榥(1735~?), 조선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絹本淡彩 23.6×36.1cm
“정선의 손자인 손암巽庵 정황이 그린 것으로, 양주에 있던 정선의 묘소 부근의 전경을 그린 것이다. 양주송추는
서울의 북교北郊인 도봉산과 인수봉의 일부를 사경한 것으로, 산등성이에는 많은 비석이 그려져 있고, 성묘를 마
치고 돌아가는 일행의 모습도 보인다. 좌측 상단에는 화제와 함께 ‘榥敬寫(황경사)’라고 써서 선조의 묘역을 담기
위해 그렸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겸재 정선(謙齋 鄭歚,1676~1759)은 진경산수화로 우리 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림 외에는 거의 흔적이 없고 필적를 볼 수 있는 간찰簡札과 내연산 연산폭포에 '鄭善 甲寅 秋‘라고 쓴 바위글씨가 있는 정도이다. 그가 말년에 거처했던 장동壯洞의인곡정사지仁谷精舍址는 서울 옥인동으로 군인아파트가 들어 섯고 그의 묘소는 흔적도 없어 서울 쌍문동의 도봉산 자락으로 추정될 뿐이다.
정선을 기억할만한 장소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 서울 경복고등학교 교정(유란동, 幽蘭洞)에 기념비가 1)설치되어 있어 장동팔경 그림의 현장을 살펴보며 그를 추모할 만하며 양천구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도, 그가 양천현감으로 재직했던 궁산 아랫녘에 자리해 그의 원본 그림의 감상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겸재의 간찰(簡札, 개인 소장), 내연산 정선 바위글씨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敾’2)
이 글에서는, 정선이 묻힌 도봉산 자락의 묘를 찾아 그를 기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손자인 정황(鄭榥,1735~미상)의 <양주송추도楊洲 松楸圖>와 광주정씨 세보를 통하여 그의 묘소를 짐작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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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밖에 정독도서관 마당에 기념비가 설치되었고 광주光州 정씨鄭氏 용인 선산에 그의 묘단墓壇이 세워졌다.
2)서찰의 내용은 “보내준 양초는 밤이 긴 겨울날 쓰고 싶다는 사연이 들어 있다. 편지지 또한 화인답게 꽃편지지를 사용했다.” 이고 사진 및 국역은유흥준의 화인열전Ⅰ(2001) ‘겸재정선’의 내용이다. 바위글씨는 겸재 정선이1734년(59세)에 경상도 청하 현감을 지낼 때, 포항내연산을 방문하여 연산폭포 바위에 ‘갑인년(1734) 가을에 정선이 다녀 갔다(甲寅秋 鄭敾)’라는 바위글씨를 새겼다. 치악고미술동우회(http://cafe.daum.net/wjart2011/MjR)의 사진이다.
1. 양주송추도楊洲 松楸圖
양주송추도는 우이동에서 북한산과 도봉산을 배경으로 한 선영을 그린 산수화로 좌측 상단에 화제인 ‘楊洲 松楸(양주 송추)’와 함께 ‘榥敬寫(황경사)’라고 써져 있다.
양주 송추도는 진경을 그렸다는 점에서 정선을 계승한 면모가 보이지만, 탁 트인 시야, 우측 하단에서부터 대각선 구도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능선의 표현, 원산의 과장된 암봉, 여유로운 공간 구성, 담담한 필치와 부드러운 색채, 일정한 시점의 구사 등에서 정황이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 주는 동시에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경 진경 산수화의 면모를 전해 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화가인 정황이 조선의 진경 산수화풍을 성립시켰던 겸재 정선의 손자로서 가업을 계승하였음을 보여 주며, 한편으로는 정선 이후에 변화된 진경 산수화풍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
1)양주송추도의 화제와 제발
그림의 좌측 상단에는 화제인 ‘楊洲 松楸(양주 송추)’와 함께 ‘榥敬寫(황경사)’라고 써져 있는데, 이는 ‘양주 선산을 정황이 공경히 그리다’라는 뜻이다. 조선의 양주목楊州牧은 서울 노원구와 강북구 일부를 포함한 경기 북부의 넓은 지역이었다. ‘송추’가 행정명으로 쓰인 예는 없지만 오늘날 양주시 장흥면의 지역명으로 불려지고 있어 지금의 송추를 그린 것으로 4)생각할 수도 있으나 ‘송추’5)는 선영을 뜻하며, 그림 속의 산의 배치만 보아도 산의 남쪽인 수유동 방면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2)그림 속의 지형
그림은 서울 수유동에서 동북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을 부감으로 바라본 경관이며 좌측로 북한산의 인수봉이 일부 그려졌고 우측으로 도봉산의 오봉五峰과 자운봉 일대의 암봉이 그려졌다. 오봉의 한 봉우리에서 이어진 능선이 좌우로 짧은 지능선을 이루며 남으로 길게 이어졌는데 산능성이 마다 묘소의 석물이 많이 그려졌다. 좌측으로 우이천을 따라 오르면 우이령으로 골짜기 시작되는 곳이 지금의 우이동 유원지 입구이다. 그림이 그려진 18세기 말, 이계 홍양호(耳谿 洪良浩, 1724∼1802)의 별서인 소귀당小歸堂이 북한산 쪽 계곡으로 있었다.
그림의 좌측에, 혹처럼 표현된 바위가 그려진 바위봉우리는 인수봉으로, 그 당시 산수화에서 인수봉을 특징하는 귀바위를 그린 것이다. 김윤겸(金允謙, 1711~1775 )의 동산계정도東山溪亭圖6)에서는 만취헌晩翠軒의 배경으로, 가까이 봉화산을 생략하고 멀리 인수봉을 그려 동산계정도의 현장이 도성 인근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김희성(金喜誠, ?-1763년 이후)의 와운루도卧雲樓圖7)에서도 인수봉에 튀어나온 형태의 귀바위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지금의 수유동 방향에서 바라본 도봉산을 그린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우이동 지역에서 본 도봉산의 그림을 찾지 못하여 18세기 산수화 형태의 지도인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를 참조하고자 한다. 이 시기 지도의 도봉산 그림은 대부분 서쪽 오봉의 감투바위가 표현되어 있고 동으로 바위봉우리가 연이어져 자운봉, 만장봉과 선인봉까지 그려져 있으며 오봉에서 다시 한능선이 남쪽으로 내리다 불쑥 솟은 바위가 원통암 부근의 우이암으로 여겨진다. 대체로 산봉위의 표현이 양주송추도와 흡사하다. 양주송추도에서는 이 능선이 계속 남으로 이어져 쌍문동 덕성여대 뒤쪽에서 동으로 꺽여 흐르는 부분까지 표현되었다.
4)정황 <양주송추도>,최열의 그림의 뜻, 김달진미술연구소 “서울 불광동(佛光洞) 박석고개를 넘어 한참을 가다보면 일영(日迎), 송추(松湫)를 만난다. 이곳 장흥면(長興面) 동쪽 일대는 워낙 풍수(風水)가 빼어난 길지(吉地)라 류판서니 정판서, 신판서 묘소가 즐비하다“
5)산소 둘레에 심는 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 주로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심는다. 표준국어대사전, 국립어학원.
6)김윤겸(金允謙, 1711~1775 )의 동산계정도는 ‘신평천申平川 동산계정東山溪亭 무진戊辰 추秋’라 적혀 있는데 망우산忘憂山
자락의 평산 신씨 세거지인 위암정사韋巖精舍를 그린 것으로 뒷 배경이 되는 봉우리 정상부에 튀어나온 귀바위를 그려 이 봉우리가 북한산 인수봉임을 짐작케 한다.
7)김희성(金喜誠, ?-1763년 이후)이 1756년 가을 겸재 정선과 함께 홍상한의 별서인 북한산 사기막골인 청담동淸潭
洞 와운루卧雲樓를 방문하여 그린 그림으로 인수봉의 귀바위가 그려져 있다.
2.정선의 가계
정선의 본관은 광주光州다. 시조인 정신호(鄭臣扈, 고려, 23세기 후반~14세기 전반)로부터 9대 손인 정응규(鄭應奎, 1508~1565)가 분가(응교공파應敎公派)하여 세거지를 서울로 옮기고 세장지世葬地를 나주로부터 경기도 광주에 두었다. 8)고조부 정연鄭演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명문에 속하던 가문이었으나 증조부 정창문이 40세의 나이로 선교랑의 품계만 받은 채 돌아가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조부 3형제 중 정선의 조부만 서울에 남고 나머지는 고향인 나주로 내려갔다. 부친 정시익鄭時翊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희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외조부 박자진朴自振은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박충원朴忠元의 현손이고 광해군대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의 당질로 명문 출신이었으나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선은 1676년(숙종 2)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정시익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 생활이 어려워지자 외조부의 도움을 받았고, 큰 외숙 박견성의 후원으로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9) 이후 송규병의 장녀인 연안 송씨와 혼인하여 29세(1704년, 숙종 30)에 큰아들 정만교鄭萬僑를, 35세(1710년, 숙종 36)에는 둘째 아들 정만수鄭萬遂를 얻었다. 두 딸과 큰 아들이 낳은 세 손자가 있었으나 손자 가운데 둘째인 정황이 화가로서 가업을 이었을 뿐 뚜렷한 인물은 배출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 이후의 후손은 번창하지 못하였으며 큰 아들의 후손은 정선의 육대 째인 정제룡(濟龍,1845~?)에 와서 실질적으로 대가 끊어졌고 둘째 아들의 경우 모두 양자로 계승되었다. 사후 그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선고先考들의 세장지에 쓰지 않고 양주군 해등촌면海等村面 계성리鷄城里에 북한․도봉산을 등지고 경계좋은 곳을 택하였으며 이곳은 그의 가족 묘지가 되었다.
정봉림鄭鳳林 간행한 광주정씨 세보의 정선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자는 원백이요, 호는 겸재이다. 숙종 병진 정월 삼일 출생하였고 음직으로 위수衛率10)를 지내고 한성 주부를 거쳐, 하양․ 청하 두 현의 현감을 엮임하였다. 사도시첨정을 지내고 을해년 첨추11)에 올랐다. 병자년 가선동추에 이르렀고 영조 기묘년 3월 24일 졸하였으니 향년 84세이다. 뛰어난 그림 솜씨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도설경해圖說經觧 등 글이 있으며 유고 수십권이 있다. 배우자인 연안 송씨이며 장인인 송병규는 주부를 지냈으며 송백흥의 후손이다. 묘는 해등촌면 계성리 간좌艮坐에 합장하였다.12)
양주송추도의 하단 중앙에서 동북으로 그려진 길을 따라 오르면 산자락이 남서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고갯마루에 이르러 길의 우측으로 짧게 내린 지능선에는 4개의 원형이 그려져 있고 주위는 솔숲으로 둘러쳐져 있다. 도봉산에서 내린 주능선을 따라 많은 석물이 그려졌지만 봉분으로 보이는 것은 이것뿐이다. 4개의 봉분이 위에서 아래로 위치해 있고 위의 두 봉분이 미세하지만 약간 크게 그려졌다. 옆 묘소의 뒤쪽 석물의 크기가 작게 그려진 것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묘소의 석물은 그려지지 않았는데 세보에도 석물을 설치 했다는 기록은 없다.
양추송추도 부분
세보에 정선의 묘소는 해등촌면 계성리 간좌艮坐13)에 합장하였다고 한다. 장자인 만교萬僑의 묘는 ‘謙齋公 墓前 艮坐 合兆,’로 후배인 경주 이씨 慶州 李氏와 합장하였고 차남인 만수萬遂의 묘 또한, ‘謙齋公 墓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배우자인 문화 류씨文化 柳氏와 고령 신씨高靈 申氏와는 봉분을 따로 하였다. 손자인 정재鄭梓의 묘도 ‘謙齋公 墓前,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위쪽으로 첫 번째 큰 봉분은 정선과 배우자의 합장묘이고 두번째는 그의 큰아들인 만교와 후배의 합장 묘소이며 그 아래로 작은 봉분 둘은 차남 만수와 손자 재의 묘소로 짐작된다. 전주 이씨의 묘소인 조계동은 정선의 가족묘 건너편 북한산 자락으로 지금의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 옆의 구천 계곡을 말한다.
계성리 지역의 정선 가족 묘
성명
관계
묘소
좌향/합장
기타
鄭歚
본인
海等村面鷄城里
艮坐 合兆
配 延安 宋氏 合兆
鄭萬僑
장남
謙齋公墓前
艮坐 合兆
後配 慶州 李氏 合兆
鄭萬遂
차남
謙齋公墓前
坐
配 高靈 申氏 墓는 미상
鄭梓
손자
謙齋公墓前
配 平山 申氏 墓는 自作村
全州李氏
孫婦(鄭柙의 配)
曹溪
壬坐
강북구 수유동 구천계곡(曹溪洞)
정선의 장자인 만교는 삼남을 두었고 만수는 일녀를 두어 손이 끊겼다. 만교의 삼남은 합柙, 황榥, 재梓인데 장남인 정합의 손이 없어 정황의 독자인 이경履敬으로 손을 이었으며 20대 재용(濟龍, 1845~?)에서 손이 끊겼다. 또한, 정선의 둘째 아들인 만수는 만교의 삼남인 재를 양자로 들여 손을 이었으나 이후 계속해서 22때까지 양자로 손을 이었을 뿐이다. 이렇듯 정선의 가계는 손자대 이후에서 직계보다는 양자로 손을 잇고 그도 얼마 못가 끊이어 그의 묘가 후손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듯하다.14) 정봉림鄭鳳林 간행 세보에는 정선의 묘소에 대해 별다른 기록이 없고 2001년 세보에 묘소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15)
2)정선묘의 현장
양주 송추도는 실경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 아니지만 현재의 지형과 비교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림의 우측 하단부에 보듯이, 도봉산에서 곧게 내린 능선이 동서의 지능으로 갈리어 서쪽 지능은 남으로 흐르다 동으로 흐름을 바꾼 우이천에 막혀 끊이고 다른 지능선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그 중간에 회산군 이염(檜山君 李恬, 1481~1512)의 묘로 이어지는, 지금의 쌍문 2동과 4동을 연결하는 고개길이 정선묘 옆으로 이어진 길로 추정되며, 길 남쪽에는 현재 우이빌라가 들어섯다.16)
양주송추도에 경작지 구간은 방학동 고개길에서 효문고등학교 사이, 약 5백여미터로 그림의 지형과 실제 지형을 일일이 찾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주능선에서 우이천으로 길게 뻗은 지능선은 쌍문2, 4동을 연결하는 고개길 좌우에서 뻗은 두 능선과 효문 고등학교 옆으로 내리는 3개다. 그 중 정선묘 옆으로 길게 내린 능선이 쌍문동 고개길 북쪽 능선이며 고개길 남쪽의 우이빌라로에서 내린 능선이 정선묘 추정지다. 그림의 하단에 대각선으로 내린 능선이 효문고등학교 옆으로 내린 능선이며 우측 하단 모서리 지점이 효문고등학교 뒷봉우리에서 'ㅅ‘자 형태로 뻗어 내린 능선으로, ’ㅅ‘자 사이가 강북구 쌍문동 친환경 나눔 텃밭이다. 17)
다음 지도 서비스 쌍문동 http://www.daum.net/ , 국토지리원 1915년 측량 쌍문동지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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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묏자리가 간방인 동북쪽을 등진 자리로 향向은서남향이다.
14)광주정씨족보편찬회 光州鄭氏族譜編簒會 [編] 光州鄭氏族譜.상, 하1 - 하2 /3책, 2001정선의 장남 鄭萬僑 숙종 갑신생 肅宗 甲申生(1704년)으로 배우자가 둘이었는데 첫째 배우자는 金海 許氏로 그의 묘는 門縣山叅判公墓下戌坐 두 번째 배우자인 慶州 李氏로 墓謙齋公墓前艮坐合兆로 기술되어 있다. 차남 鄭萬遂 肅宗 庚寅生(1710년) 배우자 高靈 申氏의 묘는 미상미며 만수의 묘는 墓謙齋公墓前 坐 라고 기술되어 있다. 정만교는 柙, 榥, 梓의 세 아들을 두었으며 柙의 묘는 自作村後谷壬坐, 배우자 全州 李氏는 曹溪壬坐에 정했으며 손이 끊겨 황의 독자인 履敬가 손을 이었다. 榥은 子가 光中이며 號는 巽庵으로 英祖乙卯生(1735년)이다. 묘는 自作村後麓에 썻다. 梓는 만수의 양주로 대를 이었는데 묘는 海等村齋公墓前이고, 배우자 平山 申氏는 自作村承旨公墓下辛坐이다. 자작촌自作村은 광주군 오포면 추자리다.
15)2001년 제작 세보에 “墓 楊州 海等村面 鷄城里 艮坐 合兆 云 而未尋(묘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 간좌 합조 운 이미심)”으로 묘는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에 간좌(동북방을 등진 방향)에 합장했는데 이미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16)이태호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그 가정과 행적에 대한 재검토」, 『이화사학연구』13․14, 서울: 이화사학연구소. 1983. “최근에 손자인 정황이 그린 양주송추도(개인소장)가 공개되어 주목을 끌었는데 북한․도봉을 배경으로장지묘역을 표현한 이 작품은 바로 정선의 묘소를 그린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곳은 현재 행정구역상 도봉구쌍문2동에 속해 있으며 현지를 답사해 본 결과 옛 무덤들이 거의 파헤쳐지고 식수를 했거나 家屋이 들어서 있어 정선 묘소를 찾기란 불가능 하였다.”
17)정선의 묘가 있는 일대의 폐묘에서 한양 조씨의 묘표와 능선의 ’趙‘자가 새겨진 표석(아래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대는 한양 조씨의 선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1957년 서울시지도 1/12,000
4.결론
양주송추도는 선영을 그린 그림이다. 선영의 위치를 표시하고자 산맥과 묘소의 위치를 도식적으로 그린 명당도가 아니라 화가답게 산수화로 그렸는데, 의도적으로 명당임을 과장해서 그리지도 않았고 실제를 자연스레 표현하였다. 요청에 의해 그린 산수화가 아니라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조부 정선과 부모의 묘소와 주변 경관을 공경히 그려 집안에 두고 추모했으리라 본다. 19)
정선의 묘소가 자리한 능선은 우뚝 솟은 암봉을 배경으로 한 나긋한 흙산이다. 정선은 주역에도 해박하였으며 그의 그림에서도 음양의 조화로움을 추구하였는데, 그가 묻힌 묘소의 주변을 보면 과연 정선다운 묫자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북한산정의 인수봉를 비롯한 날카로운 바위봉우리가 도봉산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한줄기 나지막한 능선의 포근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선의 묘소 추정지인 우이빌라 옆 지능선
정선이 태어나고 거처했던 유란동이나 인왕곡의 생가를 기회가 닿는대로 복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묘소가 갖는 의미도 남다르다. 비록 그가 묻힌 곳은 주택지로 변하였지만 그 배경이 되는 산능성이는 아직 자연 그대로이다. 역사유적지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램이며, 북한산 둘레길과도 산길이 이어지고 1키로미터 정도로 가까워 둘레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선의 묘소는 의미있는 장소가 될 수 있겠다. 그간 북한산을 근경으로 그린 정선의 그림이 공개되지 않았는데, 최근 북한산 사기막골의 홍석보 별서정원인 와운루 그림 2점과 노적봉도 등이 확인되었고 20)손자인 정황의 양주송추도의 현장이므로, 이 공간을 ‘정선과 북한산 진경산수화’란 테마로 공간 활용도 가능하겠다. 겸재 정선을 추모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 문헌
1.경기문화재단,《북한산 조사 연구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1.
2.서울역사박물관, 《망우동지, 주자동지》, 서울역사박물관, 2003.
3.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4.한국등산사연구회, <와운루>,한국등산사연구회 회지 창간호, 2016.
5.한국산서회, <山書, 제27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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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그림의 등장 인물은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으로 보는데, 좌측에 두 사람은 나무를 한 짐 진 소를 끌고 귀가하는 농부이고 말을 탄 선비는 소귀당으로 귀가하는 홍씨 집안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귀가하는 선비의 자택이 우이령 너머에 바로 위치해 있다면 모를까 도성이거나, 양주 방면이라 하여도 험한 우이령으로 먼 길을 돌아서 갈 이유가 없으며 도성의 서쪽지역도 혜화문을 거쳐 경복궁 뒤편으로 가는 평지길이 안전하고 빠르다. 선영을 그렸지만 오후 늦은 시간의 한가로운 산골 풍경처럼 보인다.
20)북한산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 한국산서회(27호, 2017)와 와운루, 한국등산사연구회지의 창간호(2016)를 참조 바란다. 아래 그림은 정선의 노적봉도다.
오랜만에 로그인하게 만드는 반가운 글입니다^^ 조장빈 회원의 내공의 깊이와 넓이가 가속도를 내고 있는 중... 일취월장이라는 단어가 금세 떠오르네요, 우보가 만리를 갑니다. 조장빈 회원이 진행하는 '북한산 인문기행'에 많은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12월 17일 토요일 아침 10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앞 미팅~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늘 관심가져주시고 지적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로그인하게 만드는 반가운 글입니다^^ 조장빈 회원의 내공의 깊이와 넓이가 가속도를 내고 있는 중... 일취월장이라는 단어가 금세 떠오르네요, 우보가 만리를 갑니다. 조장빈 회원이 진행하는 '북한산 인문기행'에 많은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12월 17일 토요일 아침 10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앞 미팅~
공감합니다. 한국산서회의 희망입니다.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하겠습니다.
잘 읽었읍니다~~ 링크할게요^^
귀한 글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