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초기 지도군(무안군)참사.
·1930~35년 전라남도 도회의원
·1941년 흥아보국단 전라남도 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화엄경과 선상무역활동을 통해 지주가로 성장
문재철은 그의 선조가 18세기 초기에 전라남도 암태도 수곡리(水谷里)에 정착한 이래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다. 암태도는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에 속한다. 암태면은 서,남해안의 다도해 지방에 위치한 암태도, 추포도, 당사도, 초란도, 마전도의 유인도와 수십 개의무인도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면이다. 이곳의 지형은 대륙붕이 잘 발달된 리아스식 해안지대로 농경지의 대부분이 넓게 펼쳐진 간석지를 개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문재철의 선대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한 이곳의 지형을이용하여 바닷물을 증수하고 소금을 제조하는 화염업(火鹽業)을 경영하여 재산을 증식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주가로 성장하였다.
화염으로 소금을 제조하여 영산포, 하동포, 강경포구 등지로 선상무역을했으며, 지역 간의 격차를 충분히 이용, 수익을 극대화시켜 이를 바탕으로 점차 지주가(家)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들의 소금장사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섬지방에 구전되어 오고 있다. 내용인즉,
이들이 소금을 배에 가득 싣고 영산포로 소금장사를 갔다가 소금 위에 커다란 구렁이가 앉아 있어서 그 소금을 팔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며칠을 보냈는데그 사이에 소금값이 몇 배로 껑충 뛰었다. 다시 배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구렁이는 진짜 구렁이가 아니고 배닻줄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부자가 되도록 하늘이 도왔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화염업과 선상무역활동을 통하여 지주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던것이다.
한편, 문씨 집안이 지주가로 급성장한 것은 1897년 목포 개항과 더불어 문재철이 암태도에서 목포로 이주하면서 부터였다. 개항이라는 상황은 그의 부를 확대시킬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미곡이 대일이출(수출)의 주종상품이었으므로 지주 경영은 높은 수익을 보장받았고, 목포항의 상인으로서 내륙의 미곡유통로를 장악, 선대제(先貸制)나 고리대 자본을이용하여 수익을 배가시켰다.
1910년 경술국치와 더불어 그의 토지집적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권력기구의 참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 제국주의 침략자는 피지배 민족 중에서 자신들의 동조자를 만든다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또 그래야만 식민지 통치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데 있어선도 마찬가지였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중추원의 구성을, 각도에서 참여관 1인(참사관 3인), 각군에서 참사2인을 중심으로 학식있는 명망가를 임명하여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식민지를 통치함에 있어서 치안유지 및 민심수습에 이들을 활용하기 위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 초기에 문재철은 지도군(나중에 무안군으로 변경)참사(參事)가 되기도 하였고, 1930년 대에는 전라남도 도회의원 및 도평의원등 식민지 권력기구에 참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계속하여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과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쌀가격 등귀현상이 문재철이 대지주로 성장하는 여건으로 작용하였음은 물론이었다. 1915년의 토지규모가 160여만 평으로부친(문태현)대에 비하여 무려 20배나 확대되었다. 이처럼 개항장의 지주층을비롯하여 재지지주(在地地主)층들이 식민지 무역의 급작스런 변동으로 소작인에게서 거두는 수확의 5할 이상 높은 수확료를 상품화하여 막대한이익을 볼 수 있어서 대지주층으로서의 성장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이들에게 식민지 지배 통치권력과의 야합경향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제국주의하에서 조선의 수출(이출)의 현실적 여건이 이러한 것이었으며,일본 자본주의와 조선의 지주층이 구조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 경제적 터전도 이러한 것이었다. 반봉건적 식민지사회에서 지주층을 매판자본자 내지는 친일세력의 핵심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주경영의 화대 강화와 소작쟁의 빈발
1920년대의 그의 지주경영은 일제가 1차대전 후 대공황에 직면하면서 곡가가 폭락하여 지주 경영의 수익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강구한 대책이 지주경영의 강화와 그에 연관된 분야에로의 확대투자였다. 지주경영의 강화는 먼저 소작료의 인상에서나타나고 있다. 즉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를 4,6타조제(소작인몫 4,지주몫6)로 바꾸고 잡을도조(지주가 소작인을 입회시키고 벼의 수확 예상량을 협정하여 정하는 도조)라는 소작료 징수방법을 채택하여 지주경영을 강화하였다.
이 때 마름(舍音)의 소작인에 대한 침탈행위 또한 극심하였다. 일제하에 마름을 지낸 암태도 사람이 "나는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배를 타지 않습니다"라고 술회하였는데 이는 소작인에 대해 심한 행위를 많이하였기 때문에 그 앙화(殃禍)가 무서워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 그의 지주 경영지는 약 300여만 평에 달하는 거대 지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이와 같은 지주경영은 이 단계에서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농민항쟁이 독립운동의 일환인 사회주의 노선과 조직적으로 연계되면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지주경영지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암태도(1924)를 비롯하여 도초도(1925), 자은도(1926), 지도(1927) 등의 농민항쟁이 그 것이었다. 이항쟁의 결과 소작 농민들은 논에서는 합복제(合卜制)라는부정액타조제(소작인몫 50%, 지주몫 40%, 농사장려금 10%)를 쟁취하였다.따라서 지대의 감소는 필연적이었다.
이 때부터 지주 경영방식은 일제의 농업회사나 농장과 같은 경영방식을 채택하여 농업생산의 합리화를 꾀하였고, 생산에서 판매에 이르는 전과정이 지주 통제하에 계획적으로 실시되었다. 농민은 수확물을 <자금대여>라는 고리대적 관계에 의해 철저히 수탈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영기구의 개편은 일제 독점자본주의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식민지 당국으로부터 경제적인 금융지원과 정책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다. 그것은 1930년대 후반 회사경영지를 중심으로 한 간척지 개간사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전후 배경에 힘입어 문씨 가(家)는1940년까지 약 500여만 평에 이르는 조선 굴지의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문재철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1941년에 목포 문태중학교를 설립하고,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업적은(?) 그가 일제권력의 비호하에 조선 굴지의 대지주로의 성장 가능성을 보장받지않고서는 불가능했던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박천우(장안전문대 교수,한국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3. 12~1924. 9.
{조선일보}, 1923. 12~1924. 9, 1933. 5. 11.
{조선연감},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