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주제>
한국 천주교 상제례(喪祭禮) 문화의 토착화(土着化)
허윤석 신부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 박사과정(전례학)
1. 시작하는 말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인간의 탄생과 동시에 모든 인간에 예외 없이 부여되는 삶의 대전제(大前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이해는 종교와 문화, 그리고 의학과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중심주제이다. 또한 시대와 종교 그리고 문화에 따라 죽음을 애도하는 예식과 매장하는 예식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각 종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그리고 같은 종교에 있어서도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토착화(土着化)되기 때문이다. 즉 ‘죽음은 불변하나 상제례의 문화는 변화의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한국 천주교회의 상제례 문화의 토착화를 위한 심포지엄을 통해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죽음관과 부활관이 어떻게 신앙의 선조들에 의해 한국 천주교회의 상제례 문화로서 토착화되었는가를 살펴보고 현대에 대두되고 있는 상제례 문화의 문제점과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죽음
2.1 부활의 문(門)인 죽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죽었다 다시 일어나시어 인류 앞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가 되셨다. 우리는 이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을 부활(Resurrection)이라 부른다.
이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탄생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천주교이다. 죽음을 인간 생명의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는 관문으로 인식시킨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로운 죽음에 대한 이해와 부활을 향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따르려는 신앙을 출발시켰다.
예수의 죽음은 단지 예수 개인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부활과 일치된 현실로서 구원의 역사이다. 단 하나의 현실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죽음은 죽음 자체의 의미와 내용을 근본적으로 변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의 파괴적인 힘을 극복하여 죽음을 내부로부터 변형시켰다. 죽음은 원래 죄의 결과이며 악의 결과물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門)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에서 전자(前者)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전의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죄의 결과로서의 인간 한계의 절정이며 생명의 끝점인 죽음이며 후자(後者)의 죽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한 부활을 담고 있는 부활을 향한 문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 14,8-9)
2.2 사랑의 계시(啓示)이자 성사(聖事)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 성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파괴인 죽음이 구원이 되기 위하여 예수의 죽음에 참여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참여’란 언어는 폭이 넓고 막연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나 적어도 그리스도교적이고 성서적인 의미 특히 바오로 사도의 의미로서 ‘참여’는 매우 현실적인 면서 동시에 신비적인 우리 자신의 ‘체험’을 의미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참여”는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의 근저(根底)에는 그가 자기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했다는 확신이 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우리의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에 동화(同化)하여 자기의 죽음으로 하였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 신비체의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는 의식을 행한다. 이때 사제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의 보속과 극기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기하는 것은 생명과 부활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는 한낱 허무인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존재상의 일치 및 생명상의 일치로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공유하는 결과 부활한 그리스도화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되고(2고린 5,14),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리스도인의 고통이 되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이 된다. 그리스도 수난의 공로를 통하여 동일화된 죽음인 우리의 죽음은 부활을 향한 죽음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죄의 결과며 인간의 한계인 죽음의 의미는 그리스도 죽음의 동일화 (同一化)를 통하여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사업의 가장 위대한 계시이며 역사적인 표징인 성사이다. 또한 성자의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가장 헌신적인 겸손된 사랑의 봉헌행위이다. 이러한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이 되었다.
2.3 죽음의 공동체성-통공에 의한 부활을 향한 연대성
장례예식서의 지침 1항은 다음과 같이 천주교의 장례예식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자녀들의 장례를 통하여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경축하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세례로 한몸이 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생명으로 옮아가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영혼을 씻어주고 성인들과 뽑힌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하며, 육신으로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육신부활을 기다리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빠스카 제사인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와 전구를 바침으로써 서로 통공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서로 영신적으로 도와주며 위로하는 것이다.”
죽음은 천주교의 교리상으로 그리스도의 사심판의 시기이다. 이승에서의 삶에 따라 천국과 지옥과 연옥이 결정된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라고 고백한다. 통공(通功)이란 공로의 교류를 말한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천국에 이르기 위한 기도와 선행을 믿는 교회는 주요한 장례예식의 본질로서 “서로 통공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서로 영신적으로 도와주며 위로하는 것이다.”를 강조하고 있다.
통공(通功)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공동체의 기도이며 전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죽음문화의 공동체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연옥과 지옥 그리고 천국으로 나누어지는 사후(死後)의 천주교의 세계관과 교리는 죽은 이들의 연옥 상태에서 천국에로의 전향을 위한 간구와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3. 천주교 장례예식의 변천과 교회의 가르침
로마 라틴 교회의 장례 예식은 죽은 자에게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리고 흙은 떠서 무덤에 넣음으로서 끝났다. 죽은 자를 위한 청원기도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시행되었다. 4세기 이후부터 청원기도가 미사에 삽입되었고, 7세기경에 위령미사에 고유한 텍스트를 갖고 시행되었다. 위령미사는 옛 로마와 희랍 문화권의 풍습에서 죽은 자의 장례날이나 기념일에 사제 밥상 또는 위안상을 차려 놓으며 죽은 자를 위한 빈 자리를 마련해 놓고 시행되었다. 현재 본당에서 추석 합동미사때 제단앞에 추석상을 차려놓은 것과 같다. 조상을 기리는 음식을 차리는 문화는 이미 로마교회의 토착화된 제례예식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위령미사가 처음엔 장례일에 거행된 것이 아니라, 위령 기념일인 죽은후 3일 7일 30일에 거행되었다. 후에 이를 교회적 의미를 부여하여 받아들였다.
예) 3일- 예수 부활, 7일 - 야곱의 성조에 대한 7일 동안 슬퍼함 등
이후 장례일에 장례미사를 지냈고, 장례미사가 장례식의 중심이 되었다. 미사 끝에 로마예식은 사도예절이라고 하여 성대한 기도를 하였다.
12세기 이후에 각 지역 풍습이 가미되어 과도하게 비대하여졌다.
16세기 에 걸쳐 기쁨의 성격을 띄는 어린이들을 위한 고유한 장례미사 예식이 생겨났다.
그 후 트리덴틴 공의회의 전례쇄신과 통일화의 일환으로 1614년에 출간된 로마예식서는 복잡화된 예식을 간소화시켜 본래의 윤곽에로 거의 복귀시켰다.
1742년 7. 11 교황 베네딕또 14세의 회칙발표로 중국의 상제례 예식이 금지된다.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꼬회 등의 중국의 상제례 논쟁이 심화되어 우리나라도 상제례 금지로 인한 박해의 원인 제공 및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36년 5. 26 포교성성은 일본이 제출한 천황숭배, 신사참배 등을 그 나라의 풍습의 차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1742년 금지되었던 일부가 해제되었다.
1939년 12. 8 신앙 포교성성은 중국이 제시한 공자의 화상(畵像)이나 위패에 대한 존경, 시신이나 죽은 사람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하거나 경의 등 예의표시를 그 나라 풍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1742년의 금지령의 일부를 해제시켰다.
1966년 초안을 작성 여러 민족과 지방의 실험을 거쳐 1969, 8. 15 경신성성은 표본적 장례예식서를 최종적으로 공포하였다. “신자들의 장례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조하기에 힘써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이들에 대한 그 시대와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그러므로 가문의 전통이나 지역적 풍습이나 장례위원회등에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다 받아들이도록 하고 혹 복음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에 있어서는 빠스카 신비에 대한 신앙과 복음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변경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4. 한국 천주교 상제례의 토착화 과정
4.1 천주교 성교예규 (1864년)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상제례 문화는 연도의 문화이다. 예로부터 초상이 나면 “연도났다”고 한다. 초상집에 문상을 가자고 할 때도 연도하러 가자고 한다. 또한 명절이나 제사때 연도를 바친다. 이렇게 우리는 연도라는 말로 상제례를 대신하며, 연도는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토착화된 우리의 기도이며 노래이고 봉사의 행위와 함께 하는 상제례문화인이 것이다.
연도(煉禱)란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祈禱)라는 뜻으로 연옥의 연(煉)자와 기도의 도(禱)를 합쳐 만든 것이다. 정확히 역사적으로 연도가 언제 발생하였는지 그리고 이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문헌은 없다.
1864년 “천주 성교 예규”라고 하여 책이 목판으로 발간된다. 이 책이 현행 사용하고 있는 연도 책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책은 1859년에 다블뤼 주교가 편집하여 1864년에 처음 1권과 2권으로 베르뇌 주교가 감수 및 인준하여 목판본으로 출간된다.
“우리 두 군데 인쇄소(목판)에서 올해 새책 4권이 나왔고, ... 儀式書 즉 장사지낼때의 경문 예식, 그리고 병자들을 권유하여 거룩한 죽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방식이 들어 있는 책 2권”
이에 대해 최석우 신부의 『한국교회사의 연구』에 의하면 성교예규는 1859년에 다블뤼 주교가 필사본으로 내려온 한문본을 당시의 한국 교회실정에 맞게 간추려 번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회의 인쇄소가 가동된 1864년에는 많은 예식서와 문서가 출판 및 인쇄되었다. 당시의 교회에서 발행한 공식 문서 및 출판에 대한 에 대한 기록서인 『Bibliographie coreenne』의 기록을 보면 “이 책은 천주교의 예식서이고 다블뤼 주교에 의해 시작(직역하면 열리게)되었다.”- Ovrage en coreen par Mgr. Daveluy-라고 만 되어있다. 이 기록에는 이 책이 1864년과 65년 사이에 첫 번째 편집으로 2권으로 편집되어 출간되었다고 한다. 즉 원본 성교예규는 단권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문 필사본 성교예규는 1864년 2권으로 출간 된 성교예규를 모두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시편과 예식에 대한 지시가 있다. 또한 혼인예식에 대한 규범도 담고 있다. 그 내용상의 구성을 보면 5권으로 되어있으며 처음 2권까지는 장례에 대해 나머지는 혼인에 대한 것이다. 즉 1864년에 발간된 두권의 목판본 성교예규는 혼인규범만을 뺀 한문 필사본 천주교 성교예규의 일부 장례에 관한 규범에 대한 번역본인 것이다.
연도를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와 예식이라는 넓은 의미로 본다면 1859년에 번역하고 편집하여 만든 천주성교예규 이전에 어떠한 형태의 연도가 시행되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먼저 다블뤼 주교의 천주성교예규의 원자료본인 한문 필사본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이 한문본에 의해 과연 장례절차와 연도가 시행되었는가?
다블뤼 주교는 1863년경에 그의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의 내용을 보낸다.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한 뒤로 많은 신자들이 외교인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공공연히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조선에서 대낮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참석자는 각기 촛불을 들고 성영(聖詠)을 큰소리로 외우면서 동네 길을 지나가는 장례행렬을 펼친다는 것을 상상하시겠습니까? 어떤 곳에서는 이 때문에 시비가 나고 싸움이 벌어지고 했지만 다행히도 과히 중대한 결과는 빚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곳 몇 군데에서는 외교인들이 일치해서 우리 예절이 매우 점잖고 아주 아름답다고 인정했고, 이 광경을 보고 개종한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했다는 것은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식 장례예절과 기도가 행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행해지던 예절을 이때에 이르러 정비했다는 의미이다. 즉 당시의 기도문은 비록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완전히 우리말 뜻에 맞게 번역된 것이 아니라 한문을 한글 독음으로 옮긴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1837년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는 기도문의 번역작업에 착수하여 이듬해 ‘쳔쥬 셩교 공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임종 장례 기도문이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다블뤼 주교는 이전까지 독음의 형태로 바치던 임종과 장례기도문을 이때 우리말 뜻에 맞게 한글로 번역, 편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천주 성교예규는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기에 이른다.
1864년에 발간된 천주성교예규에 보면 선소리(先唱)와 후소리(後昌)을 구분하여 시편을 노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또한 반드시 시편을 노래로 받치도록 되어있다. 이미 시편기도를 위한 노래가 구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도는 기도문이며 동시에 노래로서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블뤼 주교가 번역한 한문필사본 ‘천주성교예규’는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이에 대한 문헌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아마도 한문 필사본 천주성교예규에 관한 문헌의 규명이 연도의 정확한 역사를 밝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4.2 제사논쟁으로 인한 박해와 더불어 탄생
연도의 역사를 한국 교회의 창립과 더불어 제사문제로 인한 박해와 관련하여 탄생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1985년 최창무 주교님에 의해 제기 되었다. 1859년에 다블뤼 주교가 번역, 편집한 천주성교예규를 일반적으로 연도라고 칭하는 것과 구분하여 연도를 광의(廣義)적 의미에서 “죽은 신자를 위한 기도”라고 할 때 연도의 역사는 한국 교회의 초창기인 1700년대까지 올라간다. 많은 유학자들이 천주교회에 대한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학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예수회 사제인 마태오릿찌의 천주실의 등 보유론적 서적을 탐구하여 1784년 이승훈은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의 천주교회가 시작된다.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많은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선비들은 성호학파의 이익 선생의 문하생인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의 유학자였다. 그 당시 중국은 2000여 년이나 내려오는 유교문화를 생활신조로 하는 국가이며 이중에서도 예수회는 유교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보유론적인 방향에서 선교를 하였으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꼬회의 상륙으로 유교에 대한 상제례 문제로 갈등을 빚어 사도좌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켜 대립상태에 있었다.
1742년 7월 11일 사도좌 신앙 포교 성성은 제의 논쟁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때 한국 천주교는 신앙을 받아 들여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기도와 성사를 소중히 여기고 많은 기도서를 들여오고 성직제도를 본받아 성직자를 임명하고 각종성사를 집행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789년 10월 윤유일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직제도와 성사집행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즉시 성직제도를 폐하며, 또한 제사가 부당하고 미신적 행위로 금기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성직제도는 폐하면 되지만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사는 전통 풍습 및 제사를 못 지내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러나 선조들은 이러한 신앙교리를 받아드리며 서슴없이 풍습과 전통을 포기하였다. 이와 같은 단호한 행위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같은 행위는 천주교회가 사악한 종교로 지탄을 받으며 박해자들로부터 무부무군(無父無君)이니 무군멸친(無君滅親)의 생활태도를 갖는 사람으로 오해받거나 고발되었다.
제사가 부당하고 미신적 행위로 금지된 것을 알게 된 신자들은 자신들이 신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마련해야 했으며 특히 인륜에 해당되는 장례와 제사를 새로운 의식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연도가 탄생 된 원인이다. 죽은 이와 남아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고 성인들의 통공으로 같은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신앙고백이다.
연도가 1700년대 제사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만들어 졌으며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으로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예수회의 디아즈(E. Diaz,1574-1659) 신부가 저술한 한문 기도서인 수진일과(袖珍日課)이다. 수진(袖珍)이란 소매에 숨겨서 휴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과(日課)는 일상적으로 받치는 기도라는 뜻이다. 마치 지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수첩과 같이 몸에 지니기 편하도록 수진본으로 만들어진 연중기도서이다. 이 기도의 내용은 많은 부분 현행 사용되고 있는 연도의 원전인 천주교 성교예규의 한문필사본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수진일과에는 임종자를 돕는 助善終引, 臨終念, 臨終禱文, 임종후 받치는 終後禱文등의 기도문과 입염예절(入殮禮節), 起棺등의 임종에서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한국에 18세기에 전해져 한문본과 함께 내용중의 일부를 한글로 번역하여 사용한 기록이 邪學徵義와 벽위편에 남아있다. 邪學徵義에는 신유박해때 사학교도라고 칭한 천주교인들에게 압수한 물건과 문서에 대한 목록이 기재되어 있다. 즉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박해시대부터 연도책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유박해(1801년) 때 압수된 여러 서목(書目)이나 공초(供招)기록에 수진 일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아 당시 신자들에게 널리 읽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수진일과에 있는 임종과 장례 기도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실제 장례에서 사용하였을 것이다. 물론 박해 상황에서 현재와 같이 응답의 노래로 집단적으로 기도를 드렸을 것은 알 수 없지만 기도문으로서 그 실천 가능성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귀양간 윤석춘의 공초기록이 주목된다.
“제 어머니는 경술년(1790년)에 처음 저의 외숙모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제게도 역시 배울 것을 권했습니다. 제가 묻기를 ‘천주교를 하면 이익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니 어머니는 ‘천주교를 배우면 평소에 모르는 사람이라도 정이 지친(至親)한 사람과 같아서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해준다.(患難相求) 너는 형제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니 이것을 배워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고 어머니가 적어 온 한글 경문을 외웠으나 끝내 그 오묘한 이치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다음해(1791년) 3월 저의 집안은 여러 달 병에 걸렸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천주교 사람들은 한 사람도 와서 조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어머니에게 묻기를 , ‘일전에 천주교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고 했는데 지금 부친상을 당해도 위문하는 자가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하니, 어머니가 답하기를 ‘저들은 반드시 몰랐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윤석춘의 어머니는 이합규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 4월2일에 순교한 정복혜이다. 위의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윤석춘은 자기 어머니의 권유로 입교하였으며 입교 동기는 천주교의 어려울 때 서로 구해주는 전통이었다. 그리고 윤석춘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위문하는 것을 환난상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상가에 조문하는 것을 환난상구의 전통으로 생각하였을까? 윤석춘은 대화의 문맥상 조문뿐만 아니라 장례절차까지 돕는 것을 그러한 전통으로 이해한 듯 하다. 그러므로 당시 천주교의 장례예절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임종부터 장례까지 도와주는 것이 환난상구의 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위의 여러 문헌적 고찰을 통해 적어도 광의(廣義)적 의미의 연도가 교회의 창립 초기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점차적으로 한국의 상황에 맞는 연도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대기적으로 볼 때 천주교 성교예규의 한문 필사본은 수진일과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4.3 신앙의 자유이후의 장례문화-연령회
한국 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갖게되었다. 이시기에 이르면 교회의 많은 부분이 변화되는데 장례 봉사의 경우도 이전의 환난상구 단계에서 단체화의 단계로 변화가 나타난다. 대구의 로베르 신부는 1886년도 보고서에서 장례사업이 전교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였고, 전라도는 1891년경 전동본당에 연령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또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1894년 이전에 서울과 제물포에도 교회에서 장례사업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1886년 이후 연령회가 설립되었음을 말해줌과 동시에 박해시대의 연령봉사의 전통이 정식 단체의 설립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0년대에 이르면 연령회는 좀더 다양한 성격을 갖게된다. 즉 이전의 노동력 제공을 주로 하던 단계에서 금전적인 부조를 강조하고, 또 기도와 미사 봉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이러한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전시기가 장례봉사를 위주로 하였다면 이 시기에는 금전적인 부조나 기도 미사 봉헌 등의 활동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박해 시대와 구한말 과도기를 거치는 가운데 생활 면에서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신자들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10년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1912년에는 ‘천주 교중 보험회(天主敎中保險會)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보험처럼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거둔 뒤 회원 가운데 상을 당한 사람에게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주는 단체였다. 또 1917년에는 진남포 교회에 상장계(喪葬契)가 조직되어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을 수행하였다. 이 상장계는 명칭에서 알수 있듯이 주로 상장과 관련된 자선,봉사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또 계(契)라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아 보험회와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과 함께 기도와 미사 봉헌도 연령회의 주요 목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14년 로베르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경상남,북도의 몇몇 본당에 있는 연령회는 ... 해마다 회비를 거둡니다. 회비는 적립하여 그 이자로 각 회원이 죽었을 때 그리고 그 후 매년 기일에는 회원 각자의 몫으로 정해진 횟수의 미사를 드려줍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면 연령회는 장례봉사는 물론, 금전적인 부조를 위한 계의 형태의 조직화, 기도 및 미사 봉헌등 오늘날의 연령회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는 것이다.
즉 한국 교회의 연령회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환난상구의 단계에서 1886년을 전후한 시기에 단체로 성립되었다. 또 성격면에서는 장례봉사를 주로 하던 단계에서 1910년을 전후하여 경제적인 측면이 강조된 사실과 기도, 미사봉헌이 연령회의 주요 목적으로 편입되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물론 연령회의 활동 범위에는 금전적인 부조, 노동력 제공, 기도 및 미사봉헌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이래 한국 교회의 연령회 또는 장례봉사 속에는 이러한 성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생각한다. 다만 시기별로 강조되는 역할에 차이가 있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러한 기능들이 균형 있게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의 연령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10년대에 그 모습이 형성된 것이다.
1952년 목포의 현하롤드 주교는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라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설립한다. 6.25직후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의 상황 속에서 상가 봉사와 연도 받치기는 레지오의 설립과 더불어 한국 레지오의 중추적 활동으로 자리 매김되었는데 외국의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 레지오의 커다란 성장 요인중 일순위는 바로 이러한 상가봉사와 연도 받치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6.25 전쟁이라는 레지오 도입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한국인의 장례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발전요인이 된 것이다. 레지오의 빠른 성장과 함께 연도는 각 본당에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봉헌할 수 있는 기도로 전파된다.
1970년 이후 1864년에 번역된 천주성교예규는 성서의 번역본들이 나옴에 따라 일부 가사가 바뀌게 되어 지방별로 각기 다른 가사의 연도가 되었다.
예: 깊은 구렁 속에서, 혹은 주여 나 깊고 그윽한 곳에서.....
1998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81조 “장례식은 크리스찬 죽음의 빠스카적 성격을 더욱 명백히 표시할 것이며 각지방의 환경과 전통에도 밀접히 적용시켜야 한다.”와 장례예식서 지침과 해설2항 “ 죽은이들에 대한 그 시대와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그러므로 가문의 전통이나 지역적 풍습이나 장례위원회등에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다 받아들이도록 하고...”의 정신을 실행하기 위해 그동안 전례적 요소를 모두 갖춘 토착화된 신심행위로서 시행되던 연도와 한국천주교회의 상장 예식을 현대의 상황에 맞게 보완하여 한국의 전례예식서의 시안으로 상정하였으며 현재 이를 검토중이다.
다음의 조항들에 비추어서 연도는 이미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부합할 수 있는 토착화된 전례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1.교회는 망인들을 위한 예식으로써 고통을 표현하며 동시에 신뢰심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시편의 기도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사목자들을 잘 교육하여 장례식에 사용되는 시편들 가운데서 적어도 몇 가지만은 이행할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한다. (지침과 해설 12항) -이미 연도의 기도는 많은 시편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전례헌장 63조에 의하여 각국 주교회의는 로마 예식서에 준하여 지역적 필요를 감안하여 예식서를 만들 수 있고, ...민족의 특성과 전통에서 어떤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것인지 신중히 검토하고 ... 다음 적응을 도입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거기에 알맞는 곡조를 붙이고 (지침과 해설21항) 전례상의 전통에 따라 행렬때의 노래와 기도에 관해서는 선택의 자유가 더욱 큰 것이다.(24항), 미사 없는 장례식은 ...사목상 필요성으로 인해 각 주교회의는 성좌의 허가를 받아 평신도에게도 장례식 집전을 맡길 수 있다. 특히 밤샘기도는 평신도들에게 권장하는 바이다.-연도의 가락은 약 15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토착화되었다. 또한 연도는 망인의 집에서 사제의 주례없이 밤새워 봉헌하는 토착화된 기도이다.
제2차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각 지역 교회의 고유한 장례예식서를 만들 수 없었다. 전례란 성직자의 주례아래 교황청이 인준한 예식서에 의해 거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도 및 현재 거행되고 있는 천주교의 상장례예식은 바티칸공의회의 전례의 지침과 정신에 매우 부합되는 전례적 요소와 역사성을 갖고 있기에 한국 교회는 연도 및 성교예규를 통한 상장례예식를 우리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전례로서 준비하고 있다.
5. 천주교의 장례예식과 유교의 예식비교- 토착화 요소중심
천주교 성교예규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내용상 크게 2권으로 편집되었다. 1권은 임종자를 위한 기도와 선종자를 위한 기도와 예식, 2권은 임종 후 상장 규칙과 임종과 초상등의 각 절차 때의 기도, 그리고 어린이 장사예절과 상례문답으로 구성된다. 천주교의 장례예식은 천주성교예규(1864년)의 상장규구의 총 23항과 상례문답의 56항의 세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음은 유교의 전통예식과 천주교의 장례 두 예식의 비교이다.
가.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바로 종후축문이란 기도를 받친다. 임종하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를 한다. “성인들이여 천사들이여 오셔서 이 교우를 하느님께 바쳐 주십시오.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한 애원의 기도를 올린다. 이후 연도를 바친다.
연도는 크게 5가지로 구성된다.
1. 죄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2편의 시편을 교대로 합송한다. (시편 129, 50편
2. 성인 호칭기도를 통하여 성인들의 통공을 간구한다.
3. 자녀들의 기도 -상주(喪主)가 죽은 부모를 위해 기도를 받친다. 1988년 이후 주교회에 상정한 상장례 예식서에는 위령기도는 신앙공동체의 기도이므로 자녀가 없이 임종한 이를 위해 친구나 이웃이 임종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일반기도(문상객의 기도),자녀의 기도, 친구의 기도를 첨가하였다.
4. 찬미기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는 교리이며, 함축적인 노래로 교송으로 부른다. 이 기도는 연도를 바치는 믿는 이들에게는 교리 교육적이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선교의 시간이 될 수 있다.
5. 주님의 기도
6. 마침기도 - 성부를 향한 기도이며 성자의 수난 공로와 성인들의 통공을 통하여 임종자가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길 간구하며 살아있는 모든 신앙인들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연도는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을 위해서도 바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임종자의 코에 햇솜을 대보아 움직이지 않으면 운명했다고 일단 보고서 가슴을 치며 우나, 이런 물리적 판단으로는 죽음을 단정하지 않고 사자(死者)를 소생시키기 위해 다시 하늘에 비는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데 이것이 복(復)이다. 복은 죽은 사람이 평소에 입던 웃옷을 가지고 지붕 가운데 올라가서 왼손으로 목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쪽을 바라보고 “아무개 돌아오라.”고 3번 외치는 초혼복백(招魂復魄)의 의식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혼과 백의 갈림으로 생각하는데 죽은 후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본다. 그래서 복은 떠난 혼을 불러들여 백에 복귀하도록 기원하는 행위이다.
연도를 받치기 전에 교우는 상가에 와 시신에 성수를 뿌리며 “망자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아멘”하고 기도한다. 여기서 죽음관이 다름을 볼 수가 있다. 장례의 시작이 유교에서는 다시 혼을 부르는 소생에 대한 염원의 표현으로, 천주교에서는 영혼의 안식을 기리는 정화의 의미로 시작된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서도 입관 전에는 망자(亡者) 입관 이후에는 연령(煉靈)으로 시신을 구분하는데 망자(亡者)라는 단어에는 시신에 대한 애석함이 담겨져 있기에 이 단어를 천주교에서 수용하므로써 죽음에 대한 애석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유교의 시신에 대한 입장이 죽은 부모의 혼과 백이 분리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부모의 것으로 인식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시신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시신은 하느님께 은총을 받은 몸이며, 성체를 영한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궁전이며 세말에는 부활의 영광을 얻어 영혼과 한가지로 영복을 누릴 소중한 것이다.
즉 유교에서는 부모의 시신은 효의 대상이지만 천주교의 시신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궁전인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육신이다. 천주교에서는 유교의 문상접대와는 달리 “장사식장에서는 술과 음식을 많이 벌리지 않음이 아름답고 다행한 일이다”고 말한다.
나. 수시(收屍)를 하여 준다. 시신을 올바르게 수습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얼굴을 아름답고 화사하게 만들어 준다. 시신을 시상판(屍床板)에 올려 놓아 몸이 곧게 수습하여 준다.
다. 염습과 입관
사망 후, 24시간이 지난 후에 입관 시간이 잡히면 염습을 한다. 죽은 이의 시신을 깨끗이 씻긴 후 정갈한 옷이나 삼베옷을 수의로 입히는 것을 염습(斂襲) 또는 염(斂)이라고 한다. 수의는 벼로 된 옷이나 평상복(한복,양복)이나 특수복(사제, 수도자등)을 입히어 얼굴을 싸메지 않고 관에 넣는다.
염습할 때, 염습 기도문을 바치고, 시신에 성수를 뿌리고 시작한다. 가족은 촛불을 켜들고 있다. 천주교회에서 염습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입관을 중요시하였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교의 염습은 죽은자를 살리려고 애쓰면서 죽음을 인정하는 과정으로써 시신의 씻김인 습(襲), 시신을 베로 싸서 묶어 관에 넣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소렴(小殮)과 시신을 베로 싸서 입관하는 대렴(大斂), 유가족들이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 등을 엄격히 구분되어 정성을 드렸고 의식으로 정하여 엄격히 지켜왔다. 이렇게 입관보다는 염습을 중요시 한 이유는 사람이 죽었어도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살리려는 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살리려는 노력은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지붕에 올라가 초혼과 고복을 한다든지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을 5낭(囊)에 모으는 것과 죽은 자를 깨끗이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깍는 것, 사자(死者)의 입에 쌀과 조가비(貝) 또는 구슬(玉)을 넣어주는 의식인 반함(飯含)을 하여 다시 살기를 바라는 복생희구(復生希求)는 죽은 이에 대한 정성과 효의 표시이며 소생을 희망하는 살아있는 자의 심정의 표이다. 이것은 유교가 현세적 종교임을 드러내는 예식이다. 즉 유교에서는 생과 사를 별개의 차원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양면적 측면내지 일통지사(一統之事)로 본다.
반면 한국 천주교의 염습예식은 입관 예식과 분리 되어있지 않다. 한국 천주교회의 염습과 입관예식은 예수의 무덤 안장 사건을 재현하는 권고문과 임종자의 영혼이 하느님의 인도와 자비로 천상낙원으로 인도 되길 바라는 내용의 시편으로 하나로 구성 되어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그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 고운베로 싸서 경건하게 무덤에 안장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예를 갖추어 거룩한 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고인을 염하여 입관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고인을 위하여 기도하며 경건한 예식에 참여합시다.(염습예식 중 주례자의 권고)”
한국 천주교는 예수님의 무덤안장 사건을 염습예식 및 입관 예식으로 재현하므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임종자의 죽음을 동일화하는 동시에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부활을 향한 문으로 인식한 신앙교리의 토착화된 예식의 단면을 볼수 있다. 또한 한국 천주교는 반함(飯含)을 하지 않고 생전에 임종자가 사용하던 묵주를 임종자의 손에 쥐게 한다. 이것은 성모마리아의 전구를 간구하는 행위이다. 현행 풍습은 입관후에 문상을 했으나 오늘에 와서는 수시(收屍) 후에 문상을 받는다.
라. 출관(出棺)
출관(出棺)이란 상가에서 운구하여 나오는 것을 말한다. 미사와 고별식을 마치고 묘지로 떠난다. 천주교의 출관 방법은 신자인 경우 발을 앞세우는 데 이는 제단을 향하기 위함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함이다.
바. 곡(哭)의 의미과 상여소리와 연도
유교에서는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표현으로 곡(哭)을 하고 천주교에서는 연도를 한다. 천주교에서도 곡을 한다. 하지만 유교의 곡에 비해 매우 자제를 강조한다.“체모를 잊지말고 미치게 부르짖는 소리와 원망하는 말을 내지말고, 발을 구르며 가슴을 두드리는 거동을 말지니라.” 이는 부활을 희망하는 죽음관 때문이다. “외교인의 죽음은 더 간절히 울음이 마땅하니 대개 이 무리는 죽으며 곧 지옥에 삼킨바 되어 영원한 불의 무한한 벌을 받을 지라 그런고로 마땅히 더욱 서러워하고 아파하려니와 교우의 죽음은 도리어 가히 즐거워하고 경하할 것이라, 어찌 몹시 서러워 통곡하리요? 그러나 만일 본성의 눈물을 금치 못하면 멀리 이별한 연고로 가히 울것이로되, 아주 영원히 잃은 줄로 울진 못할지니 대개 장래에 우리 다시 서로 만나 서로 즐길 바람이 있음일새니라.”
연도는 이를 바치는 주체가 둘로 나뉘어 한쪽이 부르고 나머지는 ‘망자(공의회이후 세례명을)를 위하여 비소서’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교환창 내지는 선후창의 형식을 지닌다. 이러한 선후창은 우리나라의 상여소리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형식으로 연도가 민속적 전통 위에서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도를 구지 소리를 높여 노래함으로 유교적 전통으로는 자칫 즐거워하는 모양같아서 조상의 예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상례문답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 하니 이 비록 노래없이 거저 경을 외워도 족하나 경을 노래하여 외움이 그 연고 있으니 하나는 노래하는 소리 더욱 내 생각을 들어 주께로 향케하고 더욱 내마음을 수렴케 하고 더욱 우리 마음의 큰 원을 드러냄이요, 둘은 거룩한 노래의 소리 만일 법대로 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하면 능히 마귀를 쫓으니, 대개 마귀 항상 마귀 근심하여 신락의 소리를 듣고 견디지 못함이요, 셋은 장사때에 교우의 하는 소리는 또한 슬퍼하고 근심하는 소리니 그러나 과도히 못할지라, 대개 우리 근심은 바람 없는 무리의 근심과 다르니라.” 즉 통공을 통하여 죽은이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얻기를 바라는 공동체의 원의의 크기를 소리로서 나타내기 때문에 ‘소리높여’ 기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연도의 가락은 묵상을 하기 보다는 힘찬 청원기도의 분위기이다.
마. 묘지에서
무덤 축복후 즈가리야의 노래, 유가족을 위한 기도를 봉헌한다.
바. 매장이 아닌 경우- 매장 중심의 천주교회 장묘문화에서 화장과 납골 형태로 확산됨에 따라 화장과 납골과 산골시의 예식이 마련되었다.
사. 장례이후
천주교의 장례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미사이다. 장례와 관련된 미사를 위령미사라고 하는 데 이는 다시 장례미사와 기일미사, 연미사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민속과 관련하여 지적할수 있는 것은 탈상과 관련하여 장례후 절차에서 보이는 연미사의 봉헌시기이다. 가톨릭에서는 장례미사후에 3일,7일,30일 등 죽은 이를 위한 연미사를 봉헌할 것을 권장하는데, 이외 우리의 민속적 전통에 따라 삼우제나 사십구재, 백일재를 대신하여 죽은이를 위한 미사가 봉헌되기도 한다.
삼우제는 유교에서 사십구재와 백일재는 불교에서 유래된 의례이다. 삼우제(三虞祭)란 원래 세 번째 虞祭라는 말로 이는 갓 돌아가신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이다. 여기서 우(虞)는 형체가 땅밑으로 돌아간 이후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에 싸여 방황하고 있을 혼령을 편안하게 해드린다는 安神을 뜻하며, 돌아가신 당일, 삼일째 지내는 것을 각각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라고 한다. 그런데 화장(火葬)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식 장례에서는 이 삼우제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함되는 것이 보통이다. 장례일로부터 49일, 100일째 되는 날 올리는 사십구재나 백일재도 마찬가지이다. 사십구재는 원래 불교의식이었는데 유교에서도 지낸다. 보통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절에서 거행하며,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뜻을 지닌다. 불교에서 사십구일은 칠칠일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은 후 7일의 7배의 기간으로 사람이 죽어서 49일간은 중유(中有)에 헤매어 아무대로도 전생(轉生)하지 않고 7대왕에게 그 살아서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고 마지막 염라대왕을 만나는 날이 49일이다. 이때 추선공양을 절에서 해서 명복을 빌어 죽은 사람이 果保를 얻어 성불하도록 초칠일부터 7일마다 공양한다. 7의 7배인 49일로서 그 공양을 마친다. 이 기간을 중음(中陰)이라고 한다. 이렇게 49재나 삼우제는 다른 종교의 다른 신관과 죽음관에 의한 제례이다. 하지만 천주교의 일반신자들은 아직도 삼우제나 사십구재의 연미사라고 미사를 봉헌한다. 이것은 토착화라기 보다는 종교와 제례문화에 대한 혼선이라고 생각한다. 상례문답에서는 이러한 외인의 제례택일과는 다른 기도일을 지정하여 연미사와 연도를 받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문(問) :전해진 기약이 어느 날(장례 기도하는 날)이 어느 날이뇨? 답(答): 죽은 후 3일 7일 30일과 주년이요 추사이망 첨례날이니라.”(상례문답30항)
“문(問):이날에 망자를 위하여 특별히 송경 기도함이 외인의 택일 사망과 같지 아니하냐? 답(答):그렇지 아니하니 대개 이 몇날은 다 특별한 뜻이 있어 정한 것이요, 연고없이 공연히 정한 것이 아니니, 제3일은 오주 예수 사후(死後) 제3일에 부활하사 무덤에서 나오심을 기억하여, 우리들이 망자 장래에 영광의 부활 얻기를 바라고 구함이요, 7일은 천주 천지를 개벽하실 때에 엿새 안에 만물을 조성하시고 이렛날에는 쉬사 다시 내지 아니심을 기억하며, 망자 일찍 영원히 쉼을 얻기를 바라고 구하는 뜻이요, 한 달만은 고교때에 모이세와 혹은 다른 두목을 위하여 기구하던 기한을 따름이요, 주년을 지킴은 예로부터 만국 풍속을 보건대 혹 대사를 당하면 그 주년을 지키는지라, 사람이 괴로운 세상에 나매 생일을 기억하여 오히려 정하거든 하물며 교우 이 괴로운 세상을 떠나고 영원히 즐길 세상에 나는 날을 어찌 더욱 기억하여 지키지 아니리요? 추사이망날은 특별히 성교회에서 정하여, 공번되게 모든 죽은 교우의 영혼을 위하여 기구하는 날이니 이날에 우리도 마땅히 우리 자모(성교회)를 본받아 우리의 기도를 성교회의 간절한 기도에 합하여 천주께 드려 써 우리 기도를 윤허하심을 얻게 할지니라.”(상례문답32항)
6. 제례(祭禮)-유일한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미사
미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이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살아있는 대사제의 현존하는 완전한 의식이다. 따라서 천주교회의 제사는 단하나이다. 따라서“천주교에서는 유교식 제사도 인정한다. 유교식 제사를 지낸다.”는 말은 전적으로 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전례의 중심이 되는 미사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의 참여와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포함한 통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미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제이시며 동시에 흠없는 제물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봉헌되는 가장 완전한 제사이다. 따라서 천주교인 모두는 미사라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한다.
조상신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미풍양속의 개념에서 조상을 기억하고 가족, 친척과 함께 가족애를 다지는 전통적인 한국의 제사의식은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산업화와 핵가족화로 인한 가족애의 저하를 막고 진정한 가족애를 느끼는 목적으로서의 제사는 바람직한 것이다.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에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재확인 한다.”
근본적으로 전통적 유교개념안에서의 제(祭)의 의미는 죽은 조상을 산자(生子)안에 효로서 내재화하는 효의 표현양식이다. 유교의 제사는 따라서 부모애 대한 보은(報恩)의 마음을 고취시키고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기반 둔 무속의 제례는 유교의 조상숭배처럼 효와 같은 윤리적 의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후손의 현세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상신에 대한 공경을 강조한다. 따라서 무속의 제례에 있어서 조상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상신으로서 굿의 대상이 된다. 이는 교회가 이단시하는 샤머니즘적 요소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제례의 문화는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그 박해의 원인이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임금도 모르고 부모의 은덕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사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주권자이신 성부께 드리는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제사였고 그 미사 안에는 모든 이들을 위한 통공과 구원의 힘인 구세주의 몸과 피가 재현되는 살아있는 제사였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천주교를 박해하는 임금에게 보낸 상서인 상재상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신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복을 내려주시고 당신의 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 모태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가지가지 은혜가 이와 같이 한이 없으니 인간의 마땅한 본분은 과연 어떠해야겠습니까? ..아들이 그 집에 살며 그 살림을 이용하면서도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며 그 은덕에 보답할 도리와 근본을 모른다면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고 돌보심 인도하십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유교의 근본이념인 자신의 근본인 조상의 은혜를 알고 효를 행하는 것이 마땅한 윤리적 의무임을 강조하고 천주교의 교리가 이에 대치되지 않음을 역설하였다.
유교의 제사예식이 생명의 원천에 대한 보답인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정신인 효의 실현이며 무속의 기복적 신앙관과 조상신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유교의 제사는 천주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제사의 대상인 신관을 갖고 있다. 이 신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현재로서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 신관에 대한 전적인 동의는 천주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천주(天主)만이 이 세상과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이며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유일의 신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자연물 등은 신이 아니며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사후 존재도 신이 될 수 없고 다만 영혼이란 이름으로 불리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천(上帝)의 지고신적 지위를 전제하면서 모든 자연대상과 사후 인간영혼의 기능신적 역할과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인간 생존의 근원인 천, 대지를 비롯하여 인간생존의 공간과 시간을 규정하는 천체인 일(日)월(月)성(星)신(辰)
이나 양식을 취하는 장소인 산(山)임(林)천(天)곡(谷)등 이고 자기 생명을 출산해 준 조상과 더불어 생명의 원천이 되는 신존재로 인식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신을 생명의 원천으로 보고 원천에 대한 보답으로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실에서 보이는 신에 대한 유교적 인간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감사와 보답이다. 이러한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존재를 크게 유헝화하면 천신(天神),지지(地祗),인혼(人魂)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신들의 세게는 병렬적으로 열거되거나 혼란되는 것이 아니라 기능과 위계에 의한 구조적 질서를 갖는다. 곧 천(天) 혹은 상재(上梓)는 신의 기능을 유일하게 장악하는 자가 아니라 제한된 기능의 역할을 하는 군신(群神)들이 충돌됨이 없이 이 모든 군신위에 군림하고 있다. 유교의 신들은 제사를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심화시키는데 이 신들의 세계도 인간사회의 조직이나 봉건계급질서에 상응하여 관련하는 범위가 한정되었다. 천에 대한 제사는 천자의 고유한 제사 대상이고, 토지신과 곡물신에 대한 사직(社稷)은 제후까지 제사드릴 수 있었다. 공자와 선현은 국가적으로 학교에서 제사되고 조상신은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제사 대상으로 가정에서 가묘(家廟)마다 제사된다. 천주교가 조선사회에서는 왕실이나 국가기구를 통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만 민간에서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전교 되었던 만큼, 일차적으로 가정의 조상제사를 거부하였다.
유교적 신관에 대해 정하상은 상소를 통해 유교의 신관을 천주교의 신관을 토대로 비판하였다. “죽은 사람의 앞에 술과 음식을 드리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 비록 지극한 효자라도 맛좋은 것이라고 해서 부모가 잠들어 있는 앞에 차려 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은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잠시 잠들었을 때도 그렇거늘 하물며 영원히 잠들어 버렸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이는 거짓된 일입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허위와 가식의 예로써 어찌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바른 이치의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인 미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올바른 제례문화의 토착화의 관건이다. 기일(期日)에 음식을 죽은 이를 위해 차리고 나누는 예식은 초대 로마 교회의 예식에도 지방의 풍습으로 토착화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식은 죽은이들에 대한 정성과 추모를 위한 것이지 조상신에 대한 신관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제사를 일년에 몇 차례 어떤 음식으로 어떤 형식으로 차리고 거행하는가보다는 내 자신이 어떤 죽음관과 내세관을 갖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 가정의 명절과 기일의 제사는 유일한 제사인 미사의 정신인 사랑과 통공의 의미를 고유한 미풍양속안에서 발견하는 효와 기도의 신심예식으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제의논쟁 금지법령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큰 시련을 겪었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제사공인’으로 말미암아 유교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알아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1939년의 교서로는 1742년에 금지하고 제의 논쟁을 못하도록 서약시킨 규정을 취소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의 변천과 사상의 변화”로 인해서 사람들은 제사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듣게 되었으며 비록 미신과 같은 동기에서 시작된 풍습일지라도 현재에 와서는 미신의 요소나 위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교황청의 교서로 우리의 제사를 공인받은 것이 아니고 천주교의 교리에 부합되지 않는 신관이나 미신적 요소를 가려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죽음관과 부활관으로 복음화되어 전통문화를 올바로 수용할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방적 취지에 따라 연구하고 활동하는 것이 시급하다. 금지와 허락의 차원에서가 아니고 제례문화에 있어서 참된 예배와 문화적 종교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7. 한국 천주교 상제례문화의 문제점 및 발전적 제언
7.1 연도의 통일화
연도가 한국의 훌륭한 토착화된 상제례문화의 증거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1970년대 한글 성서 번역본들이 나오면서 연도의 가사가 지방마다 바뀌었다. 따라서 연도의 일부가사가 완전히 통일 되어있지 않다. 이것은 전례적인 통일을 이루어 한국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함께 노래로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7.2 올바른 천주교 제례문화에 대한 인식 확충
연미사의 봉헌시기와 탈상과 관련 ‘삼우미사’, ‘사십구재미사’등의 개념은 천주교와는 다른 죽음관과 종교관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이후 3일째의 부활을 기념하는 3일 미사, 천지창조이후 7일째 되는 휴식의 날인 7일을 상징하는 7일 미사, 구약의 성조들의 죽음을 기리는 기간인 30일, 오순절을 상징하는 50일 미사로 바꿔나가야겠다. 또한 ‘천주교에서 유교의 제사를 인정하거나 유교의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개념은 유교의 제사를 공인받은 것이 아니고 천주교의 교리에 부합되지 않는 신관이나 미신적 요소를 가려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죽음관과 부활관으로 복음화되어 전통문화를 올바로 수용할 책임을 지게 된 것이므로 이에 따른 연구와 토착화를 위한 신학적 해석이 절실히 필요하다. “전통제례의 아름다운 정신은 복음의 빛으로 재조명하여 계속 살려나가되, 한국주교회의는 그 표현양식을 시대에 맞게 개선한다.” 천주성교의 상례문답에서 처럼 우리가 죽은 조상을 기리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날만을 가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죽은 조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7.3 영안실의 확충과 공중보건위생 강조의 필요성
외국의 경우에는 장례식장이 모두 종교단체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Funeral Home이라고 한다. 한국에만 각 병원에 장례식장이 설치되어있다. 또한 그나마 병원의 장례식장도 그 수가 적어 고비용의 자연적 원인이 되고 있다.
병원설계의 취지와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죽은자를 추모하는 시설이 아니다. 원래 성당이란 신자들의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는 전례적 공간이다. 현재 서울 교구 217개 본당에 영안실이 있는 본당은 36개에 불과하며 이중 6곳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30개의영안실의 총 안치실은 60개이다. 즉 영안실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핵가족화와 산업화로 현대의 장례문화는 집에서 사절 장례식장인 병원 영안실이나 교회의 영안실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대한 각 종교 단체의 해결의지와 정부의 관심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서 고비용의 영안실 임대료를 내야한다. 서울 교구 전체 30개 영안실 중 타본당도 이용할 수 있는 영안실은 18개소, 비신자인 지역사회의 주민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본당은 5개뿐이다.
그러나 성당내 영안실 건설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협오시설 건립이라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에 있다. 그러나 본당내 영안실을 비신자들에게도 함께 사용하므로써 우리나라의 부족한 장례식장에서 오는 어려움을 함께 해소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 교구의 5개본당은 비신자들에게 영안실을 개방함으로써 영안실 설치의 반대 민원을 해결함과 동시에 이웃사랑과 전교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염사제도 내지는 공중 위생 보건사들의 제도아래 철저한 장례에 관한 공중보건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지만 한국의 장례의 경우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없기에 장례시에 발생하는 병원균의 전염 및 공중보건적으로 우려되는 문제가 야기된다. 사체의 관리와 운반 등을 통한 질병의 감염성은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므로 매우 주의해야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례관련 종사자들과 장례식장들은 사체에서 발생할수 있는 감염의 위험성과 염습실내의 위생에 대한 인식, 감염병의 감염경로 및 대비책에 무방비한 상태이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는 민간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이 오히려 과학적 진실로 자리잡고 있는 인식상황과 의료계의 사망이후 사체 연구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철저한 장례봉사자들에 대한 공중위생보건학적 교육과 영안실의 시설에 있어서도 관리 및 위생, 살균 시설 구비가 시급하다. 예를 들어 영안실을 안치실(시신안치 및 염습 장소)과 참관실을 구분한다. 영안실에 자외선 살균등(殺菌燈)을 설치한다.
7.4 매장중심에서 납골중심의 장묘문화로
한국 천주교회의 장묘문화는 그 동안 매장 중심이었다. “장사는 매장을 함이 원칙이나 화장 또는 기타 방법도 허용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역시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와 비효율적 묘지 관리로 인해 1년의 여의도의 1.2배의 녹지가 매장을 위한 묘지로 개발되며 현재 사설 2000만기의 묘지중 800만기 이상이 누구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묘지이다.
현재 서울 교구에는 20여개의 본당이 공원묘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4곳은 완전히 만장(滿場)이 되었고 연평균 묘지 매장률과 잔여 기를 조사한 결과 2015년 이전에 만장이 되는 묘지는 거의 절반에 육박할 것으로 본다. 이것은 비단 천주교 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좁은 국토의 현실을 감안하면 국가적인 문제이다. 계속되는 매장 중심의 장기 매장 허가제를 유지할 경우 전국토의 묘지화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이제 개인 매장묘는 관리가 어렵게 되고 국토의 효율적 운영에도 저해가 되는 매장중심 문화는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납골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의 공감대는 이미 확산되고 있다. 연령회의 2000년에서부터 2002년 현재까지 지구별선종자 현황조사를 보면 매년 화장과 납골이 증가되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서울시의 1991년 24.2%수준이었던 화장률이 1999년에는 41.9%로 증가하였다. 서울 대교구는 이러한 새로운 장묘문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미 2001년 9월 20일 교구 사제평의를 개최 가족 납골묘를 교구내 모든 공원묘지 안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납골당의 중간 형태로서 ‘가족 납골묘’이다. 현재는 4개의 본당이 납골묘를 추진 중이다.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는 죽음관을 갖고 있다. 납골의 방법에는 화장이나 자연 풍화작용을 통한 육탈(肉脫)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선진 납골시설의 예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지혜와 연구가 시급히 필요하다.
현행 교회 묘지규정에는 교회묘지에는 신자들만 안장하도록 하고 있다. 가족 납골묘를 건설할 경우 가족중 외교인도 포함될 수 있으므로 현행 묘지 규범을 외교인인 가족까지 가족 납골묘에 안장하도록 개정되어야한다. 또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우선적으로 이러한 장기 매장문화에서 납골문화 정착에 앞장섬으로써 신자들에게 좋은 예를 보여야겠다.
부활을 향한 죽음관을 갖고 있는 우리는 산자와 죽은이의 통공을 통한 연대성을 인식하고 성당부지내에 납골당을 설치하여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는 연대적 전례공간으로 성당을 활용하여야한다. 이를 통하여 죽음과 부활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조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멀리 떨어진 묘역을 관리하는 어려움과 늘어가는 묘지공간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성당부지내의 납골당 설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성당과 그 부지내 납골당 설치에 대한 교회법적인 조항이 미흡하다. 성당내에서의 장사(葬事)에 대한 지시는 다음의 1개조에 그친다.
“성당 안에는 시체들(cadavera)을 매장하지 말아야 한다. (In ecclesiis cadavera ne sepeliantur) 다만 고유한 성당안에 매장되는 교황이나 추기경들이나 교구장들에 관하여는 퇴임자들까지도 예외다.(교회법 1242조)” 현행 국가의 장사 및 묘지 등에 관한 법에는 어떠한 시신도 건물내에 매장할 수 없으며 허가되지 않는 묘지 이외에는 매장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묘지법도 매장의 경우 동일하다. 이것은 매장시의 부패되는 병원균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다. 현재 한국의 묘지법으로는 한국내에서 추기경들이나 교구장들도 성당내에 매장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법인 경우 납골인 경우에는 신고를 통해 일반 건물내(종교부지, 일반사택의 부지 등)에도 그 누구의 납골도 설치 가능하다. 실제로 자신의 집안 뜰에 납골당을 만든 신자도 있다. 단 일반사택내는 민법상 친족관계에 있는 자만 가능하다. 납골의 경우에도 녹지지역중의 법으로 선정한 납골 금지지역, 상수도 보호지역, 문화재보호지역, 지정고시 접도구역, 군사보호시설등의 지역에는 제한된다.
그러면 성당내 납골당 설치는 가능한 것일까? 교회법은 성당내 납골(reliquiae)안치에 대해서는 금하는 규정을 갖고 있지 아니하다. “성당 안에는 시체들(cadavera)을 매장하지 말아야 한다.”에서 시체들(cadavera)은 법용어안에서 교회법뿐 아니라 우리나라 현행법과 외국의 법에 있어서도 유해(reliquiae)와는 구별된다. 유럽교회의 경우 유해를 모신 성당은 많이 있다.
또한 현행 성당과 그 부지내의 납골당을 설치할 경우의 규범들이나 운영에 대한 규범은 개별법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성당부지내의 납골당의 거룩한 성격을 보호하고 올바른 운영을 위한 전례적이며 합리적인 규범들을 교회는 시급히 개별법으로 정해야 하겠다.
우리는 과연 천주교의 죽음관은 부활을 향한 문이므로 삶과 죽음은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인의 죽음관을 혹시 신학적 명제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은가?
사실 성당은 산자만의 공간인 듯 보인다. 죽은자를 위한 공간, 죽은자를 기억하는 공간은 저만치 미루어져 있는 듯 보인다. 어느 신학자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가장 불행한 것은 죽음을 묵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더 불행한 것은 죽음을 묵상하려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산자의 주님도 되시고 죽은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성당은 산자와 죽은자가 통공을 통해 연대성안에서 만나는 장소이며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는 곳이다. 따라서 성당은 산자의 성당이며 동시에 죽은자의 성당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과 삶을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전례적 공간으로서의 성당을 만들어 가야한다.
성공회의 주교좌성당의 납골당은 종교부지의 납골당의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이 성당은 죽음을 묵상하고 죽은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주교좌 성당 납골당 이후에 성당내 납골당 건립을 추진한 성공회 천호동본당은 민원의 항의로 무산되었다.
그것은 사실 납골당과 영안실, 화장장의 건설과 확대는 모든 국민이 원하면서도 우리 마을, 내 집앞에 설치하는 것은 반대하는 님비 현상(Nimby) 때문이다. 서울 대교구의 구로본동 본당(주임신부 이충렬)은 2001년부터 성당내에 납골당과 영안실을 설치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먼저 본당내 신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80%이상이 본당내 납골당 설치를 찬성하였다. 그 주요 이유로는 신자 자신들이 성전에 묻히고 싶고 자손으로서 조상을 성당에서 기리고 죽음에 관해 묵상하며 납골은 관리가 효율적이며, 자신의 삶의 터전과 가까운 성당에 납골함으로써 자주 조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본당은 님비 현상(Nimby)을 나타내는 민원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주민들에게 영안실을 개방하고 납골당의 일부를 주민들에게 할애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가톨릭의 보편성을 이제는 이러한 장묘문화안에서 드러내야할 시대적 요청을 교회는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방적 운영은 전교에 큰 효과를 거두리라 예상된다.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여야 하는 신앙인이다. 성당의 납골당이나 성당 묘지의 납골묘의 유해역시 영구한 보존이 아니라 결국에는 거룩하게 축성된 교회의 땅으로 뿌려져 진정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우리의 유해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의 죽음은 부활을 향한 아름다운 무지개로 또한 피어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대의 요구와 환경 그리고 문화에 적응하며 우리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전통적 효의 정신이 담긴 아름답고 합리적인 상장례문화를 이룩하기 위해 다각적인 연구와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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