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말씀편지*
※알리는말씀 :
- 2월 마지막주일이 사순 제1주일이라 그 날 복음을 선택했습니다.
마르1,12-15인데, 짧지만 대단히 속내가 깊고 풍성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완전히 독립된 두 단락으로(1,12-13 + 1,14-15)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 말씀편지는 독립된 두 개의 거룩한 독서를 한 번에 보내드립니다.
그러나, 각 그룹에서는 둘 다를 선택하시기 보다 앞의 하나만(1,12-13) 선택하셔서
함께 기도 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나머지 것은 개인이 각자 기도하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보내드리고 있는 말씀편지는 거룩한 독서에서 탄생되어 거룩한 독서를
위해 작성된 일종의 성경주해입니다. 그래서 마냥 쉽게 읽히지만은 않습니다.
이해하기 까다롭게 보이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개인으로 먼저 이 말씀편지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신 다음 그룹으로 거룩한 독서를 하시든지,
아니면 그룹으로 하시고 나서 개인으로 더 심화 하시든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편지는 주로 개인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거룩한 독서를 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작성되었기 때문입니다.
I. 마르 1,12-13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 읽 기 〉
1. 문맥
세례직후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몰아내)신다. 그분의 세례는 무엇을 보여 주는 사건인가.
그것은 예수님 인생의 근본 선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하느님의 아들’로 살겠다는 선택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사람들의 형제’로 살아야만 한다. 다시말해 ‘사람들의 형제’가 될때만 ‘하느님의아들’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형제가 된다는 말은,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히브2,17) 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그분은 다른 죄인들처럼 줄을 서서 요한의 세례를 기다리시고, 마침내 요르단 강물 속에(사람들의 죄속에!) 잠기신다.
죄를 모르시지만 우리를 위해 ‘죄’ 자체가 되신 것이다(2코린 5,21). 이렇듯, 사람들의 형제로 살겠다는 선택은 하느님의 아들로 살겠다는 선택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이런 아드님의 선택을 보시고, 당신을 쏙 빼닮았기에 너무도 마음에 들어 하신다(2,11).
그런데 이런 근본선택은 반드시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만 그 지속과 실현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분은 ‘공생활’로 곧바로 접어들지 않으신다. 오히려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께서 곧바로그분을 광야로 “몰아내신다.”(12)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받은 하느님 아들(그리고딸)로서의 사명을 실현하는 활동으로 곧바로 뛰어들 수 없다.
우리 역시 그분처럼, 그리고 그분과 함께, 광야의 여정을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알아듣고 걸어 나가야 한다.
광야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의 자세, 곧 ‘사람들의 형제(자매)’로서의 자세를 뼈 속 깊이 새기고 육화하는 법을
배우는 훈련과 식별과 정화의 장소이다.
2. 주요등장인물
성령 - 내보내다(12) ; 사탄 - 유혹하다(13) ; 예수 – 광야로 내몰리고 유혹 받다 ;
들짐승들 – (예수께서) 함께지내시다 ; 천사들 - 시중들다(13)
- 예수님 안에 우리 각자까지 포함되어 있음도 감안 한다면, 이 짧은 대목 안에 실로 인간역사의 모든 등장 인물이
총 출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시공간적배경
광야, (세례) 직후, 40일(동안)
-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배경인 낙원과 광야, 그리고 약속의 땅을 상기하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그분은 ‘새아담’으로 드러나신다는 사실이다.
옛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낙원에서 광야로 쫓겨났다면, 새 아담은 성령의인도로 광야에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신다.
그리하여 거기서 당신의 모든 형제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다시 잃어버린 낙원으로 인도하신다.
다음으로, 그분은 또한 ‘새모세’로 드러나시기도 한다. 홍해의 물을 통과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출애굽의 여정을 완성하도록 인도했던 모세처럼, 예수님 역시 새 이스라엘이 통과해야 하는 광야의 여정을
인도해 주신다. ‘광야’는 약속된 땅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만하는 ‘필수코스’이다.
한편, 광야에선 인간의 내면에서 목소리를 들려주는 두 주인공은 성령과 사탄(악령)이라는 두 ‘영’이다.
인생이란 광야에서, 사람은 끊임없이 ‘두개의 깃발’ 즉, ‘어린 양의 깃발’이냐 아니면 ‘사탄의 깃발’이냐를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성이냐시오의 <영신수련>).
‘형제’가 되게 하는 ‘아들’의 영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나만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 ‘노획물’로 독점하려는(필리 2,6)
사탄의 영, ‘분열자’의 영으로 살 것인지, 우리 일상의 광야에서 끊임없이선택해야만 한다.
〈 묵 상 하 기 : 구절묵상 〉
“그(세례)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12) :
1. 성령 : 이 성령은 요르단강에서 받은 세례 때에 예수님께 내려오신 그 영, 곧 ‘아들의 영’이다. 그분이 사람들의 ‘형제’가 되겠다고, 그래서 그들과 같아지겠다고 선택했을 때 드러나신 바로 그 영이다.
2.“내보내다” : 이 성령이, 세례를 받으신 직후의 예수님을 그 즉시 광야로 “내보내신다(ekballo)
.” ekballo 동사는 원래 “밖으로 던지다, 쫓아내다, 내몰다”는 강한 뉘앙스를 지닌말이다.
친교(koinonia) 그 자체이신 성령께서 임하시면 누구든지 ‘자기’라는 이집트의 바깥으로 던져지게 된다.
자기 스스로를 향해 있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있던 사람이 비로소 자기 바깥으로 나와(흔히 ‘탈혼’이라 번역되는
‘엑스타시(extasy)’란 말은 원래 “(자기) 밖으로ek – 나와있음stasis”을뜻한다), 남을 향해, 남을 위해 삶의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된다.
3. 광야 : 그리하여 사람은 비로소 ‘타자’(그중 첫째가 하느님!)를 향해 나아가는 먼 여정, 곧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광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지, 그래서 주님께 얼마나 의존해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체험하는장소였다.
그러나, 바로 이 가난의 체험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충실하신지도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 나아가 광야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발견한다(신명 8,2). 이기심과 탐욕과 집착은 광야에서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못하고 그벌거벗은 모습을 솔직히 드러내게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히브 4,12) 장소가된다. 이런 정화와 식별의 여정인 ‘광야’를 거쳐야만 참으로 ‘나’라는 파라오로부터 자유로운 땅, 약속의 땅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서 땅은 비로소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토마스홉스)의 장이기를 멈추고, 사람들은 서로 ‘경쟁자’ 혹은 ‘늑대’가 아니라 서로를보살피는 ‘형제’요 ‘목자’로 살게 된다.
결국 광야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 예수의 모델에 따라 사람을 경쟁자-늑대에서 형제-목자로 형성하시는 용광로
(“사랑의불가마”!)이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3a) :
1. 40일 : 모세에게 주신 계시와 엘리야의 여정을 상기시키는 숫자이다(출애 34,28 ; 1열왕 19,1-8). 그리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낸 기간도 40년으로, 40년은 한세대, 혹은 한사람의 생애 전체를 상징할 수 있는 숫자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의 짧은 피정 혹은 ‘광야체험’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전 생애가 끊임없는 유혹과 식별의 영적투쟁이었다는 말이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실 이어지는 그분의 전 ‘공생활’ 기간동안 악마는 호시탐탐 그분을 유혹할 것이며, 특히 겟세마니는 예수님 영적투쟁의 정점을 이룬다(14,32이하).
2. 사탄 : 사탄이 움직이는 방식은 창세 3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우선 그는 사람으로하여금 자기한계를 보고 슬픔을 느끼게 하며, 하느님이 자기 적수인 것처럼 느끼게 하여 그분께 신뢰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선을 악처럼, 악을 선처럼 보게 한다. 마르코에따르면 그는 말씀을 훔쳐가는 자다(4,15). “거짓의아비”(요한 8,44)인 그의 거짓말이 모든 악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듣는 말대로 살고, 그가 듣는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그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지만, 사탄의 말을 들으면 사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거짓의 아비”가 되고 말것이다(요한 8,44). 사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런 존재로만 생각할(영화 ‘엑소시스트’처럼) 필요는 없다. 하느님의 방식대로 듣고 보지않고 “사람의 방식으로만 생각”할 때, 으뜸 제자요 첫 교황인 베드로마저도 사탄이되었다(8,33).
3. 유혹: ‘유혹하다’(peirázo)는 동사는 그 명사형 peîra에서 유래한다. 이는 ‘시도, 실험체험, 지식’ 등을 동시에 뜻하는데,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횡단하다”는 뜻인 peíro에서 나온 말이다. 체험으로 아는 것, 그것은 늘 위험을 수반하는 일종의 모험일 수 밖에 없다. 체험, 모험, 위험… 삶은 바로 이런 것들로 늘 가득차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직면할 때에만 우리는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전문가’가 될 수 있게 된다. peíro 동사는 이 모든것(위험, 체험, 전문가)을 다 뜻하는 말이다.
결국, 유혹을 받는 일 자체, 그것은 죄가 아니다. 유혹에 자기 마음을 내어주고 그 음성에 따라 발길을 옮기는 순간부터 죄가 시작된다. 자기가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기 안에 어떤 영이(아들의 영과 사탄의 영 가운데) 자기를 움직이도록 자극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야 말로 영성생활의 출발점이다.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대단히 어두운 사람,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모르는 사람이 된다.(루카 23,34)
그러므로 유혹받는 일, 그 유혹과 싸우는 일은 피할 수도 없을뿐더러 좋은 것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삶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더이상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이미 넘어져 누워있는 사람뿐이다.
두 발로 서있는 사람은늘 넘어질 위험에 처해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이런 위험을 무릅써야만 중요한 것을배운다.
모든 인간관계도 상처를 주고받는 위험으로 가득차 있다. 상처받는 일이 두려워 관계를 마다하고 자기 속에 갇힌 사람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지는 모르나,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하는 사랑의 기쁨 역시 모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불행, 진짜 비참함이다. 인생전체가 이런 모험과 위험을 무릅쓰고 참된 관계 맺기를 배워야만 하는
수련과 수행의 장, 곧 광야일 수밖에 없다.
마르꼬는 다른 두 공관 복음서들처럼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혹은 한마디로, 종의 십자가를 마다하고 아들의 영광만 미리 얻으려는 유혹, 십자가의 길을통하지 않고 하느님 아들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려는 유혹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주, 표징을 통해 치유를 얻은 이나 마귀들에게, 당신 정체를 밝히지 말라 함구령을 내리셨다. 사람들이 그를 화려한 영광과 권력의 메시아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이 유혹은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
3.1. “주인공의식” : 자기의 ‘성공’을 하느님의 나라와 혼동하는 것. 인기의 절정에 있을 때, 예컨대 1,37에서 사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는 말을 들을 때 예수님 안에 이런 유혹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딴 동네로 가자”(1,38)하고 말씀하신다.
3.2. “세상적 권력” :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위해 세상의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유혹. 목적은 올바르되 수단이 틀린 경우로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말은 언제나 맞다. 하느님 나라는 힘이 아니라 ‘무력함’으로 이루어진다.
형제들을 섬기기위해 자기 삶을 내어놓는 이(주인이아니라종이!)가 지닐 수 밖에 없는 무력함, 사랑하는 이가지닐 수 밖에 없는 무력함으로 말이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직후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는 장면에서 그분이 이 유혹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6,45).
요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던 것이다(요한 6,15).
3.3. “종교적권력” : 자기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기보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는유혹.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겟세마니에서 겪으셨다(14,32 이하). 이 유혹에서 지게 되면내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게 순종해야 한다.
내 발걸음이 그분뜻에 맞는 것 인지를 살피기보다, 내가 걸어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분이 함께 걸어가시고 축복해주셔야 한다고 믿는 것은 열심한 사람들, 예수님과 아주 가깝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들도 종종 빠지는 유혹이다.
이들이 문득 예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탓할 때, 그분은 “너희가 날 따라 다녀야지, 내가 왜 너희를 따라 다녀야 하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의당 함께 따라올줄 알았던 예수님이 없자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성전에서 그분을 찾은 부모님에게 그분이 하신말씀(“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모르셨습니까?”)도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루카 2,49).
이 세 유혹 모두가 수난예고를 부인하는 베드로에게서 그대로 육화 되었다.(8,31이하)
3.4. “좌절” : 이 세 유혹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주님이 걸으신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에게 오는 가장 심각한 유혹이다. 늘 악이 이기고선 이 망하는 꼴을 보면서 그는 “십자가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다.
선은 왜 늘 힘도 없고 효력도 없으며 실패하기만 하는가. 그러나 이런 유혹을 겪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언해준다. 이런 정화의 과정, 훈육의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 사생아”일 것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한다(12,8). 더 나아가, 우리가 겪은 이 유혹과 고통을 몸소 겪어 아시는 분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바로 이 때문에 고통속에서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차 있을수 있다(야고 1,2이하 ; 1베드 1,6이하).
3.5. 다른 두 공관복음은, 순서는 다르지만 전체로 보면 같은 세가지 유혹에 대해 전해준다(빵 – 권력 – 표징).
이것들은 각각 ‘물질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세 차원에서의 소유를 상징한다.
이 세 차원 모두에서 사탄은 ‘소유’와 ‘독점’을 당연하고 좋은 것이지 않냐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유혹은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탐욕), 둘째 유혹은 사람에 대한 소유욕을(권력), 셋째 유혹은 하느님에 대한 소유욕(교만)을 뜻한다고 볼 수있다. ‘육의 욕망’ - ‘눈의 욕망’ –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이라는 1요한 2,15-17의 분류도 결국은 이와 부합한다. 한마디로 유혹자는 물질과 사람과 하느님에 대해 ‘소유주’로서의의식을 부추기고, 예수께서는 철저한 ‘아들’ 의식(곧 ‘형제’ 의식으로서, 소유와 독점이 아니라 나눔과 선사의 정신)으로 이에 대응하신다.
우리 일상 전체가 얼마나 이런 ‘소유주의식’과 ‘아들(딸) 의식’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되어있는지 우리도 체험으로 알고있다. 타자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자는 ‘흡수통일’(혹은 ‘분단고착’)을 부추기고, 후자는 ‘상생’과 ‘공존’을 지향한다고 말해 볼 수도있을 것이다. 한가지 더 지적할 것은, 세 유혹 모두를 다 사탄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런선택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목적이 좋으므로, 이런 수단도 괜챃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기가 십상이다. 선한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큰 악은 다 결국은 ‘좋은목적’을 위해 시작된 것이다),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선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3b) :
1. 들짐승들과 함께 계시다: 낙원에서 아담은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첫 인간이 창조계와도 친밀히 맺고 있던 친교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새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이 애초에 창조계와 맺고 있던 이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신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면 온 창조계와도 모종의 ‘혈연관계’에 있음을 깨닫게된다.
그래서 태양도 형님이 되고 달도 누님이 된다(성프란치스코).
이리하여 광야는 낙원이 된다.
2. 천사들이 시중들다 : 천사들이 시중든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정확히 세례 때에 하신 그 선택, 즉 사람들의 형제요, 종이 되겠다는선택에 충실하신 그만큼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래서, 원래 하느님의시중을드는천사들이이제아드님의시중을드는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처럼광야의 여정에 충실한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하느님은 결코 홀로 버려두지않고 당신 ‘천사’들을 보내 시중들게 하신다. “시중든다”는 말, “섬긴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하느님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기는일, 낮고 보이지않는 곳에서 하는 섬김의 노고에 충실한 이는 천사들로부터, 아니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섬김을 받는다. 섬김에 있어 깨어있는 종들은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그분으로부터 식탁에서 섬김을 받을 것이다!(루카 12,37)
그분은 지상에서 만종-웨이터이셨던 것이 아니라 영광의 왕으로 다시 돌아 오실때에도 종-웨이터이시다. 우리 역시, ‘웨이터장’이신 그분을 따라 좋은 ‘웨이터’가 되어 섬김이라는 노고의 광야에 충실히 머무를 때,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실 것이다.
〈 되 새 김 〉
- “성령께서는 곧바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
- …
〈 기 도 〉
- 삶의 수많은 유혹과 시련 한가운데서도 늘 하느님의 따듯한 보살핌의 손길과보호를 발견할
힘을 청하기.
- 스스로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목소리’들에 민감하게 깨어 있을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 그 목소리들이 어디서부터 오는지(아들의 영인지 사탄의 영인지)식별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 식별한 후에, 그것이 사탄의 영이라면 동의하지 않고, 성령의 것이라면 동의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 이런 수고로운 작업을, ‘나’라는 파라오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와지는 여정에서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알고 껴안을수 있는 힘을 청하기. 그리하여 점점더 하느님의 ‘아들’이요 사람들의 ‘형제’인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 하느님의 방식과 선이 무력하고 실패를 겪는데 대해 좌절- 실망- 분노하지 않고 평화를 간직하며
항구히 걸어나갈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 …
유익한 구절들 (미드라쉬)
창세 3,1이하 ; 신명 8,1이하 ; 시 91 ; 1코린 10,1-13 ; 히브 2,17이하 ; 히브 12,1-12
II. 마르 1,14-15
“때가 찼다”
〈 읽 기 〉
1. 문맥
요한에게 받은 세례를 통해 당신 인생의 근본 선택을 하신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심으로써 이 근본 선택을 실천하기 위한 필수 과정을 거치신다.
하느님의아들로 사시기 위해 사람들의 형제로 사시는(연대) 이 근본 선택의 실천을 위해 그분은 잘못된 방편들(마귀의유혹이잘보여주는)이 아니라 참으로 당신의 원래선택에맞갖은 방법만을 선택하신다.
이점을 분명히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첫 네마디는,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근원적 부르심이다. 이어지는 단락은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
곧 제자들의 추종이고(1,16-20), 그 뒷단락(1,21-28)은 이 응답-추종의 결실이다.
2. 관찰
2.1. 시공간적배경 :요한이잡힌(paradidomi동사) 뒤, 갈릴래아
2.2. 예수께서선포하신것 : “하느님의 복음.”(14) 이 복음은 15절에서 구체적으로 다음 네마디로
표현되고 있다.
2.2.1. “때(kairòs)가 차서(pleroo동사)”
2.2.2. “하느님의 나라(basileía)가 가까이 왔다.”
2.2.3. “회개하고(metanoéo)”
2.2.4. “복음을 믿어라.”
이 짦은 네마디는 사실상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복음설교 전체의 요약이다.
이 네마디는 또한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할지를 알려주는 열쇠요,
그래서 렉시오디비나의 원리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것은, 복음에서 이야기하는바를
내가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때가찼다”) 깨닫는데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여기와”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나아가 “복음을 믿는”다면, 모든 복음단락은 지금 이 자리의 바로 나를
위한 말씀이 되고 바로 그렇게 나에게 실현된다.
성경은 이런 일이 생기라고 기록된 것이다!
〈 묵 상 하 기 :구절묵상 〉
“요한 잡힌 뒤에”(14)
구약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갈망하던 요한은 마침내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리스도 앞에서 작아져야 하노라고 말하던그 가(요한 3,30) 이제는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잡히다’는 paradidomi동사(“넘겨주다, 선사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심,
넘겨지심” 뜻할 때 수도 없이 쓰이는 말. 9,31; 10,33; 14,21.41 등등)의 수동형으로, 요한이 수난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닮아 있음을보여준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기에 결코 ‘좋은때’라고 볼 수는 없다.
“갈릴래아에 가시어”(14)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란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장소’ 역시(‘때’와마찬가지로)인간적인견지에서 결코 ‘좋은 장소’라고 볼 수는 없다.
갈릴래아는 사마리아처럼 완전히 이방인의 지역으로 취급받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방인들과
그종교에 ‘오염’된 곳이라 여겨진 동네였다.
그래서 당대 정치 경제뿐 아니라 종교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예루살렘과는 여러모로 큰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라시고 일도 배우셨으며, 나아가 당신의 복음선포를 시작하셨다.
마르코 복음서의 마지막(16,7) 역시, 부활하신 분을 만날 장소가 바로 이 갈릴래아임을 말하면서
제자들을 다시금 이곳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갈릴래아는 ‘일상’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우리 역시
바로 우리의 ‘갈릴래아’, 곧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는데 ‘좋은 때’과 ‘좋은 곳’이 따로 없다. 가장 좋은 때는 늘 ‘지금’이고, 가장
좋은 장소는 늘 ‘여기’일 따름이다. ‘갈릴래아’는 바로 이를 뜻한다.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4)
복음서 시작부분(1,1)을 보면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달리말해 복음은 바로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분이기도하시거니와
선포되는 복음 자체이기도 하다.
그분은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이 지닌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뒤엎으시며 그분의 가장 내밀한 얼굴을
보여주신다(요한 14,9). 마찬가지로, 그분은 말씀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말씀’ 자체이시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다(히브 4,12). 바로 이때문에, 성경을 펼칠때마다
예수님께서 늘 나를 만나러 오시는 것이다.
“때가차서”(15)
예수님과 함께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다. 그래서 바로 ‘지금’이 ‘그때’다.
예언자들이 기다려온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는 사람들의 형제가 되신 예수님의 선택 안에서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분이 이제 역사의 분기점이 되신다.
이분으로 인해 이제 사람의 기다림과 갈망은 ‘지금’ 현실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벌려 하신 첫 말씀이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의 중요성이다.
내 인생을 위해, 내 행복과 구원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지금이야말로
내가 결정을 내려야하는 유일한 순간이다”라고 깨닫는 순간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따로 없다.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2코린 6,2). “지금이 바로 그 때다”(요한 4,23).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흐름과 함께 순환되는 시간을 일컫기 위해서는 ‘크로노스 chronos’란
말을 쓴 반면, 이런 ‘결정적순간’을 뜻하기 위해서는 ‘카이로스 kairòs’란 말을 썼다.
내 인생의 카이로스는 늘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느님을 향해 몸을 돌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내 안의 온갖 죄와 부족함도 ‘지금’ 하느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될 수 없다.
내가 준비되어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한량없고 조건없는 자비로 늘 준비되어 계신다
. 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따듯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계신다. 내가 깨끗해야 그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분을 만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깨끗해진다.
바로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이다. ‘지금’ 그 분께로 돌아서면, 우리는 과거와 미래라는 사슬에서도
비로소 놓여난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으로서(‘기억’ 속에만있는 것으로서 – 성아우구스티누스) ‘후회’의 원천이 되기 십상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아니한 것으로서(‘기대’ 속에만 있는 것으로서)
‘염려’의 원천 이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되는 후회와 염려로 소중한 ‘지금’,
유일하게 내게 주어진 현실인 지금을 낭비하며 지내는 때가 얼마나 잦은가. 후회는 ‘이미’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요, 염려는 ‘아직’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인 것을. 복음은, 과거를(그아픔을) 잊어버리도록 아편을 제공해주지도, 미래에 대한 헛된 꿈을 꾸도록 근거없는낙관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복음은 단지 지금이라는 이 결정적 순간을 그 충만함 그대로 잘 살도록, 꼭꼭 깨물어 그 끝까지 맛을
다 음미하도록 해 줌으로써, ‘지금’에 오롯이 깨어있는 일자체가미래를 위한 가장 나은 준비가 되도록 해준다. 나는 과거에 씨 뿌린 바를 지금 수확하며, 과거에 수확한 바를 지금 씨 뿌린다. 미래에는 지금
이렇게 내가 뿌리는 씨를 틀림없이 거두게 될 것이다.
모든 복음 단락은 ‘지금’이 바로 나를 위해 때가 찼음을 알아차리는 바로 그 순간 나에게 실현되고 현실이 된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단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나를 위해 실현시키시는 것이다. “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6,34)의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바로 이순간 나를 위해 실현되는 말씀이 되고 만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5)
“때가 찬”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 전체가 사실은바로 이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enghizo 동사는 “임박했다, 코 앞에 다가왔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나라 basileía’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곳으로서, 그분 뜻대로 사람들이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들과 친교를 누리며 사는 곳이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서로 형제자매가 되어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곳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이런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실현되었다. 아니,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을 위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위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사람을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실현시키시고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 역시
남김없이 채우셨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하느님과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더이 상 멀리
있지 않으며,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왕국은 세상왕국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세상왕국은 ‘우리’의 결속을 위해 끊임없이 ‘타자’들을 만들고 그들을 배제해 나간다.
이 왕국은 경쟁과 견제, 폭력과 탐욕으로만 지탱되는 왕국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왕국,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형제자매임을 알아보고 서로 보살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며 조화로운 상생과 협력, 우애와 환대, 용서와 화해가
늘 살아숨쉬게 한다. 이 나라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지만 동시에
우리의 자유로써 건설해 나가야할 책임도 뒤따른다.
우리가 읽는 모든 복음단락은 이 하느님 나라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선사해 준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청해야하고 받아들여야할 선물인 것이다.
“회개하고”(15)
‘회개하다 metanoéo’ 동사는 생각-정신-관점을 바꾸고, 그리하여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되돌아오다’를 뜻하는 shub과 ‘뉘우치다’를 뜻하는 nicham동사가 이에 상응하는
말들이다. 예수님의 선포는, 우리편에서 그 즉시 응답해야 할책임이 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지만, 거기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내 자유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회개는 그분께로 몸을 돌려서, 그분께서 걸어가시는 같은 여정을 선택해서 걷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내 발걸음과 그분의
발걸음이 합치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며 뒤따르는 출애급의 여정, ‘나’라는 파라오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자유의 나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긴 여정이다.
그래서 회개에는 한 평생이 걸린다. 베네딕도회수도자들이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io morum’을
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수도승다운 생활’로 번역되었지만, 끊임없는 삶의
전환과 전향을 동시에 뜻할 수 있는 말이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회개하도록 초대받는다.
성경은 늘 자기 삶을 비판적으로 살피도록 한다. 성경독서는 그래서 늘 ‘비판적독서’여야 한다.
이 비판은 남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자신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어야 한다.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회개시키는 것이아니라 무엇보다 나의 회개를 위한 것이다.
“복음을 믿어라.”(15)
이미 말했지만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다(1,1). 믿는다는 것은 단지 복음서의 말씀을(혹은교리를) 지성적으로 인정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마귀들도 믿고 신앙도 고백한다(1,24; 5,7; 야고 2,19 등).
믿음은 무엇보다 먼저 말씀하시는 분께 자기를 맡기는것, 의탁하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믿음은,
신앙생활이 내 삶에 주는 효용과 이득을 믿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이 잘 되리라”고 믿으며…)
중요한 것은 그분과 내가 맺는 관계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내 생명으로 모시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분이 걸어가신 바로 그 여정을 나도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귀’이며, 그분을 뒤따르는 ‘발’이며, 그분을 뵈옵는
‘눈’이며, 그분을 만지는 ‘손’이며,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는 ‘심장’이다.
복음서 단락을 읽으면서, 나를 예수님께 맡기고 그 단락의 이야기가 내게 선사하고있는 바로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청할때, 나는 복음을 믿는것이다. 바로 그때 나는 회개한 것이며, 나에게 때가 찬 것이다. 그래서 그 단락이 전하는 하느님나라의 그 측면이 내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 되 새 김 〉
- “요한이 잡힌 뒤에”
- “갈릴래아에 가시어”
- “때가 찼다”
-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 “회개 하여라”
- “복음을 믿어라.”
- …
〈 기 도 〉
- 일상생활의 바로 이 장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주의깊게
깨어 있기를 청하기
- 거룩한 독서를 위해 성경을 펼칠때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나에게 실현될 수 있도록,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은혜를 청하기
- 그리하여 나 자신이 이 복음을, 내가 경험한 바로 그 말씀의 능력을 통해 전 하며,
나 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도 하느님의 나라가 퍼져나가는 통로가 될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 …
유익한 구절들 (미드라쉬)
로마 13,11-14 ; 2사무 7,1-16 ;
판관 9,7 이하 + 1사무 8,1 이하(하느님 왕국과 너무도 다른 세상 왕국) ;
느헤 9,1 이하 ; 마태 6,25-27
( 앞 부분 마르 1, 12-13 )
( 뒷 부분 마르 1, 1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