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추억의 명승부(3) 94~95 농구대잔치
2003.3.9 일요일
추억의농구디비기우원회
(출처는 딴지일보 입니다.)
반화넬 - 2003년 글이라, 현재 현황과 다소 다른부분들이 있습니다.참고해서 봐주세요.
드디어 94~95 대회를 추억할 차례가 되었다. 이 대회를 추억하자니 본인부터 마음이 그립다.
바로 이 대회야 말로 9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들이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대회였을 뿐 아니라,
최후의 우승컵을 놓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명승부가 이어진 박진감 넘치는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대학VS실업의 대결구도로 재편된 농구대잔치 판도에서 대학은 연세대-고려대 양강 체제가 뿌리를 내렸고,
실업은 여전히 기아의 독주 아래,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한 삼성, 상무에서 주전들이 복귀한 SBS가 2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럼 94~95 농구대찬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보겠다.
정규리그의 판도- 대학강풍과 실업쇠퇴
94~95 시즌은 전 대회의 조별리그를 폐지하고, 실업(8개팀)과 대학(6개팀)이 한데 모여 풀리그(13경기)로
승자를 가리는 단순명료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초반 제일 먼저 치고나온 팀은 역시 전년도 우승팀 연세대였다.
시즌 전 대학연맹전에서 탄탄한 수비로 우승을 차지했지만, 문경은의 공백으로 인한 득점력 저하로 70점을 넣기에도
허덕이며 우려를 자아냈으나, 막상 농구대잔치가 시작되자 연세대는 용가리-이상민의 환상 투톱을 내세워 팀 득점과
리바운드의 양대 부문을 독식하며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불과 2년차의 용가리는 지난 시즌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공격력으로 시즌 초반부터 득점, 리바운드, 블록 등
각종 개인 타이틀에서도 수위를 달리며 연세대의 연승가도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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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연세대 |
고려대의 성장도 눈부셨다. 그 중심에 있었던 선수는 역시 1학년생 하마(현주엽).. 쌍철판 등 우수한 선수들을 대거 보유하고도
기복심한 경기력을 보이던 고려대는 하마라는 확실한 에이스를 얻으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
센터겸 포워드로 활약하며, 데뷔 첫해부터 득점-리바운드에서 두 자릿수의 맹활약을 보인 하마는, 전년도까지만 해도 전력에
심한 기복을 보이던 팀에 안정감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팀 선배 전희철의 활동폭을 넓혀주어 팀의 공격력을 향상시켰다.
또한 당시에 하마는 연세대 용가리와 맞짱을 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수로 거론되기도 했다.
대학 양강의 무패 행진이 이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실업의 우승후보들은 의외의 부진을 거듭했다.
물론 기아, 삼성 등 강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아는 정규리그에서 고려대의 연승행진을 저지하며 '역시 대학세를 누를 유일한 대안'으로 인정받는 듯 했지만,
곧이어 중위권 대학팀인 한양대, 또다른 우승후보 연세대 등에 계속 일격을 당하며 정규리그 우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기아의 일시적인 부진은 한기범, 김유택 등 골밑의 노쇠화와 교체 멤버의 부족에서 벌어졌다.
80년대 최고센터 김유택은 수년간 아성을 지켜온 리바운드 수위 다툼에서 일찌감치 밀려나며 후배 조동기와 출전시간을
조율해야 했고, 베스트5와 벤치 멤버의 기량차가 큰 기아는, 리그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주전들에게 계속 풀타임 경기를
의존해야 했다.
경기 외적으로는, 허재의 부친이 건강 이상으로 수술을 받게 되면서 허재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정규리그 중반까지
부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기아의 부진이 잠깐의 컨디션 난조 정도라면, 삼성은 정규리그 내내 완전 만신창이가 되어야만 했다.
지나치게 외곽에 치우친 팀컬러는 공수의 불균형을 가져왔고, 문경은-김현준 쌍포의 동반 부진은 팀 전력의 기복으로
이어지며 삼성은 정규리그에서 대승과 대패를 거듭하는 갈짓자 행보를 펼쳐야 했다.
시즌 전 우승후보라는 닉네임이 무색하게, 개막전에서 한 수 아래의 상무에게 시종일관 끌려다니며 완패한 것은
불행의 서곡이었다.
기아자동차를 오랜만에 이기며 잠시 원기회복하는 듯 했으나, 곧이어 연세, 고려, 중앙 등 대학 빅3에게 돌아가며
다구리를 얻어맞고 완전히 동네북이 되고 말았다.
중위권에서는 오성식의 앞세운 상무, 정재근의 SBS, 김영만의 중앙대, 조성원의 현대전자 등이 물고물리는 혼전을
거듭하며 플오진출을 다투었다. 하위권에서 가장 실망을 자아냈던 팀들은 다름아닌 금융팀 브러더스.. 오죽하면,
동네북 브러더스, 부도난 은행군단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금융팀들(기은, 산은, 한은)은 이 무렵엔 아예 농구를 포기한 듯
무성의한 플레이로 일관했고, 특히 그나마 금융단의 기수로 인정받던 기업은행은 주포 김상식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연패를 거듭하며 실망을 자아냈다.
이 대회에서 금융 3팀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 플옵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94~95 명승부(1) 우승을 가른 대학 라이벌전
연세대는 시즌 초반부터 무패 가도를 달리며 선두를 독주했고, 고려대 역시 기아에 1패를 당하기는 했으나,
이후에는 전승으로 연세대를 맹렬히 추격했다. 승수가 늘어날수록 용가리와 하마의 주가는 치솟았고,
시즌 마지막으로 예정된 고연전에 대한 관심은 늘어만 갔다.
연세대 12승, 고려대 11승 1패, 고려대가 이길 경우 동률이 되지만, 그럴 때는 승자승 원칙으로 고려대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방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정규리그 마지막까지 결판나지 않은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해 두 팀은 진검승부를 준비하게 된다.
양팀의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두 팀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해야 할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플레이오프 일정상 2위팀은 정규리그 3위가 확정된 최강 기아(10승 3패)와 4강에서 격돌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승 직행을 위해서라도 양팀은 똥꼬에 불붙은 심정으로 열심히 뛰어야할 동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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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철(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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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은 접전이었다. 용가리가 하마와 전희철의 밀착 수비에 막혀 공격의 활로가 막혔고, 김병철과 양희승이 내외곽을
휘저으며 점수차를 벌렸다. 그러나 이날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선수는 연세대 이상민이었다.
전년도까지만 해도 공격비중이 거의 없던 패스 위주의 포인트가드였지만, 94~95 시즌에는 1번과 2번을 오가는
전천후 가드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3점 성공률이 47%에 이르는 정교한 슈터였다.
그가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서 빠른 드라이브인과 기습적인 3점슛으로 팀 공격의 활로를 열었다.
여기에 중반부터 되살아난 주포 우지원이 전반 17점을 꽃아넣으며 팀내 최다득점을 올렸다.
전반 스코어는 48-39로 벌어지며 종료.
후반, 고려대는 강한 밀착 프레싱으로 승부를 건다. 공격 지향적이던 전반에 비하여, 후반은 수비 위주의 농구였다.
양팀의 성급한 외곽포가 모두 림을 벗어가며, 경기의 흐름은 연세대가 근소하게 리드를 잡으면,
고려대가 곧장 따라잡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발목을 잡은 것은 실책. 후반 2분여간 연세대의 공격을 무득점으로 막으며 1점까지 추격했으나, 이후 고비마다
실책으로 역습을 허용하며 역전의 찬스를 놓쳤다.
종료를 불과 1분여 남기고, 스코어는 75-67, 연세대의 8점차 리드. 외곽이 부진한 분위기상 역전은 힘들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을 뒤집은 반전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고려대 주포 김병철이 속공으로 성급해보이는 드라이브인을
감행하는데, 연세대 이상민이 무리하게 블로킹을 하려 점프하다가 중심을 잃으며, 착지하다가 무릎 인대가 파손되는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이상민의 부상은 양팀 모두를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상민은 비명을 지르며 코트에 쓰러져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사람들에 의하여 실려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민의 파울이 선언되어 김병철에게 자유투가 주어졌다.
실질적으로 이 경기 전체를 좌지우지하던 이상민의 갑작스런 공백은 연세대의 팀밸런스를 완전히 흐트러놓았다.
빠른 패스웍을 자랑하던 연세대의 경기운영은 갑자기 혈관이 막힌 듯 잘 돌아가지 안았고, 한 박자 늦게 배달된 패스는
고려대의 더블팀에 막혀 잇달은 슛 실패로 이어졌다.
특히, 이 경기전까지 리그 자유투 1위를 달리던 우지원이 고비에서 연속으로 자유투를 놓친 것은 치명적이었다.
고려대의 잇달은 속공 외곽슛과 자유투가 적중하며,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드디어 75-75 동점을 이루게 되었다.
마지막 공격권을 잡은 것은 연세대. 우지원이 용가리의 스크린을 받아 돌아나오며 슛을 날렸지만, 어이없게도 림에도
맞지 않는 삑사리 슛이었고, 리바운드 다툼이 벌어졌다. 공은 연세대 석주일의 손에 맞고 코트밖을 벗어난다.
그리고 휘슬이 울렸다.
그러나 심판의 손은 놀랍게도, 연세대의 공격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장에서, 그리고 TV 화면으로 다시 보아도 공은 분명히
석주일의 손에 맞고 아웃되었지만, 오로지 심판만은 연세대의 공격권을 선언했다.
고려대 선수들이 격렬하게 항의하였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남은 시간 4초.
최종 작전타임. 분위기상 이상민도 없는 지금 연장전에 가면 불리한 것은 연세대 쪽. 심판의 휘슬이 올리고, 남은 4초의
승부를 위해 선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세대는 스크린을 통해 슈터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려고 하지만, 고려대 선수들의 밀착 마크에 눌려 첫번째 패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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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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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히 외곽으로 달려나온 것은 슈터가 아니라 센터 용가리. 그를 전담한 고려대 박재헌이 뒤따라 나온다.
용가리가 첫번째 패스를 받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패스할 곳은 없다. 용가리는 공을 받은 3점슛 라인 부근에서 터닝하며 그대로 슛을 날린다.
박재헌이 두팔을 뻗지만 파울을 염려하여 점프하지는 않는다. 설마 들어갈까...하고 선수들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허걱, 그 뽀록성 슛이 그만 림을 갈라버렸다. (반화넬 - 뽀록이라니... 뽀록은 아녔다.)
기대도 하고 있지않던 당시 중계 캐스터와 해설자(류희형 할아버님)까지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고 코트는 그대로 뒤집어졌다.
용가리, 한 건 올렸다는 표정으로 득의양양하게 팔을 뻗고, 연세대 선수들 모두 달려들어 용가리를 깔아뭉개 버린다.
완전히 굳어버린 고려대 선수들은 코트에 쓰러지고, 골밑에서 분을 삭이고 서 있는 전희철을 하마가 와서 달랜다.
경기는 77-75, 연세대의 승리였다.
그야말로 반전의 반전, 라이벌전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명승부였다.
이상민의 갑작스런 부상, 심판의 4초전 결정적 오심 등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으나, 양교의 선수들은 팬들앞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고,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었다.
이로써 연세대-고려대가 나란히 대잔치 정규리그의 1,2위를 차지하고 대학의 시대를 선포한 가운데 정규리그는 종료되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는 정규리그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또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94-95 농구대잔치 연고전, 후반전 (전반전은 추억의 농구게시판에 있습니다.)
94~95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 연세대(1)-삼성전자(8) |
94~95 명승부(2)- 동네 폭력농구의 등장
플레이오프 대진표를 보게 되면, 눈에 띄는 것의 1라운드의 연세대- 삼성전자다.
아마, 이 경기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많을 것으로 믿는다.
삼성전자(7승 6패)는 정규리그 내내 개망신 끝에 간신히 플오에 진출한다.
그러나 정규리그 막판의 순위경쟁에서 삼성전자는 약체 산업은행에게 고의패배를 감수하며 플오 파트너로 연세대를
선택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지게 된다.
7위로 진출하게 될 경우, 삼성전자는 1라운드에서 고려대, 2라운드에서 기아, 결승에서는 연세대를 만나는 험난한
행보를 펼쳐야만 했다.
그러나, 만일 1라운드에서 연세대를 이기게되면, 2라운드에서 만나게 되는 SBS-현대전자의 승자는 상대전적에서
모두 우위이므로 어느 팀이든 누르고 결승에 직행할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연세대가 정상 전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규리그를 치르며, 연세대는 김훈(경희대전, 발가락 골절), 이상민(고려대전, 무릎 인대)등 주전 2명이 부상으로
결장한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연세대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플오 1라운드에서 연세대는 교체멤버 석주일(2차전, 발목 부상)에 이어
팀기둥 용가리가 최종 3차전에서 삼성 박상관의 엘보우 어택에 목을 강타당하여 쓰러지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연세-삼성의 이번 플레이오프는 경기라기 보다는 킥복싱에 가까운 난투극이었다.
사단은 2차전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차전에서 10여점차의 초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용가리의 맹활약에 역전패당하고
만 삼성은, 벼랑끝에 몰린다.
2차전에서부터 노골적인 파울과 위험한 플레이로 후배 선수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 저변에는 미운 털이 박힌 용가리에
대한 감정적 대응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삼성 김승기가 두 차례나 팔꿈치를 휘둘러, 우지원의 얼굴을 가격함으로써 코트 바닥에 쓰러뜨리는가 하면,
골밑의 용가리에게 패스가 가기만 하면, 위험한 파울이 난무했다.
그에 대응하는 용가리도 어른스럽다고는 할수 없는 것이, 삼성 포워드 강을준과 리바운드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점프볼이
선언되었음에도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그대로 공을 낚아채 강을준을 코트바깥으로 던져버렸던 것이다.
후반에는 연세대 선배인 문경은이 레이업 도중 용가리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드는 파워 엘보우 어택으로 용가리가
잠시 KO되기도 하는등 양팀의 감정싸움은 격해질대로 격해져 있었다.
이 경기에서 패함으로써 연세대는 정규리그 14연승 행진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최종 3차전, 양팀 선수들은 이미 승부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고 있었다.
연세대가 1학년생 센터 구본근의 덩크슛을 포함한 16득점으로 리드를 잡아나가면서 다시 동네폭력농구가 시작되었다.
전반 막판, 자유투 상황에서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점프하던 용가리의 등뒤에서 삼성 박상관의 팔꿈치가 뻗어왔다.
팔꿈치는 정확히 용가리의 목을 찍어눌렀고, 용가리는 비명을 지르며 코트에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분히 고의성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용가리는 그대로 코트 밖으로 실려나갔다.
용가리의 결장은 이미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지쳐있던 연세대에 결정타를 날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전반은 41-37로 삼성이 역전한 채로 끝났다.
그러나, 후반들어 경기는 끝났다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연세대 선수들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앞장선 선수는 김택훈과 석주일. 플오 들어서 부진하던 김택훈은, 용가리를 대신하여 골밑에 투입되며 저돌적인 플레이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차전에서 발목부상에도 불구하고 투입된 석주일은 문경은을 봉쇄하며,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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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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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해도 이날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플레이어는 그간, 받아먹기의 황제로 불리던 우지원.
그는 적어도 이날 만큼은 슈터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맹활약을 펼치며 차포를 뗀 연세대의 팀 공격을 홀로 이끌었다.
후반에만 무려 3점슛 4개 포함, 16득점. 특히 아슬아슬하게 시소게임을 벌이는 상황에서 우지원은 고비마다 멋진 클러치샷을
꽃아넣으며 경기를 박빙의 승부로 몰고갔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우지원은 해결사다운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연세대 선수들의 그런 투지도 승부를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용가리의 부상으로 생긴 골밑의 구멍은 선수들의 파울
트러블을 유발했고, 석주일, 구본근등이 잇달아 5반칙 퇴장 당하며 전세가 기울였다, 더구나 고비에서 문경은, 김현준 쌍포를
계속 놓치며 3점포를 허용한 것은 치명타였다.
77-72로 앞선, 종료 3분전부터 연세대는 단 1점도 더 뽑지 못하고, 11점을 헌납하면서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최종스코어 77-83. 연세대는 참패한데다, 경기가 끝난 순간, 이날 분전했던 1학년 센터 구본근마저 심장 이상으로 코트에
쓰러지며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용가리와 구본근은 응급실로 실려갔고, 경기는 결코 개운하지 못한 결말로 끝났다.
승패를 떠나서 농구의 룰이 무너진 슬픈 승부였다. 특정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꼭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씁쓸함이 관람 내내 떠나지 않았다.
94~95 명승부(3)- 허재와 김현준, 그들의 마지막 승부
정규리그가 연세대의 독무대였다면, 플레이오프를 주도한 팀은 역시 허재가 부활한 기아였다.
각각 중앙대와 상무를 힘겹게 제치고 4강에 올라온 고려대와 기아.
연세대의 탈락으로 이 시리즈가 실질적인 결승전으로 불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려대가 가진 농구대잔치 무관의 불운이다.
고려대가 90년대 최강의 전력을 갖춘 94년 이후 가장 껄끄러웠던 팀은 연세대 보다는 오히려 기아자동차였다.
연세대와는 전통의 라이벌이라는 경쟁 심리가 강했던데 비하여 기아에 대해서는 거의 고양이앞의 쥐와도 같았다.
자연히 경기결과도 연세대와는 승패를 떠나 박빙의 승부가 많은데 비하여, 기아에게는 종종 대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은 라이벌 연세대가 유난히 기아자동차에 많은 승리를 거둔 것과는 (연세대는 93년이후 4년 연속 정규리그에서
기아에 승리를 거둘 정도로 기아 킬러였다.) 대조적이다.
반면, 고려대는 94~95 플레이오프 이전까지 대 기아전 5전 5패(--;;). 90년대 양팀 통합 전적으로 쳐도 3승 9패
(다음 해인 95~96 대잔치까지 포함). 플오 대결은 두 차례 모두 2승 1패로 져서 탈락했다.
한 마디로 절대 쥐약이었던 셈이다.
그 바탕에는 역시 큰 경기에서 힘을 발휘하는 슈퍼 트리오 허재-강동희-김유택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대는 90년대 막강한 멤버가 존재하던 시절에도 우승은 고사하고 한 차례도 대잔치 결승에 이르지 못했고,
이 대회부터 4년 연속 4강 징크스(기아-상무-연세대 등) 에 막혀 분루를 흘려야 했다.
실력차이? 글세.. 그보다는 운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허재-강동희의 맹활약으로 4강에서 하마가 버틴 고려대를 제친 기아 앞에 놓인 마지막 관문은 SBS를 제압하고
올라온 전통의 라이벌, 바로 삼성전자였다.
대학이 인기를 주도하던 시절에 벌어진, 기아-삼성의 클래식 매치는 얼핏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라. 진정 농구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바로 그가 있음으로 90년대 한국농구가 빛났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 이름 허재와 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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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기아)와 김현준(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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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리즈 초반, 1-2차전은 사실 두 스타의 이름을 거론하기엔 싱거운 승부였음이 사실이다.
기아는 허접한 고교팀 다루듯 두 경기에서 손쉽게 삼성을 개박냈고, 허재가 보여준 것은 20여점의 평균 점수(?)와
1차전 말미에 잠깐 보여준, 환상적인 드리블 쇼타임 뿐이었다.(이때 삼성 수비수 2,3명을 잇달아 제치며 레이업을
올려놓은 허재의 드리블 묘기는 압권이었다.)
시시하게 보이던 결승전은 3차전에 가서야 조금씩 열기를 띄기 시작한다.
무기력하게 무너질듯하던 삼성이 김현준의 막판 기막힌 클러치 3점슛으로 74-72로 역전승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러나 정작 느긋하던 기아 선수들을 자극한 것은 1패가 아니라, 심판에 대한 분노였다.
3차전 종료직전 강동희의 노골된 자유투를 공격리바운드로 낚아챈 허재에게 다소 애매한 상황에서 3초 바이얼레이션이
부과되었고, 기아 선수들은 격렬한 항의했지만 기각되었다.
이것은 심판의 편파판정 논란으로 이어져서 경기 종료 후, 기아 선수들과 최인선 감독이 집단으로 거칠게 항의하는 소동으로
이어졌다.(이 문제는 후일 농구협회에서 회의까지 거쳤으나, 결국 이의없음으로 기각되었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이날의 소동은 4차전의 환상적인 농구쇼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양념이었던 셈이다.
왜인가? 바로 이날 마지막 경기에 이르러 허재가 명성에 걸맞는 대회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4차전이 시작되면서 초반의 흐름을 잡은 것은 삼성이었다. 그것도 문경은이나, 김현준이 아닌, 평범한 백업 슈터였던
허영이라는 무명의 선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허영이 전반 초반에만 4연속 야투를 성공시키며,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기아는 전반 내내 끌려다니는 경기를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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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가 흐름을 가져오기 시작한 것은, 전반 10분이 지나고 슬슬 허재가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체력에 문제를 드러낸 김유택을 대신하여 주전센터로 나온 조동기가 골밑에서 잇달아 멋진 블록슛을 선보이며
리바운드를 장악했고, 강동희가 삼성의 실책을 놓치지 않고 멋진 가로채기에 이은 속공을 성공시키며 점수차는 뒤집었다.
진검승부가 펼쳐진 것은 후반 8분경. 이 날 전반 내내 기아 봉하민에게 막혀 부진하던 문경은이 후반 봉하민의 체력이 떨어진
틈을 타서 잇달아 외곽슛을 꽃아 넣었다.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속사포처럼 연타로 꽃힌 3연속 3점슛은 경기를 역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아에게 끌려가던
경기의 흐름을 일거에 삼성쪽으로 바꾸어놓았다.
기아의 작전타임, 다급해진 최인선 감독이 열심히 작전지시를 내리는데, 우리의 허재 형, 언제나 그랬듯이 감독이 무슨 작전을
씨부리거나 말거나 쌩까고 후배들에게 '수비 똑바로 해, 새꺄~~'를 외치는 카리스마로 코치 역할까지 자청한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가 단순 후까시가 아닌 실력임을 작전타임이 끝남과 동시에 대중은 알게 된다.
곧바로 이어진 공격에서 기아는 강동희의 3점이 림을 가르며 경기의 균형을 되찾아온다.
이때부터는 일진일퇴를 주고받는 접전. 그리고 고비에서 허재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문경은-김현준-허영으로 이어지는 트리플 외곽포에 맞선 기아의 공격전술은 이날 최고의 컨디션이었던 허재에게 공을
집중하는 극단적 아이솔레이션이었다.
당연히 삼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블팀으로 대응해왔지만, 그러한 수비를 비웃듯, 허재가 페이드어웨이 슛으로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이은 강동희의 가로채기에 이은 속공...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3분 동안, 허재는 마치 폭풍이 스쳐지나가듯 코트를 유린했다. 3분동안 혼자서만 연속 17득점.
삼성은 마크맨을 바꾸어보기도 하고, 더블팀을 붙여도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허재의 공격루트는 너무나도 다양했다.
드리블하다가 기습적인 풀업 점프슛, 스크린을 돌아서 3점슛, 페네트레이션에 이은 2단 레이업, 자유투 라인에서 페이드
어웨이 등 17득점을 올리는 동안, 같은 루트에서의 오펜스가 연속 두번 시도되지 않을 정도로 허재의 플레이는 다양했다.
수없이 허재의 경기를 보았지만, 이 날 경기는 1대 1오펜스의 교본이라 불러도 좋을만큼 압도적이었다.
허재의 신들린 듯한 플레이에 삼성 벤치는 망연자실했으며, 관중석은 화려한 농구쇼로 뒤집어졌다.
허재가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 최후의 3점포를 꽃아넣은 순간, 점수차는 두 자리로 벌어졌고, 허재는 두팔을 번쩍 치켜들며
전에 없이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쉽게 들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가, 이만큼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경기는 드물었다.
본인도 오늘이 자신의 최고 컨디션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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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고 있는 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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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승패가 기운 가운데, 기아는 주전선수들을 교체했고, 막판 삼성 김승기가 연속 7득점을 성공시키며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승패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최종스코어 83-75. 승부는 결정되었다. 그리고 기아가 1년간의 짧은 슬럼프를 벗어나 다시 한국 농구의 정상에 오르는
화려한 순간이었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쓸쓸히 퇴장해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 결승전이 8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최고의 슈터 중 하나였던 고 김현준 선수의 은퇴경기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플레이오프에서 고비마다 클러치샷을 성공시키며 팀을 결승으로 이끈 해결사는 역시 김현준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그리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경기가 끝난 후, 패자로서 무대를 떠나게 된 그는 쓸쓸한 미소를 띄면서 말없이 구단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남은 팬들은 따뜻한 박수로 떠나는 노장을 전송했다.
그것은 축제의 끝에서 한 시대가 마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94~95 대잔치는 농구대통령 허재의 환상적인 농구쇼로 힘입어 최고의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90년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승부 중에서 유독 94~95 시즌만큼 최후의 우승컵을 놓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대회도
드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더불어, 아직도 그 연세에 코트를 누비고 계신 허재, 강동희 등 노친네들의 노익장을 회고하며 박수를 보낸다.
여러분은 그 시절이 그립지 않으신가?
94~95 농구대잔치 최우수 선수: 허재(기아자동차) |
[출처 : 딴지일보]
첫댓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연대를 응원했는지 이해불가 ㅎㅎ 고대 선수들을 더 좋아했는데..
삼성과의 결승전을 경기장가서 본 저로선 정말 그 허재형님의 플레이.. 말로 어케 표현할지..ㅎ
고대와 기아.. 삼성과의 결승전은.. 고대와 허재, 삼성과 허재.. 당시 삼성은 기아의 상대가 아니였죠.. 허재 선수는.. 와우.. 상대팀으로서는 방법이 없는 선수였고.
허재!!!
허재다..ㅋㅋ
김진선수도 이 대회 마치고 은퇴했죠 농구대잔치는 개막하고 챔피언결정전까지 2달이 걸리는데, 한국프로농구는 챔피언결정전까지 6달 조금 못돼죠 경기수자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되네요
이때 연세대학교가 준결승, 결승 올라가면(물론 서장훈 부상당하지 않았을 경우) 준결승에서는 김훈을 뛰게 만들며 결승에서는 이상민을 뛰게 만들겠다는 후문이 있었죠 농구대잔치 챔피언결정전에서 연세대와 기아자동차경기를 보지 못한 게 아쉽네요 기아자동차가 정규리그때는 평범하지만 플레이오프가면 강팀으로 부활하는데, 연세대학교는 주전들의 부상과 용가리 유학으로 결승까지는 오르지 못하죠 96~97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학교는 용가리 합류로 올라가지만 기아자동차는 전패하는 수모를 당하죠(주전이 부상당했으니까 원년프로농구에서 우승하기는 하지만)96~97농구대잔치가 끝나고 97 프로농구 출범을 기다렸던 기억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