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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 개요[편집]
도교(道敎)는 중국의 민속 종교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도가와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엇갈린다. 후술된 도가와의 차이 항목 참조.
사천성에 있는 도관(道觀)[1]# 도관 외에도 묘(廟)라 하여 우리나라의 마을 입구의 서낭당[2]
종교로서의 도교는 종교로서의 유교와 함께 우리에겐 약간 생소한 개념이지만[3]
종교로서의 도교는 삼국지로 유명한 장각의 태평도(太平道)와 장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4]를 시초로 하여 남북조시대에 구겸지당나라전진교(全眞敎)와 정일교(正一敎) 등이 있으며, 어쨌건 표면적으론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에 그 교도(敎都)를 두지 않고 대만
중국 이외에도 베트남과 화교태국, 말레이시아불교에 흡수되었고, 일본의 경우 음양도와 슈겐도
1990년대 말~2000년도에 들어서는 도교 자체를 중국만의 민간 신앙보다는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의 자연주의 사상/토착, 민간신앙과 문화의 교류 측면에서 연구하는 관점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문화교류사의 발전과도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5]
2. 역사[편집]
2.1. 도교의 기원[편집]
2.1.1. 오두미도(五斗米道) 이전[편집]
2.1.1.1. 원시 종교[편집]
고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의 원인을 자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고, 자연에는 정령 혹은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으며 영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의 이런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팔신제(八神祭)''' 혹은 강산제(江山祭) 등의 숭배 의식을 치루고 도신(跳神; 굿), 점복(占卜), 금기(禁忌), 조험(兆驗; 재앙이나 큰 사건에 대한 징조를 알아채는 것), 참위(讖緯; 예언), 부주(符呪; 부적과 주문)와 같은 무속문화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는 민간신앙에 머무르다가 오두미도의 성립으로 도교에 흡수되어 부록파(符籙派)를 형성했다. 특히 원시 종교에서 비롯된 도교의 부록파의 내용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하여 민간도교의 중심적인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도교 부록파의 우리나라 판 베스트셀러(?)는 정감록
2.1.1.2. 신선방술(神仙方術)[편집]
이들의 목표는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
방선도의 방사들은 크게 두 개의 계파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심선파(尋仙派)와 수선파(修仙派)다.
심선파는 심산유곡에 숨어있는 신선을 찾아가서 신선이 되게 해달라고 하고 영약도 전수받자!!는 파벌로, 삼신산 같은 신선들이 모여사는 가상의 장소를 상상해낸 것도
수선파는 명산대처에 은거한 뒤 스스로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방파이다. 이들은 연구를 통해 도교의 신선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심산유곡에 들어가 각종 광물과 약초 등을 이용해 몸을 깨끗이 하여 신선으로 만들어주는 불로장생약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신선이 되는 수련법이나 불로장생약 제조법은 이후 중의학(中醫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이후에 여러 사상적 보완을 거쳐 외단을 제조하거나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어 도교의 단정파(丹鼎派)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심선파에 비하면 여러모로 생산적인 편이였지만, 시대상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는지 수은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방선도의 방사들은 이후 장생불로(長生不老), 육신성선(肉身成仙;육신을 신선으로 만든다)와 같은 도교적 생명관의 기초를 마련하고 도교의 수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외단(外丹)과 내단(內丹) 개념의 형성[6]
이 당시의 선술은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나, 마왕퇴한묘의 백서(비단
여담으로 이런 방선도 측의 이론을 보면 중국 본토보다 삼신산, 봉래산 등 한반도와 만주, 발해만 일대를 포함한 동북방 일대가 성지로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방선가들의 주 출신/활동지역이 이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방선도는 동북방 지역 사머니즘과 유사성이 강하며, <태평경>같은 경우 <열선전>에 따르면 조사(祖師)인 백화(淸和)를 요동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후계자인 간길(干吉)[7]무당[8] 한마디로 위치닥터(Witch doctor, 주의呪醫). 이때에는 신선이란 존재도 방사의 선행과 기도에 응감해 선약을 전해주는 신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신종교 중 특히 증산계가 종교의 성격적/교리/교단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이 강해 종교학계에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2.1.2. 도가 사상[편집]
2.1.3. 무축도(巫祝道)와 황로도(黃老道)[편집]
2.2.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편집]
태평도는 장각이 태평경도덕경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10개월 만에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
천사도, 즉 오두미도의 교조는 노자, 주요 경전은 도덕경이며, 장도릉은 특별히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지어 교리를 정하였다. 노자상이주에서 장도릉은 도는 하나一"고, "하나의 형체가 흩어지면 기가 되고, 형체가 모이면 태상노군이 된다"라고 하여 노자를 도道의 화신으로 규정하였다. 또 도서(道書) 24편을 저술하여 천사도의 심오한 뜻과 교도들의 행동강령을 가르쳤다.
교구를 24개의 치(治)로 나누고 제주(祭主)를 두었는데, 제주는 한 구역을 책임지는 수장으로 신도의 교화와 제사 등을 주관하는 법사(法師)의 역할을 했다. 또 그는 정실(靜室)을 설치하여 신도가 재계하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삼았다.
천사도의 1대 교주인 장도릉은 122세(!) 되던 해에 교의 최고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천사의 직위를 그의 아들인 장형에게 계승하고 더불어 역대 천사는 그의 적손들에게 전승토록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바로 그 삼국지의 장로었지만 중국에 공산당
2.3. 도교의 변천사[편집]
2.3.1. 위진남북조시대[편집]
위촉오 삼국시대에 오나라에는 갈현
동진 때에 있었던 도교 역사상 첫 번째 여도사이자 여학자인 위화존모산파[13]
동진 때의 저명한 도학자인 갈홍은 연단갈현의 호인 갈선옹을 따라 소선옹小仙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스승인 정은[14] 나부산에 들어가 득도를 하고 연단과 저술 활동을 하였는데, 특이하게도 갈홍은 신선방술과 유가의 삼강오륜수나라당나라시기의 연단술포박자
남북조 시기에는 장로가 죽고 난 후 천사도가 크고 작은 봉기에 연관되어 지배층의 견제를 받자 천사도 조직은 뿔뿔이 흩어져 수많은 교들이 난립하였다. 하지만 이 때 육수정, 구겸지, 도홍경북천사도(北天使道)와 남천사도(南天使道)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남북조 시기에 도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로서의 의례 등이 명확히 갖추어지고 신선 이론의 체계적인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마음수련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교에서 이러한 마음의 수련의 비중은 이후 점점 확대되어 전진교나 무당파
육수정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했다. 그는 재초 즉 몸의 정갈함을 위해 목욕과 금주를 하며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음식을 피하고 마음의 정갈함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속세에 얽매이거나 불결한 생각을 하지 않는 ‘재’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초’를 중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예배, 송경, 사신의 삼법으로 마음과 행동을 정결히 하면 득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육수정으로 인해 도교의 위세가 크게 넓어져 그가 개혁한 교단을 ‘남천사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2.3.2. 수당 시대[편집]
당나라 때의 도사 소현랑은 스스로를 청하자라고 불렀는데 태역太易과 단도丹道를 발명하여 ‘보장론(寶藏論)’이라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영지靈芝(=영약=외단=불로장생약)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는데 구하지 못할 수가 없다고 하자 “영지는 너의 몸 가운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외부에서 불로장생약을 찾기보다 수련을 통하여 스스로 내단內丹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도교의 내단 수련법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육체와 마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법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내단수련의 핵심이 됨과 동시에 도교의 수련법을 신체를 단련하는 연형煉形에서 정신을 단련하는 연심煉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도교와 불교는 종교적 주도권을 위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서로에게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주는 한 편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의 이론을 공격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게 하였다. 결국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은 불교와 도교 양측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결과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이론 및 체계를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또한 이 때의 논쟁으로 인해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17]
결국 당나라 때 도교는 불교의 이론과 사상들을 대거 흡수하고 도사 소현랑의 내단도內丹道를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나라 때는 손사막, 장만복, 이전, 오균, 두광정, 팽효, 담초 등의 뛰어난 도교 사상가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내단이 도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부상하고 내단의 수련법이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인 것을 들어 노자를 당나라 황족의 시조로 받들었다. 666년 당고종이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존호를 올렸고, 그후 당나라 황제들이 존호를 추가하거나 바꾸다가 754년 당현종이 대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라는 거창하기 그지없는 존호로 바꾸었다.
2.3.3. 도교의 부흥과 전진도의 등장[편집]
송나라 대에는 흥도억불 정책으로 인해 모산파와 천사도가 크게 흥하였고 당시의 유명한 도사 진단은 전통적인 도가 학설을 중심으로 유가와 불가의 사상을 두루 융합하여 체계적인 내단 이론을 만들었으며, 특히 주역남송 대에 왕중양은 전진도
전진도는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하고 도덕경, 반야심경, 효경을 필수 경전으로 삼았는데, 처차식과 부귀공명을 버리고 육식이나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면서 내단을 연단하여 고통스러운 유한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진도는 이전의 도교에서 주장한 육신의 불사를 부정하고 단지 양신(陽神)만이 불사한다고 주장하여 부록[18]명나라 대에 이르러 전진도는 쇠락하였다가 청나라
금나라 초 북방에서 소포진이 창시한 태일교는 부록을 중시하고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고자 했으며, 정명도는 특이하게도 도교의 정명, 불교의 대승, 유가의 충서 등 삼교의 세 가르침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엔 한 곳으로 귀착된다 하여 충효를 실천하고 마음을 맑게 비우면 신과 통하지 않아도 득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원나라 때 숭도 정책은 사라지지 않아 용호파, 각조파, 모산파의 삼산부록파[19]와 전진도, 태일교, 진대도가 일어났으며 여러 유파들이 있었으나 결국 수 많은 부록파들과 천사도를 합하여 만들어진 정일도와 전진도로 나누어 흡수되어 천하가 양대 도파로 정리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내단 이론도 또한 양호한 발전을 이루었다.
명 대에는 명 태조 주원장부터 도교를 숭상하였으며, 랍탑도인 장삼봉이 무당산에 무당파종남산무武를 강조했다. 때문에 장삼풍은 무당권법을 창안했으며 육합신권을 수련하여 내가권법(內家拳法)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은 수 많은 도교의 이론과 내단 수련법을 무술에 접목한 것이었다. 이후 무당내가권은 크게 발전하여 형의권, 팔괘장, 태극권이 만들어지고 이후 수 많은 무술과 유파가 발생하여 그 유명한 중국권법이 형성되었다카더라
사실은 장삼봉은 시대별로 같은 이름이 여럿 나오는 불분명한 인물이며, 장삼봉과 무당산은 명나라소림권이 달마청나라말 동해천[20]
그러나 명나라는 공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교옥황상제
2.3.4. 근세 도교의 쇠퇴기와 근현대의 도교[편집]
예수도 같이 섬기는 도관도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는 원래 자신들이 주로 믿던 불교(특히 티베트 불교도사한테는 변발을 강요하지 않고, 기존의 상투[21]
명청 시기를 거치면서 도교는 국가 제초의례 중심의 관방도교는 완전히 사라졌다. 민간신앙적이고 주술적 기복 중심의 민간도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개인의 양생을 추구하는 수행도교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단전 호흡, 기체조 등으로 유명하다)
근현대에 들어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까지 일으켰는데 증언에 따르면 도교성지였던 노자 강경대타이완
이후 공산당이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 발전/지원 정책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사라진 도관들을 재건하고 도피했던 도사들이 돌아오는 등 숨통이 어느 정도 트였다. 하지만 중국은 국가(공산당)가 종교의 통제와 관리를 하는 나라이기에 중국의 도교는 학술적인 부분이나 양생학과 관련된 기 수련, 그리고 위에 나온 대로 중국 당국의 돈벌이를 위한 무술쇼만이 발전하였다. 이는 도교 뿐만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로, 소림사
대만/동남아로 도망친 쪽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다. 그 이전 명청 시절부터 이미 원시 도교 시절의 무축적/기복신앙적 성격이 다시 대두된 민간 도교 시대다 보니 자체적인 교단/교리/경전이 있다고는 하지만.[22] 대부분 우리나라의 무당이나 무속 신앙과 섞인 불교 모습과 하등 크게 차이나지 않고,[23] 사람들의 시선도 그다지 좋지 않아 한국인들이 무당보다 스님이나 사제를 더 수준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24] 이쪽 지역에서도 비슷한 취급이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동남아시아 자체가 상좌부 불교가 발달한 지역이다 보니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져있다.
3. 도교의 핵심 사상[편집]
좀 어렵지만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도교는 현세의 삶이나 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기독교, 이슬람 등의 종교들과는 달리 사람을 중시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
도교에서는 인간의 몸은 소우주며 우주가 인간의 몸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신들이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교에서는 태양의 신은 오른쪽 눈에, 달의 신은 왼쪽 눈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신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정결하지 않고 하늘에 죄를 지으면 사람의 몸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신들이 인간의 몸을 빠져나가면 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특히, 어떤 신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들의 정精을 받아먹고 사람의 수명을 깎아내리려 한다. 따라서 사람은 정의 공급원인 곡기를 끊어 나쁜 신들을 잠재우고 마침내 기氣만을 호흡하다가 마침내는 기를 한 번 호흡하고는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몸에 담아 몸을 보함으로써 몸을 정갈히 해야 한다. 이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잡념을 지우고 무념무상도道와 하나 되고 우주宇宙와 하나 되어 영원불멸한 우주와 같이 사람도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가 현실로 드러났을 때 생겨나는 덕과 지혜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것인데, 자연의 삼라만상에 도가 있음에도 도의 현실화된 모습인 덕과 지혜를 내보인다는 것은 도가 도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동[28]이렇게 도를 알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여 물과 같아지는 경지에 이르러야(상선약수上善若水
이러한 도교 성선成仙 수련 방법의 초점은 도교 초기의 천사도부터 당 초까지는 그 방법으로 도인술(道人術 : 일종의 체조 등을 통한 양생법), 선단(仙丹 : 불로장생하는 약,)[29]과 같은 '양생법'을 이용하였는데 썩어서 필멸하는 음식인 곡식이 아닌 영원불멸하는 것인 금속, 그 중에서도 정제된 수은[30]으로 만드는 외단 즉 단약을 섭취하고 곡기를 끊는 육체적인 방법을 통해 영원불멸하고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얻는 명命(육체)의 수련에 맞추어졌었다. 부가적으로 마음의 수련과 윤리의식 고취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양생법, 특히 선단을 이용한 불로장생술로는 신선이 되기 힘들어보였다.
그리하여 유교/불교와의 끊임없는 교류는 도교의 신선 수련 방법의 초점을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수련 방식보다 곡기를 점차 끊어 내고 기를 호흡하고 명상을 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탁하고 음陰한 기운을 남김없이 털어내어 양신陽神을 이루어 도를 얻고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마음의 수련 방식으로 옮겨놓았다. 결국 이후 내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도사
그러니까 전기의 도교는 언젠가 썩는 곡식으로 만들어진 몸은 썩어서 죽게 되니까 썩지 않는 금속을 먹자!!(육체수련 중심, 외단론 중심)이었던 것이고, 후기의 도교는 수련을 통해 우주와 합일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자!!(심성수련 중심, 내단론 중심)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후기 도교의 경향으로 인해 민간 도교가 아닌 수련 도교에서는 여러 부적술과 제사 의식 또한 단순히 술법으로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비우고 좌망(坐忘 ; 앉은 채로 자신을 잊음)할 수 없을 때에 할 수 없이 몸 안에 있는 신을 바깥으로 불러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요, 이름난 명산을 유람하는 것도 그 곳에 살고 있을 신을 만나 보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3.1. 도가와의 차이?[편집]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닐 수 있다. 우선 도가=철학, 도교=종교로 보는 관점부터가 문제가 있다. 과연 철학과 종교가 그렇게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인가? 그것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당장의 불교만 보더라도 불교 교리를 철학이라고 말하고, 그 외의 불교 의례를 종교라고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도교 역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종교의 이분법에 따라 사고하는 결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도교가 그리 많이 연구되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노자/장자의 사상은 애초에 서로 지향점이 다르고[32]
노자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한 사람들 중에는 물론 도교 사상에 빠진 신비주의자들도 있지만, 그 이전에 법가로 흔히 분류되는 한비자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한비자는 노자의 텍스트 내에 나타난 통치술에 대한 비유를 상당히 정확히 꿰뚫어보았으며,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통치에는 무위(無爲)의 도(道)를 따르는 술책으로 민(民)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노자 주해서를 통해 지적했다.[33] 즉, 노자의 사상은 외형적으로나 종교적인 사상으로 보이지, 이러한 외형적 비유를 통해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장자의 경우 일단 노자와도 다른 노선을 걷는데, 장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와 같은 초월적, 형이상학적 관념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으며, 또한 이러한 관념에 따르는 국가나 기타 지배 체제 자체를 혐오호접지몽 등을 통해 그가 그토록 깨어나라고 강조한 꿈 역시 국가주의국가, 이념
물론 전 문단의 의견 역시 특정한 경향의 의견에 불과할 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34][35]
3.2. 민간 도교의 모습[편집]
하지만 현대인이라면 몰라도 옛날의 평범한 백성들이 이것을 다 지킬 수 있을리가 없다. 따라서 도교는 민간인들에게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도교에서 죽은 사람의 혼은 명부로 가서 재판을 받은 뒤 지옥에서 벌 받을지, 천상계로 가 장생불사의 몸이 될지, 다시 환생할지 결정되는데, 선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도 말한다. 다만,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 다음 한 번의 악행을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다행히도 악행을 많이 했어도 도교의 제의를 통해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면 벌이 감해질 수 있다고도 한다. 보통 사람이 1200번의 선행을 중간에 단 한 번의 악행도 없이 연달아 한다면 죽어서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신선의 중간 종류인 지선(地仙)의 경우. 천선(天仙)은 1만 2천번을 연달아해야 한다
그 외에 민간 도교는 민간인들이 직접적으로 원하는 기복성이 발달하여, 도교 부록파불교 등과 섞여 신비주의
4. 한국의 도교[편집]
도교의 영향을 받은 신종교인 동학의 성지 경주 용담정.# |
자생설은 중국의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체적으로 독립 교단화된 도교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도교서적인 해동이적이나 청학집[38]
도입설은 중국의 도교 교단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에 도교가 퍼졌다는 주장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조 해동전도록태평경이나 포박자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도교사를 언급할 때는 아직 완전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면서 방선도 부분을 빼버리거나 대충 넘어가고 태평도와 오두미교부터 도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중도설은 현재 사학계/종교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으로, 단군신화나 한국 토착신앙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역사기록 등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무속신앙/신선신앙/제천의식 등의 원시도교와 유사한 토착신앙이 존재했고, 이러한 신앙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도입된 도교가 융합하여 현재 한국의 민간신앙/신종교의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현재까지 나온 설 중 가장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뒷받침이 잘되어있는 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도교 유입 기록은 기원후 624년 고구려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 문화 특별전에서는 한사군
백제의 경우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한 막고해
신라에서는 신라사선(四仙)에 대한 기록이나 화랑들을 신선에 비유한 기록,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이미 중심 종교로서 우세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불교와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강해 후발주자였던 데다 토착신앙과 유사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상호 영향이 시작되어 공통분모가 많이 생긴 상황에서 도교가 고유의 색을 가진 채로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면서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의 도교가 유입된다. 하지만 이때도 기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불교와 토속신앙과 충돌보다는 동화되는 형태를 보였고, 도교는 왕실과 지배층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기존 한국의 종교들과 서로 공존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도교는 수련도교가 아닌 제초도교로서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이나 종교의 교리 연구보다는 도교식의 초제(재초)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데 집중된 철저한 기복신앙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의 신선 수련이 발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을 중시하면서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적인 윤리주의와 유교적인 제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기복신앙적인 제초도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나 국가의례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고, 나중에는 마니산용호비결이나 개운조사파에서 중시하는 선불가진수어록
여기서 도교의 이해에 있어서는 민간신앙과 내단파의 관점이 조금 차이를 보였다. 민간신앙에서는 도교/불교/민간신앙이 뒤섞이면서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수경신[45] 행사를 비롯한 몇몇 도교의례의 도입과 더불어 도교적인 신의 위격/호칭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도참서
그러나 내단파에서는 종교적인 부분보다는[46][47]
이후 조선 후기를 거쳐 근세로 들어오면서 민족의식의 발달과 유교의 경직화, 신분제도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이 때 들어서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국처럼 순수한 도교 교단을 갖추기보다는 유불선 삼교와 토착신앙이 섞인 성격을 하고 있었으며, 이 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도교 혹은 도교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종교 교단들로는 동학, 남학[48], 정역파, 증산교의 교단들이 있다. 특히 동학과 강증산계열은 도교의 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동경대전*)과 더불어 다양한 도교계 신령들[49]과 원시/민간도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는 의례와 이 과정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모습, 선계(仙界), 신선[50]
5. 일본의 도교[편집]
일본에 처음 도교가 전래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였다.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 주금사(呪禁師)[51]가 있고, 무왕 3년(602)년에는 승려 관륵
이렇게 일본에 도교가 전해지면서 일본서기에 상세(常世)신앙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상세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가난이 해결되고 젊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로 교단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도교가 흥하게 된 시기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에 직접적으로 유학승/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중국이 제초도교가 들어와 점을 치고 개인의 구복을 비는 방기주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일본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지나치게 미신적인 경향을 띄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처럼 도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도교서적을 수입한 자들도 있었으며, 이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 화려한 귀족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외래문화를 토착화시키면서 그 유명한 음양사
때문에 귀족 중심적이던 헤이안 시대가 몰락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일본 도교계는 된서리를 맞는다.[52] 항상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사계급들에게 있어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 사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53][54]
이후 일본의 도교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신토, 슈겐도
6. 트리비아[편집]
그외에도 도교를 배타적 요소가 전혀 없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대안
선단을 만드는 기술인 연단술
도교에서는 신(神)의 대우가 좋지 않은데, 도교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신들은 아직 득도를 못해서 수련 중이다. 물론 이들은 도에 대해 평범한 인간보다 엄청 많은 것을 깨달았으며 신통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을 도와줄 수도 있고 인간의 스승이 되어 도에 대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들도 도를 얻지는 못했기에 인간을 득도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물론 득도를 한 사람도 도가 사상에 의하면 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줄 수 없긴 하다.) 물론 도교의 모든 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원시천존
따라서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도사는 마음을 정갈히 하고 부적이나 제사를 통해 신들을 초청해 득도하는 방법을 묻기도 하지만, 결국 나중에 가면 좌망이나 내관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이라는 스승'을 뛰어넘어 우주 전체를 관조도관(道觀), 남자 수도자는 도사(道師)나 건도(乾道), 여자 수도자는 여관양귀비
현재 중국 도교 종파 중 하나인 화산파 남천문의 장문인은 한국인이다. 곽종인이라는 여성분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절밥처럼 도교 역시 도교 요리라는 고유의 요리법이 있다. 도교의 사상과 목적을 살려 도교 역시 음양과 오행사상을 기반으로 차가운 음식과 뜨거운 음식의 공존과 조합을 만들었다.
7. 도교의 신[편집]
- 이하 생략 (위에서 말했다시피, 도교의 신은 3만 6천 + α 명인데 그걸 다 쓰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