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윤후명
소설속에서 잃어버린 내 꿈★이 이루어진다
마라토너가 달리는 걸 보면 가슴이 뛴다. 한때 나는 마라토너의 삶을 꿈꾸었다. 중학교 때는 방과후에 홀로 남아 운동장을 돌았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인 서울역 근처에서 노량진 장승백이까지 뛰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렇듯 ‘토굴’ 속에 들어앉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새다리’인 내 다리를 안쓰럽게 내려다본다.
문학을 한다고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식물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고,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철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이 괴물처럼 다가와 버티고 있었다. 도대체 문학이 무엇이건대 내 꿈뿐만 아니라 나를 키워준 아버지의 꿈, 법조인을 만들고 싶어한 꿈도 앗아갔을까.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하지만 분명히 아닐 것이다. 문학을 한다고 나는 그것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식물과 함께 있고자 애쓰며, 가야 역사를 되풀이 음미하며, 플라톤과 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있다. 그것들을 내 문학 속에 어떻게 녹여 넣을지 골몰한다. 그러니까 나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문학 속에 아우른다고 해야 하겠다.
나는 문학을 통해서 그것들을 얻는 길을 택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고등학교 때 내가 처음 택한 특별활동은 문예반이 아니라 원예반이었다. 그리고 싫증을 잘 내는 내가 도무지 싫증내지 않고 지금까지 가장 꾸준히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풀과 나무들을 사귀는 것이었다. 흔한 것, 안 흔한 것, 이를테면 이름부터 미나리아재비같이 잘 알려진 것에서 참배암차즈기나 놋젓가락나물같이 잘 안 알려진 것까지…그리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소설에서 묘사 부분에 식물을 갖다놓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이때 나는 식물학자가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비록 우장춘이나 현신규 같은 육종학자는 못 되더라도, 나름대로.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식물은 위대하다고 나는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원초적인 뿌리에 닿아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내게 구휼(救恤)과 구제의 빛이며, 이차적으로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먼저인 것은 신목(神木)으로 표징되듯이 기도드리는 대상으로서의 식물이다. 내 고향 땅 대관령의 산신제에서 한 줄기 물푸레나무는 어떻게 몸을 떨어서 신을, 하늘을 맞이하는가.
이토록 영검스럽고 아름다운 식물들이 문화가 되어 함께 숨쉬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어떤 ‘거대담론’보다 거대담론이다. 자연, 이른바 환경 앞에 누가 비루한 기치창검을 치켜들고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 문학은 여기에 눈을 돌리는 데 인색하다. 삶의 뿌리를 사랑하는 문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역사학자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묻지는 말기 바란다. 생각하기로, 역사는 진보하는 것도, 반복되는 것도 아닐 듯한데, 이에 관해서는 여기서 말할 계제가 아니다. 다만 나는 소박한 사실들에 눈길이 쏠려서, 특히 가야국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여기에 먼저 ‘삼국유사’라는 책이 놓인다. 아아, 아름답고 신비한 책이여. 그걸 쓴 스님이여. 얼마 전에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라는 절에 다녀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곳은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곳이었다. 지금 그 절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곤 해도, 나는 ‘삼국유사’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의 향기를 느끼려고 코를 흠흠거렸다. 30년도 더 지난 날에 우연히 이 책을 집어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삼국시대에 있었던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더 예전, 우리의 시조 단군임금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건국 이야기와 옛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깊은 눈물겨움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울림을 주는 향가! 이 책에 따르면, 가야국의 왕인 수로는 ‘구지가(龜旨歌)’라는 이상한 노래 속에서 하늘에서 내려온다. 무슨 뜻일까. 이어서 ‘여뀌 잎사귀같이 좁은 땅’을 수도로 정한다. 무슨 뜻일까. 그리고 인도에서 왔다는 허왕후를 맞아들인다. 무슨 뜻일까. 그는 임금인 데도 그녀를 왕후로 맞기까지 왜 4년 동안이나 홀로 살았을까. 그때가 서기 48년. 그녀는 분명히 불교를 가지고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건만 왜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훨씬 뒤인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못박히는가. 그녀의 아들들이 들어간 지리산 칠불사의 이야기는? 함께 온 삼촌의 이름이 지금도 김해에 장유면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가야’ 혹은 ‘가라’의 뜻은? 많은 의문들이 소설 속에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옛 사람의 정신이 또한 나의 주제가 되는 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우리 삶의 원천, 원류로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사막의 어떤 풀은 물을 찾아 뿌리를 몇 ㎞나 벋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 뿌리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비록 혁명과 같이 엄청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근본 정신을 다루려고 노력한다. 대상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의 글’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로 가야 한다. 내가 20년 전에 돈황으로 간 것도 실크로드와 연결된 우리의 뿌리를 찾아간 것이었다. 우리 소설의 무대가 좁다고 무작정 엉뚱한 바깥 세상으로 가는 ‘여행담’이 아니다. 우리의 아픈 이야기, 깊은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곳, 그곳에서 우리와 나를 접합시키는 작업이어야 한다. 나는 사막에서 물을 찾아 몇 ㎞를 벋어 나가는 뿌리를 알려고 러시아로, 혹은 다른 나라로도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해서 철학을 등장시켜도 좋을 듯하다. 무슨 거창한 철학은 결코 아니다. 단순히 ‘나’에 대한 몇 마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을 끌어다 쓰면 어떨까. 아무려나 소설가가 되고 나서 우리에게 참으로 부족한 게 ‘나’ 의식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요즘과는 달리 3인칭 소설이 주류였던 시절이었다. ‘나’를 써서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여기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자아’이다. 자아를 확립하지 않으면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오늘날 소설이 어차피 서양의 방법론을 가져온 것이라면, 근대 정신도 가져와야 한다. 그 지름길이 ‘나’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인(私人) 윤후명으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세계를, 우주를 인식하는 깨달음의 주체로서의 ‘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소설이란 이러이러하다’는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수구적일 때 소설은 발전하지 못한다. 소설은 날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이야기로서의 소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소설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말라 죽고 있다. 소설의 다양성과 아울러 ‘내적 서사’의 중요성은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세계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고 하나, 의식은 뒤쳐져 그에 따라가기 힘겨운 모습이 소설에서도 역력하다. 나는 내 인생에서 잃어버렸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는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 가상 공간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현실 공간이 된다. 환상이 살아나 실현되는 공간이다. 소설 속에서 내 ‘꿈★은 이루어진다.’ 오늘도 ‘새다리 마라토너’는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째 홀로 달린다. 절대 고독이 밀려와 숨이 막힌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내 꿈은 북극성처럼 빛나며 나를 이끈다. 내 소설을 바라보는 편견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오해가 있다면 그 절대 고독의 심연에서 거기에 답하리라. 누구든 잃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문학은 내게 그것을 찾는 길이다. 그리하여 ‘나’를 찾는 길이다. 그것이 비록 ‘가장 멀리 있는 나’일지라도 이 세상 마지막까지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완성은 어디에 있는가. 결정적인 해답은 아직 없다. 끝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든, 어디까지든 찾아가는 고행(苦行)의 길이다.
윤후명 (윤상규) 소설가
강원도 강릉시 태생. 본명은 상규(常奎).
1980년대의 일반적 소설 경향이었던 시대적 부채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1959년 부산 서면의 개성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법무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영등포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62년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더욱 문학에 심취했다. 1965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연세춘추〉에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69년 강은교·김형영·박건한·임정남 등과 시 동인지 〈70년대〉를 창간했다. 이후 10여 년 간 삼중당·샘터·삼성출판사·계몽사·현암사 등 출판사에 근무했다.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출간했다.
시를 쓰던 그는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단편 〈높새의 집〉·〈갈매기〉·〈누란시집〉 등을 발표하였고, 1980년에 단편 〈바오밥나무〉·〈모기〉 등을 발표하면서 전업작가를 선언하였다. 같은 해 김원우·김상렬·이문열·이외수 등과 소설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였고 소설에 주력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1980년대 그의 작품세계는 직접적인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시적인 문체와 독특한 서술방식으로 환상과 주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비상하며 사랑에 대한 탐구에 천착했다. 1990년대에는 자전적 색채가 짙은 여로형 소설을 선보였는데, 삶의 본질적인 쓸쓸함을 이야기하면서 무미건조하고 숨막힐 것 같은 일상생활에서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인 고대의 풍경이나 관념적인 환상세계로 탈출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1983년 〈돈황의 사랑〉으로 제3회 녹원문학상, 1984년 〈누란〉으로 제3회 소설문학작품상, 1986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창작문학상, 1994년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로 제39회 현대문학상, 1995년 〈하얀 배〉로 제19회 이상문학상, 2002년 〈나비의 전설〉로 제9회 이수문학상, 2007년 〈새의 말을 듣다〉로 제10회 김동리문학상을 받았다. 〈문학아카데미〉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9년에 한국소설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저서에 소설집 〈돈황의 사랑〉(1982)·〈부활하는 새〉(1985)·〈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1987)·〈원숭이는 없다〉(1989)·〈별까지 우리가〉·〈약속없는 세대〉·〈알함브라의 궁전〉 (1990)·〈비단길로 오는 사랑〉(1991)·〈협궤열차〉(1992)·〈여우사냥〉(1997)·〈가장 멀리 있는 나〉(2001)·〈삼국유사 읽는 호텔〉(2005) 등이 있고, 시집으로 〈명궁〉(1977)·〈홀로가는 사람〉(1986, 무용가 김미숙, 사진작가 김수남과 공동작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1992)가 있다. 그밖에 산문집 〈내 빛깔 내 소리로〉(1987)·〈이 몹쓸 그립은 것아〉(1990)·〈꽃〉(2003), 동화 〈한국전래동화집〉(1986)·〈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1992)가 있다. 1993년 〈돈황의 사랑〉이 프랑스 악트쉬드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번역·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