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째 正歌의 脈을 이어온 남창가객 이동규』 |
때로는 단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한없이 너그럽고, 때로는 폭포수와같이 우람하면서도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지도위원이자 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준보유자인 이동규는 선비의 기품과 풍류가 담긴 남창가곡의 맥을 5대째 잇고 있는 남창가객이다. 이렇듯 뿌리 깊은 이동규의 가곡은 천년의 향기를 이 시대에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김경순(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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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를 관현악 반주에 얹어 부르는 가곡은 우리 전통 성악곡 중에서 가장 기품 있는 노래로 예술성뿐만 아니라 음악적 구성 또한 완벽하게 짜여져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선비들이 인격도야를 위해 부른 이 가곡은 예술적 향기가 드높은 격조 높은 노래이다. 선비의 기개를 나타내듯 어떤 음역에서도 음색이 달라지지 않고 꿋꿋하며, 장중한 관현악 반주 아래 청아하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단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한없이 너그럽고, 때로는 대룽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처럼 우람하면서도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지도위원이자 무형문화재 제 30호 가곡 준보유자인 이동규는 선비의 기품과 풍류가 담긴 남창가곡의 맥을 5대째 잇고 있는 남창가객이다. 이렇듯 뿌리 깊은 이동규의 가곡은 천년의 향기를 이 시대에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의 국악의 뿌리는 고조할아버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고종 때 궁중아악부 전락(典樂)을 지낸 정악의 거봉 이인식이 고조할아버지이고, 피리의 명인으로 아악부 낙수장(樂首長)을 지낸 이원근이 증조할아버지다.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장(雅樂首長)을 지낸 송사 이수경이 그의 할아버지이고, 이왕직아악부 2기생으로 가곡의 명인인 두봉 이병성이 그의 아버지이다. 이렇듯 그의 가계는 곧 국악의 역사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오동나무를 구해다가 집에서 직접 거문고를 만드셨어요. 어린 저와 명주실을 잡고 거문고 줄을 꼬는 걸 유난히 좋아하셨어요.” 유난히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이동규는 할아버지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6.25로 인해 할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 어깨 너머로 보고 듣던 국악을 배우기 시작한 것 여섯 살 때부터. 부산 피난시절 국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배운 단가 죽장망혜는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동규의 아버지는 이왕직아악부 2기생이자 가곡의 명인인 두봉 이병성 선생이다.
그의 가계는 곧 국악의 역사
그가 본격적으로 국악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58년 국악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사양성소에 입소하면서부터.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가곡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악사양성소에서 가야금을 전공한 그는 국악기에서부터 기본무용까지 국악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곡 세계에 들어선 것은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다. “중 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7남매의 가장 역을 해야 했습니다. 대학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밤무대 연주에서부터 막노동까지 했야 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가 접었던 꿈을 다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군대 제대 직후인 1971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가야금 전공으로 들어왔는데 주위 사람들이 제 목이 정가에 맞는 목이라고 정가를 해보라고 권하더라구요.” 그가 찾아간 사람은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인 소남 이주환. 이병성의 이왕직아악부 1기 후배이자 가곡의 중시조인 금하 하규일의 수제자인 소남은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목을 가진 이병성의 목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며 “두봉에 못지 않은 목”을 가졌다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목소리가 아버지와 비슷해 두봉(斗峰)이 또 한 명 나왔다고 해서 그를 우봉(又峰)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 가곡세계에 뛰어든 이동규는 가곡을 부를수록 아버지 생각이 간절했다. “아버지 노래를 찾기 위해서 방송국과 문화재관리국, 서울대학교를 찾아다니면서 아버지 자료를 있는 대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어렵게 구한 녹음테이프를 독방에서 듣고 또 들으면서 아버지 소리를 연구하고 연습했습니다.” 타고난 목에 피나는 연습으로 그의 목에서 맑고 깨끗하면서도 힘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가의 세계에 들어선 후 그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정가만을 고집해 왔다. “5대째 국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친들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노래만큼은 누구한테도 지고싶지 않았거든요. 국악원은 내 음악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국악원만 오면 마냥 좋고, 내 집처럼 편안해요.” 33년 동안 국악원에서 정가의 맥을 잇고 있는 그는 무대 밖에서는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같지만 무대에 서면 무서운 호랑이로 변한다.
국악원은 내 음악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정가는 정신에서 나오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무대에서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그는 준비하고 또 준비해 무대에 오른다. “보통 한 곡을 부르는데 6분 30초 정도 걸리는데 일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땀이 흐르고, 파리가 귀찮게 굴어도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선비의 노래인 가곡은 자세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미동도 없이 부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거대한 산을 연상된다. 1982년 가진 가곡독창회에서 그는 2시간 동안 공연을 해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5대째 이어온 저력과 그의 노력의 산물이 얻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국내외의 수많은 공연에서 정가의 멋과 맛을 알리는 국악전도사로서 활동한 그는 1983년과 86년 두 차례에 거쳐 KBS 국악대상을 수상했으며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30호 남창가곡 보유자 후보로 지정받았다.
국악의 맥과 끝없는 정열로 소리의경지에 도전하고 있는 남창가객 이동규
이 시대에 필요한 음악이 바로 정가
아무리 작은 공연이라도 언제나 새로운 최상의 공연이 되야 한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하는 그를 많은 사람들이 가왕(歌王)이라 부르고,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는 그를 박의 성음까지도 속속들이 안다고 해서 박짱이라고 한다.
33년 동안 국악원에서 생활하면서 “노래를 변질시키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시킬 수 있었던 점이 가장 뿌듯하다”는 그는 오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곡을 지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음악, 특히 정가를 배우게 되면 사람들 마음이 순화가 돼 순한 양이 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필요한 음악이 바로 정가입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의 바람은 정가합창단을 만드는 일이다. 한없이 느리고 여유로운 가곡이 뭐든지 빨리빨리를 외쳐대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의 청량제같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좀 더 많은 가객들이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5대째 이어 온 국악의 맥과 끝없는 정열로 오늘도 소리의 경지에 도전하고 있는 그의 노래는 각박한 현실에 지친 우리의 가슴에 한줄기 빛처럼 따사롭게 흘러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