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16:15-20; 시편 33:1-22
오늘부터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서이며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사도신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로부터 시작하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몇 가지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초기 역사, 즉 초대교회에서부터 사용된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신조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우리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고, 주일 오후에 함께 고백하고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고백서인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신경과 함께 세계 3대 공교회 신경(Ecumenical Creeds)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배의 한 순서로서 자리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예배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예배의 한 순서로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교회를 이룬 성도들이 예배하면서 다 함께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이미 세례받을 때 사도신경을 외우고 그 내용을 자신의 믿음으로 고백한 것을 예배할 때마다 고백함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표시하고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증하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함께 교회를 지체들이 동일한 믿음을 가진 믿음의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유익이 있고, 또 그로 인하여 함께 주님의 몸을 이룬 신앙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경이란 무엇인가?
사도신경과 관련하여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고 할 때 ‘“신경”(信經)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경”이라는 말의 또 다른 말은 “신조”(信條)라는 말입니다. “신경” 혹은 “신조”라는 말은 영어로 “크리드”(creed)입니다. 영어의 “크리드”라는 단어는 ‘나는 믿는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 “크레도”(credo)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시작되고 있지만, 영어 번역본에는 “I believe”라고 시작합니다.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즉 “나는 믿는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신경” 혹은 “신조”라는 말을 간략하게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신경이 생겨난 2세기에는 사도신경을 사도신경의 말 대신에 “신앙의 원칙”(the Rule of Faith)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신조”(Credo) 혹은 “신경”이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의미이고, “신경”은 자신과 교회가 믿는 ‘믿음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제 “신경” 혹은 “신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 역사가 캘리(J. N. D. Kelly)는 신조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조항들을 요약하고, 교회 권위에 구속력을 갖는 고정된 진술”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신경은 초대교회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기본적인 것들을 요약해 놓은 것이고, 교회가 교회의 권위로서 이것을 확정하여 함께 고백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경”을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신앙’이라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또 다른 표현은 ‘짧게 요약된 기독교 교리(Doctrine)’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설교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회는 기독교 교리 위에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신조” 혹은 “신경”은 ‘이단과 정통을 구분시켜 주는 신앙의 테두리’입니다. 이처럼 “신조”가 ‘짧게 요약된 기독교 교리’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이 신조를 알기 위하여 기독교 교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리(Doctrine)란 무엇인가?
사도신경을 강해하는 첫 시간이니까 기독교 용어에 대해 조금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독교 교리” 혹은 ‘기독교’라는 말을 빼고 ‘교리’라는 말을 사용하므로 기독교 교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서는 익숙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교리는 교회가 세워짐과 무너짐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뼈와 근육’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뼈와 근육은 사람을 똑바로 세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교리 없는 기독교 신앙은 마치 형체가 없는 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敎理)는 ‘기독교 신앙의 살과 뼈의 역할’을 하므로 기독교 교리는 건강하고 신령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기독교 교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교리”(Doctrine)는 ‘성경의 진리 그 자체’를 말합니다. 성경의 진리 그 자체가 교리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바로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교리(敎理)는 사람이 정리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의 뜻이 바로 교리입니다. 그래서 교리(敎理)를 말하는 것은 곧 성경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삶에서 교리가 구체적으로 실천되도록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서 계속해서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목사의 복음 설교는 이 교리에 기반하여 준비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은 교리를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처럼 중요한 교리(敎理)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 총회는 주일 오후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와 돌트신경을 가르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우리 장로교회도 전통적으로 주일 오후나 수요 예배 때 교리를 가르치거나 주일 오전 예배 전에 짧은 시간이지만 가르쳐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전통이 언제부터인가부터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리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복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교리를 말하는 것은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교회인데 성경의 가르침인 교리가 전혀 없는 사교적이고 문화적이고 하나의 종교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소에 성경이 말하는 진리 그 자체인 기독교 교리에 대해 배워서 알고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가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로 인하여 확신 가운데 살아가면, 고난이 닥치고 박해가 올 때 그리고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이 날뛰면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유혹할 때 넘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인 교리를 풍성하게 깨달아 교리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기독교 신앙의 뼈와 근육의 역할을 하는 교리를 잘 알지 못하니까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쳐도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천지에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여서 너무 좋고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우매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절한 것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비교할 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리를 모르니까 영원하고 가장 중요하고 큰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 거리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비교하고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의(Dogma)란 무엇인가?
여러분, 신학(神學) 용어에는 “교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에는 “교의 신학”(敎義神學) 혹은 “조직 신학”(組織神學)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의”(Dogma)는 ‘성경의 진리인 교리(敎理)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교회의 고백적(告白的) 결정’을 말합니다. 성경은 교리(敎理)를 말하고, 교회는 교리를 교의(敎義)로 공포하는 것입니다. 교의는 성경의 교리를 교회의 이름으로 보존하여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교의(Dogma)는 교리(Doctrine)처럼 성경의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의 진리인 교리(敎理)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결정한 신앙의 규범’은 될 수 있어도 ‘신앙의 법’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리(敎理)는 성경에서 나온 진리이므로 변할 수 없지만, 교의(Dogma)는 교회가 교리(Doctrine)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고 고백한 것이므로 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敎理)는 성경의 진리 그 자체이므로 변하지 않지만, 교의(敎義)는 성경의 깨달음 따라서 발전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심하면 퇴보하기도 합니다.
신앙고백(Confession)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신앙고백(confession)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리(敎理)와 교의(敎義)의 중간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을 엄격하게 말하면 ‘교의(敎義)의 고백적(告白的)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인 교리(敎理)에 대하여 교회가 그 교리를 이해하고, 교회가 이해한 교리를 성도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고백서를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어순상 첫 부분이 “전능하사”라고 시작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고 되어 있지만, 라틴어 원문이나 영어는 첫 부분에서 “나는 믿는다”(Credo, I believe)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 관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내가 믿는 믿음으로 내 부모가 구원을 받고 내 자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내용의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동일한 고백서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신앙공동체’라는 의식과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서 강해하고 이렇게 배우는 것은 배운 지식을 삶에 적용하여 이런 사실들을 마음에 품고 삶으로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 때에 사도신경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하나의 신앙공동체’라는 의식과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하고, 의식만 하고 고백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공동체’이고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고백의 내용을 안다는 것은 죽은 지식이 되고, 헛된 고백이 되어서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만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교단이나 교파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로마 가톨릭교회, 즉 천주교회에서도 사도신경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교회가 사도신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이 사도신경을 ‘보편 교회의 고백서’라고 부르기도 하고, ‘보편 신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교단이나 교파별로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 외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서들, 즉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단이나 교파별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들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는 1907년에 독노회가 만들어지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영향을 받은 인도 장로교회의 신조인 “12신조”(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장로교라는 이름을 가진 교단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1647년에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참조만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우리 교단의 공식 신앙고백서로 받아들인 것은 1974년이고, 1974년에서야 우리 총회 헌법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신학과 신앙을 가진 개혁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 먼저 만들어진 “벨직 신앙고백서”(1561)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그리고 “돌트 신경”(1569)을 가지고 있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톨트 신경,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세 가지 일치 신조”(Three Forms of Unity)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의 기원과 구조와 용도
이제 사도신경의 기원과 구조 그리고 그 용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열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사도들이 각자 한 문장씩 말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열두 문장은 ①“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베드로), ②“그분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유일한 주를 믿는다.”(안드레) ③“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야고보) ④“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장사되셨다.”(요한) ⑤“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삼 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도마) ⑥“하늘에 오르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야고보) ⑦“그로부터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빌립) ⑧“성령을 믿는다.”(바돌로매) ⑨“거룩한 공교회와 성도들의 교제를 믿는다.”(마태) ⑩“죄 용서를 믿는다.”(시몬) ⑪“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다대오) ⑫“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맛디아)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모아서 만든 것이 사도신경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A.D. 4세기에 활동한 ‘루피누스’(Rufinus Tyrannius Aquileia, 345-410)의 사도신경 주석과 영국국교회인 성공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에 실린 설명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만들지 않았음에도 왜 신경 앞에 “사도”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일까요? 사도신경에 “사도”라는 말이 붙은 것은 사도신경의 내용이 ‘사도들의 가르침’, 즉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교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공의회나 어느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이후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굳어지고 교회가 인정하고 고백하고 교회 예배 순서에 들어오게 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A.D. 150년 이전에 초기 형태의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사도신경은 A.D. 600-700년에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삼위 하나님에 관해 아주 간략하게 정리된 내용이었지만, 점차 그 내용에 덧붙여지고 다듬어져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은 어떤 용도로 만들어져서 사용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세례받기 전에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즉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회심(回心)한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의 정회원으로, 즉 세례 교인으로 받아들일 때 그들의 믿음과 고백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이 세례 문답용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는 기독교 교리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중요한 성경의 진리(교리)를 빠짐없이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신경은 짧은 12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성경의 근본 교리를 모두 담고 있을 만큼 풍부합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창조, 교회, 구원, 종말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라는 사람은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굳건한 토대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을 잘 알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확신할 수 있고 또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사도신경은 먼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 뒤에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창조, 성자 하나님과 구속,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성화에 관한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신경은 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substance)에 있어서는 한 분(one)이시지만, 위격(person) 혹은 신격(divine person)에 있어서는 세 분(three persons)이십니다. 성부 하나님도 100%의 인격이신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도 100%의 인격이신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성령 하나님도 100%의 인격이신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인격(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은 이 세분이 각각 고유한 신격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고유한 신격을 가지신 세 분이 또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말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는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출현하였을 때 교회 회의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이 단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아주 좋은 단어입니다.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이 단어가 만들어 진지 2천 년이 더 되는 지금까지 정통 기독교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위라는 각자의 신격 혹은 위격을 가지고 계신 세 분의 하나님이 또 한 분이라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서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유한은 무한을 다 담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의 이성으로는 동일본질이신 분이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 이 삼위일체는 신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나 신비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삼위 혹은 세 신격으로 계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십니다.
여러분, 유한은 무한을 다 담을 수 없으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상의 타락한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나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적 논리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 믿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1-3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여서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우주보다 더 크시고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히브리서 11:6에서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신앙이 됩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과 사도신경에는 ‘삼위’(three persons)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증거의 말씀이 있고, 사도신경도 사도신경에 나타난 구조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신자는 사도신경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신앙이기 때문에 신자의 고백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부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의존해서 사는 ‘의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상이 죄를 지어 타락하여서 왜곡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왜곡된 인간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지만, 구약성경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8주일 제25문은 이렇게 묻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신데 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을 말합니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분의 말씀에서 이 세 구별되는 위격들이 하나이며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우리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그리고 피조된 인간의 작은 지혜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합니다.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단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초대교회의 이단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교회 역사에 의하면 거기에다가 인간적인 설명을 붙이기 시작함으로써 많은 이단이 나왔습니다.
초대교회 이단 가운데 에비온파가 있었습니다. 이 에비온파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였고, 세례를 받음으로 선지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고,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성령 하나님도 피조 되었다고 주장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초대교회의 또 다른 이단은 아리우스파가 있습니다. 아리우스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며 하나님은 존재의 시작이 없으며 창조되거나 출생되지 않으신 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시작이 있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이므로 하나님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을 성자 종속설(subordinationism)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성자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또 다른 이단 가운데는 양태론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벨리우스입니다. 사벨리우스는 신명기 6:4의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심으로 세 개의 구별된 인격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이 다른 시기에 다른 인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세 가지의 양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양태론(modalism)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단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나왔습니다. 이것을 단일신론주의(unitarianism)라고 합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이단들은 모두 다 교회의 회의를 통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사도신경이 가르치고 있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이단입니다. 여호와 증인들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고백함으로써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구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의 가치입니다. 사도신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하면 신앙이 굳건해질 수 있고 이단들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일 때부터 사도신경의 열두 마디 가운데 첫 번째 마디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조와 교회 그리고 구원과 종말에 대해서 하나하나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유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023 10. 1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