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에프의 생애와 예술
Sergei Prokofiev; 1891-1953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중 한 사람인 프로코피에프는 복잡한 세계정세와 독재적 체제하에서 유럽과 미국, 고국인 러시아 망명을 거친 그 누구보다도 다양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탓일까, 그의 작품을 들으면 전쟁과 파괴, 스산함, 악마적, 고통스러운 애잔함이 연상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우크라이나의 손초프카 출생으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5세에 ‘인디안 갤럽(Indian Gallop)’,이어 9세에는 첫 오페라 ‘거인(The Giant)’를 작곡할 정도였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빙클러와 에시포바, 림스키 코르사코프등을 사사하며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된 그는 점차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써의 기량을 나타내며 1914년 루빈스타인 피아노 콩쿨에 입상을 하게 되었다(그는 이때 그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해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콩쿨 입상 이후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를 병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한 그는 해외공연과 오페라 도박사, 피아노 소나타 3, 4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0곡으로 된 소곡집 등의 작품을 2년만(1916-1917)에 작곡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활동할 공간에 제약을 받게 된 그는 결국 1918년 미국에 망명을 하게 되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러시아 출신의 라흐마니노프와 비교하며 혹평을 하기도 하였지만 뉴욕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그는 빠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오페라 ‘3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무대로 올리는데 실패한 그는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1920년에는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보다 안정된 음악 활동을 하게 된 프로코피에프는 러시아 발레, 3번째 피아노 콘체르토를 발표하며 오페라 ‘3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공연에 다시 도전, 시카고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음악적 성공과 함께 1923년 스페인 출신 가수 리나 루베라와 결혼하여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 그는 정착을 하여 10여년 동안 머물게 된다. 하지만 당시 파리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신고전주의자들과 다른 길을 걸어갔던 그에게 파리의 음악활동은 회의를 느끼게 하였고 결국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20년 동안을 스탈린 상을 받으며 국가적 영웅이 된 그는 많은 재정에 힘입어 교항곡,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바이올린 협주곡 등 여러 위대한 작품을 발표한 채 모스크바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과 같은 날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코피에프는 그 자신의 음악적 특징을 5개로 요약했다. 하나는 고전주의와 바로크 형식을 추구, 둘째는 새로운 화성적 언어로의 혁신, 셋째는 리듬의 생명력과 같은 동력적 요소, 넷째는 서정적 요소, 다섯째는 괴상스러움이 드러나는 악마적 암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고심하며 추구한 부분은 바로 선율이었다. 명확한 선율을 추구하기 위해 그가 주장했던 것은 어렵고 복잡한 선율보다는 익숙치 않은 청중이 들어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함이었다. 당시 전체적인 음악 트렌드였던 복잡한 화성적 구조의 생리상 선율은 곡의 흐름상 자칫 까다롭게 만들어 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고심은 결국 교향곡 5번과 7번이라는 명작을 만들어냈고 이 곡은 서정적 묘사와 반복적 청취의 선율속에 정교하게 짜여진 내부 구성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프로코피에프는 1891년 4월 23일 우크라이나 지방의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업기술자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농업기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친구의 큰 농장을 관리하였다. 손초프카(현재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키) 지역은 프로코피에프 부친의 자유 경작에 맡겨져 있긴 하지만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이따금 부친은 피고용인으로서 비애를 느끼곤 했는데 이와 같은 환경은 프로코피에프의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으며 부모의 사랑도 듬뿍 받고 자랐으나 귀족 계급의 미묘한 차별로 인해 성격이 원만하지 못했다.
프로코피에프는 어머니가 연주하는 베토벤이나 쇼팽를 듣고 성장했으며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를 치곤 했다. 5세쯤 무렵에 처음으로 작곡을 하였고, 이것을 어머니가 받아 적거 <인도의 갤럽>이라 제목을 붙였다. 1900년 1월, 8세 때 모스크바로 가서 오페라 <파우스트>, <이고르 왕자>,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을 보았는데, 특히 <파우스트>가 인상에 남아 자신도 오페라 <거인>을 작곡해서 가족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페라 <무인도>를 작곡하였다. 1902년 1월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에는 어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작곡 공부에 힘썼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13세의 나이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입학하였고, 1914년 봄 그가 23세가 되기까지 10년간을 재학하였다. 화성학과 대위법, 관현악법 수업 등에는 흥미가 없었고 10세 연상인 미야스코프스키(1881~1950)와 친구가 되어 작품을 서로 보여주고 함께 연주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고, 그는 프로코피에프를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나중에 소련 복귀 후에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친구였다. 1908년 전위적인 그룹 「현대 음악의 밤」에 소개되고, 12월 18에는 여기에서 <악마적 암시>을 포함한 Op.4의 피아노 소품집을 공개연주하였다. 이 해부터 젊은 체레프닌(1873~1945)의 지휘법 클래스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적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10년 2월 21일에는 전년에 작곡했던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연주하여 모스크바에서도 데뷔하게 되었다. 그 해 7월에 부친이 사망하였으나 음악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작곡 활동도 특별한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악보 출판을 여러 사람에게 집요하게 제의했으나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그의 공격적 경향에 대한 저항이 강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1911년에 모스크바의 유르겐손을 설득하여 비로소 피아노 소나타 제1번 을 출판하게 되었다. 유르겐손 출판사에 의해 계속해서 <4개의 에튀드> <4개의 소품> <악마적 암시> <토카타> <10개의 소품>, 피아노소타나 제2번 등, 피아노 작품을 연달아 출판하였다.
1914년 봄, 그는 피아노과의 졸업 시험에서 다섯 명의 졸업생과 수석을 다투게 되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스승인 에시포바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상황을 이용해 독자성을 발휘,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시험곡으로 선택하였다. 전해 여름에 파브로프스키에서 초연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제2번이 아닌 휠씬 반감이 적은 제1번을 선곡할 정도의 분별력은 그에게도 있었다. 게다가 교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그는 유르겐손에에 부탁하여 시험 때에 맞추어 협주곡을 출판하였다. 유르겐손은 2대의 피아노의 편곡과 악보, 양쪽을 출판하였다. 시험은 2대의 피아노로 행졌고 그와 동문이며 곧 마린스키 극장의 지휘자가 된 드라니시니코프(1893~1939)가 반주을 맡았다. 심사결과는 근소한 차로 프로코피에프가 승리하여 최우수 금메달과 함께 부상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받았다. 5월 11일에 열린 연주회에서는 체레프닌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협주곡 제1번을 공개 연주하고 당당히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피아노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프로코피에프는 1913년 여름에 어머니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하여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오래된 거리를 눈에 담아둘 수 있었다. 5월 30일에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이들은 우선 파리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디아길레프의 『발레 루스』를 보았다. 그리고 <페트루슈카>, <다프니스와 클로에>, <셰헤라자드> 등 주요한 공연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스위스에서 휴양하고 9월초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예정되어 있던 연주회 스케줄이 변경되는 바람에 휴가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클리미야로 휴양을 떠난 곳에서 최초의 여인, 니나 메시체르스카야 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 온 후 가곡집 <미운 오리새끼>를 작곡하여 니나에게 보냈다. 그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명문 귀족의 딸인 니나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음악가의 결혼을 니나의 부모가 찬성할 리 없었다.
1914년 여름, 그는 졸업 기념으로 홀로 유럽을 여행한다. 6월 22일에 런던에 도착한 그는 평벙한 여행자였던 지난해와 달리 이번에는 유망한 작곡가로서 디아길레프에게 소개되어 『발레 루스』에도 자유로이 드나들게 되었으며, 새로운 발레 작품도 의뢰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세계 대전 이전 아르 누보의 무대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그것이 러시아의 전위(前衛)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미망인의 외아들이었던 프로코피에프에게 징병 통지는 오지 않았지만 많은 친구들은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듬해 1915년 1월 중순경 발레의 절반이상을 작곡한 그는 디아길레프와 의논하기 위해 이탈리아레 가기로 하엿다. 니나와 동행하기로 하였으나 니나 부모의 반대로 실패하고 혼자서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것으로 니나와의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전시중에 도착한 프로코피에프는 <어릿광대>를 제안, 시나리오와 함께 고안하였으며 3000루불 이라는 거금으로 계약하여 러시아로 무사히 돌아와 <어릿광대>를 작곡에 착수하여 1916년 3월에 완성하였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 양식은 러시아에서는 보통 현대적이라고 평가되지만 서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전통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알라와 롤리>를 관현악 모음곡으로 개작한 <스키타이 모음곡>이 초연되었을 때 그 불협화음의 진동이 불러일으킨 파문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비평한 카라토이긴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일종의 헤테르포니」로서 스크랴빈이나 쇤베르크 음악의 전위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소련 시절에는 악보도 없고 단지 문헌에서만 전위적인 작품으로 에를 든 오페라 <막딜레나> 등도, 실제로 들을 수 있게 된 지금에는 그 낭만적인 선율에 놀라게 된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 특성은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양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디아길레프도 그의 절충적인 성격을 염려하여 「예술에 있어서는 혐오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 자신의 음악이 개성을 잃는다」라고 주의를 주었으나 그는 적어도 러시아에 있는 동안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유럽여행을 단념한 그는 오페라 <도박사> 작곡에 착수하고, 아프마트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을 작곡하였으며 피아노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자휘자로서도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1917년의 2월 혁명에 의해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10월에는 사회주의 대혁명이 달성되는 등 세상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프로코피에프는 마린스키 극장에서의 <도박사> 공연 준비를 하는 동안에 메이에르홀리드를 알게되었꼬 격려도 받았다. 정치적 혼란으로 이 오페라의 공연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오페라나 발레에 관해서 그는 예전의 러시아가 남긴 유산을 충분히 흡수 하였다. 혁명이 일어난 해에도 그는 교향곡 제1번 <고전>,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피아노곡집 <순간의 환영>, 피아노 소나타 제3번과 제4번을 작곡하여, 1918년 5월 7일 페트로그라드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을 때, 그의 가방속에는 신작들이 가득하였다.
◀프로코피에프 가족 사진, 오른쪽 끝이 부인 리나(Lina)
1918년 9월, 프로코피에프는 뉴욕에 도착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라 프로코피에프는 소련에서 온 음악가로 견제도 받았으나 동시에 「볼세비키 음악가」또는「피아노와 관현악의 대담한 혁명가」로 이름이 알려져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특히 11월 20일 에올리언 홀 연주회의 성공은 뜻깊은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를 출발해서 반년반에 뉴욕의 스타가 된 것이다. 이 연주회에 참석한 21세의 아름다운 여인 카롤리나(리나) 코디나는 그와 뜻을 함께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나는 스페인어와 영어는 물론 러시어에도 능통하였고 그녀의 몸집이 작고 다소 검은 피부에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릿결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을 가진 지중해 스타일의 미인으로 프로코피에프의 이상형이었다. 프로코피에프는 키가 크고 매우 무뚝뚝하며 사교적이지 못한데 반해, 그녀는 남국의 명랑함과 우아함이 넘치는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프로코피에프는 1922년 3월 완전히 미국에서의 활동을 접고 유럽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활발한 창작과 연주 활동으로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생긴 그는 독일 남부 바바리아 지방의 에타르라는 마을에 집을 빌려 어머니와 자신의 건강도 돌보며 차분히 작곡에 전념하였다. 가끔 돈을 벌기 위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외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리나가 종종 찾아오면서 그들의 애정은 점점 깊어져 마침내 둘사이에 아기가 생겨 1923년 9월 23일 그들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무신론자인 프로코피에프는 이때에도 교회에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4년 2월에 그들은 파리에 정착하여 여기에서 장남인 스비아토슬라프를 낳았고, 어머니는 같은 해 12월에 사망하였다. 결혼 직후인 10월 18일 쿠세비츠키가 혁명 직전 러시아에서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파리에서 초연하였으나 너무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밀슈타인과 호로비츠의 피아노에 의한 초연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24년 10월에 시게티가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했을 때에는 더욱 호평을 받았다.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파리와 러시에서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아노소나타 제5번, 5중주곡, 교향곡 제2번 등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것은 파리 비평가의 취향을 반영하듯 점점 더 불협화음이고 복잡한 음율의 곡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벌릴 수가 없었던 프로코피에프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1920년 후반은 프로코피에프에게 있어서 실패와 성공, 방황과 확신이 교차하는 복잡한 시기였다. 서유럽과 소련의 정치적인 관계가 재개되었으며, 디아길레프는 소련의 산업화를 주제로 한 발레 <강철의 걸음걸이>를 구상하였다. 이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소박한 정치적 감각을 부추기게 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이것이 소련을 찬미하는 작품이며 소련에서도 좋게 평가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작곡에 몰두하여 1925년 여름 2개월 동안에 거의 완성하였다. 1927년 6월 공연 당시 디아길레프의 호화스러운 무대는 파리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구성주의적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신생 소련의 현실을 그려내기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1927년 2월 공연에 앞서 소련을 방문한 프로코피에프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당시 소련의 음악계는 현대 음악파와 플롤레타리아 음악파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으나 아직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소련에서 받은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을 여느 때와 같은 반대 비평의 하나로 생각하고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소련의 음악계는 플롤레타리아의 배타적인 승리로 이어져 프로코피에프는 한동한 소련으로 여행할 기회를 잃어벼렸다. 소련 예술계에 군림하고 있던 미야코프스키나 메이레르홀리드, 아사피에프가 프로코피에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소련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할 수 있도록 애썼으나, 렌닌그라드도 모스크바도 그의 새로운 오페라나 발레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프로코페에프의 악보를 빌리는 데 지불할 외화를 준비하지 못한 사정도 있었다. 그 동안 프로코피에프는 세 번이나 소련 여행을 중단하였다. 1929년 10월 프로코피에프 자신이 볼쇼이에서 <강철의 걸음걸이>를 상연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지만 프롤레타리아파의 과격한 비난을 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1929년 5월 그의 신작인 <방랑아>의 초연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공연은 8월 19일 타계한 디아길레프가 프로코피에프에게 선사한 마지막 성공이었다.
프로코피에프 음악은 <방랑아>로 인해 전환기를 맞이하여 서정적인 선율이 넘치는 고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의 작품 성격이 이 작품을 계기로 젊은 시절의 전위적인 구재스러움을 버리고 이해하기 쉽게 변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디아길레프가 지향하는 점이기도 했다. 이는 소련으로 복귀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 양식을 바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관의 변화가 그를 소련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29년 10월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그는 파리에 아파트를 빌렸다. 지금까지 프로코피에프의 주거는 빌린 가구가 딸려있는 아파트나 호텔 정도여서 결코 안정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이번에는 가구를 사고 일할 공간을 꾸미며 처음으로 집답게 단장을 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옮기기 전까지는 그는 그곳에서 살았다. 작품의 연주 수입이나 인세가 안정적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가 아내와 두 자녀을 부양하면서 그 집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만 않았다.
◀프로코피에프는 6세때부터 체스를 두기 시작했고 실력이 명인급 수준이었다(오른쪽)
소련에서는 1932년 4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에 따라 플롤레타리아파의 횡포가 저지되어 그가 소련에서 활약할 가능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프로코피에프는 리나와 함께 11월에 재빨리 모스크바에 임시로 머무러며, 영화 음악 <키제 중위>의 작곡을 맡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하면서 소련에도 종종 장기체류하며 작곡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 활약이 3년간 이어진 후 1935년 12월 그는 모스크바에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다음해 5월에는 마침내 아내 리나와 두 아들을 모스크바로 데려왔다. 스탈린이 대숙청 시대가 시작되고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가 혹독한 비판을 받고 이었는데도 프로코피에프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작곡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작품을 받아줄 곳을 구하고 있었고 정치적 힘의 영향은 예측할 수 없었다. 소련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해도 서유럽에서의 음악 활동은 계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936년 말과 1938년 초, 두 번의 연주 여행을 허가 받았을 뿐, 그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소련에서의 작곡 활동도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프로코피에프가 몸에 익혀온 서유럽의 정취는 소련의 정서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소련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독특한 말솜씨와 연줄이 필요했다. 프로코피에프는 그 중 하나도 얻지 못하며 음악 관료들과 항상 문제만을 일으키곤 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사교적인 리나가 그의 거리낌없는 행동을 변론하기도 하였지만 소련에서는 외국인인 리나에게 그 역할은 벅차기만 했다. 오히려 그녀 자신이 외국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리나는 1948년 2월말에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프로코피에프가 사망한 3년후인 1956년까지 강제 수용소에서 지냈다.
프로코피에프의 두 번째 부인인 미라 맨댈손이 프로코피에프를 만난 것은 1939년 여름 카프카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이다. 프로코피에프가 48세, 미라는 24세였다. 미라는 명문 모스크바 대학의 문과학생이었고 마른 체형에 소극적인 성격으로 미인은 아니었으나 지성적이었다. 그녀는 화려했던 리나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그는 미라의 문학적인 소양과 열정에 끌렸으며 동시에 소련에서 자란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처세술은 프로코피에프의 이후의 창작 생활을 지탱해 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관계는 한동안 표면화되지 않아지만 1941년 3월에 2년 정도 계속된 리나와의 불화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프로코피에프는 집을 나왔고 미라와 그녀의 부모가 사는 아파트로 거쳐를 옮겼다. 그 후에도 그는 리나와 두 아들의 생활을 돌보기는 하였지만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프로코피에프가 리나와 이혼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의 집이 있던 관할 기관에 1948년 1월 13일 미라와의 혼인신고가 수리되어 있는 것이 공문서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학자 로빈슨에 의하면 1944년에 소련의 결혼법이 개정되어 다시 국가총계국에 신고한 결혼만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아, 그때 이미 미라와 살고 있던 프로코피에프는 정식으로 이혼 신고를 하지않아도 새로운 결혼이 가능했으리라 추측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라가 정식 부인이 된 적은 없었다고 강하게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이다.
프로코피에프의 소련 시절 창작 활동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48년 즈다노프(공산당중앙위원회 서기)의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미라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진행되었다. 1945년 말에는 발레 <신데렐라>를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하였고, 1946년에는 교향곡 제5번 등의 공적이 인정되어 스탈린상을 받기도 하였다. 대작 오페라 <전쟁과 평화> 도 가까스로 공연할 수 있었고, 경쾌한 오페라 <수도원에서의 결혼>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즈다노프의 바판이 있고 난 후 프로코피에프의 생활은 몹시 초라해졌다. 즈다노프의 악평 후에 리나가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고 수입도 끊겼으며, 예전의 기개 넘치던 작곡가의 모습을 잃은 채 어떻게든 연주되는 작품을 쓰려고 고심하였다. 기사회생을 노린 애국적인 오페라 <진실한 인간 이야기>도 당의 관료들에게 냉대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1945년 뇌진탕으로 쓰러진 후 건강이 악화되어 프로코피에프는 1953년 3월 5일, 묘하게도 스탈린과 같은 날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만 62세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정리하고 올리는데. 힘들텐데.. 지기님~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