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 되신 의당(錫基)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군위공문중의 CD족보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노원구 상계5동에 살고 있는 자택을 방문하였다. 두평 남짓한 골방에서 고서와 옛날 족보 그리고 풍수지리 관련 서적과 한 쪽엔 컴퓨터가 놓여있다. 풍수지리학에 대한 전문식견(專門識見)은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다. 의당은 60대 초반 큰아들의 권유로 컴퓨터를 익히기 시작하여 전산입력 해야한다는 생각 아래 전산작업을 시작하여 3,800여 쪽의 방대한 물량을 5여년 노력 끝에 군위공파 CD 족보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한 장에 CD 족보에 수록된 인원수는 약 60,000여명, 20,000여 세대가 수록되었다. 지난 5월 17일 참판공종회 임원회의 때 CD 족보를 가지고 와서 필요한 일가들에게 "잘못되고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교정 또는 삽입해서 사용해 달라"는 겸양을 겉드려 정중하게 부탁하면서 CD 족보를 건네 주신다. 보통 쉬운 말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CD 족보를 만들려고 계획한다면 그리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족보를 면밀히 검토한다해도 한학(漢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지 않은 한문과 옥편에 없는 한자를 찾아 완성하는 일, 우리문중의 초간본인 남한보를 비롯하여 10회에 걸쳐 간행된 구보를 참고해야하고 1994년도 간행된 박사공파 대동보를 참고하여 그릇된 점이 발견된 경우 고증록 등 각종 참고 자료를 찾아 올바로 검색하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의당은 숙달된 컴퓨터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제적 이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 CD족보를 제작하여 보급했을 경우 칭찬은 고사하고 허튼 뒷말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제작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갈등 속에서 오로지 CD 족보를 완성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추진했을 것이다. 노익장을 과시한 그 인내심을 높이 칭찬하고 감사 드릴뿐이다. 의당은 매년 음력 10월 한달 동안은 직계 할아버지의 시제는 물론 방계 할아버지의 시제까지 참배하고 일가의 모임이라면 어떤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말없이 참여하는 열성적이고 순수한 종사인(宗事人)이시다. 소문중인 진주 돈재공(위서,渭瑞 박사공 13세) 문중 모임을 비롯하여 중앙종회, 박사공파대종회, 문경공(군보)파종회, 통계공(회중)파종회, 참판공(안복)파종회, 군위공(이경)파종회, 서울시종회등 임원 및 감사직에 참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일가들의 모임에 빠질 수 없다고 하시면서 노원구종회의 열성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무려 아홉 곳의 종사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계신다. 의당께서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종사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종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농담어린 이야기가 파다하다. 더욱이 특이한 것은 20여 년 전 통계공파 참판공 할아버지 시제 때 군위공 문중의 후손들이 거의 시제에 참배치 않아 항상 죄스러운 마음으로 홀로 매년 참배하는 동안 군위공후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여 4년전 서울군위공파종회, 1년전 광주, 부산등 지역에 있는 파종회를 결성하는데 작은 불씨가 되었으며, 작년부터 군위공 후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단합에 힘입어 군위공파종회(회장 석성 錫星)에서는 금년 봄부터 군위공(이경.利敬)과 금재공(한.漢) 두 할아버지의 묘역정화와 재실(추원재.追遠齋 사성재.思成齋)을 새로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공사에 착수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데 밑 걸음을 이룬 장본인이다. 의당의 아버님 신용(信庸)과 어머니 상산김씨(商山金氏 인순 仁順)사이에 4남 1여 중 큰아드님으로 1934년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화현리 사대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고향은 진주시 정촌면 봉전촌으로 진주강씨 집성촌이었으나 조부님(찬희 粲熙)께서 조선조 말 갑오(甲午)경장때 박영효 김옥균등 3일 천하를 일으킨 개화파(開化派)의 일원으로 지명 수배되어 집현산(集賢山 진주와 단성의 경계)에서 피신하신 후 가족을 단성(지금의 산청군 생비량)땅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일제침략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탄압을 받을 때 일제가 유화정책을 쓰기 위해 각기관장(군수, 서장 등)들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부임 인사차 할아버지 뵙기를 청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개화파였지만 친일 매국노는 아니다. 그러니 너희들의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며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시며 거절하신 기개(氣慨) 높으신 어른이다. 의당은 신학문은 물론 한학(漢學)과 서예(書藝)에도 해박하시다. 의당은 50년대 말 (주)삼안산업에 입사 후 자재과장을 거처 (주)동신주택에 근무하다가 직장생활을 마감하였다. 의당은 부인 해주오씨(海州吳氏. 상순)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승구, 영구) 2녀를 두었고 손자 손녀 10명을 둔 다복한 할아버지이다. 의당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종사를 문중에 접목시키기 위해 보다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 말씀 드려본다. 문수(文秀):종보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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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CD족보(군위공파보)를 카페에 올리려 했더니 문제가 있군요
아크로바트 화일이 무슨 이유로 윈도우에서 읽기 중지를 시키는지?
첨부용량이 20MB이하로 제한되어 있어서 2009년도 박사공파대동보는 용량초과(120MB)로 올릴 수 없었어도
군위공파보는 20MB이하인데도 프로그램상 문제가 있어서 족보을 게시하려 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네요
밤사이 열람수가 50명이나 다녀가셨는데...이러한 회원들의 욕구를 해소해 드려야 할 텐데...방법을 찾아 봅시다
이럴 땐 컴맹인 제가 너무 답답하여유ㅇ~!!
방화벽을 해소하니 첨부가 가능해졌습니다...첨부된 파일을 클릭해 보세요~~~감사!!!
위 일부 첨부된 내용은 편저자 강석기 현종님의 허락을 받지 아니했군요...오늘 중 전화통화를 해 보겠습니다.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 석기 아저씨의 카페 게시허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에 첨삭하는 사례가 없기를 기원합니다.
세보에 대한 자료는 20MB를 초과하여 당장 첨부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네요
CD족보는 몇개로 세분하여 첨부할 수 있는 용량이 초과가 안되도록 해야 하는데...
제가 컴맹수준이라 뉘 도움을 주실 분 없을까요?
정말 수고 하십니다...
강석기옹(1934생)께서 작년2022년4월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어제밤 2023.10.13 남계서원 카톡의 지인을 통해 우연찮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밤엔 돌가신 분의 전화번호가 새삼 뜨기에 사모님쯤으로 생각하고 전화를 해보니 어느 학생의 폰으로 오늘 처음 개통하여 전화번호 임자가 바뀌게 된 걸 알았습니다
세월도 무심하지 상계동 석기아저씨께서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1년반이 넘었군요
故人의 명복을 비오며 이곳 카페글을 읽는 분들께 아저씨의 신상변동신고를 올립니다
아저씨께서 작업하신 PC에는 군위공등 선조님들 족보자료가 엄청 많을텐데...
후손들 아무도 보존못하고 잊혀지게 생겼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