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보이는 것보다 소리가 먼저다. 보는 것은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지만 듣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듣기 싫다고 아무리 귀를 꼭 막아도 몸으로 느껴지는 그 파장은 어쩔 수가 없다. 소리는 자연과 같은 환경인 것이다. 태교에서 음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엄마의 안정된 심장소리와 평화로운 목소리, 아름답고 순한 음악을 듣는 태아는 마음이 고요할 것이고, 갈등을 품고 있거나 마음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많이 듣는 태아의 마음은 그 소리를 따라 불안할 것이다.
먼데 천둥치는 소리나 팥죽이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는 소리, 종이에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수채화가 그려진다. 비오는 날 생길 수 있는 에피소드나 손자를 기다리며 죽을 끓이는 할머니,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 이런 것들에 관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스님의 풀 먹인 장삼이 서걱서걱 부딪히는 소리는 휘적휘적 걷는 걸음새와 더불어 어느 법문보다 마음에 와 닿는다. 겨울 눈 밟는 소리와 봄 개울물 소리 모두 좋다.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대는 새소리와 바람이 낙엽을 쓸어가는 소리도 낭만적이다.
‘밥 먹어라, 된장 끓여놓았다!’ 라고 대문간에 서서 딱지치기에 해 저무는 줄 모르는 남동생을 부르던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안방 창호지 문을 넘고 담장도 넘던 아버지의 노래 소리도 듣고 싶다. 비오고 바람 심하게 휘몰아치던 날, 마당에서 세숫대야와 잡동사니가 구르면서 만들어내던 소리도 생각난다. 대문이 삐걱거리고 개가 짖었었지. 예쁜 소리가 분명 아닌데도 그 소리가 그립다. 바깥의 그러한 난리법석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온한 방안에, 가족과 함께 있다는 그 안전하고 보호받는 느낌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의 두꺼운 방음유리창 덕에 비가 내려도 온 줄 모르게 살고 있다. 검은 아스팔트의 빛깔로써, 비를 듣는 게 아니라 보아 버리는 내가 되었다. 농한기 때 단체 관광 온 시골 할머니들의 니나노 혹은 트로트 소리도 싫지 않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구를 치고 온 몸으로 부르는 노래에서 그 분들의 고단한 허리며 마디 굵은 손을 보기 때문이다. 아직 어리고 젊은 내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며 할머니들은 왜 저렇게 놀아야 되냐며 얼굴을 돌린다. 아들아, 딸아, 곧 한 순간이 지나면 너희들도 그 속에 끼여 있을지 누가 알겠니.
목욕탕에서 들려오는, 막 주민등록증을 받은 아들의 낮은 노래 소리. 그것은 이제 막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아기 종달새의 노래와 닮아 있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는 엄마가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저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꿈으로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다. 일요일 오후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누운 남편의 코고는 소리도 내 맘이 편안할 때는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다. 가까이 코를 대여야만 들리는 잠에 곯아떨어진 딸의 새근거리는 숨소리. 잠에서조차 근심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어른들과 달리 그 애는 지금 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다. 자는 사이 그 애의 무릎 뼈는 자라고 내일 아침이면 키가 좀 더 커졌을 것이다.
영화 미션의 오보에 소리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리를 들으면 분명 이승 너머 딴 세상이 있으리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항상 다른 소리의 바탕만 되던 드럼의 독주 소리에 타악이 주는 원시성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의 첫 악기인 리코더 하나만으로도 어느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한 유명 뮤지컬 배우의 독창, 그 순간 그녀는 잘 생긴 느티나무 같았다. 그녀 발 밑 깊숙한 곳에서 창자를 거쳐 입으로 터져 나오던 강렬하고도 우아한 목소리는 마음을 잃게 했다. 영화 올드 보이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 그래서 공포와 슬픔은 한 뿌리라는 말이 나온 것일까. 기다리던 전화벨소리, 엄마의 도마질 소리, 보지 못하는 그리운 사람의 전화 목소리는 언제나 좋다. 한 가족의 웃음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도 미소가 번진다.
인디언들은 별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인디언이 문명인을 데리고 깜깜한 밤 언덕위로 데려가 ‘별 소리를 들어봐’ 라고 했을 때 당황한 문명인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고 공감하였다. 자신은 당연하게 듣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고 그 인디언도 놀랐을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던, 넘치는 온갖 소리들로 인해 아름다운 소리가 주는 위안을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나를 돌아본다.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또한 무엇보다 좀 더 고요한 시간을 많이 만들어 드문드문 귀를 씻고 내 안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싶다. 여전히 시끄러운 한 날에 마음의 소리를 따라 이런 저런 소리를 불러내보았다.
첫댓글 기타를 가르치면서 은연중, skill보다 듣는 법을 가르쳐주신 ㄱ스튜디오님, 지난 겨울 음악 특강에서 어려운 이론을 쉽게 강의해주신 ㅍ스머프님, 그리고 이렇게 방을 빌려주신 잠수함님께 감사하며...
글을 읽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건필하세요.
어지럽고 시끄러움 속에서도 고요할 수 있는 새벽숲님, 마치 새벽숲에서 나는 맑은 냄새가 나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