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중공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의 孤竹國에 관한 설명 입니다.
孤竹国是中国古代的國家,在商代時出現,其王族為子姓,與商朝王室同宗,春秋時被列為山戎之一,
早期王城位于今天的唐山市附近(早期疆域,西至今唐山市、迁西县兴城镇,北达凌源、朝阳、西辽河,东抵葫芦岛,西南迄乐亭、滦南、曹妃甸等地。
东临渤海,西边和燕国接壤,南边是齐国)。
始封于商代,殷墟甲骨文中作“竹侯”。
孤竹国的国祚从商朝初年延伸到春秋中期。
孤竹国伯夷、叔齐的故事流传至今。
在前660年被齐国、燕国所灭。
고죽국은 중국 고대의 국가로, 상나라에서 출현하여 그 왕족은 자성이라 하며 상나라의 왕실과 종친이며,
춘추 때에 산융의 하나이며, 초기 왕성은 오늘날의 당산시 부근에 위치하였다(초기의 강역은 서쪽은 당산시에서,
서쪽으로 옮겨서 조양, 서요하등지로 옮겼다.)
동쪽으로는 발해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연나라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제나라와 마주 한다.
상대에 봉하여 졌으며, 은허의 갑골문에는 죽후로 기록되어 있다.
고죽국은 상나라 초에서 부터 춘추 시기 까지 이어져 있다.
고죽국은 백이, 숙제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660년 제나라와 연나라에 의해 병탄되었다.
다음은 대한민국 위키 백과의 孤竹國에 관한 설명 입니다.
고죽국(孤竹國, 기원전 11세기~기원전 664년)은 상주대부터 춘추시대 후기까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탕산 시에 존재한 국가이다. 국성은 자(子), 씨는 묵태(墨胎)이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로 알려져 있고 기원전 664년에 제에 의해 멸망했다. 수서 배구전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 있던 곳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箕子朝鮮)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
전기
상이 중원을 남하했을 때 부족 연합을 이탈한 후에 독립된 세력을 형성해 갔다. 이후 옌산 산맥의 기슭에서 농업이나 유목에 종사했고 현재의 랴오닝성 차오양 시에 정주했으며 천탕에 의해 고죽에 봉해졌다.
중기
상대 중기에 고죽국은 발전해 난하, 청룡하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고죽국은 남쪽으로 이동해 서쪽은 롼허, 북쪽은 칭룽 현 북부, 동쪽은 후루다오 시, 남쪽은 보하이 만에 이르고 있었다.
말기
주나라 말기에 고죽 서부에서는 영지(令支), 동북부에서는 산융의 세력이 대두해 고죽국의 국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말기의 고죽국의 영역은 서쪽은 난하, 청룡하, 북쪽은 현재의 만리장성, 동쪽은 산해관, 남쪽은 발해만으로 그 세력 범위가 축소되었다. 기원전 664년(주 혜왕 13년), 산융이 연으로 출병하면서 연은 제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제 환공과 연 장공은 고죽국과 영지국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산융에 출병하였으며 산융 정벌과 동시에 고죽국도 멸망시켰다.
다음은 중공 위키백과가 설명하는 山戎 입니다.
山戎,西戎之一,為中國春秋時期對中原北方的定居部落的稱呼,
約生活於今中華人民共和國的遼寧省西北部與河北省東北部。
西戎의 하나로, 중국·춘추시기에 中原의 북쪽에 정착한 부락을 칭하는 것이며,
살아가는 곳은 대략 지금의 요녕성 서북부와 하북성 동북부다.
西戎의 하나인데 대략 지금의 요녕성 서북부와 하북성 동북부다?
다음은 중공 위키 백과가 설명하는 西戎 입니다.
西戎是西周对其边界西方的部落的泛指,商代称为羌或氐羌,相传为炎帝之后,是藏族、汉族、羌族的先民之一,
在战国时期之后,“西戎”被改为用来代指位于汉族以西的各个非汉民族,为四夷之一。
서융은 서주의 서쪽 경계의 부족에 대한 포괄적인 지칭으로, 상대는 강 또는 저강이라 하였고,
전하여 지기를 염제의 후예이며 장족·한족·강족의 선민의 하나였다고 전해지며,
전국 시대 이후에는 서융은 한족의 서쪽에 위치한 여러 비한족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四夷의 하나라고 한다.
분명하게 西戎은 西周의 서쪽에 거주하는 羌族, 또는 氐族이라는 것이며
山戎은 西戎之一 즉, 서융의 하나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山戎을 느닷 없이 요녕성 서북부와 하북성 동북부라는 것입니다.
戎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서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용어 자체가 왜곡된 상태에서 역사가 해석되는 것입니다.
즉, 대한민국 식민사관자들은 역사 용어 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나라의 왕족이며 상나라 초기 제후로 봉해 져서 기원전 660년 제나라와 연나라에 의해 병탄 되었다 라는
孤竹國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隨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입니다.
矩因奏狀曰:「高麗之地,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於箕子,漢世分為三郡,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別為外域,故先帝疾焉,欲征之久矣。
但以楊諒不肖,師出無功。
當陛下之時,安得不事,使此冠帶之境,仍為蠻貊之鄉乎?
今其使者朝于突厥,親見啟民,合國從化,必懼皇靈之遠暢,慮後伏之先亡。
脅令入朝,當可致也。」
배구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의 땅입니다.
주나라 시대에 기자를 봉했는데 한나라때 나뉘어 삼군이 되었으며, 진나라 때에 요동에 통합되었습니다.
지금은 신하가 아니게 되어 외부의 영역으로 구별되어 있는 고로,
선제께서 마음에 들지 않으셨기에 오래전 부터 정벌하고자 하셨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난 탓에, 출격했으나 공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었사온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으시고 관과 요대의 지역을
야만스런 맥인들의 소굴로 두려 하시나이까."」
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것을 필자가 다시 번역해 보겠습니다.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의 땅입니다.
주나라 시대에 기자를 봉했는데 한나라때 나뉘어 삼군으로 분리하였으며, ★晉氏의 적통인 요동입니다.
지금은 신하의 관계가 아니게 되어 외부의 영역으로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수문제)께서 마음의 병을 얻아 돌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楊諒이 현명하지 못하여, 출전 하였으나 공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당계의 아래가 태평성대임에도, 관대의 경계가 만대의 향으로 두려 하시나이까?
지금 돌궐의 사신도 조정에 와서 알현하고 나라를 합치를 바라니, 반드시 황제의 발아래 엎드려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다음은 중공 위키백과의 ★晉氏에 관한 설명입니다.
晋姓出自于姬姓,是以国为氏。根据《元和姓纂》和《通志·氏族略·以国为氏》的记载,
西周初年,周成王封弟弟叔虞于唐(今山西平阳一带),世称唐叔虞。
后其子燮父将唐迁到晋水(今山西太原附近),改国号为晋。
后因公族衰落,三家分晋,晋国灭亡,其后人多用唐叔虞的唐姓,少数后代子孙以晋为氏。
★晉氏 : 진씨는 희성에서 나왔으며, 나라를 씨로 하였다.
《원화성찬(元和姓纂 )》과 《通志·氏族略·以国为氏》의 기록은
서주 초에 주나라 성왕이 동생 숙우를 당(지금의 산서 평양 일대)에 봉안하고 당숙우 라고 칭하였다.
아들 섭부( ⁇ 父)가 당나라를 진수(지금의 산서태원 부근)로 옮기면서 국호를 晋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공족이 쇠퇴하여 삼가가 진을 나누면서 진나라가 망하자,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은
당숙우의 당성을 많이 사용하였고, 소수의 후손들이 진을 씨로 삼았다.
위 晉氏에 관한 설명을 지금의 역사 해석에 있는 그대로 적용을 하면 遼東의 적통은 晉氏 라는 것이며
遼東은 산서성 서남부 平陽 일대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楊諒은 수문제의 5남으로서 수양제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 입니다.
즉, 유사 이래로 중국의 제후국이였던 고죽국과 지금의 고구리는 수나라에 이르러서는 신하의 나라가 아니며
이 때문에 고구리 땅이 중국의 외부 영역으로 구분되니 이제 고구리를 정벌할 때가 되었다 라는
취지의 상소를 하는 내용 입니다.
위 지도는 중공 위키 백과가 설명하는 夏, 商의 疆域圖이며 夏, 商의 최대 疆域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孤竹國의 위치와 고구리의 위치 그리고 요동의 위치는
夏, 商의 疆域 범위 안에 존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역사는 孤竹國의 위치를 요녕성 서쪽 일대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遼東半島를 고대 遼東으로 해석한 결과 입니다.
지금의 遼東半島가 어떤 이유로 고대 遼東으로 해석되는지에 대한 근거도 없이 말입니다.
다음은 孤竹에 관한 《禹貢錐指》 卷2 冀州에 관한 기록 입니다.
冀州為中土,古軒轅、陶唐、有虞、夏後、殷人所都,及 實沈、台駘、孤竹之封皆在焉。
기주를 중토라고 하며 옛 헌원, 도당, 우가 있었으며, 은나라 사람들의 도읍지가 있는 곳과
실침, 태태, 고죽등이 봉해진 곳이 모두 다 여기다.
즉, 孤竹의 위치는 冀州이며 中土라는 것입니다.
冀州이며 中土란 《山海經》 卷五 의 中山經을 의미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언 컨데, 夏, 商의 疆域은 西域 일대 입니다.
또한 堯舜과 夏, 商의 冀州는 大月氏의 위치와 일치 해야 합니다.
西域 시대에서 隴西(롱서)로 이동 하는 때가 기원전 1046년 주무왕이 商나라를 멸하고 난 이후 입니다.
이 때문에 首陽山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들은 隴西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水經注》渭水出隴西首陽縣渭首亭南鳥鼠山,
위수는 용서 수양현 위수정 남쪽 조서산에서 나온다.
거짓으로 해석되는 현재 중공 역사 해석으로의 鳥鼠山 위치는 감숙성 남쪽 입니다.
班昭注《通幽赋》以为“在陇西首阳,即今甘肃省临洮南。"
반소는 《통유부》의 기록을 통해서
"수양은 롱서에 있다, 즉, 지금의 감숙성 임도의 남쪽이다."
”祝穆《方舆胜览》认为:“在陇西,今陇西首阳山麓之左有二贤冢,冢旁有庙。
축모는 방여성람에서: "롱서에 있다. 지금의 농서 수양산 산기슭 왼쪽에 두개의 현가에 사당이 있다."
현재 중공 역사는 陇西首阳山을 인정 하면서도 그 위치는 필사적으로 비정 하지 않습니다.
”明楊恩《首陽山辨》指出:“隴西首陽山其名最古。
명나라 영은의 《수양산변》에서 지적하기를 : 롱서 수양산의 이름이 가장 오래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롱서 수양산 역시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옮겨진 상태의 기록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흉노 정벌과 낙랑조선벌에 성공하고 漢나라의 강역이 넓어지자
한무제는 새로운 13州를 설치하고 흉노 묵돌선우의 땅이며 옛 주나라 기주인 롱서에 존재 하던
땅이름들을 동쪽으로 이동하여 적용한 것입니다.
이때문에 허신의 제자인 馬隆은 首陽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히는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馬融則以爲 在河东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即今山西省永济县西。
" 화산의 북쪽 하동 박판이며, 하곡의 가운데에 있다.즉,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 서쪽이다."
그리고 또 다시 後漢을 세운 光武帝가 洛陽(지금의 西安)을 雒陽(지금의 洛陽)으로 옮기면서
또 하나의 수양산이라는 이름을 만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지는 것입니다.
戴延之《西征记》认为: “洛阳东北首阳山有夷齐祠。
대연지는 서정기에서 "낙양의 동북쪽에 백이와 숙제의 사당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 때문에 현재 중공 역사는 지금의 洛陽 동북쪽에 首陽山을 비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 중공 위키 백과는 首陽山의 위치를 위 지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88년 明 洪武帝(朱元璋)은 元나라를 몽골 초원으로 몰아내고 산동반도 일대와 華北(지금의 하북성 일대)를
영원히 明나라의 고유한 강역으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역사 공정을 기획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원말삼사를 바탕으로 집권 11개월만에 《元史》를 편찬하고
전해 오던 대부분의 역사서를 고치는 작업을 하고, 이에 따라 1381년 여달이라는 장수에게 명하여
1200km의 明長城을 쌓고 산서성 일대의 지명들을 화북지방으로 옮겨는 작업을 병행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4남인 영락제는 아예 도읍지를 지금의 북경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화북지방을 冀州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冀州라는 의미는 雍州와 함께 京畿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유지는 지금의 중공 역사로 이어져 역사 고치기는 지금도 진행형인 것입니다.
주원장의 역사 공정의 로드맵에 따라 孤竹國과 首陽山은 또 다시 이동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주원장이 깔아 놓은 역사 공정 바탕위에 후세 역사가들이 孤竹國의 위치를 위 지도로 비정한 것입니다.
고죽국의 위치 이동에 따라 首陽山도 함께 이동해야 했던 것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 비정되는 5곳의 首陽山은 위 지도와 같습니다.
하지만 창조적 역사 해석을 하는 대한민국 식민사관자들은 근거도 없이 수양산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합니다.
중국에는 수양산이라고 일컫는 산이 다섯 곳이나 있다.
하동(산서성) 포판현 화산의 북쪽과 하곡의 가운데에 수양산이라는 산이 있고,
농서 혹은 낙양 동북쪽에도 있다 하며,
또 언사현(하남성 낙양현 동쪽에 있는 현) 서북쪽에 백이·숙제의 사당이 있다 하고,
요양에도 수양산이 있다 하여 전해 오는 기록에 섞여 나온다
그러나 맹자는 "백이가 은나라 폭군 주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살았다"라고 했으며, 우리나라 해주에도 수양산이 있어 백이·숙제의 제사를 지내건만, 중국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은나라 북쪽이 왜 꼭 한반도라고 생각하는 것일 까요?
그리고는 고죽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합니다.
고죽국(孤竹國, 기원전 11세기~기원전 664년)은 상주대부터 춘추시대 후기까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탕산 시에 존재한 국가이다.
최소한 고죽국의 위치와 수양산의 위치는 동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여간 대한민국 식민사관자들은 역사 창조의 귀재들이며 천재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미친놈들이 분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