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당선작
미화 이십 불
정수영
8번 도로
빠른 속도의 라디오 디제이 목소리와 더불어 백인 여자일 듯한 제비 같은 목소리가 어제 일어난 티후아나의 총격 사건을 얘기했다. 부에나비스타 사거리에서 어제 오후 다섯 시경 파드레즈 모자를 눌러쓴 무장 괴한이 신호에 걸려 사거리에 멈춰 있는 도요타 아발론을 세우고 좆또 좆또를 외치며 새파랗게 질려 있는 일본인 운전자의 지갑을 뺏은 뒤 총을 쏘아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흐늘흐늘해진 그 좆또 일본인의 몸뚱어리를 도로가에 패대기치고는 그 차를 타고 달아나 버렸다고.
“또 동양인이야?”
영훈은 나지막이 혼자 중얼거리며 깜빡이를 켜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뒤 차량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음을 확인한 뒤 일차선으로 끼어들었다. 대낮에 그것도 많은 사람이 보는 사거리에서. 이백 미터 떨어진 곳엔 경찰도 있었다는데. 하긴 그게 대수겠니? 경찰도 한통속임이 분명했다. 백 불만 주면 이유 불문 사람도 죽여주는 곳인데.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티후아나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총격 사건이 일어났고 그 주 타깃은 동양인, 그 중에서도 특히 돈이 많은 일본인이었다. 얼마 전에는 일본 S사의 법인장 딸을 무장 괴한이 납치한 뒤 백만 불을 요구하여 돈을 받고는 시체만 돌려준 사건이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티후아나 경찰서장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었다.
영훈의 빨간 자줏빛 세이블이 햇살에 반짝이며 805 하이웨이를 벗어나 8번 도로로 막 접어들 무렵, 무엇인가 그의 왼쪽 옆구리에 바싹 달라붙은 느낌이 들었다. 일산 자유로에서는 밤 열두 시면 밥풀 같은 처녀 귀신이 달라붙는다고 했던가? 가끔 오른쪽이나 왼쪽에 나란히 붙어 재수 없게 운전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닿을 듯이 꽁무니에 바짝 붙어 앞 운전자를 위협하는 조폭 같은 놈들을 한국에서 심심찮게 경험한 그는 잠시 여기가 미국 땅 샌디에이고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경찰차다……!”
순간 그는 육십오 마일 근처에서 바들거리는 속도계를 재빨리 확인하였다.
‘제한 속도 육십오 마일……. 과속은 아닌데?’
그러나 이내 영훈은 운전대가 울리도록 틀어 놓은 록음악에 맞춰 드럼 페달을 밟듯이 가속 페달을 밟고 달려온 조금 전을 생각했다.
‘팔십 마일쯤이었을까? 구십 마일쯤이었을까?’
‘과속 딱지…….’
그는 순서에 맞춰 돌아가는 조립공장의 컨베이어 라인처럼 가속 페달에서 다소곳이 발을 떼고, 듣고 있던 음악을 줄인 다음, 머리를 가볍게 돌려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경관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운전에 열중하는 척 앞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나란히 달렸고 그가 불안함을 견디다 못해 창문을 내리고 퍼킹 폴리스라고 외치는 상상을 할 즈음에 갑자기 경찰차는 속도를 내더니 앞으로 쭉 나가서는 조금 있다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퍼킹 미국 폴리스인데 운이 좋았다. 아까 고개를 살짝 돌려 경관과 눈이 마주쳤을 때 마네킹처럼 딱딱한 얼굴에 선글라스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는 그의 눈빛이 영훈의 뒷좌석을 흘깃 쳐다보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샌디에이고 오자마자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다 걸리면 어디 하소연 할 때도 없다 싶어 일찍이 둘째를 위해 사들인 베이비시트를 그 경관이 본 것이리라.
‘저도 새끼가 있는 모양이지.’
아무튼, 운이 좋았다.
샌디에이고 카운티 끝자락인 파인 벨리를 벗어난 끝이 가물 한 직선도로 위로 누워 있던 바람이 모래 치마를 뒤집으며 희롱하듯 도망쳤다. 영훈의 빨간 자줏빛 애마는 결승점을 향해 질주했고 지평선 너머에는 또 다른 지평선이 펼쳐졌다. 그는 갑자기 잊었던 일을 생각해 낸 것처럼 한껏 시디 볼륨을 높였다.
***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
그는 절규하듯 존재의 이유를 외치며 백 마일의 속도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렸고 세이블이 지나간 도로 위로 쥐포처럼 납작해진 전갈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비제이 팍
뿌연 연기를 날리며 영훈이 도착한 곳은 멕시코의 최북단 국경지역 멕시칼리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사출업체 동서. 티후아나와 마찬가지로 멕시칼리에도 일찍이 일본, 대만, 한국의 대기업들이 미국에서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좀 더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진출해 있었고 자의 반 타의 반 중소 협력업체들도 그들 주변에 자리 잡았다. 한국 대기업 L사의 하청업체인 동서도 모든 아시안 업체들이 그렇듯이 주요 관리인들은 모두 자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현장 및 중요하지 않은 몇몇 사무직은 멕시칸들의 차지였다. 직원은 이백 명 가까이 되었으나 실제로 일하는 직원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모두 에어컨 밑이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지 않는 그늘 밑에서 잡담들을 나누었다. 비제이 팍은 그런 것을 매우 싫어하였지만 혼자 힘으론 그 모든 걸 제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기업에서 구매를 담당하다 오너의 눈에 띄어 여기 법인장으로 근무하는 소위 월급쟁이 사장이었고 깡마른 얼굴에 키가 작고 툭하면 고함을 치는 바람에 가끔 영훈이 동서를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제이 장이란 교포에게 전화하면 오늘 비제이가 별로 기분이 안 좋으니 다음날 오라고 할 정도로 직원들은 비제이의 눈치를 자주 봤다. 박봉준이란 한국 이름이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YS, DJ처럼 그를 BJ Park, 아니 그냥 비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영훈은 오늘 그 안 좋은 날에 맞춰 동서를 방문했다. 오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어제 저녁 제이가 황급히 전화했다. 제품에 불량이 생겼는데 비제이가 보나 마나 원료 때문일 거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영훈을 당장 불러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저녁을 막 먹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영훈은 전화 통화 후 그냥 수저를 놓아버렸다. 그리곤 후안에게 전화했다.
“동서에 불량이 터졌다네.”
“…….”
“내일 아침 일찍 같이 방문해야 할 것 같은데…….”
“내일은 다른 업체와 약속이 있어 곤란한데…….”
“그러면 그 일은 오전에 끝내고 오후에 가지 뭐…….”
“…….”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느꼈는지 후안은 잠시 망설이다, 다음날 오후 세시에 동서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영훈과 같이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인 G에서 플라스틱 원료를 공급하는 사업부의 테크니컬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멕시칸이었는데 영훈이 사는 보니타 로드에서 차로 십오 분가량 떨어진 네이플 스트리트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영업을 담당하는 영훈과는 자주 어울렸고 종종 같이 업체를 방문하곤 했는데, 멕시코에서는 상당한 교육을 받은 그렇지만 영훈의 눈에는 머리칼이 곱슬곱슬하고 땅딸한 체격에 피부색이 까무잡잡하고 행동이 느린 공단의 여느 멕시칸과 외모 상으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코에 걸치듯이 올린 까만 뿔테 안경과 이마와 귀밑으로 제법 허옇게 삐쳐 나온 새치들은 그가 제법 연륜이 있는 인텔리 멕시칸임을 느끼게도 하였다.
그런 후안이 영훈보다 먼저 동서에 도착해서 사무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영훈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영훈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상 사십 도를 오르내리는 멕시칼리에서 그는 물을 뒤집어쓴 푸들처럼 온몸이 땀에 젖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자재 창고 옆 그늘에서 오들오들 떨기까지 하였다. 그 모습은 얼마 전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 영훈이 아내 대신 첫째 놈을 데리러 유치원에 늦게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애를 연상시켰으며 애처롭기까지 하여 이내 웃음을 거두어 버렸다. 아마도 비제이가 죽음만큼 두려웠으리라. 후안은 뚱뚱하다기보다는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음식을 먹을 때 특히 육수 같은 땀을 비 오듯 쏟았다. 오래전 영훈은 후안을 집에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었는데 혼자서 영훈네 가족이 한 달 동안 먹을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해치운 적이 있었다. 주는 족족 해치우는 식성에 영훈의 아내는 계속해서 고기를 구웠고 결국 고기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식사는 멈췄다. 그때도 후안은 엄청 육수를 쏟았는데, 영훈은 후안이 먹은 음식의 절반은 땀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영훈과 후안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비제이는 불량이 난 지 언젠데 이제야 나타나느냐고 꽁지에 불붙은 거위처럼 꽥꽥거렸다. 영훈이 오전에 일이 있어서 늦었다고 하자 어제저녁에 불량이 터졌으면 어젯밤이라도 나타났어야지 하며 또 한 번 그 고장 난 바이올린 같은 쇳소리를 내며 악을 썼다. 프로 근성이 없다는 둥, 도대체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G에 들어갔느냐는 둥,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 얘기했는데 놀랍게도 후안은 다 알아듣는 듯 연방 고개를 끄덕거렸고 영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감상하듯 무표정한 얼굴로 비제이의 단독 콘서트를 지켜보았다. 비제이의 공연은 한 시간가량 계속되었고 그 사이 볼펜이며 파일이며 명패가 몇 번 날아다녔다. 후안이 재수 없이 날아온 명패에 이마를 스치며 찍히긴 하였으나 그것 때문에 비제이의 연주는 다른 때보다 일찍 막을 내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비제이는 제풀에 지친 듯 목소리 톤이 낮아져 엔딩을 치닫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때까지 숨을 헐떡거렸다. 하긴 그 난리를 쳤는데……. 물론 평균 공연 시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한여름 오후 스틸 캐년을 두 바퀴 돌아도 그보다는 덜 힘들겠다고 영훈은 생각했다. 몇 개월 전 그는 접대 차원에서 비제이와 함께 스틸 케년에서 골프를 친 적이 있었는데 클럽하우스 기둥에 매달려 있는 온도계가 영상 삼십칠 도를 가리키고 있는 무더운 날이었다. 원래 십팔 홀만 예약을 했으나 비제이는 타 당 십 불이 걸려 있는 게임에서 돈 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십팔 홀을 더 치자고 하였고 영훈은 군말 없이 즉석에서 십팔 홀을 더 예약해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그림자가 없어질 때까지 잔디를 파며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비제이를 쫓아다녔다. 골프가 끝나고 비제이와의 저녁 식사 후 영훈이 계산을 하려고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냈을 때 영훈의 지갑 속에는 비제이가 휘갈겨 쓴 오백 불 차용증 쪽지가 들어 있었다.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아 몸이 으스스하다고 느낄 무렵, 비제이의 일장 연설은 끝났고 영훈은 G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하기 위해 샘플을 채취 하러 현장에 들렀다. 영훈도 안면이 있는 동서의 현장 멕시칸과 후안이 현장 한편에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히 불량에 대해 원인 규명을 하고 있으리라. 그동안의 영훈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십육 톤 물량 중 오 톤 가량을 소비하다 눈썰미 있는 멕시칸 작업자에 의해 불량이 발견되었고 그 불량은 블랙 스팟(Black Spot)이라는 오염 불량이었다. 간혹 블랙 스팟은 원료에서 기인하기도 하나 대부분 사출기 청소 불량이 원인이었고 동서에서 사출기 스크루를 청소한 지 육 개월이 넘었다는 것을 영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 보스와 잘 얘기하여 원료 팔 톤에서 십 톤 정도를 교환이란 명목 하에 사실상의 무상 공급으로 마무리를 지으리라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샘플 채취 및 연구소 분석은 그냥 시늉거리에 불과했다.
오륙 년 전이었던가? 한국에서 영훈이 L사를 담당했을 때 그는 구매뿐만 아니라 개발, 생산과도 좋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덕분에 영훈의 매출은 해마다 탑이었다. 영훈의 해박한 화학이론 및 장비 지식은 대기업인 L사의 연구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심지어 그들은 영훈을 신제품 개발에도 참여시켰다. 구매가 원하는 적정 재고를 프로그래밍 하여 납품하였고 L사 구매담당은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말라며 그 프로그램을 자기가 만든 양 슬쩍 복사하여 사용했다. 협력업체 사람들과도 한 달에 두세 번 곱창에 소주를 마시곤 했다. 그러던 중 영훈의 원료를 사용하던 L사의 협력업체에서 문제가 생겼는데, 시디롬 외장의 실버스트리크(Silver Streak)란 불량이었고 제품 표면에 은백색의 선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컴퓨터에 내장되는 시디롬 외장 생산을 위한 원료 공급은 그 당시 영훈이 올리는 매출의 사십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모델마다 금형을 스무 벌 이상을 제작해야 할 만큼 성수기였으며, L사는 년 삼천 톤 이상을 소비하고 백이십억 정도의 매출을 올려주는 소위 업계에서 얘기하는 빅 커스터머였다. 그때도 영훈은 신속하게 움직였고 샘플을 채취하여 사흘 만에 분석을 끝낸 후 다음날 자료를 만들어 L사와 협력업체에 제출하고 원료에 잘못이 없다는 걸 설명했다. 그리고 그 불량을 없애기 위해서는 장마철이니 만큼 원료 건조 시간을 약간 늘려 원료 내 수분을 일 퍼센트 미만으로 줄이고 실린더 내에서 원료 체류 시간을 최대한 줄이면 해결되리라고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말해 주었다. L사의 납품 재촉에 시달린 협력업체에서 원료 건조 시간을 줄여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는 것을 영훈은 현장조사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L사의 담당 책임연구원과 협력업체 공장장은 알았다고 했고 그 후 더 이상 불량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원료에는 문제가 없었고 협력업체의 잘못이었으므로 원료 교환도 없었다. 영훈은 그것으로 이 건은 마무리된 줄 알았다. 그리고 이 개월 후 새로운 시디롬 모델 출시 시 영훈은 L사에 원료를 한 톨도 팔지 못했다.
현장은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정도의 열기를 뿜고 있었고 멕시칸 두세 명만이 어슬렁거렸다. 멀리서 동서 공장장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였고 영훈은 그 손짓이 자신을 향해 있는지 후안을 향해 있는 지 잠시 헷갈렸다. 영훈이 고개를 돌려 후안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아직도 같은 자세로 그 안면 있는 동서의 멕시칸과 얘기에 열중했고 이따금 흘깃흘깃 주변을 살피기도 하고 상처 난 이마를 만지기도 하면서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 바닥을 치기도 했다. 기계 소리에 묻혀 아지랑이 너머 후안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의 불쌍한 후안은 조금 전 있었던 비제이의 만행을 그 유창한 모국어로 읊조리고 있으리라. 다시 고개를 돌려 공장장을 보았을 때 그는 벌써 영훈의 발치 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두 손을 입에 모아 현장사무실로 가자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마치 털 빠진 오리 새끼 마냥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였다.
싸이몬 최
현장사무실은 생산라인 구석 안쪽에 있었고 처음 들어서면 에어컨 바람 때문에 머리에 서리가 쌓인 것처럼 시원했지만, 공장장 책상 위에 늙은 소불알처럼 달린 낡은 수은 온도계는 여전히 삼십이 도를 가리키고 이내 후덥지근함이 들러붙는 서너 평 규모의 작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생산동 건물 안에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간이식 건물이라 생산라인의 열기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방음도 형편없어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는 여전히 악악거려야 하는 장소였다.
공장장인 싸이몬 최는 최성학이란 한국 사람이었는데 명함에는 QC Director라는 영문 직책을 달고 있었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최 부장이라 불리었고 영훈은 그를 깍듯이 공장장님이라 불렀다. 소갈머리가 벗겨지고 앞머리도 듬성듬성 벗겨지기 시작하였지만 그걸 감추기 위해 옆머리와 뒷머리를 아무렇게나 길러 마치 영화 ‘빽 투 더 퓨처’의 브라운 박사를 연상시키는 인물이었는데 핼쑥한 역삼각형의 얼굴에 퀭하니 들어간 눈이 그 이미지를 더하였다. 뜬금없이 한국에 두고 온 고등학생 딸이 수학경시대회에 나가 상을 탄 이야기며, 마누라가 가족 모임에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다는 얘기 등을 우물거리듯이 얘기해서 가뜩이나 시끄러운 현장사무실에서 그의 이야기는 갓 뿜어낸 에어컨 바람처럼 허공 속을 맴돌다 문틈으로 빠져 나가버리곤 했다. 그의 자리는 깨끗하고 시원한 본관 사무실에도 마련되어 있었으나 영훈은 방문 때마다 본관 사무실에서 그를 본 적은 없었고 항상 현장사무실에서 만나 아이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제이 장이 본관 사무실 왼쪽 구석 창가 자리가 그의 것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영훈은 그가 쭉 현장사무실에서만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다음 주 화요일이면 오 년째지요.”
최 부장은 뜬금없이 영훈에게 그렇게 말했고 영훈은 최 부장이 이곳 멕시칼리 동서에 온 지 오 년이 되었다는 얘기구나 하고 단번에 알아들었다. 영훈의 영업 감각은 최 부장이란 사람은 항상 얼굴을 마주 보며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입 모양을 주시해야 할 사람이란 것을 간파하고 있었고 최 부장은 그런 영훈을 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꽤 괜찮은 영업사원으로 결론 내린 지 오래였다.
“벌써 그렇게 되셨나요?”
약간은 과장된 톤의 상투적인 대꾸로 영훈은 맞장구쳤고 최 부장의 예의 그 고뇌에 빠진 듯한 움푹 팬 눈을 쳐다보았다. 컨테이너 박스 안은 텅 빈 플라스틱 물통 같은 침묵이 잠시 흘렀고 도돌이표에 쫓긴 음계처럼 반복되는 기계 소음으로 넘쳐났다.
박 부장은 영훈이 만나본 사출업계 사람 중 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기술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동서에서 발생한 불량으로 영훈은 여러 번 불려 왔지만, 그때마다 최 부장은 정확한 진단으로 영훈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곤 하였는데 그놈의 원리원칙을 따지는 고집 때문에 비제이와 번번이 부딪혔다. 한 번은 영훈이 사출 불량으로 방문하였을 때 비제이 앞에서 이건 원료 잘못이 아니라 작업자의 실수로 말미암은 불량이라고 웅변하듯이 역설하는 바람에 비제이가 화가 나서 넌 도대체 어디 사람이냐며 최 부장을 향해 커다란 볼트가 끼워진 플라스틱 부품을 던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오히려 영훈이 나서 원료 잘못이니 자기가 알아서 교환하겠다고 하여 마무리를 지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때 최 부장은 비제이가 던진 플라스틱 뭉치 아니 볼트 뭉치를 영화 매트릭스의 총알 피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듯이 왼손으로 받아냈고 연이어 오 킬로그램은 충분히 나갈듯한 그 플라스틱 쇳덩이를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는데 그것 때문에 비제이는 더욱더 열이 받아 입에 담지도 못할 쌍욕을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또 한 번은 L사에 납품한 제품이 트럭에 실려 반품되어 돌아왔는데 L사의 신입 QA 담당이 박스 하나를 뜯어 제품 모서리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버(Burr)를 보여주며 도대체 후가공을 해서 보내는 거냐, 그냥 보내는 거냐며 큰소리를 쳤고 최 부장과 같이 있던 비제이는 그 신입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려야 했다. 그래도 신입의 면박이 계속되자 비제이는 갑자기 최 부장을 향해 도대체 당신은 제품 검사를 제대로 하는 거냐며 악을 쓰기 시작했고 그 신입이 민망해 할 무렵 비제이는 제분에 못 이겨 최 부장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나 최 부장은 너무나도 침착하게 날아오는 비제이의 마귀 같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막아냈고 비제이가 손을 빼내려고 하자 그의 손목을 잡고 살짝 비틀었다. 그리고는
“이건 우리가 납품한 제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디 보자……. 시리얼 넘버를 보니까 동광에서 만든 거네.”
그때까지 최 부장은 비제이의 손모가지를 붙잡고 있었고 비제이의 짧은 비명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최 부장이 며칠 전 사소한 일로 비제이와 말다툼을 벌였고 비제이는 늘 하던 버릇대로 최 부장을 내리쳤는데 최 부장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했으며 최 부장이 막을 거라 예상했던 비제이는 당황하여 큰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하다 다시 최 부장의 뺨을 내리쳤지만, 최 부장은 막을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그냥 맞고만 있었다고 제이 장이 전화상으로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거의 구타에 가까운 폭력이 있었노라고 제이 장은 혀를 끌끌 차며 얘기했다. 영훈은 최 부장이 왜 그랬는지 물어보려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그렇잖아도 말 많은 제이에게 멍석을 깔아 주는 격이라 그만두었다. 더군다나 영훈의 핸드폰은 오랜 통화로 이미 뜨거워져 있었고 그는 배터리가 곧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허공을 바라보는 최 부장의 눈보다는 아직 멍 자국이 가시지 않은 그의 눈두덩이 더 눈에 띄었다. 딱히 그의 오 주년에 대해서는 뭐라고 더 축하해야 할지 몰라 영훈은 이번 불량 건으로 화제를 바꾸어 결론적으로 말했다.
“이번 건으로 공장장님이 곤란하지 않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불량이 어느 정도인지 물량만 파악해서 메일로 보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최 부장이 말했다.
곧 날을 잡아 스크루를 분해 청소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현장사무실 왼쪽 구석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루이사란 여직원에게 다가가 지갑을 꺼내더니 이십 불짜리 미국 달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뭐라고 스페니쉬로 얘기했는데 기계 소음으로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영훈의 짧은 스페니쉬 실력으론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루이사는 공단 멕시칸치고는 똑똑한 편에 얼굴이 작고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영어도 곧잘 해서 최 부장이 아끼는 QA 직원이었다. 일전에 현장에서 공구 세트가 없어졌을 때 비제이는 현장 중간 관리자인 루이사를 포함한 몇몇 현장 직원들을 의심해 스패너를 휘두르며 그들을 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최 부장이 나서 막아 주었고 그 후로 루이사는 최 부장을 더 따르게 되었다. 비제이가 루이사를 건드려 낙태 수술까지 시켰다는 얘기도 돌았으나 동서에 떠도는 여러 가지 소문 중의 하나였고 곧 동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최 부장은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티를 종이컵에 두 잔 따른 뒤 영훈에게 한 잔을 권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 부장님도 참여하시죠.”
‘아니 이건 뭐 밑도 끝도 없이 뭔 말인가?’ 영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정 부장님도 참여하시죠.”
너무도 단호히 얘기하는 최 부장의 기세에 눌려 영훈은 다시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최 부장은 멕시코의 불우 청소년 가장 돕기 및 깨끗한 거리 만들기 환경기금 같은 좋은 일에 쓰일 예정이니 이십 불만 내라는 것이었다. 사실 멕시코의 어느 거리를 가더라도 쓰레기가 넘쳐나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것은 샌디에이고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잘 깎여진 잔디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일과 불우 청소년 가장 돕기는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 젊은이들에게 돈을 주어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잔 얘기인가?
“예……. 그러죠.”
최 부장이 허튼짓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영훈은 최면에 빠진 듯 순한 양처럼 승낙하고 말았다. 불우이웃돕기에 환경 기금이라는데……. 만약 영훈이 한국에서 다른 지인에게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어느 단체이며 정확한 대상은 누구이고 기금의 명칭은 무엇이며 하는 것들을 물어보았겠지만, 천하의 최 부장이 한다는데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는 생각했다. 영훈이 지갑에서 이십 불을 꺼내려고 하다가 오 불짜리 한 장 일 불짜리 세 장만 달랑 들어 있는 자신의 지갑을 들여다보고는 잠시 상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차 운전석에 숨겨둔 이십 불짜리 몇 장을 생각해 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멕시코로 출장 다니면서 비상시 사용하기 위해 운전석 햇빛 가리게 속에 넣어둔 돈이었다. 멕시코에서 운전하다 경찰이나 괴한에게 붙잡혔을 때 이십 불짜리 한 장이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후안의 충고에 따라 준비를 해 둔 것이었고 영훈은 실제 그 이십 불에 담겨 있는 앤드루 잭슨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때때로 살아 있는 대통령처럼 부활하여 사이비 경찰들을 유효 적절히 퇴치해 주었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거리의 괴한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 때때로 그것은 방탄복보다 유용하게 총알을 막아냈으며 마늘이나 십자가보다 위대한 힘으로 흡혈귀들을 내 쫓았기 때문에 영훈의 빨간 자줏빛 세이블에는 스페어타이어보다 중요한 영험한 부적과 같은 필수품이었다. 한 번은 영훈이 멕시칼리에서 티후아나로 오는 고속도로에서 과속이란 명목으로 경찰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는데 이십 불을 쥐여 주자 그 경찰은 친절하게도 샌디에이고 국경까지 그를 에스코트 해 주었다.
이십 불을 가지고 오기 위해 사무실 문을 열고 현장을 지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영훈은 온몸을 관통하는 열기로 어지러움을 느꼈으며 내장을 녹일 듯한 공기가 혹시라도 몸속으로 들어올까 입을 꼭 다문 채 금세 태양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건물 밖에는 이미 태양이 지구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고 멕시칼리는 고장 난 위성처럼 육천 도의 불꽃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아마도 멕시코는 둥근 지구에서 태양 쪽으로 돌출된 나라임이 틀림없다고 영훈은 생각했다. 그는 손에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 주변에 흩어진 종이박스 조각을 집어 운전석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문을 열자 웅크리고 있던 열기가 뜨거운 한숨을 내뿜으며 그의 뺨을 핥듯이 스쳐 갔고 감았던 눈을 뜨자 세이블은 연회색의 속살을 드러내었다. 영훈이 이십 불짜리 한 장을 꺼내자 거기에는 7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고 그 뒤에 8, 9, 10, 11이 차례대로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짐작했다. 일전 후안의 제안에 처음 이십 불짜리를 준비할 때 과연 몇 번이나 이걸 사용하게 될지 궁금해 하며 이십 불짜리 지폐 앞면의 독수리 마크 밑에 빨간 매직펜으로 큼직하게 번호를 매겨 두었고 항상 다섯 장씩 준비했는데 한두 장이 빠지는 날이면 다음날 반드시 메워 두었다.
‘벌써 7번인가? …… 행운의 7번…… 행운의 7번의 주인공은 멕시칸 불우이웃…….’
경찰이나 강도에게 뺏기는 것보다는 훨씬 잘 된 일이라고 영훈은 자신을 위로했다.
이십 불짜리를 들고 다시 현장사무실로 왔을 때 최 부장은 스페니쉬로 계약서처럼 인쇄된 A4용지 한 장을 영훈에게 내밀고는 서명을 하라고 했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확인하고 잘난 체 하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영훈은 생각했다.
네 명의 이름 밑에 YH Jung이라는 영훈의 이름이 작게 인쇄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기다란 줄과 함께 서명할 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영훈의 이름 위로 Juan Sanchez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낯익은 후안의 서명이 이미 되어 있었다.
‘짜식 빠르기도 하네.’ 영훈은 생각했다.
엘니도
다섯 시가 가까워지자 제이 장이 현장 사무실로 와서는 비제이가 저녁을 산다고 먹고 가란다. 아마 아까 혼자 방방 날뛴 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리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멕시코 국경을 넘어야 하는 영훈으로서는 약간의 부담도 있었지만, 비록 다른 차량이긴 해도 후안이 동행을 할 것이고 동서에 있는 모든 한국 직원들 또한 멕시칼리 맞은편의 미국 땅인 엘센트로에 살기 때문에 저녁이 늦게까지 가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도 비제이의 호의 아닌 호의를 무시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에 감히 세이 노라고 하지 못했다.
저녁은 멕시칼리 외각에 있는 엘니도. 영훈이 동서 사람들을 접대할 때 주로 가는 곳이었는데 이 년 전 후안이 추천한 장소였다. 근처에서는 보기 드문 상당히 고급 식당이면서도 멕시코 전통의 인테리어와 전통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곳이었다. 메뉴도 다양하고 맛도 있는 곳이었는데 무엇보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먹어보지 못하는 특이한 음식으로 유명했다. 몇 달 전 영훈은 후안과 점심을 먹기 위해 여기를 들러 호기심에 미화 약 육십 불 가량 되는 악어 고기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을 때 어른 팔 길이만 한 작은 새끼 악어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뜬 채 큰 장미 무늬 접시에 통째로 올려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영훈은 머뭇거리며 깨작거렸고 이내 살사 소스를 잔뜩 바른 나초로 대신하였지만 후안은 뼈만 앙상히 남긴 채 악어 한 마리를 몽땅 뱃속에 밀어 넣어 버렸다.
모두가 엘니도의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반 이층 가장 전망 좋은 VIP 룸에 모인 것은 여섯 시가 가까워서였다. 공장장과 공무부장이 함께 왔고 제이 장과 회계 담당 직원은 약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따로 들어왔으며, 영훈과 후안은 일찌감치 먼저와 자리 잡고 있었다. 영훈은 비제이의 짙은 밤색 인피니티 Q45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이층 창가를 통해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구형 Q45의 베이지색 가죽 시트에 몸을 묻고 15번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였다.
“정 부장도 몇 가지 골라보시지. 헤이 후안 유 투.”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한 새끼 사슴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비제이는 메뉴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비제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몇 가지 스테이크 요리와 케사디아, 타말레를 시켰고 영훈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돼지고기가 들어간 타코를 주문했다. 새우를 비롯한 해산물 요리는 멕시칸인 후안의 차지였다. 와인과 데킬라도 한 병씩 시켰는데 비제이는 멕시코산 고급 와인에 대해서는 무뢰한이었으므로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름의 프랑스산 와인 샤또 딸보를 시켰다. 영훈도 언젠가 모그룹 회장이 즐겨 마시는 프랑스산 와인이 샤또 딸보인데 대북 사업으로 북한을 방문할 때 박스로 가져간다는 기사를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와인은 후안이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영훈은 생각했지만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사실 후안은 포도주에 상당한 일가견이 있었고 혼자 멕시코 출장을 갔다 오는 날이면 그동안 영훈과 같이 식사할 때 영훈이 언급한 포도주 맛을 기억하며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와인을 매번 브랜드를 바꾸어가며 영훈에게 선물하였다. 이삼십 불대의 저가 와인이었지만 신맛과 단맛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상당히 풍부한 맛의 이름 모를 멕시코산 내지는 남미산 와인이었고 크뤼그 빈티지나 쌰토 팔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은은한 과일 향이 맴돌았다. 영훈은 체질적으로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후안이 선물한 와인은 집에서 고기를 구울 때마다 즐겨 마시곤 했다.
와인과 마가리따를 섞은 데킬라가 몇 순배 돌자 갑자기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졌고 제이 장은 으레 자기가 어린 시절 자라난 콜롬비아 스토리를 개선장군처럼 떠들어대면서 가끔 비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비제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제이 장은 갑자기 하던 얘기를 중단하였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떠들어댔다. 평소와는 다르게 데낄라 한 병이 추가되었고 영훈은 집에 돌아갈 일이 걱정되어 벌써 술 대신 탄산음료만 들이키며 분위기를 맞추는 중이었는데, 기다렸던 비제이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이 자리도 삼십 분이면 파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요즘 것들은 말이야, 도대체 프로 근성이 없어. 프로페셔널리즘 말이야.”
“그렇죠. 요새 젊은 애들에게…… 그런 걸 기대하긴 힘들죠.”
그 자리에서 제일 젊은 아직 이십 대의 제이 장이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맞장구쳤고 비제이는 핏발선 눈동자를 굴리며 아직 취하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 그가 L그룹에 있을 때 생산라인을 멈추지 않게 하려고 협력사에서 밤을 새워 기다린 뒤 새벽 다섯 시에 부품을 싣고 가서 라인에 직접 투여를 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그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강조했다. 영훈은 비제이의 얘기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여 그의 논조에 동의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의 그러한 행동은 그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비제이에게 보여주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영훈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치 비제이의 말을 논리적으로 맞는지를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 차를 몰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야 할 사람들인데 걱정이 되기도 하였고 특히나 후안은 그와 함께 국경을 넘어 세 시간을 달려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후안이 혹시나 술에 취하지나 않을까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후안은 와인이 입에 맞지 않는지 그의 와인 잔은 그대로였고 데낄라는 채 삼분의 일도 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긴 술에 취한다 하더라도 멕시코에서 음주단속에 걸릴 일은 로또 당첨만큼이나 확률이 낮았다. 설사 걸린다 하더라도 그 행운의 부적 같은 이십 불짜리 한 장이면 국빈 대접에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국경까지 갈 수 있으리라. 국경을 넘어 미국은 어떤가? 애초에 과속이나 사고로 경찰에 붙들리지만 않으면 음주 운전만을 위한 단속은 따로 없었고 재수 없게 걸려 음주를 의심받으면 미국인들이 말하는 합리적인 방법을, 예를 들면 일직선으로 걷게 하여 음주 여부를 판단하는 영훈이 보기에는 죽음을 담보로 한 터무니없는, 의기양양하게 통과하면 그뿐이었다. 동서의 스트롱 코리안 드링커들은 이미 음주 운전은 술을 죽을 때까지 퍼마시고 운전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었고 영훈도 와인 몇 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후안은 웬일인지 아까부터 굳은 표정이었고 그 좋아하는 음식도 별로 입에 대지를 않았다.
‘웬일이람? 이 맛있는 음식 앞에서…… 속이 안 좋은가?’ 영훈은 은근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별일 아닐 것으로 생각을 바꾸어 버렸다.
후안은 보기와는 다르게 가끔 머리가 아프다느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느니, 소화가 안 된다느니 하면서 영훈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꾀병을 부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업체에선 불량이 발생하여 영훈이 대신 그 먼 길을 다녀와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최 부장도 아까부터 말없이 혼자 데낄라를 마가리따도 없이 생으로 들이키고 있었다.
‘웬일이래? 술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영훈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최 부장의 눈빛은 초점 없이 미슈코아틀이 양각으로 새겨진 벽면을 향해 있었고 가끔 혼자 말을 중얼거렸는데 그 특유의 괴이함으로 온몸에서 바늘 같은 빛을 발하는 멕시코 신들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는 연방 잔을 홀짝거리며 잔을 내릴 때마다 유리가 덮여 있는 테이블의 홈이 난 곳만 집중적으로 긁어대어 마치 고장 난 분쇄기에서 쇠 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미리 주문한 부리또를 받아 후안에게 하나를 건네주고 영훈은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아니 이거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하하 또…….”
비제이가 기특하다는 듯 말했고 영훈은 충실한 애완견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마그네틱이 손상되어 두 번째 발급 받은 회사마크가 새겨진 법인카드는 G라는 글씨가 유난히 크게 디자인되어 있었는데 고객들과 저녁을 먹은 뒤 카드를 꺼내 계산할 때 종업원들은 한결같이 그 큰 G 마크를 유심히 쳐다보고 영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곤 하였다. G에서 근무하시는가 보죠? 미국에서도 상위 십 퍼센트 안의 엘리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이었고 영훈은 그 부러움의 눈길을 은근히 즐기곤 하였다.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고 많은 차량이 출국 검사를 위하여 성냥갑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보통 한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은 여권만 보여주면 거의 지체 없이 통과했고 때로는 여권을 보여주기도 전에 가라는 손짓으로 국경을 넘어갔다. 그러나 영훈은 후안을 기다리기 위해 국경을 넘어 빈 공터에 정차하여야만 했는데 거의 매번 후안은 세관 검사원에게 붙잡혀 단지 멕시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은 무슨 일로 가느냐? 집 주소는 뭐냐? 차량은 누구 것이냐? 가방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는 등의 수많은 질문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는 트렁크 수색 및 차량 내부 수색을 당해야만 했다. 그 시간을 영훈이 집에 전화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시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온 지 불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엘샌트로 시내를 빠져나와 8번 도로를 탔을 때 이미 주변은 어둠의 그림자가 내리기 시작했고 인코파 파크를 지날 때는 영훈과 후안의 차량만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가끔 보이는 가로등 위론 까마귀가 떼 지어 앉아 더위를 식히려 고개를 내미는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고 떨어질 듯 기울어진 그믐달은 타원을 그리는 독수리의 부리에 쪼여 여기저기 노란빛을 토하며 별빛을 가리고 있었다.
오타이 메사
여느 때처럼 알람 소리에 무거운 몸을 일으킨 영훈은 침대에 한참을 걸터앉아 비몽사몽간을 헤맸다. 바닥은 떠 있고 천정은 머리 위에 닿아 있었으며 동서의 출입문이 열리고 최 부장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비제이의 커진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출기 옆에선 제이가 끊어진 바이올린을 육수 같은 땀을 쏟으며 켜고 있었고 엘니도의 화덕은 인코파의 계곡 사이로 끊임없이 전갈을 구워대며 손님들은 또띠야 속으로 삐져나온 집게 다리를 입으로 핥아대고 있었다.
덜거덕거리는 방충망을 열자 뒷마당에서 뛰어놀던 토끼들이 놀라 황급히 산으로 도망쳤다. 자세히 보면 온 마당이 토끼 똥으로 가득하다. 뒷마당 보리수나무에는 아침이슬이 송글송글 맺혔고 지난 봄 벌새가 지어놓은 둥지는 비바람에 시달려 이제는 그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어렵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듯 바람에 꼬리를 살랑거렸다. 영훈은 몇 번의 맨손 체조를 마치고 가볍게 마당을 뛰었다.
‘마누라는 아직도 자고 있을 텐데……. 아침은 그냥 가다 먹을까…….’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영훈은 어젯밤 멕시칼리에서 돌아와 피곤해서 차고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세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시와 사막을, 낮과 밤을 달린 자주 빛 세이블은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시키듯 들러붙은 벌레들의 시체로 허연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대부분 쉬는 날이라 서둘러 갈 이유는 없었지만 열 시가 넘으면 영훈의 임대 창고가 있는 오타이 메사는 국경을 넘는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이고 길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짜증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일찍 서두르기로 마음먹고 아침을 거른 채 집을 나섰다. 아침은 오타이 메사 입구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팬 케이크와 계란으로 때우면 그만이리라. 동서에 교환해 줄 재고를 확인하고 오늘 출고를 지시해야 월요일 안으로 업체에서 원료를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로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지만, 창고 관리를 하는 업체를 영훈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일전에도 피씨에이비에스를 출고 지시하였는데 에이비에스를 출고하는 바람에 이미 통관을 거쳐 멕시코로 넘어간 원료를 다시 회수하느라 엄청난 애를 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직접 창고로 가서 재고를 확인한 다음 물건을 실을 때까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어느덧 영훈의 꾀죄죄한 애마는 5번 도로를 벗어나 905도로를 진입하기 직전에 있는 맥도날드에 도착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1번 아침 세트 메뉴를 시켰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넓은 매장에는 나이가 지긋한 백인 노인과 일곱 살가량의 꼬마를 대동한 삼십 대의 멕시칸 여자가 전부였는데 종업원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낯익은 디제이 목소리와 음악이 흘러나왔고 실내 분위기와 묘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그 나이 지긋한 백인 노인은 KFC 샌더스 할아버지를 연상시켰는데 검은 뿔테 안경에 두꺼비처럼 볼록거리는 배를 만지며 신문을 펼쳐놓고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한쪽 모퉁이에서는 피부가 유난히 새까만 멕시칸 여자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일곱 살 꼬마에게 쉴 새 없이 잔소리해댔는데 콩을 갈아내는 믹서처럼 끊임없이 햄버거를 입속에 집어넣고 튀기기를 되풀이했다.
음식이 준비되었다는 벨 소리와 전광판의 번호를 확인하고 카운터로 가면서 영훈은 손님도 없는데 그냥 부르면 될 걸……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제비 같은 목소리의 그 백인 여자일 듯한 목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어젯밤 멕시칼리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는데 희생자는 오십 대 초반의 봉준 팍 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며 그를 쏜 십 대처럼 보이는 멕시칸 아이는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 되었단다……. 아이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남루한 바지 주머니 속에서는 이십 불짜리 미국 지폐가 다섯 장 들어 있었고 그 중 한 장에는 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고…….
|당선소감|
20년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영위해 왔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뜻밖의 낭보가 날아왔다. 사람에 둘러싸여 철저히 혼자일 때, 혹시라도 내 글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그 외로움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미와 이십 불’을 완성했고 마지막 출근하는 날 퇴근길에 졸작을 출품했다.
그 후 한동안 매일 산에 올랐다. 그 산은 나를 부르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였으며 지겨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내 어깨를 떠밀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향후 나의 미래를 운명에 맡겨보리라 마음먹었다. 뜻밖에 빨리 찾아온 재취업과 함께 글쓰기에 대한 나의 꿈이 멀어지는가 싶었다. 그래서 계약을 미루고 며칠을 고민하다, 문득 나의 글의 원천이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직장이었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동료였고 그 속에 녹아있는 나의 경험임을 알았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부딪혀 보려 한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얼마를 더 몸으로 때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시 열심히 해보고 그것들을 글로 옮겨 보려 한다.
너무나도 부족한 글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프로필 l 정수영
1991년 부산대학교 기계설계학과 졸업
1997~2008년 GE 근무
동화-가작
꽃씨 초대장
김은경
“야, 서똥재! 너나 해라!”
버스가 휴게소에 멈추자 하준이가 이제야 게임기를 줬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지금 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그렇다고 내 것도 아니다. 어제 효섭이 집에 가서 빌려 온 거였다. 게임기 전원을 켜면서 내 이름은 동재라고 소리치려다 그만 두었다. 어차피 또다시 똥재라고 부를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막 시작하려는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아까 먹은 감자튀김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버스에서 내렸다.
“특별한 꽃씨인데 받지 않으련?”
길 가던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꽃씨요?”
뜬금없이 꽃씨를 내미는 할머니가 이상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농부들이나 쓰는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그래, 꽃씨 말이다. 이 꽃씨는 마음에 심는 꽃씨란다.”
“꽃씨를 마음에 심는다고요? 말도 안돼요!”
할머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난 얼떨결에 꽃씨를 받았지만 다른 꽃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꽃씨를 진심으로 들여다보면 마음에 꽃씨가 싹튼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마치 만화영화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맑고 투명했다. 배가 아파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씨앗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갔다. 뛰어가다 잠깐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별 괴상한 할머니를 다 봤네, 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 일을 다 보고 바지를 올리려는데 툭, 하고 주머니에서 뭔가 떨어졌다. 아까 무심코 받았던 꽃씨 한 개였다. 바지를 마저 올리고 고개를 숙여 씨앗을 주웠다. 씨앗은 마치 고양이 눈처럼 작고 까맸다. 한참 들여다보니 코딱지만큼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는 꽃씨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꽃씨 초대장?’
꽃씨에 글씨가 쓰여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생일 초대장은 받아 봤어도 꽃씨 초대장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꽃씨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하마 입처럼 커다래졌다. 검은 구멍이 둥둥 떠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이 멈춰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강한 자석에 이끌리듯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엄, 엄마 아아아~!”
길고 긴 깜깜한 터널 속을 한참 미끄러져 내려갔다. 놀이동산 ‘귀신의 집’을 들어가는 것보다 더 무섭고 아찔했다. 그것도 잠시, 나는 어디엔가 툭, 하고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행히 푹신푹신한 잔디밭이었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피어 있어 꽃향기가 물씬 묻어났다.
“여, 여기가 어디지?”
온 들판에 나비, 꿀벌,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해바라기 모양의 꽃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마음의 꽃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해바라기는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것처럼 말했다.
“마, 마음의 꽃밭이라고요?”
나는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음의 꽃밭이라니!
“네. 꽃씨 초대장을 받으셨더군요.”
“꽃씨 초대장이라니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곳은 꽃씨 초대장을 받으신 분만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초대장을 받으신 분은 마음에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도 됩니다. 우선 서동재씨 마음의 밭을 보여 드릴 테니, 따라 오세요.”
도대체 어떻게 마음에 씨앗을 심을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해바라기를 쭈뼛쭈뼛 따라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튤립, 제비꽃, 코스모스, 국화, 개나리, 목련 등이 봉우리를 봉긋 터뜨리고 활짝 피어 있었다. 꽃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꽃향기에 취해 정신이 몽롱했다.
‘우리 반 멍청이 권효섭?’
꽃밭 한 가운데 하얀 팻말에 효섭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마음의 꽃밭에서 가장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해바라기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내게 말했다.
“효섭이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네.”
그렇게 말하는 해바라기의 꽃잎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혹시 로봇으로 만든 꽃이 아닐까 의심스러워 줄기 부분을 유심히 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매일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실실 웃기만 하는 녀석의 마음이 가장 따뜻하다고!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야? 효땡이? 내일 이 만원 가져와!”
하준이가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썼다.
“나, 돈 없어어어.”
효섭이가 잔뜩 겁을 먹고 부르르 떨었다. 그만 두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간 학교생활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은 효섭이가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물건과 돈을 빼앗았다.
“넌 야구장 안 간다며? 그럼 돈이라고 갖고 와야 될 거 아니야? 응?”
하준이가 효섭이에게 윽박질렀다.
“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 정말이야. 믿어줘.”
효섭이가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까지 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장난으로 해 본 소리지? 그치?”
하준이가 눈을 부라리며 비아냥거려도 효섭이는 땅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준이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헤벌쭉 웃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는다. 내일 돈 가져 올 거지?”
아무리 무섭게 얼굴을 구겨도 효섭이는 입에 자물쇠를 채워 놓은 것처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내일 가져온다고 빨랑 말해”
내가 제발 대답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래도 효섭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퍽, 퍽!’
그때 갑자기 하준이가 효섭이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효섭이는 찍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하준이가 때리는 되로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이 녀석들! 뭐하는 짓이냐?”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우리들을 향해 어깃장을 놓았다. 깜짝 놀란 우리들은 쏜살같이 도망쳤다.
“앙아 아아아…….”
뒤돌아보니 여태껏 울지 않던 녀석이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빨리 오세요.”
앞서 가던 해바라기가 나를 재촉했다.
“……아, 네.”
재빨리 해바라기를 뒤 쫒아갔다. 갑자기 무서움이 어둠처럼 나를 둘러쌌다. 나를 둘러싼 꽃들이 팔 다리가 제 맘대로 늘어난 괴물처럼 보였다. 꽃들 사이에 갑자기 바위투성이의 밭이 보였다.
“저건 뭐예요?”
내가 바위를 가리켰다.
“그건 백하준씨 밭입니다. 씨앗조차 없는 술 취한 밭이죠.”
“이게 하준이 밭이라고요? 그런데 마음이 어떻게 술에 취해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네. 술에 취한 것처럼 마음의 밭이 엉망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마음의 밭이 풍성한 사람이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술에서 깨어날 수는 있어요.”
가끔 아빠가 술 마시고 횡설수설 한 게 떠올랐다. 그때 아빠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하준이는 술 취한 사람처럼 마음이 비틀어져 있다는 거였다.
‘그래도 내 밭은 하준이 밭보단 낫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해바라기를 따라 을밋을밋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걷다보니 꽃이 전혀 피어 있지 않는 밭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밭이 서동재 씨의 밭입니다.”
땅이 쩍쩍 갈라져 있고, 심지어 차가운 기운까지 감도는 밭을 해바라기가 가리켰다.
“이, 이게 제, 제 밭이라고요?”
기가 막혀 말까지 더듬었다. 정말 ‘서동재’ 라고 쓰여 있다.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애써 누르며 해바라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 수 있나요?”
“정말 꽃을 피우고 싶다면 그건 서동재씨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은 자기 밖에 모르니까요. 단, 한 번이라도 남을 도와 준 적이 있는지 기억해 내야 합니다. 그 씨앗이 자라서 마음의 꽃밭이 풍성해 질 테니까요.”
그러더니 내 앞에 물 한 통을 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물끄러미 ‘내 마음의 밭’ 을 바라보았다. 마치 온 몸이 갈라진 것처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얼른 마른 땅에 물을 듬뿍 주었다. 그런데 물이 땅에 스며들지 않고 금세 사라졌다.
‘어쩌면 좋지!’
나는 뿌연 안개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효섭이의 밭에서 꽃 한 송이를 갖다 심으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살피고 쏜살같이 효섭이의 밭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효섭이의 밭은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막상 꽃을 꺾으려고 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다. 하지만 나는 눈을 찔끔 감고 빨간색 튤립 한 송이를 툭 꺾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아휴~!”
숨을 몰아쉬고 나는 튤립을 땅에 꾹꾹 눌러 심었다.
“이제 내 밭도 꽃이 피겠지.”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서늘한 바람이 등줄기를 스쳐 갔다. 그러더니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쳤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움직이려고 했지만 신발에 본드가 붙은 것처럼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누굴 도와준 적이 있나?’
불현듯 체육 시간에 효섭이가 환하게 웃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편을 먹고 피구 시합을 했던 날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상대편을 맞추기에 바빴다. 나는 체육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기고 싶었다. 효섭이도 우리 편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자꾸 효섭이가 내 앞에서 알짱거렸다.
“제법 잘 피하는데!”
내가 너스레를 떠는데도 효섭이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효섭이가 멀뚱히 딴 곳을 보고 있을 때 날쌘 공이 효섭이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날렵하게 날아가 효섭이의 몸을 감싸고 공을 피했다.
“휴~!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효섭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살았다는 기쁨에 들떠 스프링처럼 통통 튀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이었다.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마치 내가 효섭이를 도와준 꼴이 돼 버렸다. 낯설긴 했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심코 효섭이의 밭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효섭이의 밭에 희미한 빛줄기가 비쳐들고 있었다. 그 빛줄기는 마치 하늘에서 우주선이 내려올 길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쏜살같이 효섭이의 밭으로 달려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빛줄기 안에 조그만 싹이 돋아나 있었다.
‘어쩌면 이 작은 싹이 내 마음의 꽃밭을 아름답게 해 주지 않을까?’
지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도 하준이처럼 술 취한 밭을 갖고 싶진 않았다. 나는 마치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싹을 들고 내 밭에 옮겨 심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고 내 밭에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알아내셨군요.”
뒤에서 불현듯 해바라기가 나타났다.
“이게, 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깜짝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서동재씨는 무심코 한 일이었지만 그 씨앗이 마음에 꽃을 피게 한 겁니다.”
해바라기는 흐뭇한 눈길로 내 밭을 가리켰다.
그때서야 나는 휴게소 화장실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빼 놓고 출발했으면 어쩌지! 마음이 조급했다. 아까 왔던 길로 되돌아 가 나가는 구멍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커다란 검은 구멍이 보였다. 주저할 틈 없이 나는 다이빙하듯 구멍 속으로 텀벙 뛰어 들었다.
“아아아아~!”
마치 미끄럼틀을 타고 회전하듯 나는 빠른 속도로 떠내려갔다.
“아얏!”
시멘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화장실에 툭 떨어졌다. 검은 구멍이 사라지고 멈춰 있던 세상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준이 떼거리 속에 효섭이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효섭이에게 게임기를 내밀었다. 효섭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빨리 받아! 팔 아파!”
효섭이는 엉거주춤 게임기를 받아들었다.
“야, 똥재! 너 뭐하는 짓이야? 내 차롄데 주면 어떻게 해?”
하준이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원래 주인은 효섭이잖아. 너도 씨앗 초대장 받으려면 효섭이한테 잘해라.”
말하고 나니 가슴 속에 박하사탕을 뿌린 것처럼 시원했다. 하준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효섭이의 팔을 잡아끌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하준이가 뭐라고 떠들어 댔지만 무시하고 힘껏 달렸다.
‘하준이도 씨앗 초대장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뛰면서 할머니가 없나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선소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어느 날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동안 두려움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동화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항상 옆에 있는 남편과 예쁜 딸아이가 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묵묵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켜 봐 준 남편과 아이에게 너무 고맙습니다. 막상 당선 소감을 쓰고 있자니 감사한 사람이 많습니다. 제일 먼저 동화작가 고정욱 선생님. 동화의 첫발을 내딛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동화의 길을 다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정해왕 선생님, 양승현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열심히 써서 좋은 동화로 보답하겠습니다.
응모하기 전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작품을 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오기를 갖고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 해 주신 김재원 선생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옆에서 한결같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핑퐁’ 동기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어설픈 제 글을 뽑아 주신 용인신문사와 용인문학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프로필 l 김은경
1975년 서울 출생. 대학에서 국어국문학 전공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원 소설 창작 과정 수료
현재 동화 창작 모임‘동창모’회원으로 활동
대표작 <루스벨트>, <댕기 끝에 진주 같은 우리말 속담>
|용인문학신인상 심사평|
편집부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용인문학 신인상 응모에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장르에 많은 작품들이 접수되었다. 응모 작품 편수는 시 252편(시조, 동시 포함), 소설 44편(중편 5편 포함), 동화 11편, 수필 21편, 희곡 2편이 접수되었다.
시 부문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번 용인문학 신인상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다양한 세계관에 의거 다양한 미학적 기준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보다 앞선 보편적 발아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시각이 보여주는 통찰에까지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최소한 작은 개연성이라도 있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확장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대부분에 응모작들이 그 기준에 못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전국에서 응모해 온 총 252편의 응모작 중에서 편집위원들은 김수정, 김용진, 김주연, 이우식, 홍윤기 등을 놓고 예의적인 거론을 하였으나 이분들의 응모작 역시 앞서 말한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책을 내고 또 해마다 신인상을 통해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는 의미 있는 행위들이 무산됨에 따라 적잖은 실망감도 들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지키는 것 또한 내려놓을 수 없는 책무라는 점에서 편집위원들 전원 합의 하에 올해는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하였다.
부디 내년에는 수준 있는 응모작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정진의 격려를 보낸다.
소설 부문은 장래성이 엿보이는 몇 편의 작품을 놓고 심사위원들이 심도 있게 논의 한 결과 정수영님의 ‘미화 이십 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은 나름대로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내용을 전개해 가는 능력이 엿보였고, 군더더기 없이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부분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습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의 모습이 여러 부분 드러났으나 소재의 참신함과 치밀하게 구성하려고 애쓴 점이 부각되어 당선작으로 정하였으니 더욱 더 정진하기를 부탁드린다.
동화 부문에 응모한 김은경님의 ‘꽃씨 초대장’을 가작으로 정하였다. 어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소재를 정한 점과 글의 짜임새가 매끄럽고 언어 표현의 적절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작품의 분량을 늘려 내용을 좀 더 알차게 구성하였다면 하는 아쉬움에서 당선작이 아닌 가작으로 정하였음을 인지하기 바라며 정진을 부탁드린다.
끝으로 응모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치열한 응모가 치열한 글을 만들 것이라 생각하며 선에 들지 못한 모든 분들의 노고가 작고 외로운 치열을 감행하고 있는 용인문학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어 간다는 말씀을 또한 덧붙인다.
(심사평 : 운문-박해람 시인, 산문-손영란 소설가)
(심사위원 : 편집위원)